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년 경기도 포천에서 출생. 인조의 셋째왕자 인평대군의 후손. 대원군 집정기에 득세한 왕 족 가문 출신으로 호는 동농(東濃). 1871년 조부재만 알성과 급제. 홍문관 수찬에 제수됨 1873년 대원군 실각 1883년 민씨 세도정권에 의해 조부 처형됨. 1894년 갑오경장 내각에 의해 조부 복관됨. 1906년 부친이 포천에서 화야의숙 설립. 「잠상태(岑上苔)」를 『소년한반도』에 연재. 1907년 철도권회수운동 단체 광무사의 발기인으로 참여. 『제국신문사』에 입사. 『제국신문』에 신소설 「고목화」연재. 『제국신문』에 신소설 「빈상설」연재. 대한협회 교육부 사무장. 1908년 워싱턴 전기『화성돈전』(번역)을 회동서관에서 간행. 『제국신문』에 구마검연재. 기호흥학회 기관지 『기호흥학회월보』 편집인. 대한협회 평의원. 『제국신문』에「홍동화」상편 연재. 번역소설 『철세계』를 회동서관에서 간행. 대한협회 평의원 재선. 기호흥학회 평의원. 1909년 『제국신문』에「모란병」연재. 기호학교 교감. 1910년 『대한민보』에「박정화」연재. 유일서관에서『홍도화』하편간행. 광학서포에서『자유종』간행. 국치 후 총독부 기관지『매일신보』에 입사. 『매일신보』에「화세계」연재 1911년 『매일신보』에「월하가인」연재 『매일신보』에「화의 혈」연재 1912년 『매일신보』에「옥중화」연재. 『매일신보』에「소학령」연재 1913년 매일신보사 퇴사. 1914년 신구서림에서『정선 조선가곡』간행. 1918년 역사소설 『홍장군전』과『한씨보응록』을 오거서창에서 간행. 1927년 포천에서 59세로 서거함.
자유종(1910)
토론체 형식이라 어던 줄거리나 인물, 사건이 있는 것이 아니다. 매경이란 여인의 생일 잔치에 모인 네명(설현,이매경,강금운,홍국란 외)의 여인들에 의한 토론으로 소설이 이루어진다. 첫장에서 여러명의 여인들이 있다고 하나, 실지로 등장하는 여인은 위의 네 명뿐이다. "우리나라에도 제일 급한 것이 학문이요, 우리 여자 사회도 제일 급한 것이 학문인즉,"에서 처럼, 여인들은 신교육의 필요성을 말하고 "우리 일천만 여자들은 학문이 무엇인지 도무지 모르고 유의유식으로 남자만 의뢰하여 먹고 입으려 하니, 국세가 어찌 허약지 아니하겠소?"라며, 남녀 평등, 특히 교육에서의 평등을 주장한다. "자국정신은 간데없고 중국혼만 길러서,.....남의 나라 기천년 흥만성쇠만 의로하고내 나라 빈부강약은 꿈도 아니 꾸다가" 오늘날 나라가 흔들리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아울러 "중국글"을 폐지하자고 한다. 그러나 방법상에 있어 약간의 토론이 더 진행 된다. 한꺼번에 없애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없애나가자는 것이다. "『춘향전』은 음탕 교과서요, 『심청전』은 처량교과서요, 『홍길동전』은 허왕 교과서"라고 말하며, 이런 것들은 해약하니 없애자고 한다. 그리고, "혹 기도하면 아해를 낳는다, 혹 산신이 강림하여 복을 준다,......."처럼 미신을 타파하자고 한다. "교육과 종교는 주체가 되고 제사는 객체가 되거늘, 근래는 주체는 없어지고 객체만 숭상하니 어찌 열성조의 실시하신 본의라 하리요?"처럼 교육기관(서원, 향교, 태학, 관공립학교)을 비판한다. 맹모삼천지교를 예를 들어가며 자녀교육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서자이니 전취 자식이니 하는 악습을 다 개량"하자고 한다. 뿐만 아니라 지역이기주의, 가령 서북지역 사람들의 소외를 비판한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그들의 꿈(밤에 꾸는 꿈)이야기를 하면서 끝을 내는데, "나는 어젯 밤에 대한제국 자주독립할 꿈을 꾸었소.......교육을 확장하고 상공을 연구하여 신공기를 흡수하며 부패사상을 타파하여............나는 어제밤에 대한제국이 개명할 꿈을 꾸었소......정치.법률.경제.산술.물리.화학.농학.공학.상학.지지.역사 각 등분하여 극히 정묘하게 국문으로 법제하여.........대기하기는 주색.잡기.퇴보.태타 등이다.........나는 어젯밤에 대한 제국이 천만년 영구히 안녕할 꿈을 꾸었소......." 이 작품에서는 당대의 모순과 해결에 대해서 모두 언급하고 있다. 신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역설, 미신타파, 허위 타파, 자녀교육, 국어 사용, 음란 소설 타파, 남녀평등, 서자와 적자 차별 반대, 인재의 고른 등용 등을 주장한다. 이것을 몇 가지로 크게 묶으면, 1.신교육의 필요성, 2.신분제(남녀차이)타파, 3.반봉건 반외세 라고 나눌 수 있다. 이것은 당대 신소설이 다루는 일반적인 특징이다. 나는 이 소설이 소설이 아니라고 본다. 형식은 두말할 것도 없이, 타파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도 없이 단지, 말 그대로 배부른 아낙들의 꿈같은 이야기를 쏟아낸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대의 시대상황을 고려하자면 어느 정도의 공감은 가질 수 있겠으나, 역시 이것은 소설이 아닌 잡문이다. 당대의 문제들을 깊이 고민하지 않고 그저 눈에 보이는 것만을 썼을 뿐이다.
이광수 연보 1892년 평안북도 출생. 전주 이씨 문중의 5대 장손 1902년 부모가 콜레라로 사망. 3남매가 고아가 됨. 1905년 일진회(천도교)의 유학생 9명 중에 선발되어 도일. 1914년 최남선 주재로 창간된 《청춘》에 참여 1916년 조도선 대학부 문학과 철학과 입학. 《매일신보》로부터 신년소설 청탁을 받고 구고 중 의 박영채에 관한 것을 정리하여 《무정》이라 함. 1917년 《학지광》편집위원. 두번째 장편소설《개척자》를《매일신보》에 발표. 1919년 〈조선청년독립단 선언서〉기초. 조동우. 주요한 협력으로《독립신문》의 사장 겸 편집 국장에 취임. 1924년 《동아일보》연재 사설 〈민족적 경륜〉이 물의를 일으켜 일시 퇴사하다. 김동인,김소 월,김안서,전영택,주요한 등과 함께 영대(靈臺) 동인이되다. 1926년 양주동과 문학관에 관하여 처음으로 지상 논쟁을 하다. 동아일보사 편집국장에 취임함. 1928년 《동아일보》에《단종애사》연재. 1929년 《3인시가집》(춘원.주요한.김동환) 삼천리사에서 간행. 1931년 이갑을 모델로《무명씨전》을《동광》에 연재함. 1932년 계몽문학의 대표작 《흙》을 《동아일보》에 연재하다. 1933년 조선일보사 부사장에 취임. 장편《유정》을《조선일보》에 연재하다. 1938년 단편〈무명〉과 전작 장편《사랑》의 집필 착수. 1939년 《세종대왕》의 집필에 착수. 김동인.박영희.임학수의 소위 '북지황군위문'에 협력함으로 써 친일의 제 1보를 내딛다. 친일문학단제인 조선문인협회 회장이 되다. 1940년 창씨개명함. 1942년 장편《원효대사》를《매일신보》에 연재. 제1회 대동아문학자 대회(동경)에 유진오, 박 영희와 함께 참가함. 1947년 전기《도산 안창호》의 집필에 착수. 1949년 이상협의 청탁으로《사랑의 동명왕》집필을 시작. 1950년 유작《운명》을 집필. 납북되어 사망.
흙(1932) 《동아일보》연재. 허숭은 윤참판의 집에 기숙하는 고학생이다. 윤참판은 허숭을 신뢰하고 허숭이 고시에 붙어 변호사가 되자, 자기의 딸 윤정선과 결혼을 주선한다. 허숭은 농촌 사업을 하려고 했기에 결혼을 거부했지만, 정선과의 결혼이 곧 농촌계몽 사업의 포기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정선과 같이 하면된다고 생각해서 정선과 결혼을 한다. 정선은 지식 있고, 아름다운 신여성이어서 뭇 남성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고 특히 김갑진은 그의 아버지 세대때부터 윤참판의 집과는 인연이 있었고, 정선이 자기 아내가 될 것임을 의심치 않았었다. 그런데, 허숭이 정선과 결혼하자 분해한다. 허숭은 정선과 같이 살고 허숭은 변호사 생활을 했으나 변호사 생활에 회의를 느낀다. 변호사라는게 부잣집 사람들의 치정 사건이나 해결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정선은 부잣집에 자랐고, 허숭을 촌놈이라고 무시하기도 한다. 허숭은 아내와 다투고 살여울로 가서 계몽운동을 시작한다. 이 시기를 틈타 김갑진은 윤정선을 꾀어 내어 불륜을 저지른다. 그는 정선뿐만 아니라 여자들을 후리는 허량한 인물로 전락한다. 그러나 나중에 허숭의 높은 뜻에 감화해서 농촌 사업에 힘을 기울인다. 허숭은 자신의 아내가 불륜을 저지른 것을 용서해 준다. 동시에 갑진도 용서한다. 그러나 정선은 시골에 가지 않는다고 하자, 허숭은 다시 살여울로 돌아간다. 기차를 타고가는데, 그 기차에 정선이 뛰어 들어 다친다. 정선은 그 사고로 다리를 절단하게 된다. 허숭은 정선을 진심으로 간호한다. 정선은 허숭의 높은 뜻에 감탄하여 살여울로 가서 같이 계몽운동을 한다. 한편, 살여울의 유순은 허숭과 한 때 서로 정신적으로 사랑하던 사이였다. 유순의 부모가 병으로 갑자기 죽자, 허숭은 유순을 자기 집에 있게 한다. 유순은 허숭의 일을 도와 준다. 그리고 유순을 위해 관리를 때려 감옥에 들어간 맹한갑이가 출옥을 하자 허숭은 유순을 그에게 시집보낸다. 유순은 그가 좋아서라기 보다는 허숭의 말을 따라서이다. 그 때 동경 유학생 유정근이 살여울로 돌아온다. 유정근은 허숭으로 인해 자기 집의 수입이 줄어들고 자기들의 위신이 떨어져 이를 위해 허숭을 모략하려고 계획을 세운다. 먼저 맹한갑이를 유혹해 유순과 허숭의 사실무근한 일들을 떠벌리고 맹한갑이는 술을 먹고 와서 유순을 때려 죽인다. 그러나 맹한갑은 정신을 차리고 자기가 속은 것을 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허숭과 맹한갑, 허숭의 일을 도와주던 작은 갑이와 정선의 친구이자 기생이었던 선희도 잡혀 들어 간다. 선희는 정선의 친구로서 학교 다닐 때부터 숭을 보았다. 그녀는 숭의 높은 뜻에 감화하여 같이 살여울로 왔던 것이다.
유정근은 마을 사람들에게 술도 사주고 돈도 비려주어 인심을 산다. 그러나 장리로 인해 동네 사람들은 그에게 다시 빛지게 되고 허숭이 일구어놓은 것이 다 파괴되어갔다. 3년형을 받은 작은 갑이와 선희가 출옥했다. 그 때 작은 갑이의 아내는 유정근의 집에 가서 일을 해주었고, 유정근은 작은 갑이의 아내를 유혹했다. 작은갑이는 이를 알고 그와 싸운다. 다음날 작은갑이는 칼을 들고 가서 유정근을 죽이려고 한다. 유정근에게 빛을 탕감해줄 것과 마을 사업을 위해 돈을 내놓으면 살려준다고 했다. 유정근은 자기의 아내 때문이 아니라 마을을 위해 고귀한 마음을 품은 작은갑이에게 감탄하고 자기의 죄를 뉘우친다. 그래서 5년형을 받아 아직 감옥에 있는 허숭에게 찾아가고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살여울을 위해 할 일을 조언 받는다. 한편, 한민교 선생은 보성전문 영어 강사인데, 청년들의 정신적 지도자이다. 허숭도 한민교성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농촌 계몽을 운동을 하려 살여울로 간다. 이는 허숭이 지금 감옥에 있고, 유정근이 그를 찾아와서 도와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건영 또한 박사이고 한민교선생의 집에 드나드는 청년이지만, 돈 많고 예쁜 여자를 아내로 얻어 세상을 편히 살려는 자다. 그는 사귀던 순례를 버리고 이 여자 저 여자 쫒아다니다가, 정선에게도 추파를 던지지만, 정선에게 무시를 당한다. 순례는 유명한 음악가가 되어 공연을 했다. 그가 순례의 공연에 갔다가 모든 사람들에게 욕을 먹는다.
김동인 연보 1900년 평양에서 양반부호의 아들로 태어남 1912년 숭덕 소학교 졸업. 1913년 숭실 중학 입학, 중퇴. 1914년 일본에 유학하여 메이지학원 중학부에 입학. 1917년 메이지학원 중학부 졸업. 1918년 가와바다 미술학교 입학. 부친상으로 일단 귀국. 4월 상인의 딸 김혜인과 결혼. 1919년 가와바다 미술학교 중퇴. ≪창조》를 주요한.전영택 등과 함께 사재를 들여 발간 후 귀 국.《창조》창간호에 처녀작〈약한자의 슬픔〉을 발표. 1920년 〈마음이 옅은자여〉를 창조(3-6호)발표. 1921년 한국 근대 단편소설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배따라기〉를 발표. 단편〈목숨〉.〈음악 공부(일명 유성기)〉.〈전제자〉를 발표. 1922년 단편〈태형〉을 발표. 1923년 〈이 잔을〉.〈눈을 겨우 뜰 때〉를 발표, 1924년 ≪창조≫후신격인 《영대》발간. 첫 창작집 ≪목숨≫ 출간. 단편〈거칠은 터〉.〈피고 〉.〈유서〉 를 발표. 1925년 단편〈X씨〉.〈감자〉.〈명문〉.〈정희〉.〈시골 황 서방〉을 발표. 1926년 관계사업 실패로 파산. 단편 〈원보부처〉발표. 1927년 아내가 딸을 데리고 가출함. 단편〈명화 리디아〉.〈딸의 업을 이으려〉발표. 192년 영화흥행에 힘썻으나 실패함. ≪조선지광≫에 〈소설작법〉집필. 129년 ≪동아일보≫장편 ≪젊은 그들≫연재시작. 단편 〈광염소나타〉.〈태평행〉.〈눈보라〉. 〈K박사의 연구〉.〈송동이〉를 발표. 문학평론 〈조선근대소설고〉발표. 1930년 김경애와 재혼함. 단편 〈정〉.〈포플라〉.〈구두〉.〈배회〉.〈여인〉.〈증거〉.〈죄와 벌〉.〈신앙으로〉발표. 《중외일보》에서 연재하던 ≪태평행≫ 중단됨. 1931년 단편 〈추억으로 더듬는길〉.〈큰 수수께끼〉.〈거지〉.〈박첨지의 죽음〉발표. 1932년 ≪삼천리≫지에 단편〈붉은 산〉.〈적막한 저녁〉을 발표함. 단편〈발가락이닮았다〉.〈 잡초〉발표. ≪매일신보≫에 《해는 지평선에서》 연재. ≪동아일보≫에 중편 《아기네 》 연재. 1933년 ≪조선일보≫학예부에 40여일간 근부. ≪조선일보≫에 장편 《운형궁의 봄》연재. 1934년 ≪삼천리≫지에 평론 〈춘원연구〉연재. 1935년 월간≪야담지≫에〈원두균에 대한 이야기실림〉. 이를 계기로 사담에 손을 대기 시작. 12월≪야담≫지 손수발간. ≪월간중앙≫에 장편 ≪왕부의 낙조≫발표. 단편〈광화사〉 발표. 1936년 조선서관에서 ≪이광수.김동인 소설집≫ 출간. 1937년 6월,17회로 야담을 진남포 사람에게 넘김. 1938년 단편〈가두〉.〈가신 어머님〉.〈태양지 아주머니〉발표 1939년 일제가 친일적인 글을 쓸 것을 요구했으나 완강히 거부함. 장편 제성대, 단편〈김연실 전〉발표. 박문서관에서 ≪김동인 단편집≫을 출간함. 1941년 장편≪대수양≫발표. ≪매일신보≫에 장편≪백마강≫연재. 1945년 좌익을 맹렬히 비난하는 수필을 ≪대동일보≫에 실음. 1946년 단편〈석방〉.〈반역자〉등 발표. 1947년 단편〈망국인기〉발표. 1948년 재기를 다지며, ≪태양신문≫에 장편 ≪을지문덕≫을 연재함. 정신착란증 등 발병으로 135회 중단. 1951년 가족이 피난간 사이 중병으로 자택에서 사망함.
약한자의 슬픔(1919)
가정교사 강 엘리자베트는 가정교사이다. 그 집은 "조선의 선각자로 자임하는 남작"의 집이다. 그녀는 "아직 십구 세의 소녀이지만 재주와 용자로 모든 동창생들에게 존경과 일종의 시기를 받"는다. 그녀는 이환이란 사내를 짝 사랑한다. 그렇지만 그에게 말도 못하고,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친구 혜숙과 이환의 누이 동생 S에게 모욕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혜숙(이혼녀)의 집에 놀러가지 않는다. 그녀는 어느날 남작과 동침을 한다. 그녀는 심한 저항을 하지 않았고, 더구나 나중에는 자기가 남작에 대하여 "애정을 가지게 된 것을 깨"닫고는 놀라기까지 한다. 남작은 그 후로도 "평균 일주 2회"자신의 방을 방문한다. 그러다가 그녀는 임신을 한다. "잉태로 인하여 그 미래도 잃어 버렸다"고 그녀는 말한다. 그녀는 그런 혼란 속에서 "마음 속에 두 사람을 그린 후에 어느 편이 자기에게 더 가깝고,고 더 사랑스러운고 생각"하는 것 처럼 둘을 저울질 한다. 물론, 이환이란 남자는 그녀의 존재 조차도 잘 모르고 있는 상태이고, 남작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남작과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고 낙태하는 약을 먹는다. 그리고 남작의 집에서 쫒겨나온다. 그녀는 오촌모의 집으로 가고, 오촌모는 그녀를 반긴다. 하지만, 그녀는 남작에 대해서 분해하고 이런 시골에 있는 것에 답답함을 느낀다. 그녀는 드디어 남작에 대해 재판을 청구한다. 그러나 결과는 패하고 만다. 이것이 약한자의 슬픔이라고 그녀는 혼자 말한다. 그리고 자신의 주체로 살지 못하고 객체 혹은 대상에 영향을 받고, 지배를 받는다는 면에서 20세기의 사람들은 모두 약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에게 사고의 전환이 온다. "나도 시방 강한 자이다. 자기의 약한 것을 자각할 그 때에는 나도 강한 자"자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강한자에게 사랑이 필요하고 "사랑 안에서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강 엘리자베트는 허영에 들떠 있고, 공주병(?)에 걸려 있는 여자다. 어쩌면 스스로 파탄을 자초하는 보봐리 부인과 비슷하다. 물론, 결론에서의 사고의 비약이 죽음까지 몰고간 보봐리와는 다르지만. 그녀는 자신이 자신의 선택에 의해 살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후에 김동인의 작품 속(감자 등)에 줄곳 들어나는 자연주의의 영향인지도 모른다. 사족이 많아서 다분히 습작 시절의 작품이란 게 눈에 드러난다. 그리고 너무 낭만적으로 잉태에서 낙태의 상황이, 당대의 시각에서는 대단히 큰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려진다. 그리고, 성적인 면에서 과감함이 드러난다. 친구 혜숙이 이혼녀인 것도 그러한 면에서 보아진다.
광염(狂炎) 소나타(1929) "유명한 음악 비평가 K씨"가 어떤 질문을 하고, 거기에 대한 의견을 "사회 교화자의 모씨"에게 듣는다고 하나, 실상은 그가 답까지 하는 것이다. 두 노인은 얘기를 하다가, 백성수의 편지를 보러 K씨의 집으로 오고, 모씨가 그 편지를 읽게 되고, K씨가 천재 예술가를 옹호하는 주장이 이 소설의 전부이다. 여기서 작가는 "나"란 일인칭 시점과 K씨라는 삼인칭 관찰자 시점을 혼용해 쓴다. 밑에서 부턴 편의상 K씨를 나라고 하겠다. 백성수는 "유명한 광염 소나타"의 작가이다. 나는 그의 아버지와는 동창생인데, 그는 "야인"이었고, "광포스런 양성"의 소유자였고, 천재 음악가였지만, 술로 폐인이되고, "어떤 양가의 처녀를 어텋게 관계를 맺어서 애"까지 배게 하고는 심장 마비로 죽는다. 한편, 나는 "조용한 밤중의 몇 시간을 00예배당에 가서, 명상으로 시간"보내는 것이 습관이었다. 어느날 불이 났다. 나는 불구경을 하고 있는데, 어떤 청년이 예배당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그는 피아노를 발견하고는 "뚱 하고 시험을"해보다가 "숨소리가 차차 높아 가기 시작"하더니, 몹시 흥분해서 피아노를 쳤는데, "순전한 야성적 음향"이었다. 나는 오선지와 연필을 꺼내어 그 음표를 배끼어 놓았다. 나는 그가 백성수임을 알고 그 또한 나를 알고 있었다. 나는 그가 대단하기도 해 집으로 데려가 다시 피아노를 쳐보게 한다. 하지만, 그는 피아노를 좀 전처럼 치지 못한다. 나는 예배당에서 그의 연주가 "자기의 천재적 즉흥뿐으로 탄주함 것"임을 알게 된다. 내가 기록된 부분을 연주하자, 그의 ".......눈은 미친 사람과 같이 빛을 내기 시작"하더니 다시 피아노를 즉흥적으로 연주했고, 그것이 광염의 소나타이다. 백성수의 어머니가 아기를 밴 뒤에 친정집에서 쫒겨나게 된다. 집이 가난한 그는 공장의 직공이 되었다. 그 때도 "정식으로 음악 교육은 못 받"았지만, 집에선 피아노만쳤고, 피아노에 대한 열정을 키워갔다. 그러던 어느날 그의 어머니가 몸쓸병에 걸린다. 그는 조그만 담배가게 앞을 지나가다가 "오십 전짜리 은전 한 닢과 동전 몇 닢"을 훔치다가 주인에게 잡혀 경찰서로 가게된다. 여섯달 동안 그는 이를 갈면서 분해했다. 반년 뒤 그가 오막살이에 찾아가자, "어머니는 반년 전에 아들을 찾으며 길에까지 기어 나와서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그 가게집에 불을 지르고 예배당으로 도망을 온 것이다. 나는 그에게 방을 꾸며 주며, 그의 천재성을 끌어내려고 한다. "방안은 모두 검은 칠을 하고, 창 밖에는 늙은 홰나무의 고목이 한 그루 서"있어 과연 귀기가 돈다고 백성수는 말했다. 그는 음악이 잘 되지않아 마음이 조급해지고 무거워졌다. 그러다가 그는 다시 불을 지른다. 그래서 [성난파도]를 작곡한다. 그리고 "불이 있던 날 밤마다"그는 한 가지의 음악을 얻는다 .물론, 불은 그가 고의로 낸 것이다 .그러나 불만으로 그는 예전의 분노를 느낄 수 없었고, 급기야 살인까지 저지르게 된다. 그리고 "한 사람이 죽을 때마다 한 개의 음악"이 만들어졌는데, 그 처음 것이 [피의 선율]이다. 예술가 협회에서는 정부와 재판소에 탄원해 그를 정신병원에 감금했다. 그렇지 않으면 당장 사형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게다가 엄정한 작곡법이 있어서, 그것은 마치 수학의 방정식과 같이 작곡에 대한 온갖 자유스런 경지를 제한"한다고 말한다.그리고 "천 년에 한 번, 만 년에 한 번 날지 못날지 모르는 큰 천재를 몇 개의 변변치 않은 범죄를 구실로 이 세상에서 없이하여 버린다는 것은 더 큰 죄악"이라고 말함으로써 예술가의 권위를 강조한다.
발가락이 닮았다(1932) "노총각 M이 혼약을 하였다"그의 나이는 서른 두살이고, 그 당시의 습관으로 보아서는 너무 늦은 나이었다. 다른 친구들은 그가 돈 때문에 이렇게 늦게 장가를 갔다고 하나, 의사인 나는 "다른 종류의 해석" 즉, "M의 육체적 결함"에 기인하는 것을 알았다. 그는 학생 시절 부터 방탕한 생활을 했고, 돈이 없는 그는 "가장 하류에 속하는 방탕"을 일삼았기에 온갖 종류의 성병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는 생식능력이 없었다. 그가 장가 가기전 날 병원에 와서 내게 물었으나, 의사인 나는 그가 생식능력이 없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고, 그는 다음날 장가를 간 것이다. 그런데 그가 내게 정식으로 검사를 하겠다고 병원으로 왔고, 나는 다른 환자들을 먼저 치료해주고 그에게 가니 그는 사라졌다. 알고보니, 그의 부인이 임신을 했다는 것이다. 그제서야 나는 며칠전 그가 검사하겠다고 했던 심정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M이 나를 찾아왔다. 다른데 가서 검사를 했다고 했다. 그 결과로 자기는 생식능력이 있음을 판정 받았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가 거짓말을 한 것을 눈치채고 있었고, 그는 병원에 가지 않았음을 알아냈다. 그는 두려워 했다. 그도 자기가 정말 생식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확인하기가 두려웠던 것이다. 드디어 M의 부인이 아이를 낳았다. 그애가 "M의 할아버지를 닮았다"고 다른 사람들이 얘기했다. 그러나 나는 M의 친적들이 "하릴없이 예전의 조상을 들추어"낸 것임을 알고 있다. 그가 나의 병원에 왔다. "기관지가 조금 상하였"다. 그는 내게 자신의 아들이 자기와 발가락이 닮았다며 자랑스레 말을 한다. 나는 "얼마나 닮은 곳을 찾아봤기에 발가락 닮은 것을 찾아내었"을까 하는 정도로 "M의 마음과 노력이 눈물 겨워졌"다. 나는 그에게 "발가락뿐 아니라, 얼굴도 닮은 데가"있다고 말하고, 그의 눈을 피해 돌아 앉는다.
김연실전(1939) "연실이의 고향은 평양이었고", "김영찰 소실의 태생이"이다. 적모는 "교양없이 길러난 사람이었"고, "아버지란 사람이 집에 들어오는 일조차 쉽지 않으니"그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적모에게 시달림을 받는다. 그의 집안 또한 별 볼일이 없다."유명한 M감사가 평양 감사로 내려올 때라, M감사에게 돈만 바치면 아무것이라도 할 수 있었던 시대"여서 그는 돈을 주고 영리의 자리를 샀다. "가정적으로 정 가는 데 없고 사랑 붙일 데도 없는 연실이는" 진명학교라는 계집애가 다니는 학교에 입학한다. 그러나 다음해에 진명학교는 문을 닫아버린다. 그러나 이 기간동안 "부모에게 대한 공포심을 잃고 그 대신 경멸심을"가질 정도로 "관념과 인식상의"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또 다시 연실이는 적모와 많은 시간 얼굴을 맞대고 살아야 했다. 그가 아버지가 있는 소실집(자기 친 어머니의 집이 아님)에 찾아가자, 아버지는 자기는 안중에도 없고, 소실과 "온갖 추태"를 다보여 연실은 실망하여 돌아온다. 그런데, 진명학교 동창이던 최명애란 처녀가 동경으로 공부하러 떠났고, 연실도 가고 싶어한다. 그래서 연실이는 "동무의 동무(기생)의 오라버니"인 토지 측량기가로 떠돌아먹던 사람에게 일어를 배운다. 그러나닥 그녀는 측량기사에게 몸을 쉽게 내어준다. 그녀는 성에 대한 관념이 별로 없었다. 그는 적모의 돈을 훔쳐 동경으로 간다. 최명애가 마중을 나왔다. 그러다가 연실의 장래에 큰 변화를 줄 사건이 일어나는데, "방장으로 있는 사학년 도가와라는 처녀가"연실에게 책을 빌려주고, 연실에게 책을 읽으면, 일어를 잘 할 수 있다고 한다. 연실은 서양의 소설들을 읽고 많은 감명을 받는다. 고가와는 "나는 일본 여류 문학가가 될게.........나하고 긴상하고 다 일본과 조선의 여류 문학가가"되자고 하고, 연실도 그러하리라고 마음 먹는다. 그녀는 "인생의 연애는 예술이요, 남녀간의 예술은 연애"란 생각을 하고, 문학을 하기 위해 연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자신이 "선각자"로 생각하고 이를 위해서 "수줍은 감정을 극복하고, 용감히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다며 남자들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한다. 농학생 이창수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녀는 그러다가 XX음악 학교로 학교를 옮기고, 기숙사를 나간다. 그래야만 자유롭기 때문이다. 연실은 "서양 문명의 겉물을 핥는, 또 그 겉물을 연실이는 핥았"고 "조선 신문화는 대개 동경 유학생의 힘으로 건설되었고, 문화의 제일 과정은 자유연애"라 생각한다. 그녀는 귀국하게 되고, 최명애의 집에 드나드는 문인들과 어울린다. 그러나 그녀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잘 알아 들을 수 없다. 그리고 최명애의 남편과 수작을 하다가 명애와 대판 싸우고 나간다. 그는 호텔에서 김유봉이와 일년간 산다. 자기가 소설책에서 보았던 낭마적인 사랑을 그에게서 얻을 수 있었으나, 그는 차차 마음이 달아났고, 연실이도 마음이 멀어졌다. 급기야 그가 최명애와 같이 다른데서 신첩살림을 차리게 되었다. 그렇지만, 김유봉과 최명애도 금방 갈라서게 된다. 그녀의 남편 고 교수도 신문여기자와 살림을 차린다. 그러다가 일본의 정책이 문화정치로 바뀌자 집필자가 많이 필요로 하게 되었다. 각계각층의 그들의 일을 놓고 붓을 들었다. 최명애가 여자들 모임을 만들고, 김연실은 "다정다한한 여류 작가"로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불경기가 되었다. 사람들은 다시 붓을 놓고 자기의 위치로 돌아가고 남아있는 사람은 몇이 없었다. 그 때쯤 연실은 생활난에 부딫힌다. 전당포에 자기의 짐을 모두 맡기게 되었지만, 앞으로의 일이 문제엿다. 그제서야 그가 평양 집에 돌아가자, 그의 아버지와 적모는 죽었고, 이복 동생이 마누라와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연실을 반갑게 맞이하지 않는다. 연실의 행색이 초라했던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연실은 자존심이 몹시 상해 다시 경성으로 돌아온다. 연실은 "문학을 버린지 벌서 오래"다. 그는 자신의 살 길을 찾기 위해 먼저 집값이 싼 00동에 집을 얻으려 복덕방에 간다. 복덕방의 주인은 측량기사였고, 이윽고 "한 쌍의 원앙이 생겨"났다.
태형(1922) 나의 이름은 기쇼이다. 나는 현재 감옥소에 있다. 감옥은 "다섯 평이 좀 못되는 이 방에는 처음에는 스무 사람이 있었지만, 몇 방을 합칠 때에 스물여덟 사람이 되"어 매우 비좁고, 수감된 사람들의 "몸에는 종기 투성이"이다. 그리고 유월중순의 날이지만, 많은 사람들의 체온으로 땀은 줄줄 흘러 내린다. 그러나, 물 조차도 주지 않는다. 한마디로 극한상황이다. 이들은 "삼월 아드렛날 멧골짜기에서 만세 부를 때"를 미루어 보아 3.1운동 때 잡혀온 사람들인 것 같다. 영감은 그 3.1운동에서 한꺼번에 아들 둘을 잃었다. 그들은 공판을 받아 출옥되기를 모두 바라고 있고, 하루하루 자신의 이름이 불리어지기를 바라고있다. 그런데 그 "영감"이 공판을 받았다. 사람들은 공판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물어보고 영감은 절망적으로 "태형 구십"도라고 말한다. 나이 칠십줄에 태형을 맞으면 목숨을 잃는 것은 뻔한 일, 사형과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영감은 공소를 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런 영감의 태도를 다른 사람들은 용서치 않았다. 나는 영감에게 "이 방 사십여 인이 당신 하나 나가면 그만큼 자리가 넓어지는 건 생각지 않소? 아들 둘 다 총에 맞아 죽은 다음 뒤상 하나 살아 있으면 무얼해"라고 말한다. 나의 이말에 다른 사람들은 같은 이유로 나에게 절대적 지지를 보낸다. 십 여일 만에 한 번씩 가질 수 있는 모깡(목욕)에 우리가 다녀오자, "단말마의 부르짖음"이 들렸다. 영감이었다. 우리가 내쫓은 영감은 "쓰린 매를 맞으면서도 우렁찬 신음을 할 기운도 없이 '아유' 외마디 소리로 부르짖을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몸이 허약했다. 그를 내좆은 장본인은 나였고, "멀거니 뜬 눈에서는 눈물이 나오려"하였다.
눈을 겨우 뜰 때(1923) "이것은 오년 전에 생긴 조그만 일"이라고 말하지만, 죽음까지 몰고간 깊은 사색들이었다. "평양 사월 파일 불놀이"는 매우 유명했고, 평양 사람뿐 아니라, 외지의 사람들도 "거기서 삶을 찾고 즐거움을 찾고 위안을 찾으려 한다." 금패는 기생으로 손님 셋과 금패 밖의 기생 둘과 배를 탓다. "불놀이를 구경하러 떠난 배들은 여기서 쉬면서 술을 먹는 사람은 술을 먹고, 술을 안 먹는 사람은 웃고"처럼 불놀이를 즐기기 위해 배를 타는 것이다. 물론 배를 얻어 타는 사람은 "행복된 사람"이다. 마침 옆으로 여학생들이 탄 배가 지나갔다. 금패는 성이났다. 그녀들의 '현재'모습에 화가난 것이다.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부러운 것이다. 하지만, 여학생들의 나이가 젊어짐에 따라 그네들이 사치해지는 것을 보면, 금패는 "여학생들이 기생을 본받는다고 부르고 이긴 자의 쾌락을 맛보는 마음"을 가지기도 한다. 그리고 늙으면 학생들도 비참하리라고 생가한다. 그녀에겐 또 하나의 아픈 사연이 있다. A라는 사내가 접근을 해서 금패가 받아들여 주지 않아, 그녀의 집 밖에서 얼어 죽은 것이다. 그녀는 이것으로 사람의 앞에는 죽음이란 커다란 그림자가 있다는 것과 "돈과 멋"밖에 "참과 참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녀는 "굵고 짧게 사는 것이 정말이냐, 가늘고 길게 사는 것이 정말이냐?"를 깊이 생각하고 순간순간의 쾌락을 취하면 된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운다. 그녀에게 인생은 "컽지 않고, 변변치 않고, 괴롭고 쓸쓸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기생이란 것에 대해 많은 열등감을 느끼고 "자포자기의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그것은 그녀가 "남에게 온전한 사람의 대접"을 못받고 있다는데서 기인한다. Y라는 손님이 알지 못할 친구를 데려오는 데, 그 친구는 Y에게 기생이 사람이면서도 사람의 축에 못낀다고 말한다. 물론, 일어로 말했지만, 금패는 일어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는 마상이를 빌려 월도를 향하여 올라갔다. 그러다가 그녀는 마상이에서 떨어졌고, 죽을 힘을 다해 다시 마상이 위로 올라온다. 그녀는 주위에 사람소리가 들리지 않자 불안에 떨었고, 불안 속에서 다만 한가지만을 의식하였는데 그것은 죽음이란 그림자였다. "아낙네들이 기다리는 오월 단오가 이르렀다" 금패는 친한 손님 몇 명과 더불어 어죽 놀음으로 떠나기로 한다. 그들은 닭을 잡아먹고, 술을 마신다. 금패는 술을 많이 마시고 "사람 살리소고레"란 말까지 할 정도로 신음하였다. 이튿날 뱃놀이에서 "열서넛에 난 계집애 하나가"청류벽 위에서 뒤어내려 자살을 한다. 금패는 그 애를 보며"아무 저픔이며 두려움을 모르고 "죽었다고 한다. 그만치 그녀는 두려움에 휩쌓여 있다. 어쩌면 실존을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언젠가는 누구나, 나 또한 죽을 거란. 그녀의 "머리속에는 죽음이란 문제가 성장하기 비롯하였다." 명절 마지막날 아우의 조름에 못 견디어 그네를 타로 간다. 그녀는 높이 올라가다가 땅 위에 철석하니 떨어진다. "이리하여 대기 가운데 떠돌던 조그만 티끌 하나는 눈을 겨우 뜰 때 자기의 사위의 너무 크고 너름에 놀라서 소리도 못 내고 도로 그 자리에 스러졌다"로 이 소설이 끝난다. "눈을 겨울 뜰 때"란 죽음이란 걸 의식할 때이다. 죽음을 의식하자, 세상은 일장춘몽이었고, 더구나 자기는 기생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죽을 수 밖에 없었다.
나도향 연보
1902년 서울 출생 본명 경손(慶孫). 호는 도향. 필명은 빈(彬) 1919년 배재고보 졸업. 경성의전 입학. 도일. 와세다대학 입학이 자금 미조달로 실패. 1921년 단편「추억」(신민공론)을 발표하여『백조』동인. 1922년「젊은이의 시절」,「별을 안거든 우지나 말걸」, 시「투르게네프 산문시」를 『백조』 에 발표. 장편「환히」(동아일보)발표. 1923년 단편「십칠원 오십전」(개벽), 「춘성」「행랑자식」「은화 백동화」발표. 1924년 단편「자기를 찾기 전」(개벽), 논문「문단으로 본 경성」발표. 1925년 단편「뽕」(개벽),「물레방아」(조선문단), 계급문학시비론「뿌로니 푸로니 할 수는 없 지만」(개벽) 등 발표. 재차 도일하여 수학의 뜻을 이루려 하였으나 실패. 1926년 귀국. 소설「지형근」(조선문단).「화염에 싸인 원한」(신민)등 발표. 8월26일 폐환으로 죽다.「벙어리삼룡이」(현대평론)가 고(故)도향 이름으로 발표, 장편「청춘」발간.
벙어리 삼룡이(1926) "내가 열 살이 될락말락한 때이니까 지금으로부터 십사오 년 전 일이다...... 지금은 그곳에 빈민굴라고 할 수밖에 없이 지저분한 촌락이 생기도 노동자들밖에 살지 않는 곳이 되어 버렸으나 그때에는 자기내 딴은 행세한다는 사람들이 있었다.....그 중 여유 있는 생활을 하여 가는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잊어버렸으나 동네 사람들이 부르기를 오 생원이라고 불렀다."그는 굉장히 부지런한 사람이었고, 그가 이곳으로 이사올 때부터 감투를 쓰고 다녀서 동네 사람들은 양반이라고 불렀다. "그 동네에서는 가장 인심이 후하고 존경을 받은 집인 동시에 세력 잇는 집이다." 그 집에는 삼룡이라는 벙어리 하인이 하나 있는데, 몰골 또한 보잘 것이 없다. 그는 "진실하고 충성스러우면 부지런하고 세차다" 그리고, 이집에는 삼대 독자 아들이 있는데 동네 사람들은 그를 보고,"후레자식!아비 속상하게 할 자식!저런 자식은 없는 것만 못해"라고 욕을 할 정도로 자기 멋대로이다. 그 아들은 장가를 갔다. 사람들은 모두 부인이 아깝다고 한다. 장가를 간뒤에도 그 아들의 행동은 바뀌지 않았고, 이런 것을 꾸짖기라도 하면 아들은 말하는 사람보다 아내가 더욱 "밉살머리스러"웠다. 아들은 또한 부인을 못살게 굴었는데, "울면 요사스럽다고 때린다. 또 말이 없으면, 빙충맞다고 "때려 집안이 평화스러운 날이 없엇다. "삼룡이의 마음은 주인 아씨를 동정하는 마음으로 가득찼다. 또는 그를 위하여서는 자기의 목숨이라도 아끼지 않겠다는 의분에 넘치었다." 마님은 삼룡이에게 별이었던 것이다. 하루는 아들이 술이 잔뜩 취하여 무지한 놈에게 맞아서 길에 자빠진것을 삼룡이가 업고 오매, 부인이 고마와서 쓰던 비단 헝겊조각으로 부지삼지 하나를 하여주었다. 이런 이유로 그는 아들에게 죽도록 맞는다. 그리고 그 후로 벙어리는 안방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그후로 부터 밥을 잘 먹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아들이 심하게 부인을 두들겨 패었다. 벙어리는 안타가워서 안방으로 가서는 아씨를 위로한답시고 아씨를 안았다. 그 이유로 그는 대게 맞고 "죽은 개처럼"집 밖으로 내쫒기었다. 그는 그날 밤 주인집에 불을 지르고 주인(오 생원)을 구한 뒤, 아씨를 구하려다가 그는 다치고 색시를 무릎에 뉘인채 죽었다. "평화스럽고 행복스러운 웃음이 그의 입 가장 자리에 엷게 나타났을 뿐이다"
뽕(1925) 안현집의 남편의 이름은 김삼보이고, 나이는 삼십오륙 세나 되었고, "땅달보 김삼보" "아편쟁이 김삼보" "오리궁둥이 김삼보"라는 별명 처럼 외모도 초라하다. 그는"한달에 자기 집에 붙어 있는 날이 이틀이라면 꽤 오래 있는 셈이요, 하루라면 예사"일 정도로 놀음에 빠져 있다. 안현집은 몸이 헤픈 여자다. 그녀는 "돈만 있으면 서방도 있고 먹을 것, 입을 것이 다 있지"하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있는데 기인한다. 그래서 그녀는 "십 오륙세 적, 참외 한개에 원두막 속에서 총각 녀석들에게 정조를 빌린 것이나, 볏 몇 섬, 돈 몇 원, 저고릿감 한 벌에 그것을 빌"렸던 것이다. 삼돌이는 "어젯밤에도 김 참봉 아들네 사랑방에서 자고 왔습네다"라고 안현집에게 농담을 하면서 안현집을 품을 기회를 노린다. 그리고 김삼보에게 이르겠다고 협박도 하지만, 안현집은 그에게 몸을 주지 않는다. 이렇게 이삼년을 지내고 난 어느 가을에 삼돌이란 놈이 그 뒷집 머슴으로 왔다. 그는 동리의 계집 중 반반한 계집은 모두 건드려보았으나 안현집만은 건드리지 못했다. 그래서 집주인 마누라가 누에를 놓고 혼자는 힘이 드니까 안현집을 불러서 같이 누에를 치자는 약속을 받고 머슴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러다가 누에가 거의 오르게 되자 뽕이 떨어졌다. 삼돌이는 뽕을 훔쳤고 주인은 좋아한다. 그리고 다음 날은 안현집과 삼돌이가 같이 간다. 삼돌이는 기회다 싶어 여러 생각들을 한다. 그러나 뽕을 따다가 그들은 들키었고, 삼돌이는 도망을 하였으나, 안현집은 잡히었다. 그러나 뽕밭 주인에게 안현집은 몸으로 때웠다(?). 삼돌이는 화가 나서 미칠지경이다. 그러다가 삼돌이는 안현집에 가서 그녀를 덮치려고 하나, 실패하고 만다. 그는 화풀이로 동네에 소문을 다 내고 다녔다. 안현집은 주인집에게 삼돌이를 내쫒으라고 하지만, 주인은 일 잘하는 삼돌이가 아까워서 소 한필은 내놓아도 삼돌이는 못내어주겠다는 심보이다. 그러다가 영감이 왔다. 안현집은 넉두리를 하다가 김삼보와 싸움을 한다. 그 때 삼돌이가 와서 화를 더 돟구어 놓는다. 김삼보가 삼돌이의 멱살을 잡았다가 오히려 삼돌이에게 패대기 치인다. 그리고 삼돌이는 안현집의 일을 모두 까발린다. 삼돌이가 돌아가고 김삼보는 안현집을 죽도록 때린다. 안현집도 대어든다. 그러나 이튿날은 아무일 없었다는 듯 평소와 같았다. "이튿날 벙어리들 모양으로 말이 없이 서로 앉아 밥을 먹고, 서로 앉아 치어다보고, 서로 말만 없이 옷도 주고 받아 갈아입고, 하루를 더 묵어 삼보는 또 가버렸다. 안현집은 여전히 동리 집 공청 사랑에 잠을 잤다. 누에는 다서 30원싹 나눠 먹었다." 그들에겐 정조나 도덕이나 인륜은 무엇도 아니다. 적어도 굶어죽을 이 지경에서는. 그래서 서로가 싸워도 어쩔 수 없이 서로를 인정해 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지형근 (1926) 지형근은 노동을 하기 위해 집을 떠난다. 목적지는 강원도 철원군인데, 대개는 "시골서 소작농들을 하다가 동양척식회사에서 소작권을 잃어버린 사람이 아니면 일확천금의 꿈을 꾸고 허욕에 덤빈 사람들이었다. "그것은 철원에 수리조합이 생기며 그 개간공사로 노동자를 사용하는 까닭도 있지만 금강산 전기철도가 놓이며 철원은 무서운 속력으로 발전을 하는 데 따라서 다소간의 금융이 윤택"했기 때문이다. 그는 돈이 모자랄 것 같아서 도중에 김 서방을 찾아간다. 김서방은 옛날에는 자기 아버지의 은덕으로 살아간 사람이어서 도움을 받을 수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김서방에게 돈을 빌린긴 빌렸지만, 김서방은 "존대도 아니요 어리벙벙하게 말을"하고, 허세를 부리기에 "형근의 얼굴은 노래졌다가 다시 붉어"졌다 한다. 그는 철원에 도착했고 자기를 부른 친구를 찾아갔으나 환멸을 느낀다. 그가 있는 집이 "짐승의 우릿간과 같은데 거기서 십 명 사람들이 도야지들 모양으로 옹기종기 모여"있는 것이 사람이 살데가 아니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거기 가서도 돈이 귀한줄 모르고 얼마되지 않은 돈을 히프게 쓰고, 조주사의 농간에 의해 돈을 다 써버린다. 그것은 이제 일거리가 생기며 돈을 벌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형근은 술집에서 이화라는 여자를 만나는데 알고보니 자기 고향의 이웃에 산 여자란 걸 알아낸다. 형근은 그녀가 타락된 것에 대해 그녀를 속으로 욕한다. 그리고 "이화는 팔자를 창기로 타고났으므로 그는 언제든지 창기밖에 못된다"라고 생각한다. 이화는 자기의 지난 시절을 이야기하다가 울지만 형근은 이화의 눈물을 해석할 수 없다. 형근은 그 날 이후로 이화가 있는 술집을 기웃기웃 거리다가 들어가지 못하고 다시 움막으로 돌아온다. 일자리도 열흘이 넘도록 구하지 못하였다. 형근은 밥을 사먹어야 됨을 알게 된 때는 이미 그에게는 돈이 없었다. 시골에서 양반행세를 한 그는 세상물적을 잘 모른다. 그렇게 지내는데 형근을 부른 친구가 금화에 일자리가 생겼으니, 같이 가자고 한다. 그는 이제 일자리가 생기면 돈을 빌려도 갚을 수 있으리라 생각해서, 이화에게 가기 위해 친구에게 돈을 빌리려고 하나, 말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그날 그 친구가 술이 취해서 들어온다. 그는 우연히 친구의 주머니에서 지갑을 만지게 되었고 거기에 삼십원이 들어 있음을 알게된다. 그는 혼란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가 끝내 돈을 가지고 이화가 있는 술집에 간다. 이화는 손님을 받고 있었고, 형근은 자기 방으로 오라고 짜증을 부린다. 그러다가 옆방 손님과 형근을 싸움을 한다. 싸움을 한 뒤 그가 술집을 나올 때 그는 순사에게 잡힌다. 친구가 돈을 잃었다고 신고를 한 것이다. 친구는 형근이 훔쳐간지 몰랐고, 신고를 하지 말 껄 하고 후회를 한다.
염상섭 연보 1897년 서울 출생. 본명 상섭(尙燮). 필명 상섭(想攝). 호 횡보(橫步). 1909년 관립 사범보통학교 자퇴. 보성소학교로 전학. 1912년 보성중학 중퇴. 도일(渡日). 1920년 『폐허』동인 결성(남궁벽.황석우.김찬영.오상순.민태원 등) 1921년 처녀작「표본실의 청개구리」탈고(개벽8-10월호 연재). 1922년 단편 「임야」「제야」. 평론「개성과예술」등을 『개벽』지에 각각 발표.「묘지(만세 전)」을 『신생활』에 연재(3회로 중단) 1923년 '조선문인회' 결성(번영로.오상순.황석우.송진우.최남선.진학문 등). 중편「해바라기(신혼 기)」『동아일보』 발표. 1924년 첫 창작집 『견우화(박문서관)』와 『만세전(고려공사)』출간. 1925년 「전화」「윤전기」등의 단편을 『조선문단』에 각각 발표. 장편『진주는 주었으나』 『동아일보』 1926년「신흥문학을 논하여 박영희군의 소론을 박함」으로 프로문학파에 도전. 다시 일본으로 감. 단편「조그만 일」을『문예시대』창간호에 발표. 1927년 단편「남충서」를『동광』에, 「두 출발」을『현대평론』에 발표. 장편『사랑과 죄』 『동아일보』연재 1928년 귀국 장편『이심(二心)』『매일신보』연재. 1929년 김영옥과 결혼. 장편 『광분』『조선일보』에 연재 1931년 장편『삼대』『조선일보』에 연재 1932년 장편『무화과』『매일신보』에 연재 1934년 장편『모란꽃 필 때』『매일신보』에 연재. 장편 『무현금』 『개벽』에 연재. 1935년 장편『청춘항로』 『중앙』에 연재. 1936년 장편『불연속선』 『매일신보』에 연재. 1948년 장편『효풍』『자유신문』에 연재. 단편집『삼팔선(금룡도서)』출간. 「이합」「재회」 「바쁜 이바지(양과자갑)」등 단편 발표. 1949년 단편집 『해방의 아들』출간. 단편「임종」「두 파산」「일대의 유업」등 발표. 1950년 단편「굴레」. 소년소설「채석장의 소년」등 발표. 해군입대. 1952년 장편『취우』『조선일보』에 연재. 장편 『홍염』연재. 1954년 장편『미망인』『한국일보』에 연재. 단편 「추도」「 비스켙과 슈루탄」 등 발표. 1955년 장편『지평선』『현대문학』. 장편『젊은 세대』『서울신문』에 연재. 단편「부부」「 짖지 않는 개」등 발표. 1956년 『화관』『삼천리』에 연재. 단편「부성애」「어머니」「자취」등 발표. 1957년 단편「절곡」등 발표. 1958년 「순정의 저변」「쌀」「대목통티」등 다수의 단편 발표. 장편 『대(代)를 물려서』『 자유공론』연재. 1960년 단편집 『일대의 유업』(을유문화사)출간. 1961년 카톨릭 입교. 1963년 별세.
만세전(1922) "조선에 만세가 일어나던 전해 겨울이다"나는 동경W대학 문과에 재학중이고 이름은 이인화이고 아명은 경만이다. 연종시험을 보는 중에 아내가 위급하다는 전보를 받았고, 귀국해야만 했다. "죽었으면 나 안가기로 장사지낼 사람이 없어서 시험 보는 사람더러 나오라 는 것인가"라고 생각할만치 나는 귀국에 대해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아내의 죽음에 관심이 없다. 나는 곧장 귀국을 하지 않고, 형이 전보와 함께 붙여준 돈으로 돌아다니다가 자켓도 사고 여행 제구를 사고, 깍을 때도 되지 않은 머리를 깍는다고 가서는 면도만 하고 나온다. 그리고 잡지책을 사러갔다가 M헌에까지 온다. 거기에는 정자(시즈꼬)라는 일본 여급이있다.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였을 뿐 아니라 문학서적과 소설을 탐독한다" 나는 그녀에게 목도리를 준다. 물론 주면서 키스까지 한다. 그러나 그는 죄책감 따위는 느끼지 않는다. "죽거나 살거나 눈 하나 감짝 거리지 않으면서 하는 공부를 내던지고 보러간다는 것이 위선이다. 더구나 여기 술먹으러 오는 것을 무슨 큰 죄나 짓는 것같이 망설이는 것부터 큰 모순"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천변가를 헤매며 다니다가, 친구와(이름이 밝혀져 있지 않음)동경역으로 향한 것은 10시가 다 되어가서이다. 거기에 의외로 정자가 배웅을 하러 왔다. 그녀는 밴또와 편지를 싼 보자기를 내게 주었다. 나는 가다가 을라를 만나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고베에 내렸고, 을라를 만난다. 을라는 인화가 순진했던 시절 한 때 연모했던 신여성이다. 그녀는 당시 신여성이 대개 그렇듯이 추문이 끊이지 않았고, 사촌형인 병화와도 그런 관계가 있었다. 을라는 같이 서울로 가자고 하나, 나는 그녀를 위해 이틀을 더 머무르기가 싫어서 거절했다. 다음날 저녁에 나는 연락선을 탔다. 그런데 연락선을 타기 전에 나는 순사들로부터 조사를 맏고 감시를 받았다. 그 당시에는 유학생이 귀국할 때는 감시와 조사를 받았다. 그리고 그가 배안의 욕간에 갔니, 미리 사 오인이 있었다. 그들은 상인이었는데, 조선의 촌 사람들을 꼬여서 일본의 노동자로 파는 일종의 인신매매꾼들이었다. 나는 우국지사는 아니건만, 가슴에서는 반발감이 나왔다. 나는 배를 타게 되었다. 그러나 배안의 시선들이 갑갑했다. 내가 조선인이란 것을 그들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갑판위에서 흐려가는 항구의 불빛을 보며 눈물을 흘린다. 이 눈물의 의미는 망국인의 사나이가 흘리는 눈물이다. 나는 부산에 내려 도 다시 경찰서로 가서 한번 더 조사를 받는다. 그리고 나는 부산이 일본식으로 모두 바뀐 것을 본다. 그러다가 나는 일본식 국숫집에 들어간다. 거기에서 조선인 어머니와 일본인 아버지를 가지고 있는 혼혈인 여급을 만나고, 그 여급은 아버지를 찾으러 일본으로 간다고 했다. 나는 안타가웠다. 더구나 조선 남자는 "돈이 아니라 금을 주어도 싫"다고 그녀가 말하는 것을 볼 때 나는 다른 여급에게 농담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기차를 타고 김천을 지나갈쯤에 훈도인 형님이 역에 있는 것을 보고 나는 내린다. "세상에는 정치밖에 없다는 부친의 피를 받았으면서도 보수적. 전형적 형민과 무이상한 감상적 .유탕적 기분이 농후한 내가 태어난 것이 세상도 고르지 못한 아이러니"라고 말한다. 그러니만큼 형님고 나는 의견이 맞지 않았다. 그러나 형님은 쓰러져가는 집을 지탱하는 유일한 돈줄이다. 그가 아니라면 나의 유학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는 또한 첩을 들였다. 사연을 형님이 말했지만, 나는 이해를 못해준다. 그리고 나는 형님과 공동묘지에 대한 견해로 말다툼을 한다. 그러나 "산판이나 묘위전이 남의 손에 들어갔다는 데에는 나도 잠자코 있을 수가 없었다......공동묘지에 성화가 나서 하는 것은 코웃음치는 나도 조상의 산소를 팔아먹은 데에는 분개하고 있는 터이다." 셋째집 종형이 문서를 위조해 팔아먹은 것이다. 그날 저녁에 나는 다시 서울로 온다. 기차 안에서 나는 갓장수가 내 앞에 앉았고 그와 난 말동무가 되었다. 그 또한 공동묘지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공동묘지도 괜찮다고 햇다. 산사람도 못사는데 죽은 사람을 위해 묘지를 만들다 보면 우리는 살 곳이 없어진다는 논리이다. 그러다가 대전역에서 일본순사에게 그는 순사에게 잡혀간다. 나도 내려 대합실로 갔다. 대전 또한 일본식으로 바뀌었고, 조선인들이 일본인들에게 혹은 순사들에게 굽실거리는 것을 본다. "이게 산다는 골인가? 모구 뒈져라!"....무덤이다! 구더기가 끓는 무덤이다"라고 나는 외친다. 물론, 속으로 외쳣다. 울분이었다. 나는 서울에 도착했고, 아내는 아직 죽지 않고 숨을 힙겹게 몰아쉬고 있었다. "혼수상태에 있던 병인은 눈을 슬며시 뜨고 시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다보고 나서 곁에 있는 나를 물그러미 치어다보더니, 까맣게 탄 입술을 벌리고 생그레 웃는 듯하더니 깔딱 질린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하여지면 외면을 한다." 이런 묘사는 조선 여인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조혼을 하고 남편의 얼굴을 익힐 때쯤 남편은 유학을 떠난다. 물론, 사랑이 있을리 만무하다. 그러나 아버지는 "요새 양의가 무어 안다던?"하면서 끝가지 한의에게 약을 썻다. 부인은 죽었다. 나는 삼 일만에 공동묘지에 파묻엇다. 그날 나는 을라와 동경으로 가고 싶었지만, 형임으로 인해 도리가 아님을 깨닫고 십여일있다가 동경으로 돌아간다. 을라는 물론, 이제 까페생활을 떠나 대학입학을 준비하는 시즈꼬도 청산한다.
이기영. 故鄕. 이 작품은 원터 동리에 사는 소작인들과 마름인 안승학과의 대립구조로 이루어진다. 안승학은 前 마름을 모함으로 밀어내고 마름의 지위에 올랐다. 당시 토지제도는 한명의 지주가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고 그의 직접적인 통제가 이루어지지 않는 곳에는 대리인 자격인 마름을 두어 소작인들을 관리 했다. 원터에 동경유학을 하고 온 희준이가 오면서 안승학의 일방적인 착취는 곤란을 겪게 된다. [고향]은 농민소설의 형태를 뛰고 있지만 같은 피착취 계급인 노동자의 단합을 그리고 있다. 노동자는 원칠의 딸인 인순이, 안승학의 딸인 갑숙이, 그리고 방개다. 인순이는 집안 형편상 일찌기 공장으로 들어가 집에 돈을 보태주고 있고, 갑숙은 마름의 딸로서 서울에서 보통학교를 마치고 호화롭게 지냈으나 경호와의 사랑으로 인해 집안적 풍파를 입고 가출해서 옥희로 이름을 바꾸고 공장에 들어간다. 옥희는 의식이 깨어가는 인물로서 자기 아버지의 잔악한 행위를 혐오하게 되고 희준을 돕게 되고 소작인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활을 해준다. 방개는 덜렁거리는 성격의 소유자로서 시집을 갔으나 가난에 찌들려 행복해 하지 못하고 옛 사랑인 인숙의 오빠 인동이와 도망을 가자고 하나 인동이 반대하자 공장에 들어간다. 권상철은 포목점을 하는 부자로 아들 경호를 두고 있지만, 안승학의 간계로 경호가 자신의 친 아들이 아님이 소문나게 된다. 경호는 갑숙을 진심으로 사랑하나 안승학의 반대로 좌절되고 권상철의 주선으로 공자의 사무원으로 들어간다. 거기서 그는 헤어진 옥희를 다시 만나게 되고 그의 요구로 둘은 약혼을 한다. 하지만, 갑숙은 마음속에 여전히 어릴적 소꿉친구이고 지금은 자신을 희생해 소작인을 도우고 있는 희준을 사랑한다. 인동이는 희준의 주선으로 부잦집 딸 음전이와 결혼을 하나 만족하지 못하고 방개를 사랑한다. 김선달은 인동이와 함께 희준의 충실한 동무다. 희준은 소작인들의 지위를 되찾기 위해 마을 청년회를 부활하고 야학과 두레를 앞장서서 해나간다. 그도 옥희를 사랑하나 우애적 사랑을 위해 그의 마음을 억제한다. 안승학과 소작인의 대결이 정점에 달한 것은 많은 비와 폭풍우로 농토와 벼들이 유실되었을 때이다. 소작인들은 올해는 지세를 깍아줄 것을 요구하나 안승학은 완고한 고집을 피운다. 소작인들은 직접지주를 찾아가 허락을 받지만 안승학은 뒷일-계속 마름을 할려면 지주에게 잘 보여야한다-을 위해서 지세 탕감을 허락치 않을 것을 지주에게 설득 시킨다. 소작인들은 정당하지는 못하나 그의 약점을 잡아 허락을 받아낸다. 그것은 그의 딸의 소문을 퍼트린다는 것인데, 옥희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다.
한설야 연보 1901년 함경남도 함흥 출생. 본명은 한병도(韓秉道), 필명은 만년설, 한형종, 김덕혜, 윤영순. 1924년 니혼대학 사회학과 졸업. 귀국 후 북청사립중학 강사로 재직. 1925년 《조선문단》에 소설 〈그날 밤〉으로 추천을 받고 문단에 데뷔. 1926년 소설〈동경〉이《조선문단》에 발표. 평론《예술적 양심이란 것》이《동아일보》에 발 표. 1927년 카프에 가입. 소설〈그릇된 동경〉을《동아일보》에 연재.〈그 전후〉,〈뒷걸음질〉,〈 합숙소의 밤〉등을《조선지광》에 발표. 평론에도 주력하여《계급대립과 계급문학》 등 을 발표. 1928년 소설〈인조폭포〉,평론〈문예 운동의 실천적 근거〉,〈현단계의 조선 사람은 어떠한 예 술을 요구하는가〉등을 《조선지광》에 발표. 1932년 《신계단》편집 맡음. 1933년 소설〈교차선〉을《조선일보》에 연재.〈추수 후〉,〈소작촌〉《신계단》에 발표. 1934년 카프 제2차 검거 때 투옥. 1936년 〈황혼〉을 《조선일보》에 연재.〈임〉(《신동아》3월호), 〈딸〉(《조광》4월호), 〈홍 수〉(《조선문학》5월호), 〈후미끼리〉(《조광》6월호)에 발표. 1937년 〈청춘기〉를 《동아일보》에 연재. 1939년 〈귀향〉《 영창서관》발간. 1940년 임화, 김남천, 안막 등과 더불어 국민총력조선연맹, 조선문인보국회 등에 가담.〈태양은 병들다〉《조광》, 〈모색〉《인문평론》3월호, 〈탑〉《매일신보》등 발표. 1945년 임화 중심의 조선문학건설부의 지도 노선에 반발하여 이기영 등과 함께 조선 프롤레타 리아 예술동맹을 조직하여 기관지《예술운동》을 발행하면서《문화전선》과 경쟁을 벌 임. 8.15직후 월북. 1962년 숙청당함.
황혼(1936)-《조선일보》 연재. 여순은 경재의 집에서 경재의 이복동생들을 가르치며 살고 있다. 계모는 제 소생의 자식들을 탓하진 않고 여순이 공부를 못가르쳐 성적이 올라가지 않는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여순은 그 집을 나온다. 경재는 자기를 잘 이해해주고 호감을 가지고 있다가, 여순이 집을 나가자 여순의 일자리를 알아봐주고 도움을 많이 준다. 경재의 집은 기울어져 가고 있었고, 경재의 약혼녀 현옥의 집은 그 아버지가 사둔 금광이 갑자기 가격이 올라 부유하게 되었다. 경재 아버지(김재당)가 하던 회사, Y방적회사를 현옥의 아버지가 인수한다. 현옥은 경재가 일본 유학시절에 보살펴 준 아가씨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현옥의 집은 그녀를 뒷 바라지 할 만큼 잘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옥은 자기의 집이 잘 살아짐에 따라 성격도 조금씩 바뀌어 간다. 경재는 이런 이유로 현옥에게 마음이 멀어져간다. 그러나 현옥은 끊임없이 경재를 따라다니면서 지극정성을 보인다. 김재당은 경재가 현옥과 결혼 할 것을 강요한다. 한편 사장(안중서)은 공장은 개혁하기 위해 새 기계를 들려 놓는 계획을 잡는다. 그러면 더 적은 직원들을 고용하여 더 많은 생산을 할 수 있다는 속셈이다. 그래서 그는 직원들을 내보내기 위하여 계획을 세우는데 그것이 신체검사이다. 신체검사를 해서 건강이 나쁜 사람들은 쫒아내겠다는 심보다. 그런데, 준식과 그를 중심으로 한 직공들은 이 사실을 미리 알아내고, 마지막 장면은 이들이 사장실로 몰려옴으로써 끝이 난다. 여순은 경재의 주선으로 그 회사에 취직을 했다. 그녀는 S고보를 나온 학벌로 인해 공장이 아닌 사무실에 근무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장이 그녀를 겁탈하려 하자 회사를 그만 둔다. 그녀는 고향친구 준식이 그 회사에 다니고 있었고, 준식의 권유에 의해 그 회사의 직공으로 다시 들어온다. 그래서 준식의 일을 돕는다. 그러나 안중서는 여순에 대한 욕망은 끝까지 사라지지 않는다. 공장에서 준식이가 중심이 되어 직원들의 편의를 위해 투쟁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가담하진 않지만, 혼자서 일이 생길 때 마다 도와주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동필이다. 준식이 패는 동필이를 감시하고, 따돌리지만, 마지막에 같이 투쟁한다. 사장을 하늘같이 모시는 주임 털보에게 여러차례 유혹을 받았지만, 끝까지 양심을 팔지 않았던 것이다. 여순은 경재에게 책도 얻어 보고, 많은 이야기를 듣고 그의 사랑을 받지만, 그의 사랑을 끝내 뿌리친다. 경재는 의식은 있어도 행동이 따라가지 못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그와 반대로 준식은 배운 것은 없지만 많은 책을 읽었고 무엇보다도 실천하는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