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世 송당(松堂)공 휘 훈식(勳植) 유사(遺事)
1970년대 수몰 직전의 자양면 용산리를 백암산에서 찍은 사진이다.
계천(溪川)<옛 이름 호계(虎溪)>의 오른쪽이 인구마을이다.
삼휴공(18世)께서 영천 석동에서 인구마을로 살림나 일생을 사신 마을이며,
모재공(21世)께서도 귀미마을에서 인구마을로 살림나 일생을 사셨다.
그 후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았고,
송당공(29世)께서도 이 마을에서 태어나 일생을 보내셨다.
송당공께서 어리실 때 서당(書堂)이라 불리운 추모당(追慕堂)에서
한학(漢學)을 공부하셨다.
송당공의 어머니신 하양할매의 60대 중반 때 일본의 둘째 아들까지
모인 생신의 기념사진.
아들 딸 5남매와 친외손들이 모여 생신잔치를 했다
1939년 3월 23일 (昭和14년 3월 23일) 자양공립심상소학교 제2회 졸업사진.
앞줄 한복입으신 분 울산할배(휘 淵夏) 자양면장이시고,
셋째줄 왼쪽부터 셋째가 차남 병목(炳穆).
네째 줄 왼쪽에서 셋째 한복 입으신 분이 송당공의 40세 때의 사진이다.
학무의원으로 참석하셨다.
1951년에 자당(慈堂)께서 돌아가시자 아들 3형제분은
3년상 내 상주의 의복을 입으셨다.
1951년 어머니께서 영천읍의 장남 병호 집에 오셨다. 그때 독사진도 찍고
3남매와 사진도 찍으셨다.
영천 창구동에 살던 시절! 어머니께서 둘째아들 병목, 둘째 딸 병숙과 그리고
어린 손자 형기, 윤기와 정겨운 모습을 맏아들 병호가 찍은 사진이다.
댐건설로 수몰되었던 증조부 경암공(휘 진우 27世)께서 농와고택에서
살림나 사셨던 집터가 나타났다.
이 터에서 조부 용헌공 남매분이 태어나셨고,
부공(父公) 송당공 3남 3녀분께서도 그 집에서 태어나 성장한 곳이다.
그리고 대를 이어 송당공 자녀 우리 4남 2녀가 그 집에서 태어났다.
그 집은 고가(古家)로 송당공께서 마을 입구의 밭에 새로 집을 지어
옮기고 그 자리는 체소밭이 되었다.
송당공께서 심혈을 기우려 지은 새집이 1950년 6.25전쟁으로 불타벼린
그 자리가 댐건설로 용궁이 되었다가 물이 줄어
집터에 돌담과 주춧돌이 나타났다.
인구마을에 하나밖에 없던 우리 집 우물이다. 송당공께서
새집을 지으며 우물을 팠다.
수몰 후 나타난 생명수를 대어주던 정든 우리 집 우물의 흔적.
면소재지인 신용산의 수몰후의 모습.
이곳에 송당공께서 운영하셨던 아들 병호의 정미소가 두 곳이나 있었다.
포항시 기계면 문성리에 있는 우리나라 새마을운동의 발상지의
수련원으로 변신한 외가 집.
송당공의 처갓집이요 어머니 친정집, 우리의 외가 집의 오늘의 모습.
1980년 송당공의 큰딸인 학야누님의 회갑날 동생들이 안강에 가서 회갑을
축하하고, 다시 문성의 외가 집을 찾았다. 그날 경산형수님을 비롯하여 군위형님 내외분,
나 내외, 병묵 내외가 외할아버지 내외분의 인자하신 체취가 품기는 외가 집이라 어머니 생각이 간절했다. 양동외숙부 내외분(사진 중앙 외삼촌, 외삼촌 앞의 분이 양동외숙모)
께서 반가이 맞아주셨다.
1953년 설날 고향에서 어머니를 모신 7남매 중 6남매의 가족사진.
대양골의 송당공 내외분의 쌍분 모습
송당공의 증손자 영록 내외의 결혼 후 첫 증조부 성묘 때의 모습.
아들 병욱, 병극 형제와 손자 태기, 형기, 우석 3형제, 그리고 증손자 영록 내외와 상록의 성묘를 얼마나 반가워하셨을까!
공의 휘는 훈식(勳植 29世), 자는 이대(而大), 호는 송당(松堂).
송당공의 40세 때의 존영, 배위 52세 때의 존영.
1.가계(家系) : 시조공의 28세손이며, 호수공 휘 세아(世雅 16世)의 13세손 이고, 삼휴공 휘 호신(好信 18世)의 11세손이다. 모재공 휘 중교(重喬 21世)의 8세손이며, 자언공 휘 일필(一鉍 22世)은 7대조 되시고. 휘 하주(夏澍 23世) 농와공은 6대조이며. 5대조는 휘 성휴(性休 24世)이시다, 고조부는 휘 유명 (裕明 25世)이시며, 증조부는 휘 치선(致璇 26世)이시고. 조부는 휘 진우 (鎭禹 27世)이시며, 아버지 휘 연석(淵錫 28世) 용헌공과 어머니 하양 허씨의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셨다.
2.생몰(生沒) : 경자1900년 11월 7일 생- 기해1959년 3월 29일 졸. (향년 60세)
o배위 남양 홍씨 : 경자1900년 7월 25일 생-무술1958년 5월 16일 졸. (향년 59세)
3.배위(配位) : 남양 홍입분(洪立粉). 父 종태(鍾泰), 祖 재병(在昞), 曾祖 이섭(二燮).
o본종(本宗) 휘 진호(鎭頀) 덕산할배가 이모부가 되신다.
o배위 남양 홍씨께서는 부자 집 3남1녀의 맏딸로 귀하게 자라셨다. 온화하고 인자한 마음씨
로 7남매를 낳아 잘 기르셨으나 건강이 좋지 않아 고생을 많이 하셨다. 그리고 늘 많은
자식들 걱정으로 날을 보내셨다.
o맏아들 병호가 일제(日帝) 때 일본군의 징병으로 군대에 가야하기에 일어 (日語)로
‘센닌발이 (千人針)’를 몸에 메면 총알을 피한다는 일본사람들의 속설 이 있어 어머니께서
손수 짠 무명베에다 아버지께서 무훈장구(武勳長久)라는 붓글씨를 써 천(千)사람에게 부탁
하여 수 (繡)를 놓았다. 우리 마을은 물론 인근마을, 친정 문성 까지 가서 수를 놓아 만드셔.
1945년 일본군대에 입대 하는 아들의 어께에 걸어 주셨다. 그 자정(慈情)을 상상해보자!
4.효성(孝誠)과 우애(友愛) : 1919년에 부공(父公)이신 용헌공께서 45세로 별세 하셨을 때.
아드님 송당공은 20세, 백당공은 13세. 죽당공 10세였다. 송당공께서는 장남으로 집안의
기둥이 되셨다. 유가의 후예로 예의범절을 잘 지키고 어머니 봉양과 형제 자매간의 우애
가 깊었으며. 성품이 후덕하고 근엄 하며 인자하셨다.
1)홀로되신 어머니를 극진히 모셨고, 형제자매 간의 우애 또한 남달랐다.
누나나 여동생이 친정 오면 여러 남매분들이 눈물로 상봉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2)어머니 생신 때는 아침은 큰아들, 다음은 기차(其次)집에서 하였다.
어느 해는 일본에서 둘째아들 백당공이 어머니 생신에 오셔 여러 남매분이 마을 잔치를
하고 할머니 기념사진도 촬영하였다.
3)1950년 9월 6.25전쟁으로 송당공께서 심혈을 기울러 건축한 새집이 폭격으로 불타
송당공의 종숙 원산댁에 방을 얻어 임시로 온가족이 살았다.
그러다 1951년 2월 5일 어머니신 하양할머니께서 작고하신 후 집이 불에 타 없어 차남의
집에서 여막을 차렸고, 아침저녁 상식(上食)을 월연 큰댁에서 인구까지 날랐다. 다음해 불탄
집 자리에 아래채를 복원하여 여막을 옮겼으며 초상부터 대상까지 전통상례법에 맞게 3년
상을 내었다.
5.학업(學業) : 송당공께서 어릴 때 추모당에서 토골할아버지(휘 치석)로 부터 한학공부를
하셨다. 대소가의 한문 글쓰기를 언제나 맡아 쓰섰다.
6.영농(營農) : 유산으로 받은 논밭이 중농가(中農家)가 되어 언제나 머슴을 두고 농사를
지었다. 형님들도 성장하면서 농사일을 거들었다.
임고면 수성리의 논밭은 팔아서 사과과수원을 샀다. 그리고 장남의 도정공장도 맡아 운영
하셨다.
7.공적(功績) : 신주택 건립과 장남 사업자금을 대어주셨다.
1)신주택(新住宅) 건립(建立) : 1938년경 조부 경암공께서 농와고택에서 살림나신 구주택
(舊住宅)이 오래된 고가(古家)로 노후(老朽)해 신주택(新住宅)을 새집 터에 건립하여 이사
(移徙)를 하셨다.
용산리 945번지에서 용산리 965-1번지에 3개동(個棟) 10간이고, ㄷ자형의 와가(瓦家) 재목
(材木)으로 지었으나 예산 등으로 초가(草家)를 입혔다. 그리고 안팍 마당 두 개소와 우물 1
개소를 팠다.
2)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에 교육관계(敎育關係)의 장학위원(獎學委員) 으로 위촉(委囑)
되셨다.
3)1946년 해방후(解放後) 면(面) 단위(單位) 장(長)으로 면민들의 추대(推戴)를 받은 일이
있다.
4)위선사업(爲先事業)에 적극참여 : 호수공의 불천위제사의 참재소계(參齋所稧)에 추입
하셨다. 1946년 원당묘사 과판공, 하천화수회(穀雨契)가입하셨다.
5)마을의 길흉사에 앞장서 도움 : 가례(家禮)에 밝으시어 대소가의 길휴사에 적극적인 도움
을 주셨다. 예를 들면 예장(禮狀), 초상례, 제문, 축문쓰기등.
6)장남(長男)의 사업자금(事業資金)을 댐 : 장남(長男) 병호(炳浩)의 운수업(運輸業) 및
정부 미곡도정공장(政府米穀搗精工場)과 주유소(注油所)운영 자금(資金)을 대어 주셨다.
8.자손(子孫) : 5남 2녀.
o장남 병호(炳浩), 配 월성 최을식(崔乙植). 父 동환(東煥). 祖 상준(相駿).
*손자 태기(胎基), 配 용궁 전문자(全文子). 父 성호(聖鎬). 祖 상곤(祥坤).
*손자 형기(亨基), 配 강릉 유순애(劉順愛). 父 용연(龍淵). 祖 한술(漢述).
*손자 윤기(潤基), 配 행주 기은하(奇銀河). 부 양섭(養燮). 祖 소연(昭衍).
*손자 우석(又碩). 配 월성 이수경(李秀慶). 父 광희(光熙). 祖 달순(達順).
*손녀 미혜(美慧). 夫 나주 정규석(丁奎奭). 父 맹섭(孟燮).
o차남 병목(炳穆), 配 여강 이봉식(李鳳植). 父 장원(長源). 祖 석희(錫熺).
*손자 수진(守珍). 配 삼척 김순덕(金順德) 父 진태(鎭泰). 祖 기수(基壽).
*손녀 태교(胎嬌), 夫 인동 장덕수(張德守). 父 병술(炳述).
*손녀 영애(英愛). 夫 현풍 곽충섭(郭忠燮), 父 병옥(秉玉).
*손녀 숙자(淑子). 夫 경주 이성태 (李成泰).父 만석(萬石).
o3남 병욱(炳旭), 配 경주 김필주(金畢朱). 父 상훈(相勳). 祖 우구(禹九).
*손자 인기(仁基), 配 해주 최경애(崔敬愛). 父 세웅(世雄). 祖 승종(承鍾).
*손자 인배(仁培). 配 성주 이윤화(李允化). 父 수룡(守龍). 祖 권이(權伊).
*손녀 순옥(順玉), 夫 의성 김청길(金淸吉). 父 진덕(鎭德).
*손녀 순애(順愛). 夫 밀양 박흥규(朴興圭). 父 병옥(炳玉).
o4남 병극(炳極), 配 창녕 조덕선(曺德宣). 父 규형(奎亨). 祖 인환(寅煥).
*손자 석윤(碩允), 配 월성 손정혜(孫貞惠). 父 영호(榮鎬). 祖 찬익(讚翼).
*손자 상기(祥基) 配 밀성 박주희(朴珠嬉). 父 영술(永述). 祖 준현(俊鉉).
*손녀 향미(香美), 夫 영양 남기혁(南基赫). 父 상구(相九).
*손녀 인경(仁慶). 夫 전주 이은식(李銀植). 父 길안(吉安).
o5남 병묵(炳默), 配 진주 하정자(河貞慈). 父 영상(永尙). 祖 재주(在周).
*손자 인석(仁碩), 配 곡부 공경숙(公京淑). 父 병윤(炳允).
*손녀 유진(有珍). 夫 제주 고승우(高承佑). 父 이승(利勝).
o장녀 병증(炳曾) 夫 여강 이세구(李世久). 父 능희(能禧).
*외손자 이용석(李龍錫),
*외손녀 이영희(李英姬), 이희양(李喜養), 이명순(李明順).
o차녀 병숙(炳淑) 夫 용궁 전재룡(全在龍). 父 병식(炳植).
*외손자 전용호(全鏞鎬). *외손녀 전성혜(全晟惠).
9.묘소(墓所) : 중귀미 대양골.
o배위는 처음은 군평 분지밭골 시어른 용헌공 묘소 옆이었으나 몇 년 뒤 대양골 부(夫)
묘소에 쌍분으로 이장하였다.
10.택호(宅號) : 문성(문호) (현 포항시 기계면 문성리)
<자료정리> 4남 병극(炳極)
첫댓글 숙부님 할아버지 할머님 유사를 정리해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할아버지께서 손수 새로 지으신집 6,25사변통에 전소되고 피난후 다 타버려 방구들장 과 녹아내린 철재가구들,
우물가 당감나무,향나무 붓잡고 통곡히시든 할아버지 얼마나 애통하고 상심이 커을까 생각히니,
지금도 잊지 못하고 가슴이 져며듭니다,
나흘훗날 내외분 60년 갑년이되는 추석날 정성드려 차사드리겠습니다,
편히 영면하시고 극락왕생 하소서!
숙부님께서 고생하셔서 할아버지 생애를 잘 정리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증조할머니님은 제가 못 뵈었는 줄 알았는데 태어나고 이듬해 돌아가셨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애들에게도 꼭 읽어 보도록 하여 조상님 은혜를 알도록 하겠습니다.
숙부님께서 할아버지 내외분의 발자취를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해 주셔서 많이 배우고 감동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처음으로 알게된 증조할아버지의 발자취입니다 .
알기 쉽게 잘 정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영록아!
너의 내외의 증조할아버지 산소 첫 성묘가 기특해서 올렸다.
앞으로 조상 받들기에 앞장 잘 서기 바란다.
그동안 잘 몰랐던 증조할아버지의 생애를 알게되어 감사합니다
해외에서 올려주신 게시물을 보니 더 반갑네요
이번 추석때 뵙지는 못하지만 모두들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상록아! 해외 근무에 수고가 많지? 너의 내외 같이 건강하겠지!
카페방문으로 증조할아버지의 생애를 이해하는 기회가 되었다니 다행이다.
건강히 잘 근무하고 상봉의 그날을 기다리자!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다시 한번 더 증조 할아버지를 생각할 수 있게 된 좋은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현수도 방문했구나! 건강히 잘 지내겠지!
증조할아버지,너의 할아버지 양대분이 우리의 거울이되신다.
곧 할아버지 유사도 올릴계획이다. 건강히 잘 근무하여라.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8.09.22 10:37
조부님에대한 정리 내용 잘보았습니다.
자손들이 조상님의 생애를 알게되는 소중한 자료가 되리라 생각됩니다.
제가 태어나기 한참전의 일들이나 묘사로 자주 방문하게 되는 자양과 관련된 내용
할아버지 아버님들의 내용이라 관심있게 재미있게 보게 되었네요
자손들이 다시한번 기억할수 있게 정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아버지 어머니" 오래만에 불러보는 이름이여 누구에게나 부모가 계시는데 나에게는 부모님의 온기를 느껴본지 너무 너무 까마득 하여 네가 80의 세월을 살았으니 두분 곁으로 갈날 얼마 남지 않아 가서 뵙지요
나에게 아버지는 너무 무서운 존재 어릴적 황소한마리 먹이를 나에게 감당케 하여 죽기 살기무거운 꼴망태 매고 어린게 땅에 기어 다녀도 늘 부족하여 혼이난기억 어머님은 밥솥에 나무도 생나무를 잘라다주어 눈물로 밥을지으시던 일 보릿고개에 앞들에 가서 덜 익은 보리를 짤라다 훌터 밥을 지으시는 모습들, 감개가 무량 합니다
자료 수집에 편집하시느라 고생하신 인계형님께 감사이 말씀 올립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장남의 무훈장구를 비는 할머니의 천인 수 놓음에서 자식에대한 지극한 사랑을 느꼈습니다. 눈물이 나도록 감동받았습니다. 불알드러내고 짱글시고 앉아 있는 대갈장군의 모습이 흥미롭습니다. 작은아버지의 수고하심으로 많은 후손들이 좋은 선물을 받게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역사를 이렇게 대하다니 신세계 적은아버님 덕분에 이렇게 대하게 되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어릴 때 할아버지 께서 신용산 국화빵 사주시던 모습이 아직 머리에 있어요.
집에 가서 고모랑 같이 먹으라고 봉다리에 싸주시던 할아버지.
할머니는 늘 저에게 자상하시고 보고 싶어하시던 울 할머니 늘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