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남이성지 → 치명자산성지 도보순례
(세계 순례대회 및 전주교구 24위 시복 기념 도보순례)
○ 순례 일자 : 2014. 10. 03. 금요일
○ 순례 인원 : 000 명 (이병호 빈첸시오 주교님외 신부, 수녀, 신자)
○ 순례 일정 : 총 20km, 소요시간 6시간 35분 (이동 5시간 35분, 휴식 1시간)
1. 10:15 : 초남이 성지 출발
초남이 성지
초남이는 호남의 첫 사도요 순교자인 유항검(柳恒儉, 1756~1801, 아우구스티노)의 고향이자 전라도 천주교회의 발상지다. 또한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동정 부부인 유 요한과 이 루갈다가 ‘평생을 오누이처럼 살면서 동정을 지키겠다’는 동정 서원을 하며 혼례를 올린 곳이다.
초남이는 또한 1794년 최초로 조선에 입국한 외국인 선교사인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1752~1801, 야고보) 신부가 유항검의 초청으로 전라도에서는 처음으로 방문한 곳이기도 하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사학의 괴수로 낙인찍힌 그는 전라도 지방에서는 가장 먼저 붙잡혀 혹독한 고문을 받고 서울로 압송되었다. 외국인 신부의 입국을 도와 내통했고 사교(邪敎)를 믿었을 뿐만 아니라 청나라에 청원서를 냈다는 죄목으로 대역부도의 죄를 적용해 능지처참 형을 언도받고 1801년 9월 17일 전주 남문 밖에서 참수 치명하였는데 이때 그의 나이 46세였다. 그의 아들 유중철(柳重哲, 1779~1801, 요한), 유문석(柳文碩, 1784~1801, 요한) 형제는 10월 9일 전주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하였고, 숲정이에서는 며느리 이순이(李順伊, 1782~1802, 루갈다)와 조카 유중성(柳重誠, ? ~1801, 마태오), 처 신희, 제수 이육희가 1802년 1월 31일 순교하였다.
2. 10:30 전주원동초등학교 - 1965년 개교한 학교
3. 10:55 : 생골마을
4. 10:50 : 갈동마을
5. 10:55 : 호남고속도로 굴다리
호남고속도로
대전광역시 동구에 있는 경부 고속 도로의 회덕 분기점을 기점으로 하여 전라남도 순천에 이르는 고속 도로. 1973년 11월에 개통되었으며, 길이는 251.8km이다.
6. 11:00 : 호남로 굴다리
7. 11:15 : 혁신도시 혁신고등학교
8. 11:35 : 공원 쉼터, 휴식
9. 11:45 : 기지제
10. 11:55 : 기지제 다리
12. 12:15 : 고물 수집장
13. 12:25 : 서고사
서고사(西固寺)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 금산사의 말사이다. 908년 후백제의 견훤이 완산주(完山州)에 도읍을 정하고 국운의 회복과 백성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하여 명덕(明德)에게 창건하도록 하였으며, 1353년(공민왕 2)혜공대사가 중건하였다.
조선에서는 전주의 사방을 방비하는 사고(四固)사찰의 하나로 중요시 되었는데, 1624년(인조 2) 지엄대사가, 그리고 1763년(영조 39) 벽송대사가 중창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때 가람이 완전히 소실되었다가 이후 소규모로 중창되었다.
1987년 의성이 요사와 나한전을 중수하였고, 1997년 도상(道尙)이 극락전과 나한전을 지어 오늘에 이른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극락전과 나한전 · 요사채 등이 있다.
14. 12:45 : 황방산 황방정(黃尨亭)
황방산(黃尨山)
전주부성 밖으로 서고진(西固鎭)인 황방산의 수려한 산용(山容)은 우뚝 솟아 부성의 서북방 쪽 빈 구석을 수호하고 있다.
한편 일설에는 기린토월(麒麟吐月)할 때 황방의 누런 삽살개(黃尨山의 형국, 삽살개 상으로 지칭한데서 기인)는 밤새도록 짖어 재액(災厄)을 막는다는 전설이다.
황방산의 효자천
전주시 서곡에 위치한 해발 216m 높이의 산을 황방산(黃尨山)이라 이름한다. 황방산 기슭엔 조선 선조 임금 때에 백모라는 가난한 선비가 살고 있었는데 슬하에 아들 삼형제를 두고 아내와 안락한 생활을 꾸리고 있었다. 우연히 주인 백씨가 병을 얻게 되어 여러 날을 신음하더니 뜻밖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백씨의 아내는 뜻밖의 상변에 어린것들을 데리고 어찌할 방도가 없었던지 통곡만 하고 있었는데 생각지도 아니한 어느 노승이 찾아와서 기막힌 정황을 보고 하는 말이 “이렇게 울고만 있을 일이 아니라 빨리 시신을 염습(斂襲)하고 나를 따라 오라,”는 것이었다. 백씨 아내는 눈물을 거두고 노승이 시키는 대로 산길을 따라 올라갔더니 한 장소를 가리키면서 이 장소는 와우혈(臥牛穴)이어서 여기에 묘를 쓰면 멀지 않아 부귀와 영화를 누리게 될 것이다. “여기에 그대 남편의 장사를 지내도록 하시오.” 하는 말을 남기고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백씨의 아내는 노승이 지정한 자리에서 남편의 시체를 묻고 나서 집에 돌아오려고 할 즈음에 셋째 아들이 울기만 하고 묘소 옆을 떠날 생각을 아니하고 있다. 백씨 아내와 두 아들은 여러 가지로 타이르고 달래 보았으나 끝내 듣지 아니하고 울고만 있었다. 가족들은 어찌할 방도가 없어 집으로 돌아와서 음식을 나르기를 매일같이 계속했다. 이러한 소문이 인근 마을에 퍼져 알려지게 되자 여러 마을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하기를 “이 어린이는 하늘이 내린 효자”라 했다. 마을 사람들은 뜻을 모아 백씨 무덤 옆에 초막(草幕)을 지어 주고 시묘(侍墓)를 하게 하니 초막 아래에서 뜻밖에 구슬같이 맑은 물이 비쳤다. 마을 사람들은 물이 비친 자리에 옹달샘을 파 주었으니 오늘에 효자천(孝子泉)이라 불리운다.
15. 13:10 : 서곡성당 (중식)
서곡성당
전주 서곡본당은 전주시 완산구 천잠로 509에 2003년 8월 24일 신축 봉헌 되었다. 서곡성당은 대지 700여 평에 건 면적 100여 평의 성당건물과 사무실 회합실 주방이 갖춰져 있는 80여 평의 강당 등 두개 동으로 돼있다. H빔 철골조에 조립식 판넬로 마감한 단층 건물인 본성전은 250여 석에 유아실과 성가대석이 따로 마련되어 있으며 성당 앞 야외광장에 둥그렇게 야외 14처상을 설치하고 14처상을 따라 긴 의자가 배치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16. 14:00 : 서곡성당 출발
17. 14:20 : 문학대 공원
18. 14:30 : 서곡공원
19. 14:40 : 홍산교 건너 왼쪽 천변산책로
20. 14:55 : e편한세상 아파트 106동 옆
21. 15:20 : 백제교
22. 15:50 : 다가교
23. 16:10 : 서천교 지나 초록바위
서천교 성지
이 성지는 조윤호(요셉, 1848~1866) 성인이 순교한 곳이다. 조윤호 성인은 1848년에 태어나서 18살의 나이로 병인박해 때 순교하였다.
충청도 신창에서 태중교우로 태어났다. 1864년 부친을 따라 전주 근처의 교우촌인 성지동으로 이사한 후 교우 처녀 이 루시아와 결혼하였다.
아버지 조화서 베드로 성인은 숲정이에서 순교했는데, 아버지와 아들을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처형하지 않는다는 관행에 따라 조윤호 요셉 성인은 아버지 보다 열흘 늦게 12월 23일 이곳 서천교 아래에서 치명하였다. 서천교 밑에서 빌어먹던 거지들에게 목을 감은 끈을 서로 조르게 하였다. 그리고 거지들은 순교자의 시신을 끌고 다니며 동냥질을 했는데 시신이 하도 참혹해서 누구든지 겁에 질려 밥을 주었다고 전해지는데, 오늘 생각 해봐도 참으로 비참한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아버지 조화서와 아들 조윤호의 돈독한 신앙심은 참으로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케 한다.
이들 부자는 1866년 병인박해 때 함께 체포되었는데, 전주감영에서 견디기 힘든 형벌을 받으면서도 서로 격려하며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먼저 사형장으로 끌려 나가는 부친이 아들에게 “네 마음을 변치 마라. 관장 앞에서 진리대로만 답해라. 네가 불행히도 마음을 변할까 그것이 두렵구나. 각별히 조심해라.”라고 하자, 아들 역시 “저에 대해서는 조금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아버님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1866년 12월 23일 18세로 순교하였다.
초록바위 성지
초록바위 성지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하신 성 남종삼(요한)의 큰 아들 남명희와 역시 새남터에서 순교한 홍봉주의 아들을 1867년 가을에 수장으로 죽인 곳이다.
(1) 남명희(南明熙)
南鍾三(요한) 성인은 철종 때 承旨를 지낸 분으로 천주교 신자 중 가장 높은 벼슬을 한 분이다. 南鍾三 성인이 치명한 후, 충주부사를 지낸 아버지 南尙敎와 아들 南明熙는 공주 감영으로 이송되었는데 할아버지와 손자를 한 감옥에 가두지 않는다는 국법에 따라 14살 南明熙는 전주 감영으로 이송 되었다. 14살 성인이 되어야 처형시킨다는 법에 따라 처형이 연기되어 1867년 14살 성인이 되어야 처형시킨다는 법에 따라 처형이 연기되어 1867년 14살이 되자 물에 빠뜨려 죽였다.
어린 소년이지만 이들의 신심은 어른 못지않았다. 南明熙는 전라감사가 “너마저 죽으면 집안의 대가 끊기니 배교하라.”라는 권고를 받을 때마다 입을 꼭 다문 채 고개만 가로 저었습니다. 어린 소년의 심지가 굳음에 탄복한 감사는 때로는 애원을 해보기도 하였지만 소년의 대답은 “천주님은 천지의 대군주이시고 대부모이신데 어찌 배교할 수 있겠습니까?”하고 말할 뿐이었습니다.
또 처형 당하는 날은 포졸이 “애야!”라고 부르자 “국법이 지엄하여 죽기는 하나, 그래도 나는 양반의 자손이다. 어디서 함부로 ‘애야!’라고 하느냐!”하면서 당당했다고 합니다.
南明熙의 죽음으로 남씨 집안은 3대가 순교의 화관을 받았다.
(2) 洪鳳周의 아들 - 베드로
洪鳳周의 아들의 이름을 모르고 세례명은 베드로이고 14살에 순교하였다.
洪鳳周(토마스)는 충남 예산 출신으로 1866년 병인박해 때 새남터에서 남종삼(요한) 성인과 함께 순교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전주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한 洪梓榮 프로타시오는 아버지이고, 어머니 丁조이는 초대 명도회장이며,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丁若鍾의 형 丁若鉉의 딸로서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하였다. 또한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洪樂敏(루카)는 조부이다.
洪鳳周의 가족은 4대가 순교한 집안이다.
24. 16:20 : 싸전다리
싸전다리[米廛橋]
1922년에 처음 건설하였으며 쌀도가들이 몰려 있는 풍남문에서 가장 가까운 다리라 싸전다리라 불린다.
25. 16:25 : 남천교
남천교(南川橋)
완주군과 임실군 경계인 슬치에서 발원한 전주천을 따라 전주에 들어오다 보면 먼저 눈에 띄는 것이 한벽당 부근의 징검다리다. 전주천이 한벽당에서 좌회하여 얼마 안간 위치로, 이를 지나면 그 유명한 남천교가 나온다. 전주 남천교 너머 완산칠봉으로 해가 넘어가고 있다. 남천교 위에 세워진 청연루(晴烟樓). 이는 완산팔경 가운데 하나가 ‘한벽청연(寒碧晴煙, 승암산 기슭 한벽당과 전주천을 휘감고 피어오르는 푸른 안개)’에서 비롯 ‘, 한벽’과 ‘청연’을 댓구로 사용, 현 송하진 전북도지사가 전주시장 재임 시절 쓴 글씨다. 다리 위쪽으로 한벽당이 있으니, 그 아래쪽에다 청연루를 지은 것이다. 슬치에서 시작된 상관 계곡의 물이 의암, 은석 등 크고 작은 많은 골짜기의 물과 합류하면서 만마, 색장 등 여러 고을 옆을 거쳐 한벽당 아래로 흘러온다. 여기서 물줄기는 계곡의 바윗돌에 부딪쳐 흰옥처럼 부서지면서 거듭 굽이 틀어 남천으로 흘러간다. 남천교로 이름한 것은 아래로 흐르는 하천의 이름이 남천(南川)이기 때문이며, 전주천이 우회하면서 전주부성의 남쪽을 흐르므로 불리워진 이름이다. 남천교의 청연루에 앉으면 전주천, 한벽교, 승암산(치명자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지금의 남천교는 전주시의 자랑거리인 한옥마을과 경기전, 승암산, 한벽당, 남고산, 전주천 등 자연경관과 조화를 이루되, 남천교의 옛 모습을 현대적인 시각에 맞게 2009년 복원 재가설한 팔짝지붕 형태의 교량이다.
26. 16:30 : 징검다리 건넘
27. 16:35 : 한벽교
한벽당(寒碧堂)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된 한벽당은 승암산 기슭인 발산 머리의 절벽을 깎아 세운 누각으로 옛 사람들이 한벽청연(寒碧晴煙)이라 하여 전주 팔경의 하나로 꼽았다. 한벽당이라 처음 불리게 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월당 최담선생 유허비에는 월당루(月塘樓)라 하였다. 따라서 조선 초 이 나라 대표적 선비의 한 분으로 월당이 이 곳 바로 위에 위치해 있으므로 해서 월당루라는 이름이 붙여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한벽당이 언제부터 붙여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 한벽당이라는 이름이 옛날 벽옥한류(碧玉寒流)란 글귀에서 연유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28. 16:50 : 치명자산 루갈다 광장
첫댓글 덕분에 도보순례 잘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