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가의 차 (2) 2007/9/10 차인
종가의 모든 제사에 술 대신 차가 오르다
나주 나씨 송도공파 나천정 종가
직접 재배한 찻잎으로 종부가 정성껏 우려 종손과종부가
함께 조상에게 올린 차. 차와 다식, 과일과 적, 송편 등이 전부인
소박한 순수한 차례상 이기에 그 예와 정신은 더욱 올곧게 빛났다.
글/ 이연자 . 한배달우리차문화원장
“올 추석부터는 술 아닌 차로써 차례를 모시기로 결심하고 이룰 실천할 것.”
한국차인연합회 박권흠 회장은 명절 차례뿐 아니라 기제사에도
술 아닌 차가 의례물로 당당히 주인공이 될 것임을 덧붙이며
모든 차인들에게 “차로써 차례 모시기” 실행을 당부했다 (2006.9/10 차인)
우리민족이 차로써 추석 차례를 모신 기록은 선연하다
<<삼국유사>.를 펼쳐보면 가락국 수로왕 제사에 차를 올렸음을 확인할 수 있다.
661년 이니 1400여 년 전의일이다.
그 기록 이후에도 <<조선왕조실록>>에는 ’차례’라는 말이 수백 번 나온다.
다만 일제 암흑기와 근대사의 불행으로
차로서 차례 모시기는 잠시 그 맥이 끊어진 듯했다.
하지만 차 마시는 인구가 500만은 추산될 것이라는 이즈음,
공인된 단체 회장의 ‘차례 모시기’발언은 멀리까지 그메아리가 펴져나갈 것으로 보인다.
차례 상에 술 대신 녹차를 올리는 종가가 있다기에 찾아 봤다.
게다가 시중에서 구입한 차가아니라 스스로 야생차밭을 일궈
무쇠솥에서 직접 만든 차로 올린다는 것이다.
바로 전남 광양시 칠성읍 칠성리 나주나씨 송도공파 나천정(1649~1713)선생의 종가다.
3아들 7손자가 진사를 해 나주에서는 알아주는 집안의 12대 종손
나상면(58세 보광한의원장)씨와 종부 김영순(56세)씨는 주말이면 종가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산속 야생차밭으로 달려가 차나무 돌보는 일을 낙으로 여긴다.
종손은 농약 대신 풀을 뽑고, 종부는 찻잎을 다서 정성껏 만든 차를
추석 차례는 물론 종가에서 모시는 모든 제사에 술 대신 쓰고 있었다.
의례물로써 차뿐 아니라 찻잎으로 만든 송편과 찻잎전 등
차 음식 일색으로 차례상을 차렸다.
지금까지 월간<,쿠켄>>에 96집의종가 글을 쓰고 있지만
이러한 종가는 처음이어서 귀가 활짝 열리고, 가슴이 뒤는 취재였다.
‘차례’ 의 전통을 되살리는 종가
전남 광양시 칠성읍 칠성리에 있는 ‘보광 한의읜’이 바로 그 종가였다.
종손이 태어나고 조상의 손때 묻은 옛집이 아직도 나주에 남아 있긴 하지만,
고대광실 고택이 아닐 뿐 더라 종손의 생업이 이곳에 있으니 옛집을 지키지는 못한다.
가금 가서 집을 관리할 뿐 지금은 비워둔 상태라 했다.
한의원에서 만난 종손 나상면 씨는 육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피부가 맑고 그늘이 없다.
차를 물처럼 마시고, 아픈 환자를ㄹ 돌보는 순수한 마음 때문일 것이다.
따듯하고 친절했으며 언어 구사력이 대단히 문학적이어서 내공이 범상치 않아 보였다.
고택이 아니니 취재는 차밭이 좋을 거라며 우리 일행을 차밭으로 안내했다.
종가에서 40여분 거리에 있는 차밭으로 가는 길은
보성군 벌교읍에서 율어면으로 가는 옛길이다.
차밭이 있는 존제산 740m 산속 하늘고개를 올라는 길은 비포장 비탈길이라
일반 승용차는 어림도 없다. 사륜구동 차라야 겨우 오를 수 있는 산중에
새의 날갯짓 같은 모습으로 얹혀 진 집 한 채가 눈길을 끈다.
종손이 주말이면 기거하는 별서다.
하늘 고개라는 지명답게 땅보다 하늘이 더 많이 보이는 이곳에서
종손은 부처님과 조상의 신주를 모시면서 차를 만들고 있었다.
집 옆으로는 맑은 개울물이 흐르고 울창한 자연림 사이에
차나무는 푸른 잎사귀를 자랑하며 건강하게 자라고 있었다.
30연 년 전에 차시를 뿌려놓고 관리를 하지 않은 채 방치된 차밭을
종손이 인수해 지난 2001년부터 연인원 500여 명을 동원해 사람이 드나들며
찻잎을 딸 수 있도록 1만평 정도 길을 텄다.
지금도 찻잎을 따려면 장화를 신고 들어가야 한다.
습기를 좋아하는 차나무 생리 대문에 뱀이 많다.
공해가 없고 비료나 농약을 주지 않았으니 뱀뿐 아니라 벌레들의 천국이다.
야생차가 우리 몸에 이로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약으로 벌레를 퇴치하는 것이 아니라
풀벌레들과 싸워 이겨내는 강인한 힘이 응축돼 있는 찻잎이기 때문이다.
기계로 찻잎을 따고 기계로 만들어내는 대단위 신식 다원과는 상황이 다른
산중다원의 문제점은 찻잎을 딸 인부 구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산세를 잘 아는 마을 분들에게 부탁해야 하므로
그 분들이 요구하는 인건비는 예사롭지 않았다.
찻잎이 활짝 피기 전 곡우 전후에 찻잎을 따야 맛있는 차를 만들 수 있는데
이때의 인건비가 찻값보다 훨씬 높다.
어렵사리 사람을 동원해 차를 따서 만들어보았지만 경험 부족으로
실패를 거듭한 끝에 2008년에야 겨우 첫 녹차 수확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초의선사가 펴낸<,다신전>. 조다법 대로 한 치의 오차 없이 차를 만들었다.
부처님 고르듯 센 잎과 억센 줄기 부스러기를 골라내고,
지름 80cm솥에 생잎 900g을 넣고 덖어 익혀서 손으로 비빈 다음
다시 솥에 넣어 말리는 덖음 녹차를 만들었다.
그렇게 많은 투자와 공력을 들여서 만든 차를 가지고 그해부터
종가에서 지내는 모든 제례에 차를 올렸다.
반드시 청정한 차를 제례에 올려야 한다는 것은 집안에 전해오는
제사 순서인 홀기에 나타난 ‘국을 내리고 차를 올린다“는 기록 때문이다.
그리고 그뿐 아니라 부처님 앞에 차를 올리듯 조상님께도 차를 올리고 싶어서였다.
유와 불이 함께하는 종가의 사당
나무와 흙으로 지어진 세 칸짜리별서 툇마루 이마에는
‘천치원’이란 당호가 편액으로 걸려 있다.
하늘天(천) 자는 중시조 할아버지의 이름자 ‘천정’에서 따왔고,
그 이후 손이 사는 집이란 뜻을 담았다.
고갯마루 峙(치) 자는 천치라는 이곳 지명에서 옮겨온 글이다.
3개의 방으로 꾸며진 별서 외쪽 방 벽장을 열면
종손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유와 불이 함께 있었다.
“제가 불가에 마음을 빼앗긴 것은 14살 대였습니다.중학교 1학년 때 사회선생님께서
4대 성인(석가 . 예수 .소크라테스 . 공자)에 대해 설명해 주셨어요.
사람은 누구나 종교를 가져야 하며 이들 중에서 선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때부터 어떤 성인을 섬겨야 할지 심각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다소사’ 하는 절에 소풍을 가게 됐습니다.
그런데 울긋불긋 단층 칠한 대웅전 건물이 ‘상여’처럼 느껴져서
무서운 마음에 가까이 갈 수 없었어요, 저 혼자 절 마당에서 서성이고 있는데,
노스님 한 분이 유심히 보더니 저를 껴안고 자기 방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함께 절에서 살지 않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분은 우화스님으로 이미 돌아가셨지만 전라도 지역에서는
지금도 도인 스님으로 추앙받는 분입니다.
그 스님께서는 평범할 수 없는 제 운명을 보셨던 것 같습니다.
처음 들어간 노스님 방인데 어린 마음에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어요,
아! 이곳이 바로 내가 살 곳이구나 하는 생각이 강렬해서
어떻게 수습할 수가 없었답니다.“
종손은 그날 이후부터 공부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루는 결심을 하고 도시락과 책가방을 학교에 그대로 둔 채
혼자서 다보사를 찾아서 절집에 눌러앉아 버렸다.
부엌에서 아궁이에 불을 때거나 물을 길러오는 잔심부름도 즐거웠다.
불경 공부는 학교 공부보다 재미있었다.
종손이 절집 생활에 제법 익숙해질 무렵 어는 날
절 마당에서 어머니의 통곡 소리가 났다.
한 달 동안 행방불명이 된 맏아들을 찾아 전단까지 만들어 헤맸던 것이다.
어머니의 애끓는 울음소리에 마음이 약해진 종손은 집으로 돌아오지만 생각은
절집에 가 있었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또 다시 가출을 해 절에 숨었지만
그때마다 어머니는 그냥 두지 않았다.
불심을 간직한 종손, 그를 닮은 종부
그렇게 절과 집을 왔다 갔다 하면서 평생의 업이 된
한방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평생의 벗이 된 차와의 인연도 시작되었다.
“18세 때 경남 다솔사에서 효당 최범술 스님을 만났습니다.
그대 처음으로 재대로 갖춰진 다구를 보았고 ‘다도’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찻그릇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 돈을 모아 일습을 구했는데
그 다구는 저의 재산 목록 1호가 됐습니다.
차에 그처럼 빠져들게 된 것도 불가에 귀의하지 못한
허전한 마음을 달래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 같습니다.
종손이란 소임만 아니었어도 어머니는 아들의 소원을 들어주셨을 겁니다.“
어찌해 볼 수 없는 맏아들의 정신세계 때문에
가슴이 까맣게 탔던 어머니는 6년 전 73세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는 밤마다 울면서 용서를 비는 눈물의 편지를
화선지 전지 세 장에 서서 유골과 함께 묻었다.
하늘에서 아들의 절절한 편지를 읽으신 어머니는
불효자를 조금은 용서하실지 모르겠다며 허전한 미소를 지었다.
천치원에서 만난 종부 김영순 씨는 관상학적으로도 천상 종부였다.
훤칠한 키에 넉넉한 마음을 가진 분이었다.
무엇보다 솥뚜껑 같은 두툼한 손이 예사롭지 않았다.
불가에 마음이 가 있는 종손 대문에 무척이나 마음고생을 했을 법도 한데
남의 이야기처럼 태평히다.
토굴에서 생활을 하든 함께 살든 모든 게 다 인연의 법칙이 아니겠느냐며
그래도 이렇게 함께 있을 때는 행복하다고 말한다.
도인 같은 종손과 함께 사는 분이라서 종부도 도인의 마음을 닮은 듯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종손 대신 집을 짓는 큰일부터 차밭을 관리하는 일까지
세파에 시달리는 모든 일은 종부가 다 한다.
그러면서도 4 남매를 훌륭히 키웠다. 큰딸은 수의사, 둘째 달은 약사,
셋째 달은 의대생이다. 종부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낳은 넷째 아들은
대학 재학 중에 군에 들어가 군대생활을 하고 있는 다복한 가정이다.
차와 차음식 일생으로 지내는 종가의 추석 차례
이날 차를 올리는 추석 차례상을 보고 싶다 했더니 종부가 정성스레 상차림을 해주었다.
추석 차례는 아침 6시에 지낸다.
먼저 병풍르 펴고 병풍 앞으로 위패를 모실 교의를 놓았다.
그 앞으로 제상이 놓여졌다. 길이 1M, 폭 61CM로 작다.
이 제상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것이다.
제상 앞으로 향상이 놓이고 향상 위에는 향로와 향갑도 놓았다.
그 다음은 촛불을 켜고 위패를 모신 신주 문을 열고 향을 피워 분향을 했다.
그리고 다식과 차 한 잔을 올리고 종손 혼자 모두 두 번 절했다.
일반적으로 모사에 술을 붓는 의식은 없다,.
그 다음 대추. 밤. 곶감. 배. 사과를 올리고
쇠고기를 다져 찻잎을 섞어 구운 육전과 여러 가지 야채와 두부, 고기,
찻잎을 섞어 구운 두 가지 전을 한 그릇에 담아 올렸다.
찻잎으로 만든 송편을 올리고 종부가 우린 한 잔의 차를 신위마다 올렸다.
참석자 모두 두 번 절한다.
음식을 드시는 동안 기다렸다가 안녕히 가시라는 예로 두 번 절한다.
위패 문을 닫고 상을 거두는 것으로 차례는 간단히 끝났다.
차는 종부가 우리고, 조상 앞에 찻잔을 올릴 때는 종손과 종부가 함께한다.
찻잔을 받침이 다로 없고 뚜껑도 없다. 잔대가 높은 것을 헌다 잔으로 썼다.
종가 차례 모시기 특징은
차와 다식을 먼저 올린다는 것과
과일과 적, 송편 등 네 가지 음식이 전부라는 것이다.
차례 음식 만들기를 버거워 명절을 기피하는
신세대 주부들이 솔깃해 할 종가의 차례상이다.
무엇보다 ‘차례’라는 용어에 걸맞게 차음식이 올려 졌다는 점도
일반 종가와는 차별된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