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벌 편
석야 신웅순
필자가 서벌 선생을 만난 것은 80년 대 중반, 한국시조시인협회 여주 세미나 때였다. 여주 문화원장의 인사말도 있었는데 여주는 조선 후기 시인 석북 신광수가 여강록을 남길 만큼 유서깊고 아름다운 고을이라고 소개했다. 문화원장에게 필자가 석북 8손이라고 말했더니 매우 반가워하면서 어디 석북의 시 전모를 구할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후에 필자는 석북 4남매 시인의 시집을 묶은 『숭문연방집』을 그해 원장님께 보내드렸다.
서벌 선생은 그 말을 듣고 ‘그 유명한 채재공의 친구 석북 시인이 자네 선조인가’ 하면서 석북 선생을 가까이에서 본 듯 말석 시인인 필자의 손을 덥썩 잡으며 매우 반가워했다. 그만큼 선생은 시를 사랑했다.
시인은 필자에게 이런 말씀을 했다.
석북과 동시대의 인물이기도 했던 채재공의 『번암집』을 보면 시조가 음악상의 명칭으로만 불리워진 것이 아니라 당시에도 문학상의 명칭으로도 불리워졌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시인이 발굴했던 자료이다.
余嘗侯藥山翁 翁眉際隱隱有喜色 笑謂余曰 今日吾得士矣 其人姓黃思述其名 貌如玉 兩眸如秋 水袖中出詩若于篇 皆時調也 而其才絶可賞 請業』於余 余肯之 君其興之遊……
내 일찍이 약산옹을 찾아뵈었더니 그 어른의 눈썹 사이에 즐거워하는 빛이 은은하게 서려 있었 다. 미소띤 어조로 내게 말씀하시기를,“오늘 선비를 얻었다네. 그의 성은 황씨이고 이름은 사술이 라하지. 얼굴은 옥같고 두 눈동자는 가을 하늘처럼 맑더군.” 하면서 소매 속에서 시 몇 편을 꺼내 시었다. “이것이 다 시조인데 그의 재주가 썩 뛰어나서 칭찬할 만하다네. 내게 수업을 요청하므로 허락했지. 자네도 그 사람과 잘 사귀도록 하게.” 하시었다
이런 교감이 있은 후 필자를 만날 때마다 ‘어이, 석북 후손’ 이렇게 부르며 필자에게 각별히 대해주시는 것이었다. 그 때의 빛나는 눈빛과 시조에 대한 열정을 필자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시인과는 그런 인연이 있었다.
엊그제 같은데 30년이 훌쩍 넘었다. 그분은 이미 고인이 되었고 필자는 교수 정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다시는 뒷걸음 칠 수 없는 세월이 되었다.
서벌 선생에 대해 무언가를 쓰고 싶었는데 이제야 쫓기듯 필을 들었다.
내 오늘
서울에 와
만평 적막을 사다
안개처럼 가랑비처럼
흩고 막
뿌릴가 보다
바닥난 호주머니엔
주고 간
벗의 명함……
- 「서울․1」
시조 시인들에게 회자되었던 명작이다. 나그네의 처절한 비애감! 만평의 적막을 사다니. 시인에게는 적막보다 더 비싼 땅이 어디 있으며 그의 형이상학적 정신은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말했을까.
원은희는 『서벌 시조연구』 머리말에서 이 시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시민으로 살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시정신으로 사회적 통념에 집중했던 기존 시단과 맞선 그 의 활약은 시조부흥과 시조 대중화로 이어져 현대시조의 면모와 위상을 드높였다. 주제의 차원에 서 혁신을 이룬 작품인 「서울․1」은 정형시와 자유시의 경계를 초월한 명작으로 현대시조의 전 범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실존주의 경향을 띤 현대시조 작품들이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시인은 달랐다. 열정과 정서가 달랐고 현실과 형태가 달랐다. 기존 시조 그 가치마져 다른 그는 천생 시인었다.
1964년「관등사」로 시조문학지에 3회 추천 완료되었다. 한국시조작가협회 창립 위원이었으며 시조동인지 『율』을 창간, 주관했다. 시조집으로 『각목집』,『걸어다니는 절간』,사설시조집 『휘파람새 나무에 휘파람으로 부는 바람』등이 있으며, 중앙일보 시조대상, 남명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한국문협이사, 한국시조시인협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대전 유성구 구암사 납골당에 안장되어 있다.
문틈으로 보는 달과 뜰에서 보는 달과 언덕에서 보는 달이 서로 다르다.
시인은 세상을 어떻게 보고 또한 자신을 어떻게 보았을까.
발에 감긴 밤하늘이 시려서 우는 기러기
30원이 없었던가
막차 놓친 외기러기
못 가눠
뽑은 외마디
둘 데 찾는 이 기러기
- 「서울․3」전문
선생은 자신을 막차를 놓친 외기러기라고 했다. 물론 시인과 텍스트의 화자는 다를 수 있으나 확언컨대 선생은 분명 외기러기였다. 30원이라는 상징적인 액수는 시인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키워드이다. 시인은 몸 하나 가눌 수 없고 둘 데가 없어 ‘꺼억꺼억컥’ 기러기 외마디 소리를 뽑아냈다. 얼마나 절절했으면 시린 밤하늘을 혼자 뽑아내는 것인가. 아마도 가난은 일생 그의 자화상이 아니었을까.
시인은 1970년 32살 때 군에서 제대, 상경했다. 만만치 않은 것이 서울 생활이다. 문학이라는 외줄기에 기대어 살아야만했던 시인에게 서울 생활은 고통, 그 자체였다.
시인은 1985년 47세 때 별거. 2001년 뇌출혈로 쓸어질 때까지 17년 동안 혼자 살았다. 이 즈음에 쓴 것이리라. 그의 삶을 생각하면 30원의 상징은 자명해진다.
모든 문학 작품은 자신의 삶을 벗어나 존재할 수가 없다. 무심코 던진 한마디 말, 무심코 칠한 낙서, 무심코 그린 그림도 결국 자신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잃어버린 기억도 무의식도 수천 물길로 길어올리는 것이 시이다. 시는 거짓말을 할 수가 없다. 사실은 아니되 진실인 것이 바로 시이다.
아내에 대한 또 한편의 시조 「누설」이 또한 가슴을 친다.
제주섬 감싼 바다를 가슴에 넣고 사는
아내는 여전한 섬
오로지 섬으로 산다.
해와 달
별이란 별들
다 섬이라 말하면서.
그가 온섬(全島)으로 드센 파도 일으킬 땐
반섬(半島)인 나는 다만
늘 밀리는 기슭이다.
아이 둘
가파도․마라도
온 섬의 편이 되고
- 「누설」전문
아내는 제주섬, 아이 둘은 가파도와 마라도. 가파도는 우리나라 최남단 마라도와 제주도의 중간에 위치한 섬이다. 둘 다 파도가 가파른 제주도에 딸린 섬이다. 지형도 지형이거니와 아이들도 다 엄마 편, 자신은 언제나 밀리는 기슭이다. 가정에서도 이렇게 버림을 받았으니 가장으로써 심정은 오죽하였으랴. 적막은 깊어지고 그럴수록 술에 대한 의존도는 심해져갔다. 시에서 밥이 나오는가 쌀이 나오는가 아니면 술이라도 나오는가. 삶은 현실이다. 늘 밀리는 기슭으로 출렁거리는 그의 시조. 시인들의 운명이란 바로 이런 것인가 생각하면 씁씁하기만 하다.
지금도 아버지들의 신세와 다를 게 없는 것을 보면 이 시조가 시사하는 바는 크다.
살그머니 집을 나와 어슬렁거리는 허씨
시청역 지하도에서
웅크린 채 날밤 샌다.
무슨 말 나올 듯하지만
목안 넘지 못한다.
한 때 잘 나가던 가장 허씨 그는 이젠
허기진 아나키스트
가족은 흩어진 구름.
세상을
어떻게 버려야할지
그것조차 모르는 그.
아닌 밤 홍두깨도 마른 하늘 날벼락도
시방은 두렵잖은
사금파리 깔린 마음
허씨는
빈 항아리였다가
어떤 판에 박살났나.
허공, 지하 허공에 한산(寒山)의 달 오르고
습득의 빗자루
떵떵 언 얼음판 쓸어
드디어 허씨는 일어선다 갈 데 가기 위하여
- 「그 허씨」전문
중산층에서 갑자기 빈민층으로 추락한 한 노숙자의 실상을 이렇게 고발했다. IMF사태가 가장을 직장에서 노숙으로 몰아낸 것이다. 노숙자와 다름 없는 시인도 어느 노숙자의 허씨에게 자신을 투영시켜 노래했다. 이 시조가 더욱 공감이 가는 이유이다. 자신은 아나키스트이며 사금파리이며 빈항아리이다. 시인에게 세상 앞은 언제나 아슬아슬한 것들뿐이다. 그러나 살아야겠기에 빗자루를 들어 꽁꽁 언 얼음판이라도 쓸어야할 게 아닌가. 갈 데를 찾기 위해 일어서야 한다. 어떻게 해서라도 고통에서 벗어나야 한다. 왜 그는 자신을 저항의 대명사 아나키스트라고 했을까. 그리고 사금파리, 빈항아리라고 했을까.
이런 현실과 정치에 대해 원은희는 시인의 시조를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서벌은 민중과 더불어 뼈저린 삶의 체험에서 우러난, 시대가 짊어져야할 공동의 부채를 갚기 위 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현실에의 목소리를 드높였다.그 소리는 해당시기의 정치 상황과 현실태를 향한 비판과 함께 사회적 비리와 악을 개선하려는 목적의식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그는 어두운 현 실의 구석구석을 들춰냄으로써 이 시대의 아픔을 함께 해야할 시인의 소명의식을 결코 외면하지 않았다.
그런 시인이었다. 그런 그에게도 부처님같이 자애스럽고 한없이 따뜻한 시조가 있다. 이렇게도 섬세하고 빈틈없이 그려냈을까 싶을 정도이다. 동자승같이 천진난만한 그의 불심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지극히 조심스레
마음씨
가꾸신 분.
그분, 방금 막
세상
버렸나봐.
하늘님
당신만 아시고는
색동무덤 써 주셨다.
- 「무지개」전문
조심스레 마음씨 가꾸신 분이 지금 막 세상을 등졌는가보다. 그래서 하늘님이 아시고 색동무덤 써주셨나보다. 무지개는 지상과 하늘을 이어주는 다리이며 차안과 피안을 이어주는 다리이다. 선녀들이 물 맑은 깊은 계곡에 목욕하러 무지개를 타고 지상으로 내려온다는 전설도 있지 않은가.
무지개는 잠깐 나타났다가는 금세 사라진다. 무지개를 초극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도 이런 특성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육사의 「절정」에도 한발 재겨디딜 곳조차 없어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개라 했다.
불교에서는 무는 존재하지 않는 고정된 경계나 틀이 없는 깨달음의 상태이다. 차안과 피안이 연결되어 있는, 삶과 죽음이 연결되어 있는 다리. 이것이 초극의 경지이며 시간도 무화되는 엑스터시의 경지이며 무(無)의 경지가 아니가 싶다.
시인은 왜 여러 편의 시조에서 무지개를 등장시켰을까. 그는 세상과 타협하지 못하고 혼자서 살았다. 탈출구가 필요했고 자신을 초극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시인은 무지개를 선택한 것이다.
어떤 때는 미친 듯 화를 내고 어떤 땐 부처님처럼 양순하고 어떤 때는 깊은 생각에 잠기기도 한 소크라테스. 시인은 천생 시인일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바람 불어도 흠이 질 것 같은 천진난만한 동시조 2편을 소개한다.그의 동시조를 읽으면 저절로 마음이 순해진다. 묘한 치료약이다.
초침은
달리는 말
분침은
달팽이 발.
가는 건지
마는 건지
시침은
부처님 손.
손 얼른
움직이셔야
도시락
먹을 텐데
-「넷째 시간」전문
풀 한 잎 또옥 따서
냇물에 띄웁니다
생각 한 잎 또옥 따서
내 마음에 띄웁니다.
잠길 듯
배 되어 가는
풀 한 잎, 생각 한 잎
풀 한 잎 생각 한 잎
자꾸 따서 띄웁니다.
숙이네 아랫마을
돌아앉은 꽃마을로
잠길 듯
아, 잠길 듯이
내 하루가 떠내려갑니다
-「풀 한 잎 생각 한 잎」전문
시인은 고등학교도 중퇴할 정도로 참으로 가난하게 살았다. 불우했던 어린 시절에도 문학에 대한 열정만은 대단했다. 평생 가난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시인, 그래서 가난이라는 트라우마를 일생 안고 살아야만 했던 시인. 시인에게서 시는 끝내 진흙 속에서 피는 연꽃과 같은 것인가. 순수가 미칠 수도 있겠구나 싶을 정도이다. 붉은 고통 속에서 나온 시인의 시조는 다이아몬드같이 순도가 이리도 높고 높다.
시인은 시집 한권 낼 정도로 많은 장시조를 창작해냈다. 빛나는 주옥 같은 장시조 그 하나를 든다.
풀꾹쌔 우짖는 소리를 평생토록 가슴 안에다 들여놓고 산 당신은 지금 풀꾹 울음빛 청산 바다 떠도는 섬
한 점 섬 반은 떠 있고, 반 잠기어 있음. 반 떠있음은 못 두고 갈 이승 때문이었음.반 잠기어 있 음도 이승을 감추어 깔고 바닥으로 디딘 때문임. 망개를 따 먹어도 이승이 나은 거라고 풀꾹풀꾹 우지짖던 그 때문에었음.가슴 안에 들어와 치던, 평생토록 치던 소리가 하룻날 풀꾹풀꾹 새어나가 청산바다 펼쳐 당신은 섬이 되고 발이 묶여 오도가도 못하게 된 것임.
어머니, 당신의 소자는
일기 이리 철없게 씀.
- 「사서思書․6」전문
고성 장터 생어물로 청춘을 다 판, 살아 생전 가족들의 생계를 끌어안고 행상을 하며 살았던 어머니이다. 죽어서도 반은 떠 있고 반은 잠겨 있다고 했다. 그나마 반 잠기어 있는 것은 이승을 깔고 바닥으로 디뎠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제는 저승에 가서도 발이 묶여 오도가도 못한 어머니는 끝내 ‘청산 떠도는 섬이’이 되었다. 소자인 시인이 이렇게 철없이 일기를 쓰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들이다.
몇번 강추위가 왔다가 갔다. 겨울도 중반에 접어들었다. 시인의 시조를 읽으며 며칠 동안 시인을 생각하며 지냈다.
밖에는 겨울 햇살이 폭포처럼 쏟아진다. 세상은 춥지만 햇살 같은 시인의 따뜻한 가슴이 있기에 우리의 영혼도 이리 따뜻해지는 것이 아닌가. 필자도 시인이 되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서예문인화,2017.2,106-111쪽.
[출처] 서벌 편 - 석야 신웅순|작성자 석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