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목사님
(나 1:11) 여호와께 악을 꾀하는 한 사람이 너희 중에서 나와서 사악한 것을 권하는도다 아멘
원어중심 성경강의 나훔 18번째 ‘벨리야알’이라는 제목으로 말씀 나누겠습니다.
‘여호와께 악을 꾀하는 한 사람이 너희 중에서 나온다’라고 해요. 악을 꾀한다라는 말은 ‘악’은 ‘라’예요 라고, 악을 ‘꾀한다’라고 할 때는‘하샤브’라고 합니다. 악을 생각하는 사람이 너희 중에서 나온다라고 할 때는 ‘민’ 전치사를 써요. 너희로부터, 너로부터, 이게 ‘너희’라고 돼 있는데, 복수가 아니고 단수예요, 너로부터 ‘나온다’, ‘야차’라고 하는 거죠.
주석들을 보면은 너희라는 말 이게 너죠, 너는 누구를 지칭하는지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해요. 그러니까 너는 앗수르다라고 하는 그런 주석도 있고, 또 예루살렘이나 유다다, 이스라엘 이야기하는 거죠, 이스라엘이다라고 이야기하는 주석도 있어요. 그러니까 이 뒤에 문맥을 보면, 12절,13절로 가면은 여성 단수란 말이죠. 그래서 남유다를 지칭한다라고 이해를 할 수가 있고, 그렇게 보이죠, 근데 여호와께 ‘알’이라는 전치사를 써요 알, ‘대적한다’는 거죠, 여호와께 대하여 악을 꾀하는 한 사람, 이건 또 누구냐라고 하는 것도 또 큰 문제죠.
하나님을 의심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거스려서 악을 꾀하는 자란 말이에요. 흐름상 그 역사적인 나훔서의 배경을 보면 앗수르라는 건 표면적으로는 분명하죠. 앗수르는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켰잖아요. 그 북이스라엘을 가르치기 위한 도구로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고, 그 이후에 그 여세를 몰아서 남유다까지 짓밟고 파괴하는 그런 모습을 보인단 말이죠.
이사야서 36장에 보면은, 앗수르의 산헤립이 유다의 도성들을 파괴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비난하는 그런 사건도 있단 말이죠. 그래서 11절의 전체적인 의미는 예루살렘에서 여호와의 뜻을 거스려서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는 앗수르,라고 그가 '야차, 나온다'라고 보통 보는 거죠. 그리고 '나올 것이다'라고 그런 의미로 이야기하지만, 완료형을 써요. '야차, 이미 나왔다'라고. 그래서 이걸 예언자적 완료다라고 해요. 그러니까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해석을 하자면은 앗수르가 나간다라고 하는 건 또 이스라엘에서 떠난다로 보기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아직 이스라엘에서 떠나지는 않았지만, 그렇지만 결국 앗수르가 멸망하고 유다가 독립할 거다, 이렇게 보는 거죠. 그게 역사적인 어떤 배경에 의한 이해가 될 수가 있고요, 이 구절에서.
'사악한 것을 권한다'라고 할 때는, 이게 오늘 제목이에요. ‘벨리야알’이라고 해요. ‘무가치함, 무익함, 파멸’이라고 하는데요. 사악한 것을 '권한다, 벨리야알'이라고 해요, 벨리야알을 ‘야아츠, 권한다’라고 하는 거죠. 벨리야알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여러 번 나오죠? 불량배, 비류, 이런 부류로 나오기도 하고요.
이 벨리야알에서 ‘벨리’라는 말이 ‘닳아서 떨어진다, 다 없어진다, 소멸한다’ 이런 의미의 명사예요, 소멸이라는 의미의. 그리고 야알, ‘야알’은 ‘이익되다, 이익을 얻다’ 이런 거죠. 그러니까 이익이 전혀 없는 거, 그걸 사람으로 치면 전혀 선한 것이 없는 자, 무익한 자가 되는 거죠, 그를 벨리야알이라고 하는거죠
제가 나훔 1장 11절을 70인역을 소개를 해놨죠, 70인역이라는 게 이게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바꿔놓은 거잖아요. 그걸 잠깐 보고 지나갈게요.
나1:11여호와께악을꾀하는한사람이너희중에서나와서사악한것을권하는도다
1 ’에크수’라고 하죠, 에크수, 너희 중에서, 민 전치사로 히브리어에서 쓰인 구절이죠. 그리고 2 ’엑셀류세타이’라고 하는데 이제 ‘엑셀코마이’예요. 그래서 나가다, 야차죠, 야차 나가다죠. 그리고 여기서 주의해서 봐야 될 게, 4 ‘카타 투 퀴리우’라고 하는데 이게 원형은 ‘카타 호 퀴리오스’가 되죠. 퀴리오스가 주님이죠. 그러니까 히브리어에서는 여호와께 대하여라는 거 했잖아요, 여호와. 근데 그걸 70 인역에서는 퀴리오스라고 한단 말이에요. 퀴리오스는 주, 주님이잖아요. 그러니까 여호와를 주님으로 보는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여호와는 구원하신 하나님, 그리스도시라고 제가 말씀드렸죠 그런 의미를 담아서 번역을 한 거예요. 그리고 7 ’에난티 오스’라고 하는데 요게 맞은편, 대적한, 요게 벨리야알에 해당되는 거예요. 이게 맞은편에 반대하는 이런 의미죠. 그러니까 에난티오스가 벨리야알이에요, 이 에난티오스라는 말이.
(마 14:24)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그러니까 바람에 거슬리는 거죠. 바람은 히브리어로는 '루아흐'가 되겠죠. 이 구절 자체에서는 '아네모스'겠지만, 루아흐가 아네모스와 프뉴마의 역어로 쓰인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루아흐예요, 결국은. 성령이란 말이에요. 바람은 성령으로 보시면 돼요, 성령은 말씀이에요. 말씀에 대적하는 거죠.
(딛 2:8)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
대적하는 자 이게 ‘에난티오스’라고 하는데 대적하는 자란 말이에요. 대적하는 자는 ‘대적자’, ‘사탄’이죠. 네 그러니까 이 벨리야알은 사단의 의미가 있는 거예요. 그리고 사단은 마귀 중의 괴수 이런 차원이 아니라 우리 안에 율법이라고 했죠, 율법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내가 사단이고 마귀인 거예요. 그러니까 대적자, 대항자, 그를 사탄이라고 하는 일반 명사인 거예요. 신명기 13장 13절 합독하시겠습니다.
(신 23:13-16) 13 너희 가운데서 어떤 불량배가 일어나서 그 성읍 주민을 유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가서 섬기자 한다 하거든 14 너는 자세히 묻고 살펴 보아서 이런 가증한 일이 너희 가운데 있다는 것이 확실한 사실로 드러나면 15너는 마땅히 그 성읍 주민을 칼날로 죽이고 그 성읍과 그 가운데 거주하는 모든 것과 그 가축을 칼날로 진멸하고 16또 그 속에서 빼앗아 차지한 물건을 다 거리에 모아놓고 그 성읍과 그 탈취물 전부를 불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지니 그 성읍은 영구히 폐허가 되어 다시는 건축되지 아니할 것이라.
어떤 불량배가 일어나고 그리고 하나님께 대적하는 일이 있으면, 그 성읍 전체를 불사르고, 또 탈취물도 불사르고 그래서 폐허로 만들어서 다시는 재건축되지 못하게 하라. 이런 대적자에 대한 어떤 징계를 내리시는 그런 말씀으로 보이지만, 성경 말씀은 전부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로 보라고 했어요.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고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로 보아야, 모든 것이 진리로, 십자가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발견되게 되는 거죠.
‘너희 가운데’라고해요. 이것도 너희라고 돼 있지만 단수예요 너. 그러니까 전부 너, 나 이야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하나님이 나에게 이야기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너로부터, 너 가운데, 이게 전부 ‘민’이나 ‘케레브’나 전부 내 안의 일을 이야기하는 걸로 지금 가르쳐주고 계신 거란 말이에요. ‘내 안에, 내 가운데, 내 마음 한가운데’에서 어떤 불량배가 일어나서 ‘에노쉬 벤 벨리야알’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벨리야알이라는 거는 내 안에서 나온다는 걸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거예요.
벨리야알의 아들, 곧 그 인간이죠, 에노쉬가. 에노쉬가 곧 벨리야알의 아들이다라고 하는 거죠. 에노쉬 벤 벨리야알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에노쉬하고 벤 벨리야알은 따로 떨어진 의미에요. 서로 연결돼 있진 않아요. 벤 벨리야알만 연계형으로 연결돼 있어요. 그리고 그 사이에 베접속사나 이런 것들이 없단 말이에요.
그거는 뭐냐 하면, 에노쉬 곧, 벤 벨리야알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에노쉬라는 거는 사람을 이야기한단 말이에요, 인간. 그러니까 어떤 불량배가 일어났다라고 하지만은, 우리 이야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 인간, 인간이 곧 벤 벨리야알, 벨리야알의 아들이다라고 하는 거예요. 근데 너 가운데라고 했잖아요. 그렇지만 벨리야알은 복수에요. 벨리야알의 아들들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 안에서 여럿이 나온다는 거예요. 내 안의 여럿, 여럿은 뭐예요 항상, 많은 것, 율법을 이야기한다고 했죠. 그러니까 내 안에 많은 것이 나온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들이 ‘성읍 주민을 유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우리가 가서 섬기자’. 그러니까 다른 신, 다른 엘로힘, 다른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이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라고 했을 때 엘로힘이라고 한단 말이에요, 다른 엘로힘. 그거는 하나님을 다른 신으로 오해하지 말라라는 거였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은 항상 우리에게 말씀으로 오신단 말이에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오는데, 그 말씀을 우리가 하나님의 그 뜻, 진리로 깨닫지 못하면 그러면 우리는 그 말씀을, 다른 하나님으로 보게 되는 거죠.
우리는 항상 선악의 두 마음으로 살펴보잖아요. 어떤 일들, 관계들, 사건들이, 현상들이, 나타나고 나에게 다가올 때, 내가 그걸 지각할 때, 우리는 항상 그걸 두 마음으로 본단 말이에요. 이것이 좋은가 나쁜가 선인가 악인가 그걸 토대로 해서, 나의 희로애락의 감정이 항상 물결 치잖아요. 그게 바람에 거슬리는 거예요. 배가 바다를 건너는데 바람이 거슬린다. 배는 나란 말이에요. 나라는 성전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렇게 나의 그 율법이, 나의 그 두 마음이, 하나님을 오해하는 거예요. 진리를 오해하는 거란 말이에요.
항상 하나님은 좋은 걸로 나를 성전 만들기 위한 그 십자가 진리로 모든 것들을 주시는데, 그걸 나의 선악의 두 마음으로, 이것이 나에게 유익이 되는가 손해가 되는가에 기반해서 항상 노심초사하잖아요. 그걸 가지고 애면글면한단 말이에요. 이것이 조금이라도 손해를 당할까 봐, 경계하고 걱정하고 그리고 누가 혹시라도 손해를 끼치면 분내고, 성내고, 이게 전부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신으로 섬기는 일이란 말이죠.
그렇게 ‘섬기자 한다 하거든 너는 자세히 묻고 살펴보라’ 그러니까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그 이야기를 하시는 거란 말이에요. 구하고 찾고 두드려서 그 말씀 그 진리를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거예요. 그거는 전부 성령 이야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나에게 필요한 걸 달라고 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찾아서 ‘이런 가증한 일이 너희 가운데 있다는 것이 확실한 사실로 드러나면’ 가증한 일, ‘토에바, ‘혐오스러운 거, 가증스러운 것’ 율법이란 말이죠, 그것들이 드러나면
(신 20:18) 이는 그들이 그 신들에게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을 너희에게 가르쳐 본받게 하여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게 할까 함이라
우상숭배를 이야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우상은 항상 나예요 나, 내가 우상이에요. 나의 두 마음이 우상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항상 내가 만족시켜드리려고 하는 대상 그 신은 나란 말이에요. 나의 두 마음이란 말이에요. '토에바'를 이야기하는 거고 그 가증한 것이, 그 토에바는 곧 율법이란 말이에요. 그 율법이 너희 가운데에서 나타난다라고 하는 거죠.
(겔 7:3) 이제는 내게 끝이 이르렀나니 내가 내 진노를 네게 나타내어 네 행위를 심판하고 네 [모든 가증한] 일을 보응하리라
케츠라는 말이에요. ‘케츠, 끝, 종말’이에요. 그러니까 성도에게 끝은 다나토스, 그 무트 타무트의 죽음이죠. 자기 부인의 죽음이란 말이에요.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우리의 모든 가증한 일 율법을 보응한다라고 하시죠. 진노를 드러내서 가증한 일들을 보응한다. 저주의 말씀 같지만 우리 율법을 심판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무트타무트, 종말, 십자가 죽음, 그 다나토스의 죽음을 죽게 해주신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저주의 말씀이 전혀 아니라 은혜의 말씀이고 구원의 말씀인 거죠.
그렇게 그 토에바 ‘가증한 것이 너희 가운데 있다는 것이 확실한 사실로 드러나면, 너는 마땅히 그 성읍 주민을 칼날로 죽이고' '칼날, 페 헤레브’란 말이에요, ‘칼의 입, 말씀의 검’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말씀으로 ‘죽이고 진멸해라’라고 하는데요. 그리고 그 속에서 빼앗아 차지한 물건을 다 콜 샬랄이라고 해요. ‘콜’ ‘샬랄’, ‘모든’ 샬랄 ‘잡은 것, 약탈한 것, 노획한 것’ 전부 나의 소유죠. 내가 가진 모든 것, 그걸 다 거리에 모아놓고 다 불살라라, 불은 성령의 불이죠. 진리란 말이에요. 진리의 말씀으로 불살라라, 불사르라고 하는 거는 그게 뭔지 깨닫게 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불태워 없앤다는 거는 그거 버리게 해 주신다라고 하는 거죠.
그러면 그 성읍은 옛 성전이죠, 영구히 폐허가 되어서 다시는 건축되지 않는다. 전부 나의 율법 이야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율법. 내가 두 마음으로 탐심을 따라서 보이는 걸 보이는 대로 보는 거, 그게 율법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보이는 걸 가치 있게 본단 말이에요. 그것이 의미 있게 보인단 말이에요. 두 마음으로 보게 되면, 하나님의 한마음으로 보면 전부 십자가 진리인데, 이걸 나의 두 마음으로 보게 되면 그 보이는 것들, 원래는 보이지 않는 것이 진짜란 말이에요.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란 말이죠. 하나님 나라는 보이지 않아요, 왜? 하늘에 있고, 그 하늘은 내 안에 있기 때문에,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영의 눈으로 보는 거란 말이에요. 근데 두 마음으로 보게 되면 눈에 보이는 것들이 가치를 얻게 돼요. 이게 실재로 보이기 때문에 그것들이 가치가 있고, 그것들이 힘을 얻게 된단 말이에요. 그래서 그 소유를 가지고 싶어 하는 거예요. 어떻게 해서든지 내가 가진 것이 더 나아 보이게끔, 그래서 소유를 늘리는 일, 또 치장하고 가꾸고, 또 막 고치기도 하고, 그런 것들이 전부 보이는 것들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있는 거죠.
그것들이 전부 나의 소유란 말이에요. 무형까지 마찬가지예요. 유형만 아니라, 형태가 있는 것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자존심, 또 명예, 다 마찬가지란 말이에요. 그런 것들이 나에게 가치를 얻는 거란 말이에요, 그게 전부 나니까. 그것들을 전부 폐허가 되어서 건축되지 않게 하겠다. 완전히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박살을 내고 나라는 성전을, 나의 두 마음 성전을 완전히 박살을 내고 새 성전으로 만들어준다라고 하는 거죠. 새 영을 부어서, 새 마음 주시는 일이란 말이에요. 전부 성경은 같은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나를 죽이는 거, 나의 두 마음 죽이는 거고, 옛 사람 죽이는 거고, 그 옛 마음 죽이는 거고, 전부 새 하늘 새 땅 그거 주려고 하시는 거죠, 새 성전 주려고 하시는 거죠
(신 15:9)a 삼가 너는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지 말라
이 악한 생각이 벨리야알이에요. 삼가, 삼가는 ‘샤마르’라고 하는데 이거는 ‘지켜라, 간직하라’ 그리고 ‘너는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지 말라’라고 하는데 ‘레카’란 말이 있어요 레카, 레카가 번역이 안 됐어요. 이게 레 전치사에다가 2인칭 너라는 2인칭 단수가 붙은 거예요. 그래서 레 전치사는 ‘너를 위하여, 너에게’ 이런 뜻이잖아요, 여격. 그러니까 너를 위하여 간직하라, 이런 의미가 들어있는 거예요.근데 이 ‘샤마르’가 니팔형이에요, ‘간직되라’라고 하는 거죠. 그거는 뭐예요? 너를 위하여 그게 뭔지 깨달으라라고 하는 거죠.
‘삼가 너는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지 말라’라고 하죠. 악한 생각은 벨리야알이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마음에 벨리야알을 품지 말라라고 하는 거죠. 그러니까 벨리야알은 어디 있다는 거예요? 마음이란 말에요, 벨리야알은 내 안에 있는 거예요. 그 악한 생각은 뭐겠어요? 하나님 말씀을 둘로 나누는 거, 두 마음으로 나누어 보는 모든 생각이 악한 생각, 악, 악은 율법이라고 했잖아요. 두 마음으로 나누는 거 그게 전부 율법이란 말이에요. 그게 악이라고 하는 거예요, 성경에서는, 계속. 그게 죄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죄에서 벗어나는 거, 죄사함을 받아야 구원인데, 죄사함을, 나의 두 마음이 죽는 거란 말이에요. 선악이 하나님의 선하신 한마음으로 바뀌는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죽는다고 하는 거예요. 십자가 죽음이라는 거는 선악의 두 마음을 죽여주시는 거란 말이에요. 그 십자가 죽음을 죽으면은 내가 죽고 부활하면 선하신 한마음만 갖는 자로, 깨닫는 자로, 하나님의 선하신 뜻 하나만 아는 자로, 새롭게 나오는 거란 말이에요.
둘로 나누어 보지 않는 거예요. 뭐가 좋다 나쁘다 나눌 때, 감정이 요동친단 말이에요. 잘 들여다보시는 거예요 일상에서. 일상에서 성경을 사시는 거란 말이에요. 모든 게 말씀이라는 거를 확인하면서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뜻을 내가 하나님의 뜻으로 보는지 그 선하신 뜻, 나를 죽이는 거란 말이에요.
하나님의 선하신 말씀은, 죽여야 새 성전 만드니까, 그러니까 나를 죽여가시는 말씀으로 깨달으면, 그게 선한 말씀인 거예요. 근데 우리는 항상 내가 높아지기를 바라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선하게 안 들리는 거란 말이에요. 왜 나를 죽이려고 해, 낮추려고 해, 왜 나를 기분 나쁘게 해, 내 자존심을 건드려, 계속 그러는 거죠. 그래서 분내고, 성내고, 다투고, 그런 일이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괴로워하고.
희로애락의 감정이라는 거는, 전부 선악의 두 마음에서 나오는 거예요. 두 마음이 발동하고 있다는 증거가 감정이란 말이에요. 그 두 마음이 없어지면 감정 또한 점점점점 선하신 하나님의 한마음으로 바뀌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항상 기뻐하고 감사할 수가 있게 되는 거란 말이에요. 모든 일에 대해서 기뻐하게 되는 거예요. 무슨 일이든 간에 선악으로 안 보고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저거 손해인데 그런데, 그걸 하나님의 뜻으로 보니까 기뻐하는 거예요, 그래서 기뻐하고 찬송하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 나라란 말이에요. 하나님의 뜻이 나를 다스리는 거잖아요. 나를 장악하신 거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통치가 임한 하나님 나라란 말이에요, 그게. 천국인 거예요, 천국을 내 안에서 사는 거예요,
그리고 지옥을 내 안에서 사는 거고, 내가 두 마음으로 나누어 보는 게 지옥인 거고 내가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면 내가 성전이라니까요. 하나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것이 아니라 안에 있다고 말씀하시잖아요. 우리 안에 있단 말이에요.
하나님 말씀을 선악의 두 마음으로 나누어 보는 모든 생각이 악한 생각인 거고, 그러니까 ‘삼가 너는 마음이 악한 생각을 품지 말라’ 이거는 전부 말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말씀을 어떻게 받느냐,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받고 있느냐, 두 마음이냐 한 마음이냐 그래서 이 구절에는 우리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지만 다바르가 나온단 말이에요. ‘다바르’, ‘말씀’이 나오는 거예요. ‘삼가 너는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지 말라’라고 하는데 다바르라는 단어가 사실 들어있어요. 근데 번역에 반영이 안 됐단 말이에요. 마음의 악한 생각 벨리야알이 말씀으로 있지 않게 하라. 하야 동사도 있어요. 그래서 말씀으로 있지 않게 하라. 그렇게 하도록 샤마르하라라고 하는 거예요. 너를 지켜라, 그렇게 하도록 너를 지켜라.
전부 말씀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벨리야알. 우리 안에 그 두 마음, 율법, 그거 이야기하고 있단 말이죠.
(잠 6:12)불량하고 악한 자는 구부러진 말을 하고 다니며 라고요.
‘불량한 자’는 ‘아담 벨리야알’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벨리야알의 아담, 벨리야알의 사람이라는 거죠.
그리고 악한 자, 악한 자는 ‘이쉬 아웬’이라고 ‘아웬’은 ‘헛됨, 거짓, 사악, 불행’ 이런 뜻인데 거짓, 거짓의 사람 ‘이쉬’도 사람이죠. ‘남자, 사람’이란 뜻이란 말이에요. 거짓의 사람 그러니까 벨리야알의 사람은 곧 ‘거짓의 사람이다’라고 하는 거죠. 거짓이 뭐예요? 거짓, 거짓이, 진리 아닌 거, 율법이죠. 율법 이야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게 악의 사람이고, 거짓의 사람, 거짓말이 율법 이야기하는 거라고 했죠,
그는 구부러진 말을 하고 다닌다. 이게 익케슈트, ‘익케슈트’가 ‘삐뚤어진, 부정직’ 부정직이 진리를 말하지 않는 거, 그걸 이야기하는 거죠. ‘폐’는 ‘입’이에요, 입의 부정직이죠. 여기에 익케슈트 폐가 연계형으로 연결돼 있어요. 그래서 입에 비뚤어짐, 부정직함, 이렇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말에 부정직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진리를 말하지 못하면서 간다라고 하는 거죠, 벨리야알. ‘간다’ ‘할라크’ 가는 건 항상 주님 따라가는 십자가 길 이야기하는 거예요, 가는 거는. 그러니까 성도는 그 십자가의 길을 가야 되는데, 그 십자가 그 진리의 길을 가지 못하고, 입에 비뚤어짐, 말의 부정직, 즉 율법의 길을 간다라고 하는 거죠. 그러니까 벨리야알은 거짓이고, 율법을 가리킨다라는 걸 우리가 확인할 수가 있죠.
(삿 19:22) 그들이 마음을 즐겁게 할 때 그 성읍의 불량배들이 그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들기며 집주인 노인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와 관계하리라 하니
‘성읍의 불량배들’ 벨리야알이죠. 성읍 사람, 성읍 사람이라는 건 성전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성읍’은 성전을 가리켜요, ‘이르’란 말이에요. 우리 이야기하는 거란말에요. 성전 사람, 우리를 벨리야알이라고 하는 거예요. 성경에 나오는 악당은 항상 나로 보시면 돼요. 나에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 안에 허다한 율법들, 율법들을 말하는 거예요.
그들이 뭐라고 하냐면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와 관계하리라’ 관계한다는 말은 야다에요. ‘야다’는 ‘알다, 이해한다’는 뜻이죠. 내가 그를 알아야겠다, 이게 동침하다는 의미로도 쓰인 단어죠. 그러니까 관계한다고 했지만 알아야겠다라는 의미도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동침은 곧 아는 거예요. 그리스도와 하나 됨으로써 아는,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율법들이 그를 알아야겠다. 그는 레위인이잖아요. 그 레위인, 제사장, 그리스도를 알아야겠다라고 하는 거란 말이에요.
(호 4:6)a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지식이 없다. ‘벨리 다아트’라고요. ‘벨리’ 이게 ‘없어짐’ 벨리야알의 벨리죠, 지식이 없으면 벨리 다아트는 벨리야알이란거죠. 그래서 ‘다마, 망한다 멸망한다’라고 하는 거죠. ‘다아트’가 ‘지식’인데, 그게 야다의 명사잖아요. '야다, 하나 된다'는 거예요. 그리스도가 하나 되면 그러면 그리스도를 알게 되는 거죠.
그리스도를 아는 거는 어떻게 된다는 거예요? ‘그리스도를 알겠다’라고 하는 의미는 뭐냐 하면, 바꿔서 이야기하면, ‘십자가로 하나 되겠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그리스도가 하나 되는 방법은 십자가와 하나 되는 거란 말이에요. 벨리야알이 그를 알고 싶다라고 하는 거죠, 지금. 그는, 여자를 지금 끌어내라고 하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그란 말에요, 남성이란 말이에요, 3인칭, 남성.
(삿 19:1) 이스라엘의 왕이 없을 그때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거류하는 어떤 레윗 사람이 유다 베들레에서 첩을 맞이하였더니
그는 레위인이고, 그리고 그가 이스라엘이 왕이 없을 그때 일이라고 하는데, 지금 이게 성경은 옛날 옛적 그러한 때가 있었다. 사사기니까 왕이 아직 서지 않은 그때 이야기하나 보다, 이렇게 볼 수가 있겠지만, 성경은 항상 내 안의 이야기란 말이에요, 내 안의 이야기. 그러니까 왕이 없다라고 하는 거는, 내 안에 하나님이 없다는 거예요, 하늘의 왕이신 그분이 없다, 없다라는 얘기는 내가 그분을 나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고,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왕국이란 말이에요, 하나님 나라, 왕국이란 말이에요. 그 왕국이 되지 못했다는 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여러 주변 국가들의 통치를 받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거예요, 사사기에서. 성경에서 보여주는데, 그건 하나님을 우리가 깨닫지 못한 상태다라는 거를 우리 안의 상황으로 놓고 보면, 그 이야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리고 그들을 섬길 때 하나님은 그들을 팔았다고 말씀하세요. 내가 그들을 팔았다, 너희를 팔았다, 이스라엘을 팔았다.
(삿2:14)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 넘겨주사 그들이 노략을 당하게 하시며 또 주위에 있는 모든 대적의 손에 팔아 넘기심에 그들이 다시는 대적을 당하지 못하였으며
팔아버렸다라는 거예요. 대적, 대적은 ‘오예브’ 적이에요. ‘대적, 원수’에게 이스라엘을 팔아넘겼다라고 하는 것 대적은 누구라고 했어요? 항상 대적도 나잖아요, 나에게 넘기신 거예요, 나에게 나를 팔아버리신 거예요, 넘긴 걸 팔았다고 하는 거예요. 요 오예브가 벨리야알이고, 사단이고, 나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성도는, 하나님의 어떤 유기에 의해서, '유기, 버려짐'에 의해서, 뭔가 이 세상에서 잠시 버려진 존재가 아닐까라고 할 정도로 소외를 느낄 때가 있어요. 근데 그거는 사실은, 내가 이 세상을 사는데 소외를 느낀다는 건, 하나님과 떨어져 있다는 거예요. 근데 그 상태가 어떤 상태냐 하면, 내가 내 멋대로 사는 상태예요. 내가 나의 탐심, 나의 정욕, 나의 두 마음이 멋대로 발동하게 내버려 두는, 그걸 하나님이 잠시 그렇게 그 상태로 두시는데, 그걸 팔아버렸다라고해요.
그래서 '테스 형, 세상이 왜 이래' 이러면서 고민하는 그런 노래도 있지만, 세상은 왜 이렇게 악한가, 이러면서 혼란스럽고 힘들고 세상살이는 왜 이렇게 괴로운가, 뭐 이렇게 하기도 한단 말이에요. 이거는 테스 형한테 물을 일이 아니고, 내 안의 하나님께 물어봐야 되는 거예요. 그럼 하나님이 뭐라고 하세요? 이거는 세상이 악한 게 아니라, 세상은 항상, 나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네가 악한 거다!'라는 거예요. 악하다는 건 또 뭐예요? 계속 말씀드리지만 악한 건 율법, 네가 두 마음을 발동하고 있다. 하나님과 나만 있다니까요, 천지 간에. 하나님과 나만 보셔야 돼요, 하나님과 나.
내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선다는 건, 하나님과 나만 보이는 거고, 다른 외부에 주어진 모든 관계, 모든 일들은 다, 말씀으로 깨달아지는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만약에 세상이 왜 이래라고 고민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대답은 그거란 말이에요. 네 제일 악해, 네가 제일 문제야, 이게 정답이에요, 하나님이 주시는 그 정답은. 그러니까 항상 우리 안의 악, 악이란 말이에요, 율법, 나의 그 두 마음이 문제란 말이에요. 그것 때문에 세상이 괴롭고 힘들고 살기가 괴롭고 복잡스러워 보이고 이래요. 복잡스러워 보여요, 왜? 하나로 보이지 않으니까
진리를 알면 하나예요. 그래서 아주 명료하고 단순해요. 모든 걸 하나로 볼 수가 있단 말이에요. 모든 게 하나님 말씀으로, 나를 죽이는, 죽여주시는 십자가의 말씀으로 보이면 그러면 요동할 일이 없는 거예요, 전부 감사로 깨달아져요. 근데 하나하나가 다 달라요. 그래서 왜 이렇게 바빠, 일이 많아, 힘들어, 복잡해, 혼란스러워, 전부 그게 하나가 아니라, 나누어서 보니까, 쪼개서 보니까, 율법으로 보니까, 그렇게 되는 거란 말이에요. 내 두 마음에 의해서 그 일이 일어나는 거예요.
(시 44:22)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이걸 사도바울이 로마서에서 인용을 했었죠, 기록된 바 이러면서, 이 구절을 그대로 인용을 했었어요.
우리가 종일, ‘콜 하욤’이에요, 콜하욤, ‘모든 그 날’, 그 날, 그날은 심판의 날이죠.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하라크에요, 푸알 완료형이에요, 푸알이라는 거는 수동태인데 강조형이에요, 반드시 완전한 죽임을, 완료예요, 당했습니다. 당하게 되며가 아니에요, 당했습니다. 성도가 마치 큰 박해를 받아서 어떤 특정한 날에 무슨 콜로we세움 같은 데 서가지고 비참하게 하루 종일, 한 사람 한 사람 죽어나가는 그러한 일을 겪는, 그러한 박해를 받는 일 같지만은, 이거는 내 안을 이야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시편 44편 처음 시작할 때 보면 다른 성경에서는 제목을 쓰지 않았는데 제가 넣어놨죠.
[한문]시 44:1 (고라 자손의 마스길 영장으로 한 노래) 이렇게 나와 있어요.
그리고 영어 성경도 다 안 나오고
KJV하고 RSV 여기는 고라자손의 마스길을 영장으로 한 노래 요거, 요게 영문으로 나와 있어요. 고라 자손에 쓴 시편이다라고 하는 거죠. 근데 어떤 견해가 있냐면 44편을 쓴 게 히스기야다라고 보는 그런 견해도 있어요. 이게 내용이 앗수르의, 우리 지금 공부하는 게 나훔이고 앗수르에 대한 이야기하잖아요. 이 앗수르, 산헤립이 침략했을 때 두 번 공격해 오거든요. 그때 히스기야의 대응을 기록한 게 열왕기하 18장 19절과 이게 내용이 비슷하다 이래가지고 히스기야가 아닐까 이렇게 보기도 한단 말이에요. 그렇지만 히스기야 당시에 고라 자손이 지었다 이렇게 보는 게 더 우세해요. 대체적으로 그렇게 보고 있는 거예요.
근데 요게 앗수르 산헤림이 공격해오는데 두 번째일 거라고 보는 거예요. 두 번째 공격때 일거라고 보는 이유가 뭐냐 하면, 첫 번째 공격할 때는 히스기야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애굽을 의지한단 말이에요. 그래 가지고 굉장히 혼쭐이 나죠. 그 다음에 2차 공격 때는 하나님을 의지해요. 그래서 히스기야의 어떤 신앙 상태를 44편에그렸다, 이렇게 보는 거죠. 하나님만 의지하면서 하나님께 모든 걸 맡기는 그러한 모습을 볼 수가 있는 거죠.
그래서 성도가 외부의 어떤 세력, 자기 바깥의 어떤 힘, 권세에 의해서 박해받고 막 살해당하고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 것처럼 보이는데 그러한 역사적인 배경이 있는 시편이긴 하지만, 근데 성경은 결국 성경의 독자에게 주시는 말씀이란 말이에요. 그런 박해가 과거에 있었고 지금도 있기도 하겠지만 성경에서 이면적으로 속으로 말씀하시는 그 성도의 죽음은 항상 목숨이 끊어지고, 육신이 죽는, 그 죽음 말하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항상 두 마음의 죽음, 십자가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주님이 죽은 그 십자가 죽음은 그걸 시각적으로 가르쳐주시는 거예요.
'콜 하욤, 모든 그날' 욤이란 말이에요. 하욤, 욤은 오르라고 했죠? 빛, 빛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빛 진리란 말이에요, 그리스도가 빛이란 말이에요. 그 빛이 우리에게 오는 모든 때, 우리를 비추는 모든 때, 그러니까 깨닫게 하는 모든 때, 성도가 진리를 깨닫는 때에, 그때를 이야기하는 거고, 그때 그 빛, 그 진리에 의해서 죽음이 일어나는 거란 말이에요. 도살이 일어나는 거란 말이에요, 내가 죽는 거예요, 내가 자기 부인의 십자가 죽음을 죽는, 그 일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거란 말이에요.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도살의 양이라고 해요, ‘촌 티브하’라고 하는데 ‘촌’이 ‘양’이고 ‘티브하’가 ‘도살’이에요, 그러니까 도살의 양이에요. 도살하게 될 양, 그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그것처럼 막 죽는 그 양들처럼 우리가 막 죽고 있습니다 이런 일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도살의 양, 이거는, 주님을 이야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희생 제물의 그 양으로 죽으시는 주님을 가리키는 표현이에요. 도살의 양, 그러한 주님과 같이, 그러한 주님처럼, 아들로, 죽여서 살리는 아들로, ‘하샤브’ ‘여겨주셨다’라고 하는 거예요. 니팔 완료형이에요, 그러니까 여김을 받았다, 주실 거라는 게 아니라 이미 받았다라고, 전부 완료형이에요, 이미 죽임을 당했고, 이미 여김을 받은 거에요. 예언자 완료라고 하죠.
그러니까 이미 십자가 죽음을 죽었어요. 영혼 속에서 보면 아들은 이미 죽은 자예요. 십자가에 죽음을 죽은 자인데, 우리는 그 과정을 배우고 있는 거예요. 그게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이 삶 속에서 이해해 가는 거예요. 당장은 안 되지만, 이미 영혼 속에서 죽은 자라니까요, 십자가 죽음을 죽고, 하나님 나라가 된 자예요. 그리고 이미 아들로 여김을 받았단 말이죠. 이미 아들이란 말이에요, 내가 너를 낳았다라고 하잖아요, 낳은 거에요, 하나님이 낳았어요. 그래서 주님이 내 형제라니까요, 아버지가 같아요.
그러니까 도살의 양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고, 성도는 주님처럼 그 십자가 죽으면 죽는데, 당신의 아들 그 예수를 십자가에서 도살한 것처럼, 성도를 십자가에서 도살하는 것, 이렇게 죽여주시는 게 아들로 여겨주시는 일이죠. 그걸 위해서 나를, 성도를, 세상에 팔아 넘겨버리신 분, 세상에 넘겨주셨죠, 나에게 넘겨주신 거란 말이에요. 이 세상에 버려둔 것 같지만, 나라는 세상에, 나를 그냥 두 마음으로 살도록 내버려 두시는 거, 이걸 세상에 넘겼다라고 하는 거고, 팔았다라고 하는 거예요.
출애굽은 바로 그러한 세상, 그러한 나로부터의 탈출이란 말이에요. 나의 그 두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거, 그게 출 애굽이란 말이죠. 애굽의 바로도 나고, 그 죄인 중에 괴수고, 나란 말이에요, 세상 임금도 나고, 그러면 나를 나에게 파는 그거, 내가 왕 노릇하게 내버려두는 그거, 그러니까 결국 나는 나에게 팔린 거에요. 나라는 세상 왕, 세상 율법에 팔린 거예요. 육의 도살은 내 율법의 도살이 되는 거에요.
그러니까 우리의 그 십자가 죽음은 무슨 대단한 큰 죽음이 아니라, 나의 율법에 의해서 자라난 죄가 십자가에서 도말되는 거, 육의 도살을 이야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게 죄에서 죽고 진리로 풀려나는 일인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에게 팔아버리시지만 그렇지만 안 판다라고 말씀하세요. 팔았는데 안 판다라고 하세요.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을 하세요.
(레 25:23)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토지를 팔지 말라, 에레츠란 말이에요. 경작할 토지 이야기 하는 게 아니라, 샤드 얘기하는 게 아니라 ‘에레츠, 땅’이란 말이에요, 땅 이야기하는 거예요. 땅은 우리 자체, 자신을 이야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우리를 ‘마카르, 팔지 말라’라고 하는 거죠, 영구히 팔지 말라라고 하죠. ‘체미투트’라고 해요. ‘체미투트, 완성 완료’ 이게 ‘차마트’라는 단어에서 왔어요. 이게 ‘근절하다 멸망하다’ 멸망의 의미인 거예요. 그러니까 체미투트는 멸망의 완성인 거예요. 멸망해서 완성되는 거, ‘칼라’랑 같은 의미죠. 칼라, 완성하는데 멸망으로 완성되는 거, 그 십자가 죽음으로 완성되는 거예요. 그게 레 전치사가 체미투트 앞에 있어요. 그래서 '레 체미투트'예요. 그러니까 멸망의 그 완성을 위하여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가 테텔리스 타이로 십자가 죽음을 죽고 진리로 완성되는 그 일을 위하여 땅을 안 판다라고, 이스라엘을 파시지만 그거 내 거다라고 하는 거예요. 왜? 내가 다시 찾아온 주님이, 다시 찾아오시죠, 하나님이 자기를 팔아서 은 30에 팔아서 나를 다시 사주신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잠시 허락하신 그 허락 안에서 내가 나를 나에게 잠시 팔아 넘겨진 일인 거죠.
열왕기상 21장 20절 하반부
(왕상 21:20)b 내가 내 자신을 팔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우리가 우리를 파는 거예요. 스스로 파는 거고 스스로 팔린 거란 말이에요. 율법에 팔린 거란 말이야. 나의 두 마음에 넘겨지는 일이기 때문에 스스로 판단하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 노릇하고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이런 건 전부 나의 두 마음에 사로잡힌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율법의 종노릇하는 거 이걸 말하는 거예요. 그걸 하나님이 팔았다라고 하시는 거고 그게 악이다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가 인생에서 겪는 모든 환란 고난 이런 거는 전부 자기 때문에 겪는 거거든요. 나의 두 마음 때문에. 그러니까 성도는 다른 사람을 원망할 필요가 없는 누구 때문에 망하고 누구 때문에 고생했고 누구 때문에 골병 들고 누구 때문에 병들고 이런 거 없단 말이에요.
전부 나 때문이에요. 자기 때문에 자기 때문에 모든 일들이 일어나는 거에요. 하나님이 허락하셨단 말이에요. 허락하셨기 때문에 나의 탐심이 발동을 하고 그걸 하나님이 허락하셨어요. 허락하지 않았으면 나에겐 아무 일도 안 일어나요. 허락하셨기 때문에 일어나는데 그 일들이 나의 그 탐심 그 두 마음이 원인이 되어서 일어나는데 그것들이 전부 내가 나를 팔아 넘긴 일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게 나를 잘 만족시키고 그러면은 잘 산다 그래요. 나를 잘 만족시키면 종 노릇하는 거라니까요. 나를 팔아넘긴 거라니까요. 성경은 그게 '네 자신을 팔아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는 일이다'라고 하는 거죠.
그 신랑이 레위인이란 말이에요. 그 첩이 음행을 하고 가출을 했어요. 그래서 장인 집을 가서 첩을 찾아와요. 그 과정에서 첩이 벨리알에게 겁간을 당하고 죽는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거죠. 그때 레위인이 비류들에게 넘겨주잖아요, 여자를 넘겨주잖아요. 원래 원한 거는 레위인이었단 말이에요. 그를 알겠다 그를 상관하겠다라고 하는. 근데 그가 자기 대신에 첩을 내줘서 죽음에 이르게 한단 말이에요. 자기 여자를 팔아버린 거예요, 자기 신부를. 레위, 레위는 연합된 자 ‘이씨 레위’라고 해요. ‘연합된 자’ 그 신랑 남편이라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는 거라구요.
그가 유다 베들레헴에 오잖아요. 양식의 집, 양식의 성전에 주님이 오시죠. 우리 이야기하는 거예요. 베들레헴도 나예요. 내가 양식의 성전이에요. 내가 하나님 말씀을 받아서 성전이 되는 곳. 그래서 주님이 생명의 양식을 우리에게 주기 위해서 아직은 짐승이 내 안에, 그러니까 짐승의 구유로 오신단 말이에요. 그 짐승의 목욕통에 오셔서 나를 먹으라라고 하시죠. 내 살과 피를 먹으라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잖아요. 그게 생명이다라고 하시는 거죠. 전부 말씀이란 말이에요.
그렇게 오셔서 그 신랑이 신부를 찾았는데 신부가 아버지 집에서 얼마 동안 머무냐면 네 달 머물러요. 네 달이란 말이에요. 광야 40년, 성도의 세상살이. 넷을 이루는 그 기간, 성경을 이루는 그 기간. 근데 여자의 아버지는 뭐예요? 아버지는 율법이잖아요. 여자의 아버지니까 율법의 아비를 주님이 마귀라고 하시죠. 율법 이야기하는 거예요.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서 났다라고 하잖아요. 마귀, 율법이란 말이에요 전부. 진리를 알지 못한 나의 옛 사람, 마귀란 말이에요. 율법이에요. 그러니까 본질상 우리는 진노의 자식.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되는 마귀고 율법이란 말이에요. 근데 하나님이 하늘의 신랑이 우리에게 오신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그 마귀를 그 율법을 묻고 율법의 세간이었던 그의 신부를 구출해내는 거죠.
그 레위인이 5일째 떠난단 말이에요, 떠나서 여호와의 집으로 간다고. 주님이 유다 베들레에 오셔서 행음한 신부 우리를 찾아서 하나님 나라로 간 거란 말이에요. 가는 길에 날이 저물어요. 6일째, 육이 삭제되는 날, 십자가에 죽음을 죽는 날인 거란 말이에요. 여섯째 날에 첩이 비류들에게 죽는 거죠. 십자가 죽음을 죽는 거란 말에에요. 율법에 의해서 죽음을 죽는 거예요. 주님이 율법주의 이스라엘에게 죽듯이 죽는 거란 말이에요. 그 비류, 결국은 그건 우리고 우리 안의 허다한 율법이란 말이에요. 그 율법에 의해서 우리는 십자가에 죽음을 죽는 거죠.
벨리알이 '야다'하고 싶다 그랬잖아요. 진리를 깨닫고 싶다고 하는 거라고 했죠. 내가 벨리알이고 나의 율법에 의해서 내가 죽어요. 근데 나는 진리를 모르니까 진리가 그리스도고 그리스도는 씨잖아요. 씨가 없는 건 전부 여자라고 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성경에 여자라고 나오는 건 전부 성도가 아직 진리 모르는 상태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거고 진리를 모르는 내가 죽는 거에요.
(삿 19:27) 그의 주인이 일찍 일어나 집 문을 열고 떠나고자 하더니 그 여인이 집문에 엎드려져 있고 그의 두 손이 문지방에 있는 것을 보고, 라고 해요.
그 주인, 주인은 ‘아돈’이에요. 아도나이죠. 큐리오스란 말이에요. 주님이 일찍 일어나 ‘보케르, 아침’에 일어나. 보케르 빛의 아침이죠. 죽고 다시 사는 부활의 아침이란 말이에요. ‘쿰’ 십자가 진리로 우뚝 서는 거죠.
그 빛에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여자가 죽어 있어요. 그리고 여자를 12조각을 내죠. 아들이 됐다는 거예요. 세상에서 도살 당했던 일, 여자였던 내가 죽고 내가 새롭게 아들이 되더라.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 신랑이 우리를 잠시 세상에 팔아 넘기는 그런 일이 있는 거란 말이죠.
고린도후서 6장 14절부터 합독 하시겠습니다.
(고후 6:14) 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예를 함께 매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14절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예를 함께 매지 말라’ 라고 해요. 그러면서 그 다음에 ‘티스’라는 말이 어찌하여라고 번역이 돼 있는데, 여러 번 나오죠. 어찌하여가 네 번 나오죠, 티스. 어찌하여가 계속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애 를 함께 매지 말라가 중심되는 말이고 그걸 가지고 이제 수식하는 거죠. 어찌 이거 할 수 있으며 어찌 할 수 있으며 이러면서 이 말에 대한 어떤 일종의 수사 의문문인 거예요. 그걸로 처음 나온 말을 설명해 주고 있는 ‘너희는 믿지 않는 자, 아피스토스’라고 해요.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함께 ‘멍에를 매지 말라, 헤테로주게오’, '어울리지 않는 멍게 매다' 이런 뜻인데, 짝을 잘못 짓다라는 비유의 말도, 뜻도 있고요.
그리고 '매지 말라'라고 하는 말은 ‘매 기노마이’예요. 기노마이는 일어나다 생기다 이런 뜻이죠. 이게 믿지 않는 자와 멍예를 함께 매지 말라라고 했죠? 근데 와라고 번역을 하면 안 돼요. 이게 와라고 하려면 카이라는 접속사가 필요하겠죠. 또는 ‘메타, 누구누구와 함께’ 그런 전치사가 필요하겠죠. 근데 이게 그런 게 전혀 없고, 이거는 역격이에요. 아피스토스가 역격 전치사도 없고 그냥 역격이에요. 역격은 뭐뭐와가 아니라 역격, 아까도 나왔죠? 뭐뭣을 위하여 또는 뭐뭐에게 이런 뜻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게 '에게'로 보면 믿지 않는 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멍예를 메게하지 말라, 이렇게 되는 거에요. 어울리지 않는 멍예를 메게하지 말라.
그러니까 이게 지금 내용이 전혀 달라요. 너희는 불신자하고 함께 뭘 하려고 하지 마, 어울리지도 마, 그런 의미로 보이잖아요? 그 의미가 아니라 믿지 않는 자는 나란 말이에요.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멍에 매지 않게 해.
어울리지 않는 멍에, 율법, 그거 매지 않게 구원의 말씀을 주고 계신 거란 말이에요.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티스라고 했죠. 티스는 히브리어의 ‘마’에 해당되는 단어예요. 마는 ‘무엇이냐’라고 했잖아요. 티스도 마찬가지예요, 무엇이냐. 근데 이걸 어찌하여 이렇게 해석하면 안 된다 했죠. 하나님도 우리를 야단치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단지 뭔지 가르쳐주려고 하신다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마라고 나오면 그게 뭔지 알아라고 묻는 건데, 우리 번역은 전부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이렇게 야단치듯이 번역을 해놨단 말이에요. 하나님은 우리를 야단치지 않으세요. 우리가 깨닫기를 원하신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 티스도 어찌 함께하며 이게 아니라 무엇이냐라고 하는 거예요.
의와 불법이 ‘의, 디카이오쉬네’와 ‘아노미아, 불법’이 함께 한다. ‘메토케, 함께 나눔 참여 교재’라고 해요. 그게 무엇이냐 라고 하는 거예요, 무엇이냐. 그리고 ‘티스,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냐라고 하는데, 이것도 티스 하면서, ‘빛, 포스’ ‘어둠’은 ‘스코토스’죠 이것도 역시 카이도 없어요.
그리고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냐라고 하는데 빛이 ‘프로스 스코토스’ 프로스라는 전치사가 나와요. 그러니까 어둠을 향하여. ‘코이노니아, 교제’ 사귄다. ‘티스 코이노니아’ 빛이 어둠을 향하는 사귐이 무엇이냐라고 묻는 것이 서로 같이 놀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는 큰일 나는 거예요, 우리가 어둠인데. 그러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향해서 오시는 거예요. 빛은 우리를 향해서 오게 되어 있단 말이에요.
우리가 어둠이에요. 그러니까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냐, 기독교인은 불신자하고 사귀지 마, 결혼도 하지 마, 막 이제 이런 얘기도 하는데, 우리가 어둠이란 말이에요.
(요 1:5) 빛이 어둠에 비취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라고 하잖아요
우리가 어둠이에요. 그리스도께서 어둠에 빛을 비춰주시는데 우리가 그 빛을 미처 깨닫지 못한 상태, 지금 우리 이야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옛날 옛적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지금 내가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있으면 그러면 내가 빛을 깨닫지 못하는 어둠의 상태인 거예요. 빛이 어둠을 향해서 이렇게 오신단 말이에요, 비춰주신단 말이에요. 이게 '코이노니아, 사귐, 교제'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사귐, 교제. 코이노니아는 진리로 서로 나누는 것, 이게 참된 코이노니아인 거예요. 진리를 주고받는 진리의 나눔이고 교제란 말이죠.
빛에서 어둠을 향하는 사귐이 무엇이냐. 뭐겠어요? 빛과 어둠은 원래 하나잖아요, 하나였잖아요.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셨다'라고 했죠? 빛과 어둠은 원래 하나였어요. 영혼 속에서 원래 빛과 하나였던 어둠인 내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빛 없는 상태로 살아봤는데, 그 흑암의 상태가 그 진리를 모르는 상태, 하나님 모르는 상태, 하나님의 그 은혜 모르는 상태가 온통 환란이고 고난이고 슬픔이고 눈물이고, 한마디로 그게 지옥이더라. 요거 깨닫는 거란 말이에요.
그러한 우리에게 빛이요 진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와주셔야 되는 거죠. 어둠인 우리를 향해서 와주시면, 당신을 주시는 거란 말이에요. 어둠을 향해서 빛이 몸을 던지는 거란 말이에요.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는 일이잖아요. 그렇게 진리를 주시는 거, 십자가 죽음 이야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렇게 코이노니아해 주시는 거란 말이에요. 그럼 뭐겠어요? 뭐긴 뭐예요, 구원이죠. 은혜죠, 사랑이죠. 예 은혜인 거죠, 하나님의 크신 은혜.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라고 해요. 그리스도와 벨리알, 벨리알이란 말이에요.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그리스도와 벨리알, 이게 서로 물과 기름처럼 섞이면 안 된다는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쉼포네시스, 동의, 일치, 조화'라고 해요. 이거는 조화에 그리스도가 속격으로 붙어 있어요.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조화. 조화가 '프로스 벨리알', '벨리알을 향하는 게 무엇이냐' 이렇게 되는 거죠. 그리스도의 조화가 벨리알을 향하는 게 무엇이냐.
그리고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느냐'라고 하는데, 그게 서로 관계를 구분하는 게 아니라 '믿음 있는 부분이 믿지 않는 부분과 함께인 것은 무엇이냐', 직역하면 이래요. 그러니까 그리스도께서 벨리알과 함께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그와 조화하기 위해서 한목소리를 내기 위해서 벨리알들에게 빛을 주시는 거란 말이죠. 그래서 우리 안에서, 벨리알인 우리 안에서 레마의 말씀을 가르쳐주시는 거죠.
'쉼포네시스', 이게 '포네오'라는 말이 '소리 내라'는 거잖아요. '쉼'이라는 말이 '함께'라는 뜻이에요. '쉰'인데 이게 단어가 서로 붙으면서 쉼으로 바뀐 건데. 그러니까 함께 소리 내는 거, 함께 큰 소리 내는 거, 그걸 '조화'라고 하는 거예요, 함께 큰 소리. 그러니까 입맞춤과 같은 거죠. '호물로게오'와 같은 거죠. 같은 말을 하는데 함께 큰 소리로 외친다는 거, 그걸 '조화'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믿음 없는 우리에게 믿음이신 당신이 믿음을 주시는 거고, 그렇게 해서 믿음 있는 자로 벨리알을 그리스도로 만들어주신 거죠. 그래서 벨리알인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거란 말이죠.
(고후 6: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오.' '슁카타데시스'. 슁카타데시스, 이게 역시 하나로 되는 거죠. 이렇게 되면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거죠. 우리 안이 성전이란 말이에요. 내 안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거고, 하나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안이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여기서 살다가 목숨이 끊어지면 좋은 데서 다시 깨어나겠지, 이런 차원이 아니라 내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천국은 없는 거예요, 영원히. 내 안에서 반드시 천국이 이루어져야 되는 거란 말이에요. 천국을 살던 자가 천국이 되는 거고. 천국이 아니었던 자가 어떻게, 그죠? 천국이 되는 거란 말이에요.
우리는 목숨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성경에서 죽음은 목숨 이야기하는 게 전혀 아니고 항상 십자가 죽음 이야기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성도는 그것만 집중하시면 되는 거예요. 내가 십자가 죽으면 죽고 내 두 마음이 삭제가 되고 하나님의 한마음, 나를 죽여서 살리시는 그 항상 선하신 뜻, 성전 만들어 주시는 그 선하신 뜻으로 내가 모든 것들을 바라보고 있는가. 그때 그가 하나님 나라가 되는 거라니까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 그 천국이 되는 거란 말이에요. 그게 천국이에요. 그렇게 슁카타데시스, 하나로 찬성이 되고 동의가 되고 그리고 '우리 가운데', '엔'. 엔이란 말이에요. 우리 안에 거하시며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 가운데. 우리 안에 거하시며.
그리고 '두루 행하여' 이게 '엠페리파테오'인데 이것도 역시 엔이라는 전치사하고 페리 파테오라는 단어가 서로 합쳐진 거예요. 엔이란 말이에요, 안에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 안을 돌아다니시는. 두루 운행하시는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이게 하나님 나라죠. 이게 천국이죠. 그게 언약이 이루어진거죠. 그게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예요, '안, 엔'이란 말이에요. 항상 내 안에서 그 일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 나라가 이렇게 된다는 거는.
서로 교제하지 말고 사귀지 말고 가까이 하지 마, 친하게 지내지 마, 이런 얘기하는 게 아니라 믿지 않는 자와 친하게 지내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구원해 주신다는 거예요.
어둠은 나고 벨리알도 나고 행악자도 나고 사단도 나고, 다 나란 말이에요. 강도도 나고, 주님 십자가 옆에 달려 죽는 그 강도도 나란 말이에요. 내가 진리를 깨닫고 왼쪽에서 오른쪽 강도가 되는 거란 말이에요, 전부 내 이야기하는 거에요.
역대하 13장 7절 합독하시겠습니다.
(대하 13:7) 난봉꾼과 잡배가 모여 따르므로 스스로 강하게 되어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함을 대적하였으나 그때 르호보암이 어리고 마음이 연약하여 그들의 입을 능히 막지 못하였었느니라
'난봉궁과 잡배가 모여서 따랐다'. '잡배'가 '벤 벨리알'이에요. 벤 벨리알, 벨리알의 아들이죠. 그리고 이제 '난봉꾼'은 '에노시 레크'라고, 에노시 레크. '레크'가 '빈 거'예요, '텅 빈, 헛된, 가치 없는'. 이것도 가치 없는 이니까 벨리알과 의미가 상통하죠. 비었다, 텅 비었다. 혼돈과 공허다라고 하는 거죠. 우리 이야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에노시 레크, 텅 빈 인간, 헛된 인간, 혼돈과 공허인 그 인간. 그리고 '잡배, 벤 벨리알, 벨리알의 아들. 근데 서로 다른 부류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과'가 아니라 '그가 그다'라고 하는 거예요, 난봉꾼 곧 잡배. 자 번역이 적절한지 모르겠지만 에노시 레크가 벤 벨리알이다. 이게 접속사 없이 역시 나열돼 있는 거예요. 혼돈과 공허인 우리가 곧 밸리얄, 무가치의 아들이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들이 모여서 따랐다', '카바츠'. '스스로 강하게 되어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함을 대적하였으나' 이게 그에게 모였다는데, 그는 여로보암이고 북이스라엘을 나중에 세우는 거죠. 여로보암 이야기예요.
'스스로 강하게 되어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함을 대적했다'라고 해요. 르호보암, 르호보암은 라하브라는 말하고 암, 암이 백성이잖아요. 그러니까 '라하브'가 '넓다, 광대하다'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백성을 크게 하는 자라는 거예요. 장성하게 하는 자 라고 하는 거죠. 백성을 장성하게 하는 자는 누구겠어요? 백성을 크게 하는 자, 장성하게 하는 자. 하나님이고 그리스도시죠. 그 내용을 담은 이름인 거예요.
'그에게 대적했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에게 대적했다. 솔로몬의 아들, '솔로몬, 평강', 평강의 아들. 평강이란 말이죠. 그래서 스스로를 강하게 했다. '아메츠'예요. 이게 히트파형인데, 제기 용법이에요. 그래서 스스로를 강하게 했다. 그가 여로보함이라고 했죠? 이것도 역시 '암, 백성'이라는 뜻이 있고, 이게 '리브' 그러니까 '백성과 다투다'. 다투는 자라는 그런 의미가 있는 거예요.
'그때 르호보암이 어리고 마음이 연약하여' 르호보암 왕이 마음도 약하고 아직 나이도 어리고 그러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아르, 아이, 소년'이라는 의미고 마음이 연약하단 말은 '라크, 레바브' 그리고 라크는 '부드러운'이라는 뜻이에요. 온화한, 연한, 그리고 '레바브, 마음'이다라고 하고요. 그래서 그들의 '입을 능히 막지 못했다', '로하자크 파님'이라고 해요. 이게 입이란 말은 없어요. '그들의 입을 능히 막지 못했다'라고 하는 거는 파님, 여기에 레 전치사 앞에 있어요. '레 파님'이죠.
그러니까 그들의 파님을 위하여 하자크, '로 하자크'예요. 하자크는 '강하다'예요. 그래서 이제 강하지 않았다. 근데 '히트파이라'는 '스스로 강해지지 않았다'죠. 그들의 파님을 위하여 스스로 강해지지 않았다, 내버려 뒀다는 거죠. 그러니까 주님이란 말이에요. 주님이 말씀이 우리 안에 오셨는데 내가 말씀을 대적하죠. 그 양상이에요. 그 양상인데 파님을 위하여 파님을 그대로 보고 그렇게 살아보도록, 왕 노릇해 보도록, 강하게 주님이 자기를 주장하지 않았다라고 하는 그러한 의미를 담은 구절인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두 마음으로 왕 노릇하게 내버려뒀다. 곡에 팔아버렸다는 의미라고 했죠? 왕 노릇하게 내버려뒀다. 그게 팔아버렸다 의미라고 했죠? 왕 노릇하게 내버려뒀다.
(대하 34:27) 내가 이곳과 그 주민을 가리켜 말한 것을 네가 듣고 마음이 [연약하여] 하나님 앞 곧 내 앞에서 겸손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와가 말하였느니라
'내가 이곳과 이 그 주민을 가리켜 말한 것', '마콤'이란 말이에요. '이곳' 십자가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설 자리, 서는 곳, '쿰'하는 곳 십자가를 가리켜서 '그 주민' '야샤브' 거기에 거하는 자. '듣고 마음이 연약하여' 요게 '라카크'예요. 이 라크와 같은 말이에요.
'연약하여 부드러워서 하나님 곧 내 앞에서 겸손해졌다'. 이게 '카나'라고 니팔령이에요, 수동태예요. 그러니까 '낮아졌다'라는 말, '정복됐다'라는, 다시 말하면 죽었다는 거에요. 자기 부인의 십자가의 죽음 죽었다.
그래서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다.' 옷, 자기 의의 옷, 율법의 옷 찢어버리고 통곡했다, 회개했다라고 하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겸손하다라고 하는,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겸손하다는 거는 전부 뭐예요? 하나님 앞을 이야기하는, 하나님을 깨달았을 때 진리를 깨달았을 때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깨달았을 때 깨닫는 자가 부드러워지는 거고 연약한 거고 겸손한 진리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마태복음 11장 29절 합독하겠습니다.
(마 11:29-30)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주님이 겸손하다고 하시는데 이건 전부 십자가의 죽음 이야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십자가 죽음을 죽었다. 죽었으니까 너도 내 멍에 메고 내 십자가 메고 '아이로' 십자가 들고 따르라고 할 때 아이로, 그 멍에 들고 따라와서 내게 배우라라고 하는 거예요. 이게 '멍에'가 '쥐고스'인데 쥐고스가 '쥬그뉘미'에서 왔어요, 쥬그뉘미. 쥬그뉘미 이게 '결합하다'는 뜻이에요. '함께 멍에를 메고'. 그러니까 나의 멍에, 십자가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나 되는 십자가를 아이로, 들고. 그 진리를 배워라라고 하는 거고요.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아나파우시스, 안식'하는 거죠. 안식 얻는 것이 뭐예요? 십자가 죽음 죽은 거, 일곱째 날이잖아요. 십자가 죽음을 죽으면 안식으로 들어가는 거죠. 그러니까 안식은 십자가 죽음 죽을 때 진리가 뭔지를 깨닫고 나의 두 마음을 삭제 할 때 그때 얻어지는 거죠. 그게 하나님 나라예요.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얻어지는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성경은 계속 그 얘기하는 거예요. 율법과 진리 이야기하는 거고 전부 내 안에서 그 율법이 뭔지를 깨닫고 그 상태를 겪어 보고 진리를 바르게 알고 하나님 나라로 지어지는 이야기, 거기에서 그리스도의 은혜 바르게 깨달으라라고 하는 거예요. 이사야서 53장 2절 합도록 하겠습니다.
(사 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 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은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곳이 없도다
이 구절을 보면 흔히 주님은 어릴 때 요렇게 자라나셨어, 그렇게 잘생긴 외모는 아니었던 것 같아, 이러면서 해석을 하기도 하는데.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라고 하는데, 이게 '주 앞에서' 이거는 '레 파님'이에요, 그의 파임을 위하여.
'요네크' 이게 '연한 순'이라고 했는데. 요네크예요 이게. 어린 나무를 이야기하는 나무란 말이에요. 나무는 십자가예요. 어린 나무처럼이라는 거는 그 나무 그 십자가에 어린아이처럼 순종했다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라났다가 아니라, 알라. 여기 성장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알라, 올라갔다. 올라, 번제로 올라갔다라고 하는 거. 번제물이 되시려고 십자가 죽음을 죽으러 십자가에 올라갔다. 그러니까 주님은 어릴 때 이렇게 자라났대 하는 성장사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전부 십자가 이야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십자가 진리,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그 은혜를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라고 해요. '마른 땅, 치야'라고요. 건조, 가뭄, 마른 땅, 광야잖아요, 광야. 물이 없는, 진리의 말씀이 없는. 우리의 근본이 되어 주신다라고 하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 안에서 그분이 나와주시는 거죠. 마른 땅, 우리 안에서 나오는 그 근본. 하나님 나라의 근본이 되어 주신다라는 거죠.
오늘 본문에서
(나 1:11) 여호와께 악을 꾀하는 한 사람이 [너희 중에서 나와서] 사악한 것을 권하는도다
'너희 중에서 나와서'. 우리 중에서 나와. 사단의 일 같지만 겉으로 보면. 오늘 본문이 여호와께 악을 꾀하는 한 사람이 너희 중에서 나와서 사악한 것을 권한다라고 하죠. 너희 중, 너희는 너희가 아니라 너라고 했어요. 내 안에서 나오는 거란 말이에요. 메마른 땅이 내 안에서, 주님이 나오는 거란 말이에요.
악을 꾀하는 게 아니라 악을 생각하게 하는, 율법을 생각하게 하는. 주님이 우리 안에서 나와서 벨리얄을 알게 한다라고 하는 거에요. '사악한 것' 나쁜 짓을 하게 하는 그런 일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그가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다'라고 해요. '로 토아르, 좋은 모양이 없고' 그리고 '풍채, 하다르' 장식 광채 위엄, 이런 것이 없고. 그리고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라고 해요. 이게 흠모할 만한 거는 '하마드'라고 해요. '몹시 바라는 것, 탐내는 거' 이게 창세기 3장 6절에서
(창 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 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다'. '탐스럽기도 하다'가 '하마드'란 말이에요. 몹시 바라는 거 그런 게 없다라고 하는 거죠. 그러니까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이시죠.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탐심을 채워주는 말씀이 전혀 아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전부 주님이 어떻게 자라 오셨다라는 걸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전부 우리의 구원을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벨리야알이었단 말이에요. 날마다 간음하고 살인을 했잖아요. 율법의 행위를 했단 말이에요. 내가 사랑하지 못하면 그게 살인이라고 했어요. 그거는 뭐냐면 진리로 깨닫지 못하는 게 형제 살인, 말씀을 죽이는 거예요. 주님을 십자가에 매다는 일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살인이에요. 우리는 날마다 살인하고 있는 거예요. 두 마음으로 판단하고 그리고 그걸로 희로애락 감정으로 가는 거니까. 그게 주님을, 말씀으로 오신 주님을 살인하는 일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날마다 간음하고 살인하는 비류, 벨리야알이란 말이에요. 근데 그러한 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하나로 연합하자, 한목소리로 조화를 이루자고 스스로 벨리알이 먼저 되신 거에요.
율법이 되셔서, 율법이 되셨잖아요. 말씀이 육신되어 오셨어요. 육신이 됐다는 게 악이란 말이에요. 보이는 모든 건 하늘의 손을 가르쳐주는 재료란 말이에요. 진리가 아닌 건 전부 거짓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 그것만이 선인 거고 하나님만 선하시다고 하잖아요. 하나님만 선이고 전부 보이는 모든 것들을 악이라고 하는 거예요.
악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선을 가르쳐주는 재료란 말이에요.
거짓도 마찬가지. 진리를 가르쳐주는 재료로서 모든 보이는 것들을 보이는 거에 머물면 그걸 악이라고 하는 거고, 거기에서 그 하나님 나라를 깨닫게 해 주시기 위해서 주님이 먼저 벨리야알이 되셔서, 그리고 나를 향해서 다가와 주셔서 나와 하나가 되어 주시고, 조화를 이루어 주시고, 일치를 이루어 주시고, 그래서 내가 받아야 할 하나님의 심판을 먼저 받으시고, 그리고 함께 죽으시고, 함께 부활해 주시는 거란 말이에요.
그런 다음에 그렇게 부활해 주시고 그 부활의 아침으로 동행해 주시는 거죠. 그래서 그 열둘의 아들을 만들어주시는 그 이야기를 성경은 하고 있단 말이죠. 성도는 그 은혜를 깨닫고 그 은혜 찬송하는 복된 자인 거예요. 이 명절에 그 복 많이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두 마음의 탐심으로 사는 게 우리는 너무나 익숙한데 그러한 벨리야알인데 우리 그 벨리야알들에게 하나님을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을 주시고 그 고운 모양, 그 풍채도 없는 그 십자가 진리를 기쁨으로 즐거움으로 배우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 진리 잘 깨닫고 잘 죽어서 열두 토막 나는, 그래서 아들 되는 부활의 새 아침 맞이 하는 자 될 수 있도록 하나님 은혜를 더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