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문]2006-05-05 20 판 47 면 1635 자 |
‘인∼천의 성냥공장, 성냥공장 아가씨….’ 나이 40을 넘긴 남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불러봤을 그 시절의 국민가요(?)다. 체면을 따지지 않아도 되는 술자리 등에서는 단골로 등장해 수준을 ‘끌어내리는 데’ 일조하면서도 분위기를 띄우는 묘한 노래였다. 하지만 끝부분이 상당히 저급해 성희롱의 잣대가 엄격해진 요즘 아무 데서나 불렀다가는 다음날 아침이 편치 않을 것이다.아무튼 지난날 군대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불려져 제대 후 “정식 군가인 줄 알았다.”고 회고하는 싱거운 사람까지 있는가 하면, 모 전방부대에서는 사단장이 사병들과 함께 손을 흔들며 문제의 ‘끝부분’과 후렴까지 힘차게 불렀다는 믿기지 않는 얘기도 있다.이 노랫말처럼 ‘인천’ 하면 성냥공장과 직공 아가씨들이 연상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인천이 우리나라 성냥산업의 시발지이자 메카였기 때문이다. 1900년 러시아 대장성이 발행한 ‘조선에 관한 기록’이란 보고서에는 “1886년 인천 제물포에 외국인들의 지휘 아래 성냥공장이 세워졌다. 그러나 얼마 안가 생산이 중단됐는데, 그 원인은 일본제 성냥이 범람했기 때문이다.”고 적혀 있다. 이 기록만으로는 성냥공장의 정확한 위치, 상호 등을 알 수 없지만 한국 최초의 성냥공장이 인천에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는 최초의 성냥공장은 1917년 10월 인천 동구 금곡동(당시 금곡리)에 설립된 ‘조선인촌주식회사’다. 이 공장이 인천에 들어선 것은 성냥 재료로 압록강 오지에서 생산되는 목재를 배편으로 쉽게 들여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천 한 세기’라는 책자는 “당시 서울에는 성냥공장을 세울 만한 마땅한 부지가 없었고, 전력도 인천보다 부족했다.”고 밝혔다. 실제로 금곡리에는 대형 변전소가 자리잡는 등 공장 가동에 필요한 전력 사정이 서울보다 나았다. 또 항구도시라 값싼 노동력이 풍부했다. 비슷한 시기에 서울이나 대구 등지에 세워진 성냥공장들이 별 재미를 보지 못하고 문을 닫은 것도 이같은 여건들이 뒷받침되지 않은 탓이다. 조선인촌주식회사는 신의주에 부속 제재소까지 두었고, 직원도 남자 200여명, 여자 300여명 등 모두 500여명에 달했다. 성냥 제조는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어서 당시로서는 드물게 여성을 많이 고용했는데, 이것이 ‘성냥공장 아가씨’라는 야릇한 노래가 탄생한 배경이다. 그 무렵엔 기계화가 이뤄지지 않아 성냥개비에 인(燐)을 붙이고 성냥개비를 성냥갑에 넣는 작업 등을 전부 수작업으로 했는데, 이 일을 주로 당시 가난했던 어린 소녀들이 맡았다. 이 회사는 ‘패동(佩童)’,‘우록표(羽鹿票)’,‘쌍원표(雙猿票)’ 등의 성냥을 국내 소비량의 20%에 달하는 연간 7만 상자(하루 2만 7000갑)를 생산했다. 특히 성냥갑 제조를 위해 하청을 준 곳이 500여가구에 달할 정도로 규모나 생산량이 대단했다. 이 집들은 온식구가 성냥갑 만드는 일에 매달렸다고 한다. 1930년대에는 성냥공장 여공들이 낮은 임금에 항의해 파업을 일으켰다. 성냥개비 1만개를 붙여야 60전을 받고 하루 13시간 꼬박 서서 일해야 하는 등 노동환경이 지나치게 열악했다. 여공들에 대한 비인격적인 대우는 말할 것도 없었다. 여성 근로자를 비하하는 뜻이 담긴 ‘성냥공장 아가씨’에는 이처럼 애틋한 사연이 담겨 있다. 인천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사라지는 것을 찾아] 애환담긴 성냥공장 |
성냥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들의 모습 |
조선인촌주식회사
배다리 삼거리
오늘은 어느때며 또한 무슨날이라고 하는가? 날이라 하면 24시간 지내기도 마찬가지고 주야가 있기도 일반이로되, 특별히 뜻 없는 세월이 유수같아 적지 않은 300여일이 꿈결같이 꼬박꼬박 쉴 새도 없이 넘어 대회일(大晦日)의 인천 연말시황이다. 일전보다 얼만큼 더 풍성한가 하고 인천의 제일 볼만한 배다리 시장에 가서 시찰을 하여 본즉, 어쩌면 그 같이 사람이 옹기종기 모여들었는지 한번 들어갔다가 나오기도 매우 곤란할 뿐 아니라, 평시에는 나무바리나 혹 왕래하던 우각동 마루터기에서부터 삼마장 거리나 되는 배다리까지 각 촌의 어른, 아이들은 물론하고 행인이 연락부절하였는데 빈손으로 가는 자는 하나도 볼 수 없고, 모두 손에 주렁주렁 이것저것 들고 가는 자도 있고, 짐을 진 자도 있으며, 소에 잔뜩 실은 자도 있어, 방긋방긋 웃으며 불이 나게 나가는 모양이다. 매매상황을 본 즉, 각종 물건을 맞춰 도로에 보기 좋게 짐을 쌓아 놓고 목이 터지도록 소리를 질러 대목이니 싸구려니 하며 서로 다투어 한 푼만 남아도 온통 펄쩍이고 사가는 사람들은 값의 헐허고 비쌈을 불게하고 주머니나 지갑을 툭툭 털어서라도 마음 당기는 것을 모두 사갈 마음이며, 가게마다 어찌 많이 들이덤비는 지 사고팔기에도 자못 괴뢰운 대성황을 이루었더라. 또한 우육 한근에 십전씩인 고로 팔리는 폼이 작년만 못지아니하며 조기는 작년보다 이십전 가량은 헐하되, 아주 재미가 없는 모양이고 어시장을 가서 본즉 약간 팔리는 것은 한 두름에 오십여전 육십전하는 청어뿐이고 다른 것은 흥정이 없어서 이틀, 사흘 동안을 묵혀서 판다하며 다른 시장에는 일전보다 약간 풍성한 모양이나 별로 신기한 것은 없으며 배로 들어오는 벼는 약간 적어지고 철로로 들어오는 현미는 매우 많은 모양이더라.매일신보 1915.2.14.
공동 세탁장 증설, 동아일보, 1924-03-21
인천부의 민간을 위한 사업 중 조선인 가정의 편리가 적지 아니한 것은 축현정차장 앞 연못가에 있는 공동 세탁장인대 이것의 1년동안 성적이 좋을 뿐 아니라 수도계량제가 실시된 후로부터 더욱 그 필요를 느끼게 되어 부에서는 금곡리(배다리 밖에) 빨래터를 약 천원의 공비를 들여 공동 선착장을 증설할 계획이라더라(끝)
자유 시장 설치, 대중일보, 1946-12-03
꿀꿀이 죽
해방 후 시장 시설의 부족으로 시내 창영동(배다리), 송현동, 화평동, 도원동 일대에는 「야미시장」이 벌어져 각 방면으로 피해가 적지 않아 이에 대한 정리 문제는 벌써부터 물의가 분분하던 바 금번 시에서는 이 「야미시장」의 일소를 기하고자 자유 시장 조합(가칭)을 설치하여 부정 매매의 일소 등 동 내의 제반 피해를 제거하여 나갈 방침이라 한다.(끝)
미군 부대 내에서 발생되는 쓰레기 처리나 병사들이 남긴 잔반을 치우는 일은 한국인이 했는데 그 처리 업자가 바로 공설운동장 야구장 서남쪽, 평양옥 가는 방향에 자리 잡고 있었다. 마당이 넓고 입구 오른쪽에 잘 지은 일본집이 서 있던 곳이었다. 꿀꿀이죽이 개, 돼지 대신에 사람 차례가 된 것이 바로 이곳에서였다. 창영동 골목에는 이런 고기류와 함께 꿀꿀이죽을 끓여 파는 전문점(?)이 여럿 늘어서 있었다. 지금은 골목길조차 그 흔적이 남았는지 모르지만 이 골목을 ‘굴꿀이 골목’이라고 불렀다. 이곳은 막일꾼, 노무자, 지게꾼 같은 사람들이 끼니를 위해 이용했다. 그밖에 또 먹을 수밖에 없었던 물질로 수구레를 들 수 있다. 이 물건은 숭의초등학교, 지금의 정문 좌측, 변전소로 올라가는 길 초입에 있던 가죽 공장에서 많이 흘러나왔다. 쇠가죽에서 마지막으로 긁어낸, 뭉글거리면서도 비계덩이처럼 희고 질긴 이 육질은 그나마 사람들에게는 요긴한 단백질 공급원이었고, 생일상의 고깃국이었다.해마다 배고픈 봄이 오면 식구들이 총 출동해 송도에서 동막에 이르는 해안선을 따라 고둥, 동죽, 삐죽살을 잡는 일도, 청량산 일대에서 알 밴 칡뿌리를 캐는 일도 먹고사는 데 있어 빼놓을 수 없이 중요한 일이었다. 주안, 용현동, 학익동 등 시 외곽까지 차지한 중국인들이 채마밭 언저리에서 냉이를 캐거나 어린 명아주 잎을 따는 일도 또한 연명을 위한 일이었다. 행여 제 밭이 다칠까 전족(纏足)을 한 중국 여인이 뒤뚱거리며 나와 쉼 없이 쏼라거리던 장면도 떠오른다. 우리 땅에서 우리가 중국인에게 천대받으며 나물을 뜯던 시절이었다.
동인천 채미전 거리처럼 숭의동에도 청과시장이 생겨 흩어진 배춧잎이나 무청, 파 줄거리를 주우러 다니는 일도 부끄러웠지만 삶과는 바꿀 수 없었던 절박한 일이었다. 곰표, 공작표 밀가루 한 포대만 들여놓아도 그토록 든든했던 그때, 밀가루는 고사하고 소, 닭 사료에나 쓰일 말분 가루에 소다를 넣고 찌거나 시커멓게 개떡을 만들어 먹던 사람들…. 이처럼 눈물겹고 심정 사나웠던 역사도 이제는 어언 반세기 전 세월 저 멀리 옛 이야기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1962년 2월 한국무진은 중앙무진을 흡수통합한 뒤 그해 6월 고려무진도 흡수하고 국민은행으로 탄생하게 되는데..
그러나 정식 국민은행으로 발족하여 영업을 개시한 때는 다음해 1963년 2월입니다.
무진과 상호부금
계(契)와 상당히 비슷하면서도 계와 다른 것으로 무진(無盡) 또는 상호부금(相互賦金)이라는 제도가 있다. 이 제도는 전문회사가 자기 책임으로 운영하는 것이므로 조합이 아니며(소비대차와 유사한 법률관계가 성립한다), 상법은 무진을 상행위의 일종으로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금전 이외의 것을 목적으로 하는 때에는 법(국민은행법)에도 위반되지 않는다는 맹점을 지니고 있다. (1) 무진 ― 일본에서 발달한 서민을 위한 상호금융제도. 일정한 계좌수로 조를 짜서 각 계좌의 급부금액을 미리 정하여 정기적으로 부금을 납부하고 1계좌마다 추첨·입찰 등의 방법으로 부금자에게 일정금액을 급부하는 제도를 말한다. 1962년 12월 7일자로 공포된 국민은행법에 의하여 당시 존속하고 있던 5개의 무진회사를 병합하여 국민은행이 설립되었다. (2) 상호부금 ― 무진을 합리화한 제도. 일정한 계좌수로 조를 짜는 일이 없으며 가입자는 미리 자금의 사용계획을 세울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율이 높지 않아 가입자에게 유리하다. 상호부금의 업무는 상호신용금고와 국민은행만이 할 수 있다. 가입자와 상호부금업자와의 법률관계는 소비대차와 비슷한 관계가 생길 뿐이고 가입자 내지 회원 상호간에는 아무런 법률관계도 생기지 아니한다.
7, 80년대 TV 연속극에서 ‘좀 산다는’ 동네로 단골처럼 등장한 곳은 서울 가회동 아니면 성북동이었다. 풍채 좋은 한옥집들이 즐비했기 때문이다. 인천에도 한때 이에 못지않은 동네가 있었다. 밤나무골로 불리던 중구 율목동(栗木洞)이다. 이제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밤나무도, 기와집도 거의 사라졌지만 호젓하고 조붓한 골목길을 걷다보면 인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그 흔적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곳에서 ‘오늘’을 찍었는데 사진을 뽑고 보니 ‘과거’가 현상돼 나왔다.
# 헐리웃 키드의 낭만, 애관
시계바늘을 100여 년 전으로 돌려보자. 제물포항에 짐을 내린 벽안(碧眼)의 외국인은 서둘러 서울로 향한다. 말잡이는 싸리재로 길을 잡는다. 우마차 한 대 겨우 드나들 수 있는 길 초입에 들어서니 거름 냄새가 코를 찌른다. 주변은 온통 중국인들이 경작하는 양배추 밭이다. 오른쪽 언덕에는 주변 풍광과는 어울리지 않는 서양식 건물이 하나 서 있다. 파리 외방선교회가 지은 제물포본당(답동성당)이다. 고개길을 조금 더 오르니 멀리 시커먼 연기를 내뿜으며 달리는 기차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얼마 전에 개통한 경인철도이다.
시계바늘을 50여 년 전으로 당겨본다. 이제 전쟁은 끝나고 사람들은 폐허가 된 땅에 다시 삶의 씨앗을 파종하기 시작했다. 싸리재에도 활력이 돌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모던보이 모던걸의 무대였던 경동에 양복점과 양화점이 다시 문을 열기 시작하더니 길 양 옆으로는 상점들이 빼곡히 줄을 이었다. 긴담 모퉁이 길 입구 언덕에 미국 감리교의 도움으로 지은 기독병원이 개원하고 주변에 개인병원도 한 집 걸러 하나씩 생겼다. 더불어 약방과 약국도 속속 문을 열면서 이곳은 늘 사람들로 붐볐다.
2010년 2월 중순, 겨울비가 내리던 날 그곳에서 다시 시간여행을 한다. 경동파출소 앞에 섰다. 6·70년대 야통(야간통행금지)이 있던 시절에 번화가의 특급지 답게 사건사고로 늘 시끌벅적했던 파출소였지만 지금은 ‘경동치안센터’라는 이름으로 간판을 바꿔달았다. 안을 슬쩍 들여다보니 컴퓨터를 들여다보는 의경 혼자 한가롭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경동에 오면 아직도 옛 추억을 고스란히 곱씹어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바로 애관극장이다. 이 극장은 공인받고 있지는 못하지만 협률사(協律社)라는 우리나라 최초 공연장의 뿌리를 품고 있다. 애관극장 덕분에 일제강점기 때 경동거리는 ‘복지강화’(합동영화사), ‘날개 없는 천사’(국보영화사) 등이 제작 보급될 만큼 한동안 시네마 천국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한때 대한민국에서 제일 큰 스크린을 가진 애관극장에서 당대 스타였던 신성일과 엄앵란이 무대인사를 하던 날 이 일대가 교통마비가 되었다는 것은 이제 전설로 남아있다.
애관은 지난 2004년 ‘살아남기 위해’ 5개의 스크린을 가진 멀티플렉스로 변모했다. 박스오피스 1, 2위를 다투고 있는 아바타와 공자 등의 포스터가 붙어 있는 극장에 들어섰다. 평일 한낮이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극장 안의 풍경은 늘어진 필름처럼 한가롭게 돌아가고 있다. 이곳에서 두 시간 내내 까치발을 들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보았던 헐리웃 키드들에게는 애관이 존재하는 그 자체 만해도 그저 고맙기만 하다.
# 양복, 드레스에 자리를 물려주다
극장 뒤 언덕에 오르면 신신예식장이 있다. 이 예식장은 6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80년대 까지만 해도 인천에서 ‘좀 폼나게’ 결혼식을 올린다고 하면 거의 신신예식장에서 치렀다. 이 예식장에는 정원이 딸려 있어 예식이 끝나면 이 야외마당에서 단체사진을 찍었다. 예식장이 비어 있는 날짜에 맞춰 결혼날짜를 잡아야 할 정도로 인기 있었던 곳이다. 요즘 청첩장에서 신신예식장 활자를 본 지 오래됐다. 이름도 신신컨벤션웨딩홀로 바뀌었고 우아했던 그 모습도 여러 차례의 증축을 통해 사라지고 말았다.
신신의 명성은 시들해졌지만 예식장은 이 거리에 웨딩문화의 씨앗을 뿌렸다. 길 양편으로 드레스 숍이나 한복 그리고 사진관 등 결혼 관련 가게들이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하더니 몇 년 전 부터는 아예 ‘웨딩거리’로 명명되기에 이르렀다.
번성했던 경동거리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었던 상점은 양복점이었다. 한미라사, 김테일러, 화신양복점, 서울라사, 잉글랜드양복점, 자유라사, 신라라사, 백양테일러, 대흥양복점, 월드양복점, 현대라사 등 한창 때는 30개의 양복점이 성업 중이었다. 멋쟁이 신사들이 한 벌 쫙 빼입고 활보하던 거리에 이제 양복점 간판을 보기가 힘들어졌다. 기성복에 밀리고 백화점에 밀린 것이다.
모퉁이 길에서 눈에 띠는 이수일양복점에 무작정 들어갔다. 한가롭게 TV를 보던 이수일(68) 사장에게 옛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자 “다 잊혀진 이야기인데 뭘…” 하면서 마득치 않은 눈치이다. 이것저것 양복에 대한 이야기를 슬쩍 던지자 그는 얘기 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한창 때는 재단사, 봉제사 등 20명을 두고 장사를 했지. 이런 설 명절 때는 몇일 밤을 새워서 일하곤 했는데… 한때 영화 예고편 앞에 양복점 광고가 몇 개씩 붙은 적도 있었지.”
손님 한 명이 문을 밀고 들어왔다. 오늘이 가봉하는 날이란다. 가봉… 얼마나 오랜만에 듣는 단어인가. 이내 줄자를 목에 건 이 사장의 눈빛은 장인의 눈빛으로 변한다. 돌리고 재고 올리고. 40년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의 몸통 치수를 쟀을까. 요즘 맞춤양복 한 벌 값은 대략 100만원선. 단골인 듯한 손님은 스스로 특이 체형이라면서 양복을 꼭 맞춰 입는다고 한다. “아마 여기에 제 아버님 치수 장부도 있을 겁니다.” 오래된 장부를 들춰보면 체형이 비슷한 부자(父子)들이 대를 이어 양복을 맞춰 입었음을 알 수 있으리라.
# 노란자위 뜬 쌍화차
차 한잔 권하는 이수일 사장에게 대신 이 동네에서 좀 오래된 다방을 알려달라고 하자 바로 양복점 옆 골목에 있는 학다방을 소개한다. 인천에서 연조가 있는 다방 중의 하나라는 설명이다. 나무문을 밀고 들어가 보니 색깔 있는 어둔 조명 밑 탁자와 의자 등의 소품이 70년대 다방 분위기를 그대로 풍겼다. ‘궂은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잔에다 짙은 섹소폰 소릴 들어보렴’ 최백호의 노래가 생각났다. 마침 비도 오겠다 도라지 위스키 대신 쌍화차를 한잔 시켰다. 잠시 후에 노란자위가 둥둥 뜬 쌍화차가 탁자에 놓였다. 아, 계란 띄운 쌍화차가 이곳에서는 아직도 살아있구나.
약을 사기 위해 문밖으로 줄을 길게 선다면 이해가 갈까. 그런 풍경이 심심치 않게 연출되었던 곳이 동서대약국과 싸리재약국이었다. 기독병원을 중심으로 김내과, 이이비인후과 등 십수개의 개인병원이 함께 의료타운을 이룬 덕을 톡톡히 보았다. 인근 김포, 강화, 옹진 섬 사람들이 시내를 방문한 차에 약을 박스나 봉지채로 사가곤 했다.
동서대약국의 간판에는 ‘Since 1946’ 이란 글자와 함께 옛모습의 사진이 걸려있다. 옛 주인은 미국으로 이민가고 지금은 이 집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약사가 세들어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옆의 싸리재 약국은 경동 지역에서 ‘싸리재’라는 이름을 쓰는 거의 유일한 집이다. 그렇게 싸리재는 잊혀져가고 있다.
다시 조명이 켜지다
싸리재하면 ‘돌체’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돌체는 최영준, 김성찬, 정주희 등 100여 명의 연극인들을 배출한 인천 연극의 산실이었다. 지난 1978년 12월 얼음공장을 개조해 약 90석 정도 되는 객석과 무대공간을 만들어 문을 열었다. 초기에는 연극뿐만 아니라 통기타 가수들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 싱어롱의 무대도 겸했다.
극단마임 대표인 최규호 씨가 극단의 전용극장으로 활용하면서 지역 연극에 불씨를 키우기도 했다. 2007년 마임이 남구 문학동으로 이전하며 돌체극장은 한동안 조명이 꺼졌다.
그런 돌체가 최근 문화활동가이자 작가인 장한섬(36) 씨에 의해 ‘플레이캠퍼스’라는 간판을 내걸고 다시 개관했다. 지난 연말에 ‘크리스마스 트릭’을 무대에 올려 돌체에 대한 향수를 지극하기도 했다. “지역 연극의 산실이 다시 명맥을 유지해나가는 것 같아 기쁘다”고 말하는 장 대표는 ‘한 극단의 전용극장이기 보다 인천문화예술인들의 공간으로 활용할 계획’임을 내비친다. 그 일환으로 실버극단과 직장인 중심의 극단도 만들고 극장 옆에 비어진 공간을 도서관으로 만들어 인문학카페를 운영할 생각이다
글 유동현 본지 편집장 사진 김성환 포토저널리스트
쌀로 흥한 동네(긴담모퉁이 길0
밤나무 마을 율목동이 부자 동네가 된 것은 ‘쌀’ 때문이었다. 1906년 농상공부 허가 쌀 중개업체인 근업소(勤業所)가 율목동 55번지에 문을 열면서 부자 동네가 되었다. 여주, 이천 등 전국에서 생산된 쌀을 일본에 수출하는 역할을 하는 인천근업소 주변에 사람과 돈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주로 영남 출신 상인들이 미곡중개를 주름 잡았는데 업무상 일본어 능통자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쌀장사로 돈을 번 그들은 근업소 근처에 단아한 자태의 한옥을 지어 살면서 ‘밤나무골 새동네’로 불리웠다.
4, 50대들에게 율목동하면 생각나는 것 중의 하나는 ‘율목풀장’이다. 노천 풀장이었던 율목풀장은 옛 시립도서관 뒤편에 있는 현재의 어린이공원 자리에 있었다. 이 터는 우여곡절이 참 많은 곳이다. 1900년대 초반까지 인가가 거의 없던 이 언덕배기는 원래는 일제로부터 자작 벼슬을 받고 법부대신을 지낸 이하영 소유의 임야였다. 이곳에 일본인들이 9천 여㎡의 공동묘지를 조성해 시내 곳곳에 퍼져있던 자국민들의 묘지를 이장해 만들었다. 일설에 의하면 묘지 상당수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때 목숨을 잃은 일본군이었다고 한다. 당시 이곳서 멀지 않은 곳에는 화장장도 있었다, 이 화장터는 1930년대에 도원동으로 이사를 갔고 1944년 공원으로 결정되었지만 ‘사자(死者)의 땅’으로 인식돼 한동안 인적이 드문 야산으로 남아있었다.
뼈가 나뒹굴던 산꼭대기 땅은 1970년 12월 ‘풀장’으로, 그야말로 환골탈태하면서 인천의 명소가 되었다. 휴가와 레저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 율목풀장 한번 다녀 온 꼬마는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이 땅은 1992년 다시 공원으로 지정되었는데 1997년 공원 조성공사를 하던 중 땅속에서 귀와 목이 잘린 문인석 6점이 거꾸로 매장된 것을 발굴했다. 일제가 민족혼을 말살하려고 저지른 행위였을 것이라는 게 당시 추측이었다. 그중 3개의 문인석이 현재 율목공원 맨 위쪽에 전시돼 있다.
한옥과 일본집의 조화
율목동 하면 시립도서관을 빼놓을 수 없다. 인천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1946년 현재의 자리에 문을 연 옛 시립도서관에 대한 추억 하나 쯤은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좌석을 잡기 위해 새벽 공기를 헤치고 싸리재를 거쳐 성산교회 앞 언덕을 숨 가쁘게 올라가던 일. 발걸음을 뗄 때 마다 삐걱거리던 구관 목조 계단. 양지바른 신관 앞 벤치에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읽었던 소설책들. 이제 그 도서관은 추억을 머금은 채 문이 굳게 닫혀 있다. 시립도서관은 미추홀도서관이라는 이름으로 남동구에 새롭게 터전을 마련했다.
관리인의 허락을 받고 옛 도서관을 둘러봤다. 먼저 구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나라 건물 구조와는 사뭇 다른 목조 이층집이 도서관 마당 끝에 자리잡고 있다. 아직도 목조계단과 유리창의 모양 등은 옛 모양을 유지하고 있다. 건물 옆에는 일본식 정원의 흔적이라 할 수 있는 분수연못과 여러 개의 석등이 세워져 있다. 이 집의 옛 주인은 ‘역무 정미소’로 이름을 날렸던 정미업자 리끼다께(力武平八). 정미소로 떼돈을 번 그는 전망 좋기로 소문난 이곳에 정원이 딸린 대저택을 짓고 살았다. 그는 정원의 석등에 불을 켜놓고 일본 정미업자들과 함께 항구와 신흥동 정미소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을 내려다보며 밤새 흥청망청 연회를 벌였으리라.
1962년 준공된 2층짜리 신관 옥상에 올랐다. 사방팔방으로 시야가 트였다. 월미도, 인천대교, 수도국산, 수봉산, 청량산, 계양산… 아파트가 없던 시절, 전망 하나로만으로도 이 동네에 사는 맛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밑으로 일본집들의 지붕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율목동은 산을 중심으로 북동쪽 은 한옥동네, 서남쪽은 일본집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한옥이 있었던 곳은 거의 빌라가 들어섰지만 아직도 반대편은 왜식풍의 주택들이 많이 남아 있어 일본동네의 분위기가 물신 난다. 이곳에는 1920년대에 일본인들이 문화주택이라고 부르며 지었던, 남향으로 넓은 창을 낸 작고 아담한 이층집들이 많이 남아있다. 얼마 전 까지 만해도 인근에 ‘다다미방’ 수리 가게가 있었다가 지금은 없어진 걸로 봐서 이제는 많은 집들이 외관만 왜색풍이지 내부는 현대식으로 변경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가끔 그 골목에서 사진기를 든 허리 구부정한 백발의 노신사를 만난다면 그는 일제강점기에 ‘진센(인천의 일본어 음)’에서 태어나고 자라다가 패전 후 일본으로 건너간 일본인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몽마르트 언덕’ 율목공원
일본집 많은 동네에서 답동성당 쪽으로 가면 ‘긴담모퉁이 길’이 나온다. 돌담이 길게 놓여진 이 길은 애초에는 꼬불꼬불한 실오라기 산길이었는데 홍예문을 만들었던 일본 공병대가 1907년에 구릉을 헤치고 축대를 쌓아 ‘신작로’를 만들었다. 신흥동 지역에 살았던 일본인들이 축현역(현 동인천역)과 경인가도로 편하게 다니기 위해 만든 지름길이었다. 화수동, 송현동 등에 살던 젊은 아낙네들이 하얀 머리수건을 쓰고 신흥동 정미소로 줄지어 일하러 가던 슬픈 사연을 지닌 길이기도 하다.
길게 늘어진 돌담 끝, 신흥동 쪽으로 가면 케이크 조각처럼 잘린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신기해서 셔터를 누르고 있는데 수퍼가게 문을 열고 한 할머니가 나오며 언잖은 표정을 짓는다. 사연인즉 우마차 정도 드나들던 긴담모퉁이길이 조금씩 확장되더니 급기야 할머니 집의 거의 대부분이 잘려나갔다는 것이다.
율목동은 6,70년대 청춘남녀의 데이트 코스이기도 했다. ‘인도집’이라 불린 유명한 도나스(도너츠)집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독병원 옆 골목에 있던 인천도나스집은 70년 대 초까지 ‘얄개’들의 연애 장소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곳이다. 교외지도담당 선생님들이 가끔 들러볼 정도로 ‘문제의 장소’이기도 했다. 연인들은 도나스를 달콤하게 먹고 나서 인적이 드문 ‘인천의 몽마르트 언덕’ 율목공원으로 장소를 옮겨 도나스보다도 더 달콤한 데이트를 즐겼다.
율목동 골목에서는 무궁무진한 인물들의 사연이 읽혀진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은 ‘맹인들의 세종대왕’ 송암 박두성이다. 강화 교동에서 태어난 그는 일제 강점기에 한글 점자를 창안하고 시각장애인 교육에 평생을 바치며 암흑 세상에 한줄기 빛이 되었던 인물이다. 송암이 언제부터 율목동에 살았는지 모르지만 1935년 인천영화학교 교장에 부임하던 시절부터 1963년 8월 25일 76세의 일기로 별세할 때 까지 율목동 25-1번지에 거주했다. 그는 대문에 커다란 태극문양을 그려 넣어 동네사람들이 시각장애인들에게 자신의 집을 쉽게 알려 줄 수 있도록 했다.
원래 7칸 방이 있을 만큼 컸던 그 집은 현재 도로와 상가 등으로 잘려나갔고 아무런 표식이 없어 오래 된 듯한 기와만이 그 집의 연조를 말해주고 있다. 한동안 대문 앞에 세워져 있던 표지석은 현재 율목공원에 놓여져 있다.
이밖에 인천부윤(현 시장) 관사, 기독병원, 경아대 등 율목동은 인천역사의 작은 내러티브가 더덕더덕 붙어 있는 다채로운 콜라주이다.
이하영 보안회.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