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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4. 14.
나의 음악 나의 인생: 쥐뿔도 모르면서
전인평(중앙대학교 명예교수, 아시아음악학회 회장)
나는 원래 서울대학교 국악과에서 작곡을 전공하였다. 필자는 작곡을 잘하기 위하여 한국음악사를 공부하였고, 한국음악사를 더 잘 알기 위하여 아시아 음악을 공부하였다. 아시아 음악을 공부해 보니 마치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듯이 한국음악이 환하게 보였다. 높은 산에 올라가 아랫마을을 내려다보면 골목골목이 한 눈에 보인다. 이렇듯이 아시아 음악 연구는 한국음악에 대한 새로운 안목을 갖도록 도와주었다.
나의 작곡 생활은 1964년 <연못>이 라는 동요로 시작하였다. 이후 쥐뿔도 모르면서 작곡도 하고 논문도 쓰고 학생도 가르쳐 왔다. 이러한 과정에서 국악작곡입문(1986), 국악감상—한국음악의 멋(1991), 새로운 한국음악사(2000), 동양음악(1996), 실크로드 음악과 한국음악(1998), 아시아음악연구(2001) 등의 책을 집필하고 100여 편의 작품을 썼다. 이러한 음악학연구가 나의 작곡 생활을 도와주었다고 생각한다. 즉 작곡은 음악학 연구를 음악학 연구는 작곡에 상보적인 역할을 하였을 것 이다.
지난 50여 년을 회고하는 글을 쓰려니 쥐뿔도 모르면서 작곡하고 글도 쓰고 학생을 가르친 세월이 부끄럽다. 일 전에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나눈 농담이다.
30대 교수; 저도 모르는 것을 가르친다.
40대 교수: 자기가 아는 만큼 가르친다.
50대 교수; 학생들이 알아들을 만큼 가르친다.
60대 교수; 능력있는 교수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떠들지만 종횡무진(縱橫無盡)이고, 무능한 교수는 횡설수설(橫說竪說)이 된다.
오랫동안 학생을 가르쳐오면서 이 농담이 농담 아닌 진담으로 들리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이것을 나의 작곡 생활에 비추어 보니, 30대에는 나도 모르는 것을 작곡하였고, 40대 때는 자기가 아는 것을 이용하고 작곡해 왔다. 50대에는 사람들이 알아듣는 음악을 있도록 작곡하려고 노력하였다. 60대가 넘어서야 비로소 내 색깔이 있는 음악을 만든 것이 아닌가 싶다.
1. 충북 영동에서 태어난 시골 학생(1945년)
나는 충청북도 영동군 학산면 아암리에서 음력 1944년 12월 22일(1945년 2월 4일) 태어났다. 호적에는 옛날 출생 후 몇 달 동안 지켜보다가 등록하는 관행에 따라 1945년 5월 23일생으로 되어 있다.
옛날에는 다 가난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극빈 생활이다. 아침에는 밥을 먹지만 점심에는 김치와 고구마를 먹고 저녁에는 죽을 먹었다. 그런데도 이런 생활이 가난하다고 생각되지 않고 중류층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왜냐하면 모두가 이렇게 살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입학 전 해에 1950년 한국 전쟁이 터졌다. 625때는 서울에 살았는데, 자고 일어났더니 집 뒤는 채소밭이 있었는데, 포탄이 터저 지름 10미터 깊이 5미터 정도의 웅덩이가 파였고, 그동안 비가 와서 물이 고여 있었다. 어른 들이 주위에 모여서 아차하면 모두 죽을 번 하였다고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었다. 625 전쟁 동안 비행기 소리가 나면 다락방에 올라가 이불을 둘러쓰고 피하였다. 솜이불을 둘러쓰면 총알이 뚫고 들어오지 못한다는 어른들의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며칠 후 동네 사람들이 땅속에 방공호로 굴을 깊게 팠다. 그리고 그 곳으로 들어가 밤을 지세우기도 하였다. 나는 개울에 가서 올챙이를 잡아다 병에 두고 길렀는데, 방공호로 올챙이 병을 들고 들어갔더니 어떤 어른이 이것을 왜 가지고 들어오냐고 하면서 빼앗아 밖으로 던져 버렸다. 그러자 올챙이들이 땅 위에서 파득거리던 모습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서울에서 어찌어찌 지내다가 1951년 14 후퇴 때 충북 영동 고향으로 피난을 왔다. 모두들 영등포역으로 나갔는데, 어쩌다가 가족을 잃고 말았다. 나는 울면서 다시 집으로 왔는데, 집에 사람이 있을 턱이 없다. 다시 밖으로 나가서 골목을 막 돌아서려는데 어머니도 나를 보고 우시면서 “이녀석아! 왜 혼자 여기를 온거야”하고 나를 껴안았다. 아마도 단 몇 분만 어긋났더라면 나는 전쟁고아가 되어 이 세상에서 살아남지 못하였을 것이다.
기차로 영동까지 가는데 일주일이 걸렸다. 기차에 올라타기는 하였는데, 탱크 운전석에 우리 가족 몇이 끼어 지냈다. 1월 엄동설한에 일주일이나 버티면서 어떻게 얼어 죽지 않고 영동에 갔을까 싶다. 피난 중에 공산군이 몰려 와서는 청년들을 모았다. 그리고 청년들에게 연극을 공연하도록 지도하였다. 시골 마당에 담요를 막으로 치고 세수 대야를 징으로 삼아 꽝 치고는 연극을 했다. 내용은 어렴풋하지만 지주들에게 얼마나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는가 하는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그리고 동네 꼬마들을 모아 김일성 장군 노래를 가르치고는 골목에서 부르도록 하였다. “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의 북한 애국가나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국, 압록강 줄기줄기 피어린 자국”의 김일성 장군 노래를 어린 친구들과 떼로 몰려다니며 불렀던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시절, 겨울인데도 양말도 신지 않고 지냈던 기억이 난다. 교실 바닥이 마루 바닥이었는데 내가 앉은 자리 바닥에 구멍이 나 있었다. 이곳으로 찬바람이 들어와 어찌나 추운지 겨우내 감기를 달고 살았던 기억이 있다. 그 구멍을 종이로 막았으면 좋았을 것인데--- 하고, 왜 그 당시에는 그 생각을 못하였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초등학교 생활에서 음악적 재능을 보인 것 같지는 않다. 5학년 때 학예회에서 박태준 작곡의 <동무 생각>을 독창을 하였던 기억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글재주는 조금 있었던 모양이다. 4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이종복 선생님이셨는데, 이 때 학급 신문을 발행하였다. 이 때 선생님께서 쓴 글을 칭찬해 주셨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선생님이 삼정골이라는 마을에 살았는데, 반 아이 몇을 집으로 불러 같이 글을 쓰고 감을 따 먹으며 놀았던 기억이 있다.
가족이 대전으로 이사 오는 바람에 중학교 2학년 때 대전 한밭중학교로 전학을 왔다. 이때 처음으로 음악 시간에 피아노를 보았다. 그리고 고등학교는 졸업 후 초등학교 선생이 되는 대전사범학교를 입학하였다. 이때 고등학교에서 밴드부에 들어가 트럼펫을 불었다. 이때 만났던 안일승 음악 선생님과 선배 전봉구를 만난 것이 음악대학생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2. 시골 초등학교 총각 선생님(1964년)
필자는 20살도 되기 전에 충남 서산의 원북초등학교 선생이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도 철없던 어린 시절에 선생이 되어 학생을 가르친 것이다. 대전사범학교에서 만난 음악 교사 안일승(安一承) 선생님은 어찌나 열심히 가르치셨는지, 고등학교 음악 시간에 ‘화성법’을 배왔다. 대학 입시를 위해서 개인지도로 배운 것이 아니고 음악 수업 시간에 배운 것이다. 물론 기초적인 것이었지만, 어지간히 극성스런 선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필자가 음대를 다니기 전에 어린이를 위한 동요를 만든 것은 특별히 따로 배운 것이 아니고, 바로 안일승 선생님에게서 묻어나온 실력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선생님은 이제 작고하시고 안 계시지만, 살아계실 적에 선생님을 뵙게 될 때, “제가 음악가랍시고 활동하는 것은 모두 선생님 덕택입니다.”하고 말씀드리면 "나는 가르친 것이 없는데—--"하고 빙그레 웃으신다. 고등학교 시절은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이다. 나는 이 시기를 참으로 훌륭한 선생님 아래서 지낼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참으로 복 받은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다.
지금이야 고속도로와 고속철 KTX로 펑 뚫려 있어서 서울 부산도 2시간이 채 안걸린다. 그런데 당시 1964년에 충남 서산군 원북국민학교에 발령을 받고 대전에서 서산을 가는데 새벽에 떠났는데 도착하고 보니 밤 10시였다. 대전에서 홍성까지 기차를 타고 홍성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서산을 가고, 하루에 두 번만 다니는 버스를 갈아타고 원북면에 도착해 보니 밤 10시였다.
내가 처음 취직한 원북면은 바닷가여서 조금만 걸어 나가면 바다가 나오는 그런 곳이었다. 그런데 바닷가라고는 하지만 고기잡이하는 어부는 별로 없고 대부분 농사를 짓고 사는 지역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직장 생활을 하면서 총각으로 혼자 사는데도 생활고에 시달렸다. 혼자 달랑 홀몸으로 살면서 생활고라고 하니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1961년에 박정희가 군사혁명을 일으켰다. 군인들은 경험이 없이 의욕만 앞서 있어 시행착오를 거듭하였고, 나라는 너무나 가난한 형편이었다. 첫 달치 월급으로 4,300원을 받았는데, 쌀 한 말이 500원 이었다. 당시 하숙비는 쌀로 치렀는데 쌀 6말이 한달치 하숙비였다. 그래서 3,000원 을 하숙비로 치르고 나면 1,300원 이 남는다. 이 상황은 너무도 기막힌 현실이어서 취직을 했다는 기쁨보다는 이러고도 사는 선배 선생님들이 요술쟁이로 보였다. 이곳의 동료 선생들은 대개 농사를 짓고 있어서 농사를 지으면 먹을 것은 해결된다. 그리고 적지만 월급을 받으면 시골에서는 부유층이 된다. 당시는 워낙 가난하여 쌀을 시장에 내다 팔아야 겨우 고무신도 사는 등 생필품을 사는 형편이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벵글라데쉬 케냐와 더불어 가장 가난한 세 나라 중의 하나였다. 지금이야 치킨을 맘대로 사먹지만 당시는 닭 한 마리를 잡으면 30명 대 식구가 설을 쇠는 형편이었다. 아침에는 겨우 밥을 먹지만 점심에는 고구마를 먹고 저녁에는 죽을 먹었다. 이렇게 살았지만 이러한 생활이 중류 생활이었다.
내가 처음 담당한 학생은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당시 시골에는 학교를 늦게 들어온 나이 많은 학생도 있어서 선생인 나와는 몇 살 차이도 나지 않는 학생도 있었다. 학교 생활은 무척 단조로웠다. 다른 교사들은 대개 집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기 때문에 퇴근 후에는 곧장 집으로 돌아가 농사일을 한다. 나만 달랑 혼자 학교에 남아 있으니 할 일이 없었다. 더구나 주말은 더욱 할 일이 없었다.
심심하니 별 수 없이 하루 종일 책만 보았다. 그리고 풍금이나 기타를 치면서 세월을 보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노래를 만들게 되었다. 반 학생 중에 명혜식이라는 눈이 큰 학생이 있었는데, <연못>이라는 동시를 썼다. 심심풀이 삼아 이 시로 노래를 만들어 우리 반 아이들에 게 가르쳤다. 이후 신기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토요일 오후였다. 혼자 방에서 책을 읽고 있노라니, 조용하던 골목이 갑자기 시끄러워진다. 동네 개구쟁이들이 몰려 온 것이다. 누군가 노래를 시작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내가 작곡한 노래를 부르는 것 이 아닌가? 당시는 텔레비전 방송은 아직 없던 때이고, 라디오도 매우 귀한 때였다. 그래서 마을에서 사람들에게 전할 소식이 있으면, 이장님 댁에 설치한 확성 장치로 소식을 전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어린이들이 오늘날처럼 상업 방송 음악에 물들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어린이들은 학교에서 배운 노래를 집에서도 불렀다. 그래서 내가 작곡하여 학교에서 가르친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이후 나는 노래를 몇 개 더 만들었다. 그리고 새교실이라는 잡지에 이 노래 악보를 보냈다. 이 새교실은 교사를 위한 월간지로 맨 뒷장에 현직 교사들이 작곡한 노래를 한 편씩 소개하는 지면이 있었다. 그러자 다음 달에 내 노래가 책에 실렸다. 그리고 동요 담당자였던 박준식 선생님이 짧은 평을 해 주었다. “이 노래는 선율은 좋은데, 반주가 문제다. 앞으로 음악이론 공부를 하면 좋은 곡을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론공부를 해 보자고 이리 저리 책을 알아보았다. 서점에 가보니 나운영의 화성법과 작곡법이 눈에 띄었다. 아주 얇은 책이었는데, 도대체 책만으로는 공부가 되지 않았다. 방학이면 나의 사범학교 동기인 친구 이근택(창원대 교수로 정년 퇴직)에게 화성법을 지도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어떤 때는 화성법 문제를 풀어서 편지로 보내면 친구가 첵크하여 보내 주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애는 썼지만 무슨 공부를 했으랴 싶다. 그리고 서울대 음대 작곡과를 지원하였다. 시험장에서 이야기를 하다 보니 대부분 미리 교수에게 개인지도를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리 지도를 받아야 된다는 것을 듣기는 하였지만 이렇게 모든 학생이 지도를 받고 있다는 점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렇게 준비 없이 시험을 보니 목표하였던 작곡과는 당연히 낙방하고 말았다.
당시 음대 입시 제도가 너무 묘해서, 지금 생각하면 그런 때가 있었나 싶다. 교수가 자신이 학생을 직접 가르치고 입시 문제를 출제하고 또 스스로 채점도 한다. 이런 형편이니 교수에게 개인 지도를 받지 않으면 100% 낙방한다. 그래서 어느 교수는 소위 ‘새끼 선생’을 두어 일정 기간 자기 제자에게 지도를 받은 학생 중에서 지도할 학생을 선발한다. 그래서 입시를 위해서는 우선 소위 줄 서는 일에 성공해야 한다. 이 작업을 위하여 어머니들이 치마 바람이 세차게 불 수 밖에 없다. 이런 연결 고리를 끊도록 법제화한 사람이 전두환 대통령이다. 이런 점에서는 온 세상 사람이 모두 욕을 해도 나는 그의 공적을 인정하고 싶다.
그런데 이게 운명이라는 것일까? 입학원서에 ‘제2지망 국악이론 전공’이라는 칸이 있었다. 제1지망인 작곡과에 낙방하면 제2지망인 국악이론 전공을 공부할 사람은 체크하는 란이었다. 그냥 별다른 생각도 없이 이곳에 표시를 하였다. 그래서 서울대 음대 국악과 학생으로 합격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국악과에 합격하였지만 학교 다닐 생각이 없고, 이제 음대 가는 방법을 알았으니 더 공부해 내년에 다시 시험을 봐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데 나보다 1년 먼저 서울음대에서 성악을 전공하던 전봉구 선배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내 이야기를 듣더니 “국악 전공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앞으로 기회가 작곡과보다 더 많을 수도 있을거야.”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국악 전공 학생으로 4년을 보내게 되었다. 전봉구 선배는 경원대학교 성악과 교수로 정년하였는데, 그는 나의 고등학교 밴드부 선배이기도 하였다. 당시 대전사범학교 밴드부는 교사의 선배가 후배를 가르치는 것이었다. 그는 1년 선배였지만 고3 실력으로 밴드곡을 편곡할 만큼 대단한 음악성을 지닌 선배였다.
2. 청계천 6가 평화시장 골목 시절(1966년)
시골에서 초등학교 선생으로 지내던 2년은 음악에 대하여 애타게 목말랐던 시기였던가 보다. 이러한 목마름이 있었기에 음대 4년과 대학원을 그야말로 학교에서 살다시피하였다. 당시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은 청계천 6가 평화시장 골목에 있었다.
지금의 서울대학교는 관악산 자락에 있는데, 이것은 당시 군사 정부에서 반정부 시위를 하는 서울대 학생을 시위 방지를 위하여 관악산 아래 서울대학교를 이전하였다는 설이 있었다. 관악산의 서울대는 골짜기에 들어있어 정문과 후문을 막아버리면 꼼짝없이 갇혀 버린다. 이처럼 관악산서울대는 데모 방지를 염두에 두고 옮긴 것이라는 이야기가 지금도 전해오고 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교문 앞에는 경찰서 파출소가 있는데 파출소가 엄청나게 큰 규모여서 이 이야기가 허구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는듯하다.
당시 청계천은 더러운 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 개천을 중심으로 양쪽에 판자집이 즐비하였는데, 청계천 양쪽으로 상가가 형성되어 있었는데, 남쪽으로는 고서점이 즐비하였고 북쪽으로는 외재 전자제품을 상점이 있었다. 그리고 동대문에는 전차 종점이 있었다. 필자는 이곳 동대문 종점에서 영등포까지 전차를 타고 다녔다. 이 청계천은 복계하여 고가도로가 있었는데 이명박 시장 시절 이 고가도로를 철거하고 청계천을 복원하였다. 요즘 다시 이곳을 다시 가보니, 지금은 러시아 상인들이 진출하고 있어, 파란 눈의 늘씬한 러시아 아가씨들이 오가고 있었다. 청계천 서울대 음대 맞은편은 국립의료원 뒤편이어서 영안실이 보였다. 가끔씩 울부짖는 젊은 여인네가 보이기도 하였다. 거기다가 청계천시장 골목에서는 땡 처리를 하는 젊은 장사꾼의 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니, 조용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시장 골목의 학교지만, 일단 철문 교문을 들어가면 피아노 소리 거문고 소리가 들려 이 곳이 '음악대학'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길가로 본관이 있고 작은 공간을 사이에 두고 맞은 편에 컨써트 홀이 있었다. 이 본관과 컨써트 홀의 중간에 자그만 연못이 있었다. 연못이라기보다는 자그마한 웅덩이지만 그 웅덩이 주위에 긴 의자가 있었다. 당시 국악과 입학생이 15명 이었고 음대 전체 입학생이 120명이니 전교 학생이라야 500명 이 채 되지 않았다. 사람이 많지 않고 한 곳에 몰려 있으니 그곳에서 어울리고 또 한일협정 반대 시위, 노동자 탄압 반대 시위 속에서 학교를 다녔다.
음대를 다닐 때, 철없는 여학생들이 선생님께 휴강하자고 졸라 휴강이라도 하게 되면, 아까운 생각이 들곤 하였다. 나는 선생님께 이런 저런 질문을 하려고 잔뜩 준비를 하고 있는데 휴강이 되면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목마름으로 음대 4년을 다녔기에 나에게 음대는 재미있는 '놀이동산' 이었다. 음악대학에서 제일 좋은 곳은 음악을 개인적으로 신청하여 들을 수 있는 시청각실이 있었다. 시청각실 옆에는 도서실이 있었다. 스코어를 도서실에서 빌려 시청각실에서 음악을 들을 때는 정말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야 라디오만 틀어도 음악이 넘 쳐나는 형편이니, 음악이 천해졌다는 생각이 든다. 천해진 정도가 아니고 오히려 공해로 사람을 괴롭히는 존재가 되었으니 말이다.
대학 시절 화요 연주라는 시간이 있었는데, 학생들이 모여 듣고 한 학생이 1회씩 출연하는 시간이었다. 이 시간을 위하여 과제곡으로 여러 곡을 썼다. 그런데 마음속에 남아있는 것은 노래곡 <산거>(山居)이다. 한용운의 시에 곡을 붙인 것이다. 이 곡은 3학년 때 화요 연주회에서 초연한 곡이었다. 그 노래를 동급생 배승택이 노래하였는데, 그 노래가 들을만하였던지 지금도 가끔 그 곡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다. 배승택은 성악가로서 오페라에도 많이 출연하였는데, 부산교육대학교수로 정년을 마쳤다.
음대에 들어와 쇤베르크의 12음기법도 배우고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였다는 Chance operation도 배웠지만 나는 촌스럽게 5음계를 이용하여 선율을 만들고 이 선율에 송이화음(tone cluster)을 붙인 것 이었다. 5음음계로 송이화음을 만들었으니 그리 거칠지 않고 부드러운 분위기가 나왔다. 당시 나는 한양대 교수이시던 박중후 선생님을 작곡 전공 지도 교수로 모시고 있었다. 그 때 박중후 교수에게 작곡을 배운 사람으로는 교향악 지휘자 금난새가 있었다. 하루는 수업을 마치고 선생님께서 한 마디 하셨다.
“동아 콩쿠르 준비를 해 보게.”
“저는 국악과 학생인 데요.”
“?찮아, 작곡만 잘하면 되지. 과 무슨 문제가 있나, 오히려 국악 전공이면 더 유리할 수도 있지.”
“저는 푸가 공부를 시작도 못하였는데—--,”
“지금부터 하면 되지.”
이렇게 해서 6개월 동안 매주 푸가 한 곡씩을 쓰면서 살았다. 그런데 막상 콩쿠르 예선을 위한 공고를 보니 과제곡으로 가곡이 나왔다. 예선 제한 시간이 3시간인데, 모두들 끙끙거리면서 곡을 썼다. 그런데 놀랍게도 3시간 안에 곡을 완성 한 사람은 11명 중 나를 포함하여 세 사람뿐이었다. 이 콩클 본선 과제곡은 피아노 삼중주였다. 바이올린 선율에 피치카토로 가야고 산조 선율을 얹은 것이 어느 정도 효과를 본 모양이다. 이때 동아일보사 주최의 동아콩클의 입상은 “내가 국악 작곡 전공이지만, 작곡 생활을 계속해도 되겠구나”하는 생각을 갖게 하였다. 내심 같은 캠퍼스 내의 ‘작곡과 동료들과 함께 겨루어도 되겠구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당시 국악과에 입학한 사람은 15명인데 여학생 몇은 결혼을 하여 그만두고, 그 중에 8명 이 졸업하였다. 그런데 졸업하고 보니 예상대로 모두들 실업자가 되었다. 지금도 국악을 해서는 취직하기가 어려운데 당시로서는 더 말할 나위 없었다.
대학교 4학년 말이었다. 하루는 장사훈 교수께서 연구실로 오라는 전갈이 왔다. 선생님은 뜻밖에도 대학원 진학을 권하는 것 이었다. 이제 국악과 대학원이 생겨 학생을 뽑으려고 하였는데 지망자가 없었던 모양이다. 선생님은 나만 불러 대학원 진학을 권한 것이 아니고 여러 사람을 불러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계셨다. 그런데 모두들 대학 4년간 등록금 내면서 학교 다녔는데 실업자가 된 신세인지라 대학원에 가겠다고 대답한 사람이 없었던 모양이다.
나는 이러한 형편을 알리가 없었다. ‘선생님께서 나를 끔찍이도 아끼시는 사랑하시는 구나.’ 나는 이렇게 오해를 하였다. 당장에 시험 준비를 하겠노라고 약속을 하였다. 대학원 입 학 시험은 동숭동 대학본부에서 치렀다. 지금은 ‘한국문화예술진흥위원회 예술가의 집’이 대학원 건물이었다. 시험장에 들어가 보니 국악과 대학원 입시생은 딱 한사람 나 혼자였다. 그제야 장사훈 선생님이 ‘이러이러한 것을 자세히 보게나’ 하고 이야기해주던 일이 생각났다. 오직 입시생 이 한사람인 데 그나마 떨어지면 어쩌나 하고 걱정을 하셨는지도 모르겠다.
대학을 졸업하고 무엇으로 먹고 사나 하면서, 다른 친구들처럼 실업자로 지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고등학교 선배인 전봉구 선생이 소식을 전해 왔다. 그는 상명여자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에 음악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이 선배의 소개로 나는 상명사대부중 음악교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대학 들어올 때도 선배의 도움을 받았는데, 선배의 후의로 취직까지하게 된 것이다.
당시에는 중고교 선생이 부족하여 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자격검정고시가 있었다. 어떤 고교 동창은 이 검정고시를 통하여 나보다 먼저 중학교 선생이 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4년 동안 비싼 등록금내며 공부를 마치고 중학교 선생이 되었으니 계산을 해보면 내가 손해를 본 셈이다. 이렇게 먼저 선생이 된 친구는 중학교 교장이 되어 정년을 하였다. 이렇게 나는 중학교 선생님으로 지내다고 고등학교 선생이 되어 학생들과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3. 쥐뿔도 모르면서 관현악 작품을(1971년)
하루는 서울대의 한만영 교수를 만났다. 대학원생이던 나는 학생이면서 또한 가르치는 선생이었기에 눈코 뜰 틈이 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곡 좀 하나 써봐”
“무슨 곡으로 쓸까요?”
“여러 사람이 등장하는 관현악곡을 써 보게.”
한만영 교수는 서울대 영문과를 나와 고등학교 영어 선생으로 십여 년을 지내다가 국악과 학사 편입을 하여 졸업 후 교수가 된 분이다. 음악대학 국악과에서는 해마다 정기연주회를 한다. 지금은 국악곡이 많고 많지만, 당시 국악계는 전통곡을 제외하고 나면 관현악곡이 별로 없었다, 연주회의 마지막 곡목으로 여러 사람이 나와 멋지게 마무리하는 곡이 있어야 하는데 당시에는 이러한 곡이 없었다.
이렇게 부탁을 받아 처음으로 쓴 곡이 <가야고 협주곡>이었다. 처음으로 쓰는 관현악곡이니 제대로 소리가 날리 만무하다. 당시에는 서울대 국악과 출신으로 작곡을 하는 사람이 이성천·김용진·이해식·전인평 정도였다. 한만영 교수는 부족한 곡이었지만 짜증을 내지 않고 열심히 잘 다듬어 주었다. 이렇게 하여 자주 서울대 국악연주회에서 위촉을 해 준 덕택에 나로서는 참으로 귀중한 관현악 경험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니 쥐뿔도 모르면서 곡을 쓰고 있었다. 1970년대에 쓴 작품을 대충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72년의 작품으로 <운>(韻)이 있는데 한국적인 음향의 아름다움을 내 나름대로 표현하려고 시도하였던 작품이었다. 우리 음악의 특별한 아름다움은 섬세한 미분음 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런 효과는 궁중음악에서보다는 민속악 특히, 전라도음악에서 많이 볼 수 있다. 1975년의 <방황하는 무리들>은 무용조곡을 발표하였는데 특히 이 곡에서는 낮은 음역의 결핍을 보강하기 위하여 아쟁을 중요한 선율악기로 등장시키고 다채로운 리듬을 살리려 노력 하였던 작품이다.
1978년에 쓴 작품으로 관현악 모음곡 <두레>가 있는데 이 곡은 내 음악의 시야를 농악으로 돌렸던 최초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일부 사람들이 전통국악곡은 단조롭다고 하는 말을 듣게 되는데 나는 이들에게 농악을 연구해 보라고 권해보고 싶다. 농악에서 사용하는 헤미올라나 엇박은 아주 상쾌한 느낌을 갖게 하는 매력적인 리듬이다.
1979년에는 작곡발표회를 하였다. 이 연주회는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에서 국악연주회를 개최하고 있었는데, 한만영 교수의 추천으로 명동의 유네스코한국위원회 강당에서 열렸다. 이 연주회에서 6곡의 새로운 곡을 발표하였다. 이때는 좀 더 전통에 깊이 빠져보겠다는 생각으로 곡을 쓰면서, 보다 농도 짖은 한국음악 한국의 전통을 살린 곡을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이 발표회에서 <단소, 해금, 양금의 3중주>, 거문고 독주곡 <소나무가 보이는 마을>, 가야금 조곡 <어린이 나라>가 초연되었다.
우리의 한글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한자를 빌어 우리말을 적은 때가 있었다. 그러나 한글이 만들어진 뒤에도 한문을 숭상하여 한글로 완전히 우리의 뜻을 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글을 쓰지 않고 한자를 쓰던 때가 있었던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러한 현상은 음악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우리 나라의 음악계를 보다 풍부하게 살찌우기 위하여 국악이 좀 더 연구되어 새로운 창작수단의 재료로서 가치가 있다고 인정 하는 사람이 많이 늘어가고 있는 점이라 하겠다. 바이올린이나 플롯으로 나타낼 수 있는 아름다움을 가야금이나 대금으로 나타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인가? 이것이 내가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궁리하던 문제였다.
한만영 교수는 서울대 교수를 사직하고 기독교 목사로 활동하시다가 세상을 떠났다. 고등학교 영어교사에서 국악과 교수로 그리고 불교음악학자로 기독교 목사로 그의 변신을 참으로 놀랍다. 나에게 작곡가라는 명칭을 처음으로 붙여준 분이다. 이렇게 내 딴에는 열심히 써왔지만 나도 잘 모르는 관현악곡을 쓰면서 실험을 계속하고 있었다. 내게 작곡가로서 살아온 바탕은 상당부분 한만영 교수 덕택이다. 선생님 이 내 곡을 연주해 주지 않았더라면 내가 어디 가서 관현악 경험을 하겠는가? 지금은 세상을 떠나고 안계시지만 잊을 수 없는 고마운 선생이셨다.
4) 장구선생 김병섭 선생님(1978년)
1979년 여름. 나는 농악에 심취해 있었다. 단순한 듯하면서도 미묘한 장단이 조금씩 조금씩 변화되어 얼마 후에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전혀 새로운 장단으로 변화되어 있을 것을 느끼곤 하였다. 나는 듣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어서 좀 더 적극적으로 농악을 알아보려고 우도농악(右道道農樂) 김병섭 선생님에게 농악을 배운 것이다. 다시 혜화동 3층 건물에 연습실이 있었는데, 이곳을 여름철 내내 다녔다.
작곡가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소재를 찾는 일일 것이다. 이 고통을 해소하려고 궁리하던 중에 김병섭 선생을 찾은 것이다. 선생님은 정읍에서 올라오신 농악 전문가이신데, 혜화동에서 학생들에게 장구를 가르치고 계셨다. 김병섭 선생이 가르친 농악은 <장구놀이> 부분이었는데, 농악을 여럿이 함께 치다가 장구 연주자가 기량을 자랑하는 대목의 독주 부분이었다. 선생에게서 배운 곡은 10분짜리 독주곡인데, 장구를 메고 빙빙 돌면서 장구를 치는 무용과 연계된 음악이었다.
그 곳에 가보니 이미 영국인 프로봐인(Robert C. Provine)이 선생의 장구를 배워 채보를 해 놓은 것이 있었다. 또 평화봉사단으로 와서 있다가 한국에 눌러앉은 Garry Recter가 선 생의 장구놀이에 심취해 있었다. 그래서 김선생님이 가르쳐 준 가락 중에 “이 부분은 Garry Recter가 작곡한 부분이다”라고 말씀해 주시기도 하였다.
장구를 배우면서 우리 나라 농악 장단의 다양함을 몸으로 체득할 수 있었다. 이때의 경험을 정리한 것이 “굿거리의 변주 방법”이다. 그리고 작품으로 나타난 것은 관현악 조곡 2번 <두레>이다. 이곳은 1983년 공보부에서 주최한 대한민국 작곡상의 수상작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이 곡은 1980년에 쓴 것이다 누구나 창작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것이겠지만, 창작의 어려움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지경이다. 그러므로 그 창작의 과정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더욱 그 곡에 애착이 가는 것은, 어머니가 난산일수록 그 자식이 더욱 귀하게 생각되는 바와 같을 것이다. 내가 이 곡에 대해 애착심을 갖는 이유도 이만큼 이 곡에 정성을 쏟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 조상들은 농경 생활을 영위하면서 자연스럽게 서로 도와가면서 함께 일을 하며 살아야 하는 형편이었다. 이러한 집단협동노동체를 두레패라고 하는데 이 두레패들이 일을 하고 오고 갈 때에는 농악을 치면서 이동하게 되는데 이 농악을 ‘두레굿’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또 힘든 농사일이 끝나면 잔치를 벌이게 되는데 이 잔치를 ‘두레를 먹는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자연스레 부락마다 농악기가 준비되고 보관되어 그 음악이 전해져 온 것이다. 지금도 어떤 지방에서는 아직도 자연부락 단위로 농악이 전승되어져 있어 명절마다 농악을 즐기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농악을 판굿이라고도 하는데 이 판굿에는 개인의 기량을 나타내 보이는 개인놀이 부분이 있다. 이 부분은 마치 협주곡의 카덴짜와 같은 부분으로 개인의 테크닉을 잘 나타낼 수 있도록 아주 복잡하고 화려한 가락으로 짜여져 있다. 나는 이 개인놀이 중에 나오는 장구놀이를 배웠다.
장구놀이를 배우면서 나는 농악에 대한 인상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장구는 전통음악에서는 빠질 수 없는 악기로서 궁중음악에서부터 무악에 이르기까지 합주곡은 물론 독주의 반주에 이르기까지 매우 폭넓게 사용하고 있는 악기이다.
김병섭 선생님의 장구놀이는 높은 음과 낮은 음 즉, 북편과 채편의 두음으로 내는 음색과 리듬의 변화는 참으로 놀랄만해서 마치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을 방불케 하였다. 김병섭선생님이 치는 장구를 자세히 들어보면 합창단을 칠 경우 채편의 앞꾸밈음이 약간 먼저 들어가고 채편이 다음 음을 치는 극히 짧은 사이에 북편의 음이 전타음을 수반하여 울리게 되어 있어 매우 미묘한 울림을 들려준다. 장구를 처음 배울 때 여간 연습하지 않고서는 이것을 거의 해낼 수가 없다.
나의 관현악 조곡 제2번 <두레>는 바로 이러한 농악이 바탕으로 삼았고, 3악장으로 구성 되어 있다.
제1악장은 7박자의 조용한 분위기로 시작하여 점점 고조되어 농악에서 흔히 많이 쓰는 삼채가락으로 끝난다. 이 삼채는 4박자의 빠른 장단으로 가야고 산조의 <세산조시>와 비슷한 것으로 어떤 이는 휘모리라고도 하는 장단이다. 이 악장은 우리나라 산천의 아름다운 모습을 그린 악장이다.
제2악장은 전통음악 중에 6박의 <도드리>라는 곡이 있는데 이 곡은 우직할 만큼 아주 고집스럽게 규칙적인 4분음표를 반복하는 곡이다. 나는 이 곡의 분위기를 이용하려고 마음먹고 현악기들은 규칙적인 리듬을 반복시키고 관악기들은 지속음을 사용하여 현악기와 관악기가 서로 대조를 이루도록 구성하였다. 이 곡은 소박한 옛사람의 정감을 표현한 곡이다.
제3악장은 두레패의 농악을 그린 악장으로 처음 부분은 전통음악에서는 비교적 많지 않은 5박의 리듬으로 시작된다. 5박자의 장단 중에는 엇모리 장단이 있는데 이것은 3+2의 복합박자로서 거문고 산조나 판소리에서 비교적 드물게 사용되는 좀 빠른 장단이다. 두레에서 사용한 5박은 엇모리와 달리 느리게 시작되는데 리듬꼴은 농악장단을 변형하여 사용하였다. 이 리듬은 더 발전하여 3+2, 2+3의 복합박자로 계속되다가, 농악의 오방진 (五方陳) 장단으로 이어진다. 오방진은 농악놀이 중에서 동서남북 중앙의 다섯 군데에 진을 짜는 것으로 농악놀이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다. 쇠가락이 급하게 조여가면서 한사람이 앞장을 서면 나머지 대원들이 뒤를 잇게 되는데, 나선형으로 감아들어 갔다가 반대방향으로 돌아 나오는 것을 의미한다.
5) 장산도의 씻김굿(1980)
1980년 여름 전라남도 장산도 씻김굿 현장조사를 할 기회가 있었다. 우리나라 음악계에서 현장 조사의 원조는 권오성 교수(한양대 정년 퇴임)이고, 뒤를 이어 이해식 교수(영남대 정년 퇴임)가 뒤를 잇고 있다. 그런데 이 두 분은 당시 KBS 방송국 직원이어서 말하자면 방송국의 취재 활동으로 방송국에서 경비를 부담해 주는 작업이었다. 그러니 월급은 월급대로 받고 자기공부 삼아 현장 연구를 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직업과 연구 활동을 겸하고 있었으니, 매우 부러운 직업 중의 하나였다.
그러던 중 중앙대 무용과의 정병호 교수(중앙대 교수)가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의 무형문화재 기록 사업을 하게 되었다. 이 때 소식을 듣고 함께 따라 나섰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사람으로 기억나는 사람으로는 당시 미국 UCLA 박사과정 학생이었던 박미경 교수(계명대 정년 퇴임), 청주대학교 무용과의 강혜숙 교수, 관동대의 황루시 교수, 중앙대 일문과의 박전열 교수, 그리고 비디오 전문가 천승요씨 등이었다. 당시는 모두 열심히 공부하던 대학원 학생이었는데, 모두를 교수직을 수행하다가 정년 퇴직하였다. 정말 시간이 많이 흘렀구나 싶다.
이 때 필자는 처음으로 무당 음악의 소중함과 멋을 만끽할 수 있었다. 특히 장산도 무당이 들려주던 장단의 구음(口音)이 재미있었다. 다음에 몇 개를 적어 보겠다. 쉼표는 사분음표 단위이고, /는 한 마디를 표시하는 것이다.
흘림장단 =⇒ 4/4 울콩, 절콩, 전대, 콩/ 냇가, 건너, 꿀껍, 떡.
살풀이 장단 ⇒ 6/4 상도리 , 돈돈, 닷돈, 도리도리 , 돈돈, 닷돈(이 구음의 뜻은 ‘상 위의 돈이 다섯 돈은 되는냐, 상위의 돈이 다섯 돈은 된다’라는 뜻이다.)
오귀 굿 ⇒ 4/4 정 첨지, 개가죽, 개기름 발라, 덩더 쿵.
문굿 〓⇒ 4/4 쥔쥔, 문여소, 바삐바삐, 문여소.
이처럼 익살스런 사설과 함께 장단을 가르치니 리듬형을 바로 이해할 수 있고,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는 재미있는 방법이었다. 교육 방법으로는 최고의 방법이구나 생각하였다. 이후 나는 북 장단의 매력에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 1981년에는 북 장단의 가야고곡 <노피곰>을 작곡하였다. 이 북 반주는 장산도의 경험이 바탕이 된 것이다. 이 곡 <노피곰>은 정읍사(井邑詞)에 서 나오는 말을 제목으로 삼은 것이다. 정읍사는 백제 노래로 알려져 있는데 악학궤범(樂學軌範)에 전하고 있다. 노피곰은 이 노래의 ‘ᄃᆞᆯ하 노피곰 도ᄃᆞ샤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에서 나온 발로 ‘높이 높이’라는 뜻이다.
정읍사를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ᄃᆞᆯ하 노피곰 도ᄃᆞ샤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져 재 녀러신고요
어긔야 즌ᄃᆞ를 드ᄃᆞㅣ올셰라
어긔야 어강됴리
어느이다 노코시라
어긔야 내가논ᄃᆞㅣ 졈그ᄅᆞᆯ셰라
어긔야 어 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이것을 현대말로 옮겨보면 또 다음과 같다.
달이 높이높이 돋으시어 멀리 멀리 비치게 하여 주시오. 시장에 가 계신가요? 질퍽한 곳을 디디고 있을까 두렵구나! 어느 사람에게다 놓고 계시는가? 내 가는 앞길이 어두워질까 두렵구나.
남편을 멀리 시장에 보낸 여인네가 남편을 기다리며 ‘어느 여인네에게 마음을 놓고 있기에 이토록 돌아올 줄 모르는고’하는 한숨과 원망과 또한 절망을 나타내고 있지만 마침내 절망의 실연에서 떨쳐 나와 마치 자신의 잡념과 질투를 떨어버리듯이 '나의 앞날에 제발 어둠이 없는 불행이 없는 앞날이 되게 해주소서’하는 애원이며 임에 대한 간절한 기대를 나타내고 있는 노래이다. 필자가 이 시를 처음 대한 것은 고등학교 국어시간으로 기억되는데 대학에서 악학궤범을 뒤적이다가 다시 접하게 되었다. 전라도 음악은 한(恨)이 깔린 음악이라고 하는데 이 한은 젊은이보다 한 세상을 살아본 여인네들이 보다 잘 표현한다고 한다.
가야고 독주곡 <노피곰>은 이러한 한을 바닥에 깔고 있다. 그러나 이 한이 남도음악처럼 밖으로 표출되는 것이 아니고 속으로 여미며 다소곳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 곡의 음계는 BCEFG#의 5음 계인데 B와 E의 완전 4도가 주축이 되어 이 두 음에 각각 반음이 붙은 음계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여기의 반음은 서양의 평균율 100센트보다는 넓은 것으로 순정조(Just Intonation)의 반음이 112센트인데 이런 정도의 반음으로 생각하면 좋다. 그리고 G#음은 줄을 고를 때에는 G#음으로 하지만 실제 연주 때는 약간 눌러 농현을 해서 A에 가깝도록 연주하는 게 좋다. 그러므로 이 곡의 음계를 다른 방법으로 적어보면 B, C#(-), E, F#(-), A의 음계가 되는데 C#과 F#의 이 두음은 C보다는 높고 C#보다는 낮은 음으로 (-)표는 낮게 잡으라는 뜻으로 붙인 것이다. 또한 완전 4도의 B, E음에서 B음은 너무 강한 농현이 되지 말아야 되는데 이것은 너무 강한 농현이 들어가면 마치 산조의 계면조와 같은 처절한 분위기로 흐르기 쉽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연주되던 가야고 산조는 대개 두 옥타브와 완전 5도 정도의 음역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곡은 음역 이 세 옥타브로 확장되어 있다.
그리고 실제음은 표기음보다 완전 5도 아래의 음으로 연주된다. 지금까지 흔히 연주되던 <가야고 산조>는 느린 진양조부터 시작하여 점점 빨라져서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로 이어져 휘모리까지 흐르게 되는데, <노피곰>은 느린 무장단 음악으로 시작되어 금방 경쾌한 빠른 부분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아주 느린 장단이 나온 후, 점 점 고조되고 빨라져서 마지막 휘몰아치는 장단으로 마치게 된다.
대개의 가야고 독주곡이 연주되는 것을 살펴보면 장구 장단을 수반하고 있는데 이 곡은 북을 쓴 것이 특징이다. 한번은 우연히 고물상 앞을 지나다가 북을 하나 사왔는데 집에 와서 정성스레 잘 닦아놓고 보니 풍채가 그럴듯하였다. 혼자서 이리저리 살펴보고 쳐보다가, <노피곰>의 반주를 처음에는 장구를 쓰려고 했다가 북이 장단을 담당하도록 바꾼 것이다. 북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데 판소리에서 쓰는 소리북을 쓰면 된다.
북의 기보법은 오선을 사용하였는데 첫째 칸은 북편, 둘째 칸은 채편의 복판, 셋째 줄은 채편의 변죽, 셋째 칸은 북의 둥을 치도록 표기하였고 북편을 소리를 내지 않고 손으로 짚기만 하는 것은 가위표에 기둥을세워(↑) 표시하였다. 북을 연주할 때는 연주 기량이 능숙한 연주자라면 주어진 장단 안에서 즉흥연주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처음부분 ‘느리고 자유롭게’의 무장단 부분은 반드시 적혀있는 대로 연주해야 한다. 이 곡은 여섯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첫째 부분의 마지막 부분에서 북의 16분음표 리듬은 처음에는 곱게 치다가 점 점 고조되어 둘째 부분으로 이어져야 한다.
셋째 부분에서는 아주 느린 선율에 화음이 쓰였는데 이것은 너무 느린 음악에서 생기기 쉬운 단조로움을 깨뜨리기 위해서이다. 이 화음이 너무 거칠지 않도록 부드럽게 이어져야 하겠다. 넷째 부분에서는 지금까지 쓰였던 F음이 F#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곳에서는 분명 하게 장 2도의 음정으로 나타나야 한다. 이곳은 앞부분과 비교하여 훨씬 밝은 분위기로 만들어져야 하는데 그러기 위하여 장2도 음정 E, F#을 분명히 하고 경쾌한 분위기로 연주한다.
다섯째 부분의 후반부에는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든 D음이 쓰였는데, 이 음은 조현에도 없는 음이기 때문에 자칫 불안해지기 쉬운 음이다. E에서 D로의 진행이 분명해야 한다. 이 부분의 연주가 끝나면 두 번째 부분으로 되돌아가게 되는데 두 번째 부분이 반복될 때는 먼저보다는 빨라야 한다.
여섯째 부분은 '가능한 빨리'라고 되어 있는데 빠르더라도 모든 음이 골고루 또렷이 나타나도록 연주되어야 하며 마지막 부분에 무장단 음악이 나오는데 가야고의 선율은 장단이 없이 자유롭게 연주되더라도 북의 리듬은 흐트러지거나 느려지지 말고 같은 빠르기로 계속되어야 한다. 이 곡은 재순악보출판사에서 ‘한국음악의 발전을 위하여 엮는 시리즈’의 첫 번째 악보로 출판되어 시중 음악서점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으며 1981년 10월 20일 세종문화회관 소강당에서 열린 박현숙 가야고 독주회에서 초연 되었다.
<악보> 노피곰 넣기
1982년 유일한 순수음악 월간지 월간음악에서는 국악과 양악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서양음악은 이제 보편화된 음악이니 ‘양악’ 이 아니라 ‘음악’이라고 불러야 하고 국악은 한국인만 하는 음악이고 옛날 음악이니 ‘고악’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 때 여러 사람이 논객이 등장하였는데, 다음은 당시 필자가 쓴 글이다. 다음은 “무엇이 한국적 작품인가"라는 제목으로 쓴 글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작곡가는 기록에 의하면 세종대왕이라 할 수 있다. 세종실록 권 116에 의하면 세종 31년 12월에 세종대왕이 친히 막대로 땅을 치며 박자를 맞추며 하루 저녁에 ‘<정대업>과 <보태평>을 만들었다.’(新樂節奏 上所制 以柱杖擊地爲節 一夕乃定)고 한다. 그런데 정대업 15곡 보태평 11곡을 후세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순수하게 새로 작곡한 것 이 아니고 이미 있었던 곡을 이용하여 종지형을 바꾸고 길이를 길게 하거나 짧게 만들어 편곡(?)을 했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세종대왕 이후, 우리 나라에는 수많은 곡이 만들어졌는데, 우선 한국적 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봐야 그 다음 한국적인 작품 이야기를 할수 있다고 본다. 현재의 한국음악 속에는 가깝게는 19세기 말부터 들어오기 시작한 서양음악과 고령의 예종 때 들어온 송나라 음악, 그리고 신라 때부터 들어온 당나라 음악과 우리의 고유한 음악이 한데 뒤엉켜 있다.
그 중에서 19세기 말에 서양음악이 들어오기 전의 우리음악 즉, 전통 음악의 특징을 간단히 살펴봄으로서 한국음악의 정의에 가까워지려고 한다. 동양화는 서양화에 비해서 여백 이 많다. 그리고 입체적 표현보다는 평면적이고 선적이다. 음악에서도 같은 현상으로 풀이될 수 있는데, 모든 음이 독립하면서 여음(餘音)의 처리가 극히 중요하여 만약에 거문고에서 시김새를 제거해 버린다면 국악은 좀처럼 들을 맛이 없는 뻣뻣한 음악이 되고 말 것이다. 대부분의 국악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개 그들의 귀에는 시김새가 안 들리고 원음만 들리기 때문에 지루하기만 한 것은 바로 이런 연유이다.
국악의 선율이 선적이라는 것은 <만년장환지곡>(가곡)을 들어보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길게 한음을 뽑아가면서 수많은 장식음(meIisma)을 넣어 가며 변화를 주는 모양은 흡사 섬세한 신라시대의 금목걸이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커트 삭스(Curt Sachs)는 서양음악의 리듬의 기초는 인간의 걸음걸이라고 하는데 이는 두발로 걷게 되니 2박자 계통의 리듬이 되겠고 이것으로 인하여 ‘모데라토’ 라는 것이 대개 인간의 보통 걸음걸이 정도가 된 것은 너무 당연하다.
그러나 한국음악에는 인간의 호흡이 리듬의 기초가 되고 있다. 학포금보(學圃琴譜)에 보면 맥박 4회를 호흡 1회 시간으로 계산하여 리듬을 세는 단위로 삼는데 이를 양식 척 (量息尺)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양식척은 메트로놈의 박절감보다는 얼마나 따뜻하고 인간적인가? 숨은 들이쉬고 내쉬는 것이 일정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고 내쉬는 것이 길고(長) 들이쉬는 것 이 짧다(短). 우리나라의 음악에서 장단이라는 것은 이러한 길고 짧음을 말하는 것으로 기초적인 장단은 대개 2:1로서 3박자이다. 이 3박자는 한국음악의 모든 영역에 깔려 있는데 이 2:1이 좀더 길어지면 5:3이 되고 더 길어지면 8:5가 된다. 그러나 2:1이 짧아지면 1:1이 되는데 이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8:5 ⇒ 5:3 ⇒ 2:1⇒ 1:1로 변화되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길고 짧음으로서 볼확정성을 갖고 있어서 이런 변화는 한마디로 미묘하다 할 수밖에 없다.
다음으로는 한국음악 중에서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문묘악을 소개하겠다. 문묘악은 C' 에서 d#"까지의 음역을 정 해 놓고 조옮김을 할 때는 d#보다 높은 음은 옥타브 내리고 C보다 낮은 음은 옥타브 올린다. 예를 들어, C, A, G, E의 선율을 장 6도 올리게 되면 A, f#, e, C#으로 되는데 여기에서 f#과 e는 제한음역을 넘게 되므로 옥타브 내려서 A, F#, E, C#의 선율이 된다. 같은 선율인데도 불구하고 조옮김을 하게 되면 전혀 다른 선율로 느끼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것은 홉사 쇤베르그의 12음 기법에서 하나의 정해진 음렬이 순서를 바꾸지 않고 나오는 것과 같아서 매우 흥미롭게 느껴진다.
우리가 서양음악을 받아들인 것이 100년을 눈앞에 누고 있는데 불교문화의 상징인 불상을 보면서 생각나는 것이 있다. 6세기 삼국시대 신라의 것으로 알려진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보면 불교 전래 초기의 작품이기 때문에 코가 높고 얼굴이 길고 허리가 가늘고 늘씬한 외국인 형상의 불상을 만들고 있는데, 8세기 신라통일기의 금동보살입상을 보면 얼굴에 살이 많이 붙고 갸름하고 도톰한 전형적인 한국인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신라시대 불상을 보면 200년 만에 외국 문화를 우리나라의 토착문화로 만든 것을 알 수 있다.
현대와 같이 정보매체가 발달된 이 마당에 100년을 지나도록 우리 것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좀 더 적극적으로 우리 것을 정립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신라 사람들이 200년 걸렸으니 우리도 200년은 걸려야겠다는 것은 현대와 같이 교통이 발달하고 정보 전달이 신속한 이 마당에서는 말도 안 된다. 우리나라에서 현재 연주되고 있는 현대 작품을 들어보면 모두가 너무 개성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자기의 세계가 없고 다른 사람이 이렇게 쓰니 나도 이렇게 써야겠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으로 보여 진다.
가끔씩 창작곡을 모아 연주하는 기회가 있는데 프로그램을 보지 않고 그냥 듣고 있노라면 누구의 것인지 전혀 개성을 느낄 수가 없다. 처음에는 조용히 시작하여 지속되며 긴장된 분위기를 이끌며 이따금 타악기가 쿵쿵 몇 번 점을 찍고 고조되다가 다시 조용히 마치는 이것이 대부분 작품의 스토리 이다.
우리나라 전통음악은 대단히 풍부하여 12음 기 법 적 인 문묘악과 헤테로포니 음악인 시나위까지 있다. 우리는 조상들이 남겨준 음악을 발전시키기는커녕 극히 제한된 몰개성 의 음악시대로 만들었으니 이것은 누구의 죄일까? 이것은 누구 몇 사람에게 책임이 있기보다는 우리 전체의 책임 이라고 봐야한다.
내가 듣기로는 유럽의 작곡계가 실험적인 작품경향에서 온건한 작품 경향으로 방향이 바뀌어가고 있다고 들었다. 이제 또 여러 사람들이 “내가 유럽에 가보니 이렇게 작품을 쓰고 있습니다”하는 얘기들이 만발할 것이다. 필자가 소속하였던 중앙대 음대 교수회의 광경이 생각한다. 어느 교수가 기회 있을 때마다 “비엔나에서는 그렇게 안 해요!” 이렇게 여러 번 이야기 하는 것을 듣고 “비엔나는 비엔나니까 그렇게 하지만, 여기는 서울인데 서울에서 꼭 비엔나에서 하는 것처럼 애야 되나요? 그렇게 비엔나식으로 하고 싶다면 비엔나 가서 교수 하세요.”라던 이야기가 오갔다. 이 문제는 유럽 사람들이 방향을 바꿨다고 해서 우리도 방향을 바꿔야 하는 것인가? 우리는 이렇게 항상 남의 것만 배우며 시간을 낭비 할 것인가? 극단적으로 말하면 앞으로 5년 후에는 5년 전에 유럽 에서 공부해 왔던 이론들이 별 도움이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남의 것만 따라 가다가는 우리는 항상 바쁘기만 할 것이다. 이제라도 우리는 우리의 전통이 어떤 것이 있나를 좀 더 적극적으로 찾아봐야 할 것이다. 말로만 하지 말고 정말 그 속에 뛰어들어 찾아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어 월간음악에 "모든 것에 우리 것 이라는 색채를 내야한다"라는 글을 썼다. 푸치니가 그의 출세작 <마농>을 작곡한 것은 1893년 그의 나이 35세였고 <라보엠>은 1896년 38세였다. 그리이그는 <페르귄트>를 1874년 즉 31세에 작곡하여 그의 명성을 드날렸다. 30대라고 하면 왕성 한 창작의욕으로 작품 활동을 할 나이라고 하겠으나 아직 작풍(作風)이 정립되기에는 이른 시기라고 할 수 있어서 고민과 갈등을 해소하기에 많은 노력이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된다.
앞에서 예로 들었던 작곡가들은 이미 30대에 그의 출세작을 발표하여 작곡가로서의 위치를 굳혔다고 할 수 있었는데 나의 작품이 과연 나의 예술 30대의 세계를 말할 수 있을 만큼 성장했는지는 의문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전하는 것을 보면 ‘진흥왕이 이르기를 나라마다 서로 말이 각 다른데 어찌 음악이 같을 수 있겠는가? 하고 우륵에게 명하여 새로운 음악을 만들도록 하여 12곡을 지었다. 그뒤, 우록도 가야국이 어지러워지매, 가야고를 가지고 신라 진흥왕에게 투항하였다. 진흥왕은 그를 받아들여 국원(國原, 지금의 충주)에서 음악을 가르치고 배우게 하였다. 진흥왕이 우륵의 음악을 즐겨함을 보고 신하들이 '망한 나라의 음악(亡國之音)은 취할 바가 못 됩니다.’라고 상소하였다. 이에 진흥왕은 ‘가야왕은 음란하여 스스로 망한 것 이지 음악에 무슨 죄가 있겠는가’라고 상소한 사람을 탓하였다.
여기에서 우리가 음미해야 할 뜻은 나라마다 말이 다르다는 점이다. 전라도와 경상도만 비교해 보아도 전라도 말의 억양은 유연하고 그래서 육자백이같이 매우 부드러운 민요를 가졌는가하면 경상도 말은 투박하고 꿋꿋하여 옹헤야 같은 활기있는 민요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지방마다 음악이 다른데 하물며 동양과 서양의 음악이 서로 다른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우리말의 가사를 갖고 있는 가곡을 부를 때 가끔 가사 전달이 안된다는 말을 듣는 수가 있다. 이러한 현상은 말은 우리말이로되 음악은 서양음악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음악이 무슨 죄냐? 나라가 망한 것은 위정자의 죄이지 음악의 죄가 아니다. 나라는 망했더라도 그 음악이 훌륭하다면 우리가 그 음악을 멀리할 이유가 없다. 필자는 오늘날의 국악에 대하여 동일한 생각을 적용하고 싶다. 러시아의 국민악파가 유럽음악계에 큰 기여를 한 것처럼 우리나라 국악도 세계음악계에 기여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 음악은 여러 차례 외국에서 외국음악을 수입하였다. 고구려는 서역음악인 중앙아시아 음악을 수입 하였고, 신라는 당악을 고려는 송나라의 음악을, 조선조 말에는 서양음악을 수입 하였다. 우리의 조상들이 외국의 음악을 받아들인 방법은 매우 흥미있는 것으로 현재의 우리들에게 좋은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외국의 음악을 우리 음악으로 소화한 것 중에 <보허자>(步虛子)와 <낙양춘>(洛陽春)이 있다. 현재의 <보허사>(步虛詞)는 본래 송(宋)나라에서 들어온 사악(詞樂)으로서 가사가 탈락되어 기악곡과 같은 인상을 주면서 연주법과 음역 등의 변화와 함께 많은 파생곡이 생겼다. 현행 <보허사>는 옛 <보허자>의 원형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또한 이 <보허자>의 일부를 변주하여 <밑도들이>·<웃도들이>·<계면 가락도들이>·<양청 도들이> 등의 파생곡이 생겼는데 이 곡들은 완전히 향악화(鄕樂化)되어 다른 향악곡과 구별이 어려울 정도이다.
우리의 전통 음악에는 창작 즉, 작곡이라는 개념은 없었다고 할 수 있어서 어떤 한 곡을 오랫동안 여러 사람들이 연주해 오는 동안에 그 파생곡이 생기고 변주곡이 생겨 온 것이 우리의 형편이었다. 예를 들면, <영산회상>(靈山會相)만 하더라도 처음에는 상령산 한 곡이었던 것이 중령산·세령산·가락덜이·상현환업·하현환업 등으로 확대 발전하여 지금과 같은 큰 곡이 이루어진 것이다.
서양의 음악은 작곡가 중심의 음악이었다고 할 수 있어서 음악 사조가 바뀔 때마다 천 재적인 작곡가에 의해서 음악이 발달해왔다. 해방 후, 우리나라의 음악계는 외국의 음악을 받아들이기에 여념이 없었던 시기였다. 외국의 음악을 얼마나 철저하게 받아들였는지는 음악대학의 교과 과정에 잘 나타나 있다. 차라리 음악대학의 간판이 양악(洋樂)대학으로 바뀌어야 할 만큼 철저히 외국의 음악을 받아들였다. 받아들인 것을 나쁘다고 할 수만은 없다고 생각한다. 옛날 우리의 조상들이 보허자를 받아들여 원형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보허사>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밑도들이, 웃도들이 등의 변주곡을 만들면서 우리의 숨결이 스미고 우리의 멋을 더 보태서 향악화시켰던 것처럼 지금의 우리도 외국의 음악을 소화시켜 우리의 음악을 더 풍부하고 살찌게 만들 때가 되었다고 본다.
5. 거문고 이야기(1978)
하루는 서울대 장사훈 교수님께서 전화를 하셨다. 사실 이렇게 선생님께서 전화하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이어서 긴장하고 전화를 받았다.
“좋은 거문고가 두 대 나왔는데----, 하나는 내가 구입하려고 하는데----,”
“굉장한 거문고라네. 자네 형편이 되면 구입해 두면 어떠한지---- 형편이 되는지.”
나는 선생님께서 전화하시고 권하는 것이라 생각할 것도 없이 값이 얼마냐고 묻지도 않고 내가 사겠다고 하였다. 다행이도 비싸기는 하지만 감당할 만한 정도였다. 지금은 잊었지만 당시 고등학교 음악선생이었던 내게 3개월 정도의 월급이었다. 난데없이 큰돈을 내놓으라는 나의 요구에 순순히 돈을 건네준 집 사람에게 지금도 감사하고 있다. 무엇하러 거문고 연주가도 아니면서 그리 비싼 악기를 사느냐고 한 마디 묻지도 않고 돈을 선뜻 건네 준 집사람을 생각하면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장산도에서 무당 음악 현장연구에서 돌아와 나는 이 거문고를 만지면서 장산도 무당음악의 리듬을 거문고에 얹었다. 이렇게 하여 작곡한 것이 <장산도>와 <정읍후사>라는 거문고곡을 만든 것이다.
<정읍후사>는 시인 김양식의 시에서 악상을 빌려 온 것이다. 당시 나는 틈이 나면 고서점을 순례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꽤나 정성껏 한지로 제본한 시집이 눈에 보였다. 이것은 페이지마다 판화로 인쇄한 것이었다. 후에 알고 보니 이 김양식 시인은 인도문화에 심취한 분이었다. 내가 인도 음악에 빠질 것이라는 운명을 예고라도 하는 듯 인도는 그렇게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대학 일학년 때, 장사훈 교수님께 거문고로 <영산회상>을 배웠다. 다행히 선생님은 정간보 악보를 사용하지 않으시고 5선보 악보로 교육하셨다. 나는 오선보는 잘 볼 수 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공부를 하였고 선생님께서 매우 아껴 주셨다. 가끔 선생님께서는 거문고를 타주셨는데, 문현을 치고 그 여음을 다음 유현 소리가 나기 직전에 왼손 바닥으로 막으며 타는 거문고 소리는 가히 신선의 소리였다. 유현의 영롱한 소리도 일품이려니와 대현의 육중한 소리는 깊은 바다에 산다는 잠룡의 꿈틀거림 그 자체였다. 옛 선비들이 거문고를 좋아하여 서재에 두고 즐겨 탔다고 한다. 지금도 조용할 때 거문고 음악을 들으면 장선생님의 거문고 소리가 아련히 귓가를 맴돈다.
2007년 7월 중순 경, 필자는 병산서원을 찾았다. 이번 계기는 종교학 전공 이화여대 최준식 교수가 이끄는 문화표현단의 답사팀과 함께였다. 최교수는 종교학자인데 국악의 멋을 젊은이들에게 전하려고 무척이나 애를 쓰고 있었다. 이처첨 국악을 위해 고생하는 분에게 무엇인가 기여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거문고를 전공하는 딸아이에게 연주를 부탁하여 선비음악의 멋을 전하려고 병산서원을 찾은 것이다. 저녁 어스름이 깔리고 있다. 널찍한 만대루 마루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면 낙동강이 흐르고 있다. 우람한 바위 절벽 앞으로 흐른 강은 너무 거창하지 않아서 마음이 편해진다. 먼 길을 오느라 버스에서 시달렸고 특히 안동에서 하회 마을로 들어가는 진입로 초입 1차선 비포장도로가 짜증스러웠다.
슬기둥 -- 덩 --- 둥, 거문고 굵은 줄 대현의 우람한 선율이 마루바닥을 통하여 온몸으로 전해진다. 여기에 대비하여 가는 줄 유현이 영롱한 소리로 화답한다. 천장을 바라보니 우람한 대들보와 서까래가 보인다. 소위 말하는 연등천장이다. 이 천장에서 반사되는 소리는 알맞은 잔향을 가지고 있어 귀를 아주 시원하게 해 준다. 연등천장은 마치 중세 유럽의 돔형 천장 역할을 한다. 천주교 성당의 돔은 궁융형(弓融型) 천장이다. 천주교 성당에서는 성가대의 노래가 높이 오르다 이 천장에서 반사되면 하늘의 소리와 같은 신비한 소리를 낸다.
만대루는 선비들이 글 읽는 짬짬이 머리를 식히던 곳이었다. 앞에는 바위 절벽이 마치 병풍처럼 둘러 있다. 선비들이 풍류를 즐긴다면 아늑한 사랑방에 병풍을 치고 그 앞에서 거문고 음악으로 반주삼아 나지막하게 자신이 지은 시를 노랫말 삼아 가곡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병산서원은 경북 안동군 풍천면 하회리 병산 마을에 있다. 이 서원은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서애 류성룡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병산서원의 전신은 풍악서당으로 고려 공민왕이 안동일대로 피난 왔을 때 왕의 후원으로 성장한 서원으로 풍산읍 소재지에 있어 풍산 류씨 가문의 서당으로 유지해 오다가 1572년 류성룡이 지방관으로 역임하던 시절, 현재의 병산 서원자리로 옮겨왔다. 임진왜란으로 불탄 서당을 1607년 다시 중건하였고, 1614년 사당인 존덕사를 건립하면서 서원으로 탈바꿈 하였다. 1620년 서애의 위패가 안동 동쪽의 여강서원으로 옮겨졌다가 1629년 다시 모시게 된다. 사액서원으로 승격한 것은 1850년대이고 대원군의 서원 철폐 명에도 살아남았다. 일제 강점기에 대대적인 보수가 행해졌으며 강당은 1921년 다시 세웠다고 한다. 병산서원으로 가는 길은 꽤나 고약하다. 안동에서 하회 마을로 들어가는 진입로의 초입에서 왼쪽으로 1차선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비포장도로가 나온다. 맞은 편에서 차와 마주치게 되면 여간 고역이 아니다. 더구나 대형 버스와 마주친다면 낭떨어지로 떨어질듯한 아슬아슬한 곡예 운전을 보게 된다.
이렇게 잠시 유장해 보이는 낙동강을 끼고 엉금엉금 기어 들어가면 병풍같이 생긴 산이 일행을 맞이한다. 긴장감으로 팽팽하던 가야고 산조의 휘모리에서 마지막 도섭으로 긴장을 풀어주는 장면처럼 이곳에 도착하면 갑자기 편안해 진다.
몇 채의 민가와 병산과 마주하고 있는 건물 지붕이 보인다. 바로 병산서원이다. 지금도 들어가려면 힘드는 이곳은 옛날에는 아주 궁벽한 곳이었을 것이다. 옛날 선비들이 과거 급제 꿈을 않고 이곳에 들어오면 과거 시험이나 보려고 나오지 그렇지 않으면 밖으로 나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처럼 이곳은 외부와 차단된 곳이다.
정면의 복례문을 통해 들어오면 누대 다락인 만대루를 통해 선비들이 공부하던 장소인 입교당 마당으로 들어가게 된다. 만대루는 정면이 7칸이나 되는 무척 긴 구성이어서 사나이의 큰 포부를 상징하듯 한다. 이 만대루는 강당 역할을 하고 밖으로부터 공부하는 선비에게 오는 자극을 내부는 막아주고 안으로부터는 밖을 열어주는 기능을 한다. 무엇보다도 주변의 경관을 만대루가 맞이하고 있는 장면은 압권이다. 만대루가 낙동강과 병산을 대하고 있는 모습은 고고한 선비의 정신을 상징하는듯하여 매우 인상적이다.
조선조 선비들은 거문고를 꽤 숭상하여 아무데서나 연주하지 않았다. 1724년에 편찬한 한금신보(韓琴新譜)에 오불탄(五不彈)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거문고 연주에서 지켜야 할 다섯 가지 금기 사항을 밝힌 것이다. 오불탄의 첫째는 질풍폭우(疾風暴雨) 불탄으로, 빠르고 요란스런 음악을 거문고로 타지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는 대속자(對俗子)불탄으로, 교양 없어 음악을 이해하지 못하는 속된 사람 앞에서는 타지 않는다는 것이고, 세 째는 진시(塵市)불탄으로 장거리 즉, 장터에서는 연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네 째는 불좌(不坐)불탄으로 정좌해서 바르게 자리 잡은 후가 아니면 타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섯째는 불의관(不衣冠)불탄으로 의관을 바로하고 정장한 상태가 아니면 타지 않는다는 뜻이다.
벌써 오래 전일이지만, 병산서원 만대루에서 듣던 딸아이가 연주 하는 거문고를 소리가 내 귓가에 쟁쟁하다. 굵은 대현과 가는 유현의 줄 소리가 마루바닥에서 발끝으로 전해오고 맞은편 바위 절벽에서 울려오는 소리인 듯 웅혼하게 반사되어 울리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린다.
그날 우리 일행은 마치 조선조 선비인양 늦게까지 맥주잔을 기울이면 나라의 장래도 논하고 특히 21세기에 닥아 올 문화의 세기를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밤새도록 토론을 하였다. 기회가 되면 이번에는 내 자신이 직접 거문고를 만대루에서 타 보아야지 하는 꿈을 아직도 버리지 않고 있다.
거문고를 배우는 과정에서 잊을 수 없는 분은 조위민 선생님이시다. 서울대학 국악과에서는 부전공 제도가 있었는데, 본인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작곡 전공 학생은 부전공으로 거문고를 선택하도록 되어 있었다. 당시 조위민 선생님은 대학 졸업 후 처음으로 서울음대에 시간 강사로 처음으로 학생 둘을 배정 받았는데, 그 중의 하나가 나였다. 달랑 학생이 둘인데 동급생 한 사람은 학교를 다니는 둥 마는 둥 하였다. 선생님은 와 계시는데 학생이 안 오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레슨을 빠질 수가 없었다.
조위민 선생님은 처음 강사를 시작하셔서 의욕이 넘치고 있었다. 레슨을 세 시간씩 계속하셨다. 이런 선생님의 의욕과 선생님이 기다리시는데 아무도 안 가면 어쩌나 하는 나의 여림에 나는 엄청난 공부를 하였다. <신쾌동 거문고 산조> 전 바탕을 다 외웠다. 그리고 가곡 전 바탕을 배웠다. 신쾌동 산조를 듣노라면 당시 열심히 가르쳐 주신 조위민 선생님 생각이 난다. 이렇게 배운 덕택에 나는 석사학위논문으로 "가곡의 대여음에 관한 연구"를 쓰고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 논문은 한국국악학회의 학술지 창간호인 한국음악연구에 수록되었는데, 당시의 일이 지금도 생각난다. 당시 학회 사정이 어려워서 논문을 싣고 나서 논문을 제출한 당사자에게 인쇄비 일부를 담당시키토록 한 모양이다. 당시 나는 상명사대 부중 교사였는데, 장사훈 선생님께서 직접 전화를 하셨다.
얼마인지는 기억이 안나는데 선생님이 인쇄비 일부로 얼마를 부담하라는 내용이었다. 당시 중학교 선생이던 나에게도 조금은 부담스런 액수였다. 그래서 철없이 “그렇게 많이요?”하고 대답을 하고 말았다. 이 때 장사훈 선생님이 몹시도 서운하셨던 모양이다. 대학원 학생 석사 논문을 학술지에 싣도록 배려하였는데 ‘학술지의 가치를 모르는 놈’이라고 하셨던 모양이다. 이 이야기를 한만영 교수가 전하면서 선생님께 사과드리라고 하여 선생님 모시고 식사하며 쩔쩔매며 사죄드렸던 일이 생각난다.
7. 네팔 아가씨 줄루(1985)
1983년 이 해는 내가 중앙대학교 국악과에 전임 교수로 부임한 해였다. 나는 당시 전남대학교 교수였던 최종민 교수의 제의에 따라 전남대학교로 가려고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채용시험도 보고 면접도 보고 서류도 다 내서 발령이 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때였다.
그런데 중앙대학교 교수가 된것이다. 그런데 이 갑자기 취직을 한 후에, 일 년이 지난 후 말할 수 없는 고통의 나락으로 몰고 가고 있었다. 부끄럽게도 학생들이 전인평을 도마 위에 놓고 성토를 벌이고 있었다.
“전인평은 실력이 없다.”
“전인평은 거짓말쟁이다.”
“전인평은 학교의 공금을 떼먹은 사람이다.”
이후 나는 학교를 떠나기로 되어 있었고 그리고 학기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떠날 사람이라고 새로 음대 건물이 준공되었으나 연구실 배정도 받지 못한 형편이었다. 이후 나의 휴직이 결정되었다. 내가 이 때 선택한 것이 인도행 이었다.
인도에 가보니 무척 이나 더웠다. 아침 최저 온도가 30도였다. 그리고 한 낮에는 40도를 넘고 있었다. 인도 델리의 간다르바 마하 비디알라야(Ghandharva Maha Vidyialyaya)라는 음악학교에서 인도음악을 공부하려고 자리 잡았다. 그러나 너무 더워서 공부는 고사하고 하루하루 살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같은 클라스에 네팔에서 온 ‘줄루’라는 노처녀가 있었다. 나이는 물을 수가 없으니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우리나라 초등학교 4학년 쯤 되어 보이는 작은 체구에 까만 얼굴의 아가씨였다. 작은 체구에 검은 피부라서 예쁜 곳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보이지 않는 그런 아가씨였다.
이 아가씨는 인도 정부에서 주는 월 미화 50불의 장학금을 받는 인도 정부 장학생이었다. 인도 사람들은 조금은 건방져서 이웃나라 사람을 얕잡아 본다. 벵글라데쉬 사람을 제일 천하게 여기고 다음이 네팔 사람이다. 이웃의 스리랑카는 당시 민족 분쟁이 있었기에 더욱 감정 이 좋지 않았다. 이렇게 무시하는 네팔 아가씨가 인도 정부의 장학금을 받는다는 사실이 인도 학생들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또 일본 여학생과 같은 방을 쓰고 있었는데 이 일본 아가씨가 또한 까다로운 사람이었다. 어떤 때 줄루가 차를 마시면서 일본 아가씨의 설탕을 한 스픈 양해 없이 먹었던가 보다. 이 사실을 기회만 되면 일본 아가씨는 재방송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모두들 네팔아가씨를 왕따시키고 있었다. 줄루를 보면 당시 초등학생 이던 딸아이가 생각났다. 키가 비슷하였기 때문일까? 아니면 아빠 없는 사이에 고생이나 하지 않나 하는 딸아이에 대한 연민 때문이었을까?
나는 인도 음악을 공부하러 왔다고 하지만 인도 음악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기에 누군가 자상한 도움이 필요한 형편이었다. 그래서 주위의 학생들에게 질문을 하면 그들은 한결같이 ‘열심히 연습하다 보면 나중에 저절로 알아져요’하면서 대답을 안한다. 뒤에 안 것이지만 그들도 잘 모르고 있었다. 인도에서는 실기 중심으로 수업을 하였고, 이론 수업은 매우 등한하였다. 인도음악 책을 읽어보면, 인도 사람들이나 알 수 있는 그런 아리송한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줄루는 인도 음악 책을 읽으면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이지적인 아기씨였다. 정말 맹탕이던 인도 음악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 사람이 줄루였다.
인도에서의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특히 살인적 인 더위는 참을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아침 최저온도가 30도에서 시작한다. 인도 사람들은 한낮이 되면 두꺼운 커튼을 치고 밖에서 열기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꼭꼭 닫고 낮잠을 잔다. 이렇게 내가 더위 때문에 어찔줄 몰라하는 것을 출루가 보기에 딱하던 모양이다. 하루는 얼음 넣은 차 한 잔을 건넨다.
“전지, 압께세헤(안녕하세요)? 차 한잔 합시다.”
인도 사람은 존칭으로 ‘지’라는 말을 쓴다. 그냥 ‘간디’하고 하지 않고 ‘간디지’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아버지에서 ‘아비’라는 말에 존칭어에 ‘지’가 붙은 것이 아닌가 싶다.
“인도 생활 어떠세요”
“죽을 맛입니다.”
“어려운 일 있으면 말씀하세요, 도와 드릴 터이니—--”
이렇게 말문을 트고 보니 줄루는 대단히 유식한 아가씨였다. 영어는 물론 싼스크릿어, 힌디어에 능통한 대단한 아가씨였다. 그리고 인도 문화권의 역사와 문화에 상당한 식견이 있었다. 이 아가씨를 통하여 배운 산스크릿어는 대단히 유용한 정보였다. 그전에는 이해가 안되던 사실이 산스크릿 공부를 하면서 풀리기 시작하였다.
인도에서는 수업 전에 선생(구루)에 게 인사를 한다. 그냥 머리 숙여 인사하는 것이 아니라 큰 절을 한다. 그리고 일어서면서 선생의 발을 만진다. 그리고 일어나면서 발 만진 손으로 자기 이마를 만진다. 나는 선생에게 큰 절은 하겠는데 도대체 발을 만질 수는 없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발은 더럽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시간이 지나 서로 편안해지자 줄루가 말을 걸었다.
“왜 선생에게 인사를 안하나요?”
“인사를 안하다니, 무슨 소리야. 나는 인사를 잘 하였는데—--”
“절을 하고 발을 만져야 진짜 인사가 됩니다.”
“왜 발을 만져야 되지?”
“선생 발을 만지고, 다시 이마를 만지는 것은—-—, ‘나의 머리는 선생의 발만도 못합니다. 많이 가르쳐 주십시요’라는 뜻이예요.”
순간 나는 쇠망치로 얻어맞은 듯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크게 깨달았다. 인도가 어떤 힘으로 굴러가는지, 엄청난 사유 체계의 인도 철학이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 조금은 알 수 있었다. 당시 한국 교수들의 수모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당시 목원대학교에서는 등록금 문제로 총장을 감금하고 머리를 깎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성균관대학교에서는 학생이 교수를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학생들의 배척 운동으로 인도에 밀려온 나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인도인은 이토록 선생을 존경 하고 있었다. 어찌 인도를 가난한 나라라 흉볼 수 있을 것 인가? 인도인은 가난하지만, 정신적으로는 지상 최대의 갑부이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인도는 정신문명으로는 최 선진국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인도를 ‘신비의 나라’, ‘불가사의의 나라’라고 부른다. 인도를 처음 여행해 본 사람은 인도의 열악한 생활환경 , 상상을 초월하는 서민의 가난한 모습, 사회의 무질서, 인도 사람들의 불친절·무례함·부패한 관료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인도란 신이 버린 저주받은 나라가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3개월 정도 지나면 어머니 품과 같은 편안함과 따뜻함을 느끼고 새롭게 놀라게 된다. 그리고 문명에 찌들릴대로 찌들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또한 자신의 생활이 얼마나 덧없는 것을 위해 수많은 시간을 마음 졸이고 살아왔으며, 자신이 얼마나 많은 쓸데없는 굴레에 얽매어 있는지를 발견하게 된다. 또한 소위 현대 기계 문명 이라는 것 이 인간에게 참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인가, 그리고 인간은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일까 하는 본질적인 의문을 갖게 한다.
인도의 무엇이 사람을 이토록 휘어잡으며, 인도의 어떤 마력이 사람을 인도에 미치게 하는 것 일까? 이와 같은 의문에 빠지면서, 인도는 ‘신비의 나라'라는 말이 과연 빈말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음악을 대하는 태도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음악 전문가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적 태도로 대할 것 이고, 일반인에게는 즐기기 위한 목적으로 음악을 듣는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음악을 통해서 마음과 몸을 닦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음악을 교육적 목적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인도 사람들은 앞의 여러 가지 목적 외에 신에게 자기의 뜻을 전하고 신의 음성을 듣기 위한 종교적 목적이 추가된다. 그리고 어쩌면 음악의 종교적 목적 이 가장 강조되는 측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인도에서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가 따블라를 배우는 것을 보고 노인이라 심심해서 그러려니 했는데 , 신문기자라는 40대 의 남자가 딸과 함께 시타르를 배우는 것을 보고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특별한 몇 사람이 취미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꽤 많은 수의 성 인이 매일 음악을 공부하며 지낸다. 그리고 그 음악을 공부한 기간을 물어보면 10년 간 공부했다는 사람은 수두록하고 20년 넘게 음악을 배우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이 왜 이렇게 음악을 배우는가 하는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축제가 돌아오자 곧 그 의문을 풀게 되었다. 축제가 되면 그들은 자기가 섬기는 신상을 모셔놓고, 온 집안 식구가 함께 먹고 마시며 노래하고 성대한 잔치가 벌어진다. 이때에 손자가 노래할 땐 할머니와 아들이 반주하고, 할머니 노래에는 아들과 딸이 반주한다. 온 집안 식구가 돌아가며 신을 찬양하며 노래하며 즐긴다. 이 축제에서 악기를 못 만진다거나 노래를 못한다면 자리에 함께 할 수 없다. 인도 사람들이 이 때 부르는 모든 노래는 신을 섬기는 찬송가이다. 이 음악은 듣는 사람을 즐겁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신을 찬양하기 위한 것이고, 이차적인 목적 이 인간을 즐겁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인도사람들은 신을 찬양하는 동안에 듣는다고 한다. 그들은 바로 이 신의 소리를 듣고 말할 수 희열에 잠긴다.
7. 칼카타의 밤샘 음악회
인도를 여행 중 칼카타에 도착한 날이었다. 당시는 칼카타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민족주의 바람이 불어 원래의 이름인 ‘꼴까따’로 바뀌었다. 호텔에서 쉬는데 딩굴거리다 보니 신문에 ‘밤샘음악회’(over night concert)라는 기사가 눈에 뛴다.
밤샘 음악회!
도대체 밤샘 음악회란 어떤 것일까? 밤새워 술을 마신다든지, 밤새워 파티에서 술을 마시며 논다면 몰라도, 밤을 새워가며 음악을 듣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이 음악회는 저녁 6시에 시작하여 다음 날 아침 6시에 끝나는, 그야말로 ‘밤샘 음악회’였다. 글쓴이는 마드라스에서 36시 간 기차를 타고 막 돌아왔기 때문에 피곤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도대체 밤샘음악회란 어떤 분위기일까 하는 호기심에 음악회장에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워낙 피곤하기도 하지만 밤을 세우려면 힘들 테니까, 6시에 시작한다는 음악회를 9시 쯤 갔다. 현장에 도착해보니, 천막을 쳐서 만든 임시 음악당으로 Indian Music Conference라고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서울의 음악회라면 9시는 음악회가 거의 끝날 시간이다. 그러나 밤샘음악회라 그런지 음악회장 입구에는 수많은 사람이 모여 술렁이고 있었다. 복잡한 사람 속을 뚫고 매표소를 찾았다. 천만뜻밖에도 ‘매진’이라고 씌어있고, 매표구는 닫혀있었다.
매진이라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비싼 입장료였다. 입장료는 세 등급으로 나누어 100루피, 150루피, 200루피였다. 당시 인도에서 고등학교 졸업하고 받는 첫 월급은 400투피 정도, 그렇다면 하루 저녁 음악회를 위해 최소한 일주일치 품삯을 치러야 한다. 외국 유명악단의 연주회도 아니고, 인도에서 인도 음악회가 이토록 비싸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거기다 이처럼 비싼 음악회가 ‘매진’이 라니—---. 매진이라고 그냥 돌아서면 한국 사람이 아니다. 나는 늦게 온 죄로 비싼 암표를 샀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1천 5백 명의 는 정도의 청중이 앉아있다. 나는 구석에 자리잡았다가 시간이 지나 사람이 빠져나간 후에 제 자리를 찾으리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빠져나가기는커녕, 점점 더 늘어나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날 밤 가장 인기 있는 성악가인 빔 센조시 (Bimsenjosi)는 한 밤중의 라가인 바게쉬리 (bagheshri) 라가를 자정에 연주를 시작하였다. 자정이 되자, 그야말로 입추의 여지가 없는 꽉 찬 상태가 되었다. 느린 알랍으로 시작한 라가는 점 점 빨라지면서, 긴장감이 고조된다. 뜨거운 열기 속에서 음악이 끝났다. 쏟아지는 박수, 그리고 환호, 대단한 열기였다. 시계는 한 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한 시간 이상의 연주는 누구나 가능하다. 그러나 이 늦은 이 시간에 사람들에게 음악을 듣도록 만드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연주가 끝나고 연주가가 바뀔 때는 15분 정도의 휴식 시간이 있다. 이때는 밖으로 나와 차나 간식을 들며 쉬다가, 안으로 들어가 계속 음악을 듣는다.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기 때문에 이 정도로 밤샘 음악회 이야기를 줄여야겠다. 인도 사람들은 아마도 이 비싼 음악회를 위해 표를 미리 사고, 연주 날을 손꼽아 기다렸을 것 이다. 그들이 음악이 듣는 분위기를 보면,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고뇌와 어려움을 다 초월한 그런 순수한 모습이다. 인도음악의 어떤 힘이 이토록 인도 사람을 휘어잡을 수 있는 것일까? 우리 나라 대학에서는 학생들에게 한국음악의 이해를 높이기 위하여, ‘국악개론’이나 ‘한국음악의 이해’ 같은 시간을 만들어 놓고 국악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이 국악에 관심을 보일 뿐이다. 그러나 인도 대학에는 ‘인도음악개론’같은 시간이 없다. 인도음악을 진흥시키자는 운동도 없다.
형편이 이러함에도 그들은 전통음악을 즐기며 밤을 지새우니 놀랍지 않은가? 그러니 누가 인도사람들은 가난하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할 수 있는가? 물론 가난한 것은 자랑할 것은 못된다. 그러나 가난함 속에서도 참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사는 삶! 그런 가난한 삶이라면 결코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날 호텔에 돌아와 밤을 꼬박 새웠는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참으로 엄청난 인도음악의 힘이 아직도 머리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도 음악계를 둘러보고 느낀 것은 놀라운 그들의 수용능력 이었다. 인도에는 인도의 전통적인 씨타르· 비나· 따블라· 반스리 등의 악기가 있지만, 서양에서 전해 온 바이올린이나 기타도 어엿한 인도 악기이다.
<그림> 남인도 음악 합주 모습,
위 사진은 바이올린 둘과 타악 둘의 남인도 합주 모습인데, 바이올린 연주 자세가 유럽과 매우 다르다. 외국 악기를 수용하였지만 자신의 연주 스타일을 구축하였다.
<그림> 인도 기타 연주 자세.
인도 바이올린도 역시 연주 자세부터 자신의 방법으로 연주한다. 서양 사람들은 어깨에 메고 서서 바이올린을 연주하지만, 인도인들은 앉아서 바이올린의 지판을 아래쪽으로 향하도록 숙이고 연주한다. 서양사람 눈으로 보면, 악기를 거꾸로 들고 있는 셈이다. 음악 내용은 하이든이나 브람스가 아니고, 인도의 전통음악인 라가를 연주하고 있다. 그리고 인도 음악의 시김새를 나타내기 위하여 오른손으로 튀기고 왼쏙으로 농현을 하여 인도 전통적인 라가의 기법을 구사한다.
우리나라에 바이올린이 소개된지 벌써 100여 년이 넘었지만, 이 악기는 여전히 서양악기로 남아 있다. 바이얼 린은 베토벤이나 모차르트의 음악을 연주하는데 쓸 뿐, 이 악기로 영산회상이나 산조는 연주하지 않고 있다.
인도사람이 외국악기를 대하는 태도는 우리와 판이하다. 인도 사람들이 연주하는 바이올린은 연주 자세부터 그들 식이다. 서양 사람들은 어깨에 메고 서서 바이올린을 연주하지만, 인도인들은 앉아서 바이올린의 지판을 아래쪽으로 향하도록 숙이고 연주한다. 서양 사람 눈으로 보면, 악기를 거꾸로 들고 있는 셈이다. 음악 내용은 하이든이나 브람스가 아니고, 인도의 전통음악인 라가를 연주하고 있다. 바이올린은 몇 사람이 재미로 하는 것 이 아니고 인도 음악계의 중요한 한 부분이다. 음악학교에는 씨타르 교수와 함께 바이올린 교수도 있고, 전공하는 학생의 숫자도 결코 적지 않다. 인도에서는 바이올린은 서양악기가 아닌 바로 인도 악기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바이올린이 널리 쓰이지만, 바이올린 교수에게 베토벤을 연주하라고 하면 그들은 고개를 내젖는다. 이같은 형편은 바이올린· 기타 뿐 아니라 클라리넷· 오보에· 피아노 까지 연장된다.
이와같은 인도 음악계를 살펴보고 필자는 인도는 거대한 옹광로라고 생각했다. 자동차나 비행기의 쇳조각이 거대한 용광로에 들어가 용해되듯이, 인도 음악계에 외국의 악기가 들어오면 이 악기는 인도 악기로 다시 태어난다.
인도 음악계를 보고 놀라운 것은 서양음악에 대한 무식함(?)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특별히 음악인이 아니더라도 슈베르트·브람스·드뷔시의 이름은 알고, 베토벤의 운명교향곡 주제 정도는 알고 있다. 그러나 인도의 음대 교수들은 베토벤· 모짤트 정도의 대 음악가를 이름 정도만 알지 그의 작품은 모르고, 나아가 팔레스트리나· 퍼셀 정도 이야기를 하면 그 사람도 음악가냐고 물을 정도이다. 인도의 수도라고 하는 델리에는, 우리나라에서 그 흔한 시립 교향악단 하나 없다. 방송을 들어도 서양 음악은 들으려야 들을 수 없고, 그 유명한 마이클 잭슨의 음악도 들을 수 없다. 오직 인도의 전통음악인 라가와 바잔, 인도 영화 음악 등이 흐를 뿐이다.
인도는 잘 알려진 대로 1633년 영국이 벵갈지방을 식민지로 삼으면서 1947년 독립할 때까지 장장 300년도 넘는 영국 식민지 생활을 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300년 식민지 생활에도 유럽 음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토록 오랫동안 유럽 사람들과 접촉을 했지만 놀랍게도 기독교 인구는 전 인구의 3%에 불과하다.
우리나라는 이 땅에 유럽음악이 들어온지 100년 밖에 안됐지만 방송음악·교육음악·영 화음악·오락음악 어느 곳을 보아도 서양음악이 잘(?) 보급되어 있다. 너무 잘 보급이 되어 있어서 국악은 마치 박물관의 고려자기 대하듯 평소에는 잊고 있다가, 설이나 추석 에나 듣는 음악으로 인식될 지경 이다.
글쓴이는 인도 음악을 대하면서, 외래 음악의 홍수 속에서 설자리를 잃어 가는 한국 전통음악계로서는 인도 음악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음악하면 유럽 음악을 이야기하고, 한국음악은 ‘전통음악’ 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인도에서는 ‘음악’하면 이것은 당연히 인도 음악이고 아예 유럽 음악은 없다. 그래서 인도 사람들은 자기나라 음악을 인도음악(indian music)라고 하지, 인도 전통음악(indian traditional music)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음악(music)은 서양음악이고, 한국음악은 전통음악(Korean traditional music)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최근 우리나라는 무분별한 유럽 문화를 추종하면서 우리의 전통을 소홀히 하고 있는 문화현상을 비판하고 반성하며, 전통문화에 대해 새롭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러한 관심은 음악계뿐만 아니라 문화계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는 추세이다. 이러한 관심이 일시적 인 관심으로 끝나지 않고 진실로 민족문화 창달이라는 수준으로까지 이어져 성공을 거두려면, ‘왜 전통예술이 대중으로부터 멀어졌는가,’ ‘왜 불과 100년 만에 전통음악이 서양음악에 안방을 내주고 사랑방으로 밀려나게 되었는지’를 진지하게 살펴야 할 것이다. 그 원인을 찾는 데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겠으나, 전통음악을 성공적으로 보존하고 있고, 일반 대중들로 부터 전통음악이 사랑 받고 있는 인도 음악계를 참고로 한다면 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음악 역사상 가장 오래된 음악을 몇 꼽는다면 그 중의 하나가 인도음악이다. 인도음악은 인도 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의 음악학자들이 관심을 보여왔고, 또한 인도 음악을 즐기는 사람도 많다. 그래서 비유럽 음악 중에서는 인도음악의 연주회가 가장 많은 형편이다.
글쓴이가 인도와 관계를 맺은 것은 음악학자로서 우리나라 음악의 뿌리를 찾아보려는 노력의 하나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도 음악을 공부하면서 음악의 참 모습이 란 바로 이런 음악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서우석 교수와 글쓴이가 인도음악을 소개하고 인도음악연구회를 결성 하는 등 인도음악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여 이제는 인도음악 연주회를 개최하면 상당수의 청중이 모인다.
이제는 우리나라의 음악대학이나 대학원 과정에서 동양음악에 관한 교과목이 많이 늘어났고, 인도 음악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인도 음악을 소개하는 한국어 문헌으로는 글쓴이의 인도음악의 멋과 신비와 윤혜진의 인도음악이 있다.
흔히 인도를 ‘신비의 나라’ 또는 ‘불가사의한 나라’라고 한다. 인도를 처음 여행해 본 사람은, 인도의 열악한 생활환경, 상상을 초월하는 인도 서민의 가난한 모습, 사회의 무질서, 그리고 인도 사람들의 불친절·무례함·부패한 관료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인도란 신이 버린 저주받은 나라가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3개월 이상 인도에 머물게 되면, 어머니 품과 같은 편안함과 따뜻함을 느끼고 새롭게 놀라게 된다. 그리고 문명에 찌들릴 대로 찌들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또한 자신의 생활이 얼마나 덧없는 것을 위해 수많은 시간을 마음 졸이고 살아왔으며. 자신이 얼마나 많은 쓸데없는 굴레에 얽매어 있는지를 발견하게 된다. 또한 소위 현대 기계 문명 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참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인가, 그리고 인간은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일까 하는 본질적인 의문을 갖게 한다.
그래서 인도에 3년 이상 살다가 인도에서 나오게 되면, 편리함을 추구하는 현대 기계 문명 의 삶이라는 것 이 얼마나 삭막하고 인간미가 없으며 메마른 정서인지를 실감하게 된다. 그래서 이런 생활이 얼마나 괴롭고 어려운지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그리고 정신생활에 깊숙이 빠져들어 보통 사람의 눈으로 보면 이상한 사람이 되어 독특한 사람이 된다. 그리고 심지어는 인도로 다시 돌아가는 사람도 있다.
인도의 무엇이 사람을 이토록 휘어잡으며, 인도의 어떤 마력 이 사람을 인도에 미치게 하는 것일까? 이와 같은 의문에 빠지면서, 인도는 ‘신비의 나라’ 라는 말이 과연 빈말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기도 했다.
필자가 인도와 관계를 맺은 것은 음악학자로서 우리나라 음악의 뿌리를 찾아보려는 노력의 하나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도 음악을 공부하면서 음악의 참 모습이란 바로 이런 음악이어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다음에 필자 나름대로 느낀 인도 음악의 특성을 종교성·종합성·다양성의 세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써 보겠다.
인도 사람들이 이 때 부르는 모든 노래는 신을 섬기는 찬송가이다. 이 음악은 듣는 사람을 즐겁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신을 찬양하기 위한 것이고, 이차적 인 목적 이 인간을 즐겁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인도사람들은 신을 찬양하는 동안에 신의 소리를 듣는다고 한다. 그들은 바로 이 신의 소리룰 듣고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희열에 잠긴다. 그들은 매일 음악을 배우며 축제에서 신을 찬양할 때 신의 음성을 듣는 순간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도 음악계를 둘러보고 느낀 것은 놀라운 그들의 수용능력이었다. 인도에는 인도의 전통적인 씨타르·비나·따블라·반스리 등의 악기가 있지만, 서양에서 전해온 바이올린이나 기타도 어엿한 인도 악기이다. 우리나라에도 근세에 바이올린이나 기타가 소개되었지만 인도에서 외래 악기를 수용하는 태도와는 판이하다. 우리나라에 바이올린이 소개된지도 벌써 100여 년이 넘었지만, 이 악기는 여전히 서양악기로 남아 있다. 바이올린은 베토벤이나 모차르트의 음악을 연주하는데 쓸 뿐, 이 악기로 영산회상이나 산조는 연주하지 않고 있다. 기타도 널리 퍼져 있어서 젊은이들 사이에 ‘기타 못 치면 간첩’이 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이 기타도 스페인의 기타 음악이나 팝송을 연주하는데 쓸 뿐, 수제천이나 시나위·살풀이를 연주하는 데는 쓰지 않고 있다. 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예 쓸 생각을 안한다.
이와같은 인도 음악계를 살펴보고 필자는 인도는 거대한 용광로라고 생각했다. 자동차나 비 행기의 쇳조각이 거대한 용광로에 들어가 용해되듯이 , 인도 음악계에 외국의 악기가 들어오면 이 악기는 인도 악기로 다시 태어난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인도에서는 가능할까? 필자는 참으로 오랫동안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 잠정 적 인 결론은 종교적 심성에 기인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도의 힌두교는 잘 알려진 대로 범신론이고 다신교이다. 힌두의 세계에는 수많은 신이 있고, 사람들은 자유로이 이 중에서 선택해서 모신다. 하나의 신만을 모시는 경우는 없고, 여럿을 동시에 모시거나 또는 세월이 흐르면 모시는 신을 바꾸기도 한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하나의 신이 여러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파괴의 신인 시바(shiva)신은 사우미야· 우그라· 느릿타· 닥시나무르티· 하리아르다무르티 등 여러 모습으로 나타난다. 필자가 그 곳에서 한 학생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권해 보았다. 예상외로 그는 예수는 좋은 신이라고 하며 예수를 믿겠다고 했다. 필자는 반가운 마음에 성경도 주고 마침 가지고 있던 예수 사진도 주었다. 며칠 후 그 학생의 집에 가보고 필자는 깜짝 놀랐다. 그 학생은 자기가 믿는 힌두 신상 옆에 예수 사진을 나란히 걸어놓고 향불을 피워놓고 있었다. 기겁을 한 필자는 예수를 믿으려면 다른 신은 모두 버려야 된다고 하니까, 왜 그래야 하느냐 꼭 예수만 믿고 다른 신을 버려야 한다면 나는 예수를 믿을 수 없다고 했다. 필자는 인도인의 놀라운 수용 능력을 인도사람의 사고 방식과 관련하여, 힌두의 범신론적 인 사고로 설명 해 보았지만 아직도 온전한 대답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더 궁리를 계속해야겠다.
인도는 잘 알려진대로 1633년 영국이 벵갈지방을 식민지로 삼으면서 1947년 독립할 때까지 장장 300년도 넘는 영국 식민지 생활을 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300년 식민지 생활에도 유럽 음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토록 오랫동안 유럽 사람들과 접촉을 했지만 놀랍게도 기독교 인구는 전 인구의 3%에 불과하다.
처음 인도에 처음 들어온 사람은 포르투갈의 들어온 것은 바스쿠 다 가마(Vasco da Gama)로 현재 인도 케랄라(Kerala)주에 속한 도시 캘리컷(Calicut, 현재의 코지코드(Kozhikode)에 1498년 5월 20일 상륙한 것이다. 포르투갈은 구자라트(Gujarat)의 술탄에게서 다만(Daman, 점령은 1531년, 정식할양은 1539년), 살세트(Salsette), 봄베이(Bombay), 바사잉(Baçaim, 1534년), 디우(Diu, 1535년 병합)등 여러 영토를 빼앗았다. 이들 영토는 포르투갈령 인도의 북부지역이 되었다. 다만에서 차울(Chaul)까지 해안에 인접한 100km 넓이의 땅과 내륙으로 30~50km 정도가 해당 영역이었다. 지역은 성채도시 바사잉이 지배했다. 뭄바이(Mumbai)는 1661년 영국왕 찰스 2세와 결혼한 포르투갈 왕녀 카타리나(Catherine of Braganza)의 지참금의 일부로써 할양되었다.
인도 사람들은 음악을 배울 때 악보로 배우지 않는다. 악보를 쓰기는 하지만 잊지 않으려고 적어두는 역할을 할뿐이다. 선생은 학생에게 가르칠 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가르쳐 준다. 앞에 가르친 것을 완전히 소화해야 다음을 가르쳐 준다. 악보 없이 가르치다 보니 전에 가르친 것과 다르게 가르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선생이나 학생들에게 대수럽지 않은 흔히 있는 일로 받아들여 진다. 오히려 이렇게 가르치는 동안 학생들은 즉흥연주 능력을 배우게 된다. 이렇게 얼마동안 배우게 되면 스스로 음악을 짤 수 있게 된다.
연주자는 연주장에서도 연주자가 정해진 선율을 정확하게 연주하는 것 이 아니다. 연주를 시작해서 청중이 재미있게 들으면 더 길게 연장할 수도 있고, 반대로 지루해 하면 건너뛴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판소리와 아주 흡사하다. 판소리 명창은 청중의 추임새를 들으며 청중과 교감한다. 같은 심청가를 부른다 해도 청중이 노인층이 많으면 심청가 중 슬픈 계면성의 이별 장면을 강조하고, 젊은 층이 많을 때는 뺑덕어미의 <심술타령>같이 해학적인 장면을 강조한다.
인도 음악은 이와같은 즉흥연주 능력 때문에, 시대가 바뀌어 사람들의 음악적 욕구가 바뀌면, 음악도 새로운 욕구에 맞추어 변화해 나간다. 인도의 라가는 약 500여 종이 있는데, 지금도 새로운 라가가 계속 만들어지기도 하고, 인기가 없는 라가는 잊혀져 가고 있다. 그러면서도 인도 음악이라는 끈은 끊어지지 않고 면면히 이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인도음악의 특징을 종교성· 종합성· 적응성의 세 가지로 필자가 느낀대로 정리해 보았다. 필자는 인도 음악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깊이있는 연구를 하지 못했다. 그러나 인도 음악을 대하면서, 외래음악의 홍수 속에서 설자리를 잃어 가는 한국 전통음악계로서는 인도 음악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음악하면 유럽음악을 이야기하고, 한국음악은 '전통음악' 이라고 부르고 있다.
최근 우리나라는 무분별한 유럽 문화를 추종하면서 우리의 전통을 소홀히 하고 있는 문화현상을 비판하고 반성 하며 , 전통문화에 대해 새롭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러한 관심 은 음악계뿐만 아니라 문화계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는 추세이다. 이러한 관심 이 일시적 인 관심으로 끝나지 않고 진실로 민족문화 창달이라는 수준으로까지 이어져 성 공을 거두려면, ‘왜 전통예술이 대중으로부터 멀어졌는가’, ‘왜 불과 100년 만에 전통음악이 서양음악에 안방을 내주고 사랑방으로 밀려나게 되었는지’를 진지하게 살펴야 할 것이다. 그 원인을 찾는 데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겠으나, 전통음악을 성공적으로 보존하고 있고, 일반 대중들로부터 전통음악이 사랑 받고 있는 인도 음악계를 참고로 한다면 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필자가 인도 음악에 영 향을 받아 작곡한 작품으로 1996년 국립국악원 위촉으로 작곡한 <동방의 등불> 이 곡은 타골의 주제를 이용한 것이다. 인도의 타골은 우리나라를 동방의 등불이 될 것 이라고 예언하였다. 일본 식민지 시절 암울한 시절이었다. 이와 같은 예언은 20세 기에 실현되고 있는 중이다. 그는 우리나라에 와보지도 않은 그가 이런 시를 썼다니 놀라운 일이다. 한국에서는 타골을 단순히 노벨상을 받은 유명 한 시인 이라고만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작곡을 한 음악가였으며, 안무가였고 또한 화가였다. 인도 국가는 타골 자신이 작시 작곡한 음악이다. 타골이 작곡한 노래는 지금도 인도 사람들의 애창곡으로 부르고 있다. 그의 음악을 전문으로 연구하고 연주하는 사람도 많이 있다.
이 <동방의 등불>은 타골이 작곡한 노래를 주제로 만든 음악이다. 선율은 타골 주제이지만 장단은 작곡자 자신이 새롭게 만들었다. 마치 장구가 인도에서 시작한 악기이지만, 지금은 누구나 장구를 한국 고유의 악기로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외래 음악을 향악화한 놀라운 조상의 지혜 덕택이다.
오늘날의 우리도 외래음악을 외래음악 그대로만 받아들일 것 이 아니라, 외래 음악을 소재로 발전시켜 한국음악을 살찌워야 한다. 말하자면, 이 음악은 타골 음악를 향악화한 것 이다.
<동방의 등불 악보>
<타골 작곡 악보>
7)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 (1991년)
필자는 1991년 4월 17일부터 6월 16일 까지 유네스코에서 주관하는 비단길 탐사에 참여한 바 있다. 유네스코의 비단길 탐사는 중국의 사막의 길, 베니스에서 오사카까지의 바다의 길, 그리고 소련 남부 중앙아시아의 초원의 길 등 세 가지 길로 나뉘어 실시되었다. 탐사대는 세계 여러나라의 학자와 취재 기자들로 구성 되어 비단길을 직 접 탐사하여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교류하였던 현장을 연구함과 동시에, 동서양의 사람들이 이념을 초월한 대화를 통하여 세계평화에 이바지하기 위해 계획된 것이다. 왜냐하면 옛날의 비단길은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이기도 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던 교통로로서 곧 이 길은 대화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필자가 참여했던 초원의 길 비단길 탐사는 투르크멘 공화국의 아시하바드에서 카자흐 공화국의 알마아타까지 약 12,000Km의 길을 59일간 실시되었다. 이 탐사는 42개국에서 100여 명 의 학자와 60여 명의 취재 기자들이 참여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서울대 고고인류학과의 임 효재 교수, 서울대 박물관의 이 인숙 학예관 그리고 필자 등 세 사람이 학술조사대원으로 참가하고, MBC 문화방송의 이상룡 기자 외 두 사람이 취재팀으로 참가하였다. 이번에 탐사했던 곳은 워낙 벽지였기 때문에 외국인의 방문이 거의 없었던 곳이어서 어느 곳은 우리들이 그곳을 방문한 최초의 외국인이었다는 곳도 여러 곳 있었다. 특히 이란· 아프가니스탄· 중국 등의 국경지방은 군사적 인 시설이 많은 곳이어서 그동안 개방이 안되었던 곳인데 고르바초프의 개방정 책 이후 외국인의 출입 이 허용된 곳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우리를 환영하기 위해 나온 사람은 물론 동원된 사람도 있겠지만, 우리 일행에서 많은 호기심을 보이고, 손님 4대 접에 최선을 다하는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특히 소련 당국의 배려는 극진해서 우리 일행이 지나가는 곳은 길을 새로 포장하고, 어느 곳은 우리들을 특별한 유적지로 안내하기 위해서 길을 새로 낸 곳도 있을 만큼 열성을 보였다.
필자의 눈에 비친 중앙아시아 사람들은 외모부터 우리와 닮아서 매우 친근함을 느꼈고, 그들은 음악과 춤을 무척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느꼈다. 우리 유네스코탐사반 일행은 가는 곳마다 춤과 음악으로 환영을 받고 음악으로 전송을 받았다. 심지어는 식 당에서까지도 음악이 없으면 식사를 못하는 것으로 느낄 만큼 음악이 풍성 했다. 우리 일행 이 도착하면 북과 끄르나이를 연주하며 동네 사람들이 춤을 추며 환영 한다. 그리고 전통의상으로 곱게 차려입은 젊은 여인이 커다란 빵을 겹겹 이 쌓아놓은 위에 소금을 얹어 들고 기다린다. 그러면 손님 이 다가가 빵을 조금 뜯어서 소금을 찍어 먹으면 집 안으로 안내된다. 이들의 환영음악을 들으면서 우리나라의 자진모리나 동살풀이 장단과 비슷한 장단이 있어 깜짝 놀랐다. 일본이나 중국에는 없고 우리나라와 인도에만 있다고 생각했던 장단이란 개념 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우리나라 장단과의 유사성 은 매우 놀랄만한 것 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지의 전통 음악인들은 러시아어를 거의 모르고, 러시아어를 아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영어를 통한 이중통역을 해야 했기 때문에 조사를 위한 대화는 거의 불가능했다. 설상가상으로 일정 이 일요일도 쉬지 않을 만큼 빡빡했고 개인 활동이 어려웠기 때문에, 충분히 문헌도 구할 수 없었다. 틈만 나면 서점에 가보곤 했지만 서점에는 러시아어나 현재의 지방어로 된 책뿐이고 영어 책은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실 이 글은 중요한 문헌 연구가 결여되어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가 탐사한 지역은 투르크멘 공화국, 우즈벡 공화국, 타자크 공화국, 카자흐 공화국의 5개 공화국이다. 이 지역은 옛날부터 중국의 신강성에서 천산산맥을 넘어 인도에서 파미르 고원을 넘는 길과 연결되는 비단길이었다. 중국의 서안에서 신강성까지의 길은 사막이 많기 때문에 사막의 길이라고 하는데 비하여 이곳은 초원이 많기 때문에 초원의 길(Steppe Route) 이라고 부르는 곳 이다.
옛날부터 유목민들이 활동하던 무대는 매우 넓은 지역이기 때문에 자연환경 이 동일하지 않고 다양해서 대체로 4개의 환경으로 나눈다. 가장 북쪽에는 흔히 툰트라(Tundra)라 고 부르는 넓 고 동결된 늪지대가 있고, 남쪽으로는 타이가(Taiga)라고 부르는 삼림 지대가 위치하고 있다. 이 삼림 지대는 두개의 지대로 구분되어 , 북쪽지역 에는 주로 침 엽수가 자라고 남쪽에는 주로 낙엽수가 성장한다. 툰드라와 타이가 지역의 중간에 초원지대(Steppe)가 있다. 이 지역은 거대한 대초원의 연속으로서 헝가리의 평야로 부터 중국의 만리장성 까지 연속되는 지역으로 오직 풀종류만 자라는 지역이다. 초원지대는 남쪽으로 사막지대로 연결되는데 이 지역에서는 오아시스가 있는 지역에서만 농사를 지을 수 있다.
중앙아시아 사람들의 대부분이 우리나라 사람과 너무 흡사해서 마치 가까운 이웃을 대하는 기분이 들고, 그들이 쓰는 언어가 한국말과 같은 계통의 알타이어족에 속하는 점 과 그들이 우리나라 사람만큼이나 음악과 춤을 좋아하는 등 너무나 우리와 비슷한 점이 많다. 또한 중앙아시아사람들의 음악에서 우리나라의 자진모리와 같은 장단단장형 의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점과 어쩌면 우리나라의 고취악 생성에 깊은 영향을 준듯한 꾸르나이와 다프의 합주 등은 앞으로 연구하여야 할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이 방면의 연구는 한국음악의 뿌리를 밝히고 우리나라 음악의 생성 원리를 찾아내어 우리나라 음악의 특징을 뚜렷이 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제는 그 동안 갈 수 없었던 소련이나 중국이 문을 열었기 때문에, 그만큼 우리의 시야가 넓어진 것이다. 이에 발을 맞추어 우리도 더욱 개방적인 자세로 다른 나라의 음악을 살펴서 그 속에 배울 점이 있다면 서슴지 말고 배우고, 다른 나라 사람들이 실 수 한 것이 있다면 이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우리는 그와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말아야 할 것 이다.
필자가 중앙아시아 비단길 탐사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 비단길 탐사 한국측 조정 위원 고병 익 박사님 ,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관계자 여러분, 재정적 도움을 준 문화방송과, 특히 파카스탄 다니 교수의 배려를 잊을 수 없다.
필자의 관심사 중 가장 애착을 가지고 있는 분야는 아시아음악이다. 나는 아시아 음악 연구를 하면서 우선 영어권 연구에 덜 의지하려 마음을 먹었다. 왜냐하면 유럽 학자의 연구는 유럽인의 안경으로 아시아 음악을 본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무슨 신기한 원시음악 다루듯이 아시아 음악을 호기심으로 들여다 본 것 이 많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터키 음악에는 우리나라의 장단에 해당하는 우술(Usul)이 아주 중요하다. 우술 만을 다룬 600여 쪽의 단행본이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서양학자의 터키 음악 소개를 보면 우술은 간단히 서술하고 있다. 음악사전의 최고봉이라고 하는 그로브음악사전에도 우술에 관한 설명은 단 한쪽에 불과하다. 서양음악에서 장단의 중요성은 매우 적다. 그래서 서양인이 장단에 관심을 갖기란 쉽지 않다. 그로브사전의 터키 음악은 서양인의 안목, 취향, 그리고 관심으로 터키 음악을 서술한 것이다.
나는 아시아 전역의 현장 연구를 하기로 마음먹고 각국의 음악사 관계 학자도 만나고 음악 관계 문헌을 수집하며 준비해 왔다. 그래서 북한과 이락을 제외한 아시아 모든 나라를 적어도 한 달 이상씩 현장 연구를 마쳤다. 국제학회에 나가 보면, 나만큼 현장 연구를 한 사람은 많지 않다. 그리고 영어· 중국어· 일본어를 함께 구사하는 사람도 많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이만하면 나도 ‘아시아 음악 학계에 기여할 바가 있겠구나’하고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해서 나온 책이 아시아음악연구이다.
8. 카이로에서 페르세폴리스까지(1997년)
그동안 필자의 아시아음악 연구에는 큰 구멍이 있었다. 중앙아시아 문화를 살펴보니, 구석구석에 아랍 문화가 스며있었다. 이 지역은 워낙 지역적으로 멀고 생경한 지역이라 쉽사리 떠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1997년 중앙대학교의 연구교수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1월부터 6개월간 이집트의 카이로부터 페르세폴리스까지 여 행하면서 아랍 음악을 살펴보았다.
카이로의 국립도서관에서 놀란 일은 서양음악의 뿌리는 아랍음악이라는 점이었다. 내가 읽은 모든 ‘서양음악사’는 서양음악에 대한 아랍음악의 영 향을 다루지 않는다. 서양 음악사학자들이 이것을 몰라서가 아니다. 연구 서적도 엄청나게 많았다. 왜 서양음악사학자들은 이 부분에 귀를 막고 있을까
서양 사람들의 합리주의와 놀라운 실증주의는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이것이 바로 서양사람들의 ‘강자의 논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한국에서 발행한 모든 ‘서양음악사’ 관계의 책은 모두 유럽인이 쓴 음악사를 그대로 본받고 있다. 번역은 물론이고 왜 한국인이 새롭게 쓴 음악사마저 서 양사람이 쓴 음악사를 따라야 하는가? 하루 빨리 누군가 서양음악사를 다시 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처럼 왜곡된 서양음악사는 서양 학자가 바로 잡아야 하는데, 그들이 하지 않으면 우리라도 하여야 할 것 이 아닌가? 사실 이 일은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연구가 많이 진행되어 있기 때문이다.
테헤란에서 이스파한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의 일이다. 한 남자가 일어나 한마디 한다. "승객 여러분! 한국에서 온 학자가 도둑을 만나 점심을 굶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이것은 정말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우리가 그냥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터키에서 밤 버스를 타고 테헤란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고 보니 새벽5시 였다. 아직은 날이 밝지 않아 컴컴하다. 이란 사람이 정직하고 친절하다는 이야기를 수없이 들어왔기에 내가 방심을 한 모양이다. 노천카페에서 차 한잔 마시는 동안에 짐 두 개 중 하나를 누군가가 집어가 버렸다.
중요한 연구 자료를 수집한 것이 순식간에 날아가 버린 것이다. 더욱 암담한 일은 여행자 수표를 잊어버린 것이다. 이란은 미국과 국교 관계가 없어서 씨티은행 여행자 수표를 재발급 받을 도리가 없다. 이란에서 한 달간 지내면서 페르시아 음악을 조사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가지고 있는 현금이라고는 미화 800불 정도. 할 수 없이 절약 작전을 할 수밖에 없다.
테헤란에서 이스파한으로 가는 도중 끼니때가 되어 모두들 식사하러 버스에서 내렸다. 돈이 부족하기는 하지만 밥을 먹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속이 편치 않아서 버스 안에서 쉬고 있었다. 한 남자가 버스에 오르더니 왜 식사를 않느냐고 물었다. 나도 모르게 장난 끼가 발동되어 여차여차하여 돈이 없어 식사를 않는다고 하였다. 이 남자는 우선 밥을 먹자고 다짜고짜로 나를 끌어다가 억지로 밥을 먹게 하였다. 그리고 버스가 움직이자 내 이야기를 하면서 나를 위하여 모금 운동을 하는 것이었다. 외국인이 이란에 와서 이런 일을 겪었는데 우리가 그냥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 이었다. 밥은 얻어먹었지만 더 이상 볼 수가 없었다. 모금 운동을 중단시키는데 무진 고생을 하였다. 이사람은 간곡한 내 청에 못 이겨 모금 운동을 중단하면서 친구와 함께 나를 위한 후원회(?)를 조직하고 “나머지 내 연구 일정을 책임지겠노라”고 제의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민속 음악인을 쉽게 만나는 길도 열렸고, 영어를 잘 하는 사람을 만나서 순조로운 일정을 보내게 되었다.
전화위복이라는 말이 바로 이런 일을 말하는가 싶다. 이러한 현지 조사가 너무 힘들어 ‘쓸데없이 고생만 하는구나’하고 생각하였는데, 이 고생은 중국 신강에서 주칭 빠오(周菁裸) 교수를 만나 완전히 보상을 받았다. 아랍 지역에서 구해 온 문헌들이 있었기에 주칭빠오 교수의 도움으로 위구르 마캄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답사의 성과물로 나온 것이 ‘위구르 마캄에 대한 고찰’인데, 이 글은 인도 음악이 중국 대곡에 이르기까지의 연결 고리를 논의를 한 것이다.
2000년 11월 9일에는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아시아 음악과 한국음악>이라는 강의 음악회(Iecture concert)를 개최한 바 있다. 당일 약 500명 손님 중에 300명이 매표 손님이었다. 신기한 것은 젊은이들이 몰려온 것이다. 사실 국악계에서 연주회는 대부분 초대 손님으로 자리를 채우기 때문에 이와같은 매표 실적은 보기 드문 일에 속한다.
필자는 <아시아음악학회>(www.asianmusicology.net)라는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다. 이 모임의 회원이 표를 사가지고 온 것이다. 이 젊은 손님 중에는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사람도 여럿 있었다. 그리고 더욱 신기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들은 맨 앞자리에 자리를 잡더니 열심히 적으면서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음악회가 끝나자 인터넷 홈페이지에 여러 가지 의견을 올리는 것 이었다. 이후에 나는 ‘머리 색깔은 패션이다. 품행과 관계없다’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즉 머리색과 품행의 무 관계성을 알게 된 것이다. 이 음악회를 마치며 이제 ‘아시아음악’ 이라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젊은이들이 많이 있다는 점과 이제는 ‘아시아 음악을 논해도 될 만한 분위기는 마련되었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10. 아시아음악학회(Council for Asian Musicology)의 창립과 영문학술지 Asian Musicology 발행(2002)
1999년 말레이시아 코타끼나발루에서 아시아역사학대회가 있었다. 이 때 모인 음악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Council for Asian Musicology를 결성하고 학회 저널로 영문 학술지 Asian Musicology 발간을 결의하였다. 학회를 운영하고 학술지 출간은 경비가 들게 마련이다. 학회에서는 나를 회장으로 지명하면서 학술지 출간 경비를 담당하라는 짐을 지워 주었다. 나는 부담이 되더라도 내 주머니 돈으로 저널을 발간하기로 작정하였다. 가난한 아시아 지역 학자들의 주머니 돈을 끌어내기가 만만치 않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고맙게도 한국문화예술진흥원에서 5집부터 경비를 지원 받았다. 내가 경비를 충당하려고 생각하였는데 지원을 받고 보니 공돈이 생긴 것 같아 고맙기 그지없다.
학술지를 발간하고 전 세계의 학자와 도서관에 무료로 기증을 하였다. 이렇게 몇 년을 지나고 보니 여러 나라의 도서관에서 책값을 보내주고 개인 구독을 원하는 학자도 많아졌다. 그런데 아쉽게도 국내 반응은 아직 인색하다. 오직 다섯 사람이 돈을 내고 책을 받아보고 있다. 그래도 나는 원망을 하지 않는다. 원래 내가 경비를 감당하려고 시작한 일이기 때문이다. 때가 되면 이해할 날이 있을 것이다.
나는 영문학술지 Asian Musicology를 발간하면서 부수적인 효과를 보고 있다. 여러 나라에 우리 학회와 내 이름이 알려지면서 자기 나라 국제 행사에 나를 초청해 주고, 무슨 국제적인 심사를 할 계기가 있으면 나를 위원으로 위촉을 하는 것이었다. 이런 기회가 되면 나는 저널을 한 아름 안고 가서 도서관에 기증도 하고 개인에게 나누어준다. 이렇게 되니 예전보다는 학회 홍보도 잘 되고 보다 논문 수집도 용이하게 되었다.
2010년 11월 14일 케냐 나이로비에서 유네스코 파리 본부에서 주관하는 세계무형문화유산 심사가 있었다. 유네스코에서 필자에게 심사위원 수락을 해달라는 전자우편이 왔다. 처음에는 으레 보이는 스팸 메일로 보고 지웠는데, 다시 메일을 보내면서 전화를 걸어왔다. 나중에 몇 번 회의를 거듭하는 동안 조금 분위기가 편하여 담당자에게 문의하였다.
“세계 수많은 학자 중에 어떻게 나를 심사 위원으로 지명하였나요?”
“우리는 지명전에 최소한 세 나라의 학자에게 위원 추천을 부탁합니다. 이때에 전 박사가 여러 사람의 추천을 받았어요.”
이 이야기를 듣고 다른 나라의 학자들이 어떻게 내 이름을 알았을까 싶었다. 내 추측으로는 내가 무료로 10여 년 동안 꾸준히 세계연구기관과 저명 학자에게 보냈던 것이 효과를 발휘한 것이 아닌가 싶다.
간혹 외국에 나가 도서관에 가서 한국음악 문헌을 찾아보면 아주 오래된 영어 문헌만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외국에서 나오는 한국 음악 관계 글을 보면 옛 자료에 의거한 글이 자주 보여 안타까웠다. 국악계에는 대학 국악과만도 30개를 헤아리고 있다. 이곳에 재직하고 있는 교수만도 150명 이 넘는다. 그리고 해마다 나오는 논문이 대단히 많다. 그러나 대부분이 한글 논문이어서 외국인의 접근이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나는 우리 나라 국악 연구의 성과가 외국에 전해지기 위해서는 영어 저널이 꼭 있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만든 것 이 아시아음악학회이고 영문 저널 Asian Musicology이 다.
이 저널을 발행하고 보니 국내보다는 국외에서 더 반응이 좋았다. 사실 이런 결과를 예견하였지만 외국 학자들이 입회비를 내고 입회를 해주었다. 이에 비하여 국내 학자들의 참여는 아주 미진한 형편이다. 아시아음악은 유럽 학자보다는 아시아 학자가 휠씬 유리한 형 편이다. 다면 영어로 국제간에 소통을 하다 보니, 아시아 학자들이 소외되는 형편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앞으로 아시아음악 학자들은 서로 의견을 교환하면서 공동 연구를 하여야 한다. 아시아음악학회는 바로 이련 역할을 하기 위한 것이다.
<사진> 2008. 6. 23. - 27. 하노이에서 열린 “한류와 아시아음악” 학술회의
그간의 연구 생활에서 가장 고마운 분은 나의 현장 조사를 도와준 외국의 여러 음악가들이다. 이들은 나에게 귀중한 자료를 서슴없이 내 주었고 귀중한 정보를 제공하였다. 나는 늘 빚진 마음으로 살고 있다. 그래서 외국 학자가 오면 그 보상을 하려고 그들을 도우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렇게 분주한 생활을 하다가 2010년 8월 말로 중앙대학교를 정년퇴직하게 되었다. 1983년 부임을 하였으니 27년을 근무한 셈이다. 이곳 중앙대학교에서 재직 중 책을 20권을 펴냈고 80여곡을 작품을 썼다. 그리고 아이들은 자라 모두들 자기 짝을 찾아 갔다. 생각해 보면 사연 많았던 27년간이다.
다른 사람이 본 전인평
이성천이 본 전인평
서울대학교의 이성천 교수는 내가 참으로 좋아한다. 그 분은 진심으로 후배를 사랑하는 분이기 때문이다. 내가 새로 쓴 책을 드리면, “아니, 전선생은 잠도 안자나? 어느 틈에 또 책을 썼어?” 하신다. 내가 책을 출판한 후, 주위 사람에게 주면 대개 의례적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 어떤 사람은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그냥 받아드는 사람도 있다. 내가 놀란 것은 어떤 사람은 책을 내 면전에서 훑어보다가 ‘쓸데없는 짓을 하였군!’ 하는 바람에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다음은 이성천이 음악평론에 필자에 관하여 쓴 글의 일부이다.
—기계문명이 앗아간 ‘새야새야’ 노래—전인평의 <파랑새 환상곡 >
전인평의 첫 작품은 <산거>로서 피아노반주로 된 가곡이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는 해에 첫 작품의 표제인 <산거>를 제목으로 하여 그동안 써 두었던 가곡을 모아 작품집을 출간했다. 이 작품집은 그가 손수 프린트를 써서 만든 수제품이기도 해서 그의 음악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엿보인다.
전인평은 여행을 즐겨한다. 새로운 경치를 즐기는 여행이 아니라 음악을 찾는 여행이다. 방학이 되면 배낭을 둘러메고 음악 여행을 떠난다. 동남아는 물론 중앙아시아 여러 지방까지 음악을 찾아다닌다. 그야말로 아시아필드웍이다. 그러다가 인도의 뉴델리 간다르바 음악학교에서 인도음악을 연구하는 전문적 기회도 갖는다. 그가 아시아에서 음악을 찾는 이유는, 그의 음악세계가 아시아적 이라는 데 있다. 서양에 대한 편향주의가 그로 하여금 아시아로 눈을 돌리 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가 체험하고 수집한 아시아음악 이 상당한 수준에 이른 것이며 <노피곰>에 서와 같이 최근 그의 작품에는 아시아적 요소가 많이 배합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아시아적 작품세계의 확장은 체험과 지식이 요구되고 이를 얻기 위해서는 여행이 필수적 이다. 그래서 그를 부지런하다고 말하는 것이며. 공사를 불구하고 그에게 맡겨진 일은 틀림없이 지켜주는 성품을 가졌기에 신실하다고 말한다.
그의 사제관계도 특별하다. 배우고 가르츠는 직업적인 관계가 아니라 자식을 대하는 듯한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이다. 아는 것을 모두 토해내고 음 하나에 관련된 상식으로부터 정신세계에 이르기까지 상식과 지식을 꼼꼼히 가르친다. 사랑이 없이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자상함이 넘쳐흐른다. 힘들여 얻은 자료도 제자를 위해서는 아낌없이 제공한다. 인간적으로 바르고 작곡가로서 순수하게 키우려는 의도가 강열하다. 교육자상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싶다.
전인평은 작곡가로서 70여 편의 곡을 발표했으며, 교수로서 20여 편의 논문 외에 국악작곡입문(1988), 동양음악(1989)과 국악감상(1993)의 저서도 출판하였다. 가곡집 산거, 거문고 독주곡집 정읍후사(1988)와 여러 권의 작품집 출간도 그의 부지런한 일손의 하나이다. 이러한 열정은 아마도 교사시절, 아니 그 이전부터 그가 품어왔던 음악에 대한 애정 이 시대의 변천과 사고의 전환에도 아랑곳없이 계속 용출하는 힘의 활화산 같다고나 할까. 음악찾기 여행과 곡쓰기, 책쓰기, 논문쓰기의 일과 작업이 청년기이 열망을 하나씩 이루어 나가는 열정의 힘 때문인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는 말이다.
전인평 의 작품은 순수음악 경향이 뚜렷하다. 순수음악을 지향한다는 것은 연극, 무용, 영 화 등의 부수음악에서 얻는 창작적 이익보다 예술적 가치를 추구하는 태도이므로 그는 전통음악기법에 충실하되 필요하다면 부분적으로 서구적 또는 아시아적 소리와 기법을 사용한다. 그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정감 중의 하나는 <노피곰>, <외오곰>에서 드러나듯이 애향적 성향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멀리 백제의 다소곳한 미감에 깊은 애착을 갖고 있는 듯하다. <파랑새 환상곡>은 <국악 관현악을 위한 파랑새 환상곡>의 원 표제를 줄여서 쓴 제목이다. 이 곡을 쓰게 된 동기에 대해서 작곡자의 말을 옮겨보자.
“기계문명에 흡수되기 이 전에는 우리나라의 어머니들도 모두 자장가를 부르며 아이를 재웠다. 자장가는 바로 곁에 어머니가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어린이가 편안하게 안심하고 잘 수 있는 상징 적 인 보호망이다. 그러나 어느 틈엔지 우리나라의 어머니들이 자장가를 다 잊어 버렸고 어린 이들은 라디오 음악으로 잠들게 되었다. <새야새야 파랑새>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지금은 잊혀진 자장가의 하나로서 근대화 과정에서 기계문명이 앗아간 우리를 포근히 감싸주던 보호망이라고 하겠다.”
어머니가 불렀던 옛 자장가 <새야새야>가 이젠 어머니의 품을 떠났다는 애석함을 관현악으로 달래 보고자 한 작곡자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김미림이 본 전인평
다음은 김미림 이 1996년 중앙일보에 쓴 글이다.
음악평론가 윤중강씨는 전인평씨의 작품을 달에 비유해 “저녁·밤·감춰짐, 그리고 한밤중에 갑사 비단옷을 차려 입고 머리를 곱게 빗고서 뒤뜰로 달구경 나온 이름 모를 여인네의 드러나지 않은 한(1艮)의 정서가 여과돼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창작세계는 한마디로 외래음악을 받아들여 향악화(鄕樂化)로 가는 구도자의 과정이다.
향악화란 예부터 중국을 비롯한 서역 지방의 음악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외래적 요소 가 우리 음악과 자연스럽게 융화되는 과정을 말한다. 그는 이러한 시대정신을 고집하면서 시대에 맞는 음악을 만들어왔다. 전통음악이 일반인에게 소외된 지금 상황이 향악화에 대한 안일한 태도의 결과로 보고 생활 가까이 남을 수 있는 ‘귀의 맛’에 맞는 음악을 만들기 위해 노력 해오고 있는 것 이다.
그가 인도 음악기행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작품을 발표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최근 제 43회 국립국악원 주최 한국음악창작발표회에서 초연한 <동방의 등불>도 인도의 타골이 작곡한 노래를 주제로 3개 의 가야금과 대금의 중주곡으로 작곡한 것이다. 1988년 발표한 <홍난파 주제에 의 한 변주곡>은 홍난파(洪蘭坡)의 가곡 <금강에 살어리랏다>가 전통적 인 계면조와 유사한 선법으로 되있음에 착안, 이를 산조 리듬에 얹어 향악화시켰다. 이는 고려 말에 들어온 송나라의 사악(詞樂) <보허자>, <낙양춘>이 조선조를 거치면서 본래의 음계가 재래음악과 다를 바 없는 음계로 변화했던 사실에 주목한 결과다. 전인평씨는 “인도의 경우 전통적인 ‘라가’가 지금도 인도인들에게 애호되는 것은 변주와 즉흥연주라는 방식 이 음악을 화석화(化石)시 키지 않고 바꾸어왔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팀파니와 마림바 등 서양악기를 국악관현악에 사용하고 몽골· 인도의 음악을 주제로 삼아 변주하기도 한다. 또 서양의 음계를 전통적 인 것과 관련시키는 등, 가능한 한 모든 향악화의 방법을 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12. 중앙대 정년 퇴직(2010)
지금까지 나의 인생에서 중요한 계기를 중심으로 그 동안의 연구 상황을 회고해 보았다. 이제 다시 생각해 보니 나의 음악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계기가 몇 번 있었다. 한번은 초등 학교 총각 선생님 시절에 들었던 노래, 꼬마들이 내 노래를 부르며 내닫는 소리를 들를 때의 희열감이다.
또 한번은 인도에서 들었던 밤샘음악회, 인도 사람을 그토록 강렬하게 휘어잡고 있는 인도음악의 힘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이후로 나는 완전히 인도음악에 빠지고 말았다. 또한 인도음악의 엄청난 힘 이 아시아 여러 나라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보면, 우리나라 장구는 인도에서 비롯한 것이고, 굿거리 중모리 휘모리같은 장단도 인도 음악의 영향이다.
1985년 필자가 인도음악을 처음 접하였을 때, 한국음악의 만중삭 형식이 인도음악에서 나타나서 무척 당혹스러웠다. 왜냐하면 만중삭 형식은 한국음악의 특징 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이후에 이 만중삭 형식은 인도 한국뿐만 아니라 인도네시아·태국·캄보디아에도 있음을 알았다.
중국에는 왜 만중삭 형식이 왜 없을까 하는 의문을 풀기 위하여 중국 대륙을 답사하여 중국음악의 만중삭 형식이 만중삭(慢中數) 형식으로 존재함을 밝히게 되었다. 이러한 비교적 안목이 바탕이 세종대왕이 작곡한 <봉래의>라는 궁중 춤곡의 형식을 알게 되었다. 세종대왕은 이 곡을 작곡하면서 성악 선율·기악 선율·장구장단·박판·노랫말을 자세히 적으면서도 이 곡의 속도를 적지 않았다. 당시로서는 음악의 속도는 적지 않아도 잘 알 수 있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이 음악의 속도를 잊고 만 것이다. 이와 같이 잃어버린 600년 전 세종대왕 당시의 음악 형식과 속도를 인도음악· 중국음악· 인도네시아 음악· 태국음악을 비교하면서 알게 된 것이다.
또한 “중국음악의 세틀 형식”이라는 논문을 쓰면서 중국음악의 역사에 눈을 뜨게 되었고, 중국음악의 만중삭 형식은 중국의 대곡 형식과 관련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한편 이 대곡 형식은 인도의 2세 기 연극문헌 나티야 사스트라에 나오는 딸라(tala)와 라야(laya) 이론과 관련있음도 눈에 보였다. 이처럼 필자는 아시아 음악 연구를 통하여 한국음악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기회 있을 때마다 말하고 있다.
나는 지금 어떤 때는 작곡도 하고, 어떤 때는 글도 쓴다. 어떤 사람은 나를 작곡가로 알고 있고, 어떤 사람은 아시아음악학자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두 가지 일을 겸하게 된 것은, 바로 인도음악을 접한 이후부터 이다.
2000년에는 8년 동안이나 골몰해 오던 새로운 한국음악사를 현대음악출판사에서 간행 하였다. 이 책을 마치고 나니 주위에서 한국음악과 외래 음악과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다룬 단행본을 내라고 격려해 주었다. 그래서 궁리한 것이 밖에서 본 한국음악사라는 책 이다. 그런데 이 책을 준비하다가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게 되어 집필한 책이 동북아시아음악사이다.
동북아시아 음악사 집필(2012)
필자가 인도음악에서 시작한 아시아음악연구는 아시아음악사 집필을 위하여 골몰하고 있다. 사실 하루 빨리 누군가 열심히 공부하여 아시아음악사를 나보다 먼저 쓰기를 기다리고 있다. 서양음악사 개설서는 수 없이 많은데 아시아음악사는 없다. 일본에서 츠게겐이치(拓植元一) 외 6명 이 쓴 아시아음악사라는 책이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엄밀히 말하면 <아시아 각국 음악사>이 다. 아시아 여러 나라의 음악을 여러 사람이 나누어 쓰고 한 권으로 묶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아시아음악을 종횡으로 엮은 진정한 <아시아음악사>가 나와야 한다.
이 작업을 하다가 너무 버거운 일을 시작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징검다리 삼아 쓴 책이 바로 동북아시아음악사(2012)이다. 이 책은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 음악을 공시적 통시적으로 섭렵한 책이다. 이 책을 쓰면서 문득 인도에서 네팔로 밤 버스를 타고 가던 일이 떠 올랐다. 히말라야는 신비의 산, 장엄한 산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옛 선인들은 설산(雪山)이라고도 불렀다. 인도에서 연구를 진행하던 필자는 머리를 식힐 겸 네팔을 향하고 있었다. 까트만두로 향하는 새벽 버스에서 나는 히말라야를 비몽사몽간에 바라보게 되었다. 새벽이 가까워지면서 높은 빙벽의 히말라야 산은 높은 쪽부터 붉은 색이 돌기 시작하더니 점점 색이 진해지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장엄하다는 것이로구나’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나는 인도 현장 연구를 하면서 인도음악은 장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깊은 동굴에서 나오는 신의 소리와 같은 두르빠드의 알랍도 장엄하거니와 인도음악은 티벳, 중국, 한국, 인도로 불교와 함께 전해지고, 남으로는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인도음악은 베다음악의 전통에 아랍음악과 중앙아시아 음악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오늘의 심오한 인도음악을 이루었다.
나는 아시아음악 연구를 30년간 진행하면서 무모하게도 아시아음악사를 쓰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를 위해서 아랍음악의 중요성을 깨닫고 테헤란, 암만, 이스탄불, 카이로 등지의 학자를 찾아다니며 조언을 구하고 자료를 수집하였다. 아랍음악이 꽃을 피웠던 무스림 스페인을 연구하기 위하여 남부 스페인 코르도바도 방문하였다. 이곳에 가서는 관광지 탐방은 뒤로 한 채 학자들을 만나고 대학 도서관과 고서점을 뒤지는 것이 내 일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중앙대 정년이 몇 년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는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너무 큰일에 매달리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정년 전에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잡은 테마가 동북아시아음악사 저술이다. 이미 2000년에 새로운 한국음악사를 저술한 바가 있었기에 여기에 중국, 일본 역사를 아우르는 책을 써보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 동북아시아음악사는 지난 40년 내 연구의 중간보고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다음은 동북아시아 음악사 머리말이다.
21세기는 우리 역사에서 아직 인간이 경험해 보지 못한 미지의 세기이다. 이 시기는 정보화, 도시화, 세계화, 지식산업화 등이 삶의 여러 부분을 지배하고, 국경과 영토 개념이 약화되어 세계인 모두가 하나가 되어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구촌 방방곡곡에서 생활하는 인류 모두에게는 삶의 방식, 문화의 발전 속도, 문화사적인 방향, 교육의 방법 등이 오늘과는 크게 다르게 전개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21세기를 철저히 대비하여야 한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주위 환경을 배워나간다. 우선 우리 집을, 이웃을, 그리고 이웃 마을을, 이처럼 확장하여 우리나라, 이웃나라, 세계로 확장하게 된다. 이것을 음악 형편에 대입해 보면, 먼저 한국음악을, 이웃나라 음악인 중국음악과 일본음악을, 아시아 음악을, 그리고 세계음악을 배워 가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이다. 어려서부터 서양음악을 배우고, 우리나라 음악을 배우지만, 이웃 나라 음악인 중국음악과 일본음악에는 아예 관심이 없다. 서점에 가서 음악사 관계 서적을 살펴보면, 서양음악사와 한국음악사 관계 개론서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아시아 음악 또는 주변국 음악사 서적은 극히 드물다. 더구나 주변국과 우리나라와의 영향 관계에 대한 연구 서적은 아직 출판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필자는 동북아시아음악사 연구를 시작하였다. 이 연구의 첫 관문은 시대 구분이었다. 지금까지 중국, 한국, 일본 학자들은 각 나라에서 자국의 자료에 의지하여 각각 다른 입장에서 음악사 시대 구분을 하고 연구를 해 왔다. 기존의 연구는 각 나라의 음악은 소상히 알 수 있지만 상호 관계를 읽어낼 수 없는 맹점을 지니고 있다. 문화 현상이란 독자적인 발전도 있지만 상호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필자가 이와 같은 작업에 자극을 받은 것은 다른 분야에서는 이와 같은 작업이 많은 성과를 내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음악계도 누군가가 이러한 연구를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에 본인의 부족함을 무릅쓰고 연구를 시작하였다.
기존의 연구나 도서는 한국, 일본, 중국이 각각 자국의 음악사를 연구하였고 각 나라 별로 음악사를 서술하였다. 기존 출판 음악사 시대 구분을 살펴보면, 대부분의 연구가 정치적 변천이나 왕조사의 변천에 기준을 두고 시대를 구분하였다.
이러한 왕조사 중심의 시대 구분은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의 음악사의 비교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 각 나라의 형편을 정치사 중심으로 서술하였기 때문에 상호 영향 관계나 음악사 흐름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 정치권력의 변천은 중국과 일본의 경우 한국에 비하여 정치적 변동이 많아 한국에 비하여 복잡하다. 그래서 3국의 음악사적 흐름을 한 코에 들어 올리려면 새로운 시대구분이 필요하다.
동북아시아음악사 집필의 첫 단계 작업으로 ‘중국음악사 시대 구분 시론’을 발표하였고, 두번째 작업으로 ‘한일본음악사 시대 구분 시론’을 논의하였다.
필자가 동북아시아음악사를 써보려고 마음먹은 것은 10여 년 전이다. 기회가 닿는 대로 자료를 모으고 소논문을 발표하던 중 큰 암초에 부딪히고 말았다. 본인의 저술 계획은 왕조사, 정치사로 구분하지 않은 음악 양식에 의한 시대를 구분하려는 것이었다. 음악 양식의 변천은 음악 수용층의 변천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래서 한국, 중국, 일본 음악사를 수용층 변화를 중심으로 재구성하려 한 것이 이 책이다.
재구성의 초점을 음악의 수용층이 점점 확대되었다는 관점으로 맞추고 궁중음악 - 문인음악 - 서민음악으로의 수용층이 확대되는 양상으로 역사를 보자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한국, 중국과 달리 과거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문인사회가 형성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일본에는 한국의 문인에 해당하는 선비계층이 없고, 따라서 문인음악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문제 때문에 본인의 작업은 수년간 중단되고 말았다.
이렇게 세월을 보내던 중 중앙대 일어일문학과 박전열 교수와의 대화에서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문인과 일본의 무사 계급은 지향하는 정신세계와 생활 태도가 흡사하다는 정보를 얻었기 때문이다. 한국과 중국의 문인의 정신세계와 철학 사상은 일본 사무라이의 정신세계와 철학이 상통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따라서 문인음악과 무사계급이 후원하던 음악을 연결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궁중음악으로는 한국의 여민락과 일본의 가가쿠, 문인음악으로는 한국의 가곡·영산회상과 일본의 노가쿠, 서민음악으로는 한국의 판소리와 일본의 기타유부시를 대응시킬 수 있었다.
이 작업은 3국의 비교를 위하여 역사를 단순화 시켰다는 것이다. 복잡한 사건을 많이 다룰수록 예외가 많아서 비교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에서도 처음 시도하는 동북아시아음악사이다. 많은 문제점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한술 밥에 배부를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따르려고 한다. 본인이 이와 같이 조그만 작업이라도 시작한다면 다음에 일을 하는 사람은 내 작업보다 쉽게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소위 콜럼버스의 달걀이다. 이와 같은 수용층의 변화에 의거하여 음악사 시대 구분은 처음 시도되는 것이다. 알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아직 어떤 음악학자도 이런 책을 시도하지 못하였다. 그만큼 동북아시아 음악을 하나로 묶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콜롬버스의 신대륙 발견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신대륙 경영에 나섰던 것처럼 음악사에도 새로운 연구가 나올 것을 기대한다. 역사는 항상 다시 서술하게 된다. 사회적 요청은 수시로 달라지며 시대의 지적 풍토도 변화하므로, 역사 서술은 이러한 변화에 잘 대응해야 한다.
음악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이것이 나의 오랜 숙제였다. 결국 음악도 수요와 공급이라는 간단한 도식에서 출발을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음악이란 듣는 사람이 있어야 음악의 존재 의미를 갖게 된다. 다시 말하면 즐기는 향수층이 공급자를 자극하여 창조적 작업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향수층의 변화에 관심을 가지고 쓴 개론서가 새로운 한국음악사이고 그 연장선 상에서 기획한 것이 동북아시아음악사이다. 새로운 한국음악사 집필 이후 이 개론서의 ‘새로움’ 때문에 적지 않은 비판을 받아 왔다. 그러나 이 책이 출판되고 10년이 지난 요즘도 서점에 깔려 있어 흠쾌하게 생각하고 있다.
음악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음악사를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에 대한 궁리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실제 작업에는 힘을 기울이지 못하는 태도를 갖는 학자를 간혹 본다. 신중한 일은 좋은 일이지만 이와 같은 신중함에는 완벽한 역사서를 써야한다는 강박 관념이 작용하고 있는 듯하다.
“그런 책이 될까요?”
“일본음악사, 한국음악사 그런 이름은 들어보았지만 동북아시아 음악사 그런 책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서양음악사는 유럽이 하나의 음악문화권이었기 때문에 가능하지만 동북아시아 삼국은 서로 달라요, 그런 연구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함부로 책을 쓰면 되나, 더 연구를 하고 써야지’
본인이 동북아시아음악사 서술 계획을 듣고 몇몇 학자들이 걱정 겸 우려를 보였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동북아시아음악사는 마무리를 하게 되었다. 이 책은 아시아에서 아니 세계에서 최초로 시도하는 책이어서 모자라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부족한 부분은 동학과 후배들이 채워줄 것으로 기대한다. 작업을 마치면서 허전함을 무릅쓰고 팔삭동이를 내 보낸다.
이 책은 한국학술진흥재단(현 한국연구재단)의 3년간의 연구비 지원으로 빛을 보게 되었다. 세 번의 중간 심사를 거쳤는데 다행히도 심사위원들이 내 연구를 긍정적으로 평가해 주었다. 그리고 관계 논문을 발표할 때마다 학술지 심사위원들의 긍정적 평가와 고견에도 감사드린다. 사실 필자는 연구비가 없어도 이 연구를 하고 있던 중이라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은 주마가편이 된 셈이다. 이 책에 대하여 필자는 앞으로 연구를 지속하여 10년 후 개정판을 출간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다행이도 2016년에 초판이 완전 소진되어 수정판을 출간하였다. 이처럼 대중성 없는 책이 그래도 꾸준히 읽어준 독자들이 고맙기 그지없다.
국악관현악법 집필(2014)
필자가 오랫동안 대학에서 작곡 지도를 하면서 마음속에 담고 있던 숙제는 어떻게 하면 학생들에게 작곡을 할 수 있도록 도와 주는가 하는 문제였다. 내가 작곡하는 것은 할 수 있는데, 학생을 가르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이 문제를 풀려고 발간한 책이 국악작곡입문(1988), 국악작곡 길잡이(2013)이었다. 이 책을 출간한 이후에도 갈증을 풀지 못하였다. 그래서 착수한 것이 국악관현법 집필이었다. 다음은 이 책의 머릿말이다.
필자가 1966년 대학 입학 이후 작곡을 시작한지 40년이 넘었다. 홍안의 소년이 이제 “종소욕(從所欲)이라도 불유거(不踰距)”라는 70대가 되었다. 공자님은 70이 되고 보니 ‘하고 싶은대로 행동하여도 규범에 어긋나지 않는 달관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설파하였다. 그러나 본인은 아직도 실수와 후회를 계속하고 있으니 어찌할꼬 싶다.
국악계에서 나는 소위 인문계 출신이다. 서울대학교 국악과에 입학하고 보니 정원 15명 중에 10명이 국악사양성소(현 국립국악고등학교 전신) 출신이었다. 학교에서 여민락이나 정읍을 배우는데, 인문계인 나는 전혀 알아듣지 못하였다. 양성소 출신은 이미 다 배워 연주를 할 수 있는 형편인데 말이다. 그래서 악보를 구해 보려 무진 애를 썼다. 그래서 양성소 출신에게 수소문하여 프린트판의 양성소 교재를 구해서 몇 권 구입하여 보기도 하였는데 정말 악보 구하기가 어려웠다.
국립국악원에서 한국음악 씨리즈로 김기수 선생님이 오선보로 편찬한 악보가 나왔다. 이것을 얻어 볼 요량으로 국악원에 갔더니 담당자가 대학원생인 나에게 이 책을 주기가 망서렸졌던 모양이다. 책이 없다고 하며 거절하니까 옆에 있던 구윤국 선생님이 책을 내 주면서 “이 책으로 공부하세요, 나는 주위에 있는 책을 빌려 보면 되니까---” 하면서 책을 주었다. 어떻게 고맙던지 몇 번이고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국악원을 나왔다.
국악 작곡을 연구할 때에도 똑 같은 어려움을 겪었다. 작곡을 처음 하는 사람으로서 도대체 남들은 어떻게 작곡을 하는지 궁금했다. 음악회장에서 듣는 것만으로는 간이 차지 않아서 악보를 구해 보려고 무진 애를 썼다. 당시는 지금처럼 복사기가 없고 청사진이란 것이 있었다. 어렵게 악보를 구했지만 청사진 비용이 워낙 비싸 쉽게 복사를 못하였다. 국악곡 통계를 보면 약 300여명의 작곡가가 국악곡을 썼고 작품 수는 5000여곡에 달한다. 많은 작품을 연주하고 있지만 악보를 구하기는 지금도 여전히 어렵다. 이 국악관현악법을 쓰는 목적은 내가 젊었을 때 한 고생을 후배들에게 반복시키지 않기 위한 것이다.
그래도 1988년에 발간한 국악작곡입문이 30년 넘게 서점에 깔려 있어 국악기로 작곡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는 말로 위로를 받았다. 중앙대학교를 정년 퇴직한 후에, 30년 동안 묵혀두었던 이 책의 개정 작업에 몰두하여 새롭게 국악작곡 길잡이라는 책으로 발간하였다.
필자의 젊은 시절 가장 애타게 필요한 것은 다른 작곡가의 악보와 음원을 구하는 일이었다. 국악계에서 악보 출판은 매우 드문 일이고 더구나 관현악곡의 악보 출판을 더욱 드물다. 이러한 나의 고민을 해결하려고 생각해 본 것이 국악관현악법이라는 책의 집필 작업이었다. 그런데 이 책의 집필에 큰 어려움은 이러한 책은 처음 출판하는 것이어서 참고할 만한 선행 연구가 없다는 점이었다.
서양 음악계에는 좋은 관현악법(Orchestration)이 여러 권 있는데, 국악계에는 한 권도 없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 필자가 한 평생 모아 두었던 악보가 있었기에 기왕에 모아 놓은 악보를 소개하는 선에서라도 엮으려는 마음으로 용기를 냈다. 필자가 이렇게 시작한 국악관현악법이 지금은 엉성하지만 앞으로 누군가가 더 완벽한 국악관현악법으로 보완 집필하려고 할 때 징검다리가 되고 싶다.
이 책에는 작품을 거론하고 작곡자 자신이 적은 해설을 넣었다. 작곡자 자신의 해설이야말로 음악을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자료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 수록한 작품은 각 작곡가의 대표적인 중요한 작품을 싣지 못하고 내가 주위에서 얻을 수 있는 자료를 활용하였다. 아마도 많은 작곡가들이 이 점에 대하여 불만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이 책을 쓰면서 국악계에 종사하고 있는 작곡가들을 무던히도 귀찮게 하였다. 여러 사람들의 헌신적인 도움이 없었다면 이 책은 나오지 못하였을 것이다. 가락동의 내 작업실에서 한 달에 두 번씩 모여 신악회 주최로 <나의 작곡 기법> 이라는 학술회의를 열었다. 이 모임에서 자신의 작품을 소개해 주고 자료와 악보를 제공해 준 작곡가들에게 말할 수 없는 감사를 느낀다. 이 학술회의는 2013년 4월 13일부터 2014년 5월 31일까지 12번에 걸쳐 개최하였는데, 다음은 이 학술회의에서 발표한 작곡가 명단이다.
제1회 2013년 4월 13일: 이해식, 조원행
제2회 2013년 4월 27일: 김대성, 김미림
제3회 2013년 5월 11일: 윤명원, 심진섭
제4회 2013년 6월 1일: 강상구, 전인평
제5회 2013년 6월 15일: 정동희
제6회 2013년 9월 28일: 이경희, 강주리
제7회 2013년 10월 19일: 고은영, 안승철
제8회 2013년 11월 2일: 이혜성, 유민희
제9회 2014년 3월 29일: 황호준
제10회 2014년 4월 19일: 김승근, 고은영
제11회 2014년 5월 10일: 이해식, 강주리
제12회 2014년 5월 31일: 김대성, 박병오
이 학술회의에는 국악계 외에도 서양 음악 작곡계에서도 적극 참여하였는데 이경희 한세대 명예교수님의 참여는 우리들에게 많은 자극을 주었다. 이 외에 한정임, 심준섭, 강향숙 선생님도 여러 가지 조언을 해 주셨다. 이 책을 쓰면서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았다. 양미지 선생, 강주리 선생, 정다슬 양의 헌신적인 협조에 감사한다. 이 책에는 중요한 작품인데도 빠진 작품이 아직 많이 있다. 본인이 치밀하지 못하여 미쳐 작품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여러 작곡가의 작품을 인용하였는데, 한국저작권협회에 등록된 작곡가의 작품은 협회에 일괄하여 작품 사용료를 지불하였다.
이 책을 마무리 하면서 부끄러운 마음이 앞선다. 악기론을 자세하게 기술하여야 하는데 넣지 못하였다. 본인의 국악작곡 길잡이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앞의 국악작곡 길잡이 악기론 부분을 그래도 넣을까 생각도 하였지만 넣지 않았다. 불편하지만 악기론은 앞의 책을 참고하기 바란다.
국악계의 연구도 아주 미진하다. 기초적인 내용도 다양하게 나와 있어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예를 들면 관현악 총보(Score)에서 악기 배열을 어떤 순서로 할 것인지 통일된 안이 없다. 어떤 작곡가는 타악기를 중간에 넣기도 하고, 또는 맨 아래에 넣기도 한다. 거문고를 높은음자리표를 쓰기도 하고 낮은음자리표를 쓰기도 한다. 시김새 표시는 더 다양하여 종잡을 수 없을 지경이다. 또한 필자 자신도 국악관현악에 대한 연구가 아주 미진하였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생각하니 국악관현악법 집필은 만용이었다는 것을 절감한다. 앞으로 교정 증보판을 약속할 수밖에 없다. 또한 후배 중 누군가 더 좋은 국악관현악법을 나오길 기대하는 마음이다.
11. 아파트와 바꾼 책, 아시아 음악 오디세이(2015) 출간
1980년대 이후 필자는 아시아 음악에 방학만 되면 외국에 나갔다. 그리고 방학은 물론이고 방학이 아니더라도 틈만 나면 아시아 지역을 돌아다녔다. 당시 우리나라 경제가 넉넉히 못하여 외국 여행을 제한하고 있었고 여권을 발급받으려면 외국의 초청장이 있어야 했다. 이렇게 30여년 동안 연구에 쓴 돈을 대강 계산해 보니 아파트 한 채와 맞먹을 정도이다. 이렇게 시작된 아시아 음악 연구는 1989년 동양음악이라는 책으로 처음 출간되었다. 며칠 전 서점에 갔더니 뜻밖에도 이 동양음악이 아직도 서가에 꽂혀 있었다. 반가운 마음으로 펼쳐보니 30년 전 촌스러운 편집이지만 정겹기도 하였다. 그런데 뒤 판권을 보니 인지 도장이 빠져 있었다. 순간 당장 저작권협회에 제소할까 하고 생각하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도무지 팔릴 것 같지 않은 책을 그리고 무명 학자가 쓴 책을 발간해 주었던 고마움 마음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아시아음악 연구를 시작한 후 첫 성과물은 1989년 동양음악의 출판이다. 그후 이 책이 출판사의 애초의 기대와 달리 이렇게 15년 동안 책이 팔리는 것을 신기해하고 있다. 도무지 상업성이라고는 없을 것 같던 책이 15년 동안 꾸준히 서점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동양음악에 관한 국내 도서로는 2 가지가 있다. 이 중에서 내 책은 ‘아시아 음악 현장을 발품을 팔며 돌아다니고 쓴 책’이기 때문에 쉽게 읽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이곳저곳에서 들었다.
동양음악 출간 이후 좀 더 본격적인 아시아음악 연구를 위하여 아시아 전 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현장 연구를 시도하였다. 북한, 사우디 아리비아, 이락을 제외하고는 모든 나라를 답사하였다. 중국과 인도는 나라가 넓어 10번 이상 방문하였다.
이 과정에서 어학이 필수적이었다. 특히 중국에서는 영어가 통하지 않아 영어가 통하는 학자를 찾기보다는 내가 중국어를 배우는 편이 빠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막상 중국어 공부를 시작해 보니 영어 공부의 1/10 정도 노력을 기울이면 되는 것이었다. 2004년 11월 19일 인천에서 한중불교음악학술대회가 열렸는데 중국어로 논문을 발표하였다. 중국 사람이 내 발표를 알아듣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보다 내 자신이 더 놀랐다. 중국어를 배우고 일본어를 공부하니 일본어는 더 쉬운 감이 들었다. 요즘에는 러시아어를 공부하고 있다. 중앙아시아 지역 연구를 위해서는 러시아어 해득 능력이 아주 요긴하기 때문이다. 아시아 음악 관계 학술대회에 참석해 보면 예상외로 영어가 안 통하는 학자가 많다. 나는 영어·일어·중국어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아시아 지역에서는 이 세 가지 말이면 거의 소통이 가능하다. 덕택에 나는 더 쉽게 아시아 음악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현장 연구의 결과로 2001년에는 『아시아음악연구를 출간하였고, 2003년에는 실크로드, 길 위의 노래를 출간하였다. 특히 실크로드, 길 위의 노래는 국내에서 국악학자가 쓴 책 중 가장 많은 판매 부수를 올리는 기록을 세웠다. 이 책은 영광스럽게도 문화관광부가 2004년 우수도서로 선정하기도 하였다.
아시아음악연구를 보다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아시아 여러 나라 학자들의 협조와 상호 정보 교환이 아주 요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에 수천 명의 음악가가 있는데, 그들의 논문을 읽어보면 중국 국내 자료에 의거한 논문이 대부분이었다. 중국 학계의 고대 음악 연구를 수당대 연구에서 구자(龜玆) 음악까지가 한계이다. 구자음악의 뿌리인 인도음악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태국 학자의 연구를 보아도 태국․미얀마․인도네시아 등과의 교류를 다루고 있을 뿐이어서 태국 음악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중국 음악과 인도음악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다. 태국 학자들이 특히 한자라는 벽을 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번거롭고 돈드는 일을 자청하고 나선 것은 ‘아시아음악사’를 집필하기 위한 욕심 때문이다. 지금까지 출간된 아시아음악사라면 세계에서 오직 한 권 일본에서 나온 것이 있다. 이 책은 엄밀히 말하면 아시아 각국 음악사이다. 아시아 여러 나라의 음악사를 나라별로 집필하였기 때문에 아시아 음악을 날줄과 씨줄로 살피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이 책은 아시아 음악사 집필을 위한 징검다리로 중요한 작업이라 생각하며 애독하고 있다. 이제 아시아음악에 관한 네 번째 책으로 아시아음악의 이해를 출간하게 되었다. 그 동안 여러 학술지에 발간한 것을 다듬고 정리한 것이다. 이 책의 몇 논문은 이전에 출간한 본인 저서의 내용과 겹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아시아음악의 이해를 위하여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중복이 되지만 재 수록하였다.
필자의 저서 중에는 아시아음악학회 학술회의를 통하여 발표한 논문을 엮은 아시아음악의 아름다움과 아시아음악의 어제와 오늘이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특히 2005년 발간한 아시아음악의 이해는 꾸준히 독자들의 성원에 힘입어 10년 동안 5쇄를 기록하고 있다. 5쇄가 뭐 대단하냐고 하겠지만 난해한 학술서가 이처럼 10년 동안 꾸준히 나가는 책은 많지 않다. 이것은 우리나라가 세계화 바람이 불면서 외국에 관하여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는 증거이기도 하고, 외국 음악에 대하여 알아보자는 분위기가 조성되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
2015년에는 아시아음악의 이해를 대폭 수정 보완하여 아시아음악 오디세이라는 새 이름으로 발간하였다. 이 책의 수정 보완판이 나오게 된 첫 번째 이유는 이 책을 출판한 중앙대학교출판부에서 이 책을 절판하였기 때문이다. 이 책이 절판되자 여러 곳에서 복사하여 교재로 사용할 터이니 양해해 달라는 연락을 받은 바 있다. 그래서 새로 그동안의 연구 논문을 보충하기로 마음먹었다. 전에 출간한 책을 이름을 바꾸어 출간하게 되어 마음이 불편하다. 그러나 그동안 새롭게 연구한 결과를 보충하고 새로 쓴 논문을 보충하였다는 점에서 위로를 받고 싶다. 이 책에서는 2005년 발간한 아시아음악의 이해」 출간 이후에 새롭게 밝혀진 몇 가지 내용을 수정 추가하였고 특히 새로 집필한 아시아음악관계 논문 7편이 증보되었다.
이 중에서 “밖에서 본 영상회상”은 아시아 음악 연구 30년 동안의 연구 성과를 한국음악에 비추어 본 것이다. 놀랍게도 결과는 지난 60년 국악계 연구 결과와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다. 특히 한국 국악학계의 태두이신 이혜구, 장사훈 두 분의 연구 결과와 배치되는 내용이어서 몹시 당황스럽다. 이 논문을 누군가 꼼꼼히 읽고 나의 오류를 정정해 주기 바란다. 그리고 이 논문이 폐기되기를 기대한다. 이 책에 부록으로 수록한 <몰래 맞을 각오로 쓰는 음악대학 이야기>는 2015년 1월부터 동아일보 동아광장에 쓴 글이다. 이 글은 필자가 아시아음악을 연구하기 위하여 아시아 여러 나라 현지답사를 하면서 우리 나라 음악계를 바로본 소회를 적은 것이다. 일반 독자를 위하여 쓴 글이어서 쉽게 읽을 수 있는 자료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 수록한 논문은 무두 필자가 발로 뛰면서 쓴 것이다. 그냥 책상에 앉아 문헌만 보고 쓴 것은 하나도 없다. 문제점을 발견하고 나면 반듯이 현장 확인을 거쳤다. 본인의 연구를 위하여 지난 15년 간 쓴 돈은 적어도 수억 원 이상이 될 것이다. 특히 1991년의 중앙아시아 6개월 현장 조사, 1997년의 아랍 음악 6개월 조사에는 몸도 고생스러웠지만 엄청난 경비를 썼다. 사실 이것은 특별히 계산한 것이 아니고, 어림잡아 계산해 본 것이다. 매년 여름방학·겨울방학을 이용하여 적어도 일 년이면 두 달 이상의 현장 조사를 하였기 때문이다. 요즘은 몸이 이곳저곳 자꾸 아프다. 이제는 현장 조사를 하려면 겁이 난다. 진작에 다녀 두었던 것이 여간 다행스럽지 않다.
아시아음악 연구란 사실 혼자서 할 일이 아니다. 이 책이 우리나라에서 아시아음악연구에 더 힘쓰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가급적 문장을 쉬운 글로 썼다. 그러나 워낙 주제가 생소한 외국음악이다 보니 일반 독자가 읽기에는 어려움이 많이 있을 것이다.
지난 한 평생을 돌아보니 정말 부지런히 살아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누가 글을 써 달라거나 작곡을 해 달라거나 하면 거의 거절한 기억이 없다. 실력없는 나에게 무엇인지 부탁하는 것이 너무 고마웠기 때문이다. 이 글을 마무리 하면서 세어보니 20권의 책을 출간하였다. 내가 눈치도 없고 순발력이라고는 약에 쓰려도 없는 사람이 이만큼 살아온 것은 바로 내가 모자라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모자람을 채우려고 무던히도 노력하며 살아온 한 평생이었다.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니 여러 사람들의 도움이 많았다. 그리고 대학교수라는 직업을 갖게 되고 사연은 많았지만 정년까지 마친 것을 생각하니 감사한 마음뿐이다. 지난 세월 동안 내가 아시아음악 연구와 작곡 활동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중앙대학교라는 직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강의를 들어준 학생 덕택이다. 고마운 마음을 다시 한번 전한다. 또한 나를 힘들게 한 사람에게도 감사를 표한다. 어떤 분은 논문 심사로 어떤 분은 인간 관계로 필자에게 비판을 해 준 사람들이 많았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니 이 분들이 나를 항상 깨어 있도록 만들었고 나태하지 않도록 자극하였다. 이 분들이 없었으면 오늘의 내가 있을 수 없었다고 생각하고 이분들에게도 감사드린다.
또한 한평생 작곡가로 학자로 안정된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와 준 집사람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정말 내 평생 사는 동안 수많은 좌절을 딛고 일어서고, 수많은 슬픔과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아내 덕택이었다. 내 생애에서 제일 잘한 일은 지금의 아내를 만난 일이다. 서재에서 책이나 보고 있는 남편을 타박하지 않고 묵묵히 지켜준 덕택에 오늘의 내가 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잘 자라준 삼남매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
이제 21세기에는 유럽 음악에 대항할 아시아음악을 창출하여야 한다. 이것은 21세 기 아시아 음악인 모두의 과제이다. 이 일에 필자도 남은 힘을 보태고 싶다. 필자의 이 두서없는 글이 한국에서 새로운 음악 이론을 개척하고 새 음악 창달에 골몰하는 후배들에게 도움이 되고 자극이 되길 바라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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