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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유, 부인! 정말 큰일날 소리하는군요. 신경계 질환이란 자기의 의지로 할수 있는게 아니에요. 뇌의 홀몬을 비롯한 화학적 물질이 과다분비되거나 비정상 작용을 하는데 그걸 약을 끊고 해결보시겠다니요?”
“알다시피 저 비정상적으로 살이 찌고 있어요. 직업적으로도 안좋고 여자한테 얼마나 수치인데요?”
신경내과 전문의와 마주 앉은 솔희가 투약을 완강히 거부하자 의사는 솔희를 호통치기 시작했다.
그는 솔희에게 한심하다는 표정과 답답해하는 모습을 숨기지 않았다가 비장한 모습으로 솔희에게 또박또박 작심한듯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부인! 여자한테 진정한 수치가 뭔지 제가 보여드리죠”
키 땅딸보에 머리가 벗겨지고 거무잡잡한 피부를 지닌 인도 출신의 의사는 리모콘을 들어 의사 뒷면 벽에 걸린 50인치급 TV화면을 작동시킨뒤 그도 솔희를 등지고 뒤로 돌아 앉았다.
TV화면에는 보스톤과 뉴욕지역의 여성노숙자들을 촬영하거나 일부 인터뷰한 내용이 실려나오기 시작한다.
그중 끔찍한 것은 모자이크 처리했지만 윤간을 당한뒤 길거리에 나체로 실신해 있는 여성노숙자의 사진이 몇장 지나가는 장면이었다.
인터뷰중 한 여성노숙자는 왜 치료를 받지 않냐고 질문하는 기자에게 분노에 가득차 화면에 삿대질을 하며 자긴 미치지 않았고 세상이 미쳤다고 소리치고 있다.
그리고 화면 중간 중간에는 우울증 환자의 자살율 그래프를 보여주었고, 미국 동부의 여성노숙자 발생 원인에 대한 통계와 분석이 보여지고 있었다.
화면을 정지시킨 의사는 솔희 쪽으로 돌아 앉았다.
“저 여성노숙인들, 생리대가 없어서 길거리에서 휴지 주워뭉쳐 쓴다는 이야기 들으셨죠? 불결한 환경 속에 사는 여자에게 누가 성욕이 솟을까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해떨어진 뒷골목은 사람의 세상이 아닙니다. 저 여자들 배운거 없고 가진거 없어서 저리된거 아니에요. 어엿한 하우스와이프에 고학력 캐리어우먼들도 있어요. 왜 저리 됐다고 생각하나요?”
솔희는 충격적인 영상을 보고 더 이상 의사 앞에서 말을 잇지 못했다.
일부러 공포마케팅을 하는 듯한 의사가 솔희에게 하려는 말은 너무나도 뻔했기 때문이다.
“저게 다 시초는 우울증입니다. 그게 조울증이나 정신착란증으로 발전하면 저리 됩니다. 저 여인들 부모나 남편이 어떻게 안해 봤을것 같죠? 그 정신상태에서 저렇게 스스로 집을 나가고 가족을 버린 겁니다. 가족들은 강제입원시킬 권한도 없어요.”
“어머, 저런 끔찍한 상태로 내몰리는데도요?”
“미국 수정헌법에 의하면 정신병자도 자유의지와 개인적 선택으로 치료를 거부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사고회로가 어긋난 인간들이 무슨 개인적 선택이고 자유의지랍디까? 이게 빌어먹을 fucking America의 실체입니다. 그게 미국 전국적으로 미친 노숙자들이 날마다 늘어나는 이유죠. 제발 부탁인데 나중에 그 굳은 의지로 살은 뺄수 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길거리로 나가서 눕는것보다 무서운건 자살충동입니다”
성폭행당한 직후의 노숙여성들의 사진을 보자 그녀는 에드먼드라는 놈에게 하룻밤을 바치면서 저런 영혼없는 표정과 새우처럼 등을 고부렸던 모습이 그때의 자신과 너무 흡사하여 PTSD가 다시 오는것 같은 강렬한 충격에 휩싸였다.
그리고 의사가 인용하는 헌법의 조항에서 개인적 선택이니 자유의지니 하는 단어들은 제이가 솔희에게 자주 사용하던 친숙한 언어였지만 이번에는 혐오스러운 말로 다가왔다.
솔희가 일탈을 즐기며 남편을 배신하다 못해 이혼하는 것에 대해 제이는 솔희에게 기존의 제도 따위에 구애받는 것을 거부하며, 자유의지에 기반한 사랑을 즐기고 자기 신상에 대해 개인적 선택을 할줄 아는 멋진 현대여성이라며 찬사와 위로를 해주었었다.
하지만 그 잘난 개인적 선택으로 제이는 독신주의자임을 표방했건만 역시 되먹지 못한 개인적 선택으로 딴년이랑 결혼해 버린 놈.
역시 자유의지로 솔희와 내연을 가지면서도, 분노한 본처에게 솔희가 일방적으로 폭행을 당해도 두 여자의 개인적 선택이라며 모르쇠하던 놈.
“제이 그 XX, 개XX였어!”
“네, 뭐라구요?”
“아, 아닙니다. 그냥 얼마전 친구 생각이 나서요”
“방금처럼 이렇게 주의가 산만해지는 것도 우울증의 증식과정입니다. 결국에는 일반적 생활 판단력도 마비되지요”
의사는 솔희의 혼잣말에 반응하며 거기에 대하여 의학적 소견을 내놓았다.
솔희에게는 그 짧은 순간 제이에 대한 애증, 에드먼드에 대한 분노와 굴욕감, 그리고 에벌린에 대한 분노가 번개치듯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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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오후 연습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던 솔희의 휴대폰에서 경쾌한 소리가 난다.
아이폰에 찍힌 넘버는 제이의 공연기획사 사무실 전화번호였다.
그녀는 바로 전화를 받아 보았는데 실망스럽게도 제이의 시크리터리(비서)인 에리카양이었다.
“쏘리씨, 저희 회사와 협업을 하시는 모든 분들과 사장님의 긴급한 미팅이 잡혔어요. 오늘은 토요일이라 문을 닫지만 세시까지 사무실로 와주시면 되겠습니다”
“흠, 저는 제이에게서 어떤 말도 듣지 못했는걸요?”
“저희 사장님은 이런 일에 있어서 개인에게 먼저 이야기하지는 않으시는걸로 알고 있습니다. 사장님은 지금 교외지역의 미팅에 가셨다가 운전해서 돌아오시는 중이라 직접 통화는 자제해 달라는 전언도 있었어요.”
솔희가 자기도 모르게 한, 제이에게서 직접 말을 듣지 못했다는 것은 솔희와 제이와의 친근한 관계를 스스로 드러낸 다소 멍청한 반문이었고 비서 에리카양의 딱딱한 답변은 그들이 이전부터 부적절한 관계일수 있다는 것을 확인해 주는 말이었다.
또 불필요한 소리를 했구나 하는 자책감과 함께 솔희는 그 미팅에 응하기로 했다.
제이의 사무실에 도착했을때 그녀가 이상하게 느낀 것은 제이의 회사 주차장에 새차 냄새가 물씬 풍기는 자그마한 빨간색 아이오닉 한 대만이 달랑 주차되어 있어서였다.
협업 중인 파트너들을 부른다면 아직 도착하지 않은 이들을 감안하더라도 차 다섯대는 족히 주차장에 있었어야 했다.
(에리카 새차 뽑았나? 나 밖에 없쟎아! 다른 사람들은?)
솔희는 갑자기 불길한 예감에 휩쌓여 핸드백에서 아이폰을 집어 들었다.
에리카가 전화했던 그 사무실번호로 리턴콜을 해 보았지만 다섯번 신호가 간뒤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된다.
(이런, 뭐가 잘못됐어)
그 다음으로 제이의 전화번호를 찾고 있던중 그녀의 청각신경은 건물 내부에서 흘러 나오는 낭창하고 진취적이며 남성적인 피아노 소리가 들리고 있는 것을 잡아냈다.
그러면 그렇지 하고 솔희는 씩하고 웃음을 지으며 건물로 들어섰다.
(역시, 제이다와, 실망스럽고 권태감이 느껴져도 꼭 이런 식으로 날 감동시킨다니깐. 제이는 절대 미워할수 없는 남자야)
에벌린에게 당하고 난뒤 그 얄밉게 모르쇠하던 제이와 그 동안 개인적으로 연락을 하지 않아왔건만 이런 식으로 이벤트를 만들어 줄줄 아는 남자라는 것에 대해 솔희는 마음이 풀렸고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사무실로 들어섰을때 아무도 없었고 그녀에게 전화를 했던 에리카양의 자리마저 말끔히 정리되어 있었으며 제이의 개인연습실인 3층에서부터 합창곡인 카루미나 부라나중에 나오는 O Fotuna가 연주되는 소리가 들리다가 멈추어졌다.
(희안하네? 저 곡은 피아노곡이 아닌 합창곡인데? 하기사 잡기에 능한 제이니깐.......)
솔희는 종종걸음으로 그러나 발걸음 소리를 자제하며 문이 활짝 열려져 있는 제이의 연습실로 들어갔다.
“제이, 나 왔어! 어쩐 일이야? 이렇게 혼……………….!”
연습실로 들어선 솔희는 그 자리에서 온 몸이 얼어붙고 눈 앞이 하얘지며 심장이 마구 박동하기 시작했다.
솔희가 제이의 연습실로 들어서자마자 목격된 것은 피아노 연주를 하다가 방금 중단한 에벌린이었고 제이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뒷걸음질쳐서 나가기에도 너무 늦어버린 것이다.
그전에 솔희를 손보러 왔을때 에벌린의 차는 거칠고 야성적인 벤츠 지바겐이었고 설마 저 작은 현대차가 그녀의 차라고 생각할수 없었다.
원래 미국인들 부유층은 차를 가정당 두 대 보유하는게 아니라 1인당 두 대 정도 보유하면서 한 대는 저렴한 비용으로 막 굴린다고 이야기를 들은바 있었는데 주차장에 서 있던 그 작은 하이브리드차는 에벌린의 세컨카인듯 싶었다.
아직 앳된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에벌린은 머리를 묶은 상태였지만 그 여자의 큰소리대로 청바지는 입지 않았고 조신해 보이는 분홍색 원피스를 입은 상태였다.
에벌린이 솔희가 사나운 성질에 비해 신체의 전투력이 형편없다는 것을 지난번 확인했으니 에벌린이 바지를 입던 치마를 입던 솔희 하나 흠씬 두들겨 패는데 차이가 없을거라는 자신감의 표현일까.
게다가 그 치렁치렁했던 머리를 뒤로 단단히 결박한 것으로 보아 지난번같이 다 이겨 놓은 전투에서 머리채를 휘어잡혀 꼼짝 못하게 되는 상황을 예방하려 애쓴 흔적마저 보인다.
그 지난번 전투에서의 교훈을 획득한 주도면밀하고 치밀한 에벌린은 회심어린 미소를 띠우며 유들유들하게 솔희를 구슬리기 시작한다.
“왜, 제이가 아니라서 실망스러워?”
“너, 이딴 식으로 장난치는거니?”
솔희는 속으로는 공포에 부들부들 떨었지만 일단 세게 나가기로 했다.
“이제보니깐 쏘리 너 청음도 형편없었구나! 제이가 치는 것이라면 그만의 특유의 음색이 있지. 내가 제이만큼 친다고 날 높이 평가해줘서 고맙다고나 해야 하나?”
“하고 싶은 말이나 해”
“방금 이 곡 다들 들어본 노래지. 내가 우리 학교 합창부 아이들 지휘를 하는데 경연대회때 채택한 곡이야. 지금 막 곡해석하는 중이었어. 휴우......피아노 밖에 모르던 내가 이런 짓까지 해야된단다! 내 합창부에 주립교향악단 부지휘자 멀레씨의 아들도 있고, 테너 아덴씨의 딸도 있고, M 레코드사 사장 아들 딸 남매도 있으니 긴장이랑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니야. 지난주 파티에서 보스톤필 플루티스트 자넷씨가 이번 합창경연대회 곡중 소프라노 솔로를 당연히 자기 딸이 하는걸로 알고 있더라고, 아이들 오디션을 봐서 곡중솔로를 선정해야 하는데 교사 입장 난처하게시리.....그 와중에 쏘리 네가 와주니깐 꽉 막힌 문제를 풀 기회가 생겼지 뭐야?”
“휴우, 에.벌.린. 선생님! 바쁜 날 여기까지 속여서 불러다 놓고 기껏 네 학부모 자랑이니? 너한테 두들겨 맞은거 낫는데 한달 걸렸어. 거기에 대한 사과는 할 생각이 없니? 네 깡패짓을 네 제자들이 알까 무섭다, 진짜.”
장소의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솔희는 지지 않고 에벌린에게 맞서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여직원까지 회유했는지 협박했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자기를 완벽히 속여서 이쪽으로 부른 행위 자체가 괘씸했다.
에벌린은 그럼에도 유들유들하게 대화를 풀어나간다.
“내 학생들이 그때 일을 알아도 나를 응원할껄? 우리 선생님의 사랑을 훔쳐간 못된 녀는 조지는게 맛이라고 하면서 날 격려할거야. 차라리 내 학생들을 여기에 모두 집합시켜 놓고 지금부터 벌어질 통쾌한 장면을 보여주고 싶어. 남의 가정을 갈라 놓고 남의 사랑을 빼앗는 것은 이렇게 조진다.....남의집 유부남녀를 노리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언젠가 연인과 가정을 가질 제자들에게 교육자로서 몸소 모범을 보여주는 산교육 현장으로 삼을걸 그랬지?"
"후우.....얌전하고 순진한줄 알았는데 넌 뭘 해도 넌 상상 이상이구나. 더군다나 제이의 여비서까지 동원해서 유인 납치극까지 꾸미고!"
"후후.....방금 에리카가 사무실에 딱 30분 있다가 돌아갔어. 하지만 토요일 풀타임으로 일한걸로 쳐주기로 약속했지. 나가면서 뭐래는줄 알어? 에벌린 사모님의 사랑과 가정을 지키는 노력을 지지한대. 거기에 내가 너한테 머리카락까지 잡힌거 아직도 두피 아프냐고 묻더라. 당연히 안 괜챦지, 내 피해는 누가 보상해줄건데?!”
“………..그래 그래, 잡설 집어치우고, 네가 나한테 요구하고 싶은게 뭐야?”
“제이와 사적 연락을 끊는것 가지고는 안되겠어. 제이와의 모든 음악적 협업과 공적관계도 단절해”
“이런, 말도 안되는………….그거 월권인거 알어? 나, 제이와 사적 연락 안해. 그럼 됐지, 넌 그냥 안사람이야. 네 남편의 바깥 일에 대해 왈가왈부 하지마”
에벌린의 요구는 솔희의 말대로 월권 상태로 치닫고 있었다.
솔희에게 제이와의 협업이나 콜라보는 보스톤 생활에서의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 못했지만 그녀가 실력을 비약적으로 늘리고 인지도를 얻기 전까지는 제이의 음악적 도움이 절실했던 것이다.
“쏘리야, 뭘 모르는구나? 제이의 회사에 이번에 우리 아빠가 증자를 시켰어. 아빠 돈이긴 했지만 내 이름으로 돌렸어. 나는 경영에 참여할 권한이 있고 제이의 안 사람으로서도 사업에 조언할 권리가 있지. 더군다나 일을 핑계대서 남의 집 가장한테 못된 의도를 가지고 개인적으로 접근하는 여자는 딱 내선에서 정리할거고, 지금 너같은 여자 말이야!”
에벌린은 조용히 말을 꺼내기 시작하면서 뒷부분으로 갈수록 금속성으로 톤이 변했으며 속도도 빨라졌다.
‘지금 너같은 여자말이야’라고 일갈하면서 에벌린은 벌떡 피아노 의자에서 일어섰고 그 파란 눈이 이글거렸다.
섬찟해진 솔희는 속으로 쪼그라 들었다.
에벌린의 파란 눈빛은 먹이감을 발견했거나 경쟁자와의 투쟁이 준비된 야수의 눈빛이었기 때문이다.
야생늑대의 눈빛은 사육장에서 자란 늑대나 집개와 달리 푸른색 섬광이 비친다고 이야기 들었는데 서양인의 파란 눈이 이토록 무서워본건 처음이다.
속으로 떨었지만 고집이 세며 원래 자기 잘못을 인정할줄 모르는 솔희는 지지 않고 에벌린에게 따졌다.
그 어린 유아기 시절, 그녀는 생각도 안 났지만 그녀의 아빠가 밤새도록 솔희를 벌세우고 때리면서 ‘잘못했어요’라는 단 한마디만 하도록 강요했었다.
세상 떠나갈 듯 울어서 얼굴에 눈물과 콧물 범벅이 되었어도 유치원생인 솔희는 절대로 잘못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고 결국 그녀의 아빠가 항복해 버렸었다.
물론 그건 솔희 본인이 기억을 못하지만 그녀의 친정부모의 술회 속에서 알게 된 일이다.
“이봐, 아무리 네가 제이의 아내더라도 제이의 자유로운 사랑에 간섭하지마, 내게도 마찬가지고. 난 전남편이 나와 제이 관계를 알아차렸을 때 뭐 용서해달라 했는줄 알어? 나의 사랑할 자유를 겁박하지 말라고 오히려 큰 소리쳤어. 이런 나한테 무슨 잘못을 인정하라느니 제이와 사적 공적 관계를 다 끊으라느니 하는거, 너 번짓수 잘못 찾았다”
“이런 말도 안되는! 이봐 눈찢어진 아시안 걸! 하여간 차이나 걸이나 코리안 걸들은 학교 다닐때부터도 교수들한테 아부나 하고, 동기들한테 절대 안질려고 하고 별 쓸데없는 욕심이 많았지”
“이런! 인종차별에 국가차별적 발언까지? 네가 그토록 독점하고 싶어하는 니 남편 제이는 한국인 피가 흘러. 그리고 네가 타고 온 그 차는 어디서 온건지나 아니?”
“이봐, 제이는 어느 혈통이든 상관없어. 내가 사랑하면 그만이니깐. 자동차는 어디서 왔던지 내가 조작하는대로 말없이 움직이지. 하지만 네년은 그렇지 않아!”
솔희는 자기가 생각해도 절대로 에벌린에게 꿇리지 않고 있다고 속으로 자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는 에벌린의 분노를 계속 도발하는데 지나지 않았다.
계속해서 솔희는 부르르 떨고 있던 에벌린을 받아치며 자기의 입장을 내세웠다.
“네가 그토록 원하니 제이랑 사적관계는 안할게. 하지만 공적관계는 나와 제이 두 사람만의 소관이야. 난 네가 현명하고 착한 여성인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폭력적이고 말도 안되는 논리에다가..........웁!”
철썩!
그리고 솔희가 차마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 그녀의 눈앞에 번쩍하고 섬광이 비쳤고 솔희는 중심을 잃으며 쓰러질뻔 했지만 피아노를 잡아 의지했다.
지난번과 똑같은 상황, 하지만 솔희는 일어선 자세를 유지했다.
두손을 그녀의 왼뺨에 갖다대니 뜨거운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말로 하는 타임은 끝이 나버렸고 온전히 에벌린의 독무대로 변해 버렸다.
그 반대편 빰과 귀에도 섬광이 터져버렸다.
“아아악!”
솔희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돌아서 문 밖을 나가 달아날 생각을 했다.
지난번처럼 일방적으로 장시간 동안 얻어맞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방에게 등을 보이는 지난번의 에벌린의 실수를 이번에는 솔희가 해버린 것이다.
머리채를 붙잡힌 솔희는 머리를 마구 움직일수록 아픔이 더해졌고 에벌린이 움켜쥔 손은 더욱더 솔희의 모발을 강하게 압박했다.
탁!
솔희의 핸드백이 땅바닥에 힘없이 떨어져 버렸다.
에벌린의 손아귀를 벗어날 방도도 없었지만 핸드백 안에 돈과 카드, 전화기와 차열쇠가 다 있었기 때문에 핸드백을 방치하고 도주하는 것도 말이 안되는 일이었다.
솔희는 그전의 에벌린처럼 어깨 뒤로 손을 보내려 했지만 만져지는 것은 허공의 공기뿐이다.
쿵~ 철푸덕!
에벌린은 솔희의 머리채를 잡아 고무총을 쏘듯이 그랜드 피아노의 옆모서리에 사정없이 패대기를 쳐댔다.
머리채를 잡힌 아픔과 부자유를 벗어났지만 반격할 여유도 없이 계속해서 그녀의 어깨와 볼에 에벌린의 손바닥이 춤을 추기 시작했고 솔희는 아예 볼에 감각이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솔희가 볼에 감각을 찾기 시작한 것은 두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차갑게 느껴지면서 부터였다.
에벌린은 그전보다는 더 치밀했고 이성적이었던 것이 솔희에게 더 이상의 폭행을 지속하지 않은 것이었다.
물론 수틀리면 다시 매질이 시작될수 있다는 뉘앙스를 솔희에게 흘린다.
“이봐, 어서 이 자리에서 약속하면 얌전히 보내주지. 내게 잘못을 용서빌고 제이와의 공적관계도 끊겠다고 약속해”
피아노에 등을 기대고 쪼그려 앉은 자세의 솔희는 훌쩍거리고 있었다.
반격을 하려 해도 에벌린은 그전처럼 허점을 전혀 보이지 않고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몇 대 맞고 나니 반격을 할 기운과 체력이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에벌린.........나한테 왜 이러니? 난 너에게 학교 한참 선배야........흑흑”
“셧업! 그 따위 소용없는 이야기 집어치우고! 몰라서 물어? 물라서 묻냐고! 내 사랑하는 남편을 훔쳐다 같이 잔 여자를 알게 된 아내의 심정을 네가 알기나해? 너 남편 뺏겨본 적도 없지? 진지하게 묻고 싶다, 남편 뺏겨본적 있어?”
“........에벌린, 흑흑흑........난 전 남편이 다른 여자랑 뭘한다 해도 관심 없었어. 난 전 남편한테 밖에서 섹스도 하라고 권장 했었지. 남편 사랑이나 바라보며 살아가는 여자들과 난 달라. 그래서 지금 너의 감정을 난 몰라. 너도 정 그러면 다른 애인 찾아서 제이 몰래 낭만과 일탈을 즐겨. 내 입장 알게될거야.”
“OMG! 이런 말도 안되는!!”
솔희는 매의 아픔에 눈물을 흘리고 더 이상 저항하거나 맞설 의욕을 잃어버리고 굴복한 자세를 취하면서도 말에 있어서는 에벌린에게 절대 지지 않으려 했다.
에벌린은 더욱 분노하여 두 손목을 모아 야구 배트를 휘두르듯 솔희의 목을 쳤다.
퍽!
아아아악!
솔희가 쓰러질 기회도 주지 않고 에벌린은 솔희의 멱살을 잡아 끌어 올렸고 솔희는 숨이 끊어질 듯 막힌 상태에서 힘없이 에벌린의 두 손에 끌려 일어서게 되었다.
“오늘 널 죽여버리고야 말겠어!”
에벌린은 섬찟한 말과 섬찟한 눈빛으로 솔희를 노려보며 두손을 뻗어 솔희의 목을 잡았다.
“으아아아악!”
그때 솔희는 환시를 본 것인지 뭘 본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에벌린의 머리 위를 바라보며 공포와 놀람에 가득찬 비명을 질러댔다.
그리고 솔희는 나무가 무너지듯 털썩하고 무릎을 땅에 떨어뜨리며 꿇었다.
그때부터 솔희는 다시 정신이 미쳐버린 듯 했다.
솔희는 지금껏 없었던 공포에 부들부들 떨며 두손을 모아 닳듯이 에벌린에게 빌기 시작한다.
“여보, 여보, 잘못했어요, 정말 잘못했어요. 당신이 그토록 절 사랑해주시는걸 알면서도 그냥 지겹고 권태스러워서 실수를 저질렀던거고, 진심 아니었어요. 전 당신만을 사랑해요. 믿어 주세요. 다시는, 다시는 그런짓 안할께요. 제이와 당장 헤어질께요. 다시 당신을 모시게 될 기회를 주세요.......흑흑!”
에벌린도 황당하고 놀란 듯 했지만 다시 냉정하게 솔희를 구박하기 시작했다.
“너 어딜 보고 이야기하는거니? 거기다 갑자기 웬 한국어?! 나 한국말 하나도 못 알아듣거든? 제이 이야기 나오는거 들어보니깐 네가 어지간히 급해서 모국어가 나오는 모양이구나. 하지만 넌 내 자존심을 건드렸고 오만불손하게 행동했어. 좀 더 매를 맞아야 해”
그때서야 솔희는 제 정신이 돌아왔고 방금 환시를 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에벌린에게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는 절망적 상황에서 절대 신과 같은 존재인 에벌린에게 용서를 빌어야 했다.
“Mrs.Neville! 용서를 빕니다. 흑흑흑. 다시는 제이와 개인적으로도 공적으로도 연락하지 않겠고 음악도 같이 하지 않을거에요. 당신의 행복한 가정에 걱정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제발 더 이상 때리지만 말아 주세요, 흐으흑”
그러나 그 사과가 너무 늦은 것이었던지 에벌린의 분노는 풀리지 않았다.
솔희의 귀에는 퍽퍽거리고 짝짝거리는 소리가 끝도 없이 들렸고 몸이 흔들렸지만 전혀 아픈 감각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다른 공포에 짓눌려 있었다.
그리고 에벌린에 말로든지 완력으로든지 저항할 힘도, 의욕도 완전히 제로가 되어 있었다.
차가운 에어콘이 자동으로 작동되는 타이밍에 솔희는 눈을 떴다.
그녀는 새우모양으로 옆으로 누워 뻗어 있었는데 에드먼드라는 변태놈에게 당한 직후의 모습과 흡사했다.
아이러니하게도 3층 제이의 전용연습실에서는 솔희와 제이가 함께 연습을 하며 사랑을 키우던 곳, 몇주전에는 예기치 못했던 환상적인 정사를 했던 그 장소였다.
지금 솔희는 제이의 아내 에벌린에게서 모진 구타를 당하고 실신해 있던 땅바닥은 바로 제이와 함께 등을 대고 누웠던 장소다.
에벌린은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으으으.........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말라붙은 눈물자국와 코피자국이 배어 있다.
솔희는 힘겹게 갈비뼈를 붙잡고 쉬워지지 않는 숨을 억지로 몰아쉬며 일어서는데 그녀의 머리맡에 있던 명함을 발견했다.
에벌린이 실수로 흘린 것일까, 아니면 일부로 놓아두고 간 것일까?
[Lucas Keller 카이론즈 법률그룹 오너겸 대표]
에벌린은 그녀의 친정아버지 법률회사 명함을 일부러 솔희의 머리맡에 두고 자리를 뜬 것이다.
그 명함은 솔희더러 소송을 하고 싶으면 해보라는 공갈이자 잘나가는 친정을 둔 에벌린의 자신감이었다.
솔희 앞의 에벌린은 마치 키가 5미터는 넘는 온 몸이 철갑과 칼날로 무장된 몸체와도 같이 느껴진다.
솔희는 병원에 하루 입원해서 밍겔주사를 맞고 치료를 받고 퇴원한뒤 삼일 내내 집에서 조명을 어둡게 하고 식음을 전폐하고 지냈다.
어느 정도 상처가 아물자 솔희는 벌떡 일어나 냉장고에서 쉰내나는 반찬을 꺼내 햇반을 데워 먹었다.
뭐라고 해야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컴퓨터를 켜고 제이의 회사에 접속을 하는데 오늘이 제이의 회사 창립기념일 파티가 열리는 날이라는 공지가 떠 있었다.
파티장소는 외곽에 위치한 제이의 집으로 5천 스퀘어피트(약 140평)의 초대형 단독주택이었고 파티손님을 60명이상 충분히 수용가능한 곳이었다.
이들이 결혼하고 두달뒤 파티가 열렸을때 솔희도 초대받아서 간적이 있었다.
처음엔 제이와 에벌린 단둘이 살고 그들이 나중에 아이 열명 이상을 낳을 것도 아닌데 집이 왜 이리 클 필요가 있을까라는 부자걱정을 잠시 했지만 솔희의 느낌은 오산에 가까왔다.
그곳에는 방음과 냉난방 장치가 완비된 앙상블 연습실 두개와 개인연습실 세개, 녹음실과 소박하게나마 콘서트장으로 사용될 공간까지 확보되어 있었다.
또 이런 행사 때의 파티를 주최하는 손님 접대의 장소도 쓸 계획이며, 음악에 소질있는 꿈나무 청소년들을 발굴해서 이곳에서 연습 훈련을 시킬 계획이라고 했다.
즉 그 대형주택은 그저 신혼부부의 돈질이 아니라 제이의 음악사업의 야심을 실행시키는 장소였던 것이다.
공지에는 이번 파티가 가정집에서 열리기에 인원이 제한되어 제이의 절친들과 직원가족들, 제이의 회사와 협업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에게 초대장이 우편으로 발부될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솔희에겐 어떤 연락도 언질도 없었다.
때는 저녁 7시. 아마도 한참 파티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을 것이었다.
홈페이지의 동영상 섹션에 들어가보니 누군가가 파티상황을 스트리밍으로 찍는 것이 올라와 있었다.
파티에 인원 제한이 있다고 하더니 보스톤 음악계의 웬만한 중견급 인사들, 촉망받는 신인들은 다 초대받아서 놀고 있었고 족히 100명은 가까워 보였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올림머리 미용을 받고 메이크업조차 외부에서 받은 듯이 보이는 에벌린은 시종일관 웃는 모습과 쾌활하면서도 정중한 태도로 손님들을 접대하고 있었고 천연덕스러울 정도의 행복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제이와 에벌린은 손님들 앞에서 수시로 길고 짧은 키스신을 벌여 그들의 부부애를 과시하고 있다.
인정하긴 정말 싫었지만 화면 속의 에벌린은 미스 아메리카를 연상할 정도로 아름다왔고 활기차고 명랑한 액션 속에서도 제이에 대한 지고지순한 순종심이 그대로 표현되고 있었다.
컴퓨터의 칼렌더를 작동시켜 보니 에이젼씨와의 계약만료는 두달 앞으로 다가와 있었고, 두달 후면 자동으로 계약이 끝난다.
그리고 다른 어떤 에이젼씨에서도 입질조차 없었고, 그나마 보험으로 생각했던 제이의 업체로는 들어갈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려졌다.
랩탑 컴퓨터를 끈 솔희는 쇼파에 올라가 다리를 접어올리고 쪼그려 앉은채 고개를 푹 파묻고 한참을 움직이지 않고 있었고 심연을 알수 없는 깊은 우울감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아무도, 아무도 내 곁에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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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첫댓 고맙습니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감사해요. 갈등내용이 많아서인지 조횟수가 높네요.
감사합니다
저두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