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意義]
본시 「臥薪」과 「嘗膽」은 각기 다른 사건에서 유래한 말이지만,지금은 이를 구분하지 않고 「臥薪嘗膽」이라고 하며,"섶에 눕고 쓸개를 맛본다"는 말로,"원수(怨讐)를 갚기 위해 괴롭고 어려움을 참고 견딤"을 비유한 말이다.
[出典]
사기(史記)" 월왕구천세가(越王勾踐世家)
[解義]
춘추 시대, 오왕(吳王) 합려(闔閭)는 월(越)나라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월나라 군대의 완강한 저항으로 합려는 오른쪽 다리에 중상을 입은채 군대를 철수하고 오나라로 돌아왔다.
합려가 부상의 악화로 숨지자, 그의 아들 부차(夫差)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부차는 어떻게 해서든지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고 결심하고 조석(朝夕)으로 땔나무를 쌓아 놓고 거기에 누워[朝夕臥薪中], 자신의 몸을 괴롭게 하면서 신하들에게 명하여 자기가 방안으로 드나들 때면 이렇게 외치도록 하였다.
"부차여, 너는 월왕 구천이 너의 아버지를 죽인 사실을 잊었는가?"
3년 후인 기원전 494년에 부차는 다시 군대를 거느리고 월나라를 공격하여 부친의 복수를 하였다.
그 당시, 오나라의 도읍은 지금의 강소성 소주 땅에 있었고, 월나라의 도성은 회계(會稽; 지금의 절강성 소흥)에 있었다.
두 나라 군대는 태호(太湖)와 고성(固城) 일대에서 격전으로 벌였는데, 월나라가 크게 패하였다.
월왕 구천도 형세가 불리하다 생각하고, 대부 문종(文鍾)을 파견하여 오나라의 재상 백비(伯비)에게 화친를 부탁하였다.
백비는 문종이 황금, 백벽(白璧) 등의 귀중한 예물과 미녀들을 데려 온 것을 보고 마음이 흐뭇해져서, 문종을 데리고 부차를 뵈러 갔다.
문종은 부차를 만나자, 월나라 왕이 충심으로 오나라 왕의 신하가 되고 싶어하며, 또한 월나라의 영토를 오나라에 바치기 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오나라 대신들은 대부분 구천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지만, 부차는 월나라의 투항을 인정하여, 예물들을 받아들이고 월왕 구천을 오나라로 오게 하였다.
구천은 오나라로 가기 전에, 나라 일을 문종 등의 대신들에게 부탁하고, 아내와 대부 범려(范려)를 데리고 오나라로 갔다.
부차는 구천 부부와 범려에게 합려의 묘소 옆에 있는 석실(石室)에서 살면서 오왕의 묘를 지키고 말을 기르라고 명하였다.
구천은 고국으로 돌아갈 생각만으로 오나라에서 삼 년을 매우 신중하게 행동하며 모든 모욕과 수난을 겪어냈다.
문종도 월나라에서 늘 백비에게 예물을 보내며, 오왕 부차 앞에서 구천의 말을 잘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구천은 오왕 부차가 병에 걸린 것을 알고, 백비에게 부탁하여 부차의 거처에 들어가 볼 기회가 생겼다.
구천은 직접 부차의 시중을 들며 알아서 간병을 잘 하였다.
부차는 병이 다 낫자, 구천의 정성에 매우 감동하며, 곧 그들 부부와 범려를 월나라로 돌아가도록 석방하였다.
귀국 후, 월왕 구천은 나라를 멸망시킨 복수를 위해 오나라와 일전을 하겠다는 결심하였다.
그는 문종에게 정치를 담당하도록 하고, 자신은 백성들을 독려하여 농사를 짓고 누에를 기르도록 하여 경제적 실력을 키워 나아갔다.
뿐만 아니라 구천은 범려에게 지시하여 군대를 훈련시키게 하였으며, 자신도 투지를 태우며 오나라에서의 굴욕적인 생활을 잊지 않았다.
그는 쓰디쓴 쓸개를 기거하는 방에 걸어 두고 늘 그것을 혀로 핥으면서 외쳤다[懸膽於坐臥, 卽仰膽嘗之曰].
"너는 회계산에 포위되었을 때의 굴욕[會稽之恥]을 잊었느냐?"
오나라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고 있는 월나라는 백성의 수를 늘리고, 국가재정을 충실하게 관리하여 튼튼하게 다진 지 10년, 다시 10년을 백성들에게 오나라에 대한 적개심을 가르쳤다[十年生聚, 十年敎訓].
20년이 지난 기원전 473년, 월나라 구천은 오왕 부차가 주력부대를 이끌고 도읍을 비워 둔 사이에 신속하게 진격하였다.
오나라는 세 번 싸워 세 번을 패전하여 도망하였다.
결국 오왕 부차는 자신이 쌓은 고소대(姑蘇臺)에 몸을 의지한 채, 회계산에서 월왕이 했던 것처럼 월나라에 화친을 요청하였으나, 월나라의 범려가 절대 들어주지 않았으며, 이미 기울어버린 대세 속에서 오나라 재상 백비마저 투항하여 버렸다.
부차는 자신의 과오를 한탄하면서, 오자서를 만나 볼 면목이 없다는 말을 전해 달라고 하며, 천으로 눈을 가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구천은 오나라를 멸한 후, 북상하여 중원의 몇몇 제후국들까지 차지하게 되었는데, 이는 구천이 신하들을 잘 다스려 그들의 지략(智略)이 집결된 때문이었다.
재능이 출중하였던 범려는 월왕 구천을 20년 동안 수행하며 월나라를 도와 오나라를 멸망시키도록 하였던 인물이었다.
오나라를 멸한 후, 월나라로 돌아오자, 월왕 구천은 범려의 공적을 인정하여 그를 상장군(上將軍)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범려는 직접 그 이유를 말하지 않은 채 관직을 사양하며 제(齊)나라로 가버렸다.
사실 범려는 월왕 구천의 마음을 너무 잘 알고 있었으므로, 구천의 신변에 있다가는 조만 간에 죽임을 당할 것 같았기 때문에 일찌감치 그를 떠난 것이었다.
범려는 제나라로 도망하면서도 월나라 대부 문종(文種)에게 글을 써서 다음과 같이 일렀다.
"하늘을 나는 새가 다 잡히면, 좋은 활은 거두어지는 것이고, 교활한 토끼가 모두 잡히면 사냥개는 삶아지는 법입니다[飛鳥盡, 良弓藏, 狡兎死, 走狗烹]. 월왕 구천은 목이 길고 입은 새처럼 뾰쪽하니[長頸烏喙], 어려움은 함께 할 수 있어도, 즐거움은 같이 할 수 없습니다. 대부께서는 왜 월나라를 떠나지 않는 것입니까?"
문종은 범려의 편지를 읽고, 병을 핑계로 궁궐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자 어떤 이가 이를 구실로 그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참언하였다.
월왕 구천은 이를 빌미로 그를 잡아 들여 그에게 칼을 내리며 말했다.
"그대는 나에게 오나라를 칠 일곱 가지의 계책을 나에게 가르쳐 주었는데, 나는 그 중 세 가지만을 사용하여 오나라를 물리쳤소. 나머지 네 가지는 그대에게 있으니, 그대는 선왕(先王)을 뒤쫓아가서 그것을 시험해보기 바라오."
이 말을 들은 문종은 이내 자결하고 말았다.
위의 이야기에서 「十年生聚, 十年敎訓(십년생취, 십년교훈)」이라는 말도 유래하였는데, 이 역시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해 오랜 시간 온갖 고생을 참으며 노력(努力)함」을 뜻하는 말이다.
첫댓글 현진님:안녕 하세요? 와신상담에 대한 일화와 출전 해설까지 세세히 설명을 하여 주셔서 많은 것을 배우고 갑니다.님의 한문에 대한 많은 자료들을 올려 주심에 회원님들이나 송정에게도 많은것을 배우게 하는 군요 건강 하시고 늘 행복 하세요. *^^*
현진님 와신상담 잘 읽었습니다^^*
재미있게 잘 읽고 갑니다. 올려 주시는 많은 자료, 보고 또 보고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