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읽기 요약 서울 18회 (11.3.13)
참석-- 공심님, 꽃거지님, 냐냐님, 다현님, 명대님, 무루님, 무무님, 무무명, 무영님, 보리수님, 복덩이님, 부끄러운님, 상곤님, 알마님, 예심님, 은혜님, 자애심님, 자연심님, 조은님, 진석님, 청솔님, 편안님, 평온님, 허주님, 자재법사님.
부디 잘못 쓴 것이 있으면 알려주십시오.
범위--상윳따3권. 무더기 상윳따. 각묵스님 기준 129쪽 ~146쪽.
다음 예정범위-- 147쪽~ 182쪽.
내용
진석님--갈애는 하고픈 것이 있는 것이라면 욕망은 강화된 것.--사성제 알고 8정도 닦아야.
무무명--12연기에서 무명을 소멸해야 그 뒤로 죽 소멸하지만, 힘드니까 갈애에서 소멸을 시작하게 설해 주심.
보리수님--사과로 예를 들면, 색을 안이 보고 감각접촉으로 느낌이 생기고 갈애를 하여 구하고 얻고 맛있다고 분별하고 욕망이 강화 되어 강요되고 완전히 동요되고 인색과 쌓음과 싸움까지 간다.
무무명--해결은 갈애를 놓음인데 그 힘을 기르려고 수행.
진석님--화를 참다보면 무상으로 결론이 나서 나와 남에게 바라는 것이 없어짐.
조은님--갈애는 직접 이해가 어렵다. 사유해 보기. 사성제 출발. 가지고 있는 것이 과연 나쁜가? 당위성을 사유할 필요.
진석님--일어남 사라짐 달콤함 위험함 벗어남을 다 알아야. 집중 연습이 된 사람이 더 보임.
앙굿다라에 실생활의 적용이 있으니 같이 병행 읽기를.
삼매 경(S22:5)
3. “비구들이여, 삼매를 닦아라. 삼매에 든 비구는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그러면 무엇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아는가?
물질의 일어남과 사라짐, 느낌의 일어남과 사라짐, 인식의 일어남과 사라짐, 심리현상들의 일어남과 사라짐, 알음알이의 일어남과 사라짐이다.”
4.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물질의 일어남이고, 무엇이 느낌의 일어남이고, 무엇이 인식의 일어남이고, 무엇이 심리현상들의 일어남이고, 무엇이 알음알이의 일어남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사람은 즐기고 환영하고 묶여있다. 그러면 무엇을 즐기고 환영하고 묶여있는가?
그는 물질을 즐기고 환영하고 묶여있다. 물질을 즐기고 환영하고 거기에 묶여 있는 자에게 즐김이 일어난다. 물질을 즐기는 것이 바로 취착이다. 그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죽음과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이 생긴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가 발생한다.
그는 느낌을 ··· 인식을 ··· 심리현상들을 ··· 알음알이를 즐기고 환영하고 거기에 묶여 있는 자에게 즐김이 일어난다. 알음알이를 즐기는 것이 바로 취착이다. 그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죽음과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이 생긴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가 발생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물질의 일어남이고, 이것이 느낌의 일어남이고, 이것이 인식의 일어남이고, 이것이 심리현상들의 일어남이고, 이것이 알음알이의 일어남이다.”
5.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물질의 사라짐이고, 무엇이 느낌의 사라짐이고, 무엇이 인식의 사라짐이고, 무엇이 심리현상들의 사라짐이고, 무엇이 알음알이의 사라짐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사람은 즐기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묶여있지 않다. 그러면 무엇을 즐기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묶여있지 않는가?
그는 물질을 즐기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묶여있지 않다. 물질을 즐기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거기에 묶여 있지 않는 자에게 즐김이 소멸한다. 즐기는 것이 소멸하기 때문에 취착이 소멸한다. 취착이 소멸하기 때문에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하기 때문에 태어남이 소멸하고, 태어남이 소멸하기 때문에 늙음·죽음과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이 소멸한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가 소멸한다.
그는 느낌을 ··· 인식을 ··· 심리현상들을 ··· 알음알이를 즐기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거기에 묶여 있지 않는 자에게 즐김이 소멸한다. 즐기는 것이 소멸하기 때문에 취착이 소멸한다. 취착이 소멸하기 때문에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하기 때문에 태어남이 소멸하고, 태어남이 소멸하기 때문에 늙음·죽음과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이 소멸한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가 소멸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물질의 사라짐이고, 이것이 느낌의 사라짐이고, 이것이 인식의 사라짐이고, 이것이 심리현상들의 사라짐이고, 이것이 알음알이의 사라짐이다.”
무루님-------자유게시판에서 늦은 답을 퍼왔음.
경전읽기 때 무영님 질문에 제대로 답을 못해드려 죄송합니다.
그때 상태가 좀 그러했지요.
어떠한 상황(TV시청 등)에 빠져들지 않고
어찌하여 염오하거나 삼매에 쉽게 드는지에 관한 질문이었던 것 같은데
짧은 소견이나마 저의 얘기를 하여 본다면
우리가 잊어버려 그러는데
아가가 처음 밥을 먹을 때 수저 젓가락 잡는데서 부터 시작하여
혼자 밥을 먹을 때까지 많은 배움과 시간이 걸리는데
지금은 그냥 자동으로 밥을 먹듯이
처음 삼매를 익힘에 있어 안 해본 것이라
다소 생소하고 어려움이 있지만
매일 매일 가급적 같은 시간대에 정해진 시간에 꾸준히 하다보면
그것을 습득하게 되어 있는 것이지요.
일단 습득하면 자동반응처럼
마음이 쉽게 단조롭게 되고 마음이 단일해 지면
쉽게 염오하거나 삼매가 되는 것이지요.
삼매의 방법은 선원에서 배우고 있으니 그대로 하시면 되고요.
예로 TV시청을 꼭해야 된다면
어느 하나에 초점을 두지 마시고 다 초점으로 TV를 시청하시면
그것도 하나의 공부 방법이 될 수 있는 것 같아요.
어느 한 사람을 나와 동일시하여 봐 버리면 그 내용에 빠져들어 버리지요.
그런데 그걸 하지 않으면
모든 사람들의 삶이 보여 지게 되고
어찌하여 우리네의 삶들이 꼬여지게 되는지 알게 되고...........
그러다 보면 우리 모두 견해 싸움이요, 나만의 이익을 구하고 있음이요, 부질없음이요........
이것들이 보여 지게 되는 것 같아요.
그렇게 되면 더 이상 그것들을 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진석님--희열은 나쁜 것에 집중되어도 나타나는데 자신의 보호 본능인데 희열이 있으면 바른 사유로 돌아옴. 화낼 타이밍을 놓침. 마음챙김으로 내 안에 멈춤.
무무명--희열이 있으면 누가 욕을 해도 희열이 있고 연민이 섞이더라.
조은님--화의 사이에 틈이 생기는데 증진시켜야.
허주님--자신과 법을 의지처로 하라는 경의 말씀이 있으니 삼매도 갈애로 하지 않아야 되지 않나?
무무님--증진해야할 갈애임. 다만 삼매되는 사람 질투는 안되고.
조은님--삼매만 강조하는 것은 오해 소지 있음. 화를 내면에서 내리는 것을 함.
은혜님--그 정도면 공부 많이 된 것임.
진석님--삼매의 전 단계 이야기 중요.--계 감각단속 등
취착에 의한 초조함 경1(S22:7)
3. “비구들이여, 그대들에게 취착에 의한 초조함과 취착하지 않음에 의한 초조하지 않음을 설하리라. 이제 그것을 들어라. 듣고 마음에 잘 새겨라. 나는 설할 것이다.”
············
4.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해서 취착에 의한 초조함이 있게 되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배우지 못한 범부는 성자들을 친견하지 못하고 성스러운 법에 능숙하지 못하고 성스러운 법에 인도되지 못하고 참된 사람들을 친견하지 못하고 참된 사람의 법에 능숙하지 못하여 물질을 자아라고 관찰하고, 물질을 가진 것이 자아라고 관찰하고, 물질이 자아 안에 있다고 관찰하고, 물질 안에 자아가 있다고 관찰한다. 그러나 그런 그의 물질은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 간다. 그의 물질이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 가기 때문에 그의 알음알이는 ‘물질은 변화한다.’는 [생각]에 휩싸인다. 그러면 ‘물질은 변화한다.’는 [생각]에 휩싸여서 생긴 초조함과 [해로운] 심리상태가 일어나서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 머문다. 마음이 사로 잡혔기 때문에 그는 겁을 먹고 걱정하고 안절부절못하고 그래서 취착에 의한 초조함이 있게 된다.
비구들이여, 여기 배우지 못한 범부는 성자들을 친견하지 못하고 성스러운 법에 능숙하지 못하고 성스러운 법에 인도되지 못하고 참된 사람들을 친견하지 못하고 참된 사람의 법에 능숙하지 못하여 느낌을 ··· 인식을 ··· 심리현상들을 ··· 알음알이를 자아라고 관찰하고, 알음알이를 가진 것이 자아라고 관찰하고, 알음알이를 자아 안에 있다고 관찰하고, 알음알이가 안에 자아가 있다고 관찰한다. 그러나 그런 그의 알음알이는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 간다. 그의 알음알이가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 가기 때문에 그의 알음알이는 ‘알음알이는 변화한다.’는 [생각]에 휩싸인다. 그러면 ‘알음알이는 변화한다.’는 [생각]에 휩싸여서 생긴 초조함과 [해로운] 심리상태가 일어나서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 머문다. 마음이 사로 잡혔기 때문에 그는 겁을 먹고 걱정하고 안절부절못하고 그래서 취착에 의한 초조함이 있게 된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해서 취착에 의한 초조함이 있게 된다.”
5.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해서 취착하지 않음에 의한 초조하지 않음이 있게 되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성자들을 친견하고 성스러운 법에 능숙하고 성스러운 법에 인도되고 참된 사람들을 친견하고 참된 사람의 법에 능숙하여 물질을 자아라고 관찰하지 않고, 물질을 가진 것이 자아라고 관찰하지 않고, 물질이 자아 안에 있다고 관찰하지 않고, 물질 안에 자아가 있다고 관찰하지 않는다. 그런 그의 물질은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 간다. 그의 물질이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 가지만 그의 알음알이는 ‘물질은 변화한다.’는 [생각]에 휩싸이지는 않는다. 그러면 ‘물질은 변화한다.’는 [생각]에 휩싸여서 생긴 초조함과 [해로운] 심리상태가 일어나서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 머물지 못한다. 마음이 사로잡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겁을 먹고 걱정하지 않고 안절부절못하지 않고 그래서 취착하지 않음에 의한 초조하지 않음이 있게 된다.
비구들이여, 여기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성자들을 친견하고 성스러운 법에 능숙하고 성스러운 법에 인도되고 참된 사람들을 친견하고 참된 사람의 법에 능숙하여 느낌을 ··· 인식을 ··· 심리현상들을 ··· 알음알이를 자아라고 관찰하지 않고, 알음알이를 가진 것이 자아라고 관찰하지 않고, 알음알이를 자아 안에 있다고 관찰하지 않고, 알음알이가 안에 자아가 있다고 관찰하지 않는다. 그런 그의 알음알이는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 간다. 그의 알음알이가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 가지만 그의 알음알이는 ‘알음알이는 변화한다.’는 [생각]에 휩싸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알음알이는 변화한다.’는 [생각]에 휩싸여서 생긴 초조함과 [해로운] 심리상태가 일어나서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 머물지 못한다. 마음이 사로잡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근심하지 않고 걱정하지 않고 안절부절못하지 않고 그래서 취착하지 않음에 의한 초조하지 않음이 있게 된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해서 취착하지 않음에 의한 초조하지 않음이 있게 된다.”
취착에 의한 초조함 경2(S22:8)
3. “비구들이여, 그대들에게 취착에 의한 초조함과 취착하지 않음에 의한 초조하지 않음을 설하리라. 이제 그것을 들어라. 듣고 마음에 잘 새겨라. 나는 설할 것이다.”
············
4.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해서 취착에 의한 초조함이 있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배우지 못한 범부는 물질을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관찰한다. 그러나 그런 그의 물질은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 간다. 그의 물질이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 가기 때문에 그에게는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이 일어난다.
비구들이여, 여기 배우지 못한 범부는 느낌을 ··· 인식을 ··· 심리현상들을 ··· 알음알이를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관찰한다. 그러나 그런 그의 알음알이는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 간다. 그의 알음알이가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 가기 때문에 그에게는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이 일어난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해서 취착에 의한 초조함이 있다.”
5.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해서 취착하지 않음에 의한 초조하지 않음이 있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물질을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관찰하지 않는다. 그런 그의 물질은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 간다. 그의 물질이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 가지만 그에게는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이 일어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여기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느낌을 ··· 인식을 ··· 심리현상들을 ··· 알음알이를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관찰하지 않는다. 그런 그의 알음알이는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 간다. 그의 알음알이가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 가지만 그에게는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이 일어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해서 취착하지 않음에 의한 초조하지 않음이 있다.”
보리수님--비구들이여, 여기 배우지 못한 범부는 느낌을 ··· 인식을 ··· 심리현상들을 ··· 알음알이--->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로 바꿔야 되는 구절 발견함.
--윗글은 바꾸어 쓴 것임.
과거·미래·현재 경1(S22:9)
3. “비구들이여, 과거와 미래의 물질은 무상하나니 하물며 현재는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비구들이여, 이렇게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과거의 물질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미래의 물질을 즐거워하지 않으며, 현재의 물질에 대해서 염오하고 탐욕이 빛바래게 하고 소멸하기 위해서 도를 닦는다.
비구들이여, 과거와 미래의 느낌은 ··· 인식은 ··· 심리현상들은 ··· 알음알이는 무상하나니 하물며 현재는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비구들이여, 이렇게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과거의 알음알이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미래의 알음알이를 즐거워하지 않으며, 현재의 알음알이에 대해서 염오하고 탐욕이 빛바래게 하고 소멸하기 위해서 도를 닦는다.”
과거·미래·현재 경2와 3은 1의 무상---> 2의 괴로움, 3의 무아로 바뀐 단어만 다름.
허주님--과거 미래 현재의 순서?
보리수님--공부 순서도 참회먼저 하고 미래의 불안감을 놓고.
은혜님--어떻게 불안감을 놓을까?
부끄러운님--그래서 현재에서 도 닦음.
상곤님--현재의 공부가 두려움을 없앰.
은혜님, 조은님--두려움과 불안 문제를 돌아가며 이야기 합시다.
허주님--근본은 노병사.
상곤님--사회생활의 두려움. 예측되면.
조은님--경제에 대한 비중이 제일 큰데 수행하면서 어느 순간 확 줄어듦.
절에서 청소하며 살 수도.
은혜님--겉으로 보기에 경제 문제로 보이는 것도 체면이나 쾌락의 문제일 수 많다.
육신이 멀쩡하면 대충해도 1~200은 버는데 삶의 질에 대한 차이로 한국사회에서 자존심의 문제가 핵심이다.
집은 분당이하로 내려가면 안 된다는 둥
조은님--직장 그만두면 경제가 떨어지는 정도지 죽지는 않는데
보리수님--지금 현재 할 수 있는 것으로 재물을 증장하는 것은 인과응보를 경에 대하여 사실이라 믿으면 전생에 내가 뭐를 해놨는지 모르니까 소금덩이 경처럼 계정혜를 닦는 방법 밖에 없다.
내 삶을 관찰하니 교통사고에서도 다침이 아주 적었던 경험.
부끄러운님--20년 뒤에는 현재의 직업이 70%가 없어진다고. 뭘 택하냐? 고민이 많고 투잡을 해야 하고. 세속적인 불안은 없어질 수 없으니 도 닦아야.
-----------이후는 신도 회원들로써 신도회가 갈 방향에 대한 이야기를 자유 형식으로 진행했으므로 줄입니다---------
법문
무무명--행을 의도들로 바꾸어 읽고 해석할까요?
무아를 비아로 바꾸어 읽고 해석할까요?
원장스님
심리현상들은 그대로 읽고 뜻은 의도들로 생각하세요.
무아는 복잡한데 상윳따에서는 모두 非아로 봐야함.
2가지 형태임 1--no atta
2--an atta
1은 atta가 아니다 인데 이 atta는 실체(궁극)를 이야기 한 것.
오온에서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의 자아임.
발리어의 atta가 산스크리트어에서 atman 임.
아트만이 아상이고 실체가 아니다 로 배웠지만 아님.
2는 an atta를 버려라 때 나옴.
그대의 것이 아닌 것을 버려라 에서.
위대한 비구니에서 atta를 확립했다고 실체(궁극)가 되었다고 2군데에 나온다.
자등명의 직역은 atta를 섬으로 이다.
스스로를 귀의처로 삼고 남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에서
남은 the other one으로 atta가 아닌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이다.
단어로는 atta를 실체로 썼지만 나중에는 단어를 쓰지 말라는 뜻이 된다.
근본 법문의 경에서 다양성(세상)을 즐기지 말라와
하나(열반)도 즐기지 말라가 나오는데 이때 atta 다.
이것만 잡아서 하면 안 된다.
산스크리트어에 니르아트만이 있지만 상윳따에는 안 나온다.
다만 외도가 세존께 atta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라고 단도직입적으로 여쭐 때는 대답을 안 하심.
아난다존자가 여쭈니까 있다고 인정하면 힌두는 atta를 영혼으로 쓰니 상견주의자를 긍정하는 것이 되고, 없다고는 차마 말씀을 못하시는 것은 궁극이 있으니까.
있다면-- 실체 없이 변하는 것 부합되는가?
깟짜나곳따 경(S12:15)
그때 깟짜나곳따 존자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린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깟짜나곳따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바른 견해, 바른 견해’라고들 합니다. 세존이시여 바른 견해는 어떻게 해서 있게 됩니까?”
“깟짜야나여, 이 세상은 대부분 두 가지를 의지하고 있나니 그것은 있다는 견해와 없다는 견해이다.
깟짜야나여, 세상의 일어남을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는 자에게는 세상에 대해 없다는 견해가 존재하지 않는다. 깟짜야나여, 세상의 소멸을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는 자에게는 세상에 대해 있다는 견해가 존재하지 않는다.”
“깟짜야나여, 세상은 대부분 (갈애와 사견으로 인해) 집착과 취착과 천착에 묶여 있다. 그러나 (바른 견해를 가진 성스러운 제자는), 마음이 머무는 곳이요 천착하는 곳이요 잠재하는 곳인 그러한 집착과 취착을 ‘나의 자아’라고 가까이 하지 않고 취착하지 않고 고수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괴로움이 일어날 뿐이고, 단지 괴로움이 소멸할 뿐이다.’라는 데 대해서 의문을 가지지 않고 의심하지 않는다. 여기에 대한 그의 지혜는 다른 사람을 의지하지 않는다. 깟짜나여, 이렇게 해서 바른 견해가 있게 된다.”
“깟짜야나여, ‘모든 것은 있다’는 이것이 하나의 극단이고 ‘모든 것은 없다’는 이것이 두 번째 극단이다. 깟짜야나여, 이러한 양 극단을 의지하지 않고 중간에 의해서 여래는 법을 설한다.
무명을 조건으로 의도적 행위들이, 의도적 행위들을 조건으로 알음알이가, 알음알이를 조건으로 정신. 물질이, 정신. 물질을 조건으로 여섯 감각장소가, 여섯 감각장소를 조건으로 감각접촉이,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이,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 죽음과 근심. 탄식.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이 발생한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가 발생한다.
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하기 때문에 의도적 행위들이 소멸하고, 의도적 행위들이 소멸하기 때문에 알음알이가 소멸하고, 알음알이가 소멸하기 때문에 정신. 물질이 소멸하고, 정신. 물질이 소멸하기 때문에 여섯 감각장소가 소멸하고, 여섯 감각장소가 소멸하기 때문에 감각접촉이 소멸하고, 감각접촉이 소멸하기 때문에 느낌이 소멸하고, 느낌이 소멸하기 때문에 갈애가 소멸하고, 갈애가 소멸하기 때문에 취착이 소멸하고, 취착이 소멸하기 때문에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하기 때문에 태어남이 소멸하고, 태어남이 소멸하기 때문에 늙음. 죽음과 근심. 탄식.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이 소멸한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가 소멸한다.”
여기에서 보듯이 세상을 있다고 말하면 안 된다.
세상의 소멸을 주장하셨는데-- 공부를 안 하면 안 되니까.
금강경의 무아는 너무 오버한 것이다.
무색계도 비색계인데 an이다.
유상 다음에 무상이 아니고 비상임.
이 세상을 모두 초월한 궁극 있음.
무 색수상행식 이지 무 atta 가 아니다.
잘못 된 번역이다.
결론은 atta가 나온다.
남방의 고승들도 궁극에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전지전능이 있는데 견해가 무섭다.
한국 불교도 답습을 해서 아무것도 없고 괴로움만 벗는다고 이야기하기도.
부처님께서 해탈 후에 대해 대답을 안 하시니......
시설하지 않는 경(?)에서 바닷물을 헤아릴 수 없듯이 설명하시며 별 달 지수화풍이 없는 그곳이 있다고 설명하시는데 그곳이라는 곳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공무변처부터 이 말씀이 이해가 된다.
가이 없는 지복이 있다.
그래서 깨달은 것 맞다고 인정.
이면에 모두 비추는 궁극으로 전지전능한(영화 상영하는) 것이 있다.
꽃거지님--친구들이 떨어져 나갈 때 인과라고 생각하고 내가 고칠 수 없다라고만 생각하면 안 되는데 그전의 틀이 이틀을 만들고 하는데 어떻게 해결을?
갈애는 왜 생겼는지?
원장스님
소금덩이 경에서 보듯이 인과를 똑같이만 받는다면 운명론이고 발전이 없지만 공부를 하면 비운명이 작용하여 인과를 받지만 똑같이가 아니고 개선이 된다.
앙굴리마라님이 사람을 많이 죽이고 지옥에 갈 상태였지만 공부지으시고 해탈하시며 돌맹이 몇 개 맞으시고 끝이 났다.
죄는 적어지고 복도 마찬가지로 늘어난다.
윤회의 무명의 시작은 결코 알려질 수 없다고 경에 계신다.
중요한 것은 똑같은 10명이 태어나도 점점 서로 달라진다는 것이다.
형이상학적으로는 계정혜의 선택을 하면 되고,
형이하학적으로는 탐에 머무르기만 하고 분발을 해야 한다.
대패 경처럼 좋은 선택, 분발한다고 금방 되는 것은 아니다.
오전법문에 모르고 지은 죄가 크다고 한 것은 분발만 하지 계정혜를 안 하면 잘 안 된다.
그래도 잘 되는 자는 전생에 복을 쌓은 자다.
계정혜를 하면 하늘과 사람이 돕는다.
다른 종교처럼 계만이라도 해야.
그리고 분발을 해야.
착하다와 계율을 하는 것은 다르다.
모르면서 착하기만 한 자는 아직 저열하다.
초기경전의 법을 아는 자 + 분발 = 아주 좋다.
불교 80 평생을 해도 법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진석님--보고 듣고 알고 탐구하고 하는 그 무엇이든지 생각으로 상정하는 것은 아니다 라고 이해하는 것이 맞습니까?
원장스님
예 맞습니다. 이 세상만 아는 것이죠.
그래서 무심삼매가 되어 대상이 있는 분리된 아는 것은 전체의 궁극이 아니다 를 체험합니다.
과거 미래의 사유는 쓸데 없는 것이고 사유를 하려면 오직 경전입니다.
궁극이 되기 전의 전초전이죠.
소크라테스가 죽을 때 육체가 내가 아니다 하고 담담한 것은 해탈.
마음도 아니다--길가다가 삼매--무심 6선--마음이 실체가 아니다를 앎.
부처님께서 쭌다의 공양을 독이 있다고 알고도 드심.
이제 그러나 뒷 삼매가 없으니까 이해를 못하고 철학이 되어 천상이나 이데아 정도로 앎.
복덩이님--열반이 살아서 성불과 죽을 때 벗는다고 2가지.
원장스님
무여열반이 양면해탈이고 유여열반이 혜해탈인데 남방에서는 위빠사나만 하니까 혜해탈만 인정.
상곤님--남방 대념처경을 열심히 하는데도 유여열반이 거의 안 될까요?
원장스님
계목 100% 되는 것 쉽지 않다.
몇 십년을 지켜봐야 알 정도다.
욕망 중에 돈 등 큰 것 말고 미세한 것은 아주 힘들다. 숨겨져 있다.
그래서 10단계로 비추어 보아야 된다.
고승으로 떠받드니 착각이 생기고 잘 모를 수 있다.
법으로 공격하면 알아 볼 수 있다.
사다함은 욕망이 희박해서 1회만 더 오는데 스스로만 알고 다른 사람은 봐도 모른다.
공부가 되면 적나라 하게 보인다.
거짓말을 제일 안 하시는 분이 달라이라마이고 거짓말을 과장까지도 없으면 해탈.
국가가 걸리고 부처님 환생이라고 믿는데도 해탈 안했다고 함.
계목 100%는 삼매가 되어야 할 수 있다.
고귀한 존재가 되어야.
즉 중생은 계율 100%가 안 된다.
경전공부는 신들이 도우려 노력한다.
알마님--부처님 제자 신들이 마음을 일으켜서 왜 도울까요?
원장스님
경전의 해석이 제대로 안 되니까 무심삼매 이상이 되어야 하니까.
말법에서는 제일 정법이니, 공부된 사람이 있어야, 이제라도 안 나오면 큰일이 나니까.
마하리쉬님이 1951년에 돌아 가시는데 오랜만에 해탈하신 분이시다.
불법을 말 안했어도 사다함으로 오신 분인데 역할이 삼매가 필요 없다를 개선하는 것이었다.
경에 불법승+삼매가 없으면 말법이라고 계신다.
나는 누구인가? 의 구체적인 뜻은 피, 몸 모두 부정해 가니까 나 나 나 하는 것만 올라오는 일심이 되었다가 그것도 사라지니 공무변처로 무심삼매가 진행함.
조사들이 앉아있다고 깨닫냐? 라고 하는 것은 활활발 하는 것은 혜해탈을 이야기 한 것.
마하리쉬님은 평생 아루나찰라에서 사람 앞에 계속 지고 상태가 계속되는 본연삼매로 있었는데 1000년 내에 없었다.
경에 숲에서 방일하지 말고 삼매하라고 계신는데 무심이 안 된자는 활활발만 이야기 한다.
배운적이 없이 삼매의 증거가 되심.
사여의족 (열의, 정진-일심, 마음-공무변처, 관찰-6선 이후) 과 사정근으로 왕근기라서 가능.
두레박이 가끔 올라온다 안 올라온다 라고 들뜸과 후회를 말하고
전생에서 사성제를 알았다고 생각되는 것이 그림으로 12연기를, 세상의 일어남도 설명.
무심삼매가 되면 연기가 알아진다. 어릴 때 스님도 10연기까지 아셨다고.
그런데 마하리쉬님은 삼매의 방법을 못가르쳤다.
나는 누구인가? 는 어렵다.
여기서는 경을 모를 때도 자연삼매 등 여러 가지 삼매을 하고 있었고, 경전의 여러 가지 삼매가 체험적이 되니까 2000년간 안 나왔던 방법을 제시하며 세상에 펴고 나갈 때가 된 것이다.
높은 힘이 돕는 이유가 때가 되었고 인도가서 삼매가 가야된다고 16수 6회 등으로 확실히 아셨다고.
진석님--청정도론의 수행법에 관해서.
원장스님
흙을 둥그렇게 빚어서 삼매를 연습한다든가 숨을 코에서 관찰한다든가 등은 나중에 만들고 위배된다.
나무 석가모니불
첫댓글 "과거, 미래의 사유는 쓸데 없는 것이고 사유를 하려면 오직 경전입니다."
부처님과 법에 대한 믿음과 부끄러움, 창피함이 공부의 전부..
믿음의 3요소인
법문듣기를 즐거이 함,
계목을 지키는 사람과 가까이 함,
아낌없이 보시함!
늘 열의와 정진의 모범이 되어 주시는 무무명님께 감사드립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