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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차 대간길에서 삼매경의 묘적봉과 도솔봉에서 성불을 하지 못했지만, 이번
21차 대간길도 세속에 드러난 진리를 상징하는 연화봉과 지혜의 빛이 두루 가득하게 비추어줄 비로봉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며,
신라시대 유난히 불교문화의 꽃을 피운 소백산의 많은 사찰을 만나게 됩니다.
또 마치령에서는 수양대군과 단종의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조카와 삼촌사이의 넘을 수 없었던 한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죽 령
단양죽령전투
이는 단양에서 태어나 소백산 아래 살아서 지역 지형에 능했으며 일본군의 진입로 차단과
의병의 전투 및 공격과 후퇴 군사배치등 지형지물을 최대한 이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령1차 전투에서 30명, 2차전투에서 4백명, 3차전투에서 80여명의 적을 무찌른 것이 “운강유고”에 기록되어 있다.
죽령옛길과 소백산 자락길 문화생태 탐방로
죽령옛길은 2,000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길로서 청운의 뜻을 품은 과거 길의 선비, 공무를 띈 관원들, 장사꾼들로 붐벼
길손들의 숙식을 위한 주막, 마방 들이 죽 늘어서 있던 사시사철 번잡했던 고개길이었다
추풍령, 문경새재와 더불어 삼국시대 군사적 요충지이자 영남권과 기호지방을 연결하는 3대 관문의 하나로
영주와 단양을 연결하던 옛길로, 소백산국립공원내에 있다. 대재라고도 한다.
해발 689m. 삼국시대때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 지역으로 오랜 기간 영토 분쟁지역이었다.
소백산자락이 영남과 호서를 갈라놓는 길목에 해당하며, 삼국시대 이래로 봄·가을에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영주시에서 옛 자취를 되살려 보존하기 위해 이 길(2.5km)을 다시 뚫고 안내판을 설치하였으며,
현재는 자연탐방로로 개발되어 야생화 등을 볼 수 있다.
소백산 자락길 문화생태 탐방로는 2009년 소수서원부터 죽계구곡, 초암사,
달밭골, 비로사, 삼가호, 풍기온천, 죽령옛길을 거쳐 죽령고개까지 34km가 먼저
개발되었다.
이후 2010년부터 소수서원에서부터 소백산 자락을 따라 단산면~부석사~봉화
오전리~남대리까지 연결 작업을 진행할 계획이다.
죽령옛길이 포함된 3코스는‘소백산역~죽령주막~연화봉(해발 1383m)
~희방사’로 이어진다. 천천히 걸으면 약 6시간이 걸리는 트레킹 코스다.
죽령옛길 이정표
희방사 갈림길
희방계곡와 喜方寺
소백산 영봉들로부터 흘러나오는 물소리가 주변의 경관과 어울려 계곡의 운치를 더해주는 희방계곡은
풍기로부터 죽령에 이르러 희방사로 오르는 절경들이 위치한 계곡이다.
서거정(徐居正)은 꿈속에서 노니는 천혜의 곳은 희방폭포가 있는 뛰어나게 아름다운 희방계곡이라고 격찬하였다.
희방계곡의 물은 남진하여 소백산역 부근에서 죽령과 옥녀봉에서 흘러내린 시맥골과 만나 남원천(옛날엔 남천)을 이루어
비로봉에서 발원한 금선계곡(북천)이 고현동에서 남원천과 만나 서천을 이루며,
내성천(봉황산과 북부 산악지대에서 발원한 내성천은 봉화군을 관류하여 문수면 수도리에 이른다)과 만나 삼강나루터에서 낙동강과 만나게 된다.
신라 현강왕 9년(883) 두운 조사가 창건한 1500년이 넘는 신라 고찰로 소백산줄기의 남쪽계곡 깊숙히 자리하고 있다.
희방사는 두운조사가 호랑이 목에 걸린 비녀를 빼주어 살려주는데서 유래가 시작된다.
두운조사 덕에 살아난 호랑이가 은혜를 갚고자 양가집 규수를 물어다 주었는데, 이 규수가 慶州戶長의 무남독녀였던 것이다.
호랑이에게 잡혀가 죽은줄로만 알았던 딸이 두운조사 덕에 살아있으니 그 은혜를 갚고자 절을 지어준 것이다..
희방사의 뜻 또한 경주호장이 은혜를 갚아 기쁘다 하여 기쁠 희(喜)에 두운조사의 참선방의 방(方)을 써 희방사라 지어진 것이다.
경주호장은 이것으로도 부족하다며 죽령고개 아래 마을 계곡에 무쇠다리를 놓아주었다. 지금도 그 마을을 수철동으로 불리고 있다.
희방사는 한국전쟁으로 훈민정음 원판등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소실되었습니다. 하지만 1953년에 중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희방폭포
희방사 지장전 공포((栱包)
희방사 지장전의 공포에는 유난히 토끼그림이 많다.
不死의 상징인 토끼는 다음과 같은 유래가 있다.
옛날 어느 날 노인으로 변장한 제석천(불교 수호신)이 토끼·여우·원숭이 앞에 섰다.
그는 이들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부탁했는데 여우는 강 속에서 싱싱한 잉어 한 마리를,
원숭이는 진귀한 꽃과 열매를 가져왔다.
하지만 빈손으로 돌아온 토끼는 장작에 불을 붙여 자신을 ‘한 끼 식사로 대접한다’며 불 속에 뛰어 들었다. 제석천은 자신을 위해 소신공양한 토끼의 행동에 감동을 받아 본래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는 불에 탄 토끼를 재에서 꺼내 여우와 원숭이에게 토끼를 달에 보내어 영원히 사람들의 귀감이 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 사람들은 모두 달 속에 토끼가 있다고 전해졌으며 토끼를 ‘불사(不死)·보시·희생’의 상징으로 기억하고 있다
자료 : http://blog.daum.net/topaz0058/16754227
연화봉 蓮花峰
연화봉(蓮花峰, 1394m)은 사바세계에 내려오신 부처님을 상징한다.
'세속에 드러난 진리'를 상징하는 연꽃이 봉우리를 틔운 것이 바로 연화봉이다.
그 연화봉에서 진리의 삶을 이루게 되면 바로 부처님을 만나게 된다.
부처님의 진신인 비로봉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천동리갈림길(단양)
다리안 관광지는 다리안 폭포 주변에 조성한 관광지를 일컫는 명칭이다.
천동다리의 밑으로 아름다운 폭포가 흐르는데,
다리안(橋內)폭포라 하여 이곳에 들어오려면 꼭 구름다리를 건너야만 들어올 수가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이다.
다리안 폭포
비로봉(소백산)
비로(毘盧)는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줄임말로 '몸의 빛, 지혜의 빛이 법계에 두루 비치어 가득하다'는 뜻이다.
즉 '부처의 진신(眞身)'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니 저수령에서 소백산으로 가는 산줄기의 봉우리들은 모두 부처님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비로자나불은 종파마다 각각 달리 불리는데, 화엄종에서는 석가모니불,
진언종에서는 대일여래, 천태종과 법상종에서는 법신불 등으로 부르는 부처다.
절에서 대웅전이란 석가모니를 모신 전각이니 그 큰 영웅[大雄]이 바로 불교에서 으뜸이신 부처, 석가모니를 뜻한다.
겨울이면 항상 머리에 서리꽃을 이고 있어 小白山이라 불린다.
또한 소백산은 '작은 백두산이라는 의미도 품고 있다.
부드럽지만 백두산의 기상을 품고 있는 산이 바로 소백산인 것다.
영주문화의 원류가 되는 소백산.
소백산의 동남쪽으로는 일찍부터 소국이 발달해서 풍기에 진한 12국의 하나인 기저국이 있었고,
1세기말에서 2세기 당시에는 신라가 이곳을 공략하기도 했으며,
또한 고구려와 국경을 이루며 잦은 영역 다툼을 벌였는데 그 국경이 백두대간이며,
지금도 죽령과 소백산 국망봉 등지에는 산성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5세기 들어서는 한때 고구려의 영토가 되기도 하여 고구려의 고분벽화가 이곳 순흥에 있기도 하고
그 후 6세기 말부터 신라 땅이 된 이곳은 유난히도 불교가 융성했다.
의상대사가 창건한 부석사와 비로사, 성혈사, 희방사 등의 사찰들이 번창한
불국토였으며,
그리고 산 북쪽으로는 천태종의 총 본산인 救仁寺가 자리하고 있다.
또 조선시대 들어서는 첫 사립교육기관인 소수서원을 비롯한 이산서원, 구호서원 등
무려 스무 개의 서원이 이곳에 있는 우리나라 유교문화의 모태라 할 수 있는 곳이다.
금선계곡과 錦仙臺(정)
소백산의 영봉 비로봉에서 남으로 계곡을 따라 내려오면 풍기의 삼가동, 욱금동, 金鷄洞에 이르는데,
이 절승의 골짜기가 금선계곡으로 북천이라고도 한다.
소백산의 실개울이 모여서 심산유곡을 흘러 내려오는 동안 거울처럼 맑은 시내가 되어
기화요초의 숲을 스치고 괴암절벽의 기슭을 돌아 정감록의 마을 금계동에 이른다.
개울은 반석위를 미끄러져 흐르면서 청담을 이루기도 하고, 기암괴석의 절벽을 만나 폭포가 되기도 하면서 절경을 이룬다.
조선 인조 때의 학자이며 퇴계의 문하생인
당시의 풍기군수인 이 징계의 친필인 금선대란 서각이있고
그 금선대 위엔 황 준양의 후손들의 정자인
금선대
비로사 毘盧寺
지방문화재 2점이 있고 울창한 잣나무 숲이 쌓여 있어 매우 인상적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孤雲寺 의 말사이다. 통일신라시대 眞定이 창건한 화엄종 사찰. 신라 말 소백산사라 불렸다.
가난해 장가도 못 든 채 홀어머니를 봉양하던 진정은 의상이 태백산에서 많은 사람들을 교화한다는 소문을 듣고 출가해 의상 문하에서 공부했다.
3년 뒤 어머니 사망 소식에 7일 동안 선정(禪定)에 들었다 그 소식을 의상에게 전했다.
진정의 지극한 효성에 감동한 의상은 그의 어머니를 위하여 소백산 추동에 초가를 짓고(소백산 추동은 비로사로 추정된다),
제자 3천명을 모아 90일 동안 <화엄경>을 강의했다.
강의가 끝나자 진정의 어머니가 꿈에 나타나 "나는 벌써 하늘에서 환생하였다"고 말하였다.
<비로사사적기>에는 의상이 서기 683년(신문왕 3년)에 이 절을 개창하고 비로사라 칭했다고 기록돼 있다.
여의곡 어의곡리
팜스테이 (Farmstay) 시범마을 한드미마을
팜스테이는 농촌지역의 풍부한 관광휴양자원을 농업과 연계하여 보전 개발함으로써
도농 교류를 촉진하고 농촌소득증대 및 지역개발 촉진 도모하기 위한 정책이다.
기존의 단순한 농가민박과는 달리 농가에서 숙박을 하면서 영농농촌문화 체험과
인근 지역 명승지 관광, 지역축제까지 참여하는‘농촌 문화 관광’이 결합된 일석삼조형 농촌체험 프로그램이다.
그러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의곡, 하의곡, 한곡동, 구익, 을전, 명길리를 병합하여 어의곡리라 해서
단양군 가곡면에 편입되었다.
한드미마을은 지난 1998년 생태산촌종합개발 사업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총 4개의 정부 시 행 마을개발 사업에 선정된 실속 있고 우수한 마을이다
어의곡 마을
초암사 갈림길
초암사
국망봉 남쪽 계곡 아래에 위치, 주변 경관이 아름답고, 3점의 문화재가 보관되어 있다
의상대사가 세운 조계종 사찰로 부석사 터전을 보러 다닐 때 초막을 짓고 수도하며 임시 기거하던 곳이다.
의상이 부석사를 짓고나서 다시 이곳으로 와 절을 세웠다. 6.25동란 때 소실되었다가
1975년경 초암사 조실스님인 보원스님(1910년생)께서 중건했다
초암사
초암골계곡
초암골 계곡에는 퇴계 선생이 죽계구곡이라 명명한 9개소의 명소가 있다.
소백산자락의 영봉과 국망봉으로부터 흘러나온 개울이 순흥 땅을 감돌아 백운동으로 흘러 사천으로 이어지는 계곡이 바로 죽계천이다.
이 황은 이 계곡의 아홉구비에 1곡은 백운동 취한대, 2곡은 금성반석, 3곡은 백우담, 4곡은 이화동, 5곡은 목욕담, 6곡은 청련동애,
7곡은 용추비폭, 8곡은 금당반석, 그리고 9곡은 중봉합류라 하여 죽계구곡이라 명명하였다.
또한 景畿體歌의대표적 작품인 안축(安軸)선생이 남긴 竹溪別曲의 배경이 되었던 곳으로도 이름이 높다.
제2곡 金城磐石의 청운대 각자
國望峰
선조 때, 수철장(水鐵匠) = 무쇠로 주물 따위를 만들던 장인(匠人) = 배순(裴純)이 왕이 승하하자
이 곳에 올라와서 왕성을 바라보며 3년 동안 통곡하였다 하여 이 산을 국망봉이라고 이름지었다고 한다.
국망봉과 선달산에서 발원한 내성천 영주와 안동,문경을 거쳐 예천에서 태극모양의 회룡포를 만들고
이 물길은 다시 황장산에서 발원한 금천을 문경 영순면에서 받아들인뒤 풍양면 삼거리에서 낙동강과 삼강을 이룬다.
석륜암터의 봉바위
상월봉
上月佛!" 이 刻字는 1945년 구인사를 창건한 상월 원각대조사가 구봉팔봉을 거쳐 이 암봉에 올라 새겼다고 전해진다.
상월불 刻字바위 - 바위에 세겨진 각자가 보이나요?
구인사 (救仁寺) 갈림길
충북 단양군 영춘면 백자리에 위치하며, 1945년부터 상월원각(上月圓覺)이 이곳에 터전을 마련하고, 천태종의 재흥을 다졌으며,
천태종의 본산으로서, 1966년 현대식 콘크리트조로 지은 이색적인 건물이다.
높이 33m에 이르는 5층의 대법당을 비롯 현대식건물로 지은 36동 건물 규모가 대단하다.
사천왕문에는 국내 최대의 사천왕상이 안치되어 있다.
이 천태종단은 염불(念佛) 중심의 의례종교를 탈피하고, 생활 속에 자비를 실현하는 생활·실천 불교를 지향하며,
주경야선(晝耕夜禪)으로 자급자족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구인사 천왕문
신선봉갈림길
대간 마루금에서 벗어나 있는 신선봉은 신선들의 바둑판이 있고, 일반사람은 산을 오르기가 힘들고
신선들이나 다니는 곳이라 하여
바둑판이 있는 바위에 두사람이 앉으면 구름 위에 떠있는 기분을 준다고도 한다.
고치령
고치재
경북 영주시 단산면 좌석리와 마락리를 잇는 고개이며. 태백산과 소백산의 경계이기도 하다.
정상에는 금성대군과 단종대왕을 모신 산신각이 있다.태백산신과 소백산신을 모시던 산신각은 화재로 소실되었다,
주민들에 따르면 남쪽 순흥으로 유배되었다가 안동에서 죽은 금성대군은 소백산신으로,
북쪽 영월에서 죽은 단종대왕은 태백산신으로 생각하여,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조카와 삼촌사이에 넘을 수 없었던, 고치령에 서려있는 한을 달래려 정월 열나흘이면 산신제를 지낸다고 한다.
이 고개는 또 영주(옛 순흥) 일대 상인들이 소금·생선·생필품 따위를 지게에 지고
마락리·의풍리·영월 등에 팔기 위해 넘나들던 옛길이기도 하다
금성단
형(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반대해 순흥에 유배된, 단종의 숙부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위해 영월로 보낸 밀사들이 이 길을 넘었다고 한다.
복위운동이 발각돼 가담한 인물들은 학살됐고, 순흥도호부는 폐부된다.
내죽리에 금성대군과 부사 이보흠 등 순절한 이들을 제사지내는 금성단 (錦城壇) 이 있고,
부근에 금성대군이 갇혀 있었다는 자리도 남아 있다.
壇은 墓보다 한단계 높은 무덤을 말한다.
錦城壇
좌석리(坐石里) 영주시 순흥면
단산저수지를 지나 5㎞ 남짓 오르면 세거리인데.
세거리는 윗좌석·아랫좌석·독점·
좌석리엔 1960년대까지 120여가구가 화전을 하며 살았지만 지금은 60여가구가 골골이 흩어져 산다.
세거리에서 웃좌석으로 오르다 보면 왼쪽 사과밭에 앉은 집채만한 바위를 만난다.
그 이름이 앉은바위다. ‘좌석리’라는 마을 이름이 여기서 나왔다.
정월 초정일(初丁日)에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당제를 올리는 바위다
마락리 영주시 단산면
마락리에 말굴이(말굽이)라 부르는 절벽이 있는데, 옛날 짐 실은 말들이 여기서 자주 굴러 떨어졌다고 한다. ‘
마락리’라는 지명이 바로 여기에서 나왔다.
마을 앞 골짜기 바위에서 영월과 순흥을 오가던 단종과 금성대군의 밀사가 탄 말이 떨어져 죽었다하여 얻은 이름이라 한다
청소년야영장이 나타나면 마락리 마주바위다.
마락리 계곡물은 부석면 남대리 골짜기와 함께 경북 지역에 있는 유일한 한강 수계이다
이제 소백산과 태백산의 경계를 지나고 있습니다.
대간길에서 만나는 역사적 삶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음을 느끼게 하는 아주 소중한 대간길이 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올리는 글입니다.
자료를 모은 글이라 부족한 부분이 많지만
끝까지 읽어 주어 고맙습니다.
도 덕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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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도솔봉은 한가한 시간으로 여유있게 오르지요..
이렇게 좋은정보 공유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글, 감사, 감사합니다~~!!
도솔봉 ~ 봉 이름이 참 예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