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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두만강 북중 접경지역 탐사
‘두만강 노래비’는 어디로 갔을까?
폭파 직전 가까스로 보존, 중국 정부 동북공정 중단
중국 훈춘에서 두만강 건너편으로 북한 땅이 보인다.
두만강 인근에 자리잡은 길림성 연길·도문·훈춘시 등에는 우리 역사와 인물이 관계된 역사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이번 취재기간 동안에는 〈눈물 젖은 두만강〉 노래비, 안중근 숙박지, 발해 비우성 등 그동안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역사 유적에 담긴 사연들을 만날 수 있었다. 본지 취재진과 동행한 역사학자 전갑생 선생이 1주일간의 여정 중 만난 역사 유적에 대해 상세하게 소개한다. 전 박사는 이번이 첫 번째 중국 방문이었다. - 편집자 주-
지난 (2010년)5월 25일 오후 점심식사를 위해 연길 성보백화점 정영채 회장의 집을 방문했다. 정원을 산책하던 중 필자는 정원 가운데 서 있는 커다란 대리석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옆에 있는 《길림신문》 오기활 부장께 질문을 던졌다.
“이 노래비가 여기에 있네요!”
“아! 가수 김정구 씨가 부른 〈눈물 젓은 두만강〉 노래비지요.”
“이 노래비가 어떻게 여기에 있습니까?”
“원래 용정시 송정리에 있던 것이지요. 1990년대 초 시 정부에서 폭파시키겠다고 해서 정영채 성보 회장님이 정부관계자와 협상해서 자택으로 옮겨 놓은 겁니다.”
폭파될 운명에서 건진 노래비
2000년 도문시 두만강 강가에는 〈눈물 젖은 두만강〉 노래비가 다시 세워졌다. 그러나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중국 당국에서는 한국 관련 비석에 부담을 갖고 있었던 모양이다.
정영채 회장은 “당시 시의 관계자들은 밖에 공개하지 않고 집안에만 두는 조건으로 노래비를 내가 가져가도록 허가했다”라고 말했다.
정 회장은 노래비를 옮겨오면서 “조선인이 항일의식을 담아 지은 노래요 함부로 훼손될 수 없는 것이며, 조선민중들이 소중하게 간직해야 할 유산이라고 생각하여 다른 곳에 둘 수도 없다고 하여 임시로 내 집에 옮겨 놓았다”고 설명했다. 정 회장은 연변 지역의 조선족들이 성금으로 모아 세운 노래비를 중국 정부에서 폭파시킨다는 말을 듣고 당장이라도 옮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오기활 부장은 “정 회장의 도움이 아니면 조선족의 역사적인 기념비를 한순간에 잃어버릴 뻔했다”고 덧붙였다. 이 노래비를 보고자 한국에서 가수 주현미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찾아와서 구경했다고 한다.
이시우의 고향 거제에서
“두만강 푸른 물에/ 노젓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 떠나던 그 배는 어디로 갔소/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
구성진 노랫말의 〈눈물 젖은 두만강〉은 암울한 식민지 조선에서 희망과 애환을 담고 지금도 국민애창곡으로 불리고 있다. 이 노래를 부른 가수는 잘 알려져 있다. 김용호 작사가의 동생인 김정구다. 그런데 작곡가 이시우에 대해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원래 작곡가보다 가수가 더 국민들에게 알려지기 마련이라 그럴 것이다.
필자가 고국에서 떠나 먼 연길에서 〈눈물 젓은 두만강〉 노래비를 보고 반가운 것은 또 다른 이유에서다. 동향인 작곡가 이시우 때문이다. 이시우(李時雨·1913∼1975, 본명 李萬斗)는 경남 거제시 거제면 남동리 45번지에서 이경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최근 거제시는 이시우의 노래비를 세우겠다고 계획하고 있다. 그런데 이 곳에 이미 노래비가 보존돼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거제시민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지 흥미로운 대목이다.
이시우는 “유년 시절부터 창가(唱歌, 지금의 음악)에 소질을 있다”고 1928년 거제초등학교(19회) 학적부에 기록되어 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시우는 경남 창원군 국산리 부근으로 이사했다. 그는 만주 하얼빈상업학교(1932∼1936)와 만주국립대학(1936∼1941)을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하여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전문부에서 법률을 전공했다. 다시 만주로 돌아온 그는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하얼빈지국(1941년), 《조선상공신문》 하얼빈지국(1941∼1945)에 근무하다가 1945년 해방을 맞아 귀국했다.
그는 일제의 괴뢰국 만주국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고 일본 유학 후 친일신문 지국장까지 지낸 특이한 경력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해방 후 이시우는 내무부장관 촉탁(1948), 대한반공인천시연맹 특무국장(1949), 부산시비상사태대책위원회 선전부차장(1950), 치안국 지전사 주임, 경기도 부평 형사주임(1954), 1958년 특채로 경상남도 동부산 경사근무를 거쳐 전남 함평 주임을 끝으로 퇴직했다. 공무원에서 퇴직한 그는 대한건설공사 대표, 국제산업여신주식회사 조사국장, 국제레코드제작사 부사장(1957)을 지내기도 했다. 이러한 화려한 경력은 작곡가라는 삶과는 또 다른 길이었다.
노래의 배경에 얽힌 사연
북의 월간 대중잡지 《천리마》는 2005년 5월호에서 〈눈물 젖은 두만강〉의 창작 동기와 과정 등을 상세히 소개한 바 있다. 북은 이 노래를 ‘계몽기 가요(일제 강점기에 나온 노래)’ 중 대표곡으로 꼽고 있다.
이 노래의 창작과정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한다. 원래 창작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이 노래는 1930년대 중엽 중국 동북지방을 순회공연 중이던 극단 ‘예원좌’의 작곡가 이시우가 길림성 토문(土門·중국에선 도문)의 한 여관에 머물 때 만든 작품이다.
먼저 북 잡지에 소개된 노래 창작배경을 살펴보자. 1935년 어느 날 여관 뒷마당에 서 있는 단풍나무 두 그루를 보며 고향 생각에 잠겨 있는데 여관집 주인이 그 나무는 자신이 두만강을 건너올 때 고향에서 떠가지고 와 1919년에 심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이시우가 ‘추억’이라는 주제로 곡을 구상하며 잠을 못 이루던 그날 밤 옆방에서 비통하고 처절한 여인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다음날 사연을 알아보니 그 여인의 남편과 여관집 주인은 친구 사이인데 독립군 활동을 하던 남편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총살되었으며 그날이 바로 죽은 남편의 생일날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두만강 가에 나간 이시우의 눈에는 두만강의 물결이 나라 잃고 헤매는 우리 민족의 피눈물처럼 보였고 그곳에서 만난 문학청년 한명천에게 사연을 이야기 해주자 그가 즉흥적으로 가사를 썼고 이시우가 곡을 붙였다고 한다.
한편 1973년 3월 6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연예수첩 반세기 가요계’(23)김정구와 ‘두만강’〉이라는 기사에서 이시우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여인의 남편은 독립투사였죠. 일경에 쫓기던 남편은 각지를 떠돌아다니면서 가족에겐 물론 연락조차 없었죠. 남편은 이미 일본관헌에 체포돼 어디론가 끌려갔다는 겁니다. 전날 밤의 흐느낌은 그러니까 혁명가의 아내만이 가진 단양의 슬픔이죠. 눈시울이 뜨끈하더군요. OK문예부에 있던 김용호에게 작사를 시키고 제목은 내가 붙여 예원좌에 있던 무대가수 장월화를 시켜 막간무대에서 부르게 했지요.”
처음 노래를 부른 장월화(장월성)의 증언은 좀더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작곡가 이시우의 말에 따르면 그 여인은 독립투사 문창학의 부인인 김증손녀(당시 30세)로 국내에서 항일투쟁을 하다 만주로 도피해온 남편을 찾아 중국에 건너 왔다. 자신의 남편이 훈춘에서 독립운동을 벌리다 체포(1921년 12월)되어 압송된 후 이미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1923년 12월 20일) 됐다는 정보를 접하게 된 것. 나라를 잃은 슬픔에다 남편이 이미 사형을 당했다는 소리를 들은 그 여인은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얘기다.
작사자는 누구인가?
창작과정에 여러 다른 설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노래의 작사자를 둘러싸고도 논란이 있다. 이시우는 순회공연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김용호 시인에게 부탁해 노래가사를 다듬고 선율을 완성해 김정구의 노래로 OK레코드사를 통해 취입하게 됐다고 알려져 있다. 레코드에는 작사자가 김용호로 올라 있다. 하지만 북의 《천리마》에 따르면 이 노래가 한명천 원작, 김용호 개작, 이시우 작곡이 정확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노랫말의 지은이는 가수 김정구의 친형 김용환(金龍煥)이란 주장도 있다.
북에서 작사자라고 주장하는 한명천은 해방 직후 북 정권 초기에 활동한 시인으로 그의 대표작 ‘북간도’는 북에서 아직도 조기천의 〈백두산〉과 함께 문학사에서 ‘2대 서사시’로 평가받고 있다.
또 다른 작사자로 거론되는 김용호는 마산출신으로 1941년 메이지대학 졸업 후 선만(鮮滿)경제통신사 기자로 재직했고, 해방 후 좌익문학단체에서 활동하다가 전향하여 시인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여러 정황과 내용들을 종합해 보면, 〈눈물 젖은 두만강〉은 한명천 원작으로 김용호가 개작했고, 김용환가 재차 개작해 이시우가 곡을 붙인 노래다. 따라서 한명천이 가사의 첫 번째 줄, 김용호 가사 2∼3번째 줄을 작사했고, 김용환이 이를 다시 개작하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이 유명한 노래가 창작되기까지 여러 사람들의 손을 거쳤다는 사실과 작곡가의 화려한 경력을 보면 이 노래 하나에 우리의 현대사가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발해, 당나라 발해국으로 둔갑
5월 26일 취재진은 백두산으로 향했다. 연길시에서 옥수수밭으로 펼쳐진 용정, 화룡시를 거쳐 송강진 청두촌을 따라 달렸다. 백두산 관람 입구에서 버스와 소형 차량을 번갈아 타고 백두산 천문봉에 올랐으나 눈보라가 너무 거세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었다. 3대가 덕을 쌓아야 맑은 천지를 볼 수 있다는데, 아직 그 정도의 덕을 쌓지 못한 모양이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다시 백두산을 출발해 돈화시, 안도현 명월구, 도문시를 거쳐 장장 6시간을 달려 훈춘시에 도착했다. 다음날 이른 아침 취재진은 훈춘시 삼가자향 고성촌에 잠시 들러 고구려와 발해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고성촌에선 동북쪽으로 10km면 훈춘 시내이고, 서북쪽으로 1km 지점은 두만강이며, 북쪽으로 5km는 팔련성이다. 비우성은 서남쪽으로 성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온특혁부성과 서로 이어졌다. 비우성의 남쪽성벽은 온특혁부성의 북쪽 성벽이다. 때문에 이 두 성을 자매성이라고 부른다.
비우성(斐優城)의 표지석에는 ‘당나라 발해국’이라며 당나라 안의 발해국에 의해 축성된 성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비우성은 고구려에서 발해국으로 이어지는 우리의 땅이다. 원래 송화강 또는 백두산 출신 말갈족 걸사비우가 세운 성으로 고려별종 속말갈의 대조영과 함께 발해국을 건국했다.
중국은 발해국을 당나라의 지방정권으로 중국 역사의 일부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1979년 중국과 소수민족의 관계를 중앙과 지방으로 규정하고, 이를 소수민족이 건립한 지방정권으로 인식하는 ‘통일된 다민족국가론’에 근거하고 있다. 하지만 그 논리적인 근거가 부족하다.
실제 비우성과 온특혁부성, 육정산고분군(연길의 최대 고분군·고구려) 등을 보면 고구려 후기의 문화를 그대로 이어가고 있어 큰 차별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비우성의 발굴조사에 따르면 대량의 고구려식 기와, 소수의 발해식 기와 및 요·금시기의 유물 등이 출토됐다.
현재 비우성에는 흙으로 높게 쌓은 성벽이 뚜렷하게 보이고 있으며, 성안의 동쪽은 농가들이 들어앉았고 서쪽은 밭으로 만들어져 있다. 비우성의 서남쪽에 고구려와 발해시기의 옛성온특혁부성(溫特赫部城)은 고구려의 책성(柵城) 자리에 새로 쌓은 성이다. 책성은 고구려가 북옥저지역을 점령하고 그 지역의 동북쪽에 설치한 지방행정조직이며 북옥저지역을 다스리는 통치의 중심이었다. 온특혁부성은 둘레의 길이가 2269미터로서 성벽은 흙을 다져 쌓았다.
온특혁부성에서 팔련성까지 거리는 5km이다. 팔련성은 발해가 훈춘벌에 동경 룡원부를 세우고 수도를 잡았던 곳이다. 팔련성 자리는 이미 전부다 논밭이 되었다. 현재 이곳은 중국 정부에서 대규모 발굴 중이라 일반인은 출입금지다.
중국, 고조선·고구려를 조선의 역사로 인정
최근 중국은 고조선, 고구려를 중국 역사에 편입시키는 동북공정 작업을 중단했다고 한다. 중국 공산당 서열 5위인 이장춘 상무위원이 직접 지시를 했다고 한다. 중국 한 역사학자의 전달해 준 이장춘 상무위원의 발언요지다.
“주변국가의 선린우호관계가 중요한 시점에서 과거 역사를 둘러싸고 논쟁을 벌이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 고조선과 고구려는 조선의 독자적인 역사로 인정되어야 한다. 다만 발해는 중국 변방민족의 역사로 중국 역사에 편입하는 것이 맞다.”
이러한 지시가 있은 후 새로 출간된 중국의 역사부도에서는 고조선과 고구려를 조선의 역사로 명기했다고 한다. 그러나 여전히 발해를 둘러싸고는 중국과 남북 역사학계가 대립하고 있어 한동안 논란이 지속될 전망이다. 비우성 표지석에 ‘당나라 발해국’이라고 쓰여 있는 것은 발해를 둘러싼 역사논쟁이 여전히 진행형이라는 사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앞으로 우리 역사학계와 고고학계가 만주와 연길, 길림지역까지 확대해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이다.
안중근이 다녀갔다는 초가집.
혼춘(琿春) 취안허(圈河村)의 안중근 유적지 진실은?
아침부터 뜨거운 햇빛을 뒤로하고 취재진은 5월 27일 훈춘시의 백미를 보고자 출발했다. 3국의 국경지대인 방천으로 가는 길이다. 훈춘 시내에서 약 20분 정도 달리자 경신진 권하에 도착했다. 차가 잠시 옆길로 빠져 작은 동네에 들어섰다.
‘벌써 다 왔나’ 하는 순간, 동행한 훈춘 출신의 한 관계자가 “안중근 유적지가 이곳에 있다”며 잠시 들리기를 청했다.
큰길에서 조금 걸어 올라가자 안중근이 머물었다는 초가집(주소 琿春市 敬信鎭 圈河村 02組 018)이 나왔다. 마을 노인회 분들이 초가지붕을 손보고 있었다. 경주 김씨라고 밝힌 74세의 노인회 회원은 “안중근이 머물었던 초가집은 약 100년쯤 되었고, 집 주인이 안중근과 같은 안씨”라며 “이 집의 아들 3명은 공산당 활동으로 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그 노인은 “권하 노인회에서 이 집을 관리하고 있는데, 약 7∼8년 전 ‘안중근 유적지’ 라는 기념비를 건립한 후 한국에서 관광객들이 다녀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권하의 안중근 유적지로 알려진 이 초가집은 약 5년 전에 처음 알려졌다. 지난 2005년 7월 《흑룡강신문》은 “안중근 의사가 일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하기 1년 전인 1908년 중국 연변(延邊) 조선족자치주 훈춘(琿春)에서 항일투쟁을 벌였던 유적이 발굴됐다”라고 보도했다.
당시 연변대 동북아경제문화연구소 최용린 소장은 이 신문과 인터뷰에서 “안 의사는 1908년 4∼6월 훈춘시 경신진 권하촌 한 농가에 머물면서 독립운동을 벌였고, 현재 이곳에 안 의사 초상화와 관련 사진이 보관돼 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보도에 대해 안중근의사 추모사업단체 관계자는 "일단 안 의사 유적이라는 주장이 제기된 만큼 전문가들의 철저한 검증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럼 아직 검증되지 않은 곳에 유적지가 생겨났다는 말인가? 처음 이 유적지가 알려진 후 《경향신문》(2005년 8월 16·21일자)은 〈‘안중근 유적’ 성역화 진실〉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이 보도에 따르면, 하얼빈의 조선족 서명훈(75)은 “안 의사는 단신으로 연해주로 갔고 훈춘을 들렀을 때도 물론 혼자서 다녔다”고 밝히고, 다만 안 의사가 의거를 앞두고 진남포에 있던 가족들을 보고 싶어한다는 소식을 인편에 전해들은 김 여사가 아들들을 데리고 하얼빈에 도착했을 때가 1909년 10월 27일로 의거 바로 다음날이었다고 증언했다. 김 여사는 안 의사를 만나보지도 못한 채 연해주로 피신했다는 설명이다. 독립운동사에 관심이 많은 베이징의 조선족 신금순(65)은 안 의사가 의거 후 여순(旅順)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모친 조마리아 여사가 훈춘 금당(金塘)촌에 있던 자신의 증조부집을 찾아왔다는 증언을 전했다. 아들인 안 의사가 지난 길을 몸소 더듬어 찾아오는 길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증언을 통해 볼 때 안중근 유적지로 주장되는 권하의 초가집에서 안 의사가 가족을 데리고 훈춘의 농가에서 생활했다는 얘기는 설득력을 얻기 힘들어 보인다. 다만 지붕을 수리하던 한 노인들은 “안 의사가 하얼빈으로 가기 전 이 집에서 하루를 묵었다”라고 말해 안 의사가 이 집에 잠시 거처했을 가능성은 남아 있는 듯하다.
현재 훈춘시는 안중근의 ‘비밀 아지트’ 일대를 성역화해 박물관과 공원을 세우겠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으나 실제론 진행되지 않고 있다.
한국의 자방자치단체나 훈춘시는 닮은꼴이라고 해야 할까. 지방자치제 실시 이후 일부 지방정부는 ‘없는 사실도 만들어’ 관광객들을 유치하는데 골몰하고 있다. 1회성 사업에 시민의 혈세는 마구 들어가고 있고 흥행도 되지 않고 있다. 훈춘시도 제대로 된 고증도 없이 관광지를 만들려고 하다가 중단될 위기를 맞고 있는 셈이다.
국내 언론을 통해 알려진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은 ‘우리 정부는 무엇하고 있느냐!’ 혹은 ‘하루 빨리 중국정부와 협의해 성역화 사업을 벌여야 한다!’고 개탄하고 있다. 하지만 먼저 역사 고증을 철저히 한 뒤 이루어져야 할 작업들이다.
3국 국경 그리고 ‘천안함’과 전쟁
권하촌을 지나 왼쪽으로 중국러시아 국경선을 따라 한참을 달리자 마침내 방천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려 방천 ‘국가급풍경명승구(國家級風景名勝區, 우리의 국립공원) 전망대에 올랐다. 왼쪽으로 러시아 핫산, 오른쪽으로 북 온성군이 동시에 펼쳐진다.
전망대 위에서 보니, 삼국의 땅이 한 눈에 들어오고 끝자락에 동해도 보인다. 녹색 철제선 넘어 핫산의 마을과 철도가 보인다. 그 철길을 따라 두만강을 넘어 북으로 들어가고 있다. 멀리 온성군 두루봉리 넘어 월파산(659m)과 삿갓봉(740m)이 보이고 황마역과 그 위로 판교 마을도 보인다. 그리고 강 주변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소 무리와 너무나 익숙한 마을 풍경도 보인다. 바로 북쪽 땅이다.
대다수 조선족들은 천안함 사건을 크게 염려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남과 북 사이에서 무역을 하는 사람들은 하루 하루가 가시밭길이라고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훈춘시는 북과 러시아를 연결하는 무역 도시를 꿈꾸고 있다. 훈춘 곳곳에서는 장춘에서 훈춘에 이르는 고속도로 공사가 한창 마무리 중이었다. 훈춘시는 이 도로가 북쪽의 라진시까지 이어지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천안함 사건을 이용하여 전쟁론과 냉전시대로 회귀하자는 구호에 파묻혀 미래를 보지 못하고 있다.
21세기에 삼국은 서로의 이해관계를 따져보면서 경제발전을 도모하고자 애쓰고 있는데, 남쪽 정부는 퇴색한 냉전의 유물을 껴안고 골몰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 이글은 <<민족21>>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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