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3막이 행복한 이유
이 성 상
사전 설계 없는 삶
어릴 때부터 꿈을 갖고 있거나 젊은 시절에 인생계획을 세우는 사람들도 많은데, 지금 생각하면 나는 희망하는 것은 있었으나 꼭 무엇이 되겠다거나 무엇을 이루어야겠다는 구체적이고 뚜렷한 사전 목표는 세우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지만 나에게 주어진 인생루트에 집중하였고, 주어진 일들에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하고 성실하게 임한 결과가 마음 찬 몇 결실들을 거두어 왔던 것 같다.
학업과 군복무를 마친 후 세 곳의 회사를 옮겨 다니다가, 대우자동차에 둥지를 틀고 본격적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중화학공업을 정책적으로 육성했던 1970년대 후반기라 자동차산업이 성장산업으로 전망이 매우 밝을 거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후 GM대우 시절포함 33년 동안 인생의 황금기를 한 회사에서 보냈으니 나름 감회도 크다.
워라벨(Work-Life Balance)?
일과 삶의 조화라고 해석되는 Work and life balance라는 용어는 영국에서 1970년대 후반, 미국에선 1980년대에 생겼다고 하니 가히 신조어라고 볼 수 있는데 이젠 우리나라에서도 매우 흔한 자연스러운 단어가 되었다. 다른 한국의 대기업도 상황이 크게 다르진 않았겠지만, 당시 내가 소속된 대우그룹의 문화는 일에서 시작해서 일로 끝나는 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월화수목금금금’이라는 신조어의 발상지도 당시 대우그룹이었다. 1970년대 아침 9시였던 출근시간을 8시로 가장 먼저 변경한 회사 또한 대우였다고 기억한다. 퇴근시간이라는 용어자체가 거의 사용되지 않았을 때이니 요즈음 유행하는 ‘저녁이 있는 삶’과는 한창 거리가 멀었다. 더 이상 나의 사생활에 대해서 언급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 이유다.
조상과 부모님께 불효
1967년 회사 창립 이래 최전선에서 해외시장을 선도적으로 개척해오던 대우는, 1990년대 들어 세계경영(Global management)이라는 비전을 가지고 도전적으로 해외비즈니스를 추진하였다.
1990년대 후반에는 대우그룹의 해외법인수가 420개에 이를 정도였다. 그 한가운데 대우자동차가 자리했다. 1990년대 중후반 국내의 다른 자동차회사들은 해외생산법인이 극소수였으나, 대우자동차는 동유럽과 중앙아시아, 북아프리카와 중동, 중국과 동남아시아 등 해외에 총 16개의 자동차생산법인을 운영했었고 영국과 독일에 자동차기술연구소를 설립했으며, 자동차판매법인은 6대주에 걸쳐 촘촘히 운영해왔다.
당시 전략기획담당 임원이었던 나는 해외사업장인수(M&A), 해외기술도입, 해외법인경영점검 등의 목적으로 매우 빈번하게 해외출장을 다녔다.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러시아정부가 재산의 사유화정책을 도입키로 한 1992년, 모스크바에 위치한 자동차공장을 인수하기 위해 현지로 뛰어가면서부터 본격적으로 M&A목적의 출장이 시작되었다. 지구 남반구에 위치한 남미, 오세아니아, 아프리카의 여러 국가들도 당연히 출장대상 지역이었다. 업무상으로 40개가 넘는 국가로 출장을 다녔으며, 목적지가 워낙 멀어 30시간 가까이 비행기를 탄 경우도 여러 차례 있었다.
더 큰 문제는 해외출장시점이었다. 민족의 명절인 추석과 설날(구정)은 예외 없이 해외출장일정이 잡혀졌다. 해남 시골마을출신이지만 명색이 장남인 나는 부모님과 조상에게 전혀 제구실을 못하는 불효자가 되어버렸다.
회사의 핵심가치가 희생?
앞에서 이야기한 대우의 세계경영은 1990년대 당시 유럽에서 ‘김키스칸’ (김우중 회장을 현대판 징키스칸이라고 함)이라는 용어가 생길정도로 유럽, 미국 등 선진 경제권을 포함, 전 세계적인 비즈니스토픽이 되어버렸다. 그러다보니 세계 각지의 외신기자들이 대우, 특히 대우자동차를 취재하려고 회사를 자주 방문하였다. 그래서 나는 본의 아니게 일상 업무에 더하여 외신기자 대변인(spokesman)을 맡아야했다. 예외 없이 나온 질문은, 대우는 동시 다발적으로 해외비즈니스에 엄청난 투자계획을 발표했는데, ‘이러한 프로젝트에 들어갈 막대한 자금은 어떻게 조달할 계획입니까’ 이었다. 물론 이에 대한 답변준비는 미리 해두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음으로 많은 질문은 대우자동차의 비전과 핵심가치에 관한 거였다. 당시 핵심가치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훈으로 대신 설명했는데, 대우그룹사훈은 ‘창조’, ‘도전’, ‘희생’ 이었다. 문제는 ‘희생’이라는 단어였다. 그 어느 종업원들이 희생하려고 회사에 들어왔겠느냐며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항의 아닌 항의였다. 서양인들을 비롯한 외국기자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어느 외신기자는 꼭 그러한 용어를 고집하고 싶으면 ‘희생(sacrifice)’ 대신 ‘헌신(devotion)’으로 바꾸라고 조언해줬던 기억이 난다. 외신기자 대변인을 한 바람에 나는 영국의 BBC, 일본 NHK, 싱가포르국영TV등에 방영되고, 미국의 Wall Street Journal을 포함한 여러 신문에 내 인터뷰내용이 종종 실렸다.
회사의 생존을 위한 나의 책무-1대16싸움
내가 소속된 대우그룹도 국난에 준하는 1997년 말 외한위기를 피해 가지 못했다. 당시 국내외에 대규모투자를 단행했던 터라 투자금회수를 할 겨를도 없이 재무적인 어려움에 빠져, 1999년 말 그룹 주요계열사가 워크아웃에 들어가면서 대우그룹은 해체되어버렸고 대우자동차도 예외는 아니었다.
혹독한 사내구조조정과 더불어 부품공급협력업체와 국내 및 해외 판매망이 무너지면서 회사의 비즈니스 생태계가 크게 붕괴되었다. 채권단과 경영진을 포함한 관련기관의 폭넓고 깊이 있는 논란을 거쳐 고용, 수출 등 측면에서 영향력(impact)이 엄청난 대우자동차를 생존시키는 방안으로 글로벌 자동차기업으로의 매각방안이 결정되었다. 국제입찰은 실패했고, 당시 대우자동차에 약간이나마 관심을 가질만한 기업은 과거에 대우와 합작경험이 있는 GM뿐이었다.
이젠 공이 당시 대우자동차의 기획총괄임원이었던 나에게 던져졌다. 비록 최근에 군산공장을 폐쇄하고 한국철수 운운할 정도로 GM에 대한 감정이 최악에 달했지만, 당시로는 회사생존을 위한 다른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회사를 살려 2만여 직원들과 수십만 명에 달하는 협력업체직원들을 최우선적으로 염두에 둬야했었다. 2001년 8월초 방한한 16명의 GM 조사단을 상대로 나는 서울시내 모 호텔에서 그들을 설득하는 임무를 맡았다. 당시 GM본사 이사회멤버들의 분위기는 대우자동차인수에 부정적이었다. 비밀 유지상 대우자동차 측에서는 나 혼자 참석하고 GM측 대표단은 마케팅, 연구개발, 생산, 구매, 재무, 인사, 품질, 법무 등 모든 기능을 총 망라하고 있었으며 통역관은 당연히 두지 않았다. GM이 원하는 것을 꿰뚫고 있었던 나는 20여 페이지의 자료를 만들어 프리젠테이션을 했는데 예상했던 대로 여기저기 송곳 같은 질문이 쏟아졌다. 회사전반을 아우르는 기획총괄임원이면서 외신기자 상대 대변인까지 경험한 나도 GM의 각 기능별 전문가의 예리한 영어질문에 땀을 흘려야했다. 키포인트를 집어 설명한 덕분에 4시간 반에 걸친 토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글이 길어져 키포인트에 관한 내용은 다른 기회가 있으면 상세하게 정리해둘 생각이다.
그날 회의결과는 GM본사 이사회에 보고되었으며, 대우자동차인수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런 결실 때문이었던지 2009년 5월 자동차의 날 기념행사에서 나는 대우자동차 세계경영의 기초를 설계하고 GM대우 경영을 정상화한 공로로 정부로부터 동탑산업훈장을 수상했다.
즐거움으로 시작한 제3막의 삶
우리나라사람들 뿐 만 아니라 서양 사람들도 흔히 인생을 세단계로 구분하곤 한다. 태어나서 학업을 마칠 때까지가 제1막, 주된 직업이나 직장에서 일하는 기간을 제2막, 주된 일 은퇴 후 여유를 갖고 지내는 기간을 제3막이라고 말하곤 한다.
나의 인생3막은 전혀 예상하거나 계획하지 않은 상태로 찾아왔다. 2010년 회사(GM대우)에서 은퇴할 무렵 몇몇 협력업체 기업주들로부터 자기회사 책임을 맡아달라는 제의가 들어왔는데, 뜻밖에 가톨릭대학교로부터도 초빙교수 제의가 들어왔다. 나이는 들었지만 새로운 일에 도전해보고 싶은데다 평소 학구적이었던 나의 적성을 고려하여 학교에서 일하기로 결심했다. 경영학부비전임 초빙교수로 강의를 하다가 1년 후 전임교원인 산학협력중점교수로 발령을 받았다. 교육 외에도 연구, 봉사의 업무가 주어졌다. 앞만 보면서 달려왔던 나의 지난 삶의 패턴은 학교에 출근하면서 크게 달라졌다. 대다수 학생들이 아르바이트, 경제적 문제, 취업준비, 미래에 대한 고민 등을 가지고 있었다. 회사원출신인 나는 학생들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학생들에게 어떻게 더 다가갈 것인가, 학교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것은 없는가라는 마음을 지닌 채 새로운 출발을 했다.
하지만 초기부터 어려운 과제가 주어졌다. 석사과정 외국인 대학원생들 논문지도와 더불어 수업을 요청받았다. 물론 영어강의였다. 대학원생들을 상대로 영어로 강의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원서를 정독하고 인터넷과 미디어 등에서 기업사례를 찾아 PPT수업자료를 만들어 열심히 강의를 하고, 발표와 토론, 기업탐방 등 최선을 다했더니 학생들 반응이 너무 좋았다. 내가 회사 재직 시 시간을 내 서강대, 서울대 국제대학원, 연세대, 일본 동경대 등을 비롯한 여려 대학에서 특강을 해본 경험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
연구실적도 중요해 국내외학술지에 몇 개의 논문을 발표했는데, 2016년2월에는 한국경영학회가 선정한 최우수논문상을 수상하는 행운도 얻었다. 영어논문이었는데 현대자동차의 글로벌경영성공사례를 한국적경영과 한국적기업가정신이론을 접목해 작성한 논문이었다. 나는 공동저자로 참여했다. 2015년 정년퇴임이후 비전임으로 되돌아와 지금도 경영학부에서 마케팅과 경영전략관련 두 과목 강의를 하고 있다.
언젠가 어느 학생으로부터 ‘교수님 수업이 기다려져요!’ 라는 이메일을 받았다. 학교수업이 즐겁고 행복한 이유다. 나에게는 돈을 벌기위해 학교에 출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돈을 쓰려고 출근한다는 말이 더 어울린다. 학생들에게 도서상품권도 주고, 자주 커피도 사주고 밥도 사주고 있다. 와튼스쿨의 애덤 그랜트 교수는 Give and Take 라는 논문에서 주는 사람이 성공할 확률이 높다고 하였다. 나는 학생들에게 베푸는데 머물지 않고 진심으로 그들을 사랑하며 위하며 도와주고 싶었고 또 그렇게 해 왔다고 자부한다. 학생들의 수업에 관한 질문사항은 물론 성적문의까지 학생입장에서 최선을 다해 친절하게 답변을 해왔다. 주는 삶이 행복하기 때문이다. 지난 8년간 내 수업에 참여한 학생들의 출신국가는 유럽, 북미, 남미, 아시아 등 17개국으로 이 학생들은 유학 또는 교환학생으로 우리 학교에 왔다. 일부 외국인학생들은 졸업 후 우리나라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으나, 대부분의 학생들은 자국이나 제3국에 거주하고 있는데, 그중 일부는 이메일이나 카톡을 통해 소식을 전해오고 있다.
난 솔직히 우리 광고친구들을 좋아하지만 지난 수십 년 동안 바쁜 회사일을 핑계로 모임에도 자주 참석하지 못했고 경조사에도 소극적이었으니 너무 미안한 생각이 든다. 다행히 몇 년 전부터 여러 모임에 참석해 친구들을 자주 만나고 간혹 쏘는 기회를 갖게 도니 너무 감사하고 행복할 따름이다. 고생해온 집사람과 함께 여유를 갖고 국내외 여행을 하고 좋아하는 먹거리를 찾는 즐거움도 인생3막에서나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Integrity, Commitment
지금까지 생활해오면서 가장 가치 있는 두 단어를 고른다면 하나는, 정직과 성실을 뜻하는 Integrity, 다른 하나는, 일에 몰입이라는 의미의 Commitment를 주저 없이 택하고 싶다. 난 사회적으로 출세하지도 않았고 평범한 사회인이지만 그간의 경험을 통해 느꼈기 때문이다. 회사가 위기를 맞으면서 경영권이 수차례 바뀌고 CEO가 수십 번 교체되는 동안 내가 임원으로 15년간 재직할 수 있었고 정년퇴임으로 인생2막을 보낼 수 있었던 것, 학교에서 인생3막을 시작하고 두 번째 정년퇴임과 퇴임이후 학교의 요청에 의해 지금까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은 바로 이 두 단어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온 거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 광고 17회 친구들, 늘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