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차리는 풍성한 농가연
벼 낫질하다 쉼 하고 머리의 차양 모자를 벗어 부채질하며 땀 냄새를 쫓던 산골의 가을로 가고 싶습니다. 젊음에서 도시화로의 진군, 막대한 정열을 소모하며 커다란 시간을 낭비하며 목표를 던졌던 내게, 가끔 소스라치도록 청명한 하늘을 가르며 돌아오는 메아리는 곧바로 산골로 향하라는 메시지로 가득 차오르는군요.
20여 년 전 뭐가 뭔지도 모르고 “시골 닭”은 시내의 관청에 나갔습니다. 그렇게 산 뒤에 또 산이 있고 골짜기에 또 골짜기가 연속되던 고향 오지마을을 떠나 기어오르기를 거듭했습니다. 사람은 일단 시작을 뗐으면 끝이 어딘지 모르는 미궁 속에서 헤매는 것 같습니다. 사람의 욕심이 열리면 어느 선에서 닫힐 리가 없나 봅니다. 산골에서 도시로 다시 연해 도시로 농민의 탈피를 꿈꾸며 진둥한둥 전전했습니다. 교외에 자그마한 집도 마련하고 아내와 아이 셋이 사는 가족도 만드는 쳇바퀴 속에서 삶이 짐스럽도록 흘러갔습니다.
도시 사람들은 나를 핸섬한 아저씨라고 불러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도시인과 나하고는 전혀 인연이 닿지 않는 것을 깨달았고 도시의 삶 속에 행복하지 않은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도시에 묻혀 살면서 내가 가진 것은 뭐고 내가 소유하지 못한 것이 뭔지 요즘 자꾸 생각했습니다.
학력도 낮고 전문직 훈련도 받지 못한 그대로 도시에 상경해 주먹구구식 속계산으로만 발 빠르게 앞서는 도시에 대응할 수 있었다는 것이 자신에 대한 체벌로밖에 더 여겨지질 않습니다. 바락바락 악을 쓰고 여기까지 왔지만 이것도 저것도 아닌 죽밥 그릇을 비우고 원점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각별해지는 요즘입니다.
도시에는 뭐든 넘치고 넉넉하지만 내 것인 소유는 많지 않았습니다. 재물은 물론 권세나 명예와 난 아직도 벗이 되지 않고 거리가 멉니다. 한 번쯤은 도시에 뿌리를 박고 보라는 듯이 어험 헛기침도 하고 싶었을 때가 있었습니다. 부하직원들도 어려워하고 받들어 모시는, 젊은 미녀 비서도 찰싹 붙어 따라다니는 사업가가 되는 동경을 해왔던 것은 머나먼 욕망에 지나지 않았지요. 대신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농경지로부터 벗어난 내겐 멍에가 아닌 뼈저린 부끄러움으로, 검고 기름진 손바닥만한 마당의 흙 한 줌에도 뿌리의 의미로 돌아왔음임을 미처 몰랐지요.
사람은 길지 않은 생에 마음 편하게 살고 몸 맘 건강의 소유가 제일 복됨이라는 게 나이 들어가는 내가 느끼고 있는 수감입니다. 그만큼 복잡다단한 도시는 동이 닿지 않는 건재랄까요? 남보다 보란 듯이 살려고 갖은 수단을 다하고 병과 독이 되는지도 모르고 그를 딛고 내가 설 수 있는 사람과의 부대낌 속에서 그 생각이 건강하면 얼마나 건강하겠나 하는 아집을 가졌습니다. 어느 정도 돈과 힘이 생기면 그것에 대한 자신을 은근히 과시하고 싶어지는 것도 도시 비틀린 면모데요.
내가 사는 도시는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단합대회요, 친목행사요 여러 가지 단체들이 창립되어 너는 회장하고, 나는 부회장 하는 모임을 만듭니다. 빈 드럼통이 소리만 크다고 내용은 쥐뿔도 없습니다. 신문 지상에 기사를 대문짝만하게 홍보해달라고 합니다. 그 홍보비면 차라리 열심히 살지만 어디선가 어렵게 영위하는 누군가의 식구들을 위해 조용하게 헌금을 하면 어떤지. 도시의 사무책상 모퉁이에서 심부름꾼으로 부득불 추임새를 넣고 타이핑을 해야 하는 내 자신도 껄끄럽더군요.
내겐 도시의 태깔을 들쓴 반듯한 모습보다도 아직 산골의 순박한 모습이 더 많이 산촌 경개의 추억처럼 남아있습니다. 때론 미지근하게 살아가면 미움도, 적도 적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만, 그보다도 얕아도 해맑은 마을 앞 시냇가처럼 지울 수 없는 산골 질박함 그 속성의 투영 때문에 진실치 못한 자신을 망설임 없이 내려놓습니다. 산골의 터실터실하고 흙이 낀 감자알처럼 내 얼굴은 시골티를 벗지 못했습니다. 번쩍번쩍 정장 차림에 번뜩이는 예리한 눈빛보다도 어려운 사람들의 주머니사정을 걱정하는 마음 여린 내가 영락없는 농촌 아저씨가 아닙니까.
나는 번쩍번쩍하는 승용차를 몰고 다니는 사장들의 차에 합석하면 괜히 호가호위의 낱말을 낯 뜨겁게 느끼는지 모르겠습니다. 회의석상에 뒤풀이로 산해진미가 오르면 소박한 음식상에 단란히 둘러앉아 식사하던 고향 식구들이 떠올라 가슴 중앙이 탁탁 두드리도록 체기가 올라오데요. 세상사를 잊도록 사우나 찜질을 하고 나서 예쁜 아가씨들이 안마해주거나 노래방 가서 팁도 불쑥불쑥 꺼내서 던져주며 “오늘 귀한 손님 모시고 왔으니깐 서비스 잘해.” 하는 배불뚝이 사장을 감사하게 쳐다볼 여흥의 마음도 굽질립니다. 도시가 내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수록 멀리 번데기를 탈피한 나방처럼 탈출하고 싶을 뿐입니다.
산골로의 회귀를 꿈꿉니다. 매일 만나는 오염된 하천과 공기, 먹는 식품에까지 비롯되어 도시의 사람도 그 공해를 피하지 못하고 서서히 잠식되어 가는 듯합니다. 아토피성 피부염 등 건강에 나쁜 시멘트벽으로 둘러싸인 아파트보다 공기정화가 되는 토목집이 요즘 선호되기도 합니다. 내가 설 자리가 당치 않는 긴장이 팽배한 도시, 도시의 메마른 나뭇잎처럼 시들어가는 내가 어떻게 봐도 앞뒤가 맞지 않는 매무새처럼 단풍이 곱게 물든 산골에 비쳐질 수 없는 민망하고 왜소해진 자아를 발견합니다. 촌스러운 것을 벗으려던 나는 여태 촌스럽고 그래서 어설펐고 서글펐나 봅니다.
도시 속에 살아가자면 없어도 있는 체 하는 건방과 있어도 있는 티를 낼 줄 아는 허영과 갖고 싶어서 물러설 수 없는 야심과 이젠 때가 되었다고 라이벌이 될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하던데요. 도시의 암투와 비리, 사기가 호미에 걸려나오는 감자알처럼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는 정신의 빈곤과 부함이 교차되어 시끌시끌한 장소를 내게 맞지 않는 옷차림처럼 벗어나렵니다. 그런 것들이 없어도 맨몸이듯 사는, 정신 깨끗해지고 건강해지는 고향 산골이 그립습니다.
한쪽으로는 회사가 새로 설립되고 다른 한쪽에서는 기업이 부도를 선포하는 게 도시입니다. 아니 쥐도 새도 모르게 온다간다 말도 없이 사라지는 “들가방 회사”들을 따라 어제 그저께 보았던 사람도 이젠 보이질 않습니다. 나도 그중의 한 사람이 될까 두렵습니다. 어서 내 마음의 전원으로 떠나야겠습니다.
씨앗 뿌린 대로 거두는 산골에 좋은 땀을 흘리면서 이제 내려놓겠습니다. 빈 곳간에 황금 가을을 차곡차곡 쌓겠습니다. 고향 내려갈 준비로 마지막 도시에서 정직한 연습을 하겠습니다. 최대한 오염된 몸으로 환원할 수 없어 영원처럼 고향 마음으로 이제 가다듬겠습니다.
도시 밖은 시골
1
도회지에서 출근을 시작하자 까마반지르하게 광나는 구두부터 사 신었다. 한두 달도 안 되어 구두코가 입을 벌릴 줄이야. 구두병원에 맡겨서 수리했더니 며칠 못가서 또 옆 볼이 터져 흰 양말이 수줍게 몸을 드러낸다. “지금 신들은 저질품이 많다구요.” 같잖은 중국어로 “신수리쟁이” 아저씨에게 고해바쳤더니 그가 한다는 말이 “그렇잖으면 우리 신수리쟁이들이 어찌 밥벌이 할라구. 헤헤......,” 였다.
여름날 저녁 반팔 차림으로 퇴근하여 돌아와 보니 얼굴이 너무 찝찔했다. 손바닥으로 문질러봤더니 먼지가 한 벌 묻어나왔다. 이런 얼굴로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으니. 소독약 냄새가 나는 미지근한 수돗물에 밥맛도 잃어진지 오래다. 밤에는 습관 되지 않은 찌걱찌걱 소리 내는 침대 잠자리, 밤늦도록 실북 나들듯 오가는 차량의 소음에 유리창문까지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아대 나는 종시 잠들지 못하고 자반뒤집기를 한다.
고향 사는 아주머니가 시가지에 들르면서 길에서 만나더니 줄 것이 없다면서 비닐봉투에 꼭꼭 담아 봄 달래를 안겨주는데 나는 그 정성을 차마 밀어 막지 못했다. 그것도 너무 양이 많아서 건넛집 이웃 아주머니에 덜어주었더니 그릇을 돌려주는데 지전 몇 장이 댕그라니 담겨 있다. 순간적으로 따끔해 나는 얼굴. 돈을 받자고 판 듯한 마음이 들었다. 도시 사람들은 이랬다. 무엇이나 돈으로 계산하는 기계적인 자세에 떨어지는 정나미였다.
이뿐만 아니다. 도시에서 비일비재로 일어나는 도적, 강탈, 강간 사건들. 마음 놓고 팔자걸음도 못 하는 도시의 밤이 이런 거다. 남이 피해를 받는 걸 모여들어 옆에서 눈을 시퍼렇게 뜨고 구경만 하고 구해주려고 나서는 이 없는 무서운 도시다. 화장실도 열쇠를 잠그고 입을만한 옷가지나 쓸 만한 살림 가구를 내다 버린 걸 보면 재활용을 못 하게 칼로 찢어놓고 망가뜨려 놓기도 했다. 도시의 각박한 인심에 씁쓸하고 서늘해 난다.
점차 도회에서 살며 보이지 않는 암투에 연쇄되고 탐욕의 눈이 수시로 번뜩이는 것을 보아내다 못해 권력과 승급층계로 끈 잇는 처세 술법도 인젠 범상하게 건너다보기에 이르렀다. 술 잘 먹는 과장이 선진생산자로 장려받는 것을 어이없게 바라본 것이 아니라 흔연히 선망의 눈길을 던져주기도 했다. 자기보다 만만해 보이는 사람들 속을 비집고 골탕 먹이고 얼려내고 자기보다 잘 되면 질투하고 남의 발등에 불 떨어지면 깨고소해 하는 사람들을 도시는 품고 있다. 고향 시골에서는 겪을 수 없는 아이러니였다.
2
장백산 아래 찬 기운을 머금고 연변의 금수강산이라 불리는 아름다운 고향 숭선 벽곡에 지난해 다녀왔다. 금방 소낙비가 쓸고 지나간 고향 하늘은 청청 파랗게 열렸고 가을 전야로 화해가는 숲들의 낙숫물이 내 손등에 닿아 여간 감각이 산뜻하지 않다. 24년 동안이나 때를 묻히고 있다가 타인이 되었던 첫 고향 나들이는 시끌벅적한 인간 세상을 반추하듯 정서적이다. 고향 아들답게 버젓이 도시 겨룸마당을 뛰었을까? 시골아들은 담약했었는데 지금은 단련되고 노련해지었을까? 고향이 내준 숙제이고 나에게 주어진 물음이다.
땅거미 진 풀밭에서 머리며 허리까지 금빛이 나는 앞집 쌍가마네 엄마 염소가 머리를 내저으며 울고 있다. 전에 나는 쌍가마가 새끼 가졌다고 못 타게 하는 것을 내가 억지로 엄마 염소를 목말 하다가 그만 엉덩방아를 찧었다. 쌍가마는 골나던 차 “쌍통맹통 꼬부랑통” 하면서 짝짜꿍을 쳐가면서 나를 골려주었고 나는 얼굴이 벌게져 염소 배때기를 힘껏 걷어찼다. 이튿날 염소는 죽은 새끼를 낳았다. 쌍가마는 발을 동동 구르며 울먹거렸고 나는 그날 밤 집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그런데 쌍가마 엄마는 꾸중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우리 엄마가 사과하는데도 화끈하게 웃어주었다. 그렇지만 계집애 쌍가마는 내가 고향을 떠날 때까지도 그 일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어쩐지 쌍가마와 멀어지는 것이 나는 가슴 먹먹했다.
오늘따라 금발염소 울음소리가 반갑다. 저 천연덕스러운 미물의 정 실은 울음소리에 어쩐지 쌍가마가 달려 나올 것 같아 기다렸지만 끝내 뙤창문 기척은 없었다. 나를 보기만 해도 고개를 외로 탈던 쌍가마가 보고 싶다. 지금은 숙성한 처녀로 되었겠는데......,
“모두 떠났어. 도시로 갔어. 숭어가 뛰니 망둥이도 뛴다고 처녀라 이름자 붙은 건 다 떠나려고 하니 총각들도 어디 가만있나? 농촌이 이렇게 싫단 말인가?.....,” 동구 밖 백양나무 아래 거쿨진 모습으로 기다리고 서 있던 금발머리 촌장 아저씨가 나에게 다가서며 하는 말이다. 어떤 곡경이 치러지고 있음을 무거운 촌장의 아저씨 입말에서 쩡쩡하도록 느꼈다.
문을 활 열어놓고서도 시름 놓고 잠을 잘 수 있거나 일 밭으로 다녀올 수도 있는 고향, 궂은일 마른일 서로서로 나서주는 고향 시골의 후한 인심. 우리 집 작은 양재기는 “복그릇”이었다. 이웃집으로 빨간 토마토가 담겨 가면 노란 참외가 담겨 울바자 너머로 되 건너오고 삶은 풋옥수수가 담겨 가면 콩나물이 소복이 담겨 오기도 하는 시골의 있는 그대로 나누어 먹는 재미. 누구와 다투어도 이튿날이면 풀어지는 둥근달같이 둥글게 어울려 살아가는 동네. 도시바람에 휑뎅그렁한 고향에 고이 간직되던 인심도 날아갈 것만 같아 나는 아름다운 고향의 옛 필름을 남기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나도 떠날 때는 도시를 동경해오고 이날을 위해 꾸준히 노력해왔건만 나의 심정은 뿔난 송아지 맘 딴 곳에 가 있다고 먼 고향 시골에 향해 있다.
잠 못 드는 도시의 밤마다 나는 침대에 누워서 창으로 비껴가는 둥근달을 바라보며 고향 생각에 사무쳤다. “월급쟁이”가 아니라면 나는 당장이라도 구두를 운동화로 갈아 신고 고향의 동구 밖을 시름없이 쫓고 싶었다. 생각만 해도 깨끗하고 시원한 고향의 나무 그늘, 그리고 정다운 고향 사람들, 마음속 고뇌를 털어놓을 수 있는 진실한 짜개바지 친구들이 그리웠다.
남들은 시골이 부끄럽다고 감추려고 하지만 나는 떳떳이 말한다.
“나는 시골의 아들입니다.”
|
첫댓글 오래전 쓴 수필이라 다시 손 봐서 올렸습니다. 이에 독자들의 양해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