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과 노국공주
<망할 수 밖에 없는 나라 "고려">
고려의 제25대 임금인 충렬왕이 원元세조 쿠빌라이 칸(khan=군주, 황제를 뜻함)의 부마(駙馬=왕의 사위)가 된 이후 고려는 몽고가 세운 원나라의 속국이자 부마국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이후 충선왕(26대)-->충숙왕(27대)-->충혜왕(28대)-->충목왕(29대) -->충정왕(30대) 때까지 고려 조정은 원나라의 정치적 간섭과 지배하에 놓이게 되고 새로운 권력층으로 급부상한 부원배(附元輩)등 권문세족이 득세하게 된다.
왕권은 극도로 쇠약해졌고 원나라의 힘을 등에 업은 권문세족들의 부정부패와 가렴주구는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형국이었다.
민초들의 삶은 점점 더 피폐해 졌다.
제28대 충혜왕은 고려역사상 가장 흉악한 패륜아이자 폭군이었다.
또 뒤를 이은 29대 충목왕은 불과 8세 밖에 되지 않은 어린 아이였다.
당시 조정의 꼴이 어찌 했을지 상상해 보십시요.
고려는 이미 끝장이 나고 있었다.
온갖 수탈과 가혹한 착취로 피폐 해질 대로 피폐해진 백성들의 삶과 생활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고려의 충신 이제현의 "국정개혁안"은 원나라에 기생하여 권세를 누린 부원세력과 부패한 조정관리의 온갖 방해로 제대로 시행되지도 못한다.
이런 와중에 8살의 어린 나이에 왕에 오른 충목왕은 불과 12살에 병으로 죽고 그 뒤를 이은 충정왕(30대) 역시 12살 밖에 되지 않는 어린이였습니다.
이 때문에 고려는 정치적 안정을 찾지 못했고 ...
때마침 왜구의 침략까지 온 나라가 혼란에 휩싸이고 백성의 삶은 피폐했다.
당시 원나라는 내우외환에 처한 고려를 안정시킨다는 구실로 충정왕을 폐위하고 고려의 31대 왕으로 공민왕을 세웁니다
(가릉대군(공민왕)은 어려서 부터 원나라에 들어가 자랐으며 원나라 황실의 노국공주를 아내로 맞이 한 후 귀국하였다.)
공민왕는 왕권강화에 힘썼으며 국정개혁을 추진할 개혁관료집단과 신진사대부를 적극등용하기도 하였다.
공민왕은 원나라정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 당시 원나라는 홍건적의 난으로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공민왕은 원나라를 배척하는 개혁정책을 추진하였다.
권력을 송두리째 빼앗길 위기에 처한 권문세족들은 여러 차례 왕을 제거할 반란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개혁은 좌절과 혼란에 빠지고 역모와 반란이 거듭될 수록...
정국은 혼미했고 공민왕에 대한 분노와 불신은 깊어만 갔다.
공민왕은 이처럼 사면초가의 어려움에 놓인 자신을 도와줄 이세독립지인(離世獨立之人=세상을 초월해서 홀로 우뚝 서 있는 사람)을 학수고대했다.
이때 불현듯 만난 사람이 바로 요승 신돈(辛旽)이었다.
무신정권에 뒤 이은 몽고 지배 후, 권문세족은 온갖 불법적이고 강압적인 수단을 동원해 농민들의 토지를 수탈하고 노비 소유를 확대해왔다,
또 이들은 권력을 남용해 국가소유의 토지(公田)를 개인소유의 사전(私田)으로 만들고, 양인(良人) 신분의 농민들을 사노비로 전락시키기도 했다.
신돈은 양반 계급에 있는 사람을 싫어했다.
훈구대신이나 공신을 모두 몰아내는 새로운 정책을 시행하였다.
구세력들 권문세족들이 차지 하고 있던 토지와 노예를 원소유주 농민에게 돌려주도록 하였다.
백성들은 성인(聖人)이 나타났다고 신돈을 하늘같이 떠받쳤다.
신돈을 전적으로 신임하게 된 공민왕은 즉위한지 14년째 되는 해 그에게 국정 개혁에 관한 모든 권한을 넘겨주었다.
신돈은 토지개혁과 노비해방을 통해 권문세족의 권력기반을 허물어뜨리고자 했다.
이를 위해 신돈이 전민변전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하였다.
신돈이 정권을 쥐자 그의 문하에는 벼슬을 얻으려는 사람으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심지어 벼슬을 얻기 위해 자신의 딸까지 바친 사람도 있었다.
신돈은 궁궐을 출입 할 때 궁궐정문으로 출입하기가 불편하다 하여, 궁궐 뒤에 조그마한 문을 내고 그곳으로 출입했다.
또 궁궐 뒤 터에 집을 짓고 거처했다.
여러 사람의 이목을 피해 왕과 자주 내통하고 왕은 홀로 방문하기도 했다.
신돈은 방 가운데 부처님을 모셔놓고 분향 합장하며 불경을 외우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본 왕은 더욱 신돈을 신임했고 존경하기 까지 했다.
권력을 한손에 틀어쥔 신돈이 스스로 오도도사심관(五道都事審官)이 되어 도읍지를 개경에서 충주로 옮길 계획도 세웠다.
신돈은 반대 세력을 모두 없애고 점차 자기세력을 굳혀나갔다.
엄청난 부와 권력을 거머쥔 신돈은 횡포가 점점 심해지고 왕과 나란히 걷기도하고 신돈은 왕도 우습게 여겻다.
이즈음 그의 세력이 너무 비대해지자 왕도 신돈을 좀 꺼리게 되었다.
공민왕은 어려서부터 원나라에 들어가 자랐으며,원나라 황실의 노국공주를 아내로 맞이 했다.
세월은 흘러 공민왕 14년에 노국공주는 산전(産殿)으로 들어갔다.
왕은 기뻐 대사령을 내리는 한편 각 사찰에 불공을 드리라는 명을 내렸다.
온 나라가 축제와 명산대찰에는 밤낮없이 기도와 염불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공주는 난산 끝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왕은 슬픔에 잠겼다.
왕은 밤낮없이 공주의 화상을 보며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공주의 장례식에 업청난 국고를 탕진했다.
왕륜사 동쪽에 공주의 영전을 짓도록 하였는데 목제를 운반하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또 정릉앞 정자각에서 군신들을 모아놓고 밤새도록 원나라 음악을 연주하여 공주의 영혼을 위로했다.
노국공주가 세상을 떠난후 공민왕은 성격이 아주 바뀌었다.
정사는 돌보지도 않고 술로 세월을 보냈다.
혜비가 있었으나 10년이 넘도록 혜비의 처소에는 가지도 않았다.
이즈음 신돈의 횡포가 점점 심해지고 그의 세력이 너무 비대해지자 왕도 신돈을 꺼리게 되었다.
신돈은 공민왕의 신임이 줄어들자 불안함을 느껴 드디어 왕을 살해할 계획을 꾸몄다.
신돈의 암살계획은 무산되고 신돈의 무리를 잡아 국문한 결과 발각되어 가담자 모두가 처형되었다.
신돈의 이같은 횡포는 크나큰 사회에 해독을 끼쳤고 기울어가는 고려의 멸망을 더욱 재촉하였다.
신돈이 죽자 공민왕의 마음은 더욱 허전하였다.
비통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술로 세월을 보내다 보니 몸은 더욱 쇠약해졌다.
공민왕 말년에는 왕의 침실에 시중드는 자제위(子第衛=동성연애자)을 두었다,
이들 홍륜 한안 김흥경 등과 어울려 타락과 방탕한 생활을 일삼는다.
아들을 얻기 위해서 이들과 혼숙도하며 왕비와 함께 잠자리하는 것도 예사였다.
그후 왕비인 익비가 임신했다는 말을 내시 최만생으로 전해들은 공민왕은 뒤탈을 없앨 목적으로
홍륜과 한안을 죽이려 하나 최만생이 홍륜 한안에게 밀고하여, 이들이 먼저 만취 상태에 잠들어 있는 공민왕을 살해한다.
다음날 최만생의 옷고름의 핏자국이 이인임의 눈에 뛰어 살해사실이 밝혀지고 역적의 죄목으로 모두 처형되고 만다.
공민왕의 갑작스런 죽음은 고려조정에 일대 파란을 몰고 왔다.
누구를 왕위에 앉힐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치열한 암투가 벌어졌다.
고려 제32대 왕으로 오른 우왕은 출생과 관련하여 숱한 억측과 논란을 불러 일으킨 임금이다.
훗날 이성계 세력이 공민왕의 자식이 아니라 신돈의 씨앗이라는 이유를 붙여 자신의 아들 창왕(昌王)을 폐위함에 따라
왕씨가 아닌 신씨의 자식이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써야 했다.
우왕과 창왕은 왜 신돈의 핏줄이라는 의혹을 받아야 했을까요?
우왕은 공민왕이 신돈의 여종인 반야와의 사이에서 얻은 자식이었다.
이때문에 우왕은 7살 때 까지 신분을 숨긴 채, 신돈의 집에서 자랐다.
신돈이 처형당한 후 자신의 아들임을 밝히고 궁궐로 데려왔다.
이때 우왕의 신분은 반야가 아니라 궁궐에 있는 이미 죽은 한씨의 소생이라고 조작해 발표했다.
공민왕이 갑자기 죽자 우왕을 제쳐두고 왕족중 한 사람을 골라 왕위에 앉히려는 세력과 우왕을 옹호하는 이인임 사이에 첨예한 대립이 있으나 이인임 세력은 공민왕의 유지임을 내세워 우왕을 왕위에 앉힌다.
이인임은 우왕의 신임과 자신의 권세를 믿고 온갖 악행과 전횡을 일삼는다.
이인임은 얼마 가지 못해 이에 반감을 품은 최영과 이성계에 의해 축출당하고 만다,
우왕 또한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 세력에 의해 폐위되고 강화도에 유배를 당한다.
우왕이 폐위된 후 그의 아들 창왕이 보위에 이었지만 역시 1년 5개월 만에 폐위 당하고 만다.
우왕을 폐위할 당시 이성계는 고려 조정의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지는 못했기 때문에 창왕의 즉위를 용인했다.
그러나 창왕이 즉위한 다음에 우왕이 복위를 꾀하는 역모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빌미로 창왕까지 폐위시킨다.
이유인즉 우왕은 王氏가 아니고 신辛氏의 자손이고 따라서 창왕 역시 신씨라는 것이었습니다.
조선 세종때 정인지등이 편찬한 [고려사]에도 우왕과 창왕을 고려의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아 ,
실록에 편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