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백동
‘재빼기’가 죽백(竹柏)으로
조선시대 죽백동은 양성현 반곡면(盤谷面)이었다. 반곡면은 양성현의 읍치(邑治)로부터 20리(약 12km)였다. 1899년 양성군지에 따르면 반곡면에는 침교리(砧橋里, 방아다리), 청룡리(靑龍里), 진촌리, 관동리 같은 자연마을이 있었다. 여기에서 침교리, 청룡리, 관동리는 현재의 죽백동, 월곡동, 청룡동을 말한다. 하지만 진촌리는 현재의 어떤 마을인지 알 수 없고 월구리, 내촌, 재빼기, 가내 같은 마을은 기록에 없어 당시에는 독립된 마을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침교리, 내촌, 죽백리가 통합되어 안성군 원곡면 죽백리가 되었다. 1983년에는 시군(市郡) 간 행정구역 조정에 따라 평택군으로 편입됐으며, 1986년 평택읍이 시(市)로 승격되면서 비전1동의 관할을 받게 되었다.
죽백(竹栢)이라는 지명은 죽백3동의 자연지명인 ‘재빼기(또는 댓빼기)’에서 왔다. 그래서 재빼기를 ‘원죽백’으로 부른다. 재빼기는 고개를 뜻하는 ‘재’의 사투리다. 우리나라에서는 산을 넘는 고개를 ‘재’라 하고 산맥을 가로지르면 ‘령(嶺)’, 높은 산이나 험한 산맥을 넘는 고개는 ‘치(峙)’라고 불렀다. ‘재빼기’는 조선시대 삼남대로의 요로(要路)였다. 삼남대로는 갈원(칠원1동)에서 가내를 지나 재빼기를 넘어 배다리로 넘어갔다. 주민들은 재빼기를 ‘댓빼기’라고도 부른다. ‘춘향전에서 이도령이 춘향이를 데리고 한양으로 올라가다가 고갯마루에서 담뱃대를 빼물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소설의 내용에 민중들의 상상력이 덧붙어 만들어진 이야기다.
죽백동은 죽백 1,2,3동으로 나뉜다. 세 마을은 1914년 이전까지만 해도 서로 다른 마을이었다. 죽백1동은 방아다리다. 한자로는 침교라고 한다. 마을 입구 표석에도 ‘침교’라고 새겼다. 죽백2동은 내촌이다. 과거에는 독립된 마을이 아니었지만 근대 전후를 거치며 분동됐다. 죽백3동은 앞서 말한 재빼기다. 재빼기는 삼남대로가 넘어가는 고개에 마을이 형성되어 유래되었다. 세 마을 가운데 가장 큰 마을은 죽백1동 방아다리다. 그런데도 1914년 행정구역개편 과정에서 침교리를 버리고 ‘죽백리’가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짐작할 때 죽백3동에 일본인 과수원이 있어 그러지 않았을까 생각될 뿐이다.
죽백동 일대는 배 과수농업이 발달했다. 주민 이기종(남, 1931년생)은 죽백동 일대 최초의 과수원은 산직촌(비전1동에 속했다가 이화택지개발로 폐동됨)과 죽백3동 사이에 있었던 미아사키 과수원이라고 했다. 일제 말에는 배다리저수지 부근에 조선인이 6만평짜리 영풍농원을 만들었고 죽백동에는 꽃밭재농원, 청룡동에는 조일농원을 비롯한 여러 개의 과수원이 조성됐다. 산직촌 일대가 ‘배나무골’ 또는 ‘이곡(梨谷)’이라고 부르게 된 것도 일제강점기 과수농업의 영향이다. 해방 후에는 과수원의 수가 더욱 증가했다. 일본인과 조선인 과수원에서 재배기술을 익혔던 사람들이 1970년대 후반 야산개발을 하면서 너도 나도 배 과수재배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디딜방아로 다리를 놓았던 방아다리
죽백1동 방아다리는 죽백동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마을 규모도 한국전쟁 직후 100여 호였고 지금은 전원주택을 제외하고도 120호가 넘는다. 이 마을은 양성군 반곡면 침교리였다. 침교(砧橋)란 ‘방아다리’의 한자어다. 주민들은 ‘침교’라는 지명보다 방아다리라고 부른다. 방아다리 마을 앞으로는 청룡천이 흐른다. 청룡천은 넓지는 않지만 깊어서 징검다리로 건넜다. 그러다가 마을에서 사용하던 디딜방아를 가져다가 외나무다리를 놨다. 침교 다시 말해서 ‘방아다리’는 그렇게 해서 유래됐다. 목교였던 방아다리에 100여 년 전 돌다리가 놓였다. 마을주민 김종학의 조부가 힘이 장사였는데 혼자 3백근짜리 바위를 져다가 개울가에 다리를 놓았기 때문이다. 너럭바위는 1939년(소화14년) 대가뭄 때 수여지 아래에 ‘방아다리 저수지’를 건설하면서 땅속에 묻혔다. 그리고 저수지가 만들어진 뒤로는 둑이 다리를 대신했다.
방아다리 마을을 일군 것은 정씨, 김씨, 이씨다. 하지만 대부분 사라졌고 지금은 나중에 입향한 양천 허씨와 양성 이씨가 대성(大姓)을 이룬다. 두 성씨 중에는 양천 허씨의 입향 시기가 조금 빠르다. 과거 성씨는 양천 허씨가 8호였고 양성 이씨가 40~50호였다. 그러다가 이촌향도로 인구구성이 변하면서 허씨가 20~30%, 이씨가 60%를 차지한다. 양천 허씨는 약 300년 전 안성시 원곡면 지문리에서 이주했다. 입향 후에는 허국의 효자각을 건립하는 등 상당한 세력을 구축했지만 현재는 많이 약화된 상태다.
방아다리의 대성(大姓)인 양성 이씨는 상서공파의 계파인 주부공파 후손들이다. 유래비에 따르면 이들은 본래 안성시 양성면 동항리 교촌에 거주하다가 조상들의 묘(墓)가 실전되고 어려움이 닥치자 1848년 경 회의를 열어 사패지가 있었던 죽백동 세장산 자락으로 이거(移居)했다. 세장산에는 시조 이수광부터 5세(世)까지 설단을 만들었다. 또 4세(世) 조상으로 상장군이며 왕의 부마였던 이영주의 묘는 1984년 실전됐던 것을 경기도 광주시 초원면 무갑산에서 찾아 이장했다. 고려 말의 선비 이옥은 충신으로 이름났다. 이옥은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들어가 의리를 지켜 후대의 칭송을 받았다. 양성 이씨는 조선조에 위세가 약해졌다. 관직에 진출했던 인물도 있지만 크게 영달하지는 못했다.
양성 이씨 죽백동 입향조는 마전군수를 지낸 이유직이다. 마전공 이유직은 후손 이기종(남, 1931년생)의 위로 14대조라고 했다. 그렇다면 대략 약400여 년 전 입향한 셈이다. 이기종은 양성 이씨의 입향설화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전공은 삼남대로를 따라 죽백동으로 내려왔다. 재빼기(댓빼기)에서 5백 미터쯤 내려오면 대문재가 있고 그곳에는 하마비가 있었다. 마전공이 하마비 앞에서 말에서 내려 죽백1동 방아다리 쪽으로 걸어 들어오는데 마을 앞 한복판에 작고 아름다운 연못이 있고 주변 들이 넓어 누대(累代)가 살아갈 터전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터를 잡고 집을 지어 정착했다. 죽백동에 거주하던 후손들은 나중에 공도방면의 점촌으로 이거했다가 조선 말기 다시 방아다리로 돌아왔다.”
이유직의 후손들은 어란포 만호, 파지도 만호 등 무관직과 주부 등 참하관으로 관직에 진출했다. 중앙에서야 하찮은 벼슬이지만 유력가문이 많지 않은 평택지역에서는 대단한 위세를 누렸을 것이다. 죽백1동의 양성 이씨는 지금도 마을의 중심세력이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부자들은 대부분 양성 이씨였고 지금도 마을운영을 주도하며 경제적으로도 부유한 사람이 많다.
죽백1동에는 옛스런 지명(地名)들이 많다
죽백1동 방아다리 마을은 산장너머(산장모퉁이, 1반), 속뜸(속두모퉁이, 2반), 강당말(3반)으로 나뉜다. 세 마을은 행정 동(洞)으로는 같은 마을이어서 마을회관이나 공공시설은 공유하지만 체육대회라든가 각종 행사에서는 나뉘어 경쟁한다. 산장너머는 일제강점기 일본인 산장(가옥)이 있어서 유래됐다. 일제강점기 방아다리에는 일본인 서너 명 살았는데 이들의 집 가운데 하나가 산장모퉁이 부근에 있었다고 한다. 속뜸은 안골, 안말처럼 안쪽에 자리 잡은 마을지명이고, 강당말은 옛날 글을 가르쳤던 서당이 있어 유래되었다.
경작지는 여러 곳에 흩어져 있다. 그 가운데 월곡동 사이의 용소골, 죽백초등학교 앞의 수여지, 기남방송국 앞의 맹자골, 고속도로 너머의 선바위(입암), 방아다리와 청룡동 사이의 해뜸이가 대표적인 경작지다. 효지골이라고도 부르는 수여지에는 물이 많았고 그 아래에는 논방죽도 있었다. 선바위에는 커다란 입석(立石)이 세워져 있었다. 선바위 고속도로 아래에는 점촌도 있었다. 예로부터 점촌은 수공업자 마을로 지금도 논밭을 갈다보면 사기조각과 옹기조각이 출토된다. 해뜸이는 점촌 옆에 있다. 옛날에는 화약더미가 있었다고 해서 ‘해끼미’라고도 부른다. 해끼미 옆에는 샘골도 있다. 샘골은 조선시대 역적모의를 했던 군사기지라는 이야기가 전승된다. 조선시대 진위, 양성, 안성과 관련된 역적모의라면 영조5년(1728)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무신 난)’ 밖에는 없다. 어쩌면 양성 이씨가 죽백1동 방아다리와 양성면 동항리, 그리고 점촌을 오가며 살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인좌의 난(무신난)과 연루됐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기남방송국 아래는 맹자골이다. 맹자골에는 옻우물이 있다. 옛날 옻우물에서는 칼이나 화살촉 등 병장기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개경논은 방아다리 앞 청룡천 건너편에 있었다. 옛날 청룡천은 물고기가 많았고 수심이 깊어서 징검다리를 놨다. 그래서 여름철이면 마을청년들이 천렵을 했다. 밤에는 도깨비도 자주 출몰했다. 깊은 밤 도깨비에 현혹되면 정신을 잃고 가시덤풀이나 낭떠러지로 가게 해서 죽거나 다치게 했기 때문에 남녀노소 겁을 먹었다. 수여지는 본래 물이 많아서 둑을 쌓아 놓기만 하면 금세 물이 찼다. 그래서 일제 말 수여지 아래에 논방죽을 만들었다. 용이동 신흥동 마을과 강당말 사이의 골짜기는 갈매울이다. 갈매울에는 일제강점기 갈매울과수원이 있었다. 죽백초등학교 앞을 지나 신흥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는 꽃밭재다. 꽃밭재에도 일제 말 꽃밭재농원이 있었다.
경부고속도로 상행선 안성휴게소 앞은 능골이다. 능골에는 큰 묘가 있었다. 전해오기로는 이곳이 풍수지리적으로 임금 제(帝)자의 중앙에 위치해서 묘를 쓰면 제왕이 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전설로만 내려올 뿐 위치를 알 수 없었는데 한국전쟁 때 피난 온 이완주가 능의 위치를 확인하면서 세간에 알려졌다. 기남방송 아래 맹자골은 찬우물이 있어 냉정골로도 부른다. 그밖에도 죽백동에는 길우리, 둑골터, 무지미, 버들어지, 시계배미, 시어지, 안수자리같은 들판과 매봉재, 모래봉, 삼태봉같은 봉우리가 있다.
죽백2동 내촌의 우리말 이름은 ‘안골’
죽백2동은 내촌이다. 마을은 북동쪽으로만 살짝 열려 있을 뿐 마을 전체가 삼태기 모양처럼 둘러싸여 포실하다. 내촌(內村)은 우리말로 ‘안골’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내촌이라고 불러서 이제는 안골이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있다.
내촌은 본래 약 30호가 채 안됐다. 그러다가 근래 전원주택이 많아지고 이주민이 늘어 마을규모가 커졌다. 성씨는 매우 다양하다. 가장 많은 성씨는 양성 이씨 군사공파로 마을 전체의 절반가량을 차지한다.
내촌은 예로부터 물이 귀했다. 토질도 척박했다. 그래서 우물을 파는 것이 큰 역사(役事)였다. 마을에서는 좋은 우물을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래서 작은 마을인데도 공동우물이 세 개나 있었다. 그 가운데 두 개는 건수가 나와 허드렛물로 사용했고 마을회관 앞 공동우물만 식수로 썼다. 공동우물 한 개로 마을 전체가 먹다 보니 늘 수량이 부족했다. 지금이야 수도꼭지만 틀면 맑은 물이 콸콸 쏟아지지만 과거에는 물과 땔감이 없으면 생존할 수가 없었다. 물 깃는 일은 가사를 책임진 여성들이 몫이었다. 그래서 부지런한 여성들은 새벽 일찍 일어나 공동우물로 달려갔다.
마을에서는 새마을사업을 하면서 간이상수도를 설치했다. 물 때문에 고생을 했던 주민들이 간이상수도 설치를 간절히 원했기 때문이다. 전기가 가설되면서부터는 관정을 깊이 파서 집집마다 수도를 놨다. 10여 년 전에는 광역상수도가 들어온다. 주민들은 광역상수도를 팔당물이라고 한다. 팔당물이 들어오면서 물 때문에 고생했던 일들은 옛 추억이 됐다. 애지중지했던 공동우물도 수명을 다하고 메워졌다.
구릉으로 둘러싸인 내촌에서 밖으로 나가려면 크고 작은 고개를 넘어야 했다. 그래서 내촌마을은 구릉이 둘러싸기도 했지만 고개가 감싸 안았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마을에서 재빼기로 넘어가려면 골품고개를 넘었다. 골품고개를 넘으면 곰봉고개였다. 골품고개와 곰봉고개를 넘어 가내방면으로 나가는 길은 평택장으로 걸어가는 지름길이기도 했다. 마을 뒤를 휘돌아 오르는 긴 고개는 왕지미고개다. 왕지미고개는 왕지미들로 건너는 길이었다.
마을의 주 경작지는 용수골, 집너머, 행금틀, 안수자리, 안골, 쇠마답에 있었다. 마을 입구의 쇠마답은 옛날 소에게 풀을 먹이던 곳이다. 뒷산 산봉우리는 삼태기 모양이어서 ‘삼태봉’이다. 마을 입구 봉우리는 앞산과 안산이다. 풍수지리적으로 안산은 주작에 해당된다. 주민들은 내촌은 주작이 보호하여 예로부터 험한 일을 겪지 않았다고 자랑했다.
내촌에서는 음력 정월에 당제를 지냈다. 제당은 앞산에 있었다. 주민들은 정월이면 정결한 사람으로 제주(祭主)를 뽑고 각종 금기를 지켜가며 당제를 지냈다. 당제는 1980년대 초 중단됐다. 이촌향도로 젊은 사람들도 줄어들고 세상이 변하면서 당신(堂神)에게 의지하는 마음이 식었기 때문이다.
삼남대로(三南大路)의 길목 죽백3동
해방 전후 죽백3동은 30호가 안 됐다. 자연마을은 재빼기와 성안, 진등, 가내다. 재빼기는 가장 큰 마을이고 성안은 마을 서남쪽 6호 내외의 작은 마을이다. 재빼기는 1911년에 작성된 조선지지자료에 ‘대백이’라고 기록됐다. 어쩌면 그 전에도 재빼기보다는 댓빼기 또는 대백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주민들은 댓빼기라는 지명유래를 두 가지로 설명한다. 하나는, 옛날에는 상민(상놈)들이 양반 앞에서 담뱃대를 물고 다니면 혼났기 때문에 옷 속에 숨겨 다녀 유래되었다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이몽룡이 춘향이를 데리고 한양으로 올라가다가 고갯마루에서 담뱃대를 빼물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주장들은 많지만 대다수 주민들은 죽백3동을 재빼기라고 부른다. 이것이 1914년 행정구역개편 과정에서 음이 비슷한 한자로 변하면서 ‘죽백(竹柏)’이 되었다.
주민들은 옛날 성안 바깥쪽으로는 산성(山城)이 있었다고 말했다. 지금은 과수원을 만들며 대부분 유실됐지만 해방전후만 해도 성곽의 흔적이 뚜렷했다. 가내는 평택-원곡 간 도로 변에 있었던 주막거리다. 대 여섯 집 정도가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이었는데 일제강점기만 해도 삼남대로와 평택-용인 간 국도45호선이 교차해서 사람과 물자의 통행이 많았다. 가내에서는 주막이 세 집이나 있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가내주막에는 작부가 노래도 하고 술도 따라줬다. 예나 지금이나 풍류와 술을 좋아하는 남자들치고 아가씨 있는 술집을 마다할 리 없다. 그래서 주막집은 날로 번창했는데, 덕분에 장날 가마니 팔아 꿍쳐둔 돈을 날린 남정네들이 많았다고 한다. 성업(成業) 중이던 가내주막은 한국전쟁 뒤 문을 닫았다. 삼남대로도 쇠퇴했지만 한국전쟁의 좌우익 갈등이 가져온 결과였다. 주막이 사라진 뒤에도 가내마을에 민가가 몇 집 있었다. 2000년대 전후에는 평택순두부를 비롯해서 몇몇 식당들도 영업했다. 지금도 비전1동 사무소를 비롯해서 소고기집, 추어탕집이 들어서 영업을 한다.
재빼기에서 내촌 방향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대문재라고 한다. 조선시대 대문재에는 하마비가 세워져 있었다. 그래서 말을 타고 넘어가던 사람도 대문재 앞에서는 내려 걸어가야 했다. 통상 하마비는 객사나 향교, 사당과 같은 신성한 곳에 세우기 마련인데 대문재와는 무슨 연관인지 알 수 없다.
죽백3동은 삼남대로가 지나는 구릉지대다. 토질이 척박하고 메말라서 과수농업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무척 가난했다. 1960년대에는 안성군의 ‘13대 한해(旱害)지역’에 선정될 정도였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과수농업을 시작했다. 일제 말에는 조선인들도 구릉을 깎아 배나무를 심었다. 가난한 주민들은 과수원의 품꾼으로 일했다. 일은 고됐어도 임금은 후한 편이어서 먹고 살기는 괜찮았다.
<인터뷰>
▸죽백1동 : 구자성(남, 1937년생), 이정종(남, 1938년생, 2012년), 이종성(남, 1937년생), 이갑종(남), 이기종(남, 1931년생)
▸죽백2동 : 박장수(남, 1928년생) 외
▸죽백3동 : 이계환(남, 1933년생), 윤태헌(남, 1934년생) 외
첫댓글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