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가 1995년도에 출판한 <우리 민속 아흔아홉마당>에서 옮겨왔습니다.
옛 사람들의 여름나기
입하(立夏)는 여름이 시작된다는 날이다. 입하는 황경(黃經:태양의 위치를 알리는 도수)이 45도에 이르러 여름이 시작 된다는 절후다. 음력으로 5월 6,7일 경이니, 단오가 지나면 곧 여름이다. 또, 입하를 반빙(頒氷)의 날이라고 한다. 지금은 시골 구석구석까지 냉장고가 보급되어 있지만, 예전에는 겨울이 아니고는 얼음 구경을 할 수 없었다. 기껏해야 그늘진 골짜기에서 흘러나오는 샘물로 목을 축이고 더위를 씻을 뿐이었다. 그러나, 어느 시대에서나 예외는 있었으니, 조선시대 서울의 사대부 집안에서는 여름에도 얼음을 어렵지 않게 얻어썼다. 한강변에 있었던 동빙고(東氷庫)와 서빙고(西氷庫)가 그 유적이다. 한 겨울에 한강가에서 얼음을 떼어다가 쌓기 좋게 얼음장을 잘라서 갈대잎으로 녹지 않도록 겹겹이 싸서 땅속에 파놓은 얼음창고에다 저장을 해 두었다. 이듬해 입하 때가 되면 얼음을 꺼냈다. 동빙고에 저장했던 얼음은 제사음식 차리는 데 주로 쓰였고, 서빙고 얼음은 왕궁에서 수랏상을 차리는데 썼다. 입하날이 되면 임금이 하기 보너스 식으로 신하들에게 얼음을 배급했는데, 그날이 바로 여름이 시작되는 입하날이었다. 석빙고는 지방 여러 곳에도 세워졌는데, 경남 창령에는 읍내와 영산 교리 등 두 곳에나 석빙고가 있다. 보물 제310호로 지정된 창령 석빙고는 영조 18년(1742)에 축조된 것으로, 낙동강에서 얼음을 얻었다고 한다. 북쪽 구석에 배수공이 있어 얼음 녹은 물을 개울로 뺐고, 홍예에 장대석을 걸친 천장에는 배기공을 설치하였다.
여름이 되면 입맛을 잃게 마련이다. 이 계절의 미각을 신선하게 돋구는 것으로는 화전(花煎)과 어채(魚菜) 미나리강회(芹膾), 파강회 전복회 등이 있었다. 화전은 찹쌀가루에 장미꽃 잎을 섞어 반죽해서 기름에 부치거나 튀긴 것인데 유전(油煎)이라고도 했다. 어채는 요즘의 생선회 같은 것으로 파, 버섯, 전복 등을 넣어 부친 지단, 국화잎 등을 가늘게 썰어 버무린 후 기름과 초를 쳐서 시원하게 먹는 초여름에 빼놓을 수 없는 시식(時食)이었다. 파강회는 파를 데쳐서 날고기를 속에 넣고 감아서 초고추장(초장)을 찍어 먹는다. 요즘은 농수산물의 재배기술과 저장 가공기술이 발달하여 특별히 시식이라고 내세울만한 계절음식이 없어졌다. 돈만 들고 나가면 한겨울에도 딸기를 사다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만큼 생활이 편해지긴 했지만, 계절의 맛과 멋을 잃어버린 채 살고 있다.
한여름은 초복부터 친다. 초복은 하지가 지난 후 세번째 경일(庚日)이고, 그 열흘 후인 네번째 경일이 중복(中伏)이며, 입추(立秋)가 지난 첫번째 경일이 말복(末伏)이 된다. 입추와 일진(日辰)의 순서에 따라 중복과 말복의 사이는 열흘도 되고 스무날도 되는데, 스무날이 되는 경우를 ‘월복(越伏)’했다고 한다. 초복에서 말복에 이르는 기간은 일년 중 가장 더위가 극심한 때라 요즘도 방학이라 하여 학생들이 쉬지만, 예전에도 서당에서는 짧은 기간이나마 공부를 하지 않고 쉬었다. 삼복에 들어서면 조정에서는 쇠고기를 신하들에게 하사하는 풍습이 있었다. 민간에서는 보신탕을 즐겼다. 요즘도 시골에 가면 복날을 맞아 기르던 개를 산으로 끌고 가는 광경을 왕왕 보게 된다. 복날 개를 잡는 풍속은 중국에서 수입된 것 같다. 진(秦)나라 때 개를 잡아 사대문에 매달고 병충해를 막았다는 기록이 있다. 쇠고기는 소를 잡아야만 나오는 고기이다. 소는 덩지가 커서 한 마리를 잡으면 그 마을에서 다 소화시키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소를 제일의 재산으로 여겼던 농경사회에서는 함부로 잡을 수가 없었다. 설렁탕은 복중의 음식이다. 세종 때 시작된 이 음식은, 왕이 동대문 선농단에 나갔다가 비바람으로 꼼짝을 못하게 되자, 신하들이 소를 잡아 끓여 시장기를 면하게 해준 데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쇠고기는 예나 지금이나 고가(高價)의 식품이었다. 그런 이유로 해서 경제적인 부담이 적은 개를 희생시켰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개를 흔히 충복(忠僕)이라고 한다. 삼복(三伏)의 ‘伏’자와 발음이 같기 때문에 개[伏]를 희생시킨 게 아닌가 한다.
불교에서 특히 개고기를 금한 것은 별다른 연유에서라기보다 살생을 금하는 계율 때문인 듯하다. 불교도가 아니라도 보신탕솥에 기르던 개를 집어넣기는 정서적으로 좀 그렇다. 이젠 개고기가 아니라도 경제의 발전으로 다른 영양식품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지 않은가. 옛날에도 개고기를 먹지 않은 이들은 삼계탕이나 영계백숙을 즐겨 먹었다. 양기가 부족해서 식은땀을 자주 흘리는 사람들은 삼계탕에 황기를 넣어 먹었다. 요즘 들어서는 그런 육식보다 여름과일로 소식(素食)을 하는 이들이 부쩍 늘어났다.
복날에 팥죽을 먹는 곳도 있다. 사람들은 팥죽이 사악(邪惡)한 악귀를 물리치는 음식이라고 믿기 때문이었다. 동지 때 팥죽을 쑤어 대문간에 뿌리고 또 먹기도 하는 것과 같은 일종의 무속적 풍습이다. 이 무렵 빼놓을 수 없는 것에는 백성들이 즐겨 먹었던 묵무침이 있었는데, 주로 산골벽지 사람들이 겨우내 장만해 두었던 도토리로 가루를 빻아 끼니 대신 먹기 시작했던 것이 일반화되어 시식이 된 것이다.
그리고, 경상도 일부지방에서는 흰콩을 볶아서 약수터를 찾기도 한다. 탄산약수 한 바가지에 볶은콩 한줌씩이다. 또, 흰콩을 볶을 때 소금을 넣는 것은, 더위에 흘린 땀으로 손실된 염분을 공급하기 위함이니 조상들의 슬기를 오늘에 다시금 음미해 본다. 또, 볶은 콩을 빻아서 그 가루를 밥에다 넣고 비벼 먹는 것도 복을 전후한 풍습이다. 한강 이남의 민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습인데 지금은 사라졌다.
복중에는 더위를 피해서 술과 음식을 마련해서 계곡이나 산정(山亭)을 찾아 가기도 했다. 이 날 궁중에서는 신하들에게 빙표(氷票)를 나누어 주고 장빙고에 가서 얼음을 타가게 하였다. 개울이나 소(沼)를 찾아 아이들은 보릿단을 묶어서 올라타고 물놀이를 한다. 어른들은 육식 대신 천렵으로 잡은 물고기로 매운탕을 끓여 먹고 더위를 잊기도 한다.
천렵은 입하 때부터 시작된다. 산 좋고 물 좋은 곳이 아니라도 묵은 그물을 걸머지고 가까운 시내나 개울을 찾아 붕어 미꾸라지, 피라미 등으로 매운탕을 끓이며 한잔 술로 회포를 푼다. 요즘은 어떤가, 참치캔에다 훈제 오징어를 뜯어 먹으니 운치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요즘은 더위를 피한다 하여 피서(避暑)라고 하지만, 예전에는 더위를 씻어낸다 해서 흔히 ‘척서(滌暑)’니 ‘소서(消暑)’니 하는 말들을 썼다. 피서(避暑)는 외국의 ‘바캉스’와 같이 휴가를 얻어 집을 떠나는 것을 의미하지만, 척서(滌暑)는 집안에서 더위를 이겨내고 극복한다는 뜻이 강하다. 조상들은 집안에서 분위기를 바꾸거나 여름용품들을 적절히 이용해서 문자 그대로 척서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옥에 사는 이들은 아파트에 사는 이들보다 더위를 덜 탄다고 한다. 가옥구조부터가 그렇다. 흙이나 나무, 종이 등을 많이 사용해서 단열의 효과를 배가시켰고, 환기나 통풍이 잘 되도록 엉성하게(?) 구조를 짰다. 또, 앞뒤가 훤히 트인 대청이 있어서 항상 시원한 바람이 주야로 드나들었다. 대청에 올라서서 바라보면 언제나 푸른 산과 강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더위에 쫓겨 기를 쓰고 집을 나설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옛사람들은 여름에 삼베나 모시로 바지저고리를 해 입었다. 보기만 해도 시원한 옷감들이다. 화학섬유가 대부분인 요즘과는 달리 옷감 자체가 습기를 흡수하는 자연섬유였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색깔도 그렇거니와 풀을 먹여 감촉도 시원하다. 게다가 옷안에다 등나무로 만든 등거리나 토시를 받쳐 입기 때문에 옷이 살갗에 달라붙지 않고 항상 통풍이 잘 되었다. 그러니 땀띠가 날리도 없다.
갖가지 부채를 비롯하여 대나무로 만든 베개며, 시원한 목침이며, 왕골로 짠 마루의 돗자리며, 세죽(細竹)으로 만들어 늘어뜨린 발이며, 대나무의 시원한 촉감을 이용해서 만든 평상(平床)과 좌상(座床)이며, 까칠까칠하고 시원한 삼베이불이며... 팔베개를 하고 마당에 누워 후원의 대숲소리를 들으며 별 쏟아지는 밤하늘을 바라보라. 그 청량(淸凉)함을 어디에 비교할 수 있을까. 그리고 또, 죽부인(竹夫人)이라는 게 있다. 여름용품 가운데 가장 운치와 풍류가 깃든 것이다. 이것은 대오리나 등나무 줄기 등으로 등신대(等身大) 크기로 만들어 잠잘 때 끌어안고 잔다. 그것을 이부자리 속에 넣으면 통풍도 잘 될 뿐 아니라 살갗이 바닥에 붙지 않아서 여간 시원하지 않다. 몸을 기대어 비적거려 피로를 풀기도 하고 여럿이서 베개를 대신으로 베고 자기도 한다. 그 기구의 이름을 죽부인(竹夫人)이라 의인화한 것은 참으로 한국인다운 멋이요 익살이라 아니할 수 없다.
짚신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여름용품이다. 평소에 신고 다니던 짚신에다 바닥에 왕골이나 삼껍질을 깔아서 지압 효과도 있거니와 통풍이 잘 되어 땀이 나지도 않고 무좀에 걸릴 염려도 없다. 그리고 바깥 외출 때는 대오리나 갈대로 만든 시원한 삿갓을 쓴다. 햇빛도 막으면서 거칠게 엮은 틈사이로 통풍도 느낄 수 있어 여름모자로는 더 없다.
이렇듯 옛 사람들은 문명의 이기 속에 사는 요즘 사람들보다 훨씬 지혜롭게 피서를 했다. 조금만 더워도 헉헉대고, 휴가철만 되면 빚을 내서라도 이웃에 뒤질세라 피서를 떠나고야 마는 요즘 사람들에 비하면 얼마나 운치 있고 효율적인 여름나기인가. 이는 곧 자연의 순리(順理)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하는 문제와 직결되는 것이니, 옛 사람들은 자연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임으로써 자연합일을 꾀한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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