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학관 - 草堂 강춘기 시인·수필가 편
시글 본문내용
나의 문학관 (38회) - 草堂 강춘기 시인·수필가 편 草堂 강춘기 시인·수필가 연보 전남 장흥 출생 1948년 광주대성초등학교 졸업 1952년 조선대학교부속중학교 졸업 1955년 조선대학교부속고등학교 졸업 1955년 전남대학교 농과대학 농학과 입학 1961년 전남대학교 농과대학 졸업 1963년 숭의실업고등학교 교사 1969년 전남대학교 대학원 입학 1971년 전남대학교 대학원 졸업 1979년 숭의실업고등학교 교사 사직 1979년 3월 서강실업전문대학 교수 1991년 9월~2004년 8월 서강정보대학 학장 역임 2004년 8월 서강정보대학 정년퇴임 1993년~1996년 동양자원식물학회 회장 1996년~1998년 한국자원식물학회 회장 2001년~2003년 사단법인 밀알중앙회 총재 역임 1994년 광주시민대상 학술 부문 수상 2010년 『문예시대』 시 부문 등단 2010년 『대한문학』 수필 부문 등단 2014년 서은문학상 수상 문학세계문인회 정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회원 서은문학연구소 회원 ▶ 저서 1992년 수필집 『잃은 것과 얻은 것』 2012년 제1시집 『거울이 나에게 말을 하였네』 2014년 제2시집 『어머니와 무명활』 2017년 제3시집 『만인의총 앞에서』 또 하나의 길에 첫발을 디디며 1. 들어가며 나의 생각과 삶의 경험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일상의 언어를 정교하게 다듬고 독자적인 생명을 예술로 짜내는 것이 문학이라면 나는 그 길을 걸어온 연륜이 너무나 짧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나는 십 년에도 미치지 못하니 갈 길이 멀기만 하다. 하여 ‘나의 문학관’이란 거창한 타이틀이 오히려 나를 움츠러들게 한다. 이 청탁을 받고 부끄러운 민낯을 내어놓는다는 것이 생각만 해도 얼굴이 뜨거워 일언지하에 거절을 했다. ‘-관(觀)’이란 쉽게 인생관, 역사관, 국가관, 세계관, 우주관 등 거창한 철학적 무게가 뒤따른 말이기 때문이다. 문학을 어떻게 보고 있고 어떻게 그것을 언어라는 것을 빌려 새로운 창조로 배태해 내느냐는 물음이 작가에게는 멍에로 따라다니는 것이 아닐까? 원고청탁을 가볍게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도 나의 경솔함이 생뚱맞는 일이라고 생각되어 그랬던 것이다. 그러나 살아온 얘기도 하나의 문학이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 적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내가 사사(師事)하였던 故 서은(瑞隱) 문병란(文炳蘭) 교수의 「시를 사랑한다는 것은」이라는 시가 나를 움직였다. 시를 사랑한다는 것은 꿈을 가지고 있다는 것 소리와 향이 넘치는 대자연은 온갖 꽃으로 수놓는 울타리와 신비의 정원 그 속에서 지상의 날은 짧아도 시는 영원하다 시를 사랑한다는 것은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것 덧없는 목숨 부귀도 영화도 찰나에 피는 꽃─그대 시 한 편으로도 지구의 반쪽을 입 맞추어 차지할 수 있다 ― 문병란, 「시를 사랑한다는 것은」 일부 내가 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문학에 대한 애정과 꿈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나의 여정은 소중한 것이리라. 사르트르가 “문학이 다른 예술과 구분되는 것은 단지 형식만 아니라 소재도 그러하다. 색이나 음을 써서 표현하는 것과 언어를 사용해서 표현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다. 음표, 색 모양은 표시가 아니며 외부의 무엇과 대응하고 있지도 않다.”고 했다. 문학이란 길이 나에게 잡힐 듯하면서도 아지랑이처럼 가물가물 하기만 하다. 마르틴 부버가 “근원어(根源語)는 어느 때나 홑이 아니고 짝으로 온다.”는 말이 심오하면서도 사랑 가득한 말로 나에게 다가온다. ‘나’라고 할 때 ‘너’가 동반되어 있고 ‘그것(그이, 그녀 또는 사물)’도 그러하니 문학의 묘미가 그러한 곳에 있을 것 같다. 민족이 존재하는 한 그들의 언어도 영원할 것이다. 일상 언어들이 나를 부를 때 어떻게 나의 생각과 감정을 연결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들이 땀이 배어 나오듯 소화되어 토해내야 하는데 그것들이 문자로 형성되어 형상화할 수 있을 때 나의 문학이 이루지는 것이리라. 내가 날마다 맞서 대하는 삼라만상과 내 육신의 움직임과 사유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며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열망 속으로 유영하여 나가는 길 위에 내가 서 있다. 그 길에로 나의 사랑이 순수하게 바쳐지기를 바라며 겸허한 낮은 자의 마음이기를 바라면서 걸어가련다. 나를 한없이 사랑으로 품어주었던 자연과 내가 걸어온 세상이 나의 문학에서 술 익듯 어우러져 펼쳐지기를 바랄 뿐이다. 2. 나의 유소년 시절 나의 조상들은 전남 영광에서 전남 장흥으로 이주하여 사신 지가 이백여 년이 좀 더 되었으며 조상들의 유해도 장흥군 장평면에 안치되어 있다. 아버지는 동학혁명이 일어나기 이 년 전에 태어난 분이다. 아버지가 성장하여 혼인을 하시고 처자식도 거느리고 있었지만 어린 자녀들의 사망으로 삼남 일녀를 일찍 가슴에다 묻으신 것과 가난이 연례행사처럼 몰려온 것에 먹는 것만이라도 해결해 보려고(가진 것은 건강한 육신뿐이었지만) 제주도로 내려갔다. 아버지는 고향의 지인이 먼저 제주로 가서 육체노동을 하며 배고픔을 해결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1925~1928년 어간에 제주로 이주했던 것 같다. 제주에서 유아 때 사망한 형과 내가 태어난 것으로 보아 그렇다. 나는 1932년 제주시 항구 근처의 일도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육체노동으로 처음에는 항구(港口)를 조성하는 데서 고단한 노역을 하셨다고 하며 얼마 후 한림읍 월령리로 이주해 그곳에서 주택과 농지를 임차하여 농사를 지으셨다. 그때 나는 다섯 살이나 여섯 살이었던 것 같다. 그때 우리 가족은 부모님과 작은누나(黔順)와 나 네 식구였다. 그 마을에서 자라면서 일곱 살 되던 가을부터 열 살 되던 겨울까지 만 삼 년간 고정진(高正鎭) 훈장의 마을 서당을 다녔다. 훈장께서는 요즘 말로 하면 깨우친 분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문(漢文)만 가르치신 것이 아니다. 한글, 산수, 미술, 일본어도 가르치었다. 음악은 한 번도 가르치지 않으셨다. 이렇게 여러 과목을 배우다 보니까 사서삼경(四書三經) 옆에는 가보지도 못했다. 『천자문(千字文)』, 『소학(小學)』, 『명심보감(明心寶鑑)』 정도 배웠다. 제주도는 난대지방이다. 동백꽃도 동지 안에 핀다. 중국(제주)수선화도 12월 하순부터 다음 해 3월까지 피고 7월이면 보검선인장(백년초선인장)의 연노랑색 꽃이 가시 속에서 넉넉하게 웃는 자태와 청띠제비나비가 남해안과 남해안 도서지방까지 날아가는 것들도 뒷날 알았지만 바다 위를 나는 것도 보았으며 바닷물이 들고 날 때 간조대에서 여러 가지 고동도 잡았다. 바다에서 헤엄도 치던 유소년 시절, 밀물 때면 마을의 유소년들과 형들과 함께 헤엄치던 월령리 앞바다에서 계절 따라 돌고래 떼들이 수십 마리씩 지나가는 것들을 보며 자랐다. 어떤 때는 돌고래 떼들에게 쫓긴 날치 떼들이 상당히 멀리 나는 것들도 보았고, 보리가 익어갈 계절에 들녘엔 삼동나무열매(이 나무는 석류나무처럼 가시가 있는 나무로 열매가 익으면 진보라색으로 되는데 블루베리보다 좀 작은 편이지만 감미가 더 있다)를 친구들과 따 먹고 진보라색으로 변한 혓바닥을 서로 내보이며 배꼽 빠지게 웃던 일, 또 어쩌다가 꿩 알도 줍던 일도 있었다. 그런 생활 속에서 자연과 친숙하게 지내게 되는 축복을 받게 되었다고 해도 좋으리라. 바람과 풀잎에 맺힌 갯내음 품은 이슬을 맛보기도 하고 갈매기들 노래와 파도의 노래 속에서 쏟아지는 별들을 안고 잠자리에 들곤 했다. 이 모든 것들은 자연이 나에게 속삭여 주는 위대한 언어들이었다고 생각한다. 그것들이 나에게로 왔다가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 숨겨졌다가 다시 나에게로 오는 순환은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서당에서 공부하게 되는 셋째 날의 얘기는 부끄럽기 그지없는 얘기지만 꼭 해야겠다. 그 얘기는 나의 일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당 가기 전 나는 아무런 구속도 제약 받음도 없이 자유의 아들로 밥만 먹고 나면 들로 바다로 나가 노는 아이였다. 그러다가 일곱 살 되던 해 가을에 서당에 가게 되었는데 거기서는 무릎을 꿇고 하루 종일 글을 배우는 것이 고역이었다. 아침밥을 먹고 서당에 갔다가 얼마 되지 않아 눈치껏 훈장 모르게 서당을 빠져나와 집으로 갔다. 아버지께서 “꼭 글은 배워야 되는 것이다. 다른 아이들도 다 그렇게 글을 배우고 있지 않으냐?” 하시며 다시 서당으로 손잡고 데려다 주셨다. 아버지의 막내아들이면서 외동아들이 된 나는 철없어서 부모의 깊은 사랑을 외면한 채 그날 무려 그렇게 일곱 번을 되돌아와 버렸다. 두 번째부터는 어머니께서 데려다 주셨는데 일곱 번째 왔을 때는 집에 부모님이 계시질 않으셨다. 그래서 집에서 나와 Y자형으로 갈라져 있는 집 앞길에 서서 어느 한쪽 길을 바라보니 어머니가 채전 밭에서 어머니 팔뚝만 한 무를 몇 개 뽑아 채반에 들고 오시는 것이 보였다. 어머니에게 잡히면 크게 야단을 맞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어 골목을 하나 건너 옆집 외양간으로 가 숨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는 내가 번개같이 사라진 것을 아시고 집에 채소를 내려놓으신 후 그 집으로 오셔서 나는 잡히고 말았다. “공부가 그렇게 싫으면 세상에서 무얼 하겠느냐!” 하시면서 아버지 지게에서 짐이 허물어지지 않도록 묶는 끈으로 나를 묶어 외양간 대들보에 매달아놓고 인정사정없이 지게 작대기로 때리시면서 눈물로 타이르셨다. 아파서 악쓰는 소리가 이웃까지 들렸던 모양인데 나중에는 거의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려 이웃집 아저씨가 와 보시고 나의 몰골이 새파랗게 된 상태여서 어머니를 밀어제치고 풀어 놓으니, 얼마간 있다가 긴 숨을 토하고 일어서더니 왜 때리느냐고 하며 또 울었다고 한다. “너의 발로 서당에 가라.”고 또 때리셨기 때문에 크게 악쓰며 집을 뛰쳐나갔으나 따라오시면서 회초리로 뒤에서 계속 때리셨다. 결국 쫓기어 서당 대문 앞까지 갔으나 부끄러워 못 들어가고 계속 때리시기 때문에 아파서 소리 질러 우는 소리에 훈장님이 나오셔서 나를 데리고 들어가셨고 훈장님은 자신의 방에 나를 잠들게 눕혀 주셨다. 얼마나 잤을까, 깨어보니 글방동무들은 저녁 먹으러 집으로 간 뒤였다. 서당공부는 아침 식전에도, 낮에도, 저녁 먹은 뒤에도 한다. 훈장께서는 그날은 오지 말고 다음 날 아침부터 나오라고 하시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고 열심히 다니라고 말씀하셨다. 집에 갔더니 어머니는 나를 돌아보지 않으셨고 아버지께서도 훈장님과 같은 말씀으로 사랑 가득한 가슴으로 안아주셨다. 어머니의 그 매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나는 오늘의 내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사랑의 값진 매를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 매가 아니었다면 나는 불량아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를 사랑으로 키워주신 아버지는 59세로 1950년에 11월에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1992년 97세로 9월에 이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께서는 한문과 한글을 아시는 분이셨고 어머니께서는 문자를 모르는 분이셨다. 내가 잠들면 나를 바라보는 눈들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푸른 하늘에서 대지 위로 겨울이 봄을 잉태하는 장중한 여정과 여름을 키워주는 영화로움도 함께 있다는 것을…. 여기서 졸시 「새싹」을 첨부한다. 나의 유년시절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 밝혀둔다. 새싹 어머니 나무에 아가가 태어났나 봐요 노랗다 못해 연두색이 부드러운 아기들이 쏘옥 얼굴을 내밀었어요 저렇게 가지마다 많은 아가들을 품고 있으려면 너무나 팔이 아프겠지요 어머니 아기들이 배냇짓을 하나 봐요 그렇게 쏘옥 내밀었든 것들 속에서 웃음이 쏟아져 나오네요 소리가 들려오는 곳은 강보(襁褓)에 감싸여 왔어도 얼굴 내밀어 그렇게 예쁜 황금빛 웃음은 천사가 가르쳐 주었겠지요 그 후 나는 열한 살에 조수리(造水里)에 있는 조수초등학교에 입학했고 그 학교 다니는 학생들이 월령리에서 다섯 명이었는데 왕복 이십 리 길을 거의 결석 없이 다녔다. 그러다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제국주의 일본의 패망이 점점 가까워 올 때 2월 말경인가 3월 말경의 어느 날 일본 해군의 군함 5척이 한립읍 협재리와 비양도 사이에 하룻밤을 쉬고 그 다음 날 동남아 지역으로 군수물자를 보급하기 위해 수송선 및 호위 구축함이 정박하고 있었는데 새벽에 연합군 공군기들이 그 모든 군함들을 격추시키고 만다(우리 가족이 거주하던 곳에서 직선거리로 4킬로미터 안팎). 미군이 언젠가는 상륙하여 제주도가 전쟁터가 되리라는 말들이 오고 갈 때였고 일본군들이 부쩍 늘어나 월령리 앞길을 하루에도 몇 차례씩 떼 지어 지나가곤 했다. 아버지는 다행히 어느 선주가 배에 필요한 부속품을 구하러 목포로 가는 배편이 있는 것을 아시고 그 배로 1945년 4월에 나를 목포를 거쳐 조상들의 유해가 묻혀 있는 전남 장흥 장평 숙모님 댁으로 데려다 주셨다. 아버지는 나를 숙모님 댁에 의탁해 놓고 보리수확을 위해 제주로 내려 가셨다. 부모님이 보리수확을 하고 오시기까지 3개월 남짓 숙모님 댁과 장평면 서봉리에 살고 계신 큰누님(仁禮, 큰누님은 부모님이 제주로 내려가시기 전에 혼인하셨다) 댁을 오가며 생활했다. 큰누님 댁에는 자형의 동생이 나와 동갑이고 큰 생질은 나보다 한 살 아래여서 말벗이 있어 좋았다. 그때는 연중행사로 보릿고개가 있을 때였다. 모두들 가난했고 농사지어 놓아도 식민지 조선은 공출이라 하여 왜놈들이 식량을 수탈하여 갔기 때문에 생활이 참으로 참혹했다. 아침밥만 먹으면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은 들로 나가 일하고 그렇지 못하는 아녀자들과 유소년 소녀들은 산으로 가서 산나물을 채취하는 노역이 일상이었다. 나도 그들과 산으로 가서 산나물을 채취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식민지 조선백성은 살 수가 없었다. 보릿고개 때는 다 익지도 않은 보리(가을에 벼도 그렇게 덜 익은 것을 베어다가 찐쌀 그것이 올게쌀이다)를 베어다가 탈곡하여 쪄서 말려 가루를 만들어 얼굴이 비칠 만큼 멀겋게 죽을 쒀서 먹곤 했다. 제주에서는 보릿고개를 몰랐었는데 고향에 오니 그런 참상도 알게 되었다. 6월 말인가 7월 초순에 부모님들께서 제주에서 오셨다. 나의 남모르는 외로움도 사라졌다. 몇 개월 이산가족이었는데 상봉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부모 잃은 아이들의 아픔은 얼마나 클까를 생각해 봐도 감당이 되지 않는다. 고향에서 10월 하순까지 생활하는 동안 나는 말라리아에 걸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하도 낫지 않으니까 민간에서 전해오는 황당무계한 얘기 중에 환자에게 호된 창피를 주면 낫는다는 얘기를 들으시고, 심하게 앓아 날마다 오한으로 고생하게 되어 초췌할 대로 초췌한 나를 어느 날 이른 아침 어머니께서 깨우시더니 툇마루에 앉으라고 하셨다.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으셨는데 낌새가 이상하여 멈칫멈칫하니까 빨리 앉으라고 독촉하셨다. 앉자마자 잽싸게 툇마루 바로 밑으로 내려가시더니 나에게 큰절을 하시고는 재빨리 올라오셔서는 사정없이 나의 뺨을 때리시면서 “호로 자식 같으니라고 어디 어미에게 큰 절을 받느냐!”고 대단한 호통이셨다. 나는 날마다 저승 가는 불길한 꿈으로 잠에서 깨어날 때는 비에 흠뻑 젖은 수탉 꼴이 되는데 나는 그렇게 매 맞은 것이 분하여 또 한 번 울음보가 터졌다. 얼마나 울었었는지 지금도 고향에 가면 그 울음얘기를 할 때면 나의 얼굴은 붉어진다. 그러다가 10월 하순에 빛고을로 우리 가족이 이사를 오게 되었고 그 후로는 말라리아에 한 번도 걸린 일이 없다. 나는 광주대성초등학교에 편입을 하였고 졸업을 하게 되었다. 초등학교 졸업 후 많은 친구들은 중학교로 진학했으나 나는 가정형편으로 진학할 수 없었고 이문환(李文煥) 씨의 호남산소공업사에 취직하여 사환으로 사무실에서 칠 년간 근무했다. 그곳에서 근무한 지 일 년 뒤에 육 년간 야간중고등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때는 어려운 사람들이 지금보다 더 많아 나보다 나이 두세 살 많은 동급반 친구들이 있었다. 3. 셈으론 이룰 수 없는 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전남대학교 농과대학 농학과로 진학하던 때가 1955년 4월이었으니 내가 24살 되던 해이다. 그 나이면 남들은 대학도 졸업할 나이인데 나는 그때야 대학에 진학했으니 완행열차도 상당히 더디게 가는 차를 탄 셈이다. 그러나 내가 직장 생활을 하면서 조금씩 모아놓은 돈으로 학업을 계속할 수는 없었다. 대학 입학하고 첫 교양 국어 시간인데 정익섭(丁益燮) 교수께서 강의차 오셔서 칠판 앞에 서시더니 앞 시간에 강의하고 가신 교수께서 칠판에 쓰신 글자를 지우시면서 “이거 하나 지울 용사 없나?” 하고 혼잣말로 말씀하셨다. ‘그래, 저것을 내가 해야지.’하고 일 년 반 동안 수업이 끌날 때마다 내가 칠판을 깨끗이 청소했다. 그리고 칠판 밑에 떨어져 있는 분필 가루도 하루에 세 번 물걸레로 닦아 냈다. 처음에는 동료들이 교수에게 잘 보여 학점을 잘 받으려고 한다고 수군거리는 얄팍한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을 계속하니까 그런 입방아를 찧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대학 입학하여 3학기는 연속으로 다녔으나 그 후로는 한 학기 다니고 한 학기 휴학하곤 했다.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서였다. 어머니도 고생 많으셨다. 무등산에 가셔서 땔감도 해 오시고 남의 궂은일도 더러 맡아 해 주시곤 하셨다. 나는 의재 허백련 선생이 세우신 광주농업기술고등학교(현재 의재미술관 자리)에서 몇 시간 맡아 가르쳤으나 그곳에서는 나의 등록금만 해주기로 했기 때문에 야간에도 거기서 기숙하면서 학생들의 생활도 지도해 달라고 하였으나 어머니의 생계를 위해 나는 오후에는 내려와 조아라 여사가 어려운 청소년들의 중등과정 교육을 위해 설립한 호남여숙(湖南女塾)에서 일주일에 네 시간씩 맡곤 했다. 요즘 아르바이트생들 말을 빌리자면 나는 투 잡을 가졌던 셈이었지만 생활비와 학비를 충당하기에는 요원하기만 했다. 장학금을 어떤 학기에는 받을 때도 있었고 어느 종교단체에서 두 번 등록금 일부를 도와 주신 일도 있고 그분 자신도 어려운데 이태호(李泰鎬) 선배가 도와주신 일도 있다. 이 자리를 빌어 그분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이리하여 13학기 만에 대학 졸업장을 받고 어머니에게 그것을 보여드릴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러 내렸던 일이 기억난다. 내가 가난을 벗어나는 길은 배움밖에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대학을 다닐 때 아침을 먹고 나면 다음 끼니를 걱정해야 했고 이번 학기 등록금을 납부하고 나면 그날부터 다음 학기 납부금을 걱정해야 했던 때도 있었다. ‘내일 일을 오늘 걱정하지 말라.’는 말도 있으나 실제로는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어떤 때는 더러 굶는 날도 있었다. 먹기 싫어서 안 먹는 것과 먹을 것이 없어서 못 먹는 것과는 그 상황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도저히 이해를 못 할 것이다. 이때 나에게 절박한 것은 삶의 질이 아니라 생존 그 자체였음이 사실이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라는 사르트르의 말이 생각된다. 어떤 날은 어머니는 이웃에게 굶는다는 것을 보이지 않기 위해 솥에다 물을 붓고 군불을 때시기도 하셨는데 어머니는 더 큰 울음을 가슴으로 우셨을 것이다. 지금 나는 팔십 중반을 넘어 졸수(壽, 90)를 바라보는 나이지만 어머니를 들먹거릴 때면 눈물이 나도 모르게 주르륵 나오는 것은 어머니를 잘못 모신 불효의 아픔에서이다. 가난이 죄였다는 변명으로 갚을 수 없었으니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니는 업보이고 형벌로 남아 있어 그러는 것이리라. 삶이란 쉬운 것이 아닌 것만은 사실이다. 아픔 딛고 가슴에 조용히 간직되는 노래로 키워가야 하는 것이 나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난도 비단 가난’이란 말처럼 나는 가난하여도 몸가짐을 함부로 하지 않았다. 1958년 대학생 시절이다. 그 당시에는 빛고을 인근에 걸으면서 산책할 만한 곳이 없었다. 주말이면 젊은이들이 연인들과 쉽게 접할 수 있는 곳이 내가 다니는 대학과 지산동 딸기와 복숭아 재배를 하는 곳 정도였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월요일 등교해 보면 화장실에 들어갈 수 없을 만큼 배설물 측량을 제대로 못한 사건들이 비일비재했다. 그때는 수세식 화장실도 아니었다. 그래서 학생들과 캠퍼스 내 화장실 청소부터 하면서 농촌문제를 생각해 보고 싶었다. 그때는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국민의 80퍼센트가 약간 넘는 때였고 국민소득도 73달러 정도 밖에 되지 않는 때였다. 교내에 광고를 냈다. 학생들이 농대 대강당에 백여 명이 모여 들었고 모이게 된 동기를 말하고 우선 눈에 보이는 것부터 해결해 보자고 제의했다. 많은 얘기들이 나왔다. 그리고 모이게 되는 단체의 규칙인 회칙은 어떠느냐는 출발부터 정치적인 발언들이 쏟아졌다. 그때가 5월 29~30일이었다. 아무런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대학생이 화장실 청소라니 말이 되느냐고 윽박지르기도 했다. 아무리 보아도 결론이 나올 것 같지 않아서 나는 마지막 발언을 했다. “내일은 토요일입니다. 화장실 청소 하고 싶으신 분이 계시다면 내일 본관 앞 플라타너스 아래로 2시까지 나와 주시면 그분들과 함께 출발하겠습니다.” 하고 회의를 끝내었다. 그 이튿날 나는 서무과에서 청소도구를 빌려놓고 그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이 되어 나가 보았더니 김용혁, 김영용, 김안신, 오찬용, 장태규, 정구선 등 여섯 명이 나와 있어서 고맙다고 하고 본관에서 제일 가까운 곳부터 청소를 해 나갔다. 그때에는 화장실이 다섯 군데 있었다. 쓸고 닦고 물을 길러다가 문대고 대단한 노력이었다. 그리고 넘치는 인분을 퍼서 농장으로 몇 통 옮기는 일까지 하였다. 그렇게 해서 나 이외 여섯 학생들이 의기투합된 것이 밀알회의 출발점이 되었다. 가장 낮은 곳에 이르지 않고는 어떤 일도 할 수 없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일을 찾아가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할 일이라고 본 것이다. 그 후 해마다 신입회원들이 들어오면 그 자랑할 것도 없는 일이지만 반드시 인분 통에 인분을 퍼 담아 농장으로 옮겨 작물에 주는 관례를 수년간 이어 왔다(2018년은 밀알회 창립 60주년이 된다). 독실한 크리스천이신 김용식 교수를 지도교수로 모셨고 그분께서 ‘밀알회’라고 하면 어떻겠느냐고 하셔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농촌을 부강시킬 수 있을까를 고민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마을단위로 부강하지 않고서는 가난을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농촌 청소년 단체인 4H클럽 지도에 주말이면 분임조를 만들어 청소년 지도를 해나갔다. 전남 화순군 청풍면 한지리 2구를 지정 마을로 정하고 3년간 주말과 여름, 겨울 방학 때 자비로 거기 주재하면서 농촌을 부강시키기 위해 혼신을 다했었다. 영농개선, 생활개선, 4H클럽을 지도했다. 3년 뒤에 달라진 부분들이 많았다. 젊은 날에 이러한 것들에 도전하고 씨알들의 아픔을 같이할 수 있었다는 것은 밀알회원 누구 한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모든 회원들의 희생과 사랑으로 감당해 낸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일들이 박정희 군사 쿠데타 정권에서 했던 새마을운동보다 밀알회가 먼저 한 대사건으로 치부해 주는 사람들도 있음이 사실이다. 밀알회는 1968년부터 일반회가 조직되어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으나 주로 호남지역에 지회가 많다. 이외에도 우리나라에선 장기려 박사가 맨 먼저 시작했던 의료협동조합도 전남대학교 의과대학의 몇몇 교수들의 협조와 어느 사업체에서도 좋은 생각이라며 같이 결성하여 시작하였으나 얼마 후 국가에서 의료보험제도가 이루어져 우리는 포기하였고, 장학재단도 출발하였으나 학생들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고 그 외에도 몇 가지 첫 손가락 꼽을 일들을 시작하였지만 뜻대로 이룩한 것은 없다. 밀알협동조합만이 지금껏 지속해오는 사업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신용협동조합은 국제기구 산하 조직으로 들어가면서 밀알회에서 설립취지와는 다른 길로 가고 있다. 나는 회원들에게 책을 많이 읽기를 권장하였다. 초창기에는 매월 3천 쪽씩 읽기를 권장하였으나 공부도 해야 하기 때문에 얼마 후 2천 쪽씩 읽기로 했고 ‘양서 일백 권’을 선정해 놓고 읽어가도록 했다. 지금도 그때 그렇게 책을 읽도록 길 잡아 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더러 받는다. 그러나 지금의 밀알인들은 생명이라고도 할 독서를 전과 같이 하지 않는 것에 나는 서운할 때가 많고 불만이다. 밀알인이 읽어야 될 ‘양서 100선’에서 지금은 2008년에 ‘350선’으로 개정되어 있는데 전집류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 낱권으로는 5백 권이 넘는다. 이 무렵 나는 국민의 의무인 군 입대를 기피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생계를 내가 해결해야 되는 무거운 짐이 나의 몫이었다. 박정희 군사 쿠데타 정권의 정책은 군 기피자들을 단기간 입영시켜 군 복무필을 해주려는 정책이었던 것 같다. 국토건설단이란 이름으로…. 1965년 4월 15일 빛고을, 전남, 충북지역에서 사백여 명(충북 출신은 내가 속했던 건대에 십 퍼센트 미만, 경상도 어느 지역에서도 건설단이 우리와 같은 시기에 소집되어 복무했다)이 강원도 정선 예미(禮美)로 징집되어(5월에 정선읍 앞을 흐르는 조양강 건너편 언덕으로 부대를 옮겼다) 11월 말까지 복무했는데 모두 28~37세까지의 장정들이었으며 군 기피자로는 우리나라에서 어느 곳에도 취직을 할 수 없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라도 군 복무를 대신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거기에서 우리가 한 일은 날마다 지게(판자로 만든)를 지고 흙을 나르며 충북 제천에서 예미(충북선이 예미까지 철로가 건설되어 있었다)를 거쳐 정선으로 연결되는 철로를 설치하기 위한 기반 둑 쌓는 작업을 일요일을 제외하고 날마다 했다. 날마다 그런 중노동으로 손가락을 제대로 펼 수 없는 날로 이어졌다. 그렇게 육체노동을 해 본 일이 없던 건설단원들은 고통이 많았다. 우리는 스스로 ‘삽자루 병사’라고 했다. 내가 건설단에 가기 전 어머니의 생계문제를 그래도 그분이면 믿을 수 있을 것 같아 어느 정도 도움 또는 한 달에 한 번만이라도 어머니를 찾아 뵙고 위로의 말씀이라도 드려주셨으면 한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기대와는 사뭇 다른 답을 듣게 되었다. 양로원에 위탁하고 가라는 것이었다. 누구에게도 짐이 되지 않고 자네도 마음의 빚을 지지 않게 된다고 하면서 말이다. 내가 그분을 찾아갔던 것은 어머니의 생활 전부를 맡아서 가족처럼 부양해 달라는 것이 아니고 한 달에 한 번씩이라도 찾아봐 달라는 것이었다. 그분의 말씀은 나에겐 잔인하게 들렸다. 비수처럼 말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사리에 맞는 말일지도 모르지만 세상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세상에는 말씀은 부드럽고 고상하나 행동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그날도 배운 셈이다. 세파는 가진 것 없는 자들에게는 더없이 차갑기만 했다. 마더 테레사는 “눈에 보이는 사람도 사랑 못 하면서 어떻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느냐?”고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놀라운 질문을 하였다. 마하트마 간디는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신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의 계신 것을 실제로 깨닫기를 바란다면 에고(Ego)를 내쫓아 그분을 위한 자리(Room)을 만들어야 한다.”고 하였다. 사심 없는 행동은 아마도 지도자를 경배하는 것과 같은 마음이며 낮은 자리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가슴으로 대하는 일이 아닐까? 내가 건설단에 가 있는 동안 어머니를 큰누님(빛고을 서동에서 살고 계셨다)이 어느 정도 도와주고 계셨다. 누님도 넉넉지 못한데 말이다. 친척들 모두 가난했다. 이웃에서도 도와 주셨다고 하셨다. 특히 이태호(李泰鎬) 선배도 남을 도울 만큼 여유가 전혀 없으신 분인데 아마도 그분은 또 다른 분들에게 나의 형편을 말씀드리고 모금형식을 취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태권, 최태옥 두 아우가 보탠 것 같고 그 밖에 밀알 형제들이 도왔던 것으로 알고 있다.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가르침을 지켜서인지 지금까지 내색 한 번 하신 일이 없다. 그분들께도 감사를 드린다. 그런 가능성을 믿고 나는 징집에 응했다. 나 자신도 육체노동을 심하게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건설단 생활이 고역인 건 숨길 수 없다. 여기서 어머니 걱정을 해 봐야 아무런 해결책이 없는데 말이다. 이왕 이렇게 된 이상 날마다 접하는 그 노동을 게을리하지 않기로 했다. 잔꾀를 안 부렸다는 말이다. 마음을 다해 국가에 속죄하는 마음으로 4백여 명의 단원들 중 첫째, 둘째갈 만큼 노역도 열심히 했다. ‘모든 노동은 사람의 꿈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던 나였기 때문이다. 그 강의를 듣던 그 젊은 친구들과 지극히 높으신 이가 내 곁에서나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으리라 믿고 있다. 인불지이불온(人不知而不-사람이 알아주지 않아도 원망하지 않는다)이라는 『논어』 첫머리 끝부분에 있는 말을 행동 규범으로 어느 때나 나와 함께한다고나 할까! 알아주지 않아도 원망할 필요도, 움츠릴 필요도 없이 묵묵히 내가 갈 길을 갈 뿐이다. 한순간의 판단, 칠정의 어떤 것이 억제할 수 없는 발로로 윤리적, 도덕적으로 지탄을 받게 되는 일들이 있다. 나 자신도 알게 모르게 그런 잘못에 빠지지 않도록 나의 기도는 잠자리에 들기 전과 아침에 일어나면 이어지고 있다. 나는 내가 처한 역경을 칼 야스퍼스의 『비극론』의 명제 “승리는 살아남은 자의 것이 아니라 굴복한 자의 마음 안에 있다.”는 말에서 어려움 속에서도 위안을 받으며 살고 있다. 이 『비극론』은 최태옥 아우가 내가 건설단에서 틈을 내어 책을 읽으려 하는데 나의 책들을 어머니께 말씀드려 한두 권씩 매월 보내 달라고 부탁했더니 내 책들과 함께 보내 준 책이다. 칠흑 같은 밤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어찌 새벽을 맞을 수 있으랴? 건설단에는 펄펄한 사내들만 있으니 어린애 같은 치희(稚戱)도 종종 일어나곤 했다. 국토건설단에서의 생활을 어떻게 뜻있게 보내기 위해 짬을 최대한 유용하게 이용해 보기로 했다. 첫째 번 책 읽기, 둘째 번 야외탐방을 하기로 했다. 집에서 보내온 책들은 『W. T. 자서전』, 칼 야스퍼스의 『비극론』, 플라톤의 『향연』,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과 『싯다르타』, 카를 힐티의 『행복론』과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 쇠렌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과 『이것이냐 저것이냐』,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太郞)의 『선의 연구(善의 硏究)』,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구안록(求安錄)』,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의 『사선을 넘어』, 쿠라타 하쿠조오(倉田百三)의 『사랑과 인식의 출발』, 유달영의 『인생노트』와 『새 역사를 위하여』, 함석헌의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이 책은 내가 건설단에 있을 때 개정 증보판 『뜻으로 본 한국역사』로 나왔다)를 저녁 먹고 자기 전 몇 시간과 쉬는 날에 세탁물 빨래하고 난 뒤에는 거의 책을 읽었다. 우리 내무반이 삼십이 명이었는데 충북 출신이 여섯 사람이었고 그 나머지는 모두 빛고을에 생활기반을 둔 사람들이었다. 책을 읽고 있으면 고되지 않느냐고 물으며 “이런 환경에서 책 읽는 여유까지 갖는 것 보면 姜형의 정신력이 대단하다.”고 말하는 동료들도 더러 있었으며 몇 친구는 가끔 책을 빌려달라고 하여 읽곤 했다. 또 한 친구(충북 출신)는 이제는 이름마저 잊었는데 서울 S대 법학과 출신인 그가 하는 말 “빛고을 출신들이 독서를 많이 하더라.”고 했다. 또 하나 고마웠던 일은 전남대학교 의과대학생 이태권이 보내 주는 의약품이었다. 그의 부친이 의사였기 때문에(의원을 내고 있었다) 이곳에서 절대 부족한 것이 의약품이라고 편지를 보냈더니 소화제, 지사제, 소염제, 간단한 외상 응급처치용 의약품, 붕대, 소독약, 곤충기피제 등을 보내주어서 내부반 동료들과 유용하게 사용했다. 그에게 이 자리를 빌어 고마움을 전한다. 또 어떤 쉬는 날에는 인근 산으로 가서 가을에 싸리버섯과 송이도 따서 건조시켜 어머니께 보내드린 일도 있었다. 그렇게 들과 숲으로 나갈 때에 생물의 다양성에 놀라기만 했다. 그 많은 곤충류, 나비와 나방류, 매미충류, 벌류, 많은 야생화, 수수꽃다리, 가을철의 들국화들 그 경이로움이 어제인 듯 선하다. 이러한 생활도 십일월 말에 끝나고 빛고을로 돌아왔다. 그런데 제대증은 그 다음 해에 나왔는데 1963년 7월 1일 입대, 1963년 7월 1일 제대로 되어 있다. 어쨌든 이제는 군 기피자라는 누명을 벗게 되었고 직장을 구할 수 있는 특권을 받았으니 기쁘다. 여기에 나의 졸시 「아픔과 고요」를 첨부한다. 아픔과 고요 그것은 불가마에서 나온 질그릇이거나 여인의 해산의 진통 뒤의 고요이다 흙을 빚는 도공이 혼을 집어넣는 긴 침묵― 달빛 아래 박꽃 찾은 박각시의 입맞춤도 영원으로 흐르고 여름 밤바다 야광충들의 현란한 빛의 축제도 아픔인데 나를 찾아가는 길은 너무나 깊은 아픔의 고요이다 군 복무필이라는 임시 증명을 갖고 1963년 나는 숭의실업고등학교 농과 교사로 채용되어 교사로서 십육 년을 근무했다. 학교 공부는 우리가 사회에 나가서 시민으로서 생활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지식을 제공하는 것이니 우리가 눈만 뜨면 세계는 광활하고 활동무대도 넓다고 했다. 그리고 감수성이 강한 고등학생들에게 독서를 많이 하라고 권장했다. 그리고 라빈드라나드 타고르의 『기탄잘리』, 『초승달』,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 한용운의 『님의 침묵』, 함석헌의 『수평선 넘어』에서 골라 수업 시작하기보다 훨씬 빠른 시간에 내가 담임으로 있는 반의 칠판에 한 수씩 적어 놓곤 했었다. 그 밖에도 다른 시인들의 시들도 적어 놓곤 했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학생 밀알회 회원들을 대상으로 매주 화요일 오후 수업 끝난 후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 강독을 한 점이다. 스무 명 안팎의 학생들과 세상 사는 이야기를 곁들여서 해 나갔는데 농업과 생물 교사가 무모하다면 사정없이 무모한 짓이었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그때 잠자는 젊은이들(학생 그들 자신들)을 깨워주시고 넓은 세계를 보도록 해 준 점에 고맙다는 인사를 종종 받는다. 많은 독서를 하도록 권장한 것도 잊지 않았었다. 내가 교육계에서 사십일 년 육 개월 근무했었는데 그중 중등계에서 십육 년을 보냈지만 감수성이 강한 청소년기의 학생들을 지도하던 그 고등학교에서 순수한 그들과의 만났던 시절이 제일 보람이 있었고 행복했었다. 내가 교류했던 분 중에서 잊을 수 없는 분은 함석헌 선생이다. 그분이 빛고을에 오시면 나는 전셋집에 살면서도 두 번이나 집에서 모셨었고 그중 한 번은 밀알회 수양회 오셨을 때였다. 허백련 화백, 정상호 학장, 원경선 선생, 백영흠 목사, 유달령 교수, 지명관 교수, 노평구 선생, 조용기 우암학원 학원장, 야생화 사진작가 김정명 선생과 교류하며 지냈었고 현재도 생존하신 분들과는 교류를 하고 있으며, 내가 10대에 박석현 선생이 주관한 성경공부에 참여하여 기독교에 입문하게 된 것 또한 잊을 수 없다. 1979년 2월 말에 그 고등학교에 사표를 제출하고 서강전문대학 식품영양과로 자리를 옮겼다. 거기에서 이십오 년 육 개월 있었는데 십사 년은 학장으로 재임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명석하고 예의바른 참모들이 나를 사랑으로 도와주었고 동료 교수들도 형제처럼 도와주었기 때문에 가능했었다. 이 자리를 빌어 그 모든 분들에게 고마움 전한다. 그렇게 대가 없이 근무하다가 2004년 8월 말에 명예로운 정년퇴임을 했다. 그때 나의 나이 일흔세 살이었다. 여기에 2014년 2월 8일에 쓴 「내가 살아온 3만일」이란 시를 첨부한다(1만 일은 27년 4개월 18일째). 내가 살아온 3만일 넘어지고 쓰러져도 한뉘를 살아간다는 것은 사랑하지 않고는 건너지 못하는 아득한 길 우주는 가득 찬 것뿐인데 봄 속에 가을을 보려는 눈은 흐르는 강물 위의 물비늘처럼 가슴을 저미는 아픔이나 가슴을 뭉클케 하는 희열도 땅에서 하늘에 이르기까지 세월을 숨차게 걸어오면서 울어 새는 밤도 많았지요 생광스럽지 않은 삶의 존재이어도 감추려 해도 숨기지 못하는 것은 얼굴에 피어나는 웃음꽃보다 영혼 가득히 훈훈한 웃음꽃인 것을 굴곡 많은 세상이어도 갈애(渴愛) 내려놓고 길 안내자의 소리 들으며 내 삶의 하늘 우러러 홀로 지고 있는 것이 사랑의 빚인데 사공은 항구로 돌아오고 있는데 오늘은 이렇게 끙끙 앓고 눕게 되니 죽음이 멀지 않은 곳에 있음을 보는 눈 열렸는데 오늘도 해는 서산을 넘고 있죠 4. 서은 문병란 교수와 만남 2010년 내가 일흔아홉에 지인의 권유로 금호평생교육원 문예창작반에 등록하게 된 것이 내가 문학공부를 시작하게 되었고 서은 선생을 만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나는 비교적 책을 접할 수 있는 시간을 많이 갖는 편이었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육계에서 사십여 성상을 보내었으니 문학과 단절하고 생활한 것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문창반에서 서정시인이며 민족시인이신 서은 선생과 만났지만 그 전에 이미 그분의 시집 『땅의 戀歌』, 『매화연정』, 『내게 길을 묻는 사랑이여』 등을 읽었었다. 온화하면서도 날카로운 저항정신이 배어 나오는 강직함이 그를 감싸고 있는 인상이었다. 내가 살아온 굴곡 많은 세상에서 부딪치며 살아온 경험들을 나의 사상으로 여과하여 토해내어야 하는 것이, 그리하여 아름다운 노래가 되고 시대를 품는 노래로도 나올 수 있을 것이 아닐까? 나는 조용히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생활인이며 공동체에서 협동과 더불어 사는 것을 더 사랑한다. 이제는 나에게 젊은 날의 예리한 촉기도 민첩함도 너무 무디어졌고 기억력도 어느 정도는 쇠락해졌음이 사실이다. 어떤 생각이 떠오르는데 적절한 언어가 맴돌 뿐 떠오르지 않을 때가 많은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알려져야 하고 그것이 노래로 불러져야 하지 아니할까? 내 안에 있는 생명의 소리가 언어 또는 문자라는 매체를 통해 나 아닌 남에게 그것이 문학으로 탄생되어지고 공명을 일으킬 때 나의 문학이 되는 것이리라. 서은 선생이 2014년 1월 11일에 검토하셨다는 날짜가 적힌 내 졸시 「동백꽃」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시 쓰시랴, 시집 내시랴, 회장 노릇 하시랴 지난해 수고 많았습니다. 겨울동백 다수운 베란다에서 빈객이 되어 대접받고 점잖은 어른과 수작도 나누고 참으로 귀한 겨울 志士가 아닌가. 삶의 여가에 인생을 관조하는 여유로운 그 모습에서 이제 시가 선비의 내면에 스며들어 술처럼 익어가는 단계에서 그 훈향이 넘쳐납니다. 이렇게 인생사 곱게 무늬 놓고 시정 속에서 선비의 마음 담아 사람을 즐겁게 하는군요(이하 생략).” 또 서은 선생이 작고하시기 육십삼일 전에 나의 꽃 원고 가제(假題) 『내가 길러 봤던 꽃들』 일부를 보시고 선생의 촌평은 나의 문학의 지평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일 것 같아 여기에 첨부한다. “초당(草堂) 강춘기(姜椿基) 선생의 평생 노작 그가 사랑한 취미생활(전공연구라 할 만한)을 정리된 화훼 원고 본보기로 보내주신 것(우선 정리된 초고 전체의 십분의 일 정도)을 일독했습니다. 취미를 넘어 학술적인 연구를 겸하고 있지만 취미나 교양으로서 아무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글입니다. 저자는 자연과학(실용과학)을 공부한 사람이지만 인문학, 사회과학 분야 등 폭넓게 독서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듯 문학적 수상록, 수필로서도 출중한 글일 뿐만 아니라 때로는 동서양의 고전을 인용한 대목들에서는 그의 해박한 지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더구나 천연색 사진을 곁들인다면 그 어느 식물도감보다 매력을 풍겨 평범한 화훼애호가들에게도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그런 수준의 글로서 매우 획기적인 글입니다. 장차 제3시집과 함께 자녀들이나 출판사의 협력을 얻어 세상에 나온다면 큰 성과가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 2000년 넘어 정년 이후 정붙일 곳 없을 때 만학도로서 여러분을 모시고 시와 인생에 대한 생각을 교류함에 초당 선생님과의 선연(善然)은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이하 생략)”라고 적혀 있다. 아래의 시는 「동백꽃」이란 나의 졸시이다. 동백꽃 내일이 소한인데 오늘 베란다에서 키우는 동백꽃이 새벽에 꽃단장으로 붉은 꽃잎과 노란 꽃술로 꿈을 꾸는 아기의 입술 오물거림인 양 녹색치마 사이로 얼굴 드러내었네 머물지 못하는 겨울인들 어떠랴 소라고둥껍질은 네 노래를 듣고 조약돌 하나는 네 미소를 보노니 얼었다 풀리는 땅 갈라지는 소리를 너는 들으면서 동박새를 그리는가 그리움 가득 입술 깨무는 너 앞에서 벗님과 나는 소주라도 한 잔 나누리라 고뇌의 빈자리 털어내고 너와 같이 웃으리라 어느 날 미련 없이 떠나갈 꽃송이들이 뚝뚝 떨어져 나갈 아픔을 보며 외로워도 네가 가버린 자리에서 뛰어오는 봄을 맞으리라 서은 선생은 2015년 9월에 작고하셨고 지금 서은문창반에는 그분의 제자이신 허형만 교수가 강의를 맡고 계신다. 이렇게 문창반에서 공부한 시간이 이제 겨우 여덟 해일 뿐인데 일본 어느 시인들의 동인지 『北國帶』2017년 6월호(통권 227호) 19~20쪽에 졸시 「여름밤에」가 주오대학(中央大學)의 히로오카 모리네(橫岡守穗) 교수 번역으로 게재되었으며, 같은 시를 그 동인지의 후지와라 요시꼬(藤原吉子) 시인이 번역한 것도 같이 게재되어 있다. 외국어(여기서는 한국어)를 번역하는 데 번역자에 따라서 저자의 원문의 뜻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낱말을 취사선택하는 데 한두 개는 달라질 수 있다는 그들의 고뇌도 엿볼 수 있었다. 5. 나가며 문학관에서 멀리 이탈한 글이 되어 버렸다. 자랑할 것도 없는 초라한 삶뿐인 내가 글을 쓰고 보니 자서전이 되고 말았으니 참으로 내가 읽어 봐도 가소롭기만 하고 기절초풍할 노릇이다. 결론은 내려야겠는데 여기에 터키 나짐 히크메트(Nazim Hikmet, 1902~1963)의 시 중 내가 좋아하는 「진정한 여행」을 첨부하며 끝내려고 한다.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불멸의 춤은 아직 추어지지 않았으며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 나짐 히크메트, 「진정한 여행」 전문 나의 항해는 끝나지 않았고, 나의 노래는 다 불려지지 않았으며, 내가 문학 수업을 받는 것 또한 끝나지 않은 진행형이다. | 강춘기 시인 대표작품 | 꽃씨를 보내며 외 4편 여보게 꽃 좋아하는 사람아 계절 따라 나의 꽃밭에서 받은 빗질하듯 손질하여 보내는 꽃씨 살아 있는 모든 것과 멀리 있어도 함께하는 창조의 새벽꿈을 품고 있느니 마음길 가는 길에 심어보시게 꽃씨 심어 싹트고 꽃 피거든 그 속에 자네 얼굴 찾아보고 내 얼굴도 찾아보시게 멀리 있어 자주 못 만나는 정을 이어가는 흥주머니 터지는 소리 듣고 그리움만 더해가는 사랑으로 우주의 큰 바람소리 넘치는 것을 시공을 넘나드는 씨앗 발걸음이 마음길보다 더디더라도 꽃씨 속에 그 마음 품어 내리니 작디작은 에덴동산 가꾸어보시게 창조의 새벽꿈 간직하고 있는 작은 꽃씨 꽃 피면 못 보던 한세상 눈부시게 보게 되리니 자네의 너그러운 마음도 현란한 꽃밭 속에 있으리 포도문양각청자항아리 도공은 묵묵히 물레를 돌려가며 혼을 집어넣어 빚어낸 항아리 자식을 기르듯 지극한 마음 담아 사랑으로 기다리고 또 기다린 뒤에 조각칼로 긁어내고 포도를 새기고 붙인 것은 수백 번 손자국을 내고서 이룩한 마고성(麻姑城)* 지유천(地乳泉)* 곁에 있던 포도밭인가 유약을 바르고 또 기다린 뒤에 천 수백 도의 불꽃에 품어 내고 나면 신비한 웃음으로 도공이 품어낸 꿈이 간절한 인고는 결 고운 아름다움으로 포도원의 향기보다 더 넘치는 어질기만 한 푸른빛… 무념인 듯 고운 곡선은 우주로 흐르고 포도원엔 청포도가 저리 풍년인데 저 포도 수확은 흰 사슴 타고 올 마고할머니이려나 꿈이 사랑으로 나타나면 아픔은 어디로 가고 우유빛 닮았는가 했더니 푸른빛이 배어나오는 설산의 만년설이 햇빛에 푸른색 내듯 우주가 품어내는 신비한 빛을 청자항아리가 품어내고 있다 *마고성(麻姑城) : 성경의 창조설에서 에덴동산이 있듯 동양에서 인류시원에 관한 최초의 낙원동산 이라고 전하는 곳이다. *지유천(地乳泉) : 최초의 마고성 사람들은 땅에서 솟는 젖을 양식으로 삼고 살았다고 한다. 식물에도 눈이 있나 봅니다 언제나 식물들은 그들만이 알아보는 밝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내가 식물들 앞으로 다가서면 빛을 가리지 말라고 속삭이는데 잎 속에는 디오게네스가 숨어 있나 봅니다 숨바꼭질을 하는 식물의 뿌리는 어느 때나 해를 피해 숨어버리고 폭풍우에 넘어진 잡초의 줄기는 해를 향해 일어서는 눈을 가졌습니다 “돌은 움직이고, 나무는 이야기한다고 알려져 있다”*고 한 셰익스피어의 영감이 번득이는 말이 있어도 식물의 잎 속에는 실험실의 분광장치가 있는지 적절한 파장의 빛들을 알맞게 골라 잎으로도 줄기로도 꽃으로도 키워내는 신비스러운 힘을 가졌답니다 우리의 머리 위에 수억만 년 해돋이와 해넘이를 보며 빛나는 계절이 오고 가는 것을 침묵으로 지켜낸 계절의 꽃들과 푸르름을 선사해 주는 것도 우리가 볼 수 없는 식물이 갖고 있는 경이로운 눈 덕분이랍니다 *돌은 움직이고, 나무는 이야기한다고 알려져 있다 : 셰익스피어의 『맥베스』 3막 4장. 바늘귀 천상의 소리를 들으려는 귀인가 세상의 크고 작은 일을 보려는 눈인가 정화수라도 마시려는 입인가 모든 것을 보듬는 겸손한 문인가 귀 하나로 여러 일을 해내는 너의 영특함이여 네 귀에 실과 동행하면 새색시 새신랑의 금침(衾枕)도 되고 크고 작은 옷들과 구두도 만들고 가득 찬 쌀자루를 꿰매기도 하는 네게는 일방통행이라는 것 없네 길 안내자의 말씀 “하늘나라 들어가기가 바늘구멍에 낙타가 들어가기보다 어렵다”고 하셨지 비우라고 낮아지라고 맑고 깨끗해지라고 비움 낮아짐 맑고 깨끗함 삼 형제는 그물에 바람이 걸리지 않듯 유유히 바늘귀를 빠져 나가네 완두콩밭에 김을 매며 바람이 불어도 어떠랴 햇살은 산자락 밭에 가득한데 저것 봐, 산에는 진달래꽃 불붙고 김매는 내 손이 왜 이리 무딘가 직박구리 숲 사이로 짝 찾아 날고 멀리서 장끼소리 들려오니 팔십 넘은 내 가슴이 왜 이러나 내 눈은 푸른 하늘로만 날고 있으니 그곳엔 고운 님 계시오리니 사랑이라 부르지 않아도 사랑인 것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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