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권태사 묘역을 떠나 금계재사(金溪)齋舍)로 간다.
풍산 유씨네 금계재사, 안동 권씨네 능동재사, 그리고 권씨 조상과
유씨 조상이 함께 누운 권태사 묘역은 모두 지근(至近) 거리다.
사진: daum 지도에 표시한 금계재사, 능동재사, 권태사묘역.
금계재사는 권태사 묘역 산소 중 위에서 3번째, 유중영(柳仲 呈+우부방)의
묘사(墓祀)를 위한 시설로, 유중영은 권옹(權雍)의 사위 ‘유소’의 증손이다.
풍산 유씨(豊山 柳氏)
여기서 유씨가 풍산(豊山) 하회(河回) 마을에 자리 잡는 과정을 살펴 본다.
안동 바로 옆 풍산은 지금은 안동시 풍산읍이지만 옛날엔 별도의 현(縣),
풍산현이었다. 물론 안동대도호부 속현(屬縣)으로 그 통제를 받았지만.
풍산현(豊山縣)에는 일찍부터 호족 세력이 강했는데 풍산 유씨(豊山 柳氏)도
그 중 하나로 초기 조상들은 호장(戶長)을 지냈다. 그런데 고려 때 향리 지낸
집안에서는 대략 그 사실을 드러내기 좋아하지 않으니 그 까닭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왕건이 고려를 세울 때 지방 호족들을 다 포섭하면서 향리(鄕吏)로 삼았다.
그 호족들은 향리-향직 중 주로 호장(戶長)을 지내며 자기네 고장을 실질적으로 지배했다.
안동 삼태사(三太師)도 그런 세력 중 하나로, 그 후예들은 안동에 세거(世居)하며
호장(戶長) 직을 세습했다. 삼태사뿐 아니라 안동 지역에서 이렇다 하는 집안은
대략 고려 때 향리(鄕吏)를 지냈다.
그런데 조선 왕조 들어서면 향직-아전(衙前)은 중인(中人) 취급을 받게 되고
양반들은 중인을 거의 상놈 보듯 했다. 그러다 보니 고려 향리(鄕吏)는
조선조 아전(衙前)과 성격이 완전히 달라, 아무 흠 잡을 일이 아님에도,
고려 때 조상이 호장(戶長) 지낸 사실이 드러내기 꺼리는 일이 된다.
그러고 보면 역사 지식은 한문(漢文) 잘 한다고 그냥 되는 게 아니라
근대 역사학으로 훈련 받은 안목이 필요한 모양이다. 또 세월이 흘러
쌓이는 지식의 축적이 무서우니, 조선의 거유(巨儒)들도 몰랐던 사실을
나는 거의 거저 알다시피 한 것이다. 그러니 불초(不肖)한 내가
선유(先儒)들이 이건 잘못 알았노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사진: 풍산 유씨 세계도(世系圖), 이수건 저(著) ‘영남 사림파의 형성’ p62.
파란 글씨와 숫자는 내가 써 넣은 것이다.
시작 부분 1, 2, 3 세(世)는 고려 시대 호장(戶長)을 지냈지만, 위 설명대로
조선 중기가 되면 굳이 밝히지 않으며 이름만 적고 넘어 간다.
6세 때까지 풍산현 소재지에서 살다가, 7세 유종혜(柳從惠)가 친구
배상공(裵尙恭; 흥해 배씨)을 따라 하회 마을로 들어 간다.
(*) 대(代)와 세(世)는 같은 말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관습은 대(代)는
위로 올라 갈 때, 곧 몇 대조(代祖)하는 식으로 쓰며, 기신(己身-자기 자신,
여기서는 카운트 시작점)을 넣지 않으니, 예를 들면 고조부는 나의 4대조다.
세(世)는 내려 갈 때-몇 세손(世孫) 식으로 쓰며 기신(己身)을 넣으니,
나는 4대조인 고조부의 5세손이다. 이해하기 크게 어려울 일은 아니지만
헷갈려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나의 문중(門中)에서는 근년 결의하기를
“세와 대는 같다, 둘 다 기신(己身)을 넣지 않는다.”고 한 바, 관행과는
거리가 약간 있지만, 혼선을 방지하는 면은 있다.
다시 풍산 유씨로 돌아와, 유종혜의 친구 배상공의 여서(女壻)가 권태사 묘역
가운데 산소 권옹(權雍)으로, 장인 배상공의 터전을 이어 받고, 그 권옹의
사위가 유종혜의 손자 (위 세계표 상 9세인)유소(柳沼)로 역시 장인의 터전을
이어 받았다. 결국 배상공의 터전은 사위의 사위로 해서 유씨 네로 넘어 온 것이다.
許氏 터전에 安氏 문전에 柳氏 배판 이라는 말이 전해 오는 바,
허씨 일은 잘 모르겠으나, 安氏 문전이란 배상공(裵尙恭)의 아들
배소(裵素)의 여서(女壻)가 안종생(安從生)으로 처가살이를 했고,
그 아들 안팽명도 외가-곧 하회에서 산 일을 말한다.
이상 유씨네 일 가지고 장황하다 할 정도로 쓴 것은 하회 마을이
조선 중기까지 외손이 계속 들어와 각성바지로 살다가 중기 이후
부계 집성촌으로 변화하는 대표적-대부분 그랬을 텐데 증빙이
잘 남아 있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부계 혈통 개념으로 보면 한 마을에 여러 성씨가 잡거한 것 같지만
모계로 따지면 다 하나의 lineage(혈통, 핏줄)였던 것이다.
현재 부계(父系) 관념으로 과거 모계 사회 일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예를 들면 신라 상고(上古) 시기 박, 석, 김이 교대로 왕위에 올랐다지만,
모계로 따지면 다 같은 한 계통인데, 뒷날 부계 사회 이행 후 역사 정리
하다 보니 박, 석, 김으로 갈린 것 아니냐? 는 견해가 있는 바,
상당히 설득력 있다고 본다.
다시 권태사 묘역으로 돌아가 9세 유소(柳沼)의 증손 12세 유중영 산소가
권옹(權雍) 산소 아래 있는 것은 증조부가 그 전답을 물려 받고, 후손 대대로
내려 오며 제사 받들고 산소까지 돌본 같은 lineage 조상 밑에 묻힌 것뿐이다.
이런 걸 후대의 부계 관념으로 보니 거북스럽고 따라서 분쟁이 생기는 것이다.
천등산기(天燈山記) 중 산송(山訟) 부분
먼저 글 ‘권태사묘’에서 소개한 천등산기는 필자 겸암 유운룡(13세)의
글 지은 목적이 후반부 산송(山訟) 이야기에 있을 텐데 그 부분 적어 본다.
권태사와 권옹(權雍)의 산소는 딸과 사위 유소(柳沼; 9세) 부부 죽은 뒤에도
그 후손 유씨네가 대대로 수호한다. 권옹의 아들 ‘유’와 ‘작’은 자기네 사는
평창으로 돌아 갔다. 아들이 있음에도 사위에게 물려 준 것이다.
유소의 아들 자온(子溫; 세계표 상 10世)이 죽어 산소를 하회 화산에 썼다가,
천등산으로 옮겼는데, 권태사 묘와는 4백보 이상 떨어진 곳이라고 한다.
옛날 보(步)란 단위가 또 대중이 없는데 주척(周尺)으로 6척, 대략 1.3m,
400 보면 500 m 남짓이다. 보(步)는 걸음과 관계 없지만 굳이 따진다면
한 걸음이 아니라 두 걸음, 오른 발을 디뎌 다시 오른 발이 올 때 까지다.
권태사 묘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이다. 여기부터는 천등산기 원문을 옮긴다.
번역은 겸암 13세손이 한 것을 그대로 차용하는데 괄호 안은 나의 주(註)다.
….그 뒤 부인이 (10세 유자온의 부인, 곧 유운룡, 성룡의 증조모) 죽어
합장을 하려 하니 그때 태사공(권태사)의 원손 권균이 정승이었는데
태사공 묘소 계절(階 石+切)을 뜯고 장사를 지낸다는 참언을 하는 사람이 있어
균이 안동부에 금장을 명령하니 조부 참판공이 (유운룡 형제의 조부 柳公綽;
11세; 綽은 音이 ‘작’) 서울 가서 상복 입은 채로 정승 문 앞에서 달이 넘도록
부복하여 마침내 대화하게 되어 조부께서 친위 자손의 상황과 계장(繼葬)한
내력과 산세의 원근등을 설명하니 균이 이해하고 금장령을 풀고 장사를
지내고 모든 것을 마무리 지었다. …운운
그러니까 유운룡 형제의 증조부모 합장묘를 권태사 묘로부터 400보-500m
떨어진 곳에 쓰는데, 그걸 권태사 묘를 훼손해 가며 쓴다고 일러 바치는
인간이 있어 말썽이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다.
‘균이 안동부에 금장을 명령하니’ 에 의심이 들어 한문본을 보니
‘均大怒移文本府禁葬’ 이다.
조선 왕조는 정승이라고 해도 개인적인 사안 가지고 국가 행정기관에
성질 내며(大怒) 멋대로 명령을 내리는 등-사적(私的)으로 통치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그 정도로 허술하지 않았다.
요즈음 뭔 재판소장 하겠다며 청문회 나온 인물처럼 공사(公私)를
구분 못 했다가는 대간(臺諫)에서 바로 탄핵이 들어 갔을 것이고
그 이전에 사회적으로 매장이 되었을 것이다.
기억에 없다 따위가 변명이 되는 시대가 아니었다.
균-권균은 중종 때 우의정을 지냈는데, 상당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권균의 부고를 듣고 사신(史臣)이 실록에 쓴 졸기(卒記)를 읽어 보니,
‘부화 뇌동 하지 않고, 인망(人望)이 있고, 인품이 근엄하고 기국(器局)이 있어
사람들이 감히 간범(干犯)하지 못하고..’ 하는 구절들이 나온다.
실록의 사신왈(史臣曰)은 요즘 주례사나 추도사 내지 추천사,
맛 기행문과는 종류가 다르다. 사람 죽었다고 적당히 쓰는 것 없다.
깔 때는 사정없이, 심하다 싶을 정도로 깐다.
권균의 졸기에도 ‘늘그막에 성품이 사나운 후처(後妻)를 만나 따로 방 하나를
정하여 혼자 거처하고 있었다. 그래서 곁에서 시중드는 사람이라곤 어린 계집종
하나뿐인 가운데 숨을 거두었으므로 친지와 이웃들이 슬퍼하고 딱해 하였다.’
고 읽기 민망하고 한편 웃음도 나오고 (늘그막에 후처 잘 얻었어야지),
이런 부분 꼭 써야 했나? 하는 구절까지 적어 놓았다. 나의 요점은
이런 글에서 괜찮은 인물로 평했으면 그대로 받아 들여도 좋지 않을까?
하는 뜻이다.
‘移文本府禁葬’ 은 ‘금장을 명령하니’가 아니라, ‘이런 일이 있으니
본부-안동부에 한번 알아 보라고 문서를 넘겼다(移文)’ 정도였을 것이다.
안동부사야 정승의 편지를 무게 있게 받아 들이고, 풍산 유씨한테
당신네가 알아서 해결하지 않으면 나도 난처하다 라고 했을 것이고,
그러니 ‘유공작’ 이 상복(최질; 衰 실 사+至) 입은 채로 서울 갈 수 밖에.
‘정승 문 앞에서 달이 넘도록 부복하여’는 원문이 ‘守政丞門 踰月 每出伏
於路左’인데, 유운룡의 조부 참판공의 ‘참판’은 실직(實職)이 아니라 이름만
받지 않았나 하지만, 그래도 상당한 선비였을 것이다. 그런 士林을 한 달이
넘도록 문 앞에 俯伏, 엎드린 채로 있게 하면 모양새도 더럽고 소문이 짜하고
당장 퍼질 텐데 그랬을 것 같지 않다. 조선 시대 대간(臺諫)이 탄핵한 거 보면,
‘이랬다는 말이 들리는 바 아무개 소인(小人)이오’ 하는 사실 관계가 아니라
극히 주관적 판단 가지고도 주저 없이 했고, 그래도 물러 나야 했다.
증거를 디밀어도 관행이다, 아래에서 했다, 몰랐다가 통하는 요즘과 달랐다.
어느 쪽이 좋은지? 둘을 섞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냥 힘들게 만났다 정도를 풍산 유씨네 전승(傳乘)이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불어난 듯 하다. 글 쓴 겸암 유운룡의 조부 때 일이니 몇 십 년 상간이다.
그러나 내 경우 보면, 요즈음 동창들 지나간 일 회상 자주 하는데,
다 같이 겪은 일을 부풀리니, 좋게 말해 미화, 사실 관계로 보면 왜곡인데,
그걸 또 옆에서는 맞아 맞아 하며 맞장구 친다. 야 이건 아닌데 하고
표정을 보면 본인들이 의식적으로 거짓말하는 게 아니라 정말 그렇게 믿는 듯 하다.
인간의 기억 정리란 수십 년, 불과 한 세대 사이에도 얼마던지 변할 수 있다.
이상 천등산기 후반부에서 우리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하나 겸암 유운룡이 글 쓸 때인 1500년대 후반에는 권옹 산소 뒤의 고묘(古墓),
또는 고묘라고 생각되는 흔적이 권씨 시조 권태사묘로 안동 사림들 간에
‘인식’되어 가고 있었다. (철학적으로 따지면 ‘인식’은 사실 여부와는
별개의 일이긴 하지만)
둘 유씨가 권옹의 여서(女壻)로서 터전을 물려 받고 대대로 산소를 지켜 와
(繼葬), 권씨네 어필이 굴러 온 돌이 박힌 돌을 빼는 격일 수도 있지만
부계화가 상당히 진행된 듯 뭔가 변명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셋 그럼에도 그 뒤에 유공작-서울 가서 권씨 재상 문 앞에서 한 달이 넘게
무릎 꿇고 있었다는 참판공의 아들 유중영(겸암과 서애의 아버지)의 산소를
권옹 밑에 다시 쓸 정도로 풍산 유씨의 산소 관할권(?)은 확고했다.
유씨 행적과 천등산기 이야기 한참 하다 보니 정작 제목인 금계재사 부분에
들어가지 못했는데 사진 설명만 간단히 한다.
금계재사(金溪齋舍)
사진: 금계재사 정면
풍산 유씨네는 금계(金溪)를 어찌 읽는 지 모르겠다.
머지 않은 곳에 있는 학봉(鶴峯; 김성일, 의성 김씨) 종택(宗宅) 마을은
한자로 金溪로 쓰지만 읽기는 ‘검제’로, 곧 ‘검제 종택’ ‘검제 마을’이다.
원래 마을 이름이 우리 말로 ‘금지’ ‘금제’ 또는 ‘검제’ 인데,
나중에 한자로 아화(雅化)할 때 金溪로 했다나.
풍산 유씨 현조(顯祖) 서애 유성룡과, 의성 김씨네 학봉 김성일은
퇴계의 문인(門人) 중 가장 걸출하였다. 동문수학한 사이지만, 라이벌 의식은
가까울 수록 더 심한 법이라, 두 집안 후손들의 경쟁도 대단했다.
그러니만큼 이 재사 앞에 붙은 ‘金溪’를 풍산 유씨네는 어찌 읽는 지?
갑자기 궁금해 진다. 뭐 파고 들만한 일은 아니고.
절 양식(樣式)
먼저 능동재사 글에서 안동 지역 재사(齋舍) 건물은 절, 서원, 원림,
살림집 양식을 원용했는데, 능동재사는 서원 형식이라고 한바,
여기 금계재사(金溪齋舍)는 ‘절’-원용이 아니라 원래 ‘절’을 고친 것이다.
그러니까 본래 '능효사(陵孝寺)'이었는데 풍산 유씨가 인수하여 재사(齋舍)로
개조한 것이다. 당연히 돈 주고 샀겠지만 조선 중기 이후 보면 불교 절은
양반들의 그냥 ‘밥’이었다. 어떤 글에서 중이 양반들에게 하소연 하기를,
“좀 살살 뜯어 먹어라(뜯어 먹지 말라 가 아니라) 이러다 우리 죽어 버리면
너네 어디 가서 뜯어 먹니? 그럼 당신네도 답답할 것 아니냐?”
뭐 이런 구절까지 보았다. 오죽하면 그런 말이 나왔을까?
아무튼 절을 개조하다 보니 군데군데 절 흔적이 남아 있다.
정면의 누마루 자체가 절의 안양루 냄새가 나는데, 그 뒤 본채 연결도
절의 누(樓)와 대웅전을 잇는 내정(內庭)의 구성과 비슷하다.
사진: 뒤쪽에서 본 영모루(永慕樓) 일부와 본채의 옆 부분.
절의 누마루 밑을 지나서 본채 법당에 들어가는 장면과 흡사하지 않나?
영모루(永慕樓)
능동재사에서 누(樓)의 이름이 논어 학이편 ‘愼終追遠’에서 나온 추원루
(追遠樓)라고 설명한 바, 여기 영모루(永慕樓) 역시 조상을 영원히 그린다는
뜻일 게다. 축문 같은 데 보면 불승영모(不勝永慕)란 구절이 자주 나온다.
재사 건물에 딱 어울리는 이름이다.
본채의 쪽마루와 익공(翼工)
사진: 금계재사 본채의 쪽마루
법당 닮은 또는 원래 법당이었을 본채에 쪽마루를 깔았다.
절 대웅전 앞에 쪽마루 깔기는 이곳에서 산 하나 넘어 있는 봉정사에서
처음 보았는데, 이곳도 그렇다. 아마 이쪽 절에 그런 양식이 발달한 듯.
마루 끝까지 기둥이 나와 있으면 툇마루고, 없으면 쪽마루라는 설명이다.
또 처마 밑으로 익공(翼工; 서까래 밑에 새 날개 같이 생긴 것)이 보이는 바,
보통 민간 건물에는 잘 쓰지 않는데, 그것도 원래 법당의 흔적인 듯 하다.
지금 글 쓰며 사진을 다시 보니, 맨 앞 기둥 중간 왼쪽으로 부재를 희한하게 덧대 놓았다.
기둥 이음매
사진: 기둥을 이었다. 우리나라 목조 건물에 기둥을 이은 게 많은데,
여긴 저렇게 나무 쐐기까지 박아 놓았다.
심지어 종묘 정문 기둥도 칠을 하고 사람들이 유심히 관찰을 하지 않아
그렇지 죄 이어 놓았다. 하나가 아니라 8개인가 있는 기둥이 다 그랬던 것 같다.
나무는 썩기 마련인데 물에 젖는 밑둥부터 상한다. 그럴 때는 이어 쓴다.
요즘이야 수입목 좋은 거 많지만 옛날엔 아름드리 기둥 구하기 어디 쉬운가?
족중입의(族中立議)
영모루 누마루에 겸암 유운룡이 쓴 ‘천등산기’, 서애 유성룡이 쓴
‘금계묘산 수호입약’, 역시 겸암이 쓴 족중입의(族中立議) 가 걸려 있는데,
잘 한 일은 한문 원본과 함께 한글 번역을 같이 둔 점이다.
전에 온 사람이 처음 보았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 최근에 한 모양이다.
어디 가면 한문으로 현판 좍 걸어 놓았는데, 폼은 나겠지만
그거 얼음에 박 밀듯 읽어 내릴 사람 과연 몇이 있을까?
대부분 잘 해야 띄엄띄엄 몇 자 알아 보는 정도지.
수메르 문자나 이집트 상형문 볼 때와 거의 매한가지가 아닌가 한다.
글이라고 하는 것은 서로 알아 먹자고 쓰는 것 아닌가?
족중입의는 여기 묘사(墓祀) 자손 모두 힘을 합쳐 대대로 영원토록
경건하게 잘 모시자고 1561년 겸암 유운룡이 기초한 내용인데
그 중 일부가 재미있어 옮겨 본다.
...제관이 한번 참석하지 않으면 벌미 한 말, 두 번 참석하지 않으면 두 말,
세 번 참석하지 않으면 그 종을 대신 때리고, 네 번 참석하지 않으면 상종을 말고
다섯 번 참석하지 않으면 족보에서 돌리되 질병이나 사고로 현저한 이유가
있어서…..(이유가 합당할 때는 봐 준다는 구절이 이어짐)…
.... 벌미를 내지 않는 자는 또한 같이 처리하고 유사가 책임을 다 못하면
종을 대신 태형한다.
..유사는 일년마다 교대하되 반드시 서로 만나 체계하고 그렇지 않으면
갈지 말고 제 유사가 벌미를 안 받아 바치지 못하거든 바칠 때까지
갈지 말라.
참 옛날 종 하기 정말 힘들고 빈정 상했겠다.
주인 데데하면 대신 맞기까지 했으니…
“….유사(有司)…. 갈지 말고..벌미 못 받으면 받을 때까지 갈지 말라”
이 구절은 요즘 동창회나 친목 모임에서 원용하면 좋을 것 같다.
이권이 없는 모임은 회장이나 총무 서로 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후임자 못 구하면 구할 때까지 하고, 회비 못 받으면 받아 낼 때까지 하라!
훌륭한 해결책이다.
이상으로 금계재사 기행문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