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래아 지방에서 공생애를 시작한 예수는 본격적인 활동을 하십니다. 예수의 일행이라고 하는 것을 보니 예수께서는 사람을 모아서 그 일을 시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을 시작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함께 일할 사람을 찾는 일입니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도 있고, 결국 일의 성패는 누구를 택하였느냐에 5할이 걸려 있습니다. ‘새벽의 7인’이라는 영화. ‘돌아오지 않는 해병’ ‘외인구단’이라는 만화도 그렇고, 큰일을 도모하는데 있어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사람을 모으는 일입니다. 그 이야기의 반입니다. 그리고 사람을 찾고 모으는 일은 그 일의 성패를 좌우합니다. 그래서 지난 주 예수님께서는 시몬, 안드레아, 요한, 야고보 등 어부 네 사람을 부르시지 않았습니까. 지금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복음을 전파하며 갈릴리 일대를 누비고 다니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일행이 처음 간 곳이 가파르나움이라고 했는데, 이 동네는 갈릴리호수 서북단 자리 잡고 있는 교통의 요지입니다. 예수님은 그 일대를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했음이 분명합니다. 사통팔달하는 곳에 있어야 여기저기 다닐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수의 갈릴리 전도는 가파르나움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일행은 안식일이 되어서 근처 회당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요한의 회개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었지만, 어차피 유대교인입니다. 요한의 회개운동으로 시작한 예수운동도 그 뿌리는 분명히 유대교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의 제자들은 모두 요한의 제자들로부터 옵니다. 예수님도 마태오복음 5장 17절에서 말씀하시길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더라도 분명히 예수운동의 뿌리는 누가 뭐래도 유대교입니다. 그래서 율법대로 예수 일행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회당을 찾아온 것입니다.
회당은 성전과는 다릅니다. 회당의 원어는 ‘수나고게’로 회중, 또는 집회라는 뜻입니다. 유대교의 회당 제도는 바빌론 포로생활 중에 함께 모여서 성경을 읽고 기도를 올리던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예수가 활동하던 1세기 팔레스틴에서 회당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아이들 교육하는 일입니다. 당시 팔레스틴 유대 지역에서는 10여 가구 당 1개의 회당이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회당은 우리의 과거 서당과 같습니다. 그러다가 예루살렘 성전이 70년 로마군에 의해 파괴된 후부터는 예배가 더 중요한 요소가 되어서, 이곳에서 기도와 축복, 성경봉독, 설교와 교훈 등이 행해졌습니다.
하여간 회당은 지성소가 있고 제사를 드리는 성전과는 달리 평신도 기관입니다. 회당에는 이를 담당하는 제사장이나 종교지도자나 교사가 따로 없었습니다. 회당장이라고 해서 그 회당을 청소하고 관리하는 사람이 한 명 있을 뿐인데, 그는 안식일을 알리는 나팔을 부는 일과, 그날 들어온 헌금을 극빈자들에게 하루 두 끼씩 나누어주는 일과, 안식일 날 성경 두루마기를 회당 서고에서 꺼내오는 일이 전부였습니다. 안식일에 이 회당에 사람들이 모이면 회당장이 적당한 사람을 불러 성경을 읽고 강론하도록 했습니다. 당시에는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이런 회당에서 전도를 시작하기에는 정말 안성맞춤이었을 것입니다.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예수를 환영했습니다. 정말 새로운 가르침이었고, 힘이 있었고, 당시 일상생활의 비유로 말씀하시니 알기 쉬웠고, 그 뜻하는 바가 율법의 준수를 강요하면서, 하느님을 경외하라(두려워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자유롭게 평화롭게 당당하게 살도록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말씀하시니 얼마나 유쾌하고 통쾌했겠습니까.
생각해보십시오. 유대인들에게 가장 신성한 것은 하느님이 모세에게 직접 주었다는 율법(십계명과 모세오경)입니다. 이것은 절대 신성을 가지고 있고, 절대 구속력을 갖고 있는 그들 신앙과 생활의 최고 법칙이고, 생활지도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다 포함하고 있는 전부이자 기준이었습니다. 생활의 준거입니다. 그래서 이를 연구하고 발전시키는 전문가집단이 생겼는데, 그들이 바로 서기관이라고 불리는 율법학자들입니다. 그들 중에서도 권위 있는 자를 랍비라고 해서 이들은 특별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세 가지 책임을 갖고 있는데, 첫째 율법의 대원칙에 따라 일상생활의 사소한 것까지 규정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법칙과 규율을 만드는 일입니다. 그것은 끝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도덕적 대원칙으로 시작한 유대사회는 결국 무수한 규율과 법규만이 있는 율법주의로 끝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둘째, 이렇게 만든 규율과 법칙에 대해서 일반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일입니다. 이는 불문법이니 성문법보다 더 구속력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대대로 이 규율과 법칙들을 암송하면서 자기 식대로 가르쳤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종교가 율법학자들의 손에 의해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종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셋째, 율법학자들은 매사에 판단을 내려야 했습니다. 심판관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러니 그 법을 지키기 위해서, 벌을 주기 위해 또 다른 법을 만들어야 하는 악순환입니다.
이런 율법학자들이 가르치는 내용은 규율과 법칙과 그것을 어겼을 때의 심판과 벌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의견은 없고, 독자적인 판단은 없고, 과거의 권위(스승에게서 배운 것,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를 인용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율법학자들과 같은 직업적 훈련을 받지 않은 평신도 교사였습니다. 그러니 예수는 직접적인 성령의 영감을 받은 인격적 자신의 고유한 권위를 가지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7장 15절을 보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가리켜 말하기를 “저 사람은 배우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저렇듯 아는 것이 많을까?” 하고 기이하게 여겼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하느님의 목소리로 최후의 진리를 말했으니 다른 권위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율법학자들의 의존성과 예수님의 독립성은 너무 비교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거기에서 청신함을 느꼈고, 통쾌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님의 권위는 대대로 내려오는 전승에서 온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부터 오는 하느님의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신앙으로, 개인적 경험으로, 확실한 사명감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과 교훈은 새로웠고, 능력으로 넘쳤기에 청중들은 열광했습니다. 그런데 모두 열광하고 좋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에도, 하느님의 것에도 반드시 반대는 있는 법입니다.
더러운 악령 들린 한 사람이 예수께 왜 우리를 간섭하고 없애려고 하느냐고 따집니다. 여기에는 역사적 해석도 필요하고, 종교적 해석도 필요한 부분입니다. 우선 역사적 해석으로 보자면, 이런 악령, 귀신현상은 2천년 전 팔레스틴 지역에서나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유대인의 귀신사상은 구약만 보더라도 얼마든지 많이 나옵니다. 또 이후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귀신 들린 자를 고쳤다는 이야기도 많이 있습니다. 이는 당시 팔레스틴의 불안한 생활조건은 많은 사람들에게 정신적 기능에 상해를 입혔을 것이라고 해석하면 될 것입니다. 병의 기인은 개인적인 기질에서 올 수 있지만, 사회적인 기인도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특히 이러한 정신적 질환은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지금으로 얘기한다면, 경제적 압박, 일등주의, 성공에 대한 부담, 쾌락일변도의 극도의 상업주의 등이 바로 정신질환의 기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사회의 극심한 생활고, 율법(종교적)의 억압, 로마의 탄압 등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두 번째, 종교적 해석으로 보자면, 당시의 랍비들은 대개 모든 병의 원인을 죄의 결과로 받는 형벌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더러운 악령은 헬라어 ‘미지킨’을 번역한 것인데, 이는 ‘해롭게 하는 것들’이라는 뜻입니다. 신과 인간 사이에 끼어서 그 관계를 해롭게 하는 것이 ‘미지킨’ 악령, 곧 귀신들린 자입니다. 이는 병이 아니라 그가 지은 죄의 형벌로 ‘미지킨’이 들어온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이 병을 고치고 귀신을 내쫓았다는 것은 그의 죄를 용서해주고, 그 죄로부터 구원해냈다는 것이 초대교회 때부터의 종교적 해석입니다.
해석이야 어떻게 하든지 간에 예수님이 악령 들린 자를 온전케 했다는 것이 관건입니다. 당시 그 사건은 그 때에 있었던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다반사로 벌어지고 있는 사건으로 봐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도 얼마나 많은 귀신들이 출몰하는 세상입니까. 지금도 ‘하느님과 나 사이에 끼어서 해롭게 하는 것들’, 미지킨이 얼마나 많습니까. 공포, 걱정, 불안, 병고, 시기심, 질투, 미움, 분노 이런 것들이 하느님과 나 사이에 끼어서 하느님을 가려버리지 않습니까. 이런 것들 속에서 허덕이느라 하느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나 자신을 자꾸 잊어버리고 뒷전으로 밀리는 것이 현실 아닙니까. 예수님은 하느님의 능력과 신앙으로 바로 이런 부정적인 요소들로부터, 그 지배로부터 우리들을 해방시키려고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고난에서 허덕이는 우리들의 영혼을 회복시키고, 그 정신을 새롭게 함으로써 우리의 몸도 건강하게 해주십니다. 그는 오늘도 우리의 정신을 바르게 해주시고, 또 하느님의 능력으로 우리의 괴로운 마음과 병든 몸에 희망과 용기를 주시고, 사랑으로 시기와 증오와 분노를 이기는 그런 경험을 하게끔 해주십니다. 그러나 악한 세력은 도처에서 반발하기 마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악령 들린 자가 대드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정치다’ ‘이것이 경제다’ ‘이게 현실이다’ 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합니다. 세상의 악은 ‘내가 악이다’고 말하면서 나타나지 않습니다. 얼마나 포장을 잘 하는지 누구도 넘어갈 수밖에 없도록 만듭니다. 이것을 구분해내는 방법은 그 마지막을 보면 알 수 있는데, 마지막까지 가야 되니까 그 파국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해낸 것이 그 마지막을 상상해보는 것입니다. 그 끝을 예상해보는 것입니다. 그동안의 경험과 하느님이 주신 이성으로 예상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성공회적입니까. 이것을 기도라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 틀리는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 맞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진정한 사랑이나 우의나 호의가 아닌 사업상의 술자리입니다. 처음에는 좋습니다. 평상시에는 가보기 힘든 대부분 좋은 장소에서 시작합니다. 날씨 얘기, 정치 얘기, 연예가 소식 등을 안주 삼아 품위 있게 시작합니다. 집에서라면 1년 내내 아껴 마시는 고급 양주가 금세 동나기 시작합니다. 목에 있던 넥타이가 마빡으로 올라옵니다. 허리에 있던 혁대가 마이크로 둔갑합니다. 평상시 구경 못하던 100만원짜리 수표가 분위기 띄우는 소품이 됩니다. 이쯤 되면 부정과 비리가 이 세상을 서로 돕고 사는 선으로 둔갑합니다. 아침 되면 후회하죠.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고, 받은 돈 돌려줄 수는 있지만, 먹은 술 토하면 그건 오물입니다. 그러니 아예 그런 자리는 피해야 합니다. 이런 끝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예를 들어볼까요? 분명히 뭔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이 부부관계이든, 사업상 관계이든 흔히 우리가 겪는 일입니다.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왔고, 너무 깊이 발을 담갔고, 사과하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의 명분을 쌓고, 핑계를 만들고, 현실과 타협합니다. 그러다보면 자신의 과오는 덮어질 것 같고, 잊어질 것 같습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종국에는 화만 키우고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설사 무사하게 그냥 지나간다 해도, 자신의 마지막 날 ‘그런 자신이 얼마나 미울까요.’ 그게 심판 아닙니까.
이런 악의 세력들에 대해서 예수님은 ‘입 다물고 나가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당당합니까. 과연 인간이 나와 얽히고설킨 이 세상적 악의 근원에 대해서 이렇게 당당하게 ‘입 다물고 나가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인류의 역사상 예수를 제외하곤 아무도 없었습니다. 요한1서 3장 8절을 보면, “언제나 죄를 짓는 자는 악마에게 속해 있습니다. 사실 죄는 처음부터 악마의 짓입니다. 악마가 저질러놓은 일을 파멸시키려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 나타나셨던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악마를 불러내서 쫓아내는 예수의 호통에 사람들은 ‘권위 있는 새 교훈이다.’라고 놀랍니다. 예수님의 이 새로운 교훈은 고리타분한 율법학자들의 교훈과는 비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새롭다는 말은 질적인 새로움을 나타내는 말로서 헬라어 ‘카이네’를 번역한 것인데, 일반적으로 쓰이는 ‘네오스’, 시간적인 ‘새로움’과는 전혀 다른 창조적 새로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이렇듯 전적으로 이질적인, 여태까지 경험해보지 못했던 창조적인 ‘새로운 교훈’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새로운 교훈은 삽시간에 온 갈릴래아 지방에 퍼졌습니다. 거기에 대한 반응은 두 가지였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은 곧 반항했습니다. ‘새 것’ 그것이 어떤 축복을 가져오건 옛 전승에 어그러지는 것은 반대입니다. 또 내 이익이나 내 기반을 흔드는 것도 반대입니다. 그래서 현상 유지파는 항상 새 것에 질색합니다. 반대로, 마음이 열려 있는 사람들은 ‘그것이 귀에 젖은 소리이냐, 아니냐.’보다는 실생활에 어떤 영향을 끼치느냐로 가부를 결정합니다. 내 이익이나 내 기반이 좀 흔들리더라도 그것이 하느님의 사랑을 널리 펼치는 일이라면 그렇게 합니다. 또 반대로 아무리 경제적으로 이익이 남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으로 가슴에 못이 박히는 사람이 있다면, 또는 그것이 사람이 아니라 말 못하는 생물이라 할지라도 그 일을 포기하는 것이 예수님의 새 교훈을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고래로 예수님의 새 교훈은 언제나 사람들을 두 그룹으로 갈라놓습니다. 예수님도 마태오복음 10장 34절과 루가복음 12장 51절에서 말씀하셨듯이,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로 인해 이 세상이 분열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 세상을 항상 둘로 갈라놓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는 어느 편이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얼마나 내 일을 잘 했느냐, 못 했느냐를 묻는 것이 아니라, 네가 진정 내 편이냐, 아니냐를 묻고 계십니다. ‘네가 진정 나를 믿느냐? 네가 진정 내 제자가 되기를 원하느냐? 그럼, 그 쪽에서 얼쩡거리지 말고 나를 따라와서 내 편에 서거라.’
항상 예수님 편에 서시기 바랍니다. 내가 서있는 곳에서 ‘주님, 내 편에 오시어서 저를 도와주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님 편에 서서, ‘주님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번 한 주도 예수님 편에 서셔서 당당하게 그 반대편을 향해서 ‘입 다물고 나가라’고 호통을 치는 유쾌, 통쾌한 한 주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