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과 소통을 위한 말과 글 교육> (현병호, 민들레 7-8월호)
박종호 선생님이 보내주신 글인데
우리 전북 글쓰기회에서도 같이 읽고 이야기 나눠보면 좋겠습니다.
-글쓰기교육
-우리글 바로쓰기
에 대해서 자기 생각을 밝히면서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오덕 선생님 생각을 직접 겨냥하고 있는데
비판의 근거를 따져 보았으면 합니다.
현병호 씨는 대안교육 잡지 <민들레>를 내는 분이고,
전에 보리출판사 편집부에서 일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권정생 선생님 장례식에도 참여했고, 이오덕 선생님을 이해한다는 말을
한 적도 있다고 해요...
표현과 소통을 위한 말과 글 교육
현병호 nol999@naver.com
소통을 위한 글쓰기
미래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능력 가운데 하나가 의사소통 능력일 것이라고 말한다. 사실 이 능력은 언제나 중요한 능력이었다. 어차피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야 하는 존재이고, 가까운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면 의사소통 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일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저마다 세상과 소통하는 한 방식이다. 그러니 생활과 일의 영역에서 소통을 잘 하는 것이야말로 잘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통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말과 글, 그림, 음악…그중에서 가장 일반적인 것이 말이고 그 다음이 글이라고 할 수 있다.(표정과 몸짓 같이 직접적이고 원초적인 소통 방식도 여전히 중요하지만, 여기서는 일단 논외로 하자.) 말은 특별히 배우지 않아도 누구나 하지만 글은 좀더 면밀한 훈련과정을 거쳐야 한다. 물론 아나운서나 정치인 같이 말로 먹고 사는 사람들의 경우는 말하기 훈련과정도 힘들여 거치지만, 보통 사람들의 경우 모국어로 말하기가 힘들어 애를 먹는 경우는 별로 없다.
말을 조리 있게 잘 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글을 조리 있게 쓰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더 어려워한다. 하버드대 졸업생 가운데 사회적으로 성공했다는 사람들에게 무엇이 가장 도움이 되었는지 물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생각을 글로써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능력이었다고 대답했다 한다. 동양이나 서양, 옛날이나 지금이나 글쓰기 능력은 세상살이에 매우 중요한 것임에 틀림없다. 과거시험을 보던 시절에도 그러했고, 인터넷 시대인 오늘날에도 그렇다.
어쩌면 근대화 과정이었던 지난 몇 십 년보다 앞으로 글쓰기 능력은 더 중요해질 가능성이 높다. 근대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능력은 자기 생각을 피력하는 것보다 명령대로 움직이고 주어진 과제를 군말 없이 잘 해내는 능력이었으니까. 창의성이 강조되면서 논술의 중요성이 따라서 부각되는 것은 시대적 흐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것을 입시와 연관시키다보니 부작용이 생겨나고 오히려 안하느니만 못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 지금 우리 실정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일터에서 글쓰기 능력은 매우 중요한 덕목이다. 사무직이든 기술직이든 글쓰기 능력은 갈수록 더 중요해지고 있다. 프리젠테이션을 잘 하기 위해서도 문장력이 있어야 한다. 사실상 사무직이 하는 일의 절반은 글쓰는 일이라는 통계가 나와 있다. 기획서, 보고서, 평가서 같은 문서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또 읽어야 한다. 인터넷 시대가 되면서 엔지니어들도 업무와 관련해서 글을 써야 하는 일이 갈수록 늘고 있다. 이전에는 직접 보고할 것을 이제는 컴퓨터 상에서 서면 보고를 하는 추세이다. 대기업에서는 엔지니어들을 대상으로 글쓰기 교육을 하기도 한다.
글쓰기는 다양한 의미를 띠지만, 간단히 말해 글이라는 매체를 통해 소통을 시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기쓰기도 사실상 자기 자신과 소통하기라고 볼 수 있다. 치유적 글쓰기의 한 형태인 셈이다. 이오덕 선생님이 주창한, 글짓기가 아닌 글쓰기도 그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자기표현에 충실한 글쓰기이다. 거기서 세상으로 한 발 내딛은 글쓰기, 다른 사람과 소통을 목적으로 하는 글쓰기는 굳이 이름 붙인다면 공공적 글쓰기라고 할 수 있겠다. 논술의 영역도 이 영역에 속한다.
지난 20여 년 동안 이오덕 선생님과 글쓰기연구회가 중심이 되어 ‘글짓기’ 교육의 문제를 드러내고, 그 대안으로 살아 있는 ‘글쓰기’ 교육을 널리 퍼트렸다. 삶과 동떨어진, 머리로 지어낸 글짓기가 아닌, 자기 삶에서 우러나온 느낌과 생각을 표현하는 글쓰기의 중요성에 대해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오늘날 많은 학교와 학교 밖에서도 글쓰기 교육을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러나 자기표현에 강조점을 두면서 공공적인 소통을 위한 글쓰기로는 잘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이는 아이들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통로가 거의 막혀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고전적인 통로가 00주최 백일장이나 일부 학교에서 만드는 <교지> 같은 것들인데, 공통점은 그 글을 읽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소통을 위한 글쓰기가 아니라 그저 자기표현에 그치는 글쓰기인 셈이다. 이제는 인터넷이라는 열린 공간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는 아이들이 많이 있지만, 대개는 댓글 수준의 즉흥적인 글쓰기(내뱉기)에 지나지 않는다. 인터넷의 익명성 때문에 자기 글에 책임지는 글쓰기를 기대하기가 어렵다.
공공적 글쓰기는 무엇보다 책임을 담보로 한 글쓰기라고 할 수 있다. 최근 노컷 같은 인터넷 매체와 인디고서원에서 펴내는 청소년 잡지『인디고잉』을 통해 청소년들의 공공적 글쓰기가 시도되고 있지만, 그 마당은 아주 좁다. 한편 대학입시에서 논술이 강조되면서 논술 글쓰기가 학원을 중심으로 급속히 확산되고 있지만, 입시 논술은 엄밀히 말해 소통을 목적으로 하는 공공적 글쓰기가 아니라 ‘점수 따기’ 글쓰기라고 할 수 있다.
글쓰기는 생각쓰기라는 말도 있지만,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자기 생각을 할 줄 알아야 한다. 단순한 사실이나 남의 생각을 전하는 글도 쓸 수 있지만, 이는 그다지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가능한 일이다. 현상과 맥락(context)을 이해하고 분석하여 자기 이야기(text)를 생산해내고, 또 그것을 쉽게 전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제대로 된 공공적 글쓰기를 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공공적 글쓰기는 자기표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읽는 사람에게 뭔가 도움이 되는 글을 쓰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글로써 뭔가를 나누고자 하는 사람들(예상 독자)과 ‘소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찾아오는 사람이 길을 쉽게 찾도록 약도를 그려주는 것과 같다. 약도에 지나치게 친절하게 많은 정보를 담아도 오히려 헷갈리게 만들고, 너무 간략해도 전달이 힘들다. 찾는 사람 입장에서 설명할 줄 아는 능력이 필요하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공공적 글쓰기는 무엇보다 읽는 사람 입장에서 쓰는 글이다.
이런 능력은 논술 입시 교육으로 길러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는 다른 사람 입장에 설 줄 아는 자세를 기르는 것이기도 하고,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를 통찰하면서, 그 사람들과 소통할 줄 아는 능력이기도 하다. 글쓰기 교육은 곧 소통 능력을 기르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자기와의 소통이든 다른 사람과의 소통이든 글은 탁월한 소통수단이 될 수 있다.
우리글 바로 쓰기, 다시 보기
글로써 소통을 잘 하자면 무엇보다 글을 읽기 쉽게 써야 한다. 먼저 무엇을 전하고자 하는지 자신의 생각이 분명해야 하고, 그것을 쉽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말하듯 쓰는 글이 좋은 글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말하듯 쓴다’는 것의 의미를 좀더 깊이 고찰할 필요가 있다. 언어와 문자가 일치한다 해서 글이 꼭 입말과 일치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사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쓰는 낱말은 전체 어휘의 몇십분의 일밖에 되지 않는다. 그 낱말만으로 글을 써야 한다면 표현에 엄청난 제약이 따를 것이다. 글에 따라서는 낱말을 조합하는 형식도 말과 다를 수 있다.
언어의 문제와 문체의 문제는 별개로 봐야 한다. 생활글이나 수필이 아닌 논리적인 글의 문체는 문어체가 더 적절한 경우가 많고 글마다 문체가 다를 수도 있다. 글은 말과 달리 억양이나 목소리의 느낌을 살릴 수 없기 때문에 그 나름으로 표현기법을 발달시킨 것이 바로 문체다. 말투와 음성에 저마다의 색깔이 있듯이 글도 쓰는 사람에 따라 또 그 내용에 따라 저마다 다른 형식과 색깔을 갖고 있다.
이오덕 선생님이나 이호철 선생님이 강조한 살아 있는 글쓰기의 기본 원칙에는 십분 동의하지만 그 한계도 있다고 본다. 그중 하나가 문체를 살리지 못한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글쓰기 연구회 회원들이 쓴 글들을 보면 비슷비슷한 느낌이 든다. 그중에 문체의 개성이 드러나는 글도 있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또 다른 획일성의 위험이 느껴진다. 문인들이 글쓰기연구회에 들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함석헌 선생의 글이나 김훈 선생의 글은 입말체가 아니지만 놀라운 힘과 긴장미를 지니고 있다. 말과 일치된 문자로 글을 쓰더라도 글은 말과 달리 그 고유한 형식을 가질 수 있고, 좋은 글은 그래야 한다고 본다. 글을 읽기 쉽게 써야 한다거나 글말보다 입말을 우선시하는 관점은 백번 옳지만, 형식도 내용도 못지않게 중요할 수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메시지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음식도 담긴 그릇에 따라 맛이 다르게 느껴지듯이 메시지를 전하는 형식에 따라 메시지가 달리 전달될 수 있게 때문이다. 사실 모든 문학은 형식의 산물이 아닌가. 어떤 의미에서는 형식이 내용을 결정짓는다고 봐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삶에서 우러난 글이라고 다 좋은 글이 되는 것은 아니다. 형식이 받쳐주지 않을 때 글은 그저 글자의 조합에 지나지 않거나 밋밋한 글이 되고 만다.1) 그리고 관념에 기초한 글이라고 해서 다 나쁜 글도 아니다. 관념이 아닌 삶에 뿌리를 둔 글을 써야 한다는 말이 도그마가 되면 그것도 위험하다. 관념에 기초한 글도 삶을 통찰하는 힘을 가질 수 있고, 철학서를 비롯한 많은 책들이 그렇다. 어설픈 관념이 아니라 삶과 우주의 비밀을 꿰뚫는 관념은 입말체로 표현하기에 한계가 있다. 일상적으로 주고받는 말이 갖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문체의 문제와 별도로 또 하나 짚고 넘어갈 문제가 있다. 우리말 문제이다. 되도록 한자말을 쓰지 말고 우리말을 살려 쓰자는 주장은 이념이나 실제에서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어 이제 대부분의 신문이 한글 전용에 가로 쓰기를 하기에 이르렀다. 신문 조판에서 한글보다 한자가 더 대접받던 시절이 불과 이십여 년 전이다. 한때 한자 교육까지 폐지되었다가 최근에 다시 부활하긴 했지만, 우리말과 글로써 의사 전달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데 대해서는 이제 이론의 여지가 없는 듯하다. 그런데 우리말과 글의 한계를 어디까지 볼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이론이 분분하다. 이오덕 선생님이 우리말과 글을 살리는 데 기여한 공로는 누구도 부정하기 어렵지만, 너무 우리말과 글의 순수성에 집착한 나머지 지나친 면도 없지 않다고 본다.
이오덕 선생님이 ‘우리글 잘못 쓰기’의 대표 사례로 든 것 가운데 가장 흔히 눈에 띄는 것이 ‘~에 있어(서)’ 라는 표현과 ‘적(的)’자의 남용이다. 사실 일본말 를 그래도 우리말로 옮긴 ‘~에 있어서(서)’라는 표현은 전혀 쓰지 않아도 뜻 전달에 지장이 없다. 오히려 문장이 더 간결하고 매끄러워진다. 하지만 적(的)자를 아주 안 쓰기는 매우 어렵다. 적 자를 쓰지 않고서는 뜻 전달이 애매해지거나 장황해져서 곤란할 경우가 많다. 이오덕 선생님의 ‘우리글 바로 쓰기’ 원칙을 따르는 이들 가운데는 ‘적’ 자를 전혀 쓰지 않고 말하고 글쓰는 이들이 있고, 대안학교 가운데도 그렇게 아이들을 가르치는 학교들이 있다. 충주의 이오덕학교와 과천의 맑은샘학교가 그런데, 이에 대해서는 공론화가 필요하다고 본다.2)
언어 교육은 교육에서 본질적인 영역이고, 학생들의 성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신중한 연구 검토가 필요하다. 언어가 사고과정을 결정짓는다는 것이 학계의 공통된 연구 결과이다. ‘구체적으로’라는 표현 대신 ‘구체로’하고 쓰도록 배운 아이들은 나중에 사회생활을 하면서 언어 소통에서도 어려움을 겪을 수 있지만, 사고가 선명해지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언어가 선명하고 정치하지 못하면 사고 또한 선명하고 정치해지지 않는다. 두루뭉실한 언어로는 복잡한 사고과정을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있다’는 말보다 ‘존재한다’는 말이 더 적확한 경우에도 ‘있다’만을 써야 한다면 깊이 있는 사고를 하기가 어렵다.
우리말 ‘까닭’에 해당하는 한자말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이유(理由), 연유(緣由), 연고(緣故)…. 이오덕 선생님은 이미 일상적으로 쓰이는 ‘이유’도 쓰지 말고 ‘까닭’으로 쓰기를 권하는데, 이는 말의 기본을 무시한 것이다. 일상에서 ‘까닭’보다 ‘이유’를 더 많이 쓰는 것은 무엇보다 발음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언어의 기본은 소리이기에, 소리가 쉽게 나는 쪽으로 언어는 발달하기 마련이다. 영어에서 자주 쓰이는 말일수록 불규칙 변화가 심한 것도 그 때문이다. ‘이유’와 ‘까닭’ 중에 사라질 가능성이 더 높은 말은 ‘까닭’일 것이다. 만약 이오덕 선생님의 주장대로 모두가 ‘까닭’만을 쓴다면 언어와 사고가 경직되는 결과가 초래될 수도 있다. 까닭은 발음하기도 어렵지만, ‘까닭’만으로는 미묘한 뜻을 제대로 담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때로는 ‘~연유’, ‘~연고’라는 낱말로 뜻을 더 선명하게 표현할 수 있다.
한자말을 우리말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지나친 순수주의다. ‘미소(微笑)’라는 한자말을 쓰지 말고 ‘방긋 웃음’으로 써야 한다는 주장도 그렇다. 이는 언어를 이념의 틀에 가두는 것이다. ‘미소 띤 얼굴’과 ‘방긋 웃는 얼굴’이 주는 느낌은 다르다. ‘엷은 웃음 띤 얼굴’이라 표현해도 마찬가지다. 더욱이 우리말이 갖고 있는 3․4조 운율을 감안할 때 순 우리말만으로는 문장의 리듬을 살리지 못할 경우가 많다. 시인더러 순 우리말로만 시를 지으라는 것은 시를 짓지 말라는 말이나 다름없지 않을까.
언어는 이념의 틀에 가둘 수 없는 살아 있는 것이다. 요즘 아이들이 연필심이 ‘부러진다’고 표현하지 않고 ‘끊어진다’고 표현하는 것을 두고 이오덕 선생님은 잘못된 언어 습관이라 지적하지만, 이는 오히려 아이들의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언어감각이라고 봐야 한다. 나무연필이 샤프연필로 대체되면서 자연스럽게 언어가 변화한 것이다. 샤프연필의 심은 부러지기보다 끊어지는 느낌이 든다. 굴러 떨어져도 심이 끄트머리에서 부러지기보다 안에서 끊어져서 나오기가 십상이다. 그런 경험 속에서 자연스럽게 연필심이 끊어졌다고 표현하게 된 것이다. 이를 두고 나무연필 세대가 틀린 표현이라도 말하는 것은 언어의 독재나 다름없다. 언어는 살아 있는 것이고 삶의 변화와 함께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언어와 소통
언어는 사상을 담는 그릇이다. 새로운 사상이 새로운 언어로 표현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슈타이너가 신지학 대신 인지학이라는 말을 만들어 자신의 사상을 표현했듯이, 많은 교육사상가들도 나름의 용어와 철학체계를 만들어낸다. 꽃피는 학교의 김희동 선생은 학교의 교육 철학을 하늘(얼)-땅(몬)-사람(새)의 온전한 조화를 지향하는 통전(通全)철학으로 표현한다. ‘천지인’과 ‘얼몬새’가 같은 뜻일지라도 소리가 전하는 바가 다르다고 보기에, 굳이 우리말을 찾아 쓰고 있다. 우리 전통 속에서 교육철학과 거기에 맞는 말을 찾아내어 쓰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일상에서 전혀 쓰이지 않는 말로 말미암아 외부와 소통이 잘 안되는 단점이 있는데, 장점이 더 크다고 본다면 굳이 마다할 까닭은 없을 것이다.
언어는 소통을 위한 것이지만, 내부의 소통과 결속을 더 중요하게 볼것인지 외부와의 소통을 더 중요하게 볼 것인지에 따라 선택은 달라질 수 있다. 대체로 외부와의 소통보다 내부의 소통과 정체성 확립을 더 중요하게 여길 경우 내부에서만 통하는 말을 즐겨 쓰는데, 물론 그 언어와 사상이 보편성을 획득하게 되면 외부와의 소통도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내부에서만 통하는 용어를 많이 쓰는 집단일수록 진입장벽이 높기 마련이다. 장벽을 넘어 들어간다 하더라도 코드가 맞지 않으면 어울리기가 어렵고, 결국 스스로 떠나게 된다. 대안학교나 어떤 공동체를 선택할 때는 그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어떤 언어를 쓰는지를 유심히 살펴보고, 그 언어가 자기에게 와 닿는지를 잘 가늠해야 한다. 언어에서 걸리면 십중팔구 관계 맺기가 힘들어진다.
학생들이 한꺼번에 자퇴를 하면서 갈등을 겪은 전인학교의 경우 일정 부분 언어의 문제가 작용하고 있다고 본다. 전인학교에서는 학교의 교육철학에 기초해서 몇몇 언어를 나름대로 새롭게 조직해서 쓰고 있는데, 대표적인 예가 ‘자란다’는 뜻의 ‘자람한다’라는 표현과 ‘왜’ 대신에 쓰는 ‘무엇을 돕고자’ 라는 표현이다. 학교에서 이 표현에 익숙해진 학생들이 학교 밖에서도 이런 표현을 쓰다 보니 의사소통이 잘 안돼 대화를 피하게 되는 경향도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전인학교에서는 ‘왜(전인식으는 무엇을 돕고자)’ 이런 표현을 쓸까? 실제로 어떤 현상이나 행동의 배경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지혜로운 손길이 작용하고 있음을 깨닫게 하려는 의도가 거기에 깔려 있다. ‘왜’ 대신 저 표현을 씀으로써 겉으로 드러난 양상의 이면을 들여다보게 하는 교육효과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왜’ 대신 무조건 ‘무엇을 돕고자’라는 표현을 쓸 경우 소통이 안 될 경우도 적지 않다.
이를테면 다친 아이에게 “무엇을 돕고자 다쳤니?”라고 물어본다고 하자. 부주의해서 다친 경우 부주의함을 깨닫고 경계하게 하는 의미는 있겠지만, 언어의 맥락상 저와 같은 표현은 언어의 기본 목적인 소통을 방해하고 사고과정을 왜곡시킬 우려가 있다. 모든 현상의 이면에는 ‘무엇을 돕고자’ 하는 숨은 의도(또는 섭리)가 깔려 있다고 볼 수 있지만, 언어로 그렇게 표현하는 것은 논리적인 사고력을 흐트러뜨릴 위험이 있다. 저 말 속에는 도움의 주체와 객체가 없이 돕는다는 말만 있는데, 문맥상 다친 주체와 돕는 주체와 객체가 하나인 셈이다.
‘무엇을 돕고자’라는 말을 쓰는 데는 훌륭한 교육적 의도가 담겨 있지만 교육의 기술적인 면에서 좀더 섬세할 필요가 있다. 언어를 정확하게 쓰는 것은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과 통한다. 주객이 전도되거나 혼란한 언어를 쓰다 보면 실제 생활에서도 그렇게 인식하고 행동할 수 있다. ‘자람한다’는 표현도 그렇다. 영성의 자람을 뜻하는 말로 ‘자람’이란 말을 쓰다보니 이런 표현도 쓰게 되는 것 같은데, 이는 우리말 문법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자칫 아이들의 언어감각과 사고과정을 왜곡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본다. 학교의 교육철학을 구현하는 데 굳이 이런 언어를 써야 하는지 근본에서 다시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궁극적으로는 아이들의 성장을 돕고자 하는 것일 텐데, 거기에 도움되는 언어가 어떤 언어일지 깊이 생각해 볼일이다.
말과 글의 기본 목적이 소통에 있다고 볼 때 소통을 돕는 말과 글을 잘 구사하도록 교육하는 것이 언어 교육의 기본 방향이 되어야 한다. 말하기에 앞서 잘 들을 줄 알아야 하고,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좋은 글을 많이 읽어야 한다. 언어 감각은 타고나는 측면이 많지만, 훈련의 힘도 무시할 수 없다. 타고난 사람도 꾸준히 훈련하지 않으면 감각이 무디어지기 마련이다. 아나운서들도 실수하지 않기 위해 날마다 훈련을 하고, 청산유수로 ‘썰’을 푸는 엠씨들도 방송에 앞서 늘 혀 푸는 연습을 한다. 이 시대의 명문장가로 알려진 김훈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연필로 글을 쓴다. 연필이 아니면 한 자도 쓸 수가 없다. 지우개가 없으면 한 자도 쓸 수가 없다. 나는 반드시 지우고 다시 쓰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책상 위에는 저녁마다 지우개 가루가 눈처럼 쌓이고 두어 장의 원고가 늘어난다. 인생은 고해인 것이다.”
글을 꼭 연필로 쓸 필요도 없고 누구나 글쓰기라는 고해의 바다로 뛰어들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사실 일상에서 보통 사람들이 소통을 하는 데 필요한 글은 문학적인 글이 아니다. 일상생활을 하는데 삶에서 우러난 감동을 주는 글을 쓸 필요까지는 없다.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더 중요할 때가 많다. 그런 점에서 문학적인 글쓰기, 치유적 글쓰기에 치중해 있는 글쓰기 교육의 방향을 바꿀 필요가 있다. 성장기 아이들의 경우 자기와의 소통을 돕는 치유적 글쓰기를 더 중점적으로 할 필요도 있겠지만, 공공적 글쓰기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말과 글 교육을 어떻게 할 것인가는 단지 국어교육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교육과정 속에서 같이 고려되어야 할 문제이다. 사실 ‘국어’라는 교과가 따로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이지만-나라말을 빼앗겼던 식민지 경험 탓일까- ‘말과 글’ 교과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말하기와 글쓰기는 모든 교육 활동 속에 녹아 있어야 하고, 또 학교교육으로 끝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평생 배워야 할 것이 말과 글이 아닐까. 삶을 잘 사는 데는 말을 잘하는 것보다 잘 듣는 것이 더 중요하고, 글을 잘 쓰는 것보다 마음을 잘 쓰는 것이 더욱 중요하지만, 우리 삶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하는 데 ‘말과 글’을 잘 활용하는 공부는 정말 해 볼 만한 공부가 아닐까 싶다. 아이들의 말의 힘, 글의 힘을 깨닫고 그 힘을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쪽으로 잘 쓰도록 도와주는 것이야말로 교육이 해야 할 역할이 아닐까?
(『민들레』2007년 7~8월호, 52~ 64쪽)
1) 살아 있는 글쓰기의 사례로 든 아이들 시 가운데 그런 것들이 많다. 산문을 시 형식을 빌어 표현했을 뿐이다. 엄밀히 말해 시의 형식을 갖추었다 보기도 어렵다. 시적인 긴장미, 운율 같은 형식미 없이 단지 산문을 짧게 행갈이했을 뿐인 시가 많다.
2) ‘우리글 바로 쓰기’를 둘러싸고 이미 십여 년전에 『인물과 사상』(1998년 4월호, 7월호)에서 지상논쟁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교육계에서는 별다른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수십 권의 책을 쓴 강준만씨는 ‘우리글 바로 쓰기’ 원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나름의 입장을 토로하고 있다.
“저는 언어라는 게 우선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아무리 순수하지 못한 말이라도 절대 다수의 대중이 그 말에 이미 익숙해 있다면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글을 쓰거나 말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선 그 말을 포기하는 게 쉽지 않거니와 포기하는 게 꼭 바람직하다고 보기도 어렵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저는 ‘입장(立場)’이라는 단어를 포기할 뜻이 없습니다. 그걸 다른 말로 바꾸어 표현하면 영 그 맛이 살지 않더라구요.
‘~적’도 마찬가지입니다.(중략) 물론 저도 ‘~적’을 남용하고 오용하는 것에 대해선 반대합니다. 그러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이라는 그 편리한 표현도 안 된다면 그건 좀 너무하지 않겠습니까? (중략) 엄청나게 잘못한 말이 아니라면, 아흔아홉 사람이 쓰는 말은 나머지 한 사람이 따라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아니 따라갈 필요는 없겠지요. 다만 아흔아홉을 존중해서 글을 쓰는 사람들도 존중받으면 좋겠다는 거지요.”(『글쓰기의 즐거움』, 222~224pp)
첫댓글 흥미진진해서 단숨에 읽었어요. 꼼꼼히 챙겨 읽어볼만 한 글이군요. 이 분의 말씀이 맞다 싶은 부분도 있고 아니다 싶은 곳도 있고 그러네요. 기본적으로 소통의 기능도 있지만 말은 더 깊게 들어가면 그 민족의 의식, 생각의 뿌리와 문화를 만들잖아요. 입말이 표현의 처음과정이듯이 말이 소통의 성격을 가지고는 있지만 말은 그 겨레의 길을 만드는 거라고 생각해요. 언어가 사상을 분명하게 한다면 더욱더 후자의 말이 맞지요. 그렇다면 소통의 기능만을 강조하는 말은 한계가 있고 현선생님의 의견이 모순된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김훈소설가님이나 강준만교수도 너무 커뮤니케이션에 맞추지 않나 싶어요. 또 틀(형식)의 중요성을
말씀하셨는데 그래서 말과 글이 다소 달라도 된다는 걸 이야기했네요. 과연 그럴까요? 이 글의 허가 바로 거기에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게 얼마나 사람과 삶을 다르게 만드는지 그 결과가 아주 크다는 거 설마 모르고 하시는 말씀일까요? 저는 그런 고민과 경험을 아주 오랫동안 하고 겪었는데요. 글을 보면 진짜 훌륭한 사람같았는데 실제 삶이나 하는 짓은 개차반인 작가들을 꽤 많이 봐 왔어요. 지금도 그렇죠. 아주 글로는 그럴듯 한데 실제 그 사람이 하는 짓이나 행동은 자기 이기주의에 빠져있고 남들에게 우월해 보일려고 폼잡는 거. 삶을 가꾸는 글쓰기 사람들이 절대로 최고의 예술적인 경지에 올라가는 글을 못 쓰고 있다.
못쓸것이다. 그런 지적인 것 같네요. 저 아는 작가 한분도 제게 끊임없이 그 이야길 해요. 그건 글쓰기회 식구들이 더 보완해야 될 것이다. 예술적 완성도를 갖춘 글쓰기 말이에요. 그 말엔 저도 공감해요. 하지만 글과 말은 달라도 된다. 그런데 말이 사상을 명확하게 한다는 말은 너무 큰 모순이라고 생각해요. 김훈씨가 언젠가 우리 한국의 조사는 짜증이 난다고 하면서 외국 말글법의 우월함을 이야기 한 것을 읽은 적이 있어요. 하지만 토씨가 빠진 말들이 매끄럽게 읽힐수는 있겠지만 시가 아닌 이야기말꽃에서 토씨는 사람의 몸을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살 같은 게 아닐까요? 뼈에 붙은 살. 지게가 넘어지지 않게 받혀주는 지게작대기
같은 구실을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강준만 교수도 커뮤니케이션으로서의 말의 기능만 따지고 있지 그게 겨레의 생각을 만들고 그 생각이 겨레가 나아갈 길과 삶과 문화가 되는 말의 구실의 원형이랄까요? 그걸 간과한 말이 아닌가 싶거든요. 공공적인 글쓰기의 필요성이 넓어졌고 그게 소통을 목적으로 한다는 말엔 공감해요. 그런게 소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글을 쉽게 써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이유와 까닭을 보기 들어주셨고, 연유, 연고 같은 낱말도 들어주셨어요. 그렇다면 제 땅에서 생긴 토박이말에서 따라오는 소리나 뜻이나 모습과 자취있는 말이 전혀 생활도 해 보지 않은 낯선 나라에서 들온 말에 익숙해져 있다고 해서 그 익숙
한 말을 따라 써야 한다는 건 그게 언중을 위한다고 말한다면 글쎄요. 쉽게 써야 한다고 해서 들온 말을 계속 써야 한다는 건 글쎄요. 제 나라의 모습과 빛깔과 자취가 있는 말을 찾아 쓰고 끌어다 쓰고 새롭게 낱말을 만들어 쓰는 노력이라도 해야하지 않을까요? 현재 있는 현상만을 전체로 놓고 따라가기보다 근본적인 우리 말글의 길을 따져 그 길이 잘못됐다면 바꿔야겠지요. 저도 현선생님의 글을 좀 더 꼼꼼히 읽어보고 다시 생각해 보겠지만요. 일단 처음 읽고 이런 생각이 들어 제 생각을 흩으러진 모습으로 그냥 적어봤습니다.
그리고 글쓰기의 형식에 못 미치는 글쓰기회의 글을 지적하셨는데 일면 공감하면서도 또 한편에서는 그건 사람의 삶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에 달려있다는 생각도 들고, 저는 권정생 선생님의 작품들이 보기글로 이야기 할 수 도 있겠다 싶기도 해요. 어떤 사조나 주의라고 하는 것들에서도 저는 결국 빈부의 삶의 토대문제로 보여지기도 해요. 이 세상의 모든 흐름이 굵직하게는 그렇게 나눠지는 것 같아요. 깊게 들여다보면요. 그래서 한쪽에서는 예술성이 떨어진다 하며 우습게 보고 또 한쪽에서는 말장난이다. 진솔한 삶을 드러내는 게 문학의 기능이다 하며 서로 주장하는거구요.
아, 이 글을 다시 봐도 자기 모순이 아주 많은 글이군요.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싶은데요. 현선생님께요. 가장 꼭대기에서 닿아야 할 말, 즉 우리가 써야 할 말이 어떤 말인가요? 일본어 중국어 영어에 견줄 수 없는 게 우리말이란 뜻인가요? 우리가 쓰는 말이나 사상이 중국사람이 와서 "니네 천지인도 우리거고 말도 우리거여. 니네는 아직도 일본의 언어식민지구나." 라고 했다면 뭐라고 대답해 줄 건가요? 들온말을 쓰지 말자가 아니라 할 수 있는대로 우리 토박이말을 찾아 쓰자는거죠. 우리말 40%에 들온말 60%라도 쓴다면 그래도 우리말이 살아남을텐데요. 선생님의 의견대로 이름씨를 버리고 들온말로 이름씨를 대신한다면 최고 꼭대
기에서 써야될 언어의 선택이 혼란스럽군요. 언어도 권력입니다. 시대마다 기득권층의 언어가 언제나 시대를 지배하지요. 하지만 누리그물이 발달된 현대에 와서 언어는 새로운 형태로 언중들이나 기득권층의 폭이 좁아지게 만들었어요. 한자말이 줄어들었지요. 하지만 한자가 차지하고 있던 그 자리에 이젠 영어말이 자리를 차지해갑니다. 소통을 위해서라면 사투리 쓰지 말고 표준말 써야지요. 그런데 표준말로는 다양한 삶의 빛깔을 드러내기 힘든 한계가 있어요. 말은 빛깔, 냄새, 자취, 모습이 있잖아요. 그런데 연유나 미소나 이런 말들은 무색무취한 느낌을 줘요. 쉽게 그 느낌이나 뜻이 확 와 닿지 않는단 말이지요. 나만 그런가요?
현병호님이 생각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지만 저는 공감이 많이 가는 글이었습니다. 국어교육과를 다닐 때 국어대사전을 통째로 읽어가며 순우리말을 찾아 시를 썼고, 지금도 영어가 쫙 깔린 아이들 옷을 보면 기분이 상하고, 학술대회에서 원고의 절반이 영어인 걸 보면서 비판을 했지요. 그런데 10년 넘게 글쓰기회와 함께 살아오면서 이런 부분이 저도 고민이 되어 아이들과 어른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열어놓고 생각을 주고 받았습니다. 여러 면에서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고 봐요. 한선생님이 하신 말씀 가운데 몇은 감정이 섞여서 글쓴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하게 못 맞추고 있다 싶어요. 틀린 말씀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계신다고 여겨요. 만나서 얘기해야 할 것 같네요.
아 그렇군요. 조효숙 선생님 말씀 잘 들었어요. 제가 현선생님의 말씀을 깊게 잘 알아채지 못한 것 같네요. 저도 현선생님 말씀이 공감가는 부분이 있었어요. 그리고 글쓰기회에 대한 제 나름 고민이 있었는데 조선생님도 고민이 있었다니 들어보고 싶고요. 사실 저는 글쓰기회 활동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잘 모르기도 해요. 아직은 제가 배워야 할 게 많다는 생각이 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