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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산서원 전경 (항공촬영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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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함안 조씨(咸安 趙氏) 중시조(中始祖) 정절공(貞節公)휘(諱) 려(旅) 어계선생(漁溪先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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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0년(경자생) 조선 세종임금 2년, 명나라 성종 영락 18년에 태어나셨으며.
1489년(기유년) 조선 성종임금 20년. 명나라 효종 홍치 2년 10월 22일 별세(향년 7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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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절(貞節)하면 함안(咸安)이요, 함안(咸安)하면 정절(貞節)의 고향입니다.
역사(歷史)이래 옛날부터 정절(貞節)에 관한 수 많은 이야기가 있었지만,
함안 조씨(咸安 趙氏) 중시조(中始祖)이신
정절공(貞節公) 휘(諱) 려(旅) 어계 선생(漁溪 先生)의
만고(萬古)정절(貞節)에 대한 일대기가 여기 있습니다.
선생(先生)의 깊은 흉중(胸中)은 주군(主君)에 대한 충절(忠節)과
부모(父母)에 대한 지극한 효성(孝誠)에 있으며,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정절(貞節)과 신의(信義)는
해로동혈(邂路同穴)의 사상으로 승화(承化)되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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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영월 청령포.
* 해로동혈(邂路同穴) *
아! 아! 그리운 님을 따라 같이 죽지 못한 피끓는 사모곡(思慕曲)은
몇 송이의 국화 꽃을 피우고 백이산 자락의 한마리 두견이 되어 울부 짖는가 ?
그리운 님 따라 죽음을 같이 못한 피끓는 사모곡(思慕曲)의 울부짖음이,
이 밤을 흰 빛 서늘한 비늘을 퍼덕이며, 스스로 어계(漁溪)가 되어
낙동강 하시(下始)에서 영월 청령포를 향해
그리운 님(단종임금)의 혼령을 만나기 위한
장대 하고도 기나긴 어계(漁溪)의 유영(遊泳)의 대서사시로 시작되니
1453년 (병자년)부터 어계(漁溪)의 기나긴 유영(遊泳)이 시작 되었으며,
1489년 (기유년) 시월 스무이튿날, 칠순으로 고요히 눈을 감으실때 까지
그리운 님(단종 임금)과 육신(六臣)과 함께 죽지는 못 하였으나,
뜻만은 [해로동혈]하여 스스로 [동혈 의 지조]를 굳게 지켰으니
지하에서 사모(思慕)하는 님(단종임금)과 해우(解逅)를 하시고,
장대하고도 기나긴 어계선생(漁溪先生)의 33년간 유영(遊泳)의
대서사시는 이렇게 대단원의 막(幕)을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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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先生)께서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정절(貞節)과 신의(信義)로
청고(淸高)한 정절(貞節)의 풍화(風化)를 남기시고,
정충대의(貞忠大義)의 사상(思想)은
청사(靑史)에 고고(高高)한 일기유맥(一氣遺脈)으로 이어져,
백세청풍(百世淸風)의 함안 조씨(咸安 趙氏) 문중(門中)은
영남 최고의 충효가벌(忠孝家閥)로 가승(家承)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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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계선생 신도비각.
* 어계선생 신도비.
* 어계선생 신도비 기문.
선생(先生)의 시호(諡號)는 정절(貞節)이시고, 휘(諱)는 려(旅), 자(字)가 주옹(主翁)이시며
호(號)는 어계(漁溪)로 조선 세종임금 2년1420년(경자생)에 태어나시고,
조선 성종임금 20년1489년(기유년)에 별세(別世)하시니, 향년(享年)70세 이셨습니다,
선생(先生)은 조선시대 초기의 문신(文臣) 이시며, 생육신(生六臣)의 한분 으로서,
함안조씨 가문을 영남 최고의 충효 가벌(忠孝家閥) 로 가문의 위상을 크게 드 높이시어
종통(宗統) 의 번창(繁昌)과 문중(文中)의 중흥을 이루시니,
종중(宗中)의 중론(衆論)으로 가문(家門)의 중시조(中始祖)로 추존(推尊) 되시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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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계선생 태지.
1.선생(先生)의 출생(出生)을 보면,
선생(先生)의 본관(本貫)은 함안(咸安)으로,
시호(諡號)는 정절(貞節) 휘(諱) 려(旅), 자(字) 주옹(主翁), 호(號) 어계(漁溪)로
조선 세종임금 2년(경자년) 1420년에
함안 조씨 시조(始祖) 충장공(忠壯公) 휘(諱) 정 (鼎)선조님의
10세손이신 부친 시정공 (寺正公) 휘(諱) 안(安)과
모친 숙인(淑人) 성산이씨(星山李氏: 호군(護軍) 택 의 따님)의 독자(獨子: 외동아들)로
향리(鄕里)인 경상도 함안군 군서면 (현지명: 군북면) 평관리 에서
청고(淸高) 한 그 울음소리(呱呱之聲)와 함께 서광(瑞光:상서로운 빛)이 있었으며,
선생(先生)께서 태어나실 무렵에는 백이산의 계곡물이 마르고, 소나무와 초목이 시들었다가,
선생(先生)께서 태동하시자,
계곡의 물이 다시 흐르고, 소나무와 초목이 생기(生氣)를 되 찾았다고 합니다.
태어나신 그 해에는
일(日), 월(月)이 가리워지는 1월 16일의 월식(月蝕)과, 8월 초하룻날 일식(日蝕)이 있었고,
전년에 가뭄에 이어, 9월 6일수재(水災)로 충청도 에서 3650 여결(結)의 손실이 발생하였다,
이처럼 천지(天地)의 이변(異變)이 이어지고, 때는 창업보다 수성이 더욱 어렵듯
조선의 앞날은 성군 세종임금의 성덕이 온 누리에 비치어 태평 성대를 예고 하였으나,
조선의 성군(聖君) 이신 세종 임금께서 재위 32년 1450년(경오년) 2월 17일에 승하하시고,
동년 2월 22일에 유약한 문종 임금께서 왕통을 이어 받으시나,
1452년(임신년) 5월 14일 재위 두해 만에 돌아가시고,
그 해 5월 18일에 어린 단종 임금께서 재위를 이었으나,
1453년(계유년) 10월 10일에 수양대군(후일: 세조)의 계유정란으로 이어져,
사실상 왕위 찬탈의 비사(悲史)의 서곡이 전개되어
장차 조선의 앞날은 크나큰 격랑의 소용돌이가 예견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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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생(先生)의 가계(家系)를 보면,
조부(祖父)께서는 고려말기 가선대부 공조전서 를 지내신 전서공 휘(諱) 열(悅) 이시고,
증조부는 고려조에 봉익대부 판도판서 를 지내신 판도판서공 휘(諱) 천개(天啓) 이시며,
고조부는 고려중기 문과 계림부 참군을 지내신 휘(諱) 지흥(之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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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선생(先生)의 유년,청년시절에는
어계(漁溪)선생께서는 어려서 부터 남달리 총명하시고, 빼어난 자질이 있었으며,
성품은 청개(淸介:맑고 고결함)하시었고,
총명절인 하시어 한번 보시는 것은 모조리 익혔다 합니다.
항상 의젓한 풍모와 단아한 자세로서, 일찍부터 두각이 참연 하시었고.
모든사람들이 선생의 원대한 장래를 기대 하였으며, 점점(漸漸) 성장하시자,
스스로 힘써 학문에 진력(盡力)하시어, 행실은 독실하여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으며,
고금의 역사를 읽으실때 마다 절의(節義)에 순절(殉切)하신 분을 깊이 사모하시었다.
대의를 통투(通透)하는데 주안을 두고 미사여구를 따서 과거 응시에 쓸 정문에 몰두 하는 일을
수치로 여기셨으며, 항상 방에 고요히 앉아 황권에 대하여 성현 언어에 침체 하시었고,
그 뜻을 얻은 후면 침식을 잊었으니, 혹은 원림(園林)에 거니시며 스스로 시(詩)를 지으셨습니다.
또한 부모의 마음을 즐기게 하는 색양에 힘써서 평상시 봉양에 어김이 없고,
맛 있는 음식을 올려 꼭 즐기시는 음식은 비록 가난해도 풍성하게 바치었다.
부모곁을 잠시도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손(客)이 오면 보리밥 채(菜)나물로 정성으로 대접 하고,
서로의 이야기가 농사일이 아니면 야담이였고,
집이 가난하여도 태연히 즐기시고,
강직한 기상과 화태한 모습은 안면에도 순수히 나타나
구슬을 깊이 간직한듯 부화(浮華)한 버릇을 절거(絶去)하여,
교격과정(矯激過情)한 자(者)는 통쾌히 배제 하고,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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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친(父親) 시정공(寺正公) 휘(諱) 안(安) 별세(別世).
선생(先生)은 선친(先親)을 일찌기 여윈 후(後)
애경(愛敬)을 다 하여 추원 감모(追遠 感慕) 하였으며,
장제 (葬祭)의 예절이 있어 주자가례 에 따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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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선생(先生)의 혼인(婚姻)
선생(先生)은 조선 세종임금 22년 1440년(경신년) 21세 되시던해에
모친과 주변의 주선으로 혼례(婚禮)를 올렸으며,
부인은 증)정부인(貞夫人) 흥양 이씨(興陽 李氏) 이시며,
빙장(장인)은 현령을 지내신 이 운(李 運)이시고,
처(妻)조부는 서운관정을 지내신 이중성(李仲成) 이시며,
처(妻)증조부는 장령 벼슬을 하신 이 선(李 僊) 이시며,
처(妻)외조부는 판관(判官) 을 지내신, 현풍 곽 항(郭 恒) 이십니다.
어계선생(漁溪先生)과 정부인(貞夫人) 흥양 이씨 슬하에,
아드님을 세분(동호, 금호, 야호)두셨으니,
선생의 22세 되시던 해 세종임금 23년 1441년(신유년) 장남 동호(銅虎),
관(官)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를 낳으시고,
26세 되시던 해 세종임금 27년1445년(을축년)에 차남 금호(金虎)
관(官) 가선대부 한성부 좌윤을 낳으시며,
30세 되시던 해 세종임금 31년1449년(기사년)에 막내아드님 야호(野虎)
관(官) 통훈대부 호조참의를 낳으시었다.
어계선생(漁溪先生)의 부인이신 정부인(貞夫人) 흥양 이씨는
1480년(경자년,성종 11년) 2월 10일에 별세 하시니,
이때 어계선생(漁溪先生)의 연세는 61세이셨다.
모친(母親)이신 숙인(淑人) 성산 이씨(星山 李氏)께서 는
성종 24년 1493년(계축년)에 별세하시어 향년 99세이셨다.
* 어계선생(漁溪先生)의 운명(殞命)후 4년뒤 모친(母親)께서 별세(別世)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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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선생(先生)의 출사(出仕).
선생(先生)께서는 일찌기 선친(先親)의 유종으로 가문(家門)의 번창(繁昌)과 대의(大義)를 위하고,
부인은 홀로 남으신 시모님을 지극 정성으로 모시며, 어려운 가사(家事) 에 힘쓰시니,
선생(先生)은 뒤 늦은 과거에 진력(盡力)을 다 하시어,
조선 단종임금 원년 1453년(계유년) 34세 되시던해 춘(春)사월 열 닷새날, 나라에서 증광 문과를
실시하니 천릿길 한양으로 과거에 응시하여, 전국의 많은 유생들과 경연을 겨루시고,
진사시(進士試)에 급제 하시어 태학(太學:성균관)에 드시었습니다.
이는 진흙속에서 옥(玉)구슬이 드디어 나라의 동량으로 뽑혔으니,
나라에 홍복이요, 가문에 영광이며, 이는 일찌기 선친의 유지를 받드는 길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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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계유정란(癸酉政亂)
조선 단종임금 1년 1453년(계유년) 10월 10일 수양대군이 권람, 한명희등과
계유정란을 일으켜, 황보인, 김종서, 이양, 민신, 조극관 등을 주살하고,
10월 11일 수양대군은 영의정 겸 판이병조사, 정인지를 좌의정, 허 후를 좌참찬,
정창손을 이조판서, 김 조를 예조판서, 이계전을 병조판서,
박중림을 형조판서에 임명, 정란공신을 책봉하고, 실권을 장악 하였다.
어계선생 께서는 계유정란의 개탄스러운 마음을
두보의 시(詩) 한수를 읊으시어. 심경을 담으셨다.
* 귀안 (歸雁) *
春來 萬里客 亂政 幾年歸
腸斷 江城雁 高高 向北飛
춘래 만리객 난정 기 년귀
장단 강성안 고고 향 북비
(풀이)
봄이 오는, 만리의 나그네
어느해 난이 평정되어
고향으로 돌아갈까 ?
강가의 기러기는
더 높이 북으로 나르네 !
이해 10 월 16일 월식이 있었는데 세상은 칠흑같이 캄캄 하였으며,
1454년 갑술년(단종 2년) 4월 초 하룻날 달이 해를 가리는 일식(日蝕)이 있었고,
동년 5월에 삼수에 야인들이 침입하여 나라안의 민심이 흉흉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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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왕위(王位) 찬탈(簒奪)
조선 단종임금 3년/ 세조원년 1455년(을해년) 4월 초 하루날
또 다시 달(月)이 해(日)를 가리는 일식(日蝕)이 일어나, 나라에 중대한 변란이 예고 되었으니 !!
기어이 윤 6월 11일 단종임금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전위(실제는 찬탈)하여 상왕이 되고,
정인지를 영의정에 임명하고, 윤 6월 12일 인수부를 덕령부로 고치고,
상왕의 공상(供上)의 일을 전담케 하고, 윤 6월 23일 한 확 을 좌의정에, 이사철을 우의정에,
이계린을 좌찬성, 정창손을 우찬성에, 강맹경을 좌참찬, 박중손을 이조판서, 이계진을 병조판서,
권 준 을 형조판서, 이 변 을 공조판서, 권 람 을 이조참판, 하위지를 예조참판에 임명하고,
7월 26일 원자(元子) 이 장, 을 세자로 책봉하고, 8월 7일 의정부 서사제를 중지하고,
육조 직계제를 시행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9월 5일 좌익공신을 봉(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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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조대.
9.선생(先生)의 귀향(歸鄕)
선생(先生)께서는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함에 분격 하시어 하늘을 우러러 세상을 개탄 하시며,
세조 2년 1456년(병자년) 4월 봄 선생(先生)의 37세 되시던 해에,
태학(성균관) 명륜당에서, 동문수학들과 하직 인사를 하며,
불사이군의 정충대의(貞忠大義)의 심경을 시(詩)한수 (제영: 題泳)로 표현하여 읊으시고,
작별하시어, 향리인 함안(咸安)으로 귀향 하시어,(歸隱 咸安 伯夷山) 은거(隱居) 하시며,
상앙(단종임금의 복위를 위하여 때 를 기다리리심)하시였다.
* 제영 (전거: 함주지, 경상도 함안군 총쇄록.)
명륜당 어계 조려 시 明倫堂 漁溪 趙 旅 詩
아 시 염 계 은 둔 인 我 是 濂 溪 隱 遯 人
기 년 내 왕 반 궁 빈 幾 年 來 往 泮 宮 濱
여 금 낙 견 청 아 교 如 今 樂 見 菁 莪 敎
원 욕 여 파 괴 불 인 願 浴 餘 波 愧 不 仁
柱) 상기 시(詩)의 시대적 배경은
어계선생께서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자,
불사이군의 정충대의의 심경을 마음에 담으시고,
성균관 동문수학들과 하직 인사를 할 무렵
동문들이 선생(先生)과 의 작별이 아쉬워
지금 남아 더 배우고, 출사를 위 하시라 권한바,
* 원욕여파(願浴餘波) *
남은 학문의 배움이 중요함이 아니고,
저 수양대군 의 행태가 인의(仁義) 에 어긋나
더 배워 본들 무엇 하나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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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계선생 종택.
선생(先生)께서는 풍수학에도 능(能)하시어,
함안(咸安)으로 귀향(歸鄕) 하시면서 자리를 잡으시니,
함안군 군서면 원북동이,수석(水石)의 승개(勝塏)가 아름다워 그 자리를 복지(卜地)하셨습니다.
여기는 처음부터 사람이 살지 않아 수목이 하늘에 치솟고, 거치른 곳 이였답니다.
손수 수목을 베고, 풀을 깎아 집을 지으시고 사시었습니다.
그후 본 지손(支孫)들이 번성하여 관면 이 끊이지 않고, 연장접옥(連墻接屋) 하여
한 마을을 만들고, 또 세거(世居) 번창(繁昌)하여
큰 마을을 이루며, 자손(子孫)들이 세거(世居)하였습니다.
* 고마암 어조대.
* 고마암벽에 새겨진 백세청풍 글.
선생(先生)께서는 귀향(歸鄕)하시어 스스로 자호(自號)를 어계(漁溪)라 지으시고 상앙하시니
세상 사람들이 그때 부터 어계은자(漁溪隱者), 어계선생(漁溪先生)이라 하였다 합니다.
* 어계선생 묘원.
또한 어계선생(漁溪先生)은 신후지지(身後之地) 를 일찌기 정암강 상(鼎巖江上) 갑자(甲坐)
현재지명: 함안군 법수면 강주리 의 원(原: 언덕)에 정 하시고,
<정암강 수(水)가 마른 들 내 자손은 영원히 번성 하리다 !>하시고,
또 말씀 중에
<내 자손이 마땅히 원북에 세거 할 것이나 구후(久後) 에 만약 쇠퇴하면
"산승 칠발안 오봉 상대 처山僧 七鉢案 五峯 相對 處 >에 옮겨 살면,
다시 대창(大昌: 크게 번창) 하리라 하시었다.[家乘]
어계선생(漁溪先生)의 묘원(墓園)은 정암강 상(鼎巖江上) 동(東)쪽 주산(主山)인 삼봉산(三峰山)
천제봉(天祭峯) 이 서(西)로 달리어, 응암산의 아늑한 경사지에 확 트인 시야가 낙동강의 지류인
남강 물의 입수(入水: 물줄기나 들어옴)와 정암(鼎巖)쪽에서 백산 방면으로 유유히 흘러 보내는
형국의 지맥으로 멈추었으며, 묘원(墓園)앞 에는 작은 못이 있어
세월이 흘러 자연 못 처럼 보이지만, 일찌기 선생의 풍수지형을 고려한 인공(人工)의 연못이니,
이 지형을
" 노서 하전 지형 "(老鼠 下田 地形) 이라 하여,
<늙은 쥐가 밭에 내려와 배 불리 먹는 형국의 길지(吉地) > 라 한다.
묘소(墓所)는 함안군(咸安郡) 법수면(法守面) 강주리(江州里) 산 53 번지 (응암산) 갑좌(甲坐)의
상,하(上,下) 에 선생(先生)과 정부인(貞夫人) 흥양 이씨(興陽 李氏)의 묘소가 있다.
* 어계선생 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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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선생의 충절(忠節)과 신의(信義)
어계선생(漁溪先生)의 언로(言路) 행적(行跡)은 소상히 알수 없어나,
세종임금, 문종임금, 단종임금시절에 나라에서 교육을 진흥시켜,
다사제제(多士濟濟) ! 가히 태평 성세라 할수 있었는데,
세조(수양대군)가 자리를 물러받자,일시 장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세조에 위질(신하라 칭함)하였다.
무릇 고금에 난을 피하여 중원 대륙의 은나라 자손들이 주나라 제사에 조제(助祭)하듯
구군(舊君)을 그리워 하는 사람들이 다 이러하였으니 !
오직 조 려(趙 旅) 선생(先生)등 생육신과 성삼문등 육신 사적(六臣 事蹟)은
남 추강 전(南 秋江 傳)에 실려 이제까지도 사람들의 이목에 혁혁하게 비치고 있다.
조 려 선생(어계 선생)같은 분에 있어서는 태학의 제생으로,
처음부터 단종임금에 칭신 출사 하지않았으나,
그 토록 뛰어난 재주로는, 본 뜻을 억 누르고, 신조(新朝)인 세조에 나아갔다면
만종록 청자(靑紫)의 귀한 자리도 구부려 물건 줍는 것 같이 쉬울 것이지마는,
양지녘의 따스한 영달을 버리고, 북풍(北風)의 앞섶을 스스로 내밀어
설(雪) 한풍의 낙락 장송의 굳은 지조는 장부의 기상 의리 누대(累代)에 빛 냄이니
도리어 굳은 절개로서 항거하여 죽어도 좋다하고, 저 멀리 세상을 은둔하고,
아무 망망한점 없으며, 이렇게 하여 늙어 죽어도 후회치 않으니,
슬프도다 ! 이는 정녕 호걸의 선비이며,
도리를 중히 여기고, 정이 깊지 않으면 어찌 이렇게 되었을까 ?
어계선생(漁溪先生)의 마음은 백이 숙제가 서산에서 채미(菜薇)한 마음과 같음을 알겠으니,
동봉 김열경(김시습의 호)과 가히 일대의 신교(神交)로서 타일(他日)에 역사가가 붓을 잡아
대서 특필하고, 김시습과 같이 후세에 전한다고 하면, 죽은 의혼(毅魂)이 외롭지 않을것이며,
후인이 나를 몰라 준다 한들 한(恨)될것 없으니 세칭 김열경을 동방의 백이라 하나,
특립 독행한 선비라 하겠으나 동류의 친교를 끊고, 처자를 버려 미치광이 처럼 돌아 다녀,
스스로 자기 몸을 더럽힌 점에 있어서, 이는 방정한 테두리 안에서 말을 할수가 없다.
* 백이산.
함안(咸安)에 이른 바 백이산(伯夷山)이 있으니,
어계선생(漁溪先生)이 은둔(隱遁)의 군자(君者)로서 거처(居處) 하시어 종신토록,
다시 세상에 나오지 않고, 시문(詩文)과 낚시만 드리우니 후세의 참 으로 은자(隱者)로다 !
마음은 김시습 같은 마음이요 ! 그 발자취는 은매 하여, 뭇 사람들이 무어라 칭 할수 있으랴 !
성인의 세상을 만났으면 징현천유(微顯闡幽) 하신 뜻을 능히 표현 할수 있었을 것이 아닌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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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계선생 정려.
11.잊혀진 선생(先生)의 충절(忠節)과 신의(信義)가 242년 후(後)에 생육신(生六臣)으로 추봉되다.
* 생육신 육각비.
어계선생(漁溪先生)의 장손자(長孫子) 참판공(參判公) 휘(諱) 순(舜)이 귀(貴) 하게 되어,
도승지에 증직(贈職) 되시었고,
1698 년 무인년(숙종임금 24년) 4월 6일 노산군의 시호(諡號)를 순정안장 경순대왕,
묘호를 단종으로 복위(復位)되었고,
* 어계선생 봉토(위토답).
어계선생(漁溪先生)등 여섯 분이 242 년이 지나서야 생육신(生六臣)으로 추봉(追封)되시었으며,
봉토(封土)를 하사(賀謝)하시었다.
봉토(封土)는 함안군 법수면 강주리 남강변 4필지 3만 3천여평으로,
1984 년 위토답(位土畓)을 옥답(沃畓)으로 전환, 정리하니 3만 784평 이다.
이 논(畓)의 경작(耕作) 수세(收稅)로 원북제, 하림제, 응암제, 서산서당 관리비와
금은선생 전서공 휘(諱) 열(悅), 시정공 휘(諱) 안(安), 어계선생 정절공 휘(諱)려(旅),
3분의 선조묘(先祖墓) 경비로 사용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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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9년 (기묘년) 숙종임금 25년 2월에 영월군을 부(府)로 승격 하였고,
1703년 (계미년) 숙종임금 29년에 어계선생(漁溪先生)께서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에
증직(贈職) 되시고, 서산서원(西山西院)을 창건(創建) 하였으며,
1713년 (계사년) 숙종임금 39년에 서산서원(西山西院)에 사액을 내리셨다.
1781년 (신축년) 정조임금 5년에 시호(諡號)를 정(定)하여
이맹전공(公)의 후손 상소와 10세손 중회선생께서
어계선생(漁溪先生)의 충절(忠節)과 도리(道理)를 밝혀,
자헌대부 이조판서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정2품)에 가증(加贈: 추가증직) 되시고
시호를 정절(貞節)이라 추봉(追封)되시었다.(謚法淸白自守曰 貞好廉自克曰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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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어계선생(漁溪先生)의 배향(拜享).
* 서산서원 현판.
* 서산서원 경내(육각정).
* 서산서원 정당(강당).
* 서산서원 입구(충의문).
서산서원(西山西院)은
선생(先生)께서 평소 기거하시던 백이산(伯夷山)밑 원북동(院北洞)에
어계 조 려, 동봉 김시습, 한림 이맹전, 관란 원 호, 추강 남효은, 상사 성담수 등
생육신을 배향 하고, 서산서원<창건: 1703년(계미년) 숙종임금 29년>이라 하였고,
사액은 1713년(계사년) 숙종임금 39년에 내려졌고,
서원 철폐는 1864년(갑자년)고종황제 원년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폐되었습니다.
* 서원철폐 시기의 다른 견해는 1871년 (신미년)고종황제 8년에 되었다고도 합니다,
1979년(기미년)에 정절공 어계선생의 후손(함안조씨 대종회 정기총회, 원북재)들이 발의하여,
1980 년(경신년)에 정부보조와 사림 및 육신(六臣)의 후손(後孫)들의 성금으로 착공 하여,
동년 기미년 5월 서산서원 복원 추진위원회를 조직하여 위원장에 조찬규 서울화수회 총회시 결의,
1980년 9월 17일 사단법인 서산서원을 설립(초대 이사장 : 조일제 현 화수 총연합회장)하였으며,
1984년,갑자년에 준공되었고,
4년 동안의 5억여원의 공사비로 복원하여 동년 음력 9월 9일 위패를 봉안 하였다.
숙모전(肅慕殿)은 수양대군에 의해 왕위를 빼앗긴 단종임금과 정순왕후를 비롯하여,
사육신등 단종임금에게 충의를 지킨 절신(節臣) 89위(位)를 모신 것이다.
1904년(대한제국 고종 광무 8년) 에 초혼각을 숙모전이라 사액 하였다.
현재 숙모전은 1921년(신유년) 임정정부 3년 에
정전(正殿) 6간, 동무 4간으로 고쳐 중수한 것이며, 문화제 제 1083호 이다.
* 서산서원 연당.
* 서산서원 안내표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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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절서원.
* 창절사.
13. 창절사의 추배 유감, 후손들의 숙제로 남아 !
1997년(정축년)에 후손(後孫)이 어계선생(漁溪先生)등
생육신(生六臣) 창절사<彰節祠:1971년(신해년)12월 16일
지방문화재 제27호 지정/조선시대 사당)의 추배(追配:추가 배향) 탄원상소문을 발견한바
지금으로 부터 116년전 어계선생(漁溪先生)등 생육신(生六臣) 비문을
강원도 영월 창절사에 추가 배향 되어야 한다는
경상도 유학 및 진사 등 114명이 연명 날인한 상소문 원본이 경북 청송 조용하(전 경북 도의원)
종원의 고서(古書)속에서 1997년(정축년)초에 발견되어 관심이 집중 되었었다.
서기 1881년(신사년)고종황제18년(광무7년) 진사 김경락이 대표로 되어 있는
상소문에 따르면 창절사에 박팽년, 성삼문, 유성원 , 하위지, 이 개, 유응부등
사육신(死六臣)과 생육신(生六臣) 中 김시습과 남효은 만이 배향 되어있고,
정절공 조 려, 이맹전, 성담수, 원 효등 사신(四臣)이 배향되지 못 했다고, 통탄하고,
영월에 사당을 둔 것은 군신일체의 의(義)로서 같이 제사함이라,
이러한 임금이 있으므로 이러한 신하가 없을수 없고, 이러한 신하가 있으므로,
이러한 사당이 있으므로, 생육신(生六臣)과 사육신(死六臣)은 동지동절(同志同節)의 신하로서
한 사당에 같이 향례(享禮)함이 불변(不變)의 정론(正論)이라 주장을 하였고,
[살아서 뜻을 같이하고, 죽어서도 같이 전(傳)해 졌으니 향례(享禮)를 같이함이 마땅하여
동사(同祠)로 추배 되어야 한다]고 지적 하였다.
* 이 상소문은 한지를 여러겹으로 발라만든 두꺼운 종이에 세로 1m 가로 2m규격으로 되어 있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상소 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 했고,
지금까지도 <추가 배향>문제가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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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현사] 생육신(生六臣) 두분을 배향(拜享)한 팔현사(八賢祠)가 [영월읍지]에 이어
[연려실기술]에 의 하여 밝혀졌다.
강원도 영월에 생육신(生六臣)의 두분을 배향(拜享)한 팔현사가 있었음이
서울 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완산 이긍익 저서 [연려실 기술]에 의 하여 밝혀 졌다.
그 사실은 다음과 같다.
영조 임자년에 영월 선비들이 팔현사를 육신사당 옆에 세웠는데
팔현은 김시습, 남효은, 원 효, 권 절, 이맹전, 조 려, 정 보, 성담수 이다,
뒤에 신설한 모든 사당을 헐어 없애라는 명령이 있어서 헐었는데
3일 뒤에 예조의 공문이 내려 왔는데
팔현사는 헐지 말라는 명령이 있었으나 미쳐 고쳐 세우지 못하였다.
조공(曺公) 하망(夏望)이 그 때에 부사로 있었는데
그 아들 명후가 친히 보고 이를 아주 자세히 전(傳) 하였다,
많은 유생이 사액(賜額)을 청 하였으나 윤허 하지 않았다.
영조 8년 (임자년)1732년에 영월의 선비들은 육신사 옆에 사당을 짓고
생육신(生六臣) 다섯 분과 권 절, 정 보를 합배 하여 팔현사 라 하였다.
영조 17년 신유년(1741 년)에 관찰사 김제찬은 육신사당을 현재의 위치로 이전 하였다.
이전 사유는 전(傳)해진바 없으나, 노산 묘를 장릉 으로 추대할때
육신사의 경내 존치 여부를 놓고 논의할 즈음 실리와 인정이 서로 맞지 않으며
육신사는 다른 신하와 다르니 그대로 두는것이 가 하다고 한
숙종임금의 어의(御意)와는 배치 되는 것이나
정조 15년(신해년)1791년에 생육신(生六臣) 中 의 김시습, 남효은 을 육신사 에 추가 배향 하였다.
이것은 팔현사가 철폐되었기 때문이며
한편으로 생육신(生六臣) 예우(禮優)에 균형(均形)을 잃은 결과가 되었다.
그리고 경북 영천의 용계서원에서도 배향(拜享)하고 있습니다
* 경북 영천 용계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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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불사이군(不事二君)의 님 그리는 마음 구월등고(九月登高) 시(詩)로 승화(昇化)되시니 !
1701년(신사년)숙종임금 27년 예조판서 조상우가 대왕의 어전(御前)에 무릎 굻어 재배 한 다음,
어계(漁溪)조 려(趙 旅) 선생(先生)의 아름다운 충절을 이렇게 아뢰었다.
" 전하 ! 근자에 올라온 상소 가운데 이를 소홀히 하지 못할 것이있사와 삼가 아뢰옵니다.
진사(進士) 조 려(趙旅)는 원 호, 김시습, 이맹전, 성담수, 남효은과 함게 살아서는 뜻이 같으며,
죽어서는 그 이름을 함께 하였나이다.
또한 조 려(趙旅)가 읊은 구일등고(九日登高)란 시(詩)에는
머리 돌려 눈을 뜨니 강산이 저물고, 땅 넓고 하늘 높아, 생각이 아득 하네.
복희 훤원 어디갔소 슬프기 그지없고, 요순 시절 못 만나서 마음이 아프구나,
슬프다 이내 신세 어인일로 괴로운가, 연연한 구군(舊君)그리워 잊어지기 어렵구나
라는 대목에 이르러 조 려(趙旅)의 절개를 능히 요량 할수 있나이다.
세간에 김시습 일만 크게 아나, 이는 기행이 세간에 널리 회자되어 그런것 뿐 이며,
조 려(趙旅)를 비롯한 여섯사람의 충절을 비교 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마땅히 크게 포상 하시어 동렬(同烈)의 은혜를 베풀도록 윤허 하여 주시옵소서 "
<구월등고>란 도연명을 사모한 어계선생(漁溪先生)의 시(詩)로,
중구절날 가인(부인 흥양 이씨)과 다정히 손을 잡으시고
백이산에 오르시어 지난날을 회고 하시며,
돌아가신 단종임금을 그리며, 한수의 시(詩)로 선생의 울적한 마음을 달래셨으니,
" 구월 의 구일날인 중구절날 맞이하여, 좋은시절 읊고파서 높은산에 올랐어라,
흰 구름 뭉개뭉개 기러기떼 날아가니, 난초고운 산비탈에 국화꽃이 향기롭네,
맑고푸른 산천경개 구름연기 자욱하니 가을바람 밝은햇살 기상또한 처량하네
강 언덕 갈대꽃은 흰 빛을 토해내니 아름다운 단풍잎에 청산은 단장하네
소 치는 목동아해 흥에겨워 노래하고 도연명은 뜻이높아 벼슬두고 돌아오니
천년 전 옛풍류가 어제인양 생생한데 오늘 의 호협기상 서리같이 엄숙하네
머리돌려 바라보니 강 산은 저무는데 땅 넓고 하늘높아 생각 만 아득하다
복희훤원 어디갔소 슬프 기 그지없어 요순시절 못만나서 마음절로 애닲도다
시를찾는 붓끝에는 천지만이 넓고넓어 흠뻑취한 술잔앞에 세월길다 한되도다
슬 프다 이내신세 어인일로 괴로운고 님 그려 품은회포 끝내잊지 못할네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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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선생은 벗(友)과 의 마음을 서신(書信) 에 띄우시고,
어계선생(漁溪先生)께서는 은거(隱居)하시면서
벗들과 서신(書信)으로 안부와 마음을 띄우셨으니,
그 중 한 문귀를 소개하자면
" 섣달 그믐께 보내주신 당신의 편지가 정초에야 도착 하였기로
받들어 읽어 보오니 지극히 감동이 되어, 서로 대면한 듯 하옵니다.
요즈음 바람이 쌀쌀 하온데 몸수 편안 하시온지 궁금 하옵니다.
북쪽버들과 남쪽매화에도 봄이 움트는 이때에
흥치와 정서를 참기 어려우니 더욱 당신을 위하여 생각을 바칩니다.
저는 오랜 감기가 아직 그러하니 참으로 민망할 뿐 이옵니다.
보내주신 세가지 선물은 멀리서 보내 주신 것도 감사 하온데
품질 또한 좋고 아름다웁기로 절하고 칭송을 드리 옵니다.
녹녹하고 보잘것 없어 답장 마저 뜻을 다 적지 못 합니다.
회답 주시옵기를 바라 옵니다.
조 려 ( 趙 旅 )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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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계선생 묘원.
16. 평생(平生)의 가인(佳人)을 떠나 보내신 선생(先生)의 마음은 '온 세상 이 텅 비는 것 같아' !!
1480년(경자년)조선 성종임금 11년 선생(先生)의 연세 61세 되시던 해 2월 10일
평생의 지기(知己)요, 가인(佳人)이신, 증(贈) 정 부인(貞夫人) 흥양 이씨께서
한 마리의 두견(杜鵑)이 되어 백이산(伯夷山) 자락으로 날아 갔으니 !
부인(婦人)께서는 평생을 정충대의 의 고고하신 자태의 선생(先生)을 경모(敬慕) 하시었고,
항상 다정 다감 하신 벗 이요, 어머니 요, 반려자로서 가난한 살림살이에도,
일찌기 돌아가신 시부님과 홀로 남으신 시모님을 공경과 효성을 다 하시었고,
세 형제를 훌륭하게 키우시어 출사(出仕)를 시키시니, 어찌 그 큰 은혜에 보답 할꼬 ?
항상 삼형제를 키우시면서 자상 하시고, 인자하시었으며,
때 로는 엄중 하시어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도리를 다 하시었으며.
선생(先生)으로서는 항상 여가만 생기시면 다정히 손을 잡으시고,
원림(園林)과 산천경계를 거니시며, 담소를 나누시며, 선생(先生)의 시(詩)를 경청 하시었다.
다정한 벗 ! 사랑하던 가인,
인후(仁厚)한 어머니로서의 잃으신 그 마음 어찌 요량 할수있으랴 !
선생은 부인을 일찌기 신후지지로 자리를 잡으신,
정암강상 응암산 갑좌에 정성을 다 하시어 모시니,
세상은 온통, 텅 ! 비는것 같았다.
어계선생(漁溪先生)께서는 평생의 그리운 가인(佳人)을 보내시면서
그 마음을 담은 여러 수 의 애끓는 아름다운 시(詩)를 읊으시었는 데,
어디에서 그 시(詩)를 찾을 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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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선생(先生)께서는 산천 경개(山川景槪)의 아름다운 자연(自然)을 시(詩)로서 노래 하시니,
<어계선생(漁溪先生)의 대표적인 시(詩)>
* 구월 등고시 *
구 월 의 구월구일 중구절날 맞이하여, 좋은시절 읊고파서 높은산에 올랐어라.
흰 구 름 뭉게뭉게 기러기떼 날아가니 난초고운 산비탈에 국화꽃이 향기롭네
맑고푸른 산천경개 구름연기 자욱하니 가을바람 밝은햇살 가을기운 처량하네
강 언 덕 갈대꽃은 흰 눈을 토해내니 아름다운 단풍잎에 청산 은 단장하네
소 치 는 목동아이 흥에겨워 노래하고 도연명의 뜻이높아 벼슬두고 돌아오니
천 년 전 옛풍류가 어제인양 생생한데 오 늘 의 호협기상 서리같이 엄숙하네
머리돌려 바라보니 강산 은 저무는데 땅 넓 고 하늘높아 생각 만 아득하다
복희훤원 어디갔소 슬픔어이 다할소냐 요순시절 못만나서 마음절로 애닲도다
시를찾는 붓끝에는 천지만이 넓고넓어 흠뻑취한 술잔앞에 세월길다 한되노라
슬 프 다 이내신세 어인일로 괴로운고 님 그 려 품은회포 끝내잊지 못할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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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어계선생(漁溪先生)의 한시(漢詩) 구수(九首) 발견.
1922년(임술년)임정정부 4년 목활자 본으로 간행한 담헌 김극검의 시집인
<담헌시집>의 부록에 어계선생(漁溪先生)의 시(詩)열수가 수록되어 있었다.
그중 아홉수가 <어계선생 문집>에 수록되지 않은,
새로 발견된 시(詩)로서 우리 함안조문(咸安趙門)의 감격적인 경사와 화제가 아닐수 없다.
이<담헌시집>에는 조선 초기 사육신(死六臣)과 생육신(生六臣)을 포함한
문인 학자 90여 명의 칠언율시 400여 수가 담겨져 있다.
특히 여기에는 세상에 알리어지지 않은 시(詩)들이 다수 들어 있어, 학계의 화제가 되고 있다.
김극검은 1439년(기미년) 세종임금 21년~1499년(기미년)연산군 5년,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서 본관은 김해, 자는 사렴, 호는 담헌 이다.
일찍이 생원, 진사시에 합격하고,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원 검열, 교리를 시작으로
외직인 함안군수, 양산군수, 황해도 관찰사, 전라도관찰사, 등 목민관을 지내고,
많은 주요 내직을 거쳐, 호조판서에 이르렀다.
특히 시문에 뛰어나고, 성품이 청렴 강직하여,
언론의 정상화를 요구 하기도한 문신이였다.
이 담헌의 행장과 묘지(墓誌)에
'점필재 김종직 선생과 어계(漁溪) 조 려(趙旅)선생(先生)으로 더불어 도의로 사귀면서
주고받은 시문이 수십 수에 달 한다' 고 기록 되어 있고,
김해김씨 보첩에도 극검의 란에 어계선생(漁溪先生)의 증시(贈詩)인 4율(律) 한수를 싣고 있다.
이 새로 발견된 어계선생(漁溪先生)의 칠언율시 아홉 수는
1473년(계사년)성종임금 4년에 담헌이 3
5세에 함안군수<임기:1473년(계사년)성종임금 4년 정월~그해 12월)로 있을 때
(전거: 경상도 함안군 총쇄록)
어계선생(漁溪先生)께서 54세 무렵에, 유학의 선, 후학 이며,
목민관인 담헌에게, 예를 다하고, 후학을 위무하시며, 서로 주고 받은 작품으로서
담헌이 세상을 떠난지 423년 만에 <담헌시집>이 간행되었기 때문에
묻혀 있던 어계선생(漁溪先생)의 시(詩)가 이제야 발견 된 것이다.
다행히 조기주(재)<前한국학 중앙연구원,전문위원)>종원에게 입수된
이<담헌시집>(영인본)은 대구의 고서수집가인 김광식씨로 부터 기증 받은 것이다.
아직도 미 발굴 된 어계선생(漁溪先生)의 시문(詩文)이 많이 있을것으로 추정된다.
우리 후예들은 아무쪼록 열성을 다 하여 새로운 발굴에 힘써야 하겠다.
* 전거: 함안조씨 화수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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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어계선생(漁溪先生)께서 백성을 사랑하는 민본사상이 돋 보이시는 작품 두수를 소개 한다.
生民大本 莫如農 按節羲和 使授從 不雨天應 虛送夏 無禾人乏 稟來冬
頻凶前鑑 幾驚犀 治水今年 十御龍 大野枰碁 先後置 靑靑白白 善形容
생민대본 막여농 안절희화 사수종 불우천응 허송하 무화인핍 품래동
빈흉전감 기경서 치수금년 십어룡 대야평기 선후치 청청백백 선형용
<해석>
민생의 큰 근본 농사 만한 것이 없으니, 백성들에게 때를 알려서 농사철을 아니 잃게 하오,
비 오지 않은채 여름을 헛 되이 보내고, 창고 빈 상태 에서 겨울을 맞이 하네
자주든 흉년에 겪는고통 가실날이 없는데, 금년에도 물맡아 다스리는 용이 열마리오,
큰들은 바둑판처럼 앞뒤에 펼쳐 있는데 푸른빛 흰빛이 잘 드러내고 있구나.
大旱月餘 大雨公 대한월여 대우공 달포만의 가뭄 끝에 비가 오려고
雷聲先起 부桑東 뇌성선기 부상동 우뢰소리 먼저 부상의 동쪽에 일어나네
須臾風引 難名德 수유풍인 난명덕 잠깐 사이 불어오는 그 바람 고마움 표현하기 어렵고
倉卒雲竹 造化工 창졸운죽 조화공 창졸 간에 모여든 그 구름 조화의 공 일세
異色春容 田滿水 이색춘용 전만수 봄빛은 형형 색색 논 에는 물이 가득 한데
同心人望 歲成功 동심인망 세성공 사람들은 한 마음 으로 풍년을 바라네
패然何處 無餘澤 패연하처 무여택 힘차게 내리는 비 어느곳 인들 혜택 없으랴
莫日冥冥 彼太空 막일명명 피태공 저 하늘도 무심 하다고 만 말 하지 말아 다오.
이 시(詩)는 어계선생(漁溪先生)께서 당시 함안군수로 있던,
담헌 김극검(김해 김씨) 에게 보내는 시(詩)로서
날씨가 몹시 가물음 끝에 비가 내리자,
자연의 섭리를 극치의 필체로 묘사 하여
애 타게 비를 갈망 하는 함 안 백성들과
19 세 연하의 후학(김극검과 선생께서는19세 차이가 남) 목민관의 심사를 위로 한 것 입니다.
또한 오백여년 만에 발견된 시(詩)로서 어계선생(漁溪先生)과
담헌 김극검 은 유학의 선 후배로서 상호 년륜의 시공을 떠나
예(禮) 에 의거 정중히 하시고, 교유가 돈독 하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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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선생(先生)의 선적(先蹟)을 찾아서
함안조씨(咸安趙氏) 중시조(中始祖)이신 정절공(貞節公) 휘(諱) 려(旅)어계선생(漁溪先生)의
묘소(墓所)는 경남 함안군 법수면 강주리 산53번지 응암(鷹巖)속칭:매바구) 갑좌(甲坐)에
평생의 지기이요, 가인이신 정부인(貞夫人) 흥양이씨 묘소(墓所)와 동원(同園)에 모셔져있습니다.
* 선적(先蹟)으로는
* 조묘.
조묘(조廟)가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에 있으며,
어계선생(漁溪先生)과 정부인(貞夫人) 흥양 이씨 에게 향례(享禮)를 드리는 곳으로,
매년 3월 상정일(음력 매달 첫번째 丁날)과 9월 상정일에 배향(拜享)합니다.
* 채미정.
채미정(采薇亭)이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에 있으며,
채미정(采薇亭)은 서산서원(西山書院)에 속한 건물로 서원(書院)이 훼철(毁撤)된 후
채미정(采薇亭)이라 게명(揭名) 하고, 후손(後孫)들과 사림(士林)이
매년 9월 9일 선조 어계선생(漁溪先生)과
매월당 김시습, 관란 원 호, 경은 이맹전, 문두 성담수,
추강 남효은 등 생육신(生六臣)에게 국천제(菊薦祭)를 거행합니다.
* 서산서당.
또한 서산서당(西山書堂)이 함안군 군북면 사촌리에 있으며
서산서당(西山書堂)은 서산서원(西山書院)이 훼철(毁撤)된 후,
1902년(임인년)고종황제 39년,광무 6년)에 본당(本堂)을 건축(建築)하고,
서원(書院)의 전례(傳例)에 따라 매년 3월 중정일(中丁日)에 생육신에게 미천제를 거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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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산에 가면 동학사 숙모전(肅慕殿)이 충남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에 있는데
1984년(갑자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 제 67호로 지정된 숙모전은
계룡산의 동학사 경내에 있으며, 단종과 충신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습니다.
경내에는 삼은(三隱)즉 포은 정몽주, 목은 이 색, 야은 길 재 를 모시는 삼은각이 있으며.
매월당 김시습(1435년~1493년)은 1456년 병자년(세조 2년) 사육신의 시신을 장례 지낸뒤,
삼은각 옆에 단(壇)을 만들고, 제사 하였습니다.
2년뒤 동학사에 들렀던 세조(1417년~1468년)는 자기로 인 하여 죽은 280명을
초혼각에 모시도록 했답니다.
1728년(무신년)영조임금 4년에 불에 타,
1827년(정해년) 순조임금 27년에 다시 세웠으며,
1904년(갑진년)고종황제 41년,
광무 8년에 중건하여 고종으로부터 숙모전이라는 사액을 받았습니다.
현재 89의가 모셔져 있고,
3월 보름과 10월 24일에 추모제를 지냅니다.
* 백이산과 숙제봉.
백이산 과 숙제봉은 함안군 군북면 사촌리, 명관리, 동촌리, 원북리에
걸쳐 있는산 및 봉우리 입니다. 백이산의 옛 이름은 쌍안산 인데
,
단종임금 복위후 숙종께서 내리신 어계 선조 사제문(漁溪先祖 賜祭文) 中 에
쌍안산을 백이산이라 칭(稱)하여 선생(先生)의 절의(節義)가 옛적 백이와 같음을 찬양 하였습니다,
* 숙제봉: 백이산 옆에 같이 솟아있는 봉우리로 숙제봉이라 합니다.
* 원북재(院北齋): 어계선조 조묘재실(漁溪先祖조廟齋室): 함안 군북면 원북리에 있고.
* 원북재.
* 응암재(鷹巖齋): 어계선조 묘각(漁溪先祖墓閣): 함안 법수 강주리(응암:일명-매바구)에 있으며
* 새로 중수한 응암재(어계선생 묘원옆).
* 용계서원(龍溪書院)은 경북 영천에 있습니다.
* 서산서원(西山書院)은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에 있습니다.(참조:서산서원 복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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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 영월 청령포.
21. 선생(先生)의 자호(字號) 어계(漁溪)의 유래.
* 스스로 어계 처사(漁溪 處士)라 하시니,
선생(先生)께서는 1455년(을해년)단종임금 3년, 세조 원년, 윤(閏) 6월 11일에,
단종임금께서, 수양대군 에게 왕위를 선양(실제로는 탈취)하니,
분격(憤擊)하시고. 하늘을 우러러 세상을 개탄(慨嘆)하시면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정충대의(貞忠大義)사상(思想)을 마음 속에 새기어 다짐하시며,
1456년(병자년)세조 2년 4월 춘절(봄) 선생(先生)의 37세 되시던 해에
태학(성균관) 동문수학 유생 들과 하직 인사를 하시고,
본향 이신 함안 원북동 백이산 자락, 낙동강 가에 은거(隱居)하시며,
선생(先生)께서는 스스로 어계처사(漁溪處士)라 하시며,
산천경개(백이산과 낙동강변)를 벗 삼으시고,
글을 읽고, 시(詩)를 읊으시며, 때로는 긴 낚시대를 드리우시고,
함안군 군북면 하림리 고마암 (叩馬巖)과 어조대(漁釣대)의 계곡에서 세월을 낚으시며,
자연과 더 불어 상앙(상앙) 하시면서, 우거(愚居)하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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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암.
[이 계곡은 원북동에서 1Km남짓 떨어진 곳으로 구전(전해오는 이야기) 으로는
옛날에는 계천의 폭이 넓었고, 물이 깊어 고기도 많이 노니는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지금은 560 여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계천에 사토가 쌓이고,
주민들이 농토조성을 위해, 하천이 침식되고,
더욱이 70~80년대에 새마을 사업으로 부근 일대가,
시멘트로 덮혀, 원형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다만 고마암(백세청풍 새겨진 바위) 과 어조대는
옛날을 증명해 주고 있으며 옆 공간에는 숲이 우거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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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월 청령포 도강전설의 호도비.
1457년(정축년)세조 3년 10월 24일 단종임금께서 승하 하셨다는 부음을 들으시고,
불원 천리길을 주야(晝夜)로 통곡 하시면서 달리시어,
강원도 영월 청령포에 도착하시니 나룻배는 없고,
물은 불어 동분서주 하시다가 하늘을 우러러 통곡 하시니,
하늘도 감동 하시어 대호(큰 범)을 내리어주셔서 도강 하여,
단종임금의 시소에서 통곡 4배 한 후 옥체를 수렴 하시었다.
그 이후 그리운 님을따라 죽음을 같이 못 하였으나,
뜻 만은 <해로동혈>의 다짐을 맹세 하시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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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물고기(漁)와 시내(溪)가 되시어
낙동강 하시(下始)에서 평창강 영월 청령포로 이어지는,
그리운 님의 혼령을 만나기 위해
어계(漁溪)의 기나긴 유영(遊泳) 의 장대한 대 서사시로 이어 지시니 !
가을빛 국화꽃 향기로웁고, 백이산 자락의 한 마리 두견이 되어
그리운 님 따라 죽음을 같이 못한 피 끊는 사모곡 의 울부짖음이,
이 밤을 흰빛 서늘한 비늘을 퍼덕이며,
그리운 님의 혼령을 만나기 위한 장대 하고도,
기나긴 어계(漁溪)의 유영(遊泳)이 시작(1453년(병자년) 되었으니 !
1489년(기유년)성종임금 20년 시월 스무이튿날, 칠순으로 고요히 눈을 감으시니 !
그리운 님(단종임금)과 육신(六臣)과 함께 죽지는 못하였으나,
뜻만은 [해로동혈] 하여 스스로 [동혈의 지조]를 굳게 지키시니
어계(漁溪)의 33년의 기나긴 유영(遊泳)을 끝내시며,
지하에서 사모하는 님(단종임금)과 해우를 하시었다,
선생의 정충대의(貞忠大義)의 숭고 하시고도 장대 하신 애끓는 그 마음은
어계(漁溪)의 자호(字號)로 청사(靑史) 에 길이 남기어 셨으니 !
" 선생의 청고(淸高) 하신 사상(思想) 은 백이산의 한마리 학 이되시고,
애 끓는 사모곡(思慕曲)의 혼령(魂靈)은 한 마리의 물고기(漁)가 되시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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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先生)은 지인(至人)으로 사상(思想)이 아주 연징(淵徵)하신 까닭에
그 발자취를 찾아볼수 없어, 사람들은 선생의 은절(隱絶)이 어떠 하신지를 몰랐다.
이제 살피건데, 다만 후세 사람들이 모를뿐 아니라,
당시 사람들도 몰랐고, 또한 외인(外人)들도 모르고,
하물며 한 집안 사람 조차 몰랐다고 한다.
정녕 한 세상을 풍미한 호걸 선비의 기상과 도리로서,
정충대의의 사상과 백세청풍의 고고한 유맥을
청사와 후인에 기리 남기시었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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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계선생 유품.
선생(先生)께서 유명(遺命) 하신 뒤에 원북동 고택(古宅)에는
지팡이, 화로, 촛대, 서적, 족보 등 평소 에 애용하시던 유품만이
평생을 정충대의(貞忠大義)의 고고한 절개를 지키신,
고혼(故魂)의 빛 바랜 흔적으로 남아 있었으니,
이는 고인(故人)의 청고(淸高) 하시고도,
애끓는 기나 긴 여정을 조용히 말 해주고 있음이리라 !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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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계선생 고택.
함안조가 종택
* 서산서원.
* 육선생(생육신) 기적비.
* 채미정.
* 신도비각.
* 어계선생 묘소.
산소 밑 작은 늪(연못)에서 날아가는 청둥오리.
* 서산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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