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정통 검도의 이단아라 불리며 당시 검도협회로부터 ‘검도’라는 호칭조차 사용하지 말 것을 요청받아야 했던 해동검도의 아버지 김정호(56) 대한해동검도협회 총재. 그가 말하는 도전과 성공, 그리고 수많은 역경과 위기에 굴하지 않고 해동검도를 창설하기까지. 대한민국 무예 대가의 굴곡 많았던 인생사를 들어봤다.
지난 1961년 초등학교의 첫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 아버지를 따라 관악산 천인암에 들어갔다. 이곳에서 만난 장백산 은사님은 내게 권법을 권했다. 호기심에 그러겠노라 답했다. 아마도 할아버지와의 인연으로 나를 가르쳤던 것이 아닌가 싶다. 권법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매일 매일 강해지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1년 뒤, 은사님은 내게 검을 잡아보라고 명했다. 처음으로 검을 잡는 순간, 마치 천하를 얻은 기분이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내가 갈 길은 바로 이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운명임을 직감했다. 7년 뒤 은사님이 자취를 감출 때까지 집중훈련은 방학기간마다 계속됐다.
무술을 알고부터 성격은 오히려 내성적으로 바뀌었다. 나는 마땅히 내놓을 것이 없는 데 반해, 세상에는 숨은 내공 고수들이 많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다. 겸손함과 함께 상대를 모르는 것에 대한 일종의 두려움이 생겼다. 주변에서는 과묵하다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되자, 더욱 내성적인 성격이 됐다. 이즈음이성친구가 있으면 좋겠다고 홀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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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졸업 후 가업을 잇겠다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충남 예산으로 이사했다. 얼마 뒤, 예산 중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이곳에는 폭력서클에 가입한 중학생 동기와 선배들이 있었다. 이들은 가방에 자전거 체인이나 벽돌 등을 넣고 다니며 후배나 친구들에게 힘자랑을 하기 일쑤였다. 혈기가 넘치는 친구들이었다.
어느 날, 이들 중 한명과 마찰이 일었다. 자신들을 보고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두고 보자는 말과 함께 사라진 이들은, 그 날 4교시 수업이 끝남과 동시에 뒤에서 기습을 감행했다. 순식간에 일어날 일이라 손을 쓰기 힘들었다. 총 5명이었다.
난생 처음 주먹과 발길질, 걸상으로 흠씩 두들겨 맞았다. 아팠지만 비명 하나 지르지 않았다. 한심하고 비겁한 행동에 측은한 마음까지 일었다. 강해질수록 더욱 겸손해져야 되겠다고 다짐했다.
광산사업은 밑 빠진 독과 같았다. 상당한 금액이 투입됐지만 전반적인 광산사업의 몰락에는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1969년 겨울, 아버지는 광산사업을 정리하고 서울 신단동에 자리를 잡았다. 당시 나는 성적이 좋지 않았던 터라 경쟁률이 낮은 서라벌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이때 마침 신당동에는 심검도 도장이 문을 열고 있었다. 부모님을 설득해 3년간 심검도를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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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함께 심검도를 배운 동문의 요청에 따라 사범생활을 시작했다. 가르치는 것이 적성에 맞았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군 장교 한명이 나를 찾아와 미군들에게 심검도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다. 군대 영장이 나올 때까지 미 2사단 군인들을 가르쳤다. 수개월 뒤, 육군 현역으로 입대한 나는 화천 철책선 근처에서 근무했다. 긴장의 나날이었지만, 시간은 남아돌았다. 군대의 불합리에 맞서다 몇 번이나 두들겨 맞고 영창까지 갈 뻔했다. 제대 후 진로를 고심하던 중, 스페인에 진출한 예산중학교 선배 김영구 사범이 떠올랐다. 당시만 해도, 해외에 나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초청장을 보내달라고 편지를 보냈다.
얼마 뒤 초청장이 도착했다. 침술을 배워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편지와 함께였다. 스페인은 침술이나 지압을 기술로 인정했다. 학원 수료증만 있으면 침술학원을 열 수 있었다. 선배의 조언에 따라 팔자에도 없던 침술과 뼈 교정, 지압을 2년간 배웠다. 그리고 1982년 2월, 마침내 스페인으로 출발했다.
<다음호에 계속>
무예신문 (http://mooye.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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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의 도복을 입은 인물이
탤런트 나모씨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