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미래 : 밥 딜런 혹은 디카시
김석준(시인. 문학 평론가)
1. 글쓰기의 영도 : 변화의 도정에 서서
급속도로 빠른, 감히 의식이 쫓아가지 못할 정도의 급진적인 변화에 모든 진리의 체계가 편승한다. 그것은 ‘빌어먹을 논리’의 반어적 현실이거나 문학혁명이 발생하는 형식의 전조이다. 모든 것이 변한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가치란 존재하지 않는다. 진리란 변화의 체계이다. 의미도 변하고, 그 의미를 지지했던 체제나 형식도 변화의 과정에 함몰되어 일거에 몰락하게 된다. 글쓰기의 영도의 지점에 서서 변화의 핵심을 바라다본다. 대저 밥 딜런이란 변곡점은 어떤 의미의 글쓰기가 누벼진 운명의 체계인가? 대중성 혹은 파격. 클리셰 또는 문학혁명. 도대체 글쓰기의 진실은 무엇인가? 새로운 형식과 의미 사이에 어떤 언어의 진실이 매개될 때, 시적 혁명이고, 클리셰인가?
난감하고, 알 수 없고, 변덕스럽다. 기호의 제국 혹은 의미의 절대성. 밥 딜런의 그것처럼, 바람만이 그 해답을 알거나 대답해줄 지 모른다. 마치 밥 딜런에게 허여된 운명의 기호가 글쓰기의 영도 전체를 회의하게 만들었던 것처럼, 클리셰와 시적 혁명 사이의 거리는 아주 우연한 계기가 만든 기대효과에 지나지 않다. 그것은 기대와 절망 사이의 반복적인 거리를 확인하는 환상이다. 늘 변화의 도정에 서있고, 변화만이 언어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문학의 사명으로 승인된다. 다시 말해서 글쓰기의 영도는 전복의 영도이자, 가수가 문학상의 수상자로 지명되는 어처구니없는 전복적 사태가 만들어낸 의외의 결과이다. 따라서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문학적이고 시적이며, 가히 문체반정이 일어나는 문학혁명의 전조, 즉 수 천 년 만에 시말이 통합되는 문학혁명의 실재이다.
이미지의 심급 앞에 모든 것이 전복되고 해체되는 21세기는 급진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그야말로 역동적인 세기이다. 변화만이 문학의 진실을 지시한다. 클리셰가 부정되었으며 마침내 파격과 일탈만이 표현의 참된 주체로 허락된다. 어쩌면 파격이나 일탈이라는 새로움으로 위장한 문학의 운명 앞에 밥 딜런은 문학의 역설적 위치를 지정하는 반어적 현실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까닭은 밥 딜런의 문학은 이제까지 이룩된 세계의 문학 전체를 조롱하는 대중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얻은 클리셰의 완벽한 승리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밥 딜런의 그것은 반전과 반핵을 주장한 오에 겐자부로의 서사를 대중적인 판본으로 노래한 아주 짧은 몇 마디의 가사에 지나지 않다. 밥 딜런의 수상 소감은 문학의 반어적인 위치를 역설적으로 드러내 보여준다. ‘놀랍다. 믿기 힘든 일이다. 누가 그런 것을 꿈꿔 볼 수나 있을까?’라는 역설이나 반어적 태도 말이다.
역으로 밥 딜런의 그것은 꿈 꿀 수 없는 서사가 실현되는 문학의 혁명적인 현실이다. 다시 글쓰기의 영도가 요구되고 또 변화의 도정에 서서 현대의 징후를 면밀하게 살펴볼 수 있는 실증적인 계기 말이다. 디지털혁명이 20세기 후반을 강타한 이후 이 세계와 소통하고 향유하는 방식 전체가 혁신적으로 변화했으며, 마침내 너 또는 나를 전혀 다른 존재의 차원으로 이끌어가게 된다. 말하자면 21세기는 전혀 다른 문화의 지형도를 구축함 동시에 실재와 이미지 사이의 거리를 무한히 확대하여 이미지가 실재를 대신하는 낯선 신기함으로 가득 찬 신기원의 세기이다. 아니 역으로 이미지는 의미를 지배하는 친숙한 실재의 장소이다. 이미지는 사유이고, 주체이고, 현실이다. 이미지는 너 또는 나를 포획한 영혼의 표상이자, 인간학과 세계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는 절대적인 실체이다.
이미지가 말하고, 이미지를 기호의 체계로 현현시켜 이 세계의 변화를 이질적인 코드로 혁신시키기에 이른다. 이를테면 글쓰기의 영도는 문화의 영도를 반추하는 의식의 거울이자, 이미지의 생산력이 빚어낸 언어의 혁신적인 운동이다. 이미지의 세대에게 문자는 낯선 강박의 허구이다. 문자를 압박하는 이미지의 역동적인 운동 혹은 이미지가 만든 문자의 신기원. 사실 밥 딜런의 노벨상 수상은 디카시의 존재론적 지평을 새롭게 성찰하는 계기가 되는데, 어쩌면 그것은 문자 조형력의 한계 너머에서 작동하는 예술의 신기원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막중한 사명을 간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직 완벽하게 개화를 하지 않은, 아직도 변화를 수용하는 다양체로 진화가 가능한, 바로 그 지대에 디카시가 위치해 있는 한, 그것은 미래의 문학이지 현재를 향유하는 결정된 판본이 아니다. 때론 무한히 진화를 거듭하는 디지털 환경과 더욱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때론 이미지의 위치를 실재의 위치로 고양 승화시키면서, 디카시는 미래의 문학을 대표하는 장르로 급성장할 것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변화의 과정 중에 있고, 앞으로도 무한히 변신이 가능한 디카시는 문자문학이 처한 암울한 전조를 새롭게 고양시킬 잠재력 역량이 무궁한 미래의 문학이다. 다시 말해서 디카시는 죽은 문자에 새로운 영기를 불어넣는 새로운 시문학의 판본, 즉 죽음의 공간으로 치달아가는 시문학에 관한 새로운 변이형이자, 시대의 진실과 적극적으로 조우하는 영원한 현재의 예술양식이라 하겠다. 마치 밥 딜런의 그것이 ‘귀를 위한 시’로 명명되었듯이, 일련의 디카시의 운동은 눈의 위치를 재조정하는 글쓰기의 영도에 해당한다 하겠다. 아직 그 목적지에 가지 않았고, 더 넓은 세계로의 웅비가 가능한 디카시의 이념은 가상과 현실 사이의 균열을 봉합하는 21세기 문학의 선두주자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디카시의 이념은 싸늘한 디지털 세기를 포용하는 아날로그적인 서정의 감성일 뿐만 아니라, 가상의 현실을 미적으로 승화시키는 인간학의 새로운 진경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전히 디카시의 미래 앞에 더 많은 실험성이 놓여있기는 하지만, 따라서 디카시의 완결된 판본을 현대성 위에 육화시키기 위한 엄청난 시간들이 산적해 있는 것 또한 사실이지만, 그것은 글쓰기의 영도를 재건하는 가장 숭고한 존재의 행위라 하겠다. 때론 죽음의 터널에서 고사 직전에 있는 문자예술을 이미지로 재건하면서, 때론 이미지와 문자의 결합을 통한 의미의 신기원에 도달하면서, 디카시는 자신만의 고유한 미적 체계를 건설 중이다. 더 나아가 디지털의 운용체계의 발전 속도와 동일한 궤도 위에 위치한 디카시는 어떤 이미지의 운명을 개척하여 문자와 결합할지 여전히 많은 가능성에 열려진 미지의 미적 양식이기도 하다.
2. 파격 혹은 클리셰
예술의 이념은 파격의 연속이고, 클리셰에 대한 거부이다. 반대로 대중의 취미는 클리셰의 형식적 반복이고, 파격의 거부이다. 우리는 어느 지대에 위치할 때, 가장 잘 살아낸 예술가의 운명인가? 엄밀하게 말해서 모드의 체계상 파격과 클리셰 사이에 건너거나 매개될 수 없는 의식의 심연이 존재한다할 때, 우리는 어떤 운명을 승인하는 예술가의 초상인가? 파격은 외롭고, 이해받을 수 없으며, 죽음을 걸어야만 비로소 이해의 심급에 도달하는 숙명의 전언이다. 마치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사이에 혹은 혁명적인 미적 인식과 매너리즘 양식 사이에 예술가의 운명이 총체적으로 노정되어 있듯이, 우리는 언제나 이것이냐 저것이냐 사이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미적 코드를 전유하게 된다.
특히 금번 노벨문학상의 수상자로 지목된 밥 딜런의 예는 파격과 클리셰 사이에 매개된 예술의 운명을 다시 한 번 성찰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이다. ‘위대한 미국 노래 전통 내에서 새로운 시적인 표현들을 창조해 낸 미국의 유명 포크록 싱어송 라이터 겸 시인 밥 딜런에게 올해 노벨문학상의 영예를 수여한다.’라고도 했고, ‘밥 딜런은 귀를 위한 시를 쓴다. 그의 작품은 시로 옮겨놓아도 완벽하다.’라고도 했다. 노벨상 대변인의 이러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분명 충격적이고 파격적인 장면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수상자 선정의 담론에 내재된 ‘음악의 전통 속에 새로운 시적 표현’과 ‘귀를 위한 시’라는 어구가 함의하는 의미를 정확하게 파헤치는 것이 관건이다. 특히 밥 딜런의 대표곡에 해당하는 「blowing in the wind」와 「knocking on heaven's door」의 시적 가치를 고찰하는 것은 의미 있는 작업이다.
솔직하게 말해서 밥 딜런의 수상이 파격적이지, 밥 딜런의 시문학 자체가 파격적이지는 않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서 밥 딜런의 그것은 모드의 반복이 허락되는 클리셰이지 새로운 미적 양식을 창조한 파격의 한 전형은 단연코 아니다. 어쩌면 밥 딜런 사태는 한림원의 파격적인 해석이 낳은 치명적인 오류의 결과 즉 예술의 파격적인 해체를 주창하는 미적 파격의 한 전형인지도 모른다. 말초적이고 감각적인 대중가요의 향유의 차원에서 볼 때, 밥 딜런의 그것이 비욘세나 레이디가가의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충족시키기에 한참 모자란 숭고의 이념만을 대변하고, 시미학적인 차원에서 볼 때, 그것은 반전이나 저항이라는 코드의 클리셰에 지나지 않은 평범한 모드의 반복일 뿐이다.
따라서 파격은 한림원의 선택적 의지에 있지, 밥 딜런 그 자체에서 생성된 미적 향기는 결코 아니다. 물론 밥 딜런의 그것이 이데올로기의 허구적 생산물에 대한 비판과 저항, 즉 반전의 형식으로 노래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평의 대상이지만, 그것이 문학이 아닌 것은 너무도 자명한 이치인 까닭에 밥 딜런의 문학상 수상은 그야말로 난센스, 즉 일종의 해프닝에 지나지 않다. 엉터리 논리 혹은 빌어먹을 권위. 미국의 대중음악적 전통이 왜 문학의 심연으로 되돌아와 파격과 클리셰 사이에서 요동치게 만드는가? 사실 이 지점이 중요한데, 그것은 바로 현대시가 처한 숙명적인 현실을 반조하는 의식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파격은 문학의 죽음을 자초하는 죽음의 기호이고, 자본의 기호와 영합한 클리셰만이 상품으로 판매 유통된다. 다시 말해서 파격적인 표현만을 정전적 가치로 평가하는 시문학의 죽음은 필연적인데, 그것은 상품화가 가능하지 않은 미적 기호 혹은 상품으로 포장할 수 없는 진기한 언어를 자신의 사명으로 간주하는 까닭에 그러하다. 읽히고 소통하며 인륜적 공통감을 표현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상품의 가치를 완벽하게 재현 생산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아니 시적 파격은 낯설고 기괴한 언어의 풍경만을 양산할 뿐, 더는 인륜적 공통감을 미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양식으로 전락하는 사태를 연출하게 된다. 21세기의 시들이 육화시킨 시말들이 죽음의 언어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언어의 표현적 역량의 극대화 혹은 죽음에 포획된 문학의 기호. 대저 시는 어디서 상생의 묘법을 찾아 자신에게 속한 모든 것들을 인간학으로 되돌려주고 또 고양시킬 수 있는가?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시문학 앞에 내려진 죽음의 전조를 거두어들여 너 또는 나를 공감대가 형성되는 서정의 여율로 인도할 수 있는가?
시의 길은 암울하고 문학의 코드는 점점 낯선 기괴한 구성물들로 가득 채워 읽히지도 않고 더 나아가 소통 그 자체가 거부된다. 어쩌면 밥 딜런에게서 파생된 일련의 파격적 서사는 지극히 자본의 취향에 부합하는 상품의 기호를 생산하는 최적의 장소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감히 시적 파격이 도달할 수 없는 곳에 위치한 자본의 위대한 기호일 뿐만 아니라, 인간학과 세계 사이의 균열을 자본의 코드로 봉합하는 숭고한 이데올로기의 실천적 국면이다. 끊임없이 소통하고 향유되었으며 마침내 너 또는 나를 반전의 숭고한 이념의 중심으로 데려다주는 감성의 중심에 밥 딜런이 위치해 있다.
말하자면 「blowing in the wind」와 「knocking on heaven's door」가 드러내 보여주는 ‘귀를 위한 시’는 죽음의 기호에 포획된 자본과 이데올로기의 추악한 욕망을 인간학적인 양심으로 되돌아오게 만드는 클리셰의 역설인데, 그것은 끊임없이 판매 유통 가능한, 감각적 욕망으로 축소되지 않은, 인간학과 세계 사이의 균열을 봉합하는 그 무언가를 노래 속에 침전시켰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밥 딜런의 그것은 감각적인 욕망의 향유로 소모되지 않은 서정의 인간학적 공통감에 받혀진 클리셰의 진수이다. 역으로 그것은 철저하게 대중적인 동시에 대중의 의식을 환기시키는 숭고한 이념의 클리셰이다. 끊임없이 판매 유통되었으며, 마침내 너 또는 나를 이념의 진실 한복판으로 데려다준다. 따라서 그것은 영원히 회자되고 불러지며 죽음 뒤에도 남는 영원의 코드이다. 왜냐하면 밥 딜런이 펼쳐낸 일련의 노래들은 감각적인 향유 너머에서 작동하는 인간의 양심을 자극하는 따스한 감성의 전언들을 드러내 보여주는 모드의 체계이기 때문이다. 설령 시적 차원에서 볼 때, 밥 딜런의 그것은 그리 새로운 문학적인 표현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지만, 대중가요의 전통 내에서 그것의 음악적 신기원에 해당한다 하겠다.
밥 딜런 퍼포먼스가 암시하는 밝은 미래에 대한 전망이나 비전에 비교하면, 시의 파격적인 횡보는 그리 밝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암울한 죽음의 전조를 드리우고 있다고 평가하는 것이 마땅하다. 향유가 불가능한 기호의 죽음만이 육화되어 있을 뿐, 더는 소통하거나 더 나은 미래를 의욕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문자의 파격만이 허락된다. 문자의 파격적인 퍼포먼스만이 죽음의 정전, 즉 먼지 풀풀 날리는 아카이브에 퇴적될 뿐이다. 영기가 사라진 문자의 양력과 부력에만 과도하게 몰입한 채 너 또는 나를 죽음의식으로 인도하게 이른다. 물론 이러한 죽음에 관한 문학담론의 도정이 시의 숙명적인 진실을 지시하는 필연의 과정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따라서 시의 기호가 육화되는 장소, 즉 언어의 심연에 이해가 불가능한 의미들로 중층결정된 죽음의 문자가 퇴적되어 있는 것 또한 사실이지만, 그것은 미적 기호와 향유 사이에 결코 봉합이 불가능한 문학의 사명이 위치한 까닭에 그러하다. 시가 독자로부터 멀어져 더는 읽히지 않는 문자로 전락한다. 문자에의 몰입은 사문화된 정전에의 도달이고, 문자의 정전에의 지향성은 결국 죽음을 탐닉하는 빈곤의 악순환만을 연출하게 된다.
만약 시의 현재와 미래가 그와 같다면, 우리는 왜 언어에 매혹된 채 시의 죽음을 몽상하는가? 시가 취할 수 있는 언어의 숙명적 양태를 전혀 다른 길로 인도할 시의 매체는 존재하지 않는가? 파격과 클리셰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종주하면서, 대중의 기호를 흡족하게 만족시킬 수 있는 시란 존재할 수 없는 시말의 사명인가? 과연 21세기를 살아가는 시인들에게 시에 부과된 언어의 사명을 온전하게 고수한 채 인간학과 세계 사이의 관계를 조화롭게 표현하는 것은 양립 불가능한 시의 테제로만 간주하는 것은 타당한가? 밥 딜런이 미국의 대중가요를 파격의 형식으로 노래하고 향유했을 때, 문학은 밥 딜런의 그것처럼 파격과 향유 사이에 존재하는 거대한 균열을 봉합할 수 있는 이념적인 미적 장치를 고안해낼 수 있는가?
시의 길은 어둡고, 말은 존재의 언어 그 자체를 지시할 수도 대리 표상할 수도 없는 불능의 기호로 코드 변환된다. 21세기가 회의적인 이유는 모든 미적 기호들이 철저하게 자본의 체계와 조화를 이루는 곳에서만 판매 유통이 가능한 까닭에서 그러하다. 자본의 기식자 혹은 무기력한 말의 생산자. 우리는 파격과 클리셰 사이의 어느 지점에 위치할 때 가장 잘 살아낸 운명의 시인인가? 오늘도 저 거대한 말의 제국을 바라다보며 무량하게 언어의 위치를 확인하게 된다. 말 앞에 함몰될 것인가? 말을 함몰시켜 이미지의 신기원으로 향할 것인가? 이 양자택일의 선택 앞에 시 또는 시인이 위치해 있다.
3. 그렇다면 디카시는? : 문자와 이미지의 전쟁
문자를 대리 보충하던 이미지가 우위의 점하게 된다. 극적인 아이러니가 연출된다. 역으로 문자가 이미지를 위해 대리 보충하게 된다. 믿기지 않는 현실이다. 상호 대리보충의 의미론적 체계를 구축했던 문자와 이미지 사이에 사활을 건 투쟁이 벌어진다. 물론 이 전쟁은 가상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아주 역동적인 예술의 존재사적인 혁명의 전개일지도 모른다. 아직 가지 않았고, 전혀 도래하지 않은, 혹은 미지의 기호로 남아 있는, 따라서 어떤 의미의 체계가 자신의 미래로 전개될지 아무도 모르는, 바로 잔여의 미적 형식에 관한 존재론적 물음이 비로소 이미지와 문자의 전쟁의 양상으로 전개된다. 그것은 문자와 이미지의 사실관계를 재조정하는 역동적인 운동이자, 21세기 디지털 혁명에 관한 진지한 사색이기도 하다.
디지털이 펼쳐내는 저 혁명적인 사태들을 어떠한 태도로 수용하며, 또 그것을 어떠한 방식으로 문자와 제휴시켜 미적 지평으로 고양시키는가가 관건이다. 문자의 죽음 혹은 이미지의 향유. 디지털 이미지와 친숙한 세대에게 분명 문자는 거추장스러운 도구이다.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어떤 의미의 체계를 미적 형식으로 고양시켜야 하는가에 대한 심도 있는 성찰이 필요하다. 점점 문자의 향연이 타나토스에 자극되어 죽음만을 노래하게 될 때, 시말이 견지해야할 이미지의 태도는 무엇인가?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이제까지 이룩되었던 문자의 존재론적 위치에 관한 총체적인 성찰에 이르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21세기 언어가 위치한 문학의 숙명이다.
머지않은 장래에 문자의 기능이 아주 축소되거나 완벽한 죽음이 선언될지도 모른다. 이미지를 지배하는 자가 이 세계의 진정한 주인이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이미지의 구성력과 그 표현의 다양체는 21세기를 지배하는 궁극적인 실재일 뿐만 아니라, 너 또는 나를 신세계로 이끄는 표상의 절대적인 주체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진실을 지시한다. 눈은 진실을 말할 뿐만 아니라, 진실과 거짓 사이에 매개된 일체의 불순한 의도를 제거하는 바로미터이다. 역으로 눈에 보이지 않거나 현전하지 않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거짓이거나 기만이다. 자본의 계산된 구성력과 치밀하게 결합한 이미지 주체의 시대에 눈은 진리가 구현되는 절대 장소, 즉 모든 이미지의 가치를 판단하는 진실의 장소이다. 설령 그것이 홀로그램처럼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가성처럼 느껴지지만, 이미지(혹은 환상)는 21세기를 지배하는 실질적인 주체이다.
실체도 이미지고, 객체가 표현되는 장소도 이미지다. 다시 말해서 이미지가 있는 곳에 너 또는 내가 존재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21세기의 이념이 표현되는 의미의 공통감이다. 나를 언급하는 주체도 이미지고, 나를 둘러싼 세계도 이미지다. 이미지가 공유된다. 이미지는 실재보다 더 실재적일 뿐만 아니라, 너 또는 나를 미지의 세계로 인도하는 절대적인 주체이다. 불가능이 가능으로 역전된다. 실재는 보이지도 존재하지도 않는 거짓 표상이고, 이미지가 바로 실재의 위치에서 인간학과 세계를 지배하는 궁극적인 주체로 탈바꿈하게 된다. 매트릭스의 역설 혹은 이념과 가상의 체제 전복. 문자는 진실을 지시하고, 이미지는 착각이거나 가상이라는 헛된 명제가 논파된다. 지시가 불가능한 실재는 거짓이고, 현전의 이미지는 진실이다. 인간학을 호도했던 저 실재의 위치, 즉 문자의 도그마적인 위치가 조정된다. 문자는 진실에 도달하거나 진리를 지시할 수도 없다. 문자는 한계의 표현이다. 문자는 불완전의 총체적 역량일 뿐만 아니라, 너 또는 나를 회의의 한복판으로 데려가 분열이나 갈등을 일으키는 궁극적인 원인이다.
문자는 해석학적 순환에 종속된 불완전한 매체이다. 문자는 진리를 표현할 수 없는 장소이다. 문자는 상징을 상징으로 대속하는 악순환의 체계이다. 원래 문자는 이미지의 편리한 도구였다. 원래 문자는 이미지가 불완전하게 이해되고 표현되는 전유의 장소였다. 원래 문자는 이미지를 구겨 넣는 협소한 공간의 주름이자, 너 또는 나를 의미의 한계로 데려주는 불완전한 표상이다. 그렇다면 이미지는? 그렇다면 디카시는? 문자에게 부과되었던 과도한 짐을 내려놓는다. 문자는 주체가 아니라 이미지의 타자로 몰락한 채 모든 의미 관계를 전도시키게 된다. 이제 이미지가 말하고 이미지의 의미를 받아 적는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문자가 행한 일련의 표현법, 즉 철학이나 문학은 의미의 실물 앞으로 다가가지 못하는 불완전한 구성물이었기 때문이다.
이미지가 문자의 주체이자, 문자를 구성하는 의미의 주체이다. 물론 이때 이미지는 디지털 세계가 만들어내는 화려한(혹은 추한) 외양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보여짐’, 즉 가상을 실상으로 역전시키는 환상의 실재이다. 이 얼마나 환상적인가? 이 얼마나 혁명적인가? 소크라테스 플라톤 이래로 이미지에 앞서 문자에게 과도한 짐을 지운 로고스를 해체시키는 이 극적인 광경이 환상적이지 않는가? 매트릭스가 실재와 이미지의 관계를 새로운 방식으로 조명했다면, 디카시는 문자와 이미지의 관계를 혁명적으로 전복시킨 문학의 신기원이 아닌가?
문자의 기능이 해체되거나 죽음이 선언된다. 문자는 알량한 의미조차 제대로 표현해내거나 간직하지도 못한 채 괴멸하는 해체의 징후일 뿐만 아니라, 더는 표현의 궁극적인 주체로 표상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미지는? 그렇다면 디카시에 포획된 이미지의 운동은 너 또는 나를 어디로 데려다 주는가? 사실 이 지점이 중요한데, 그것은 바로 21세기를 지배하는 문명의 중심에 디지털이라는 매체가 확고하게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디지털은 눈의 즉자적인 운동을 숭고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절대적인 실재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단순한 재현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이데아와 미메시스에 포획된 진리와 재현의 관계를 넘어서 인간학과 세계 사이의 치명적인 균열을 봉합하는 인륜적 삶에 관한 지형도를 제시하는 존재의 실질이다. 그것은 실재보다 더 실재적인 방식으로 인간학과 섹계를 지배하는 절대적인 심급으로 작용할 것이다.
말하자면 디지털은 현대성의 이념을 표현하는 진리의 표상일 뿐만 아니라, 인간학 내부에 기입된 다양한 존재의 음영을 풀어헤칠 절대적인 심급이다. 그것은 시간의 미래이자, 미래의 문학이 구현된 미적 현실일 뿐만 아니라, 너 또는 나를 절대의 시공간으로 인도하는 의미의 실질적인 주체이다. 따라서 이제까지 전개된 디카시의 실천적 국면은 새로운 미적 욕구에 부응하는 현재적인 시말운동이자 미래문학의 가능성이 총체적으로 표현된 시의 현실이다. 말에 앞서 이미지가 실재보다 더 실재적인 방식으로 포획된다. 역으로 이미지는 실재에 이르는 절대적인 통로이자 실재가 표현되는 실존의 장소인데, 그것은 소크라테스 플라톤 이래로 형성된 지적 전통에 대한 전복을 기도하는 혁명적 사유의 장소이다. 이미지에 포획되지 않은 문자의 주름은 허구이고 날조이다.
따라서 21세기는 이미지가 말하고 사유했으며, 마침내 이 세계의 표현법 전체를 이미지의 구성물로 그 체계를 형성하기에 이른다. 디지털 망의 가장 안쪽에 진실이 기입됨과 동시에 너 또는 나를 이미지의 천국으로 인도하기에 이른다. 이를테면 디카시는 실재 보다 더 실재적인 이미지의 이념을 포획하는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문자의 한계를 넘어선 이미지의 구성력을 전폭적으로 긍정하는 새로운 미적 원리라 하겠다. 이미지와 문자가 결합 혹은 문자를 선도하는 이미지의 창조적 지평. ‘저 하늘의 이미지를 찾아 떠나던 시대의 꿈은 얼마나 아름답고 황홀한가!’ 진실은 이미지의 현전 그 자체가 발화시키는 미적 향기이지, 절대라는 구성물, 즉 실재에서 뿜어져 나오는 흔적이 아니다.
‘현재 바로 지금 여기’라는 즉자에 관한 존재의 감각을 생생하게 포착하였으며 또 그것을 새로운 의미의 공식으로 발화시킨다. 이를테면 디카시는 이미지―말을 말―이미지와 상면시켜 새로운 미적 조형술을 펼쳐 보인 시적 신기원이다. 창조적인 지평 융합 혹은 미래 문학의 존재방식. 디카시의 혁신성은 문학의 존재방식에 관한 총체적인 회의를 요구하게 되는데, 우리는 이제까지 형성된 문자의 강박적인 조형술을 부정성으로 포괄하면서 미래의 문학에 관한 탐미적인 태도를 견지하게 된다. 이미지의 향유만이 너 또는 나의 삶의 중심, 즉 실재의 한복판에 다가서게 된다.
문학의 죽음 앞에 한발 더 다가섰다. 아니 문자중심의 문학은 더는 매혹적인 예술의 장르가 아닐 뿐만 아니라, 문자 조형술의 한계에 다다라 너 또는 나를 클리셰의 위치로 몰아가게 된다. 물론 여전히 말과 형식 사이에 커다란 틈을 만들어 난해한 시말운동을 전개하지만, 그 난해시 역시 난해함이라는 클리셰에 함몰된 채 더는 읽히지 않은 문자로 전락하게 된다. ‘오늘 또 읽히지 않는 파격의 클리셰를 창조했지. 난 이해받기를 원하지 않아. 그게 시인의 사명이지.’ 파격 그 자체만이 만족된 채 시인이 사멸하게 된다. 시인의 사명은 사멸의 사명이다. 바로 이 파멸의 지점에서 파격적인 표현력의 반복도 역시 클리셰로 붕괴된다는 사실을 직감하게 된다. 새로움의 사명이라는 클리셰에 친숙해진다. 다시 말해서 새로움이라는 문학의 사명 앞에 이제까지 전개된 일련의 시말운동 역시 클리셰로 붕괴된 채 혹은 아카이브에 수장된 채 읽히지 않은 문자로 전락하게 된다.
물론 모드의 체계와 같은 방식으로 기호의 체계를 변형 생성시켜 문학의 기호를 생산할 수 있다면, 그것만큼 손쉽게 문학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겠지만, 단 일회의 운동으로 그 목적을 성취하는 문학은 늘 새로움이라는 언어의 과도한 과제 앞에 함몰된 채 문자의 죽음을 목격하게 된다. 문자는 천형의 상징이다. 더 나아가 이미지의 창발적인 운동만이 새로운 미적 욕구를 충족시킨다는 사실을 문자의 붕괴 앞에서 깨닫게 된다. 마치 디카시가 아직 발화되지 않은 언어를 자극하여 표현의 영역으로 고양시키듯이, 이미지는 이 세계와 상면하는 진리의 실재일 뿐만 아니라, 너 또는 나를 환상의 세계로 이끌어 비존재를 현전화시키는 미적 양식의 한 유형에 해당한다 하겠다.
이 얼마나 멋진 광경인가? 이 얼마나 환상적인 순간인가? 이미 활력을 잃은 문자의 강박으로부터 벗어나 이미지의 다층적인 생산력을 펼치는 디카시야말로 21세기 문학을 대표하는 신국면이라 하겠다. 물론 여전히 변화의 도정 위에 서있고, 더욱 더 변화를 모색해야만 하는 어려움이 남아있겠지만, 디카시가 문자라는 협소한 공간, 즉 언어의 한계를 넘어 새로운 시문학의 전형으로 계속 발전해갈 수 있는 여지가 무궁무진하다. 아직 가지 않았고, 더 가야하는 길 위에 디카시가 서 있는 한, 문학의 잠정적인 죽음은 유보되어야 한다. 문학의 죽음이 차연된다. 문학은 자신의 존재론적 양태를 일신시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할지도 모른다. 디지털과 상면 속에서 전혀 다른 방식의 문학이 쌍방 소통의 방식으로 전개될 개연성이 여전히 잔여로 남아 있다.
4. 미래의 문학 : 문자의 죽음 혹은 저항
미래의 문학은 문학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문학적일 것이다. 미래의 문학은 이제까지 향유된 방식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문학일 것이다. 추측컨대 문자의 죽음과 저항 사이에 전혀 다른 양태의 문학이 매개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종이의 질감을 디지털 미디어로 전이시킬 수 있을까? 싸늘한 감성이 지배하는 21세기를 아날로그적인 서정이 숨 쉬는 유미적인 공간으로 승화시킨다는 것은 가능한가? 디지털의 아날로그로의 호환 혹은 그 역이 성립하는 예술의 형상화 전략은 실현가능한 미적 향유인가? 문자와 종이의 친연관계를 단절시킨 채 환상의 공간 속에서 공간의 환상을 충족시키는 서사는 여전히 유효한 미적 사태인가? 온전하게 디지털로만 이루어진 세대에게 저 아날로그적인 질감은 수용가능한 감각의 양태인가? 시대는 변하고, 공간에 관한 인지체계가 전혀 다른 이미지와 의미를 생산하게 될 때, 그것은 의사소통적 합일에 이를 수 있는 미적 기호를 양산해낼 수 있는가? 현대성의 징후가 징환이나 편집증에 빠진 채 너 또는 나를 분열의 상태로 이끌어 갈 때, 문학은 인간학을 구원할 수 있는 진실의 언어로 남아있을 수 있는가?
카프카 이후 죽음의 서사가 반복으로 재현될 때, 혹은 죽음만이 서정의 실재를 압박하는 것으로 간주될 때, 문자는 죽음의 문학에 포획된 채 필연적으로 문학의 죽음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따라서 미래의 문학은 비실재를 포획해 이미지의 환상으로 현전화시키거나 문자의 죽음을 완료시키는 것으로 현전의 이미지를 재구성하게 된다. 이를테면 21세기를 지배하는 실재는 디지털혁명이 만든 이미지, 즉 환상인데, 그것은 실재보다 더 실재적인 현전의 기호이다. 환상만이 이미지로 향유되었으며 마침내 온 세상을 이미지의 천국으로 가득 채우게 된다. 마치 비실재를 실재처럼 믿고 의지한 채 너 또는 나의 관계를 실물이 아닌 것들로 향유하듯이, 이 세계는 자본의 이념이 내어놓은 환상의 서사를 따라 다양한 이미지를 압축 전치시키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21세기 문학이 위치하는 존재론적인 위치라 하겠다.
따라서 환상은 이미지와 진실 사이를 매개시키는 의미의 중심 체계이자, 인간과 세계의 표현법에 놓인 균열을 봉합하는 최적의 장소이다. 왜냐하면 시간과 존재에 속한 그 모든 것들이 환상의 체계로 구조화되어 있을지도 모르겠기 때문이다. 따라서 환상은 문자의 저항을 최소화하거나 무력화시킬 수 있는 21세기 최대의 생산물이다. 그것은 디지털 혁명이 실현되는 최대판본이자, 문자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이 세계를 표현하고 이해하는 예술의 정점이다. 문자의 심연에 색인 된 의미의 존재방식을 일거에 무너트렸으며 마침내 새로운 미적 양식에 대한 욕구가 비등하기에 이른다.
이 세계는 이미지의 천국이다. 이 세계는 환상 속에서 디지털 미디어와 완벽하게 결합한 새로운 예술 장르를 만들어 내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미래의 문학이 위치하는 존재의 자리이다. 환상적이지 않은 것은 예술의 소재가 아니며, 더는 미적 효과를 거둘 수 없다. 더불어 실재보다 더 실재적으로 감각되는 환상의 기호만이 미로 향유된다. 미메시스의 몰락 혹은 소크라테스-플라톤 문법의 붕괴. 더는 실재의 강박으로부터 고통을 당하지 않아도 된다. 더는 실재의 이념에 관한 허구에 휘둘리지 않아도 된다. 아니 21세기가 환상적인 이유는 실재보다 더 실재적인 이미지의 구성력이 인간학의 내포와 외연을 완벽하게 지배하는 까닭이다. 이미지의 구성력은 실재의 구성력이다.
디지털 문화 환경만 놓고 보면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서 인프라 구축이 가장 잘 되어 있는 환상의 나라 중에 하나이다. 이러한 외적 환경은 미래의 문학이 태동할 수 있는 초기조건을 완벽하게 구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너 또 나를 문학의 신기원으로 데려다준다. 물론 이데올로기의 차원에서 볼 때, 환상의 심연에 은폐된 환멸의 세계상을 완벽하게 억압시킨 결과이겠지만, 아무튼 중요한 것은 21세기를 지배하는 예술 코드의 중심에 환상과 이미지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다. 향락의 이미지의 조형력에 의해 환멸이 봉인되었으며 마침내 너 또는 나에게 부과된 진실을 망각시키기에 이른다.
온 세상을 즐겁지만 차가운 기호들로 가득 채운다. 환상의 코드가 환상적이지 않은 이유는 환상이 인간학 전체를 환멸의 어디쯤으로 데려가 너 또는 나 사이에 매개된 불평등을 고도의 자본의 전술을 은폐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21세기를 지배하는 문화의 코드가 환멸과 환상 사이에 매개된 불평등의 의미를 이미지로 봉합하는 교묘한 전술 위에 펼쳐지는 것처럼, 디지털은 의미의 체계를 0과 1의 수사학으로 은폐시키는 가장 잔혹한 기만의 정치술이다. 환상의 심연에 문자의 죽음을 조장하는 교묘한 이데올로기의 조종술이 작동하고 있는 것처럼, 이미지의 표현법은 환멸을 은닉한 채 너 또는 나를 가상의 한복판으로 데려다준다.
문자의 죽음으로 모든 저항을 괴멸시킨다. 이제 환상과 이미지의 통치술 앞에 더는 저항할 미디어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문자가 행할 수 있는 최소한만의 저항을 남겨둔 채 환상적인 이미지의 공간으로 너 또는 나를 데려가 향락을 향유하게 만든다. 환멸이 문자의 심연으로 사라졌으며 마침내 이 세상을 지배하는 절대적인 주체의 중심에 이미지가 위치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환멸이 환상의 구조를 통해 이미지로 봉합된 채 너 또는 나를 미래의 문학이 생성되는 공간의 중심으로 데려다준다. 어쩌면 디지털 혁명은 아직 완료되지 않은 인간학의 미래를 결정하는 문학의 생성조건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시하는 인간학에 관한 인식론적인 태도를 완벽하게 코드 변환시킨 신기원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문학의 생산이나 향유 방식이 전혀 다른 차원에서 전개된다.
문자는 이미지의 도구다. 문자는 이미지의 완전한 향유를 대리보충해주는 부차적인 기능으로 함몰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디카시에 포획된 문자의 기능이다. 의미 구성의 주체이자, 의미의 실재로 간주되었던 문자의 죽음이 극적으로 선언된다. 문자는 의미의 생산체제의 주체가 아니다. 문자는 실용의 주구이다. 문자 예술이 비극적인 이유는 더 이상 문자에 포획된 의미의 진실을 더는 신뢰하지 않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인간학은 문자와 같은 방식으로 의미의 구조를 이루고 있지 않다. 인간학은 이미지처럼 말하고 행동하고 표현했으며 너 또는 나를 이미지의 환상 속에 함입시켜 문자와 의미의 저항으로부터 참된 자유를 향유하게 된다. 의미의 구속, 즉 문자의 협소한 공간으로부터의 탈주가 이루어졌으며, 마침내 새로운 의미의 문학 혁명이 전개되기에 이른다.
이미지가 문자를 선도한다. 이미지는 의미 이전의 존재 감각이다. 마치 디카시에 포획되었던 일련의 시말운동이 이미지와 문자 사이의 일련의 관계를 재조정하게 만드는데, 그것은 문자중심주의에 포획된 이미지의 운동이 아니라, 이미지가 말을 걸고 표현하는 이미지 주연의 신체제이다. 어쩌면 21세기를 선도하는 미래의 문학은 문자의 이미지나 서사가 아니라, 이미지 그 자체가 발화시키는 환상적 서사의 양식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러한 이미지의 서사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디지털 미디어와 완벽하게 결합한 새로운 형태의 문학이겠지만, 따라서 그것은 지평과 지평이 상호 융합 반응을 일으킨 제 3의 문학 양식, 즉 기존의 문자중심주의를 해체시킨 새로운 미디어이겠지만, 그것은 문학의 존재 방식 전체를 전복시키는, 문자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구현된 문학일 것이다.
밥 딜런의 그것이 문학으로 용인되는 시대에 혹은 지평의 장벽을 붕괴되는 시대에, 문학은 문자라는 강박으로부터 탈피해 미래 문학의 체제를 구축하게 될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서 디카시에 포획된 문학적 사태는 단순한 우연의 기획물이 아니라, 미네르바의 올빼미처럼 시대의 이념을 완벽하게 흡수 통합한 미래의 문학을 예시하는 일종의 효시라 하겠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던 상관없이, 디카시는 현재의 문학운동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로 무한히 휘어진 문학의 가능태이다. 때론 문자의 저항에 매개된 정전에의 의지를 무력시키면서, 때론 문자에 포획된 미학적 한계를 가볍게 뛰어넘으면서, 디카시는 미래의 문학을 위한 초석을 굳건하게 세운다.
아직도 실험의 과정 중에 있는, 급진적인 변화를 수용할 수 있는, 미래의 정전을 꿈꾸는, 더 나아가 이미지가 실재보다 더 실재적인 의미를 함축하는 바로 그 지대에 디카시가 위치하는 한, 그것은 현재를 향유하는 미적 형태가 아니라, 미래의 변신을 도모할 수 있는 잠재적 가능태의 실질적인 주체임에 틀림없다. 문자의 죽음 뒤에도 남는, 문자의 강력한 저항선을 뚫고 새로운 혁신을 이끌 수 있는 미래의 예술 장르가 바로 디카시에 포획된 운명의 기호라 하겠다.
5. 결론을 대신해서 : 믿거나 말거나
문자적이지 않은 방식의 문학을 문학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더 나아가 문자가 존재하지 않는 문학을 문학으로 상상할 수 있는가? 디지털 혁명은 전혀 예기치 못한 곳으로 너 또는 나를 데려가 전혀 문학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문학을 사유하게 만들 것이다. 너 또는 나는 모순의 세기를 살고 있고, 모순의 바람만이 진실과 대면하게 만든다. 문자의 강박으로부터 탈주하여, 문자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문학의 미래를 말한다는 것은 일종의 모순이다. 왜냐하면 문학이라는 예술 장르 자체를 문자가 아닌 방식, 즉 환상과 이미지로 언표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문자는 이미 사경을 헤맨 채 단지 보조적 기능만을 담당하고 있다. 문자의 운명과 몰락을 동시에 사후 추인해야만 한다. 한때 예술의 최정상이었던 문자예술의 말로가 디지털의 출현과 함께 공표되는 것은 시대의 암울한 전조이거나 환상이 극적으로 실현되는 그야말로 환타스틱한 순간일 수도 있다. 로고스와 이념을 숭고하게 포획했다고 믿어졌던 문자의 총아였던 철학은 이미 죽었고, 문학은 문자 자체의 활력을 잃은 채 더는 새로운 미적 체계를 생산해내지 못한다. 시대의 현실이 이와 같을 때, 디지털과 문자예술을 양립시킬 수 있는 최적의 방식은 존재하는가?
다시 영도의 지점으로 되돌아가 문학의 위상학적 토포스를 가늠해본다. 아주 극소수만이 문학을 향유한다. 아주 대중적인 판본만이 문학으로 유통 판매되어 가판에 진열된다. 문학의 생산자가 동시에 소비자로 전락하는 허무맹랑한 세기에 과연 글쓰기는 여전히 유효한 예술의 장르인가? 21세기에 여전히 문학이 유효한 예술의 장르인지 뼛속 깊이 회의해본다. 문학은 21세기 예술의 주변부다. 그것은 자본적이지도 않고, 더 나아가 향유할 수도 없는 불능의 코드이다. 문학은 죽음의 공간이다. 읽히지도 않고, 판매유통망에서 이탈한, 자본의 구조에 함입될 수 없는 타자가 바로 문학이 존재하는 장의 진실이다. 따라서 그것은 더 이상 모두를 위한 향유의 대상이 아니라, 생산자만을 위한 향락의 도구이다.
나르시시즘에 빠진 자기색정주의가 판을 친다. 자기에게서 출발해서 자기에게로 되돌아가 더는 이 세계와 공명하지도, 이 세계에 존재할 수 없는 소진의 형식이 바로 현대의 시들이 처한 운명의 현실이다. 알량한 시인인 체하며 향락을 구하고 문자를 탐하지만, 문자가 비수로 되돌아와 너 또는 나를 죽음의 장소로 데려다준다. 왜냐하면 문자의 생산물을 향유하는 주체가 자신에게만 열린 은밀한 통로 내부에서 자위를 행하는 바로 그 지대에 문자라는 열매가 주렁주렁 열려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간 앞에 매개된 한 치의 거리가 인간학과 세계를 어떠한 방식으로 이끌어갈지 전혀 올바르게 예측하지 못한다. 다시 글쓰기의 영도의 지점으로 되돌아간다.
너무 멀리 왔다. 글을 쓰지 않을 수도 그렇다고 글을 쓰면서 미래의 환상을 꿈꿀 수도 없다. 글쓰기 앞에 난경이 매개된다. 영화 『박하사탕』처럼 시간 전체를 역류시켜 문학의 이념 이전으로 되돌아가 문자의 숭고한 위의와 만나는 우를 범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글쓰기의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그게 글쟁이들의 운명이고 숙명이다.
문자는 아편이다. 이미 문자에 중독되어 더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다만 그저 문자와 함께 함몰된 채 문자의 사체들을 향유만하고 있을 뿐이다. 마치 21세기를 떠는 문자의 유령들이 죽음의 공식에 포획된 환상의 유령인 것처럼, 우리는 문자의 환상을 탐닉하다 한 세계를 종료시키면 그만이다.
문자놀이가 이제 막 끝나고 이미지의 놀이가 방금 시작됐다. 환상을 즐기자. 이미지와 함께 환상을 탐닉하며, 새로운 미적 향유의 세계를 활보하자. 실재의 구속에서 벗어나 마음껏 자유를 누리며 예술의 신기원을 향해 질주해보자. 그것이 어떠한 결과를 낳을지 예측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지만, 다만 단지 이미지가 주는 향락을 향유하면서, 한 세계를 종료시키는 것으로 문자와 그것이 만들어내는 세계를 질식시키면 그만이다.
아무도 문자를 모른다. 문자의 사체들만 아카이브에 널브러져 있다. 그게 바로 정전의 실재이다. 영원한 향기를 뿜어낸다고 믿어졌던 에즈라 파운드의 알량한 정전들의 사체 말이다. 아무도 읽지 않는다. 내가 쓴 내 글조차 자위이고 사체들의 향락이다. 역시 읽히지 않는다. 믿든 말든 상관없다. 그냥 쓴다. 그러나 읽히지 않는다.
김석준 충남 아산 출생. 1999년 《시와시학》으로 시, 2001년 《시안》으로 평론 등단.
시집 『기침소리』. 평론집 『의미의 곡면』 외. 미네르바 작품상(평론)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