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사회적 이념과 투쟁 정신의 시계급주의 시와 망명지의 항일시
1920년대 한국 시문학은 낭만주의적 경향과 뚜렷이 구별되는 또 하나의 문학적 조류를 보여주었다. 식민지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바탕으로 투쟁적인 사회의식과 문학적 실천을 강조하는 경향이 그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국내에서는 주로 사회주의 이념에 입각한 계급문학으로 나타났고, 국외에서는 망명지의 항일문학으로 전개되었다.
한국 문학사에서 계급주의 문학운동은 ‘염군사’와 ‘파스큘라’의 활동에서 시작되었다. 1922년 이적효. 이호 · 김홍파 · 김영팔 · 최승일 등이 ‘염군사’를 조직하였고, 그 이듬해에 박영희 · 안석영 · 김기진 · 김형원 · 이익상 등이 ‘파스큘라PASKYUIA’를 결성하여, 무산자 계급 해방을 위한 문화 및 문학 운동을 주장하였다. 계급문학 운동이 처음 대두하던 이 단계는 나중에 ‘신경향파’ 시기로 지칭되었는데, 여기서 ‘신경향’이란 1910년대의 계몽주의 문학이나 1920년대 초반의 낭만주의 문학과 구별되는 경향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신경향파 시기에 선구적 역할을 수행한 사람은 김기진이었다. 그는 당대 문학이 구체적인 현실과 생활상을 외면하고 현실도피적 영탄을 일삼았다고 비판하고, 현실에 바탕을 두는 문학을 주장하였다. 이어 기존의 문학을 부르주아 문학이라 규정하고, 무산자 계급의 해방을 추구하는 새로운 문학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이 주장들은 아직 체계화된 논리를 갖춘 것은 아니었고, 예술의 물질적 토대로서의 현실과 무산대중에 대한 소박한 인식을 내보인 정도에 머물렀다. 실제 이 시기 창작된 신경향파시들도 하층 계급의 비참한 생활과 궁핍상을 주로 그렸지만 소재주의적 차원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조연현의 지적에 따르면, 이 작품들은 가난의 사회적 원인이 드러나지 않는 단순한 ‘빈궁문학’ 혹은 소박한 ‘반항문학’으로서, 다분히 동정적인 계급의식에 기초하여 자연발생적이고 산발적으로 이루어진 창작 행위의 결과였다.⁸
다만 신경향파 시인으로 분류될 수 있는 이상화는 이러한 한계를 뛰어넘는 시적 성취를 보여주었다. 『백조』 동인이었던 이상화는 「말세末世의 희탄希嘆」이나 「나의 침실寢室로」 등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전형적인 낭만주의 경향의 작품을 쓴 시인이었다. 그러나 이후 그는 파스큘라에 가담하여 신경향파의 일원이 되었고, 나중에는 카프에도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1925년 무렵 발표된 「구루마꾼」 · 「엿장수」 · 「거러지」 등은 하층민들의 궁핍하고 비참한 생활상을 다루고 있어서 신경향파 시에 속하는 작품들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단순히 소재를 나열하거나 분노를 표출하는 차원에 머물지 않고, 적절한 묘사를 통해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을 실감나게 그려내는 성과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점은 그가 다른 신경향파 시인과 달리 단순한 이념적 사고와 도식적인 방법론에 매몰되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1926년에 발표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도 이런 시적 노력의 연장선상에서 탄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짜임새 있는 시적 구조 속에서 민족적 삶의 체험이 녹아 있는 자연스러운 표현으로 나라를 빼앗긴 우리 민족의 아픔을 절실하게 그려낸 수작으로 평가된다. 그런데 사실 이 작품에 그려진 민족 현실은 계급이념의 관점을 넘어선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그의 시세계는 흔히 신경향파의 테두리를 벗어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어쨌든 1920년대 초기의 신경향파 문학은 계급문학 운동의 첫 걸음에 불과했고, 이들의 활동이 점차 뚜렷한 한계를 드러내자 좀더 발전된 단계로 나아가려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그러한 움직임은 ‘염군사’와 ‘파스큘라’를 해체 통합하여 ‘카프’를 발족(1925)시키는 것으로 구체화되었다. 계급문학운동의 본격적인 전개를 위해 결성된 카프는 발족 초기부터 뚜렷한 행동강령과 조직 이념을 내세웠다. 이후 카프는 1935년 해산될 때까지 10여 년 동안 몇 차례의 중요한 논쟁과 두 번의 방향 전환, 그리고 이에 따른 조직 구성의 변화를 보여주며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대에 국한하여 카프의 활동 양상을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카프 발족 후 처음 제기된 중요한 논쟁은 김기진과 박영희 사이에 벌어진 ‘내용’ · ‘형식’ 논쟁이었다. 김기진은 박영희의 소설 「철야」를 두고 “이 일편은 소설이 아니요 계급의식 계급투쟁의 개념에 대한 추상적 설명으로 시종하고 말았다”고 비판하였다.⁹ 이에 대해 박영희는 “프로문예는 무산계급과 노동자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투쟁을 선동하고 지시하는 것”이라고 반박하였다.¹⁰ 이러한 주장은 계급문학에서 중요한 것은 예술적 완성이나 미학적 형상이 아니라, 계급이념의 전파를 위한 수단으로서의 성격이라는 것이었다.
이 논쟁을 통해 카프의 주도적인 이론가로 자리잡은 박영희는 1927년 ‘목적의식론’을 제기하며, 1차 방향 전환을 주도하였다. 그는 신경향파 문학을 자연발생적 단계의 경제투쟁의 문학이라 규정짓고, 무산계급의 계급의식을 고취하기 위해서는 ‘목적의식적’으로 정치투쟁의 문학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¹¹ 이것은 계급문학의 이념성을 더욱 강조하고, 사회운동과 정치투쟁에 복무하는 문학운동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목적의식기에 접어든 카프의 문학운동은 동경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신진 세력인 홍효민 · 이북만 · 임화 · 권환 · 안막 · 김남천 등이 가세하면서 이념성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1929~1930년에 걸쳐 진행된 2차 방향 전환은 그러한 움직임의 결과로서, 효율적인 예술 투쟁을 위하여 조직을 대폭 개편하고 정치투쟁의 구체적 내용과 수행 방식 등을 규정하였다.
이처럼 1920년대 중반 이후 카프의 계급주의 문학운동은 치열한 내부 논쟁 과정을 통해 더욱 체계적이고 급진적인 이론을 수립하면서 진행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 프로시가 실제 창작에서 그만한 성과를 거둔 것은 아니었다. 선명한 이론에 의거한 목적지향성이 성공적인 작품 창작을 보장해주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 시기 프로시들은 지나친 이념지향성으로 인해 미적 형상을 마련하지 못한 채 직설적인 관념의 표백이나 구호로 흐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현실인식과 계급의식 고취라는 목적에 비추어볼 때, 주관적 감정을 위주로 하는 짧은 서정시의 장르적 특성이 소설에 비해 상대적으로 불리한 요소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이런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서정시의 형식에 이야기 구조를 도입한 이른바 ‘단편서사시’ 형식이 거론되기도 하였다. 김기진은 1928년 무렵 ‘예술대중화론’을 제기하면서, 당시의 계급문학이 무산자 계급인 노동자·농민의 문학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이들과 유리되어 있는 현실을 지적하고 시가의 대중화를 주장하였다. 그는 그 구체적인 방안으로 서사적인 소재를 취하고 쉬운 말로 써서 대중들이 이해하고 낭독하기 좋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형태의 시를 ‘단편서사시’로 지칭하고, 임화의 「우리옵바와 화로」를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 들었다.¹²
김기진의 대중화 자체는 당시 소장파에 의해 부정당했지만, 1920년대 후반 무렵부터는 실제 창작 면에서 좀더 다양한 고민과 모색을 통해 사회의식을 효과적으로 형상화하려는 노력들이 확산되었다. 특히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점점 열악해지는 외부 정세에도 불구하고, 많은 역량 있는 시인들이 카프 진영에 참가하여 계급의식을 견지하면서도 보다 세련된 양식적 틀과 형상화 방법을 통해 전대의 신경향파 시를 넘어서는 시적 성과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1920년대의 중반의 프로시 운동은 그 토대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한국의 시문학사에서 1920년 초·중반부터 시작된 계급주의 문학운동은 신경향파 시기를 거쳐 1925년 카프 결성을 계기로 조직적이며 본격적인 활동을 벌인 것으로 정리된다. 1920년대에 국한해서 평가한다면, 이 시기 프로시들은 대체적으로 경직된 목적의식에 사로잡혀 사회의식의 예술적 형상화 과정을 소홀히 하는 한계를 보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작품들은 1930년대 프로시의 보다 풍요로운 성과를 위한 발판이 되었고, 무엇보다 1920년대 초기 낭만적 경향의 시들이 지닌 현실도피적 자세를 극복하고 뚜렷한 사회의식을 바탕으로 당대 현실과 역사에 적극 대응하는 문학적 흐름을 열어 이후 문학사의 전개 과정에서 지속적인 영향력으로 작용한 점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이 시기 식민지 현실 비판과 투쟁의식을 위주로 하는 문학적 흐름은 해외 망명지에서도 전개되었다. 망명지에서의 문학 활동은 분량이 긴 소설이 아니라 시기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일제의 검열과 탄압을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적극적인 항일 의지를 형상화할 수 있었다.
상해 임시정부가 발간한 『독립신문』을 비롯하여, 러시아·미국 등지에서 나온 여러 간행물들이 항일 문학 작품의 주된 발표 무대였다. 『독립신문』에는 이광수가 한때 주필을 맡아 시를 발표하였고, 주요한 ‘송아지’라는 필명으로 작품을 기고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작품들은 별다른 시적 성취를 보여주지 못했으며 주제의식도 강렬한 것이 못 되었다. 이보다는 작자 미상의 시가들이 일제에 대한 분노와 강렬한 투쟁의지, 그리고 독립에 대한 간절한 염원 등을 형상화하여 망명지 문학의 장점을 잘 보여주었다. 특히 만주에서 활약한 독립군들이 부르던 많은 ‘독립군가’는 실제 독립군 대원들이 창작하고 부르면서 항일 투쟁 의지의 고취에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망명지에서의 항일 문학은 나름의 제약을 안고 있어서 크게 발달하기는 어려웠다. 해외 망명지의 여건상 역량 있는 작가가 생겨나기 어려웠고 발표 매체와 독자도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망명지 항일 시가들은 대개 정형적인 리듬의 노래 가사나 교술적 서정시에 머무는 한계를 보였다. 그러나 민족 현실을 직시하고 항일 정신을 형상화한 주제의식은 일제의 감시하에 놓여 있던 국내 문학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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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조연현, 『한국현대문학사』, 성문각, 1973,295~296쪽.
9 김기진, 문예시평」, 『조선지광』, 1926.12.
10 박영희, 「투쟁기에 있는 문예비평가의 태도」, 『조선지광』, 1927.1.
11 박영희, 「문예운동의 방향전환」, 『조선지광』, 1927.4.
12 「단편서사시의 길로」, 『조선문예』, 1929.5; 「프로시가의 대중화」, 『문예공론』, 1929.6.
(전도현, 고려대 교수)
『한국 현대 시문학사』 이승하 외 지음
2024. 6. 27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