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지리산 가는 날.
나는 내가 정말로 지리산 종주를 갈까 싶었다.
중늙은이에 속하는 나이도 있고 특별히 산을 타 본 적도 없기에 그렇다. 혹시 그저 정상을 간단히 올라갔다 내려오는 거면 모르지만 수 십 키로 미터를 종주 하는 것이고 거기다가 배낭까지 메고 가야 한다니 배낭무게하고 내 몸무게하고 비슷한 나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다. 사실 그런 이유로 전에도 몇 번 시도를 하려다 포기하곤 했다.
반신반의 하면서 근 일주일을 앞산을 오르내렸다.
내 마음이라는 것이 언제나 나도 몰래 움직이는 통에 그냥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자는 차원이었다. 그러다 정말 갑자기 마음이 움직였다. 그 어떤 무게가 나를 짓누르면서 그것을 어찌해서든지 지고 천왕봉에 올라가 떨어트려 놓고 싶었다. 겁도 안 나는 것이 아니었지만 내 마음이 가지는 무게가 육체의 고통을 하잖게 여기게끔 무르익었을 때 결국 내 마음은 지리산 정상에 올라가 있었다.
연휴에는 여수 앞바다나 양구 산속으로 도망가는 통에 늘 같이 하기가 어려운 친구에게 전화를 거니 마침
시간이 빈단다. 그 친구는 언제나 마음이 넉넉하여 여행 동행자로는 저승까지 같이 가기에도 부족함이 없고 같은 우주의 시간 때에 산다는 것이
고맙게 생각되는 둘도 싫은 친구다.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이번 주는 연휴로 딱 한번 밖에 받을 수 없는 테니스 레슨을 받으러 나갔다. 내
공치는 스타일이 늘 타이밍이 없단다. 발리도 연결 동작으로 해서 리듬이 안 맞는 다는 것이다. ‘하나’에 기다리고 ‘둘’에 치란 코치의 말이
나에게는 무슨 성경구절의 한 마디처럼 가슴에 와 닿는다. 테니스 코치 열 댓 명 만난 중에 이 시골에서 정말 제대로 된 코치를 만나 하늘에
고마움을 느끼는 요즈음이다.
서브 연습하다 근육이 좀 늘어 난데다가 일정도 있어서 나는 레슨 후 불이 나게 공을 주워 바구니에 담고
차를 몰아 작업실에 돌아왔다. 아침을 먹고 골프 연습 공을 망에 좀 친 후에 나는 마지막 지리산행 강화훈련을 위해 테니스 레슨 복장인 반바지에
반팔 차림으로 등산화만 갈아 신은 후 후다닥 서운 산으로 향했다.
가장 빠른 가파른 길을 택해 정상에 오른 후 어제 새롭게 개척한 ‘좌성사’ 쪽 능선을 밟아 내려갔다.
아무나 무념으로 걷기만하면 철학자가 쉽게 될 수 있는 능선 길을 따라 내려가다 막판에 약간 길을 잘 못
들긴 했지만 그래도 좌성사 대웅전 바로 뒤의 약수터에 도착할 수가 있었고 물을 한 모금 벌컥거리며 들이키니 서운산과 내가 가지는 삶의 무게
모두를 삼켜버린 듯하다. 그리고는 다시 대웅전 앞, 다 깨져가고 색이 바랄대로 바란 플라스틱 의자에 앉으니 저 멀리 청룡 저수지와 그 아래로
보이는 입장시내와 여기 저기 늘어져 있는 공장들의 파란 지붕이 멀리 아스란 하게 보인다. 공장들만 없다면 ‘부석사 대웅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
보는 경치만 크게 못하지 않다.
적당히 땀이 식을 즈음 다시 온 길을 재촉하여 걸어 올라가 정상에 도달한 후 늘 내려가는 석남사 뒷길을
포기하고 아까의 빠른 길을 택해 걸음을 재촉한다.
벌써 열한시 반이 넘어 시간이 촉박하다.
작업실에 와서 어제 윗집 친구한테 빌린 등산 장비 일부와 내가 십년도 넘게 보관만 하던 가스통과 가스버너를
꺼내 점검을 해 보니 가스버너 입구는 녹이 슬은 것이 아닌가? 가스통에 그것을 연결하고 버너 주머니 속에 있던 역시 10년도 넘은 일회용
라이터로 불을 붙이니 신기하게도 불이 잘 붙는다. 그 불꽃을 바라보노라니 마치 십여 년 전 여행을 가서 그것들을 사용하던 때로 갑자기 내가
돌아가는 듯하다.
침낭을 보니 청색의 침낭 주머니는 완전히 빛바랜 회색빛이지만 제법 북데기가 큰 것이 산에서는 유용하리란
생각에 다른 것들과 함께 윗집 친구에게 빌린 배낭에 집어넣고 또한 빌려온 등산화를 보니 너무 투박한 것 같아 등산화는 다 뜯어진 나의 만 원
짜리 싸구려 신발을 그냥 신고 가기로 했다. 눈길을 걸을 것도 아닌데 그냥 신던 것이 편할 것 같았다.
그럴 즈음 친구가 하남 톨게이트를 통과 중이란다.
난 얼른 어머니기 비벼 주신 비빔국수를 게눈 감추듯이 해 치우고 차에 올랐다. 하지만 시간 관계상 부식 사는 문제는 가면서 해결해야 할 것 같다. 배티 고개를 넘어 백곡 농협에 들려 라면과 햇반 그리고 과자 서너 개를 사고 차를 몰아가다 기름을 넣고 약속 장소인 오창 아이씨 근처에 들리니 이미 벌써 도착한 친구가 반갑다.
중부를 내리 달려 대진 고속도로에 접어들어 달리다 팔팔 고속도로로 꺾어서 지리산 아이씨로 빠져나가니 전혀
막힘이 없던 고속도로 덕에 너무 일찍 도착을 했다.
우리는 실상사를 볼 요량으로 실상사로 향했다.
입구에 차를 세우고 다리 앞 돌 장승을 지나 실상사에 들르니 절간이라기보다는 그 옛날의 어느 부잣집에 들른 기분이다. 절간하면 우선 진입로의 숲길과 계단이 연상되고 냇물이 연상되고 산이 연상되지만 평지절인 이곳은 그저 alt밋한 공간에 조촐하고 조용하게 자리하고 있다 보니 그런 느낌이 드나보다.
사천왕상이 버티고 있는 문을 지나 안에 들어가니 한 낮의 절이 다 그렇듯이 중은 전혀 보이지 않고 다실에
일하는 사람과 빗질하는 행자만이 한가함을 더한다. 빗질을 하는 건지 도를 닦는 건지 구별이 안 가게 그저 빗자루만 좌우로 흔들릴 뿐이다. 아직은
낙엽을 모으기가 좀 일러서 아마 빗질 연습이라도 하는 모양이다.
그 화선지에 밑그림을 그리는 남녀가 길을 가로 막는데 그들은 건물을 그리는 것이 아니고 그 한적함을 그리는 것만 같다.
두 개의 아담한 탑 뒤에 조용한 시골여자의 자태처럼 소박하고 자그마한 대웅전이 있는데
사방의 풍경들은 모두 거세가 되어 붕어와 알이 없다. 풍경소리만큼의 작은 소리에도 이 적막이 놀라 자빠지나 보다. 대웅전 속의 불상은 금빛으로 세상을 밝히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퇴색한 단청들 사이에서 그 휘황찬란함을 폼 내고 있다. 불상 머리 위 좌우에서 튀어 나오는 두 마리의 용의 모습은 그 퇴락함으로 인해 오히려 친근하기만 하다. 크기에도 불구하고 용머리라기보다는 무슨 뱀이나 미꾸라지 머리 같기만 하다.
옆 건물의 불상은 철조불상으로 금딱지를 붙이지 않은 것이 너무 고맙기 만하다.
녹슬고 손 때 묻은 모습과 함께 세월의 흐름을 고스란히 이고 있는 그 불상이 비록 화려하지는 않지만 너무도 인간적이고 소박하여 사람들의 부족한 신심을 자아낼 만하고 인간의 허황됨을 나무라는 듯하다. 애시 당초 불심하고는 거리가 먼 나이기에 철조가 풍기는 졸깃졸깃한 느낌이 아무리 나의 불심을 불러내려고 애를 쓴다한들 어림없는 노릇이다.
대충 절간을 돌아 왼 편으로 가니 또 다른 건물이 있고 입구에는 그 대웅전에서 때온 풍경의 알하고 붕어가
매달려 있다. 문이 하도 자고 낮아서 머리통을 조심하란 뜻인가 보다. 그 재치를 재미있어 하기 보다는 원래 소리를 내려고 만들어진 물건이
어이없는 용도로 전용되고 있는 모습이 나를 약간은 슬프게 만든다.
안의 불상을 보다 그 돌 툇마루에 걸터앉아 마루를 어루만지니 자귀로 무 자르듯이 깎아 만든 그 거칠은 맛을
통해 옛사람들의 여유로움을 느낀다.
그 뒤쪽에 있는 부도와 머리와 거북이 받침만 남은 비석을 보고 돌아 나와 다시 차에 올라 산내에 들려 우리는 삼겹살을 사며 캠핑장을 물으니 달궁으로 가란다.
내일 비박을 미리 예행연습을 하는 차원에서도 숙소를 별도로 안 정하고 야영을 하기로 한 것이다.
좀 더 가니 후덕하게 생긴 여자 매표원의 웃음이 나오고 좀 더 가니 ‘달궁자동차야영장’이 나온다.
야영장에는 이미 두서너 개의 텐트가 쳐져 있고 매점도 있지만 성수기가 훨씬 지나서인지 입장료는 별도로 받지 않았다.
근 한 달을 유럽 캠핑장을 헤맨 나로서는 이곳이 특별한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 정도면 유럽 캠핑장에 크게 뒤 진다고 할 수는 없지만 확실한 차이는 역시 전기 시설이 없다는 것이고
바닥이 맨 땅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공짜라는 점을 감안하면 유럽의 캠핑장보다 훨씬 나은 건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수돗가에 텐트를 쳤다. 이 텐트로 말하면 유럽에서 수많은 고생을 안겨줬던 바로 그 텐트와 똑 같은
것이다. 한 개를 남겨 두었는데 여기서 이처럼 유용하게 쓸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간단히 텐트를 치고 우리는 불을 지펴 사가지고 온 삼겹살을
구워 친구가 가지고 온 강원도에 직접 캐서 담아두었다가 가지고 온 더덕 주를 곁들이니 이만한 만찬도 힘들 듯하다. 마무리로 끓인 라면이
‘돼지곱창’을 눌러 쌓으니 배가 묵직하다.
짬을 내서 밑에 깔 돗자리를 사러 매점에 들르니 매점을 지키고 있는 주인은 의외로 초등학교 고학년이나
되었을까 하는 똘똘하게 생긴 까까머리다. 하지만 계산은 ‘야물딱져서’ 핸드폰 충전을 위해 코드를 꽂는 것도 비용이 천원이란다. 비누와 수세미를
곁들여 사니 계산에 빈틈이 없다. 그 녀석 다른 것은 몰라도 산수는 잘 할 것만 같다.
설거지를 끝 낸 후 내일 아침 이른 산행을 위해 우리는 오로지 잠을 잘 일 이외는 할 일이 없다. 뒤
텐트에서 칭얼대는 젊은 부부의 어린 애들 울음소리를 자장가 삼아 나는 깊은 잠에 드니 오늘 하루의 빡빡한 일정에 지친 내 몸은 금방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밤새 등짝에 한기를 느꼈지만 그런 대로 깊은 잠을 잔 후 다음 날 나는 다섯 시도 훨씬 전에 일어났다.
어제 잠자리 바로 전에 먹은 삼겹살에 약간 불편해진 속을 화장실에 가서 달래고 코 골며 자는 친구를 깨우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쓰며 짐들을 대충
챙기다 결국 날이 밝아서 친구를 깨워 우리는 짐을 정리했다.
누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대로 성삼재 바로 밑 길가에 차를 대고 짐을 챙겨 성삼재를 지나 산행을 시작하니
7시 반 정도 된 시간이다. 한 참을 올라 성삼재 휴게소에 들려 우리는 아침을 라면과 햇반으로 해결한 후 산을 오르기 전에 나는 수건 두 개를
꺼내 내 배낭의 등걸이 부분을 보완했다.
배낭의 무게가 몸에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그것보다 정작 더 괴로운 것은 거깨를 파고드는 배낭끈이었다. 빌려온
배낭은 오래 돼서 인지 끈의 쿠션부분이 얇아져서 도저히 그 상태로 계속 산행을 할 수 없어 궁여지책으로 그런 방도를 썼다.
마침 내가 어느 날 처제네 가게에 가서 주은 끈을 차에 갖고 다니다가 산에 오르기 전에 혹시나 싶어서 챙겨 온 것으로 수건을 동여매니 그런 대로 안성맞춤이다.
짐 정리할 때 나보다 덩치도 좋고 마음도 좋은 친구가 짐을 더 떠 맡아 내 짐은 비교적 가벼운 편이었지만
그래도 역시 배낭의 무게가 날 계속 괴롭혔다. 이처럼 무거운 짐을 미련하게 지고서 능선을 오르내리자니 둘째 놈 어릴 적에 같이 여행 다닐 때,
무겁다며 제대로 무등 태워 주기를 못해 준 것이 괜 실이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이 고생의 십분의 일만 놈한테 투자했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좋은
아빠로서의 이미지를 갖게 되지 않았을까?
그런 식으로 한참을 오르는데 옆에서 같이 걷던 여자 둘과 남자 한명의 일행 중 남자 한명이 내 어깨 끈을
보더니 “아! 저 예사롭지 않은 재치! 아니 그런데 이 끈이 팬티 끈 아녀?”
하는 것이 아닌가? 그 끈을 옷 부자재 수출하던 동서의 가게에서 가지고 온 것이니 그 친구의 말이 맞을 성싶다.
팬티 끈을 바로 코 밑에 걸치고 지리산을 휘적거리고 있다니 산신령이 알면 놀라 자빠질 일이다. 산신령도 팬티를 입나?
노고단 대피소에 들려 늦은 아침을 해 먹으려니 연휴 기간이라서인지 대피소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적당히
버너에 불을 붙여 라면을 끓이고 햇반을 넣어 먹으니 늦은 아침이라서인지 잘 넘어 간다. 설거지 할 수가 없어 대충 코펠을 정리하고 다시 짐을
챙겨 배낭을 짊어지니 발이 제법 무겁다. 하지만 갈 길을 생각하면 이제 초반에 불과하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친구와 길을 재촉해 나갔다.
길은 계속 이어지고 임걸령과 노루목을 지나 삼도가 만난다는 삼도봉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맑은 날씨로 구례지방과 우리가 지나온 능선이 쭉 이어지고 저 멀리 노고단 지역이 희미하다. 힘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저 만큼 걸어 왔다는 것이 대견하기만하다.
지리산의 남쪽과 북쪽 사람들의 장터 역할을 했다는 화개재에 다다르니 바로 밑이 뱀사골 대피소이다. 이제
벌써 점심시간이 다가 온지라 천상 뱀사골대피소에 들려 점심을 해결해야 한다. 지리산 그 어느 곳에서도 원칙적으로 캠핑과 취사가 금지되고 담배
피는 것도 금지다. 걸리면 돈이다. 그런 문구가 여기저기 있다 보니 겁 많은 나로서는 당연히 지정장소다.
그런데 친구가 뱀사골이란 이름에 대해 투덜거린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뱀골이면 뱀골 사골이면 사골 하면 될 것을 왜 굳이 뱀사골이라고 했는지 의문이다.
뱀사골도 사람이 북적대긴 마찬가지다. 나는 야외용 나무 탁자에 자리를 잡고 버너에 불을 붙인 다음 매점에
들려 테이프가 있는 지를 물었다.
어제 밤에 잘 때 십년도 넘게 처박아 두었던 침낭을 제대로 점검도 안 하고 가지고 왔더니 지퍼가 고장이 나있었다. 둘이 아무리 궁리해도 도저히 잠글 수가 없어서 그냥 덮고만 잔 덕에 등짝의 한기가 견디기 힘들었었다.
그런데 오늘 밤은 기온이 더 낮은 곳에서 비박을 해야 하는데 그대로라면 추위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을 것이다. 침낭은 원래 덮개가 아니고 그 속에 쏙 들어 가서 잘 때 그 효용성이 극대화되는 것이니 그렇다. 따라서 궁리 끝에 그 지퍼부분을
빙 둘러 테이프로 붙여서 임시방편으로 잠을 자기로 하고 노고단에서도 테이프를 찾았지만 없다는 것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뱀사골 피난처의
매점에 물어 보니 파는 것은 없고 자기들이 사용하는 것이 있단다. 그것을 사용하고 나머지는 반납을 하라는 것이다.
그래 한 곁에 쭈그리고 앉아 그것을 침낭에 붙이려고 하는데 아까부터 주변을 얼쩡거리며 사람들에게 감시의
눈초리를 보내던 쫄쫄이 바지 입은 날렵하게 생긴 관리인 같기도 하고 관리인 친구 같기도 한 사람이 다가와 자기가 고쳐 줄 테니 망쳤다고 하지는
말란다.
이 침낭의 자크 부분이 한 줄로 되어 있고 자크 오므리는 부분이 어디로 떨어져 나가 없고자크 머리 부분만 있는 통에 잠글 수가 없어 포기한 마당인데 어찌 한단 말인가?
좋다구나 하고 얼른 건데 주니 이 친구 내가 가지고 있던 맥가이버 칼의 가위를 꺼내 자크의
중간을 싹둑 잘라 버리고 그것을 오므리는 부분으로 해서 자크 머리를 잡어 넣고 당기니 자크가 간단히 잠가지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자른 부분을
끈으로 찡찡 동여매니 졸지에 덮개 역할밖에 못 하던 놈이 침낭으로 요술부리듯 바뀌는 것이 아닌가? 깔고 앉은 곳에 산삼이 있다고 정말 엉뚱한
곳에 구세주가 있었던 것이다.
지옥에도 부처가 있다는 말은 여기서도 맞는 말이다.
즐거운 마음으로 어제 먹다 남은 삼겹살을 구웠다. 좀 불안한 마음을 없애기 위해 친구는 푹 굽자면서 연신
뒤집어 싼다. 난 대충 되었다 싶어서 대뜸 입으로 가지고 가니 맛이 있다.
마침 옆에 젊은 친구 둘이 있어 안주 없이 컵라면으로 소주를 들이키는 것이 안 되었던지 여유롭기만 친구가 얼마 남지 않아 그 아깝기만 한 삼겹살을 냉큼 집어 준다.
역시 대충 종이로 설거지를 한 후에 그 곳을 나와 다시 능선을 올라탔다. 토끼봉, 명선봉을 지나면서 가끔씩
보이는 주봉인 천왕봉과 지리산 남쪽 능선들을 바라보는 맛이 좋다. 아직 단풍은 좀 이르지만 그래도 고지대에는 초록 속에 군데 군대 박혀 있는
단풍들의 붉으죽죽한 색이 주는 맛은 배고플 때 팥밥을 먹는 맛이라고 할까? 예쁜 얼굴에 박혀있는 주근깨를 보는 맛이랄까? 봄날 동백꽃 밭에 서면
비슷한 느낌이 들까?
멀리 남쪽으로 도망가는 능선들과 옆으로 빛은 받은 들쭉날쭉한 능선들의 합주는 끝이 없이 이어지니 온 천지가
지리산인 것만 같다.
그래서인지 친구도 “전라도 지날 때 맨 집과 마을과 도시만 보였던 것 같은데 이렇게 넓은 산악지대가 있었다니 신기하네!” 한다. 눈이 보는 범위 안에서만 현상을 파악하려드는 인간의 한계가 이런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하여간 지리산도 큰 산인 것만은 분명하다.
좁은 작업실 땅 풀 뽑기도 봄이 지나자마자 그 넓이에 기가 질려 포기하고 구경만 하는 나로서는 더더욱 지리산이 크게 다가오는 것은 당연하다.
사람들이 수없이 다녔겠지만 그래도 높은 산이라서인지 길은 좁다. 하지만 많은 경우 그 좁은 길을 시누대
사이로 꼬불꼬불 빠져 나가게 되어 있어서 그 놈들이 무릎을 스치는 소리가 세상의 온갖 번뇌를 다 잊게 하는 영험한 효과가 있다. 그 이파리들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걷는 맛은 여인의 머리칼을 어루만지는 느낌과 비길만하다.
이어서 원래 비박을 하기로 한 연하천대피소에 도착을 하니 근 십 키로 미터를 넘게 걸어온 우리로서는 이제
정말 지친다. 물론 그 긴 거리를 계속 오르기만 하는 것은 더욱 어렵겠지만 이 지리산 종주라는 것이 도대체 오르막 내리막 하는 통에 아주 걷기가
죽을 맛이다.
올라갈 때는 숨이 턱에 차다가도 또 금방 내려가는 길을 만나는데 그게 쉬운 것 같아도 또한 그만큼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에 길이 내리 꽂히기라도 하면 더욱 불안하다.
인생이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다는 교훈을 가르쳐 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그게 수없이 반복되는 데는
질리지 않을 수가 없다. 지리산 종주는 평지라서 쉽다는 인간들의 말을 그때마다 이를 갈며 저주를 했다. 특히 나같이 성질 급한 놈한테는 그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이 꼭 누구 한 텐가 약 올림 당하는 것 같아서 싫다. 공수부대 구보라는 것이 있는데 막 뛰다 천천히 걷다를 반복하는
훈련인데 이 지리산 종주가 그와 유사하다.
암튼 땀이 났다 식었다 하는 통에 정신의 혼이 나갔다 들어 왔다하는 것만 같다.
그런 연속이 지리산 종주다.
연하천 피난처에 왔을 때는 이제 그런 반복에 대한 좋고 나쁨의 감정을 벗어나 그냥 기계적인 동작의 연속으로 몸에 입력이 되어 있을 즈음이지만 그래도 아직 입에 백태가 낄 정도는 아니어서 아직은 살만한 그런 때 쯤 도착을 한 것이다.
역시 그 조그만 산장에도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도대체 여기 어디 비박을 할 공간이 있을 성 싶지도 않고 여기가 노고단과 지리산의 반 쯤 되니 내일 천왕봉에서 내려갈 7-8킬로미터를 생각하면 어렵더라도 다음 산장까지 가야 내일이 편할 것 같아 우리는 물을 마시고 엉덩이를 잠시 붙인 후 다시 길을 나섰다.
갑자기 친구가 서두른다.
아직 어둘려면 시간이 많이 남았고 거리도 그리 멀지도 않은 거리인데도 쉬면 퍼진다는 말을 연속하면서 서두른다. 등을 누르는 배낭끈의 무게가 살을 파고드는 느낌이지만 그런 부분적인 아픔은 몸 전체가 느끼는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지 별 감각이 없을 정도까지 되어 버렸다. 그저 열심히 친구를 쫓아가다 보니 형제봉이고 드디어 벽소령피난처이다.
벽소령 피난처에 들려 우리는 먼저 잠자리 문제부터 알아 봤다.
비박은 매점 앞 마루 위에서 자면 되고 사람이 모이면 거기도 자리가 없으니 얼른 자리를 잡는 것이 장땡이란다. 친구와 나는 얼른 비닐 돗자리를 펴서 자리를 확보하고 라면을 끓였다. 저녁을 간단히 마무리 하고 나니 마이크로 예약자를 찾고 펑크난 자리를 차례대로 부르는데 그 차례라는 것이 특이한 방식이다.
줄은 선 순서도 아니고 먼저 도착한 순서도 아니고 그냥 자기들이 만든 기준에 의해서 불렀다.
먼저 노약자 그리고 60대 이상 그리고 여성 그리고 50대 이상 그 다음이 40대 이상 뭐 이런 순으로 불렀다. 그 만큼 해약자 자리가 많았다. 우리도 맘만 먹었으면 방으로 들어 갈 수가 있었지만 우리가 잡은 공짜 자리가 워낙 좋고 아까워서 우리는 그 자리를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에 매점에 물어 봤을 때에 마루가 침낭 속에 들어가면 오히려 덥다는 것이다. 사실
마루가 집밖이라고는 하지만 지붕도 있어서 이슬이나 서리나 비로부터 보호가 되고 바닥도 나무 바닥이라 말하자면 웰빙 구조인 셈이다.
거기다가 옆에 있던 지리산 ‘타자’인 것 같은 사람이 “안에 들어가 봐야 더 불편해요. 좁아서 옴짝 달짝도 힘든 데다가 코고는 놈, 이가는 놈, 더듬는 인간들 해서 차라리 밖이 훨씬 편해요”라는 말도 들었기에 이래저래 우리는 그냥 처음의 자리를 고수했다.
사실 산에 오기 전에 들은 이야기로 잘 아는 도자기 작가의 부인 되는 분이 이년 전에 지리산 산장에서 잠을
잤는데 비싼 등산화를 벗어 놓고 산장에 들어갔다가 다음 날 신발이 없어져 백방으로 찾다 못 찾았다는 것이다. 결국 할 수 없이 남의 신발을
자기도 훔쳐 신고 가는데 뒤에서 마이크로 “남의 신발을 신고 간 사람 빨리 돌아 오시요!”라는 방송을 연신 하는 것을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줄행랑을 쳤다는 것이다.
그 분이 아주 독실한 카톨릭 신자인데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는 것이다.
산에서 신발을 잃어버리는 것과 신혼여행 가서 신부 잃어버리는 것과 비교가 될까?
수중침투 간첩이 물갈퀴를 잃어버리는 것하고 비슷 하려나?
그런 저런 생각을 뛰어 넘어 우리는 탁월한 결정을 내린 것만 같아 아주 기쁜 마음으로 이른 저녁 잠에 빠져
들어 갔다. 밖에 외등이 걸려 안대를 차에 놓고 온 것이 후회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귀마개는 확실히 챙겨 왔음으로 낮에 고친 침낭
속에 머리를 박고 피곤한 몸을 추슬러 잠을 자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생전처음 자는 지리산의 밤은 그렇게 친구의 코고는 소리와 귀마개 너머로 약하게 들리는 주변의 웅성거림과 함께 깊어 갔다.
매점근무자가 말한 것처럼 오히려 더워서 자다 바지를 벗고 그래도 부족해 다시 얇은 잠바까지 벗고 잠을
잤다. 새벽에는 머리가 약간 시원했지만 잠자기에 불편한 정도는 아니었다.
네 시쯤 깨서 화장실에 들려 볼 일을 보고 나는 주섬주섬 짐을 쌓다.
어제 알아 본 바로는 여기서 삼 킬로 정도 가면 ‘선비샘’이란 곳이 있는데 여섯시 반까지 거기가면 해돋이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자면 서둘러야 하기에 일단 코고는 친구는 제쳐 놓고 열심히 내 짐을 정리하고 친구마저 깨워 이마에 랜턴을 붙이고 길을 나섰다.
이제껏 어디를 가서 그 놈의 해돋이를 보려고 여러 번 발버둥을 쳤지만 아직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는
지라 이번에는 꼭 보리란 욕심에 자연히 발길이 빨랐다. 근 한 시간 정도를 걸으니 서서히 사방이 밝아 오는 중에 선비샘에 도착하니 벌써 사방은
밝은데 해는 코백이도 볼 수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거기는 그럴 만한 곳이 아니었다.
앞에는 주봉인 천왕봉과 연결된 능선이 동쪽을 가로 막고 버티고 있는데다가 주변도 나무나 능선에 가리어 해 뜨는 쪽으로 시선이 트여 있지가 않아서 도저히 해돋이를 볼 수 없는 곳이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서 좀 더 올라가 시야가 비교적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아무리 해를 기다려도 분명 해는 많이 올라 온 것만 같은데도 처음에 약간 붉은 기가 살짝 비추는 듯 하더니 그것으로 끝이다.
어이없고 분한 맘이 가시지를 않는 노릇이지만 달리 방법이 없는지라 우리는 또한 발길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아침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세석산장까지 가야만 하는데 거리가 만만치 않고 빈속으로 걷는 길인데다가 어제의 근육 맺힘 때문인지 발이 무겁고 한참을 가서는 속이 약간 메스껍기 까지 한 것이 아닌가? 그래도 어제 자기 전에 친구가 ‘맨소랜담’도 발라주고 안마도 해 줘서인지 어깨는 비교적 통증이 없어 배낭의 무게가 부담이 되지는 않는다.
하긴 그동안 여러 끼를 먹었으니 부식을 주로 넣었던 내 배낭은 무게가 많이 준 상태라서 그런지도 모를 일이다.
겨우 세석산장에 도착해서 라면을 지겨워하는 친구를 위해 나는 참치캔과 햄을 사고 김치를 넣어서 찌개를
끓였다.
유감스럽게도 간이 맞지 않아서 라면을 하나 뜯어 스프를 넣으니 그런대로 간도 맞고 맛도 먹을 만큼 되었다.
처음에는 부대찌개 같았지만 거기다 햇반을 넣어 끓이니 말만 듣던 ‘꿀꿀이죽’이 이런 것이 아닐까 싶었지만 배고픈 배는 아주 반가워하기만 한다.
한껏 부른 배와 배낭을 짊어지고 우리는 다시 마지막 박차를 가했다.
장터목 가는 중에 어떤 이의 애 머리통만한 배를 한 조각 얻어먹으니 꿀맛이다.
계속되는 산행 중에 우리의 눈은 자연히 그 짙기를 더해가는 천왕봉과 그 주변의 단풍에 자꾸 시선을 가져갈 수밖에 없었다. 거기가 우리의 고통의 종착역이기에 피곤한 몸을 앞서 눈이 먼저 가는 모양이다.
장터목산장에 다다르니 이제 마지막 1.7킬로미터만 남았다.
여기서 부터는 간 길을 돌아와야 하는 길이다. 따라서 배낭에 금붙이가 없는 한 그냥 여기다 벗어 놓고 갔다 오면 되는 곳이다. 특히 나의 다 헤진 배낭은 더욱 그렇다.
하지만 나는 처음에 그냥 지고 가려고 했다. 편하려고 산에 온 것이 아니고 몸의 괴로움이 정신의 혼란함을 정리해줄 것 같은 생각에서 지리산에 오른 마당에 요령을 부린다는 것이 우스워서 그런 생각을 했다.
누군가 배낭을 놓고 가라는 충고에 친구가 “이 친구가 고통을 그냥 지고 간데요”라고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내가 가지고 가면 자기도 가지고 간다는 것이다.
나는 내 마음의 짐을 덜겠다는 부질없는 생각으로 친구까지 고생시킬 일이 있을까 싶어서 그냥 배낭을 놓고 가기로 하고 산을 오르는데 특별히 배낭을 내려 놨다고 몸이 가볍게 느껴지지 않았다. 고통이 내 삶의 일부가 되어 있듯이 이미 배낭은 내 몸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마지막 코스는 주봉을 오르는 길답게 가파르고 힘이 들었다. 금방 봉우리려니 하고 돌아서면 다시 고개가 있고
계단이 기다리고 있기를 몇 번인가를 하다 결국 정상에 올랐다.
정상에는 사람들로 역시 바글바글하고 시야가 확실하게 트여서 사방이 시야에 들어 왔지만 올라오면서 무시로 봤던 조망이상이 아니어서 특별히 어떤 감흥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의외로 싱겁기만 한 정상탈환 그 자체다.
이곳은 내가 지고 올라온 고통의 무게를 내려놓을 자리도 없고 앞으로 살아감에 있어서 내 짐을 덜어 줄 그
어떤 위안의 건데기도 없다. 사람들의 시끌시끌한 소음과 뻥 뚤린 공간의 깊이와 거짓말처럼 파란하늘에 백발로 붙어 있는 구름들의 휘날린 자국만이
날 가소롭게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나는 다시 어디로 가야할까?
천상 설악으로 가야하리라. 그래 다음은 공릉능선이다. 그 다음은 그 다음에 가서 생각하면 될 것이다.
친구와 나는 그래도 무슨 커다란 숙제를 풀기라도 한 듯한 마음으로 천왕봉을 내려왔다.
장터목 산장을 거쳐 내려오는 길도 의외로 만만하지 않다. 초반에는 오르락내리락 하는 길의 연속이어서 의외로 식은땀을 다시 만들어 내야하는 데다가 끝없이 돌부리로 이어지는 길은 몸에 충격도 오고 무릎에 무리가 오는 통에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그 와중에도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성삼재 방향으로 돌아 갈 사람을 찾았지만 그런 사람이 없다. 결국 밑의
식당에 도착해서 점심 겸 저녁을 때우고 그 주인이 모는 택시에 합승을 해서 성삼재의 내 차 있는 곳으로 와서 전주 시내로 향했다. 시내에 들어
와서 우리는 찜질방에 자릴 잡았다.
먼저 샤워를 하고 뜨거운 물에 근육을 푼 다음에 찜질방으로 들어가 나는 안대와 귀마개를 하고 빈 방에
피곤한 몸을 누이니 잠이 깊이 들었다.
두시쯤 눈을 떠 뒤척이다 다시 잠이 들어 눈을 뜨니 밖이 훤하고 시계를 보니 여덟시다.
사워를 하고 친구를 기다려 아침 콩나물 해장국 집을 갔다.
연휴 날 이른 아침인데도 꽤 많은 사람들이 식당에 자리를 잡고 있다.
콩나물 해장국을 시키니 작은 계란 프라이가 두 개가 덤으로 나오고 찐 계란은 양껏 먹을 수가 있고 모주가 나오는데 그 맛이 술 못하는 내 입에는 너무 딱 맞는 그런 맛이다.
막걸리에 한약재를 섞었다는 그 술은 우선 쓰지 않고 달짝지근하고 부드럽고 시원해서 마시기에 너무 좋았다. 아쉽게도 나는 운전을 해야 하는 통에 한 모금만 마시고 나머지는 다 친구 몫. 빈속에 들어간 한 모금도 얼굴의 색을 바꾼다.
일찍 올라가기도 뭐해서 나는 금구에 사는 전부터 알고 지내던 어느 스님을 찾아가 차를 한잔하기로 하고
찾아가니 올 봄에 왔을 때 보다 많이 정리가 되어 있다.
원래 산지기의 집이었던 것은 정리해서 쓰는 집으로 새소리만 들리는 나지막한 산중에 있는 집으로 그 조용한 정취가 한없이 정감어린 그런 곳이다.
차 맛 모르는 나로서는 그저 분위기에 취해 따라 주는 차를 거푸 마시다 점심을 먹으로 가잔다. 한참을 김제
쪽으로 가니 저수지가 나오고 저수지 변에 커다란 포장마차가 있고 세 명의 스님 친구가 기다리고 있었다. 포장마차 앞에는 미꾸라지 통이 있고 그
옆으로는 커다란 뱀장어가 갇혀 있는 물통이 있고 그 사이로 어릴 적 많이 봤던 물뱀 같은 것이 들어 있는 통이 있는데 그게 ‘음지’라는 것으로
몸에 그렇게 좋아서 그 탕을 먹고 십분만 지나면 몸에서 열이 팍팍 난다는 것이다. 글쎄 나도 몬도가네식 식사습관이 있기는 하지만 좀 게름직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냥 단순히 잔챙이 붕어와 새우와 ‘씨레기’가 들어 있는 걸죽한 매운탕과
입담이었다. 50 전후의 남자들이 쭈그리고 앉아서 토해내는 입담은 토해내는 이나 받아 주는 이나 다 같은 통속이다. 그 중 특히 두 명의 전라도
사투리 섞인 어투가 토해내는 입담은 가히 매운탕의 맛을 뛰어 넘는 아주 걸걸한 맛이다.
한 사람이 자기는 볼일을 보면 물줄기가 사 미터는 뻗친다는 것이다.
그러니 옆에 있던 이가
“하이고! 성님, 지붕에 올라가서 일 보셨구마요잉! 거거이 천장까지가 삼 미터고 그 ‘덴조’ 부분이 일 미터니께 딱 맞는구마요잉. 거, 성님, 숫자관념이 아주 기가 막히요잉!”
시의원 한다는 키가 크고 배가 불뚝한 그 분은 눈만 껌벅껌벅하더니 커다란 총각김치를 통째로 입으로 들이 민다.
“원래 김치라는 것은 쇠를 대면 맛이 없고마요잉! 그냥 먹어야제!”
무 부분에 이어 이파리 부분까지 그 큰 입속으로 통째로 빨려 들어가는 모습을 보노라니 복잡한 내 머릿속의 그 무엇이 통째로 빠져나가는 것만 같다.
더 같이 시간을 하자는 것을 마다하고 나와 친구는 열심히 차를 몰아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의외로 길이
한적하여 대전 지나 잠깐 밀리고는 그냥 내뺄만해서 예상했던 시간보다 훨씬 일찍 우리가 처음 만난 곳에 도착했다.
친구와 나는 악수로 아쉬운 여행을 마무리하며 다음을 기약했다.
“고맙네, 친구! 잘 올라가게!”
실상사 담벼락.
알과 붕어는 날라가고 종만 남은 풍경.
나무와 하나가 된 퇴락한 실상사 단청.
장터목 산장에서의 친구.
정상에서 널부러진 나.
세석산장 바닥.
선비샘에서의 해돋이 같지 않은 해돋이.
금구에서의 특이하게도 세로 만든 비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