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06. 8. 4. 02:45
■ 시조 유허 표암비(始祖遺墟瓢巖碑)
삼가 살피건데 경주이씨(慶州李氏)의 구보(舊譜)에 이르기를 시조(始祖)의 휘는 알평(謁平)이며 진한(辰韓)의 표암봉(瓢巖峰) 아래에서 처음으로 내려왔다,고 하였으니 처음 내려왔다 함은 탄생을 말한 것이다.
『시경(詩經)』에 이르되 산악(山嶽)이 신을 내리어 보(甫) 및 신(申)을 탄생하였다. 하고 소자첨(蘇子瞻)이 신(申)과 여(呂)가 산악으로부터 내려왔다.고 하였으니 고금에 전설을 믿지 않을 수 없다.
대저 산이 높고 맑은 기운이 정(精)을 모으고 영(英)을 길러 철인(哲人)을 출생(出生)함은 이치에 필연적인 것으로서 『동경지(東京誌)』에만 기재하기를 6부 대인(六部大人)이 모두 하늘로 쫓아 강생(降生)하였다.고 한 것과는 다르다.
신인(神人)이 태백산(太白山) 박달나무 아래에 내려와서 단군(檀君)이 되었다느니 또 나정부(蘿井部)의 알에서 나왔느니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었다느니 등등의 말은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설로서 떠도는 말과 같아서 의심해야 할지 믿어야할지 결정하기 어려우나 오직 표암 한 곳(瓢巖一區)만은 급량대인(及梁大人)의 유허(遺墟)로 우리 이씨(李氏)의 근본지가 되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
시조(始祖) 이래로 덕(德)을 쌓고 인(仁)을 쌓아서 경사가 자손(子孫)에게 내리어 신라(新羅)와 고려(高麗)의 사이에 높은 관직이 이어 왔고 명망이 훌륭한 분이 서로 바라 볼 정도였다. 아조(我朝 : 우리 왕조란 말로 朝鮮을 말함)에 미치어 나뭇가지처럼 뻗고 물줄기처럼 나뉘어 자손(子孫)이 천(千)· 억(億)으로 불어났고 공(公)도 되고 경(卿)도 되어 대대로 아름다운 업적을 이루어, 二千年 사이에 혁혁하여 우리 동방에 유명한 집안이 된 것은 오직 급량공(及梁公)의 음덕(陰德)을 감싸주고 덮어준 것이다.
금오산(金鰲山) 어느 기슭이 우리 시조의 묘소인가? 연대(年代)가 아득하고 문헌(文獻)이 고징할 수가 없으므로 드디어 실전(失傳)되고 말았으니 지금에 있어서 후손이 추원(追遠)하여 사모할 데는 유독 표암(瓢巖)이 있을 뿐이다.
正祖 11년 정미(丁未. 1787년)에 후손(後孫) 집성(集星)이 영양군수(永陽郡守)로 있을 때에 표암(瓢巖)위에다 깊이 새기어 기록했는데 경주(慶州)의 모든 후손(後孫)들이 이르기를 “이것으로는 유적(遺跡)을 표양할 수가 없다.”하여, 이에 돌을 다듬어 큰 비석을 표암(瓢巖)아래에 세우려하자 일가 사람 요신(堯臣)이 찾아와서 경일(敬一)에게 기문(記文)을 지으라 하니 내가 말하기를 “이 일은 많은 사람에게 상의하지 않았으니 갑. 을(甲·乙)이 의논이 있을 것이나 그 근본을 잊지 않음이 되는 것에는 또한 한 가지 의의가 있다 하겠다.
이미 세운 후에도 긴 세상에 보호하여 아이들이 두드리고 짐승이 떠받지 않게 함은 경주에 사는 모든 족인(族人)의 책임이 아니겠는가.
드디어 기문을 쓰다.
후손 대광보국 숭록대부 원임 좌의정 오은군 경일은 글을 짓고,
정헌대부 형조판서 경연춘추관 오위도총부 도총관 집두는 삼가 쓴다.
자료>경주이씨 중앙표준대종보-1987
[참고내용]
본 유허비는 병인(丙寅) 1806년 9월에 세우다.
◇좌의정 오은군 이경일 찬(左議政 鰲恩君 李敬一 撰)
◇형조판서 이집두(刑曺判書 李集斗) 글씨를 쓰다.
◇ 도 검(都 檢) : 전장령(前掌令) : 이진택(李鎭宅)
◇ 유 학(幼 學) : 이증규(李增奎)
◇ 감역유사(監役有司) : 이형묵(李亨默), 이규태(李奎泰)
◇ 각자유사(刻字有司) : 이경춘(李景春).
◇감관(監官) : 절충(折衝) 이중인(李重仁)
경주이씨 시조 표암 유허비 ⓒ무철 양재완 2024. 2. 14.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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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謹按慶州李氏舊譜曰 始祖諱謁平初降辰韓之瓢巖峰下 初降云者降生之謂歟 詩曰維嶽降神生甫及申 蘇子瞻以爲申呂自嶽降 古今所傳不可誣也. 盖崧高靈淑之氣鍾精毓英 篤生哲人理之所必然者 而獨東京誌所載六部大人 皆從天而降云者異焉. 神人降于太白山檀木下而爲檀君與蘿井剖卵遂爲佐命功臣等說自昔沿襲而齊東之言疑信固難定惟此瓢巖一區之爲及梁大人之遺墟而爲我李根本之地則明矣. 自始祖以來積德累仁慶流雲仍羅麗之間簪組蟬聯名碩相望逮于我朝枝達派分子孫千億廼公廼卿世濟厥美. 二千年之間赫舃爲吾東望族者惟及梁公之餘蔭是庇是庥耳金鰲之麓處是我始祖衣履之藏而年代渺茫文獻無徵遂失其傳在今後孫之追遠而想慕者獨瓢巖在耳歲. 丁未後孫集星之守永陽也鐫刻于巖上標識之慶之諸孫以爲此不足表揚遺蹟. 廼伐石爲穹碑將樹於巖下宗人堯臣輩來徵記文於敬一余以爲此事不謀於衆似有甲乙之論而其爲不忘本則亦或一義 旣樹之後永世衞護旡俾. 旣樹之後永世衞護旡俾童敲而角勵則顧非在慶諸人之責乎遂爲之書.
大匡輔國崇祿大夫原任左議政鰲恩君敬一謹記.
正憲大夫刑曹判書經筵春秋館五衛都摠府都摠管集斗謹書.
<끝>
ⓒ무철 양재완 2024. 2. 14. 15:43
ⓒ무철 양재완 2024. 2. 14. 15:43
▲시조공 께서 강림하신 광림대(光臨臺) / 1985년에 광림대 보호각 중수
ⓒ무철 양재완 2024. 2. 14. 15:43
▲광림대 석혈(光臨臺 石穴)
▲閼平公(알평공)은 謁平公(알평공)의 오자임.
▲표암전(瓢巖殿) / 所在地 : 慶州市 東川洞 산16번지.
所在地: 慶州市 東川洞 산16번지丁巳年(1917) 2月 27日 창건발족(創建發起)하여 기성회(期成會)를 결성(結成)하고 8年에 걸친 공사로 강원도 강릉((江原道 江陵)에서 대관령 백송(大關嶺 白松)을 수운(水運)하여 건립(建立), 乙丑年(1925)에 준공(竣工)되었고 1971年에 중수(重修)하다. 매년 3월 중정(中丁)에 제향(祭享)을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