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계할아버지 별묘 <- 여기를 클릭하면 위치를 알 수 있어요.
무릇 인간이 별세 후에 사당을 짓고 비를 세움은 그 생애의 업적을 기리고 그 모범을 본받기 위한 것이다. 공의 효제(孝悌)는 신명을 통하고 충의는 원근을 복응(服膺)시키며 조행(操行)의 순독(純篤)과 개제(愷悌)는 모두 후손의 모범이 될 수 있다.
공의 성은 노(盧) 휘는 진(禛)이오 자는 자응 호는 옥계(玉溪) 그 선조는 풍천(豐川)인이다. 국자진사 휘 유(裕)는 그 비조(鼻祖-시조) 이고 대대로 벼슬한 명문이다. 고려 말에 오랑케를 피하여 함양인이 되고 이조(조선)에 들어와 증조 휘 숙동(叔仝)은 문장과 청백으로 관은 예조참판 예문관제학에 이르렀으며 조 휘 분(昐)은 예문관 교리로 세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는데 그 가운데가 가장 어질고 호학수지(好學守志)하였으니 곧 공의 선고(先考)이다. 휘는 우명(友明)이고 관은 현릉참봉에 이르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안동권씨 생원 시민의 딸에게 장가들어 천령의 아래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천질이 영오(英悟)하여 어릴 때 부터 범인과 달랐으며 차차 자람에 따라 스스로 학문에 힘써 문의가 날로 밝았고 이십세에 상상(上庠)에 선인(選人)되어 이로부터 덕행이 닦아지고 화문(華聞)이 더욱 나타났다. 1546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박사로서 전적에 오르고 마침내 예조좌랑을 거처 지례현감이 되어 치적이 많았고 청백리에 뽑혔으며 다시 홍문관수찬으로 선발되고 교리에 올랐다. 1558년에 필선(弼善)에서 부응교(副應敎)에 옮겼다가 다음 해에 장령(掌令)에서 검상사인(檢詳司人)에 임명되고 집의전한(執義典翰)에 올라 마침내 직제학에 올랐는데 이때 권간(權奸-권세를 가진 간신)의 당로자(當路者)가 공의 재망(才望-재주와 명망)을 중히 여겨 도어(謟語)로 구관(求款)하고 공의 일언상조(一言相助)를 기유(覬覦-분수에 넘친는 것을 바람)하였으나 공은 폐문 불응하니 사론(士論)은 그를 더욱 중시하였다. 1560년에 형조판서를 특배(特拜)하고 은태(銀台)에 전입하였으며 1562년네 대부인이 70세를 넘어 귀양(歸養)을 간걸(懇乞)하니 명조께서 표욕(豹褥-표범 요)을 하사하여 그 효행을 기리고 마침내 담양부사와 진주목사 배수하였으나 모두 병으로 곧 돌아오게 되었다. 1567년에 이조참의에서 충청관찰사와 전주부윤을 거쳐 부재학으로 소환되었어다가 얼마 안되어 귀양(歸養)을 소걸(疏乞)하니 선조께서 위유(慰諭)하고 휴가(休暇)를 주어 대직왕환(帶職往還)할새 공은 고향에 돌아와 사장(辭章)과 함께 잠경(箴警)의 말을 첨부하니 성지(聖旨-임금의 뜻)로써 가장(嘉獎-칭찬하여 권장함)하고 마침내 체직(遞職)의 허락(許諾)과 함께 도관(道官)에 명하여 양친(養親)의 수용(需用)을 공급할제 공은 상잔진사(上盞陳謝)하였다. 1571년에 모부인의 봉양(奉養)을 위하여 곤양군수로 나갔다가 대사헌동지춘추관사(大司憲同知春秋館事)를 거쳐 1574년에는 병조참판대사간(兵曹參判大司諫)에 임명되고 갑자기 이조참판 겸 예문관제학(吏曹參判 兼 藝文館提學)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575년에 특히 자헌(資憲)에 진계(進階)되고 예조판서(禮曹判書)를 거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올랐으나 나가지 아니하고 이해 10월에 대부인이 졸하였다. 3년상이 끝나자 공의전의 상을 만나 형조판서(刑曹判書)로 분임(奔臨)하였으나 병으로 경질(更迭)되고 공조판서(工曹判書)대사헌(大司憲)을 거쳐 대사마(大司馬)에 임명되어 공직(供職)한지 수십일에 병으로 사양하고 1578년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올랐으나 공의 병은 이미 급전(急轉)하여 일어날 수 없게 되니 선조께서 어약(御藥)을 하사하였다. 임종에 가사는 언급하지 아니하고 단지 내가 송추(松楸-산소 둘레에 심는 나무)에서 사망할 수 없음은 실로 평생의 뜻이 아니다라하고 마침내 졸하니 춘추는 61세다.
당시 집에는 한섬의 곡식도 없었으니 사부(賜賻)로써 염빈(殮殯)을 다스렸고 경중(京中)의 사부(士夫)는 경조분곡(傾朝奔哭)하고 가동주졸(街童走卒-길거리의 아이나 거니는 무리)까지도 비통(悲慟)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장지로 돌아옴에 함양의 사민(士民)은 남녀노소(男女老少)할 것 없이 경상(境上)에서 영곡(迎哭)하고 적부(吊賻)에 힘을 다하였으며 장사(葬事)날에는 수개군(數箇郡)에서 모여들었고 오지 못한 사람은 위패(位牌)를 모셔 곡하였다고 한다.
공은 순흥안씨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바 가정에서 유염(濡染)하여 일찍부터 유한(幽閒)의 덕이 있어 아내로서 공경하고 어머니로서 자애로우니 참으로 군자의 배필(配匹)이고 7남 2녀를 두었는데 모두 명족(名族)에 가취(嫁娶)하여 내외제손(內外諸孫)이 오십여 명이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후예(後裔)는 부지기수(不知其數)이고 많은 학자와 명인을 배출(輩出)하였다.
공은 1518년 7월 5일에 나서 1578년 8월 20일에 졸하고 그해 12월 7일에 장사지냈는바 묘지는 함양(咸陽) 치북(治北) 주곡리(酒谷里) 자좌오향지원(子坐午向之原)에 있고 부인은 공부다 10년 먼저 1568년 에 졸하니 공과 더불어 같은 묘지에 모시었다. 사후에 남중(南中)의 사자(士子)는 공의 덕을 추모함이 간절하여 다음해 남원과 함양 두 곳에 묘사(廟祠)를 건립하였으며 1600년에 창주(滄洲)와 당주(溏洲)서원으로 각각 사액되어 오늘까지 제향(祭享)함은 공의 유풍여택(遺風餘澤)이 사람에게서 사라지지 않음을 말하여준다. 1629년에는 인조에서 근학호문(勤學好問)하고 자은애친(慈恩愛親)하였다하여 문효(文孝)라고 시호(諡號)를 내리었다.
공은 장중(莊重)하면서 소창(疎暢-소통)하고 간결(簡潔-대쪽같이 깨끗)하면서 화수(和粹-화합하고 순수)하며 박연(泊然-머물다)하여 기호(嗜好-즐기고 좋아함)에 치우침이 없고 탄연(坦然-너그럽다)하여 교위(巧僞-교묘하게 속임)를 부림이 없으며 평생에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고 술은 즐기지 아니하며 처심(處心)이 낙역(樂易-풍류)하여 오만하지 아니하고 의리에 의달구차(依達苟且)한 태도가 없으며 약속(約束)을 엄수(嚴守)하고 천성이 순효순제(純孝純悌-효도와 공경이 순수)하여 청렴순백(淸廉純白-맑고 깨끗함)하고 칙궁검소(飭躬儉素-몸을 경계하여 검소함)하여 들에는 밭이 없고 서울에는 집 한 채 없었다고 한다. 진취(進取)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항상 인퇴(引退-벼슬에서 물러남)에 뜻이 있어 벼슬 30년에 조정에 있었던 날은 3년도 못되고 은지(恩旨)가 돈박(敦泊-자주 재촉함)하지 않으면 강기(强起)하지 아니하며 학도들과 도리를 담설(談說)하매 미미불권(亹亹不倦-힘쓰고 게으르지 않음)하였던바 일찍이 일제 이황공과 더불어 대학을 논함에 그 종지(宗旨-근본이 되는 중요한 뜻)를 얻어 말하기를 학문은 많은 말에 있지 않고 이를 대학편에서 구하면 16언이면 족하다하였다. 문장은 부염(浮廉-겉과 속이 다름)을 일삼지 아니하고 전아섬창(典雅贍暢)하여 염낙문체(濂洛文體)를 탐득(探得)하였으며 시(詩) 또한 취미가 유원(悠遠)하여 절대로 진언(陳言-낡아 빠지고 케케 묵은 말)을 답습하지 아니하였다. 주군(州郡)을 다스림에 사직(事職)을 기신(衹愼)하고 그 설장(設章)한 바는 반드시 관대(寬大)에 근본하고 또한 일찍이 소리(小利)를 꾀하여 닐을 일으키거나 성장(聲章)을 꾸며 입명(立名)하지 아니하였다. 영남은 땅이 커서 다스리기 어려웠으나 공은 관찰사가 되어 성실로서 번거로움에 임하고 엄하나 가혹하지 아니하며 숙송체옥(宿訟滯獄)을 편언(片言)으로 부결(剖決)하니 활서(猾胥)는 염평(斂平)하고 오리(汚吏)는 망풍(望風)하며 백성은 이로써 순뢰(順賴-의지하다)하여 대치(大治)하게 되니 김계휘(金繼輝)공은 공의 업적을 살피고 말하기를 덕행(德行)과 문학(文學)이 이무(吏務)를 겸통(兼通)함이 곧 저와 같은 줄은 미처 헤아리지 못하였다고하였다.
이상을 종합하여 생각하건대 공의 생애는 실로 후세에 모범이고 귀감이다. 최근 도로의 신설로 인하여 사우(祠宇)를 옮기고 새로 묘정비(廟庭碑)를 세움에 따라 일전에 문효공의 14대손 중환씨(重煥氏)가 창주서원지(滄洲書院誌)를 가지고 와서 묘비문(廟碑文)을 간곡히 청하기에 구영(九榮)은 천학비재(淺學菲才)이나 12대조 월사공(月沙公-이정구)이 문효공(文孝公)의 종질(從姪)로서 어릴 때 가끔 참배하여 공의 제시(提撕-기운을 냄)를 받아 모덕(慕德)하는 정성이 남보다 더하고 서거(逝去) 후에는 친히 공의 묘지명(墓誌銘)과 신도비명(神道碑銘) 및 시장(諡狀-임금이 내려준 시호의 문서) 직접 찬(撰-짓다)하였을 뿐만아니라 양가(兩家)의 정의(情誼-서로 사귀어 친해진 정)로 보아 감히 물리칠 수 없어 이상과 같이 삼가 찬(撰)하는 바이다.
1995년-을해년(乙亥年)
월사공(月沙公) 후손(後孫) 연안(延安) 이구영(李九榮) 근찬(謹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