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콤바의 어원
카타콤바라는 말은 옛 로마인들이 사용했던 라틴어와 그리스어가 섞여진 '카타쿰바스'(구덩이
또는 동굴의 옆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당시 로마의 가난했던 사람들은 그들 가족을 위한
무덤을 땅 위에 만들 수 없었다. 그래서 돈이 가장 적게 드는 방법을 생각해 낸 것이 이 지역 곳곳에 흩어져 있던 자연적인 동굴을 이용해서 무덤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자연적인
동굴도 거의 다 무덤으로 차 버리자, 그때부터 땅을 파고 지하에 무덤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그때가 1세기 중엽부터였다고 한다.
로마의 이교도들은 자신들의 무덤을 '네크로폴리' 즉 죽은 자들의 장소라고 불렀다. 반면에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무덤을 '체메테리움'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잠자고 있는 중 또는 쉬고 있다는 뜻이다. 이 체메테리움(현재는 이탈리아어로 치미테로라고 부름)이라는 말은 초기 그리스도인이 스스로 지어 낸 말로서, 그들은 자신들의 무덤이 이교도들이 사용했던 '네크로폴리'라고
불리는 것이 싫었기 때문에 그 필요성에 따라 새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종교의 자유를 얻은 것은 313년이다. 그 후 교황 성다마수스(366-384)가 아피아
가도 주변에 있던 성세바스티아누스의 무덤을 포함해서 그 일대의 지하 공동묘지를 재정비하고, 이곳을 성세바스티아누스의 지하 공동묘지라고 명명하면서 처음으로 '카타쿰바스'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그 후 중세기 때부터는 초기 교회 공동체의 지하 공동묘지(주로 1세기에서 4세기 초까지) 전체에 대해 일반적으로 카타콤바라고 널리 사용하면서 현재까지 내려온다.
카타콤바의 역사와 시대적 배경
네로 시대의 박해를 비롯하여 기독교인들은 많은 박해를 받게 되었다. 첫 박해를 전후하여 초기의 선교활동은 로마 근교에 살던 가난하고 신분이 낮은 계층 사람들에게 주로 많이 행해졌으며, 그들이 살던 지역은 주로 테베레강 어귀와 아피아 가도 주변이었다.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면서, 신자들은 예전처럼 자유롭게 모임을 가질 수가 없었다. 자연히 신자들은 주위의 눈을 피해 로마의 성 밖에서 은밀히 모였는데 그 중에서도 아피아 가도 주변에 많이 있던
지하 무덤 안이 가장 안전한 장소가 되었다. 급기야는 신자들의 무덤도 그 안에 마련되면서 지하 무덤, 즉 카타콤바의 면적이 점점 더 늘어나기 시작했다.
갈수록 심해지는 모진 박해 속에서 초기 교회 공동체 신자들의 보금자리와 휴식처는 오직 구원자이신 하나님께 의지하는 길밖엔 없었다. 카타콤바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현실적인 피난처였으며, 하나님을 찬미하는 예절을 행할 수 있었던 교회였고, 또한 죽어서도 가까이 있고 싶어했던 그들만의 보금자리였다.
1세기-3세기
로마에서 순교한 사도 베드로는 바티칸 골짜기에, 사도 바울은 오스티아로 가는 길 주위에 있던 이교도들의 무덤 사이에 묻혔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면, 두 사도가 순교했던 1세기에는 아직도 그리스도인들만의 전용 묘지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선교의
대상이 주로 경제력이 없던 가난한 계층이었기 때문에 묘지와 같은 공동체의 공동 재산을 마련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2세기에 들어오면서 선교의 대상이 중류 또는 상류 계층까지 확대되면서, 차츰 그들의
소유하고 있던 로마 근교의 별장, 과수원, 또는 농장을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희사함으로써 비로소 공동체 전용 묘지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가난했던 당시의 공동체는 희사 받은 땅 위에 무덤을 세울 만한 재정적 여유가 없었다. 가장 경제적인 방법은 땅을 파고 지하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카타콤바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3세기는 순교가 가장 많았던 시대이기도 하다. 로마의 황제들 중에서도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가장 심한 박해를 가했던 황제는 카라칼라와 발레리아누스, 디오클레티아누스
등이었다. 그 중에서 발레리아누스는 그리스도인들의 지하 공동 묘지를 색출하여, 묘지
출입 금지령을 내리기도 했으며, 디오클레티아누스(284-305)의 박해 시기는 로마의 역사가들이 '피의 시대'라고 부를 정도로 많은 신자들이 순교를 당한 시기였다.
4세기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이 313년에 선포되면서, 장구한 세월 동안 박해받던
그리스도인의 교회는 이제 땅 밑에서 땅 위로 올라오게 되었다. 당시 로마 전역에 흩어져 있던 그리스도인의 지하 공동묘지는 모두 교회의 공적인 재산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종교의 자유를 얻은 후, 신자들은 자신들의 무덤을 땅 위에 자유롭게 만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 지하에 묻혀 있던 성인과 순교자들 무덤 옆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묻히기
위해 계속 그들의 무덤을 지하에 만들었으며, 이러한 일은 5세기까지 계속되었다.
5세기-9세기
그리스도교가 자유를 얻는 313년부터 시작된 카타콤바 성지 순례는 거의 400년 동안 계속되었다. 현재 발견된 카타콤바에 가 보면, 그 당시 성지 순례를 하던 신자들이 성인이나 순교자의 무덤이 있던 벽 위에 새긴, 그분들의 전구를 빌었던 기도문 등이 남아 있다.
반면에 네 차례에 걸쳐 로마가 이민족들의 침입을 받으면서, 이곳 지하 무덤도 예외 없이 그들로부터 약탈을 당하였다. 옛 로마인들의 장례 풍습은 사람이 죽게 되면 평소에
지녔던 모든 금붙이 또는 패물 등을 그대로 관속에 넣어 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풍습 때문에 무덤은 로마에 침입한 이민족들의 중요한 약탈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이를 증명이나 하듯 어느 지하 무덤에 가 보더라도 관 뚜껑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다 파괴되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듯 이민족의 침입이 잦아지자 8세기 부터는 그때까지 카타콤바에 남아 있던 성인들과 순교자들의 유골을 로마의 성 안쪽으로 이전하기 시작했다.
순교자들의 유골이 성 안의 기념 성당으로 모두 이전되자 순교자들의 발길은 카타콤바에서 점점 멀어졌으며, 이때부터 카타콤바는 역사 속에서 차츰 잊혀져 가기 시작했다.
10세기-16세기
이 시기는 카타콤바가 완전히 잊혀진 시대였다. 카타콤바라는 말 자체도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던 시대이다.
17세기-18세기
17세기 초에 들어오면서 당시 고고학 분야의 대가 였던 안토니오 보시오(1575-1629)의
연구에 의해 약 삼십여 곳의 카타콤바가 로마 주변에서 발견되었다.
19세기-현재
보시오 이후 약 2백 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 예수회 신부이자 고고학자였던 주세페 마르키(1795-1860)가 카타콤바에 대한 새로운 연구를 시작했다. 그의 강의를 듣던 제자들
중 조반니 바티스타 데 로시(1822-1894)는 마르키 신부의 수업 중에 '초기 교회 공동체
신자들이 로마에 남겨 놓은 교회 유적'이란 제목의 강의에 깊은 감동을 받게 되었다. 이
감동이 거의 천 년 이상 역사에 묻혀있던 카타콤바를 다시 지상으로 끌어올리는 역사적
계기가 되었다. 데 로시가 없었더라면 카타콤바도 없었을 것이다.
이 젊은 고고학도가 가장 심혈을 기울여 연구했던 대상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을
위해 숨어들었던 지하 무덤, 즉 카타콤바에 관한 것이었다. 어렵고도 끈질긴 인내를 요구하는 이 작업은, 1854년 로마의 남쪽 성문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들판의 땅 밑에서, 3세기 때의 교황 무덤과 체칠리아 성녀의 무덤을 발견함으로써 오랫동안 역사에 묻혀 있던 카타콤바의 존재를 그 중요성과 함께 세상에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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