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의 이름으로 촛불에게 묻노니 김승희
80년대의 이름으로 촛불에게 묻노니
촛불은 소승불교인가?
아니면 대승적인 것인가?
나 어느 조용한 시간에
그대 바라보며 물어 보고 싶었네.
촛불 아래 고요히 머리 숙이고
환한 빛 아우라처럼 받으며
글씨 숨쉬며 쓰고 있는
나(민중)에게
촛불은 대승불교처럼
높은 데서부터 낮은 곳에 이르기까지
나를 굽어보며
은은히 그 빛
긍휼히 나누어주느니
그렇다면 촛불은
대승적인 것이기만 해야 하나.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소리없이 물으면서 온몸에 울음 심지
하나 뜨겁게 박고(허무의 척추로)
화려한 아우라 불꽃놀이
촛불처럼 취해서
홀로 타고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되나.
달걀 속의 생(生), 문학사상사, 1989
객석에 앉은 여자 김승희
객석에 앉은 여자
그녀는 늘 어딘가가 아프다네.
이런 데가 저런 데가
늘 어느 곳인가가.
아프기 때문에
삶을 열렬히 살 수가 없노라고
그녀는 늘상 자신에게 중얼거리고 있지.
지연된 꿈, 지연된 사랑
유보된 인생
이 모든 것은 아프다는 이름으로 용서되고
그녀는 아픔의 최면술을
항상 자기에게 걸고 있네.
난 아파,
난 아프기 때문에
난 너무도 아파서
그러나 그녀는 아마도 병을 기르고
있는 것만 같애.
삶을 피하기 위해서
삶을 피하는 자신을 용서해주기 위해서
살지 못했던 삶에 대한 하나의 변명을
마련하기 위해서
꿈의 상실에 대한 알리바이를 주장하기 위해서!
그녀는 늘 어딘가가 아프다네.
이런 데가 저런 데가
늘 그저 그런 어떤 곳이.
달걀 속의 생(生), 문학사상사, 1989
검은 오선지 김승희
검은 오선지
인광(燐光)의 부호들이 찍히어 있습니다……
베토벤
모짜르트
바하보다도 더 아름다운 음표들이
내막을 알 길 없는 밤하늘의
흉곽 위에
형광처럼 반짝이며 날아다닙니다……
우리는 악보를 알지 못합니다
단지 음악을 들을 뿐
누구도 악보를 보지 못합니다
살아 있다는 것이 무서워집니다
희랍극의 배우들처럼
저항도 해보고
수수께끼와 맞서보기도 하면서
슬픔 혹은 원한으로
인생을 배워나가야 합니다
철도길에 나와앉아 생각해봅니다……
근심처럼 절실하게
사랑하는 사람들을,
인연의 십자가에 못박혀 가면서도
내 너를 알지 못한다고
말할 순 없습니다……
인광(燐光)의 부호들이 긴 선을 그으며
흘러 떨어집니다……
누군가 지금
죽고 있는 모양입니다
근조(謹弔) ― 등불이
돌아오는 나의 길을 밝혀 줍니다……
그리하여 짧은 우리의 사랑은
절망 속에 더욱 결속됩니다
왼손을 위한 협주곡, 문학사상사, 1983
공포영화 김승희
공포영화
나는 언제나 쫓기고 있지,
공포영화 속의 주인공 배우처럼
나는 끝까지 쫓기고 있지,
막연한 액운의 별 아래
영문 모르고 살다가
어느날 갑자기 쫓기기 시작한다는
진부한 줄거리로
지치지도 않고 계속 돌아가는
오늘도, 잠 속의 낡은 영사기……
이제 자막에서 비는 내리고
비를 맞으며
하염없이 쫓겨 가는 희미한 뒷모습……
무슨 범죄를 저질렀을까?
무성의 자막 위에
암호처럼 쏟아지는 희미한 외국어들,
왜 범인이 되었을까?
의문마저도 잊어버린 정박의 꽃처럼
온통 사위엔 쫓겨가는 움직임뿐……
바라건대 악몽은 악몽일지라도
한평생 깨지 않는 악몽이라면
그건 좋은 거야,
그건 오 케이야 ―
오, 그런데, 나는 참 찬란한 애정영화가
한편 보고 싶다,
그리고 무섭도록 사치스런 예술영화도
한편……
왼손을 위한 협주곡, 문학사상사, 1983
그림 속의 물 김승희
그림 속의 물
사랑스런 프랑다스의 소년과 함께
벨지움의 들판에서
나는 예술의 말[馬]을 타고
알 수 없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림은 손을 들어
내가 그린 그림의 얼굴을
찢고 또 찢고
울고 있었고.
나는 당황한 현대의 이마를 바로 잡으며
캔버스에
물빛 물감을 칠하고, 칠하고.
나의 의학상식으로서는
그림은 아름답기만 하면 되었다.
그림은 거칠어서도 안 되고
또 주제넘게 말을 해서도 안 되었다.
소년은 앞머리를 날리며
귀엽게, 귀엽게
나무피리를 깎고
그의 귀는 바람에 날리는
은(銀) 잎삭.
그는 내가 그리는 그림을 쳐다보며
하늘의 물감이 부족하다고,
화폭 아래에는
반드시 강(江)이 흘러야 하고
또 꽃을 길러야 한다고 노래했다.
그는 나를 탓하지는 않았다.
현대의 고장난 수신기와 목마름.
그것이 어찌 내 죄(罪)일 것인가.
그러나 그것은 내 죄(罪)라고
소년은 조용히
칸나를 내밀며 말했다.
칸나 위에 사과가 돋고
사과의 튼튼한 과육(果肉)이
웬일인지 힘없이
툭, 하고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소년은 나에게 강(江)을 그려 달라고 부탁했다.
강(江)은 깊이깊이 흘러가
떨어진 사과를 붙이고
싹트고
꽃피게 하였다.
그리고 그림엔 노래가 돋아나고
울려 퍼져
그것은 벨지움을 넘어
멀리 멀리 아시아로까지 가는 게 보였다.
소년은 강(江)을 불러
내 그림에 다시 들어가라고 말했다.
화폭 아래엔 강(江)이 흐르고
금세 금세
환한 이마의 꽃들이 웃으며 일어났다.
피어난 몇 송이 꽃대를 꺾어
나는 잃어버린 내 친구에게로 간다.
그리고 강(江)이 되어
스며들어
친구가 그리는 그림
그곳을 꽃피우는 물이 되려고 한다.
물이 되어 친구의 꽃을 꽃피우고
그리고 우리의 죽은 그림들을 꽃피우는
넓고 따스한 바다가 되려고 한다.
태양미사, 고려원, 1979
길이 없는 길 위에서 김승희
길이 없는 길 위에서
역촌동→상도동 구간을 오늘도 내일도 달리는
저 시내버스는
어쩌면 나보다 더 행복한 것인지도 모른다
승객들이 오르고 나면
재빨리 문이 닫히고
시간이 없다고 갈 길이 멀다고
오늘도 내일도
의심 없이 그 길을 달려가는
저 노선버스는
나보다 더 고뇌가 없는 씩씩한
길을 가진 것이라 해도 좋다
매일매일
떠나야 할 분명한 시점과 닿아야 할 분명한
종점을 가진 것이
부럽다 해도
난 벌써 서른 다섯 살.
아스팔트 위를 먼지와 함께 불어 가는
가을 바람
처럼
그 바람에 흩어져 날아가는
어제 저녁의 구겨진 신문지 조각
처럼
나에겐 떠나야 할 곳도 닿아야 할 곳도
언제나처럼 분명치가 않다는 느낌이다
행복한 길을 가지기 위하여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할까.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행복한 길을 가져야 할까.
나는 아직도 아마 모른다.
다만 아침 저녁으로 종점에서 닿고
떠나는
행복한 시내버스들을 바라다보며
다만 나에겐 길이 없다는 절망과
길을 원하는 갈증이
우울증같이 멀미같이
환상의 외침이 되어 다가든다는 것뿐이다
달걀 속의 생(生), 문학사상사, 1989
나는 밤마다 거울 속에 물을 준다 김승희
나는 밤마다 거울 속에 물을 준다
나는 밤마다 거울 속에 물을 준다,
거울 속에, 아니 아니,
화분 속에
나는 밤마다 화분 속에 나를 심고
거울 속에 물을 준다,
내가 죽어 있을 동안이라도
더욱 더욱 자라야 한다고,
환상이란 상심이지만
내가 잠들어 있을 동안이라도
몰래 몰래 자라야 한다고
나는 밤마다
화분 속에 나를 묻고
거울 속에 물을 준다,
도괴된 복도 속에 통조림 깡통이 하나 파묻혀 있다, 돌더미를 헤치고 통조림 깡통을 들여다보면 인스턴트 평화라고 뚜껑에 대문자로 적히어 있다, 통조림 깡통 속에 장조림된 나, 통조림 깡통 속에 장조림된 너, 평화는 불사신과 같이 방부처리되어 있어서 당신이 통조림 깡통을 땄을 때는 화두처럼 목 없는 닭 한 마리 평화롭게 온 세상 그지없이 평화롭게 누워 있었으니
나는 밤마다 거울 속에 물을 준다,
거울 속에, 아니 아니,
화분 속에
나는 밤마다 화분 속에 나를 심고
거울 속에 물을 준다,
환상이란 천벌 같은 거지만
화분 속에는 사막식물이라는
선인장 화초가 심겨져 있고
화초인지 아닌지
그 선인장은 백년 동안에 한 번만
꽃피울 수 있다는 약속이 있다,
선인장 몸 위엔
갈퀴쇠 같은 물음표만 녹색으로 가시 돋쳐
왜? 왜? 왜? 라고
눈동자를 찌를 듯이 거울면으로
육박한다,
난수표 같은 절망은 자금회전이 안 됩니다, 이곳에선 희망만이 현금유통되고 있어요, 희망을 환불하려고 거울 창구 앞으로 다가서면 희망이란 얼마나 하잘것없는 잔돈푼인지, 거대한 절망의 허물 수 없는 어음에 비한다면 희망이란 얼마나 소소한 푼돈인지, 나는 밤마다 화분 속에 물을 준다, 이 생에선 그 꽃을 볼 수 없다 하여도, 나는 밤마다 거울 속에 물을 주고, 절망에 죽음을 보탠 그 몸짓으로밖에 나는 그 선인장 꽃을 가꿀 줄을 모르니
미완성을 위한 연가, 나남, 1987
나의 마차엔 고갱의 푸른 말 김승희
나의 마차(馬車)엔 고갱의 푸른 말[馬]을
아이들, 맨발의 아이들이 튼튼한 팔뚝으로
흰 도화지 가득히 그림을 그리고 있다.
나는 저 나이의 아이들은 무엇을 그리나
보고 싶어
분홍빛 모래 들판을 파란 풀을 밟으며
다가가 보았다.
아이들은 태양을 그리고 있었다.
황금빛 태양을 화판 가득히 넘쳐나게 하고
그리고 파란 크레용으로 그린
저 푸른 들의 들판.
그곳에 말[馬]들은 뛰놀고
바닷물은 금빛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아이들은 푸르고 생생(生生)한 말들을 많이 그렸다.
크레용이 타오르는 야생의 금빛 말.
흰색 말. 검은 말.
나는 이 분홍 말[馬]을 가질래.
금빛 이마를 한 사내아이가 크레용을
좀더 칠하면서 말했다.
그럼 나는 이 흰색 말.
가래머리를 땋은 계집아이가
꼭 꽃처럼 웃으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아저씨는 무슨 말을 가질래요?
여기 우리의 말 나라에서?
정말 나는 무슨 말을 가지면 좋을까.
일상의 칸막이를 뛰어넘기 위하여
부서진 마차(馬車)를 날개 달기 위하여
내 생의 비본질을 살해하기 위하여
정말
나는 무슨 말을 가지면 좋을까.
아저씨는 여기에서 무슨 말을 가질래요.
도시에서 거리에서
찻집에서 책방에서
나는 때때로 그 아이의 태양이 넘치는 음성과
부딪친다.
내가 죽어 있을 때
내가 가장 죽어 있을 때
가령 나는 아이들의 말 나라로 가고 싶어서
해안을 걷는다.
해안 속에서 아이들은 죽고
도화지 속에서 태양만 빛나는 우리들의 일상.
나는 장갑을 벗고 모자를 벗고
그리고 나의 스틱을 버렸다.
타오르는 크레용을 들어
나는 나의 마차(馬車)를 그리고
포장이 없는 마차 뒤엔 무질서의 열병을
가득 그렸다.
나는 울고 있었다.
자꾸만 눈물이 흘렀다.
그때 탄색 모래 저편에서
머리칼을 날리며
한 사람의 청년이 나에게 다가왔다.
그는 나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푸른 크레용을 들어
거칠게 한 마리의 말을 나의 마차에 매었다.
푸르고 푸른 말.
나의 마차(馬車)는 강(江)과 강(江), 들과 들을 건너
하늘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모래가 빛나기 시작했다.
해안이 춤추었다.
아이들, 맨발의 아이들이 튼튼한 웃음으로
페이브먼트 가득히 말[馬]들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파란 크레용으로 그린
저 푸른 들의 들판
그곳에 말들은 뛰놀고
바닷물은 금빛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타오르며 있었다.
태양미사, 고려원, 1979
낙화암 벼랑 위의 태양의 바라의 춤 김승희
낙화암 벼랑 위의 태양의 바라의 춤
울고 있구나, 불아, 너는 왜 항상 벼랑 위에 서 있니? 말해봐, 촛불아, 바람은 부는데……
가장 푸른 자오선을 목에 걸고 여자들이 벼랑 위에 서 있다, 말해봐, 불아, 누가 나를 벼랑으로 부르는지…… 어둠이 가득 찬 내 척추의 흰 뼈에 누가 자꾸만 한 덩어리 촛불을 당기는지……
오늘, 여기에선, 가장 숨죽인 소리들이 들려온다, 상여소리 바라소리 피리소리 요령소리……오늘, 여기에서, 벼랑은 태양의 갈기를 달고…… 해는 하늘에도 있고 강물에도 있어서……천지의 맞닿음이여, 바라의 부딪침이여…… 햇덩어리 물덩어리 마음덩어리들이 부딪쳐…… 피톨 속에 피어나는 일만 덩이의 바라의 태양꽃들을 너는 보았느냐……목숨이여……핏속으로 부풀면서 터지는 희디흰 두견의 피여……
삶이 시작되는 곳에는 늘 언제나 벼랑이 있지, 눈먼 사랑, 치렁치렁 흘러가는 유황의 죽음의 물…… 말해 봐, 촛불아, 누가 저 태양의 바라를 흔드는지, 삶이 시작되는 곳에는 왜 늘 벼랑이 있고, 벼랑에서 추는 춤만이 왜 홀로 아름다움의 갈기를 가졌는가를……
왼손을 위한 협주곡, 문학사상사, 1983
난폭 김승희
난폭
운신할 기운조차 없다
꿈처럼 방이 무너져 내리고
선반 위의 살림살이들이 쓰러져
내 몸을 붙들고
아프게 때린다
죽을 힘을 다해
나는 돌아눕는다
허공에서 거울이 깨어지며
나의 모가지를 병마개처럼 따고
한 송이 조화(弔花)를 꽂고 있다.
순간 피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기 시작한다
나의 골에서 찬란한 단두대의
밧줄이 뻗어나와
나의 모가지를 향해 달려나간다
온몸이 찢기며
나는 웃는다
찬란한 미소가 뜨거운 찻물처럼
끼얹히는 것을 느끼며
나의 심장은, 그러나,
아무것도 원망하지 않는다
열파가 나의 두 눈을 감긴다
용암불에 성냥이 닿은 것처럼
나의 뼈 퉁소와 같은
나의 긴 뼈엔 향기로운 신이 가득하여
누에고치의 얇은 막처럼
가벼이 나의 피부가 터지는 것을
나는 알 수 있다
그렇게 죽어라
아니, 아니, 그렇게 삶을
맛보거라
삶이여―너― 아름다운 흉성이여
기꺼운 치욕이여―
왼손을 위한 협주곡, 문학사상사, 1983
넝마의 운율 김승희
넝마의 운율
벽을 보아도 이젠 목을 매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예전엔 벽 앞에 오래 앉아 있으면 어디에 못을 박고 목을 매달까 그런 생각을 했는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그런 류의 길을 가는 사람을 부러워한다. 그런 사람에겐 시간이 무척 따스하고 행복했을 것 같다. 어느 시간을 열어야 못자욱 없는 벽을 만날 수 있을까?
배추흰나비 한 마리가
엉겅퀴꽃 뒤에서
날아 간다
이 세상 어딘가에 행복이 있을 것만 같은
소식이다
가슴에 눈물을 많이 모은
알들만이
그런 엄청난 시위를 할 수 있다
헌 신문지 같은
지상의 누더기들을 슬고
저렇게 눈부신 인육(人肉)의 퇴원을 해보았으면!
세탁기 속에서
탈수된 빨래들을 정리하다가
양말과 손수건이 부둥켜안고 있는 것을
보면 죽고 싶다고 넌 나에게 말했지.
넌 그러니? 아, 어쩌면, 넌, 정말……
난, 글쎄, 난, 말이야,
그런 것을 보면
이 세상 어딘가에 아직 사랑이 남아 있는
것을 믿게 되고,
쓰레기가 쓰레기에게 친절하게 굴듯이
삶에게 마구 달려 들어
삐약삐약거리고 싶구나, 글쎄……
벽 위에 남은 희미한 못자욱들. 지워지지 않는다. 별똥무늬 달려와 박힌 누전의 뜸처럼. 그렇게 별들과 사랑을 나누었던 사람도 있구나. 못을 박으며 못을 박으며 그리움의 벼락에 구멍 숭숭 뚫린 넝마 한 장의 모습으로 별들의 수로를 이곳에 내려던 사람아. 그러니까 넌 지금껏 벽에 의해 살아온 것이다. 그러므로 넌 지금껏 별에 의해 살아온 것이다. 오 그렇지 않은가?
어떻게 밖으로 나갈까, 세계사, 1990
누가 나의 슬픔을 놀아주랴 김승희
누가 나의 슬픔을 놀아주랴
나는 병신입니다
우리는 병신입니다
이 슬픈 몸을 움직여
이 절뚝거리고 비비적대는
우스운 몸뚱아리를 움직여
한판 춤을 추다가
서리맞은 이 목숨이 허, 허, 웃을
진한 춤을 추다가 가야 합니다
어디까지 놀아야
어디까지 놀아야
우리는 가는 것인가
춤이란 뭐냐 하면
곱게 가다듬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오장육부가 움직여 줘야
징그럽게 이뻐지는 것입니다,
당신의 오장육부가 건드리는 대로
춤을 추시오,
팔자병신은 팔자병신대로
문둥병신은 문둥병신대로
육갑이 풀리는 대로 춤을 추시오,
뒤엉키는 살아 있음의
신명나는 곡선대로 ―
생즉원(生卽願)이요
생즉원(生卽怨)이니,
여기는 아쟁과 장고가 부르는
미친 살풀이판이요
히, 히 ―
미완성을 위한 연가, 나남, 1987
달걀 속의 생 1 김승희
달걀 속의 생(生) 1
우리는 꿈꾸지,
삶을 위하여
좀더 강해졌으면 하고,
보다 견고한 집을 짓고 싶고
더욱 안전한 껍질을 원하네,
마치 몰락이 없이
차갑게 버티고 있는
벽처럼
진짜로 강해질 수 있다면,
우리는 스스로 철교처럼
결코 폭파될 수 없는
어떤 희망을 구하지,
전혀 희망이 없이
그리고 또한 우린 알고 있어,
우주에 내버려진
하나의 달걀
과도 같이
그대와 나는
어둠 속에 둥둥 떠 있는
버림받은 허술한 알[卵]이라는 것을,
수문이 열리면
제목도 없이 무너져 내리는
저녁물결 속에 고요히 으깨지는
조그만 수포
그리도 꿈 같은 고통
하얀 달걀이 하나
뜨거운 물 속에서 펄펄 끓고 있네,
찐 달걀 속에선 어떤 부화의 깃도
돋아나질 않아,
무섭도록 고요한 침묵들의 비명,
(달걀 꾸러미 속에 얌전히 누워 있는
하얀 찐 계란들의 꽉 찬 평화)
무섭게 달궈진 프라이 팬 위에서
성녀처럼 와들와들 해체되는
스크럼블드 에그,
어떤 꿈도 그 고통을 구할 순 없지
우주에 둥둥 떠돌고 있는 독방
처럼
헐벗고, 외로운,
달걀 속에서
우린 한번 밖에 없는 자신의 삶을
꾸리고 있네,
뿌리가 없어 무엇보다도 뿌리가 없어 슬프지만
이름 없는 운동
뒤에
하얀 결말,
모든 달걀은 와삭와삭 깨어져
무참히 와해되고 말지만
그 안에 방이 있어
방이 하나 있어
내 얼굴을 닮은 조그만 양초 하나가
고요히 빛을 뿌리며 타오르고 있지,
눈물과 함께
입술연지로
환한 미소를 은은히 뿌리면서
달걀 속의 생(生), 문학사상사, 1989
달걀 속의 생 3 김승희
달걀 속의 생(生) 3
달걀 석 줄
삼십 개를 엊그제 사 와서
한 개만 남기고
다 먹어 치웠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래도 되는 것일까.
이럴 수가 있는 것일까.
모든 사랑은 벌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 사람도 있지만
유리창 하나 없는
이 봉사사랑.
가나다라 말문 하나 못 여는
이 벙어리 사랑
속에서
넌 또 마지막 하나 남은 달걀 껍질 속에 웅크려 앉아
무슨 난생설화를 꿈꾼다는 것이냐.
아니 무슨 난생신화를
기다린다는 것이냐.
난, 그렇게, 12월의 흐린 지평선 아래
웅크리고 앉아
병아리들 종종거리는 어느 봄날의
파란 미나리밭을,
꼬꼬댁 꼬꼬 ― 금빛 닭들이 홰를 치는
어느 태초의 푸른 새벽을
마치 금시조를 기다리듯
꿈꾸고 있거늘
그대, 푸른 접시 위에,
내일 아침
금빛 계란 후라이 하나가
담겼는가. 지붕 위로 푸득거리며 날아가는
황금빛 금시조 한 마리를 보았는가.
그러면 그대, 그때 꼭 한번 더,
나의 안부를 다시 물어주게.
달걀 속의 생(生), 문학사상사, 1989
달걀 속의 생 5 김승희
달걀 속의 생(生) 5
달걀을 보면
알 수 있지.
아, 저렇게 해방을 기다리는 사람도
있구나.
조그맣게 차갑게
두 눈을 감고
아, 어찌해,
저리도 못다한
벙어리 사랑을.
외치고 싶고
깨지고 싶어도
시간의 실금이 온몸에 강물처럼 퍼지기를
기다려. 배꼽 같은 씨눈이
노른자위를 먹어 치워
흰자위를 먹어 치워
아, 그 안에서 원무처럼 일어서는
열애 같은 혁명을 기다려.
달걀을 보면
눈물이 어리지.
아, 저렇게 미해방의 절벽 위에서
꿈꾸는 사람!
달걀 속의 생(生), 문학사상사, 1989
만파식적 김승희
만파식적(萬波息笛)
더불어 살면서도
아닌 것같이,
외따로 살면서도
더불음같이,
그렇게 사는 것이 가능할까?
간격을 지키면서
외롭지 않게,
외롭지 않으면서
방해받지 않고,
그렇게 사는 것이 아름답지 않은가?……
두 개의 대나무가 묶이어 있다
서로간에 기댐이 없기에
이음과 이음 사이엔
투명한 빈 자리가 생기지,
그 빈 자리에서만
불멸의 금빛 음악이 태어난다
그 음악이 없다면
결혼이란 악천후,
영원한 원생동물들처럼
서로 돌기를 뻗쳐
자기의 근심으로
서로 목을 조르는 것
더불어 살면서도
아닌 것같이
우리 사이엔 투명한 빈 자리가 놓이고
풍금의 내부처럼 그 사이로는
바람이 흐르고
별들이 나부껴,
그대여, 저 신비로운 대나무 피리의
전설을 들은 적이 있는가?……
외따로 살면서도
더불음같이
죽순처럼 광명한 아이는 자라고
악보를 모르는 오선지 위로는
자비처럼 서러운 음악이 흘러라……
왼손을 위한 협주곡, 문학사상사, 1983
무궁동 김승희
무궁동(無窮動)
4 나누기 3은
영원히 1.33333……
333……
이듯이,
영원히 세월이 흘러도
무궁한 세상이 바뀌어도
작게
그보다 고요하게 1.33333……
333……
이듯이,
끝날 수 없고
끝나지 않아서
잠시 잊어버리기도 하는
피아니시모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요술 글자처럼
영원히 누군가 오고 있고
영원히 누군가 가고 있는데
미안합니다만 불을 좀 빌려 주시겠어요?
불을
불을
허리를 구부리고
성냥 한 개피의 적선을 바라는
거지처럼
1.333333……으로
영원히 심령세계의 반딧불처럼
작게
그보다 정처없이
인도차이나의 검은 밤바다를
오늘도 어제도 보우트 피플로
떠돌고 있는 것은
어디선가 오고 있는 것은
어디론가 가고 있는 것은
보다 확실한 꿈 속에선
보석을 단 일각수(一角獸)가
우리의 금빛 상여를 느릿느릿 끌고 가고
4 나누기 3은
영원히 1.333333……
이라고
작은 개미는 더 조그만 개미알을 무궁히
낳고
나의 고통은 단추처럼 단단한
고통의 하얀 알들을
우주수(宇宙水)의 밑바닥에 딸라이자처럼
수북히
그보다 영겁으로 쌓아놓고 있는데……
이 불확실성의 시대에
단 하나 확실함으로
나보다 더 오래 살 것이 확실한,
4 나누기 3은
영원히 1.33333……(천년)……
333……(수만년)……
이라고……
미완성을 위한 연가, 나남, 1987
미완성을 위한 연가 김승희
미완성을 위한 연가
하나의 아름다움이 익어가기 위해서는
하나의 슬픔이
시작되어야 하리
하나의 슬픔이 시작되려는
저물 무렵 단애 위에 서서
이제 우리는 연옥보다 더 아름다운 것을
꿈꾸어서는 안 된다고
서로에게 깊이 말하고 있었네
하나의 손과 손이
어둠 속을 헤매어
서로 만나지 못하고 스치기만 할 때
그 외로운 손목이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무엇인지 알아?
하나의 밀알이 비로소 썩을 때
별들의 씨앗이
우주의 맥박 가득히 새처럼
깃을 쳐오르는 것을
그대는 알아?
하늘과 강물은 말없이 수천년을 두고
그렇게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네
쳐다보는 마음이 나무를 만들고
쳐다보는 마음이 별빛을 만들었네
우리는 몹시 빨리 더욱 빨리
재가 되고 싶은 마음뿐이었기에
어디에선가, 분명,
멈추지 않으면 안 되었네,
수갑을 찬 손목들끼리
성좌에 묶인 사람들끼리
하나의 아름다움이 익어가기 위해서는
하나의 그리움이 시작되어야 하리,
하나의 긴 그리움이 시작되려는
깊은 밤 단애 위에 서서
우리는 이제 연옥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필요치가 않다고
각자 제 어둠을 향하여 조용히 헤어지고 있었네……
미완성을 위한 연가, 나남, 1987
배꼽을 위한 연가 1 김승희
배꼽을 위한 연가 1
그대여, 당신이 누구든지간에, 당신의 배꼽을 보여준다면은, 나 그대를 사랑하겠습니다, 더럽게 뒤엉긴 자그만 동그람이 굽이굽이 꼬불쳐진 그대의 서러운 배꼽도 나의 배꼽과 똑같이 부끄러운 죄와 어리석은 욕망이 고불고불 서리서리 끼어 있을 테지요, 그대여, 어둠의 태 속에서 영문 모르고 튀어나와 정처없이 죄를 짓고 죽어가는 그대여, 그대여,
우리는 배꼽 위에서 평등하다
그것은 생일날의 흉터,
고아들의 패찰,
인광을 칠한 백골의 주황색 입술이
아삭아삭 제일 먼저 뜯어 먹는
온순한 육체의 이삭,
우리는 배꼽 위에서 너무나 평등하다
그대여, 당신이 누구든지간에, 당신의 배꼽을 버리지만 않았다면은, 나 그대를 열렬히 용서하겠습니다, 봄이 되어 메마른 나뭇가지에서 새싹이 트는 것을 바라보거나 푸드득 ― 새들이 날아 오르는 것을 볼 때마다 나는 습진처럼 나의 배꼽이 가려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이제 배꼽은 과거완료가 아니라 언제나 현재진행형으로 나의 삶 속에 움터 오르고, 어머니 ― 아, 어머니 ― 라고 불러보면 바닷가를 울면서 걸어가는 한 여인이 떠오릅니다, 그녀의 슬픔 그녀의 사랑 그녀의 절망을 따라 나의 배꼽은 또 하염없이 시원의 태 속으로 적셔 들어가고, 어머니 ― 자비와 저주의 비밀구좌이신 어머니 ― 나의 어머니시여……
왼손을 위한 협주곡, 문학사상사, 1983
사련 김승희
사련(邪戀)
낙화암에 갔지, 귀신들린
태양의 벼랑,
귀를 막아도 자꾸만
부르는 소리가
들렸어, 한계를 모르는
향수의 폭포처럼
오장육부에 갇힌 태양이
그러면 울부짖었지,
갑갑하다고,
아무래도 나는 몸 속에
짐승을 기르고 있는 것 같아
문득 머리를 풀르고
두려워지지
두려움은 오히려 헛된 것이어서
확 트인 벼랑 아래
녹음의 물결들은
너무나 찬연한 거야
반짝반짝 요령소리를 흔들면서
굴렁쇠놀이를 하자고 하지
태양의 굴렁쇠들은
그러면 나의 모가지를 칭칭 감아오지,
그리웁다고,
그리고 목을 조르기 시작해
미친 듯이 미친 듯이
살고 싶어질 때까지만,
나의 모가지에 시퍼렇게 박힌
손자욱을 보았니?
태양의 암시, 아니 한없이
현란하게만 보이는 어느 간통의
혐의 같은……
왼손을 위한 협주곡, 문학사상사, 1983
슬픈 적도 김승희
슬픈 적도(赤道)
운명이 나에게 불의 옷을 입혔을 때
나는 손쉽게 쓰러지고 말았지.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불의 병(病) 속에
나는 오래 서 있었네.
운명으로서의 기하학. 저 모퉁이를 돌아오지도 않고
불어왔던 바람.
그 시험 속에
나는 조각조각 심장을 내바쳤네.
촛불의 복습을 하기 위한
가장 슬픈 칸나꽃의 십자형(十字形) 하프를.
백 개(個)의 죽음 속에 도사린
저 백 개(個)의 탄생.
백 개(個)의 겨냥 속에 있는
저 백 개(個)의 눈물 사냥.
그리고도 그것의 또 영원한 복습.
기하학의 운명이 나에게 왔을 때
나는 모든 것을 주고 말았네.
화려한 사랑. 스펙트럼의 꿈.
안전한 통행증 옛 계보마저도.
그리고 나도 싸움을 걸었다.
치료법으로서의 전쟁, 촛불의 천국에로 이르를
그 영원한 피의 복습을.
나도 조각조각 불을 가지고서
태양경(鏡)을 만들었네.
나도 조각조각 심장을 가지고서
저 유명한 십자로(十字路)에 있어서의 운명.
오이디푸스와 함께 울지 않고 조용히
그를 비추면서 건너가려고 하네.
태양미사, 고려원, 1979
슬픔과 놀며 김승희
슬픔과 놀며
나는 조용히 골방 속에 앉아 있다,
한 사람만 수용된
우주의 고아원처럼
골방은 언제나 힘겹고 쓸쓸하고,
인생이란 오직
내 방문 밖에만 있는 듯
아무래도 조만간 옥사해 버릴 것만 같다.
나는 조용히 벽을 바라본다,
벽 위엔 오죽하면
못 하나 박혀 있지 않다,
내 호주머니 속엔 오죽하면
끈 하나 들어 있지 않다,
끈도 없고
못도 없다면
그렇군, 밀교신도처럼, 오직 나에겐
자가발전 밖에 남은 것이 없어
무릎을 꿇은 채로 앞으로 쓰러지면
부드러운 무슨 막이 나를 받아
안아 주는 것만 같다,
계란껍질 안에 고요히 잠들어 있는
노른자위처럼
누군가 나를 포태하고 있는 것만 같다,
누구에겐듯 어머니, 어머니, 부르면서
부드러운 양수막을
손길로 만져보면
모든 육체가 잿빛 눈동자로 되어 있다는
아아 그건 슬픔이라는
어머니,
슬픔이 나를 임신하고 있으니
나는 슬픔과 단둘이
오손도손 소꼽놀이를 시작한다,
슬픔에게 어머니, 어머니 부르면서
아가와 엄마가 병원놀이를 하듯이
침대에 엎드린 시늉으로 아프다고
울고 있으면
어머니는 하얀 붕대와 청진기를 가지고 와
의사시늉으로 도란도란 놀아 준다,
어디가 아픈가요? 어디가요?
그리고 의사선생님은 약을 준다,
마늘과 쑥을
백 일 동안만 복용하라고
나는 조용히 그렇게 견디고 있다,
나 혼자만 수용된
우주의 보육원처럼
골방은 언제나 무섭고 쓸쓸하지만
봉제공장의 여직공처럼
난 그렇게 숨어서
성불하고 싶다,
슬픔의 어머니가 날 임신하였으니
마늘과 쑥을 항용 먹고 있으니
미완성을 위한 연가, 나남, 1987
시간 김승희
시간(時間)&
어둠의 아이들과 햇빛의 아이들이
흑색 금색 창을 들고
사유의 들판에서 싸움을 시작한다.
그러나 나는 어느 것을 편들지는 않으리.
죽음과 생(生)을
모조리 나의 심장 속에 놓아 먹이리.
그러나 그때에는 달랐었다.
내가 아직 내 말[馬]의
고삐 쥔 손을 느끼지 않았을
그때에는,
더 이상 생각지 말아라.
지금은 빛나고 휘날리는 금(金)색의 깃발.
그러나 곧
정적이 와 버리는 것을.
태양미사, 고려원, 1979
시계풀의 편지 1 김승희
시계풀의 편지 1
푸른 것은 늘 아름답다.
멍은 푸르다.
그러므로 멍은 아름답다.
그러니까 멍든 것은 늘 아름답다.
달걀 속의 생(生), 문학사상사, 1989
시계풀의 편지 3 김승희
시계풀의 편지 3
세상에서 제일 큰 것은 하늘이라고
말한 사람은 누구일까.
그는 얼마나 철이 없었을까.
그는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어떤 사람에겐 하늘이 액자만 하다는 것을
액자보다 더 작은 하늘이
있다는 것을
그는 몰랐을까.
그는 정말 몰랐을까.
상처 안에 또 하나의 상처.
그 안에 골목 같은 상처. 그 안에
창살만한 상처.
그 아래 몽고반점만한 사랑.
하늘이 푸른 것은 아직도 꿈꾸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 사람은 누구일까.
그는 얼마나 철이 없었을까.
그는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어떤 하늘은 때때로 몽고반점처럼
푸르르고
죽고 싶도록 멍든 사람들이
멍든 빛깔로만
사랑을 칠하고 있는
살고 싶도록 푸르른 하늘.
하늘이 푸르른 것은
그런 멍든 사람들이
하늘을 등지고
푸른 언덕 위에 가슴을 대고
아아 가만가만
자신의 파아란 상처를 울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달걀 속의 생(生), 문학사상사, 1989
아프락사스 5 김승희
아프락사스 5
창세기의 현기증처럼
나, 언제나,
어지러웠어.
고운 줄무늬가 그려진
파자마 바람으로 잠든 채 누워 있는
산새알을 보았을 때
가슴이 찢어질 듯한 사랑으로
품 안에 꼭 안아주었지.
드라이아이스. 드라이아이스가
궤짝에 하나 가득 꽉 차 있어서
난 쉽게 움직일 수도 없었어.
그래서 발가락 하나
손가락 하나가 움직일 때마다
그리도 기쁜 탄성을 지르곤 했었지.
비상을 위해선
어느 정도 결박이 필요하다고
아니
난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결박 속에서만
가능하다고
일제 아이힝거는 昭湄È 남자 속에서 말했어.
결박이 아무데서도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어찌하여
새는 알[卵] 속에 머무르지 못하는가?
아니
알의 결박이 없었다면
새는 어찌하여 날개를 만들 수 있었겠는가.
달걀 속의 생(生), 문학사상사, 1989
양수리에 가서 김승희
양수리에 가서
가을이면
양수리에 닿고 싶어라
가을보다 늦게 도착했을지라도
양수리에 가면
가을보다 먼저
물과 물이 만나는 것을
볼 수 있으니
가장 차갑고
가장 순결한
물과 물이 만나
그저 뼈끝까지 가난하기만 한
물과 물이 만나
외로운 이불 서로 덮어주며
서러운 따스함 하나를 이루어
다둑다둑
흘러가는 것을 볼 수 있으니
가난한 것을
왜 그저 외롭다고만 하랴
외로운 것을
왜 그저 서럽다고만 하랴
양수리에 가면
가을보다 늦게 도착했을지라도
가을보다 먼저
물과 물이 만나는 것을
볼 수 있으니
헐벗은 가을나무들
제 유언을 풀듯
조용히 물그림자 비추어
스스로 깊어지는 혼자 외로움
거울같이 전신으로 대면하고 있으니
가을이면
양수리에 가고 싶어라
어디선가 나뉘였던
물과 물이 합하여
물빛 가을 이불 더욱 풍성해지고
가을 나무 물 그림자
마침내 이불 덮어 추위롭지 않으니
홀로 서 있다 하여
어찌 외롭다 하랴
하늘 아래 헐벗었다 하여
어찌 가난하다고만 하랴
미완성을 위한 연가, 나남, 1987
어두운 계단을 내려가며 김승희
어두운 계단을 내려가며
나는 어두운 계단 위에 서 있다.
어두운 계단 위에 서 있는 것은
한사코 어두운 계단을 내려가라는
무슨 신호인지도 모른다
처음인 양 나는 계단을 바라본다
아무런 장식이 없는 콘크리트 계단
무덤 속처럼 깊고 하얗고 불길한
무표정의 무한
층계 위에서
나는 장의사집의 장롱같은
영원하고 모호하고도 단호한
하나의 절벽을 느낀다
바닥엔 방이 있을까
내려가고 또 내려가는 것이
평화라면
나는 언제까지라도 내려가는 계단을
내려가고 싶다
내려가고 또 내려가는 것이
사랑이라면
나는 언제까지라도 내려가는 계단으로
그대에게 닿고 싶다
나는 어두운 계단을 내려간다
남보다 늦게 가는 시계처럼
나의 슬픔은 천천히 용기와 닿는다
바닥엔 방이 있을까
콜타르이나 잉크, 구두약이나 흑연처럼
검은 진짜로 검은
바닥의 방이 있을까
꿈이 있을까
나는 생각한다
천왕성 해왕성 명왕성 다음에도 별은 있을까
그 별의 이름은 무엇일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천연자원은
슬픔뿐이라고
강해지기 위해선 석탄보다도 더
검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나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간다
나의 발이 막장의 층계 속으로
한 발 아득히 닿고 있을 때
나는 그제서야 엄청나 그 무엇이
떠오르는 것을 느낀다,
천왕성․해왕성․명왕성 다음에도
별은 있다고,
그 별의 이름은 미완성이라고,
나의 발은 조용히 어두운 계단을
내려가고
나의 손은 조용히 슬픔의 채탄을 하기 위해
바닥의 하늘을
부드러이 껴안는다
미완성을 위한 연가, 나남, 1987
없는 사람 김승희
없는 사람
문 밖엔 아무도 없는데
자꾸만 초인종소리가 울린다―
아무도―없다―
없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아무도―보이지 않는다―
별들의 저울은
생사(生死)의 두 세계를 뚫고서
수심의 흰 피를 달아보고 있다―
구천으로 뻗은 어둠을 뚫고
그리움의 근(根)은
하염없이―가고―있다―
인광(燐光) 묻힌 날개를 단 새들이
문 밖에서―날고 있다―
하염없이 부풀어 터지는 백혈구처럼
영원한 극광(極光)들의 나라로 가는
흰 길―위엔―죄악 같은 추억들이―
하나씩―서―있었다―
문 밖엔 아무도 없는데
자꾸만 초인종소리가 울린다―
아무도―없을까―
아무도―없는데―그리움의 근(根)은
또 어디서―한없이―오고 있을까……
왼손을 위한 협주곡, 문학사상사, 1983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 김승희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
하얀 문이
관뚜껑처럼 닫혀 버린다
아직, 얼굴 위에서
미처 미소가 지워지기도 전에,
일방적인 해고통고와도 같이
하얀 문이
관뚜껑처럼
닫혀 버린다
아, 아, 안녕……하고
말을 맺기도 전에,
사랑하는 이여,
이것이 마지막 인사라면
정녕 그럴 수는 없다,
우린 좀더 사랑했어야 하고
우린 좀더 진지한 고통을
나누어야 했지,
사랑하는 이여, 그대와 나,
우린 좀더 불을 통과하는 뜨거운
길들을 함께
다녀보았어야 했다
언젠가 하얀 문이
그렇게 닫혀지고 말겠지,
불가사의하고도 불가항력적인 ― 하얀 ―
단절이 ― 우리의 ―
얼굴 위에 수면 마스크처럼
조용히 드리워지고,
비단끈으로 된 하얀 망사처럼
보슬보슬한 음악이
엘리베이터 천정 위에서
세뇌라도 하듯이, 자근자근 소근소근
속삭여대겠지,
잊어버려, 이젠 다 끝장이 났어,
잊어버리라구, 낄, 낄, 낄……
사랑하는 이여,
그대와 나, 이것이 마지막 인사라면
정녕 나는 받아들일 수가 없는데
언제나 마지막 문은
그렇게 닫혀지고 마는 법,
언제나 지고 있는 노름패처럼
열쇠도 없다,
열쇠도 없이
그렇게 우리 홀로 승천의 문 안에 갇혀져야 하는가,
그렇게 홀로 갇혀
멍청히 승천의 길로 올라가야 하는가……
미완성을 위한 연가, 나남, 1987
여인 등신불 김승희
여인 등신불
한 남자를 사랑했다고 하여
이런 고통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한 남자와 잠깐 쾌락을 같이했다 하여
이런 원통한 아픔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인들이여, 울고 찢기고 흐느끼며 발광하는
여인들이여,
이 성스러운 하얀 굴 속에서
한 남자란 이제 지극히 사소한 우연에
지나지 않습니다
짐승처럼 짐승처럼 지금 우리가
온몸을 물어 뜯으며 울부짖는 것은
스님이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다비의 불바다 속으로 들어감과 같습니다
하얀 도자기를 구워내기 위하여
불가마 속에 천하무비의 큰 불을
지피는 것과 같습니다
도살장에서 젊은 도수가 하염없이
나의 정수리에 도끼를 내려치는
것 같습니다
도끼날이 나의 숨골에 박힐 때마다
흰 불의 꽃송이가 하염없이 튀어 올라
흩어지고 있습니다
만다라의 꽃잎입니다
자비의 세례입니다
그대 ― 죄가 있었으면
죄를 태우십시오
그대 ― 업이 남았으면
업을 태우십시오
여인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어찌
범패보다 아름답지 않습니까?
범패보다 더 진한 막다른 소리들이
관처럼 하얀 방을 자욱히 메웁니다
오뇌와 비원의 처절한 촉수들이
찢어지는 살점을 쥐고 흔듭니다
쾌락처럼 그렇게 실신하면서
나는 천지 아득히 터지는 범종 소리를
들은 것 같습니다
아가의 울음소리 ― 갓난동이의 첫울음소리가
문득 하나의 태허(太虛)를 울리고
신탁처럼 장렬한 핏덩이 하나가
이제 삶 속에 우뚝 섭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
하얀 잠이 가득히 와서
내 육체의 모든 문을 꼭꼭 여며주고 있습니다
왼손을 위한 협주곡, 문학사상사, 1983
유서를 쓰며 김승희
유서를 쓰며
내 뼈에 가득 찬
죄악을 비우기 위하여
나는 유서를 씁니다,
독한 청산가리 같은 잉크에
내 넋의 붓을 적셔
한 자 한 자 공들여 적어 봅니다,
선언합니다,
내 몸의 모든 세포들에게,
시시한 추억들,
못 잊을 가족들에게
이것저것 유품을 나누어놓고
이것이 최후라고
단호히 선언합니다,
그리고 부엌으로 들어가
문틈을 샅샅이 레이스로 봉합니다,
그리고 가스마개를 틀고
더러운 부엌바닥에
냉정히 드러눕습니다,
그리고 아직 너무나 젊기에
더 살고 싶다는 푸르른 나의 육신에
못을 탕― 탕― 박고
망치를 허공으로 던져 버립니다,
살점이 튀고
아까운 피가 양수처럼 따뜻이 고입니다,
이제야 생각납니다.
기역― 니은― 디귿! ― 하고
어머님께 매를 맞으면서
처음 글씨를 배웠던 일이,
첫애를 낳을 때의
그 무시무시한 고통과
현란을 극한 사랑의 고마움이,
번개처럼 일어나
창문을 열어 봅니다,
달빛이 초설(初雪)처럼 흘러내립니다,
나의 해골을 집어들고
달빛을 한 바가지 가득 떠서 마십니다,
고해를 하고 성찬을 받은 것처럼
목숨이 더없이 맑아진 것 같습니다
왼손을 위한 협주곡, 문학사상사, 1983
이카루스의 잠 김승희
이카루스의 잠
어느날
새들의 임금님이
우리의 땅에 내려왔다.
황금빛 햇살을 맞으며
우리에게 말했다.
「자, 누가 이카루스인가.
모두들 한번 날아 보아라」
태양 가까이 날아
날개가 불태워져 버린 아이에게만
불멸의 날개를 주겠다.
납이 아니고
뼈와 뼈의 날개,
녹을 수 없고 썩지도 않는 날개.
그러나 지상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어느 아이가 귀가 있어
그것을 듣겠으며
어느 날개가 천재가 있어
태양까지 날겠는가.
우리들은 모두 가만히 있었다.
「이카루스만이 영원하다.
그것을 모르고 사는 자(者)는
이 지상에서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나 오, 지금은
시인도 청년도
사슴도 독수리도 아무도 날을 수 없음을
우리는 아무도 날지 않는 것을
그는 모르는 것일까?
그는 정말 모르는 것일까?
하늘 속에서 태양은 아름답고
태양 속에서 생명은 불타지만
그러나 이카루스,
이카루스는 잠을 자네.
파도와 회색 바위 위에서
이카루스,
모든 이카루스는 아무도 잠깨지 않네.
아무도.
태양미사, 고려원, 1979
일회용 시대 김승희
일회용 시대
사발면을 후루룩 마시고
일회용 종이컵을 딱 구겨서 버리는 것처럼,
상처가 아물면
일회용 반창고를 딱 떼어서 던져 넣는 것처럼
이 시대에
내가 누구를 버린다 해도
누구에게서 내가
버림받는다 해도
한 번 입고 태워 버리는 종이옷처럼,
한 번 사용하고 팽개쳐야 하는
콘돔처럼,
커피 자동판매기 안에서
눈을 감고 주루룩 쏟아져 내리는
희게 질린 종이컵처럼
껌종이처럼
일회용 설탕 포장지처럼
그렇게
내가 나를 버릴 수 있을까
그렇게
나도 나를 버릴 수 있을까
어느 으슥한 호텔 욕실에서
잠깐 쓰고 버려지는
슬픈 향내의
일회용 종이비누처럼……
달걀 속의 생(生), 문학사상사, 1989
자살자의 노래 김승희
자살자의 노래
떠나는 건 쉬워 ―
처음엔 왼발을,
그 다음엔
오른발,
그리고 슬쩍 몸을 날리는 거야,
애욕처럼 진하게
두 눈을 감고 ―
그런데
아직
유서를 못 썼어,
나의 사인(死因)을 포장해 줄
극비의
설형문자를,
그때까지는 살려고 해 ―
하하 ―
이건 변명이
아니라
소명이라오!
왼손을 위한 협주곡, 문학사상사, 1983
장미와 가시 김승희
장미와 가시
눈먼 손으로
나는 삶을 만져 보았네.
그건 가시투성이였어.
가시투성이 삶의 온몸을 만지며
나는 미소 지었지.
이토록 가시가 많으니
곧 장미꽃이 피겠구나 하고.
장미꽃이 피어난다 해도
어찌 가시의 고통을 잊을 수 있을까
해도
장미꽃이 피기만 한다면
어찌 가시의 고통을 버리지 못하리요.
눈먼 손으로
삶을 어루만지며
나는 가시투성이를 지나
장미꽃을 기다렸네.
그의 몸에는 많은 가시가
돋아 있었지만, 그러나,
나는 한 송이의 장미꽃도 보지 못하였네.
그러니, 그대, 이제 말해주오,
삶은 가시장미인가 장미가시인가
아니면 장미의 가시인가, 또는
장미와 가시인가를.
달걀 속의 생(生), 문학사상사, 1989
죽은 말의 꿈 김승희
죽은 말의 꿈
니콜로 파가니니의 난간에서
속병이 깊은 말[馬]은
세계를 짧게 만나고 있다.
꽃이 핀다.
꽃의 입술에 열리는
흰 무도장.
거만한 말[言]은 시간을 쉬고
은빛 현이
활짝 일어난다.
빠른 핀세트.
청동빛 숲과 꽃은
상치(相値)되고
또한 위태히 해체된다.
태양미사, 고려원, 1979
진주 기르기 1 김승희
진주 기르기 1
심야에, 멍청히,
제시카의 추리극장을 보며
누워 있는데
긴급한 파발마 글씨로
하얀 자락이 달려간다.
RH마이너스 B형 혈액을 급히 찾습니다 신촌 세브란스 병원 392의 0161 응급실로 빨리……
나는 RH마이너스 혈액이
없어서
그냥 누워서 양파링을 바삭바삭
먹으며
TV를 본다.
누가 나를 불렀나?
유리창에 가득 찬 밤이
내 얼굴을 쳐다보는 것 같아
등을 돌리고 누우며
홀로 한 번 더 말해본다
나․는․R․H․마․이․너․스․피․가․아․닌․데․뭘……
그렇게
80년대는 저물고
피 한 방울 손해보지 않은 나는
그 시대에 피 한 방울 보태지 않은 나는
양파링처럼 너무도 유순하게
누군가의 깊은 목구멍 속으로
자꾸만 녹아 들어가고 있는 느낌이다.
이렇게 녹아 버려도 좋은 것일까
이렇게 삼켜져도 되는 것일까
몸 속에 자꾸만 돌이 쌓여가는 기분으로
잠들었다가
(목구멍까지 돌이 차오르면
우린 행복하게도 잠수성공 익사성공
을 이룰 수도 있었을 텐데)
아, 안 돼, 잠옷 같은 수의를 떨치고
바람 같은 신발을 신고
어둠의 눈물 묻은 대문을 나서며
나는 신촌 세브란스 병원이 있다는
새벽의 방향으로
푸르게 푸르게 달리기 시작한다.
내 비록
R․H․마․이․너․스․B․형․피․는․없․지․만……
달걀 속의 生(生), 문학사상사, 1989
천왕성의 생각 김승희
천왕성의 생각
나는 천왕성을 생각한다.
때문에 천왕성은 나를 생각한다.
천왕성은 얼음이다.
그래서 나는 얼음으로 도피한다.
얼음은 우리를 구제할 수 있을까?
때문에 나는 별 속에 한 예수를 심는다.
예수는 태양을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태양을 바라본다.
태양은 우리의 식물을 키운다.
때문에 나도 땅을 사랑한다.
땅은 더럽고 부패했다.
그리고 나는 천왕성을 생각한다.
땅은 순수가 되고
영사막처럼 우리는 그것을 긍정한다.
―그러나 많은 것들이 우울하다.
―이곳은 혹시 타지마할이 아닐까?
―고통과 숙명(宿命)과 산고(産苦)가 있다.
한 남자가 천왕성에 탯줄을 대고 있네.
한 여자가 심야에 꿈의 베틀북을 짜고 있네.
그들이 이 타지마할을 살게 하네.
산소와 태양과 꿈의 자오선이
가볍고 큼직하며 쓸쓸하고 격렬하게.
이곳이 곧 천왕성이 되고
천왕성은 또 타지마할이 되고.
태양미사, 고려원, 1979
첫눈 김승희
첫눈&
어젯밤 꿈에 너를 보았는데
오늘 첫눈이 내리는구나……
네 무덤에 오래 가보지 않았는데
눈으로 내리니 반갑다……
저승천사의 흰옷깃이
네 마지막 뺨처럼 희구나
지상에 내리다 말고
잠시 겁이 나는 듯
얘야, 여기 네 어미의 꽃밭에
눕거라
우리는 꿈결처럼 만나자 헤어졌으니
오늘 첫눈이 강물 위에
네 생일(生日)을 긋는구나……
너처럼 잠시 있다 말고
호적(戶籍)도 없이
날아 가리니
저 가벼운 어린 저승새
흰 다리 쉴 곳 없어……
왼손을 위한 협주곡, 문학사상사, 1983
태양미사 김승희
태양미사
어둠이 태양을 선행하니까
태양은 어둠을 살해한다.
현실이 꿈을 선행하니까
그리고 꿈은 현실을 살해한다.
구름의 벽 뒤에서
이제는 태양을 산책하는 독수리여,
나는 감히
신비스런 미립자의 햇빛 파장이
나의 생(生)을 태양에 연결시킬 것을
꿈꾸도다.
나의 생(生)이 재떨이가 되지 않기 위하여
나의 생(生)이 가면의 얼음집이
되지 않기 위하여
나는 감히 상상하도다.
영원한 궤도 위에서 나의 불이
태양으로 회귀하는 것을.
언제나, 그리고 영원토록.
나의 생명(生命)과 저 방대한 생명(生命)을
연결해 달라,
어떤 방적기계
어떤 안개의 무(無) 속에서
우리의 실은 풀려지는 것인가?
어떤 증발
어떤 채무자인가, 우리들은?
나는 감히 상상하도다,
어둠이 태양을 선행하니까
그리하여 태양이 어둠을 살해하듯,
현실이 꿈을 선행하니까
그리하여 꿈이 현실을 살해하기를.
나는 감히
꿈꾸도다,
나의 생(生)이 안개의 먹이로 환원되는 것을
나는 바라지 않기에
살기 위해 더 많이 사랑할 것을
오직 나는 바라기에
나는 감히 상상하도다,
영원의 궤도 위에서 나의 불이
태양으로 회귀하는 것을.
그리하여 존재의 실[絲]패를 태양에 감으며
신비스런 미립자의 햇빛 파장이
나의 생(生)을 태양에 귀의시킬 것을.
태양미사, 고려원, 1979
태양성서 김승희
태양성서
타오르지 못하면
죄를 느끼는 ―
나는 하나의 양초입니다
이제 제물은 준비되었으니,
부디 나의 심지 위에
고운 불을 놓으십시오 ―
촛불이 이 세상을 만드는
어둠의 공백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모든 벽은 문(門)이 되고,
이해할 수 없게도
고문의 노래는
황홀한 불 속에 작열합니다
누가 나의 운명의 검은 자오선을
저 하얀 불 속에
휘어 넣을 수 있을까요,
나 스스로 몸을 굽혀
저 가혹한 불꽃의 먹이가 되지 않는다면
나는 대체 어디에서
삶의 젖을 빨아야 하나요?
오, 그러나, 잠깐만,
나에게 모짜르트를 들을 시간을 주세요,
산 채로 번제를 지피기 위해서는
약간의 마취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슬로우 비디오처럼, 천천히,
나는 나의 나체를 불의 제단에
눕힙니다
인육의 촛불이 꽃처럼 타오릅니다
신이여, 이것이 나의 경배,
나의 포만인 것입니다
나의 박애인 것입니다
심령이 불태워진 자는 복이 있나니
뼈에서 새가 솟을 것이오 ―
심령을 불태우는 자는 무궁하리니
태양이 저의 것이라 ―
누군가 내 긴 뼈의 맥을 짚으며
건반을 누르듯 ― 하염없이 ―
화음의 우주를 쓰다듬고 있습니다 ―
왼손을 위한 협주곡, 문학사상사, 1983
태양의 면죄부 김승희
태양의 면죄부
희디흰 폭양 속에선
어디선가 사물놀이패들 노는 소리,
징, 바라, 장고, 북 ―
징, 바라, 장고, 북 ―
어디엔가 원한의 무지개를 세우는 소리,
들립니다,
신비로와라,
삶의 무늬와 태양의 무늬가
어느 허공 중에 가벼이 부딪쳐
저리도 찬란한
색채의 거울을 세움이여 ―
누가 내 몸 속에 꼭꼭 채운 지푸라기들을
꺼내고
신을 가득 채우니 ―
오늘 같은 날은
언제나 원수 같았던 거울 속의 저 사람도
썩어가는 죄업으로 인해
더욱 진하게 보입니다
더욱 향기로와 보입니다
내 뼈의 잔가지들을 훑어서
척추의 둥근 고리뼈를 중심으로
누가 피리구멍을 내주세요,
오장육부 굽이치는 원한의 강물에
입술을 대고
누가 저 목숨의 피리를 불어서
내 뼈를 신의 맥(脈)으로
가득 채워 주세요,
호화로와라,
원한의 무늬와 폭양의 무늬가
어느 허공 중에 진하게 부딪쳐
저리도 잔인한
뼈의 향유를 부음이여 ―
왼손을 위한 협주곡, 문학사상사, 1983
평화일기 2 김승희
평화일기 2
가출을 할까
출가를 할까
이것은 나의 영원한 테마이다.
누군가도 그러하리라.
가출을 하든지
출가를 하든지
어딘가에 평화를 구하러 가고 싶은 심정으로
밤은 저문다.
신촌로터리에서 지하철 구멍 속으로 들어가면
삼분 자동칼라 사진실이 있지.
시든 베이지색 커튼을 밀치고
들어가면
관 속같이 하얀 네모난 방.
나는 주섬주섬 주머니 속의 동전들을
모조리 꺼내 놓고
일금 이천오백 원이 될 때까지
동전들을 고백처럼 밀어 넣으며
플래시가 번쩍 하는 동안의
그 작은 재회를 사고 싶다.
동전이 찰칵찰칵 들어가 액수가 차면
관 속의 실내등은 저절로 꺼지고
어둠 속에 갇힌 채로
웃을까 말까 망설이는 동안
나의 인생은 그 일 초 동안의
찬란한 자동 마그네슘 불꽃 안에
영원한 우주의 중심으로 환생하게 된다.
따끈따끈 인화되어 나오는
나의 사진을 기다리며
나는 지하철 정류장을 오고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바라본다.
모두 다 어딘가로 떠나고 있고
모두 다 어딘가로 닿고 싶은 사람들.
자동칼라 사진실의 출납창구 아래로
내 사진이 덜컥 하고 완성되어 떨어질 때
나는 행복하다.
어제보다 더 늙었다든지
점점 더 괴상한 추녀가 되어간다고 해도
(추함만큼 우리에게 일상적인 게 또 있으랴)
나는 정말 관심이 없다.
다만 나는 나와 만나는
그 짧은 순간의 영원. 어머니. 자궁.
고향같은 따스한 어둠을 기억할 뿐.
아무도 이제 내가 안 보인다고
말하지는 못하겠지.
나처럼
자기 스스로와 면회하고 싶은 객지의 사람들이
먼 길을 걸어와
관 같은 자동사진실 근처를
어슬렁거리고 있다.
호적이 없는 부랑자들처럼
니코틴에 물든 입술이 파랗다.
달걀 속의 생(生), 문학사상사, 1989
햇님을 좋아하는 얼음 나라... 김승희
햇님을 좋아하는 얼음 나라...
원제 : 햇님을 좋아하는 얼음 나라 아이들의 노래 1
석탄을 사야겠네요.
바람 때문에
자꾸만 꽃잎이 떨어져요.
내 마부(馬夫)여.
가장 좋은 장작집으로 가요.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인간(人間)의 낱말도 남기지 않으려고
지금은 찬 바람이 너무나 불어요.
불을 지피려고 아궁이로 가니
금빛 침이 가득 고여 있고요.
불씨를 얻으려고 남쪽으로 가니
희랍 아저씨는 옛날에 죽었대요.
나는 머릴 흔들어
아니라고 했어요.
미래의 형태를 위하여
변소 속의 살얼음을 사랑하고 말까요?
오, 사소한 것들.
당신들은 너무나 사소한 것들을
덮고 있어요.
나는 덮지 않을래요.
내 마부(馬夫)여.
이 슬픈 바닷가를 뛰어 넘어가요.
내 드디어 햇님 속에 누울 수 있도록.
다다를 수 있도록.
태양미사, 고려원, 1979
햇님의 사냥꾼 김승희
햇님의 사냥꾼
다이아나 언니.
마차(馬車)를 매요.
바람이 좋으니 사냥 나가지.
요정1․요정2․요정3․요정4
그리고 어린 모짤트도 불러
사슴과 거미와 토끼와 나비를
표범과 매와 태양과 절망을
언니는 쫓고 나는 잡고.
언니는 활 쏘고 나는 겨누고.
영혼의 마차(馬車)에는
네 개의 바퀴가 반짝이고 있다.
숲의 정(精)․별의 정(精)․꿈의 정(精)․활의 정(精)
우리는 정비하여
해 가까이 나가는데
지금 누런 들에서는
엑스레이빛, 엑스레이빛으로
마른 개들이 죽고 있다.
죽고 있다.
나는 알지.
긴 어둠의 창작을 내가 할 때
흰 물결․검은 물결․파랑 물결 사이에서
언제나 다시 시작되는 황야를.
메마른 의식의 침엽수 이파리와
필생(畢生)의 든든한 그 어둠소리를
나는 알고 나는 견디리
나는 활 쏘고 나는 밝히리.
돌아오는 마차(馬車)엔
햇님의 머리칼.
눈부시게 타오르는 요정들의 옷자락.
어둠은 이제 말을 몰고 돌아가고
밝아지는 뼛속과 태양 취한 일 센티.
다이아나 언니.
햇님을 매요.
반짝이는 사냥노래 나의 노래를 .
태양미사, 고려원, 1979
흑장미가 있는 연가 김승희
흑장미가 있는 연가
사랑하는 사람아, 한 치 피부 아래 그대의 아픔을 내가 알지 못하니 사랑이란 어디에 쓸데있으랴 병마(病魔) 홀로 신이 들어 우리의 지붕 위엔 해골들의 춤이 바삭거리고 오는가 이렇게 얼굴 가리고 돌아서 우는 사랑의 야윈 어깨가 부끄러워라 달빛 묻은 꽃잎만 홀로 입술 달삭여 길게 노래하니, 오, 밤이면 천지 아득한 수마(睡魔)가 있을 뿐,
사랑하는 사람아, 불붙은 도화선처럼 타들어가면서 두 손을 내뻗는 나의 가난함이 부끄러워라 방아쇠가 벌써 당겨진 시한의 폭약처럼 누군들 이제 시간은 없으려니 가는가 이렇게 흐득이는 목숨의 파편들을 한 줌 두 줌 열렬히 움켜서 남은 자(者)여 목을 놓아 풍선처럼 조용히 터지는 어느 태양의 혈통 속에 고이 나를 묻어다오,
사랑하는 사람아, 우리의 방에는 거울이 많고 거울 속으로는 언제나 꽃잎 같은 살별이 지고 있었지 꼬리를 끌고 떨어지는 별들은 낙화암 ― 낙화암으로 가는 피 묻은 삼천의 목숨의 꿈, 스스로 꽃이 되고자 하는 별 같은 목숨들이 있어 조용히 스러지라 조용히 오래된 검은 장미만이 홀로 일어서 무궁히 바다를 다스리니 오 매일 나누는 밥그릇의 무심한 정다움이 참혹하여 사랑이여―
왼손을 위한 협주곡, 문학사상사, 1983
흰 여름의 포장마차 김승희
흰 여름의 포장마차
나에게는 집이 없어.
반짝이는 먼지와 햇빛 속의 창(槍)대가,
훨, 훨, 타오르는 포플린 모자.
작은 잎사귀 속의 그늘이
나의 집이야.
조약돌이 타오르는 흰 들판.
그 들판 속의 자주색 입술.
나에게는 방도 없고
테라스 가득한 만족도 없네.
식탁가의 귀여운 아이들.
아이들의 목마는 오직 강(江)으로 가고
나는 촛불이 탈 만큼의
짧은 시간 동안
그 아이들이 부를 노래를 지었지.
내 마차(馬車)의 푸른 속력 속에서
날리는 머리카락.
머리카락으로
서투른 음악을 켜며.
하루의 들판을 무섭게 달리는 나의 마차(馬車)는
시간보다도 더욱 빠르고 강하여
나는 밤이 오기 전에
생각의 천막들을 다 걷어 버렸네.
그리고 또한 나의 몇 형제들은
동화의 무덤 곁에 집을 지었으나
오. 나는 그들을 경멸했지.
그럼으로써 낯선 풍경들을 잃고 싶지 않아서.
나에게는 꿈이 없어.
해가 다 죽어버린 바다 속의 밤이
별이 다 죽어버린 밤 속의 정오(正午)가
그리고 여름이 다 죽어 버린
국화 속의 가을이
나의 꿈이야.
콜탈이 눈물처럼 젖어 있는 가을 들판.
그 들판 속의 포장마차의 황혼.
태양미사, 고려원, 19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