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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phon Interview
주목, 이 시인을 만나다
“저곳에서는 자칫, 짧은 적요에도 발목을 다칠 수 있다”
이서화 시인
*인터뷰: 김정수(시인, 사이펀 편집위원)|사진: 이성수(시인)
계간 《사이펀》 ‘주목, 이 시인을 만나다’는 세 번째 시집 『날씨 하나를 샀다』를 내고, 강원도 원주에서 ‘이서책방’을 운영하는 이서화 시인을 만났다. 2008년 계간 《시로여는세상》으로 등단한 이서화 시인은 『굴절을 읽다』, 『낮달이 허락도 없이』, 『날씨 하나를 샀다』 등 세 권의 시집을 냈다. 첫 시집은 세종도서 문학나눔, 세 번째 시집은 2019 아르코창작기금과 문학나눔이 함께 선정되었다. 시인은 강원도 영월에서 태어나 영월·횡성·양구·원주 등을 돌면서 살고 있다. 얼마 전 “늘 비탈밭을 닫고 나오던”(「국숫집」) 아버지를 여윈 시인을 원주 ‘이서책방’에서 만났다.
<김정수> 작은 책방 이야기부터 해야겠네요. 올 1월에 강원 원주에 ‘이서책방’을 열었는데, 코로나19 정국이라 무언가를 시작한다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요.
<이서화> 제가 책방을 열겠다고 했더니 주위에서 많이 말리더군요. 이유는 한 가지죠. ‘아무리 노력을 해봐도 적자다. 요즘 인터넷으로 책을 구매하지, 누가 책방에서 책을 사느냐며 무모한 도전이다’라고요. 하지만 저는 ‘마음이 부자이기에 책방을 열면 부자가 될 겁니다’라며 준비를 했답니다.
<김정수> 책방 이름이 ‘이서책방’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름 앞 두 글자를 땄네요.
<이서화> 그런 뜻도 있지만, ‘이서(裏書)하다’는 의미도 있어요. 무언가를 시작할 때 이서부터 하잖아요. 이서책방은 강원도 원주 단계택지 골목에 있지요. 작은 책방입니다. 사실 책방은 코로나19와 상관없이 잘 안 되는 곳이라 생각해요(웃음). 책방이 있는 뒤쪽 한두 블록 나가면 유흥업소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골목 뒤편으로 나가면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이 있지만, 우리 책방 골목은 조용합니다. 하루에 지나다니는 사람을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지요. 누가 찾든 안 찾는 나 자신의 만족인 것 같습니다. 서점이라기보다 책방이 더 어울리는 작은 공간이고 주로 문학 서점으로, 제가 시를 쓰다 보니 특히 시집을 많이 비치하고 있습니다. 책방은 판매용과 열람용을 같이 운영하면서 문학에 관심 있는 분들과 많은 소통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문예지 열람을 원하는 분들이 종종 찾기도 합니다.
<김정수> 책방 운영이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이서화> 작업실 겸 책방으로 운영하는 곳이라서 처음부터 책방에 수입에 대해서는 마음을 접은 상태입니다. 그래도 꾸준히 찾는 분들이 있어서 유지해나가고 있습니다. 고마운 일이지요.
<김정수> 책방에서 북콘서트나 초청 강연 같은 행사도 여는 것으로 아는데요.
<이서화> 지난 4월 박소영 시인의 시집 『둥근 것들의 반란』 낭독회에 이에 5월에 나호열 시인의 『안녕, 베이비 박스』 ‘독자와의 대화’를 했어요. 10평 남짓한 공간이라 많은 분을 초청하진 못하고, 근교에 사는 분들만 모시고 소소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더 알찬 행사가 됐어요.
<김정수> 혹시 올해 예정된 행사도 있나요.
<이서화> ‘2022 대한민국 독서대전’이 9월에 원주에서 열립니다. 당연히 ‘이서책방’도 참여하고요. 주제가 원주지역 작품이기에 9월 19일 이인휘 작가를 모시고 ‘부론강과 소설’을, 9월 24일에는 ‘안선민의 영화 속의 목소리’를 주제로 행사를 진행합니다. 이때 각종 풍성한 프로그램은 물론 가보지 못했던 곳으로 독서여행을 떠날 수 있습니다. 원주시립중앙도서관에서 발급하는 ‘독서여권’을 들고 책과 문화가 있는 장소를 방문하면 스탬프 투어, SNS 인증, BOOK.zip 미션 등의 이벤트에 참가할 수 있고 독서기록장, 필사노트, 독서공간 리뷰 등을 할 수 있습니다.
<김정수> 9월에 원주행 열차를 타야겠네요(웃음). 책방을 차리기 전에 《시로여는세상》 편집장을 한 것으로 하는데, 서점을 차리면서 그만둔 것인가요.
<이서화> 등단을 하고 우연한 기회에 섭외가 왔지만, 문예지 일을 제가 맡아서 할 수 있을까 망설이다가 《시로여는세상》 출신이기에 일을 하게 되었어요. 2015년 봄호만 도와드리자 하고 시작했던 일이 2021년 겨울호까지 만 7년 동안 《시로여는세상》 계간지 일을 했습니다. 편집장을 하면서 청탁과 원고 정리, 모든 행정업무 처리까지 맡아서 하게 되었죠.
<김정수> 만 7년이면 상당히 오래 했네요.
<이서화> 2015년 편집차장으로 시작해 편집장으로 편집장에서 부주간으로 일하다가 일을 정리 했답니다. 온라인으로 일을 많이 했지만, 원주에서 서울로 다니면서 일하기가 쉽지는 않았어요. 문예지를 받아보는 분들은 계간지이기에 그 계절에만 일하는 줄 알지요. 하지만 그렇지 않답니다. 1년 내내 문예지 속에서 지내다 보니 제 개인적인 시간이 부족해 결국은 7년을 하고 그만두게 되었답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일보다는 개인적인 일에 더 시간을 갖고 싶었어요. 저는 무슨 일을 하면 그만두기 전에 다음에는 무슨 일을 할까라는 생각을 한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작은 책방에 관심을 가지고 책방에 대한 정보를 얻고 준비를 하게 되었답니다. 무엇보다 저는 작업실이 필요했기에 큰 공간 보다 혼자 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을 준비하게 되었죠.
<김정수> 저도 작업실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습니다. 늘어나는 책을 감당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조용히 글을 쓸 공간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에서요. 하지만 현실적인 이유로 쉽지 않더라고요. 시인이기 이전에 생활인이잖아요. 그러면 《시로여는세상》에서 일하기 전에는 무엇을 했나요. 먹고사는 문제가 중요하잖아요.
<이서화> 논술바람이 한창 불 때 국어교습소를 운영했어요. 10년 정도 운영했는데 혼자 학생 50명 수업을 할 때도 있었답니다. 어느 시기에 논술이 조금씩 시들해질 무렵 바깥세상이 궁금하기도 했어요. 교습소 문을 닫고 프리랜서로 외부 수업을 주로 다녔어요. 도서관 강의를 주로 하는 평범한 시골 강사였죠. 강원도 일대 도서관을 다니면서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했습니다. 저에게도 정말 가장 바쁜 시절이 있었어요. 신문사에서 진행하던 NIE(신문활용교육) 교육이 붐을 이룰 때는 강원도 일대를 다니면서 바쁘게 보낸 시절이 있습니다. 수업을 나가면 꼭 그 지역에 중요한 곳을 혼자 다니며 돌아보곤 했답니다.
<김정수> 국어교습소 운영에 프리랜서 강의…… 참 바쁘게 살았네요. 이제 시 이야기를 해볼까요. 2008년 《시로여는세상》으로 등단했는데, 어떤 계기로 시를 쓰게 되었나요.
<이서화> 시를 쓰기보다 희곡을 배우고 싶었어요. 마땅히 배울 곳이 없어 희곡에 관련된 책을 읽고 독학을 하면서 몇 편을 써 보기도 했어요. 그러다 원주에 있는 대학 평생교육원에서 수필 강좌가 열려 우선 수필 형식이라도 배우려는 생각에 다니게 되었죠. 학교에 언어예술학과가 생겼답니다. 그래서 생소한 학과에서는 무엇을 가르칠까 궁금해 늦은 나이지만 그 학과에 입학하게 되었죠. 입학하고 보니 박세현 시인이 학과장이셨어요. 시창작 시간에 박세현 시인의 적당히 강릉 사투리가 섞인 특유한 말투가 시와 참 잘 어울렸어요. 그렇게 박세현 시인의 『정선아리랑』, 『치악산』을 읽고 시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되었답니다. 시집을 읽을 때는 이렇게 시를 쓸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시를 쓰게 되었는데 그렇게 쓰는 것이 정말 어렵다는 것도 배우게 되었어요. 강원도에 처음으로 글쓰기 학과가 생긴 것이죠. 가르치는 교수님들, 배우겠다는 학생들이 문학이라는 바이러스에 자발적으로 걸리게 되었죠. 지방이다 보니 생소한 언어예술학과에 지원하는 학생이 별로 없어서 나중에는 문예창작학과로 바뀌게 되었답니다. 그렇게 3년을 이어가던 학과는 결국 막을 내리게 되었죠. 그래도 제게는 3년의 번개시장에서 보석을 건진 느낌이었죠. 그 당시 학과가 사라진 것을 모두 안타까워했답니다.
<김정수> 박세현 시인과의 만남이 시 쓰기의 시작이면서 증폭의 계기가 된 셈이네요. 강원도 영월에서 태어난 것으로 압니다. 강원의 정서가 시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요.
조랑조랑 흘러가는 강물 소리엔 귀를 막고요
앞산뒷산엔 빨래줄을 매고 살지요
장정들은 밭에 나가 흙더미를 일구고
아낙들은 수수밭 고랑에 엎드려 땅의 소리를 듣는답니다
마음에 맺힌 건 호미 끝에 걸려 넘어지는 흙덩이마냥
그냥 푸석푸석 깨뜨리며 살아가지요
가을이면 감자 팔고 강냉이 팔고 날품도 팔아
농고에 다니는 막내의 학자금을 만들지요
우리는 그렇게 살지요 앞산뒷산에 빨랫줄을 매고요
눅눅한 팔자일랑 짧은 햇살에 널어 말리지요
-박세현 「앞산뒷산」 부분
<이서화> 박세현 시인의 「앞산뒷산」이라는 시인데요. 저 부분에서 ‘조랑조랑 흘러가는 강물 소리엔 귀를 막고요’라는 부분에서 ‘강물’을 ‘계곡’으로 바꾸면 제가 자란 곳이 됩니다. ‘앞산뒷산엔 빨랫줄을 매고’ 살 정도의 산으로 푹 둘러싸인 동네입니다. 낮에는 구름이 흘러가는 하늘을 바라보고, 밤이면 선명하게 떠오른 별을 보고 자랐습니다. 저는 우리 동네라는 그 공간을 참 좋아했어요. 작은 동네지만 소설 같은 이야기가 많이 벌어지는 곳이었죠. 그래서 어렸을 때는 막연하게 소설을 써 볼까 하고 이것저것 써 본 적도 있어요. 그곳에서 한두 시간을 걸어서 학교에 다녔죠. 학교 오고 가는 길에 본 것들은 지금도 머리에 남아 있어요.
<김정수> ‘조랑조랑’이라는 말이 참 정감 있네요. 아우라지에 갔을 때 물가에 앉아 하염없이 흐르는 물을 바라보던 때가 떠오네요. 영월에서 태어나 지금은 원주에 살고 있는데, 시를 읽으면서 강원의 본향 의식이 많이 드러났다고 생각했어요.
<이서화> 제가 살던 동네는 다른 곳보다 문화적인 부분이 뒤떨어진 곳이었어요. 그곳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보내고 고등학교 때부터는 어머니가 무조건 그곳보다 더 나은 곳으로 나가라고 하셨어요. 중학교 때부터 어머니께서 몸이 편찮으셨죠. 그 당시 동생들은 춘천·대전·청주·서울 등지로 유학을 갔지만 저는 6남매의 맏이였기에 멀리 떠나지 못하고 어머니 주위를 맴돌았죠. 그렇게 지내다 보니 강원도 사람인 남편을 만나면서 멀리 떠나지도 못하고 지금까지 원주 언저리를 맴돌며 지내고 있네요.
<김정수> 6남매의 맏이군요. 부모님과 동생들을 위한 희생적인 삶을 운명처럼 짊어져야 하지요.
<이서화> 저만 그런 게 아니라 그 시대의 맏이들은 다 그렇게 살았지요. 강원도는 정말 제 문학의 밭입니다. 이곳에서 씨를 뿌리고 가꾸며 지금까지 왔습니다. 어릴 때는 따로 문학을 배운 것은 없고 학교에서 내준 숙제로 매일 일기를 쓰는 것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심심하면 삼촌의 책상 밑에 숨겨 두었던 《선데이 서울》 잡지를 몰래 훔쳐보며 두근거리던 기억이 납니다. 제 시는 때로는 시대에는 다소 떨어질지 모르는 소재도 있지만, 시를 읽는 사람의 마음이 정서적으로 공감되길 바랍니다. 시를 통해 마음의 위안을 찾고, 내면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시를 쓰려고 합니다.
<김정수> 《선데이 서울》, 오랜만에 들어보네요. 혹시 좋아하는 시인이나 영향을 받은 시인, 작품이 있을까요.
<이서화> 제가 처음 시집을 본 것은 초등학교 때였어요. 1970년대에 발행된 정현종 시인의 『고통의 祝祭』와 이성부 시인의 『우리들의 糧食』이었어요(시인은 책방에 있던 두 시집을 꺼내 보여주었다). 두 시집은 아버지께서 보시던 시집이었죠. 그 당시는 읽을 책도 많지 않았기에 한문이 많이 섞인 글자지만 아버지가 보시다 덮으면 그 부분을 펼쳐보곤 했답니다. 그때 뭐가 이렇게 뜻도 모르겠고 재미도 없는 책이 있을까 했거든요. 두 시집을 제가 지금도 가지고 있답니다. 그리고 제가 처음으로 구매했던 시집은 박세현 시인의 『꿈꾸지 않는 자의 행복』이라는 시집입니다. 큰아이를 업고 서울을 간 적이 있는데 마땅히 갈 곳이 없어 서점에 들어갔죠. 그 무렵에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서정윤 시인의 『홀로서기』 시집이 인기였죠. 그때는 제가 많이 힘들 때였기에 제목을 보고 그냥 골랐어요. 꿈을 꾸지도 않는데 무슨 행복이야 하면서 샀던 것이죠. 1987년도에 샀던 시집의 작가를 오랜 시간이 흘러 학교에 입학을 하면서 알게 된 것이죠. 학교에 입학했을 때 너무 신기했어요. 그러면서 자연히 박세현 시인의 시집을 많이 읽게 되었죠.
<김정수> 1987년 『홀로서기』 열풍이 대단했지요. 그때 산 시집이 제 책장에도 꽂혀 있습니다. 「홀로서기」에서 ‘만남은 타인과 만나 서는 게 아니라, 홀로 선 사람과 만나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시를 쓰는 건 결국 나 자신을 만나는 일일 것입니다. 가족과의 인연 또한 무시할 수 없고요. 첫 시집과 두 번째 시집에 가족사, 특히 아버지에 관한 시가 몇 편 있더라고요.
<이서화> 초등학생이 되면서 아버지께 용돈을 타려면 꼭 청구서를 써야만 했어요. 군것질하고 싶을 때는 거짓으로 청구서 제출했는데 알면서도 묻지 않고 용돈을 주셨죠. 청구서 없이 용돈을 달라고 하면 아무리 급히 쓸 수업자료 준비라도 주시지 않았어요. 그 당시는 용돈 타는 것이 너무 복잡하고 권위적이어서 청구서 없이 용돈을 받는 친구들이 너무 부러웠어요. 용돈조차 이렇게 꼼꼼하고 매사에 빈틈이 없는 분이었기에 덜렁거리는 저는 늘 긴장하며 지냈어요. 2003년에 협심증이 있던 어머니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어요. 어머니 살아계실 때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호된 시집살이로 본인 건강관리보다는 가족을 위해 헌신하신 어머니였기에 충격에서 벗어나기 힘들었어요. 아버지는 가정보다는 대외적인 일이 우선이었어요. 그래서 아버지께 너무 섭섭했어요. 우리에게 경제 관념을 키워주기 위해 청구서를 작성할 정도였으니 어머니께는 얼마나 깐깐하셨을까요.
시를 쓰지 않았으면 내 안의 나를 어떻게 다스렸을까 싶어요. 시 쓰기를 시작한 후 나도 모르는 사이 유독 아버지에 관한 시가 많아지더군요. 아버지에 대한 믿음과 함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어머니에게 못 했던 마음, 사랑의 표현을 아버지께 투영한 것이고요. 어머니의 부재 후 우리는 아버지를, 아버지는 우리를 서로 건사한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언젠가부터 작품 속에서 나는 아버지를 이해하고 있었고, 마음이 치유되는 나를 발견하고 보니 안정된 심리적 변화도 느꼈어요. 시는 내게 많은 것을 주었어요. 시의 언어를 통해 갈 길도 찾고 닫혀 있던 마음도 열게 되고 이해하는 법도 배웠습니다. 이런 마음에 시라는 날개를 달아주었지요.
<김정수> 얼마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서화> 이번 인터뷰 요청을 받고 며칠 지나서 아버지께서 쓰러져 날마다 병실에서 보냈답니다. 워낙에 위중한 상태라서 그사이 인터뷰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답니다. 문득 생각날 즈음 아버지께서 7월에 세상을 떠나셨답니다. 마음 추스르다 보니 8월이더군요. 세상이 참 고르지 못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동안 시간이 많고 여유로울 때는 이렇게 중요한 요청이 없었는데 말입니다. 겨울호로 넘기면 안 될까? 하는 고민을 하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고, 어떻게든 인터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마음이 정리가 안 되었어요.
<김정수> 사실 아버지께서 위중하시다는 말을 듣고 인터뷰 날짜를 잡기가 어려웠지요. 차마 말을 못 하겠더라고요. 마감이 임박해서야 겨우 연락을 했지요.
<이서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을 때는 가슴이 아프고 그립기만 했어요.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시니까 시골집 뒷산이 무너지며 집을 덮는 심정입니다. 시골집 굽이를 돌아가면 강이 있는데요. 그 넓은 강물이 바짝 마르는 느낌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유품을 정리하면서 평소에 쓰셨던 농사 일기도 보게 되었고, 그 속에 어머니께 쓰신 시 한 편을 읽게 되었어요.
저무는 계미년의 황혼빛이 내 가슴에 쿵 소리와 함께 사라지는 한 해다.
갑신년 새해를 맞으니 조상님들의 신위 모실 생각이 난다.
매년 이때면 고달픈 몸
아픈 몸 생각지도 않고
시부모 잘 모시고
조상님들 정성으로 잘 받들던.
님은 착하고 고운 마음씨 가졌기에
마지막 가는 길 외로울까 봐 명복을 빌어준 조문객이 집안에 넘쳤다.
송별객 좁은 길 가득 차 외롭지는 않았지만 지하에
조용히 잠들어 얼마나 편할까? 마음에 새겨 본다.
갑신년 새해 아침 ‘망실유인밀양박씨 신위’라는 자리 하나 더 마련해 줄 터이니
편안한 마음으로 형제자매 손자들 만나보고 돌아갈 영혼이 있다면 발자욱 소리
마저 들이지 않네.
아~~ 할 말은 태산인데 말 들어줄 귀가 보이지 않으니
말을 멈추는구나!
위 시는 아버지가 어머니 돌아가신 다음 해 1월에 쓰신 것입니다. 어머니에게 바치는 아버지의 이 시를 읽으면서 예전에 아버지께서도 문학을 꿈꾸신 것을 알게 되었어요. ‘할 말은 태산인데 말 들어줄 귀가 보이지 않’는다는 구절을 읽는데 제 심장이 쿵 하더군요. 그래서 더 아버지의 부재가 더 믿기지 않아 아버지께서 읽으셨던 두 권의 시집을 다시 펼쳐보게 됩니다.
<김정수> ‘몸으로 살았던 서사를 이서화는 시로 다시 살아낸다’는 박세현 시인의 추천사가 생각나네요. 몸 밖으로 다리 하나 내놓고 흘러가는 과적의 기억과 상처라 했지요. 그 첫 시집 『굴절을 읽다』에 평화릴레이 경험을 시로 쓴 「1번 국도」가 수록돼 있지요. 이 땅에 발 딛고 살아가면서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서화 오랜만에 그때 그날이 생각납니다. 1번 국도 따라 임진각에서 강정까지 생명평화 걷기 ‘글발글발 평화 릴레이’였답니다. 이 행사는 그 당시 제주도 강정마을에 건설 중인 해군 기지가 지닌 미증유의 폭력성을 철폐하고 평화와 생명의 가치를 우리 사회에 호소하기 위해 작가회의에서 기획한 것입니다.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반대를 위한 평화 선포식 후, 임진각을 출발해 대한민국 1번 국도와 제주항에서 제주 강정마을까지 릴레이 형식으로 걷는 행사였어요. 강정에 보내는 작가들의 편지가 들어 있는 배달 가방을 릴레이식으로 전달하며, 제주 해군기지 백지화와 강정 주민 생존권 지원을 목표로 하는 의미 있는 행사였지요.
<김정수> 이 시에 몸에서 길을 묻는 기침이 ‘길고 긴 겨울을 걸어온 손님처럼 쉬고 있다’는 구절이 있지요.
<이서화> 추운 겨울이었어요. 평화 릴레이에 참여하고자 강원도에서 김창균·김남극·한영숙 시인과 같이 강원작가회의 대표로 참여해 1번 국도를 걸었죠. 그때도 젊은 시인은 아니었지만, 열정은 젊은 시인 못지않아 이런저런 행사에 참여하게 되었죠. 그렇게 행사에 참여했기에 「1번 국도」라는 시를 낳게 된 것에 감사할 뿐입니다. 오랜만에 잊고 있던 그날, 현수막을 들고 국도를 걷던 생각이 납니다.
<김정수> 두 번째 시집 『낮달이 허락도 없이』 ‘시인의 말’에서 강원도 곳곳을 여행했다고 했는데, 그 흔적이 시에 많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이서화> 두 번째 시집은 제가 밥벌이로 강원도 이곳저곳을 돌아다닌 적이 있는데 그때의 하루하루에 제목을 붙인 시들이 있어요. 나만의 글 색과 형식으로 강원도 작가의 자부심으로 강원도의 이야기를 시에 담으려고 했어요. 독자와 화자가 공감대 형성으로 시적으로 하나가 되고 시집을 발간 목적이었는데 뜻대로 되지는 않았습니다.
<김정수> 개인적으로 「부론」이라는 시가 인상 깊었어요. 특히 ‘저녁노을이 단풍과 섞이는 절벽을 본다면/ 저곳에서는 자칫, 짧은 적요에도 발목을 다칠 수 있다’는 구절이요. 「부론강」의 ‘세상에서 가장 높은 것이 있다면/ 그건 물일 것이다’도 기억에 남는 표현이었고요.
<이서화> 원주 남쪽에 있는 부론(富論)은 과거 한강 수운의 요지로 흥원창이 있었어요. 강원도의 세곡이 모이는 곳인지라 부를 논하지 말라는 말이 전할 만큼 부유한 곳이었죠. 남한강과 섬강이 서쪽 면계를 흐르다가 흥호리에서 합류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잊힐 곳이죠. ‘무엇이든지 두 개 이상은 없는 곳’이 되었습니다. 지금 마음이 답답할 때면 찾아가 흐르는 강물을 바라봅니다.
<김정수> 「전생과 놀다」에도 나와 있듯 송정암과의 인연이 꽤 깊은 것 같습니다, 매년 문학행사를 하는 것으로 아는데, 어떤 인연이 있을까요.
<이서화> 시집을 자세히도 읽었네요. 사실 너무 주관적인 시라서 독자가 읽고 그냥 스쳐 지나가길 바라는 시인데 이렇게 콕 짚어주시네요. 저는 종교는 가톨릭이지만 유난히 절을 좋아했기에 이곳저곳 절집을 자주 기웃댑니다. 송정암 주지 스님은 소설을 쓰십니다. 소설가 주지 스님이 운영하는 절은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해서 지인과 방문을 했던 것이 인연이 되었죠. 제가 송정암을 알게 된 것은 2004년 가을이었습니다. 그 당시 송정암 대웅전을 신축 중이었고 기둥만 세워져 있는 상태였지요. 가끔 시간 나면 대웅전 기둥을 쌓는 스님을 도와 벽돌도 몇 개 쌓기도 했답니다. 지금도 생각나는데요. 쌓은 벽돌을 자세히 보면 고르게 쌓은 것 같아도 벽돌의 모습이 조금씩 다르더군요. 스님의 마음도 함께 쌓으셨나 봅니다.
거의 4년에 걸쳐 스님이 직접 지으셨답니다. 벽이 완성되고 지붕을 얹고 문을 달고 단청을 하고 모든 것을 지켜보았던 탓인지 송정암에 대웅전을 생각하면 날마다 조금씩 변해가던 모습이 지금도 떠오릅니다.
지금은 매년 초파일에는 시 낭독 행사를 엽니다. 부론면 손곡리에 주소를 둔 송정암에서 행사 때 ‘손곡문학상’ 시상식이 열리는데, 올해는 영광스럽게 제가 받아서 황송합니다.
<김정수> 세 번째 『시집 날씨 하나를 샀다』에는 가족사 대신 ‘비로소 보이는 것들’(「비로소」)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해설을 쓴 정재훈 문학평론가는 ‘그곳으로부터 시작(始作/詩作)된다’고 했습니다.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는
글귀를 읽을 때마다
반드시 도달해야 할 그 어떤 곳이 있을 것 같다
그 비로소는 어떤 곳이며 어느 정도의 거리인가
비로소까지 도달하려면
어떤 일과 현상, 말미암을 지나고
또 오랜 기다림 끝에 도착할 것인가
팽팽하게 당겨졌던 고무줄이
저의 한계를 놓아버린 그곳
싱거운 개울이 기어이 만나고야 마는
짠물의 그 어리둥절한 곳일까
비로소는 지도도 없고
물어물어 갈 수도 없는 그런 방향 같은 곳일까
우리는 흘러가는 중이어서
알고 보면 모두 비로소,
그곳 비로소에 이미 와 있거나
무심히 지나쳤던 봄꽃,
그 봄꽃이 자라 한 알의 사과 속 벌레가 되고
풀숲에 버린 한 알의 사과는 아니었을까
비로소 사람을 거치거나
사람을 잃거나 했던
그 비로소를 만날 때마다 들었던
아득함의 위안을
또 떠올리는 것이다
벌레가 살아서 내게 기어 온다
- 「비로소」 전문
<이서화> 세 번째 시집은 나름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나를 벗어난 객관적인 시를 묶으려 했고, 시 본래의 진정성과 정체성을 세우고 독자들에게 공감된 마음을 전하려 했습니다. 작품을 쓸 때마다 그 작품의 색깔을 변화시키고, 리얼리즘과 서정성으로 표현해 독자들과 공감대를 형성하는 주제를 담고자 했고요. 창작의 발상이 되는 체험과 기억을 오래 숙성시키고, 그것을 밖으로 끄집어내는 일은 누구나 같을 것이지만 세 번째 시집은 관찰력과 상상력을 더해 그것들이 지닌 힘과 가치에 대해 확인시켜주는 시집이기도 합니다. 문학이 일상의 일부로서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러한 글이야말로 독자의 마음에 깊은 울림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이 내가 쓴 시를 통해 위로받고 시를 읽는 동안은 삶의 여유를 느낄 수 있으면 합니다.
<김정수> 첫 시집은 세종도서 문학나눔, 세 번째 시집은 2019 아르코창작기금과 문학나눔이 함께 선정되면서 나름 문학적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서화> 제 시집들이 제게 좋은 기운을 안겨 줍니다. 첫 시집인 『굴절을 읽다』는 《시로여는세상》 편집장으로 있을 때 제가 편집을 했죠. 첫 시집이라 등단한 모지에서 내고 싶었기에 어떻게 해야 좋은지도 모르고 그냥 준비했던 것 같아요. 그래도 세종도서 문학나눔에 선정이 되어 기뻤죠. 두 번째 시집은 강원문화재단에서 창작지원금을 받아 발간을 답니다. 세 번째 시집이 아르코창작기금과 함께 문학나눔 도서에 선정이 되었어요. 앞으로 더 좋은 시집 발간할 수 있을지 약간 걱정도 되지만 결핍의 시대라 불리는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뭔가 깊은 위안을 주는 시를 창작하려고 합니다.
<김정수> 두 번째 시집은 권혁소 시인, 세 번째 시집은 이강산 시인이 프로필 사진을 찍어줬습니다. 2020년 권혁소 시인 출판기념회 때 저와 스치듯 만났지요.
<이서화> 선생님은 그냥 지나가도 되는 이야기를 이렇게 콕 집어내네요. 권혁소 시인은 같은 강원작가 회원입니다. 강원작가회의 행사가 있을 때마다 사진 담당입니다. 지금은 학교에서 음악 선생님이지만 사진도 굉장히 잘 찍는 작가죠. 사진을 일부러 찍은 것은 아니고 DMZ평화생명동산에서 강원작가 행사 중 동료들과 계단에 앉아 쉬고 있는데 카메라를 들이대기에 그냥 어쩌다 모델이 되었답니다. 그 당시는 너무 나이보다 성숙해 보여서 안 보다가 몇 년 후 보니까 그 시절의 사진이 지금보다 훨씬 젊어 보이더군요(웃음). 그래서 사진을 찍은 지 몇 년이 흐른 뒤 두 번째 시집 프로필을 쓰게 되었죠.
이강산 시인은 등단 전에 이강산 시인의 「한 뼘」이라는 시가 좋아서 읽으면서 독자로 알게 지냈어요. 언젠가 강원도에 출사를 오셨고, 그때 찍었던 사진입니다. 이 사진에 대한 에피소드가 있는데요. 방민호 평론가께서 첫 시집에 있는 시 「바람 조문」 리뷰를 하면서 ‘나는 이 시와 함께 실린 작은 사진을 보고 이 시인이 남자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사실은 여성이라고 한다. 시풍에 남자, 여자가 따로 있지 않겠지만 이 관조적 시선이 여성스럽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그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라고 하셨답니다. 그 사진이 세 번째 시집에 실린 이강산 시인이 찍어준 사진이랍니다.
<김정수> 얼마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바람 조문」이 더 다가올 수도 있겠네요. 사실 큰일을 치러보면 가까이 있는 분들이 힘이 되지요. 원주에 자리 잡고, 혹은 그 이전에 자주 교류하는 시인들이 있나요.
<이서화> 강원도를 벗어나서 살아본 적은 없고, 영월·횡성·양구·원주를 돌면서 살았어요. 문예지 편집장을 7년 하고 나니 지금은 강원도에 살고 있는 시인보다 전국으로 아는 시인이 더 많습니다. 원주에 자리 잡고 시를 쓰는 시인 중에는 고진하 시인은 제 고향 선배님이시고요. 안주철·양선희·신은숙 시인과 주로 연락하면서 지내는 편입니다. 특히 신은숙 시인은 자주 왕래하는 시인이죠. 코로나19 이전에는 가끔 만나 생맥주 한잔 함께하는 사이였지만 요즘은 같은 원주에 살면서도 드물게 보게 되네요. 그래도 서로 곁에서 챙겨 주면서 선후배가 아닌 동생으로 생각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김정수> 곁에 있는 분들도 소중하지만, 작품도 중요하지요. 대표작이랄까, 유독 애착이 가는 시가 있으면 소개해주세요.
<이서화> 첫 시집 『굴절을 읽다』에서는 「바람 조문」이라는 시에 애착이 갑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 혼자 계시던 시골집을 자주 갔거든요. 어느 날 길모퉁이에 떨어져 있는 조화(弔花)를 보게 되었는데 계속 머릿속에 남아 있었어요. 아무래도 그때는 갑자기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충격으로 많이 힘들 때였기에 더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첫 시집에서 「시반(屍班)」 시는 제게 가장 아픈 시랍니다.
두 번째 시집 『낮달이 허락도 없이』에서는 「고목 부처」를 좋아합니다. 뛰어난 시는 아니지만 제가 답답하면 자주 찾아가는 거돈사지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어요. 그 아래 앉아 마음 정리를 하고 하는 곳이기에 고목을 부처라 생각하고 쓴 시입니다.
세 번째 시집 『날씨 하나를 샀다』에서는 「바람의 집」 시를 좋아합니다. 그 시는 쓴 지가 오래되었지만, 그동안 발표를 안 하고 아껴두었던 시입니다. 세 번째 시집을 준비하면서 아르코창작지원금 신청 시 발표를 하게 된 시입니다. 가족사가 담긴 「그림자의 집」은 아버지께서 직접 지으신 시골집의 애잔한 이야기가 담긴 시랍니다.
<김정수> 세 번째 시집을 여는 시 「날씨 수리공」도 참 좋더군요. ‘줄곧 사용하던 날씨를 버리고 다른 날씨’(‘시인의 말’)를 샀다고 했는데, 성공한 것 같습니다(웃음). 끝으로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이서화> 요즘은 사회적으로 자신을 이방인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사회에서 바라보는 따가운 시선들을 감당하기 힘들어합니다. 그동안 내 안에 것들을 끄집어내 시를 썼다면 앞으로는 모두의 감성을 키울 수 있고 그들의 현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글을 쓰고자 합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은 보는 각도에 따라 시선도 다르듯이 그들의 마음을 읽고 싶습니다. 파격적이거나 모던한 시가 아니지만 진중하게 현실과 존재의 이면을 읽어내며 쓰려고 합니다. 앞으로의 제 작품도 화려한 기교나 요란한 관념의 수사보다 설득력 있는 목소리를 시에 담으려고 합니다. 인터뷰 지면을 열어준 《사이펀》에도 감사드립니다.
‘이서책방’ 앞에 다다르자 칠판에 흰 분필로 쓴 글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막스 피카르트의 “말이 그치는 곳에서 침묵은 시작된다. 그러나 말이 그치기 때문에 침묵이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그때 비로소 분명해진다는 것뿐이다.”(『침묵의 세계』)라는 문장입니다. 원주에 오기 전에 도서관에 가서 빌려 읽고 있는 책이지요. 아는 사람을 만난 듯, 묘한 동질이 생겨났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를 여윈 시인은 침묵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침묵에서 무언가 말을 끄집어내야 하는 건 곤혹스러운 일이지요. 침묵과 결합하지 못하면 말은 더 이상 재생할 수 없고, 자신의 본질을 잃어버린다고 했습니다. 가까운 죽음에도, 침묵에서 흘러나온 말을 어렵게 들려준 시인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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