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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장엄경론 제7권
15. 교수품(敎授品)[1]
[여래의 교수]
[釋] 이미 보살의 수수(隨修)를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여래의 교수에 대해 말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행(行)이 한 아승기(阿僧祇)가 다하도록
믿음을 증장하여 증상하게 한다.
여러 착함이 믿음을 따라 모였으니
또한 갖추기를 바다가 가득하듯 하다.
[釋] ‘행이 한 아승기가 다하도록 믿음을 증장하여 증상(增上)하게 한다’고 함은
만일 여러 보살의 행이 행하여 한 아승기의 겁이 다하였을 때에 믿음을 장양(長養)해서 바야흐로 최상의 품에 이른다.
[문] 홀로 믿음만이 증장합니까?
[답] 온갖 착한 것이 믿음을 따라 모이는 것이 또한 갖추어 바다가 가득함과 같다고 하였으니,
이른바 믿음이 증장할 때에 일체의 착한 것이 믿음을 따라 모여서 또한 구족함을 얻는 것이 마치 큰 바다의 물이 담연(湛然)하여 원만함과 같다.
게송으로 말한다.
복과 덕을 모아 마치면
불자(佛子)가 가장 처음 청정하여서
지극한 지혜와 부드러운 마음으로
부지런히 여러 바른 행을 닦는다.
[釋] ‘복과 덕을 모아 마쳤다’고 함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복과 덕을 모았기 때문이다.
‘불자가 가장 처음 청정하다’고 함은 청정함을 호지하였기 때문이요, 대승에서 정직한 지견과 전도되지 않은 받음의 뜻을 지었기 때문이다.
‘지극한 지혜’라 함은 많이 보고 들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부드러운 마음’이라 함은 모든 장애를 여의었기 때문이다.
‘부지런히 여러 바른 행을 닦는다’고 함은 감능(堪能)함이 있기 때문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이 뒤로는 모든 부처님의
법의 흐름과 교수함을 입어서
적정의 지혜를 증익하고
널리 대승에 진취(進趣)한다.
[釋] ‘이 뒤로는 모든 부처님의 법의 흐름과 교수함을 입는다’고 함은
여러 보살이 이로부터 이후로 모든 부처님 여래의 경[修多羅] 등의 법으로써 그를 위하여 설해 줌을 입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그를 위하여 십지경(十地經)을 설한 것과 같다.
‘적정의 지혜를 증익하고 널리 대승에 진취한다’고 함은
이 보살이 만일 교수함을 얻으면 사마타의 지혜를 증익하고 널리 대승에 능히 닦아 나아가는 것이다.
[여섯 가지의 마음을 일으킴]
이와 같이 교수함을 얻었으니,
다음에는 여섯 가지의 마음을 일으키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이름을 생각하고 글귀를 요달하며
뜻을 생각하고 또한 뜻을 알며
법을 종합하고 뜻을 구하는
여섯 마음이 차례로 일어난다.
[釋] ‘여섯 가지의 마음’이라 함은
첫째는 근본 되는 마음이요, 둘째는 따라 행하는 마음이요, 셋째는 관찰하는 마음이요, 넷째는 사실을 아는 마음이요, 다섯째는 종합하여 모은 마음이요, 여섯째는 바라는 마음이다.
‘이름을 생각한다’고 함은 이른바 근본 되는 마음이다. 처음 경[修多羅] 등에서 법을 관찰하여 두 가지의 뜻이 있지 아니하고 오직 이름의 무더기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글귀를 요달한다’고 함은 이른바 따라 행하는 마음이다. 차례대로 여러 글귀를 따라서 차별과 순서를 결정하여 요달하기 때문이다.
‘뜻을 생각한다’고 함은 이른바 관찰하는 마음이다. 차례대로 그 뜻의 안에서 바로 사유하기 때문이다.
‘뜻을 안다’고 함은 이른바 사실을 아는 마음이다. 그에 있어서 뜻을 생각하며 여실하게 알기 때문이다.
‘법을 종합한다’고 함은 이른바 종합하여 모은 마음이다. 다시 앞의 법을 모아서 종합하여 관하기 때문이다.
‘뜻을 구한다’고 함은 이른바 바라는 마음이다. 의취(義趣)에서 뜻 얻음을 구하기 때문이다.
[열한 가지의 작의를 일으킴]
이와 같이 여섯 가지의 마음을 일으켜 마쳤으니,
다음에는 열한 가지의 작의를 일으키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구함이 있고 또한 관이 있으며
일미(一味)이고 장차 지도(止道)이며
관도(觀道)이고 2구(俱)이며
발침(拔沈)과 아울러 억도(抑掉)이고
정주(正住)와 더불어 무간(無間)이며
중간에서 또한 존중하여서
마음을 일체의 인연에 두고
작의에 열한 가지가 있다.
[釋] ‘열한 가지의 작의’라 함은
첫째는 각(覺)이 있고 관(觀)이 있는 작의이며,
둘째는 각은 없고 관이 있는 작의이며,
셋째는 각도 없고 관도 없는 작의이며,
넷째는 사마타(奢摩他)의 작의이며,
다섯째는 비발사나(毗鉢舍那)의 작의이며,
여섯째는 두 가지가 서로 응하는 작의이며,
일곱째는 모양을 일으키는 작의이며,
여덟째는 모양을 조섭하는 작의이며,
아홉째는 모양을 버리는 작의이며,
열째는 항상 닦는 작의이며,
열한째는 공경하는 작의이다.
‘구함이 있다’고 함은 이른바 각이 있고 관이 있는 작의이다. 이 작의는 뜻으로써 말한 것이니 상속(相續)해서 여러 법을 관찰하는 것이다.
‘관이 있다’고 함은 이른바 각은 없고 관이 있는 작의이다. 이 작의는 비록 각을 여의었으나 또한 뜻과 말로써 상속해서 여러 법을 관찰하는 것이다.
‘일미(一味)’라 함은 이른바 각도 없고 관도 없는 작의이니, 이 작의는 뜻과 말을 여의었지만 그러나 상속해서 여러 법을 관찰하는 것이다.
‘지도(止道)’라 함은 이른바 사마타의 작의이니, 이 작의는 다만 여러 법의 이름을 반연하는 것이다.
‘관도(觀道)’라 함은 이른바 비발사나의 작의이니 이 작의는 다만 여러 법의 뜻을 반연하는 것이다.
‘2구(俱)’라 함은 이른바 두 가지가 서로 응하는 작의이니, 이 작의는 능히 한꺼번에 이름과 뜻을 반연하는 것이다.
‘발침(拔沈)’이라 함은 이른바 모양을 일으키는 작의이니, 이 작의는 만일 이름을 반연하여 마음이 침잠하면 곧 능히 책기(策起)하기 때문이다.
‘억도(抑掉)’라 함은 이른바 모양을 조섭하는 작의이니, 이 작의는 만일 뜻을 반연하여 마음이 흩어졌으면 곧 능히 조섭하여 가지기 때문이다.
‘정주(正住)’라 함은 이른바 모양을 버리는 작의이니, 이 작의는 만일 마음이 평등하면 능히 버리는 마음에 머물기 때문이다.
‘무간(無間)’이라 함은 이른바 항상 닦는 마음을 짓는 것이니, 이 작의는 능히 정주(正住)를 의지하여 닦아 익힘을 폐지하지 않는 것이다.
‘존중한다’고 함은 이른바 공경의 작의이니, 이 작의는 능히 익힐 때에 이름과 뜻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아홉 가지의 머무는 마음]
이와 같이 열한 가지의 작의를 일으켜 마쳤으니,
다시 마땅히 아홉 가지의 머무는 마음을 닦아 익히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계연(繫緣)과 장차 속섭(速攝)과
내략(內略)과 낙주(樂住)와
조염(調厭)과 식란(息亂)과
미혹이 기멸(起滅)하는 것, 또한 그러함과
소작(所作)의 마음이 스스로 흐르는 것과
그때에 무작(無作)을 얻는 것을
보살이 다시 마땅히
이와 같은 아홉 가지의 머무는 마음을 닦아야 한다.
[釋] ‘아홉 가지의 머무는 마음’이라 함은
첫째는 안주(安住)하는 마음이요,
둘째는 섭주(攝住)하는 마음이요,
셋째는 해주(解住)하는 마음이요,
넷째는 전주(轉住)하는 마음이요,
다섯째는 복주(伏住)하는 마음이요,
여섯째는 식주(息住)하는 마음이요,
일곱째는 멸주(滅住)하는 마음이요,
여덟째는 성주(性住)하는 마음이요,
아홉째는 지주(持住)하는 마음이다.
이 아홉 가지의 머무는 마음을 교수하는 방편으로 삼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계연(繫緣)’이라 함은 이른바 안주(安住)하는 마음이니, 마음을 소연(所緣)에 두어서 흩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속섭(速攝)’이라 함은 이른바 섭주(攝住)하는 마음이니, 만일 마음이 어지러움을 깨달으면 속히 섭지(攝持)하기 때문이다.
‘내략(內略)’이라 함은 이른바 해주(解住)의 마음이니, 각의 마음이 밖으로 퍼지면 곧 안을 다스리기 때문이다.
‘낙주(樂住)’라 함은 이른바 전주(轉住)의 마음이니, 정(定)의 공덕을 보아서 계속하여 즐겁게 머물기 때문이다.
‘조염(調厭)’이라 함은 이른바 복주(伏住)의 마음이니, 마음이 만일 즐겁지 못하면 마땅히 절복(折伏)하기 때문이다.
‘식란(息亂)’이라 함은 이른바 식주(息住)의 마음이니, 어지러움의 허물과 실수를 보고서는 그치게 하기 때문이다.
‘미혹이 기멸(起滅)하는 것, 또한 그렇다’고 함은 이른바 멸주(滅住)의 마음이니, 탐심과 근심 등이 일어나면 곧 멸하여 없애기 때문이다.
‘소작(所作)의 마음이 스스로 흐른다’고 함은 이른바 성주(性住)의 마음이니, 짓는 것이 임운(任運)하여 자기의 성품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때에 무작(無作)을 얻는다’고 함은 이른바 지주(持住)의 마음이니, 작의로 말미암지 않고 총지(摠持)를 얻기 때문이다.
[마음으로 하여금 최상의 유연함을 얻게 함]
이와 같이 주심을 얻었으니,
다음에는 이 마음으로 하여금 최상의 유연함을 얻게 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하품(下品)의 몸을 의지하여 닦아 나아가게 하고
나아감을 위하여 본정(本定)을 닦으니
청정한 선이 신통을 위하기 때문에
마땅히 뛰어나고 유연한 마음을 이룬다.
[釋] ‘하품의 몸을 의지하여 닦아 나아가게 하고 나아감을 위하여 본정(本定)을 닦는다’고 함은 보살이 주심(住心)을 얻었을 때에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미 하품(下品)을 얻었으니 몸을 의지하고 마음을 의지한다. 이 의지를 증진하기 위하여 다시 근본 선정을 닦는 것이다.
[문] 다시 본정을 닦는 것은 어떤 공덕을 위함입니까?
[답] 청정한 선은 신통을 위한 것이기에 마땅히 뛰어나고 유연한 마음을 이루어야 한다.
여러 보살이 온갖 신통을 일으키기 위함이며 가장 뛰어나고 유연한 마음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기에 본정을 닦아 나아가는 것이다.
[문] 온갖 신통을 일으켜서는 무엇을 짓고자 하며, 뛰어나고 유연한 마음은 다시 어떻게 성취합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신통을 일으켜서 여러 세계에 노닐면서
여러 세존을 역사(歷事)한다.
가장 높은 유연한 마음을 얻어서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기 때문이다.
[釋] ‘신통을 일으켜서 여러 세계에 노닐면서 여러 세존을 역사(歷事)한다’고 함은
여러 보살이 한량없는 세계에 가고자 함이요,
한량없는 시겁(時劫)의 수를 지나면서 한량없는 여러 부처님을 역사(歷事)하고자 함이며,
그 부처님들을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며 바른 법을 듣고자 함이니,
이러한 일들을 위하기에 온갖 신통을 일으키는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이러한 일들을 짓습니까?
[답] 최상의 유연한 마음을 얻어서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기 위함이다.
그것은 여러 부처님께 공양함을 인으로 삼기 때문이요,
다시 제일 뛰어나고 유연한 마음의 성취를 얻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뛰어난 마음을 얻었으면 문득 여러 부처님의 칭양(稱揚)하심을 얻을 것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청정한 마음에 들어가기 전에도
다섯 가지의 칭양함을 얻으면
기체(器體)가 청정함을 이루기 때문에
위없는 승(乘)에 나아가게 된다.
[釋] ‘청정한 마음에 들어가기 전에도 다섯 가지의 칭양함을 얻는다’고 함은 이
른바 이 보살이 정심지(淨心地)에 들어가기 전에 여래의 칭양하시는 다섯 가지의 공덕을 먼저 얻는 것이다.
[문] 이 칭찬이 보살에게 어떠한 이익이 있습니까?
[답] 기체(器體)가 청정함을 이루기 때문이요, 위없는 승에 나아가기 때문이니,
보살이 여래의 칭찬을 받았으면 청정한 기체를 이미 성취하게 되어 위없는 승에 진입(進入)하게 된다.
[문] 여래가 저 보살들을 칭찬하시면 어떠한 것들의 다섯 가지의 공덕이 있습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생각생각이 여러 습기(習氣)를 녹이고
몸을 의지하고 마음을 의지한다.
둥글게 밝음과 더불어 견(見)의 모양은
원만 청정한 여러 법의 몸이다.
[釋] 다섯 가지의 공덕이라 함은 첫
째는 융습(融習)이요, 둘째는 신의(身倚)요, 셋째는 심의(心倚)요, 넷째는 원명(圓明)이요, 다섯째는 견상(見相)이다.
융습이라 함은, 하나하나의 찰나에 일체 습기의 무더기를 녹여 없애는 것이다.
신의라 함은, 가볍고 편안함을 닦아 익혀서 몸에 두루 가득하기 때문이다.
심의라 함은, 또한 그러하다.
원명이라 함은, 온갖 종류의 공(空)을 원만하게 이해하는 것이니, 공은 분수(分數)를 여의었기 때문이다.
견상이라 함은, 분별이 없는 모양을 보아서 뒤의 청정한 인을 삼기 때문이다.
원만 청정한 여러 법의 몸이라 함은, 원만함이 되고 청정함이 되는 모든 종류의 법의 몸은 항상 이와 같은 다섯 가지의 인을 짓기 때문이다.
[문] 어느 때에 가득 차고 어느 때에 청정합니까?
[답] 10지(地) 때에 가득 차고 부처님의 지위에서는 청정하다.
이 가운데서 마땅히 알아야 한다.
다섯 가지의 공덕에서 앞의 셋은 사마타의 분(分)이고,
뒤의 둘은 비발사나의 분이다.
보살이 이때에 세간의 법을 다 구족하게 된다.
[통달분의 선근을 일으킴]
이와 같이 칭양함을 얻었으니,
다음에는 통달분의 선근을 일으키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그때에 이 보살은
순서대로 정의 마음을 열어서
오직 뜻과 말만을 보고
일체의 뜻은 보지 못한다.
[釋] 보살은 처음으로 정의 마음을 얻어서 뜻과 말을 벗어나고 자기 모양과 총상(摠相)의 여러 뜻을 보지 못하여 오직 뜻과 말을 보게 된다.
이러한 견(見)은 곧 보살의 난위(煖位)이다.
이 지위를 명(明)이라고 이르니, 부처님께서 회하경(灰河經)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이 명을 밝혀서 견법인(見法忍)이라고 이른다.
게송으로 말한다.
이 법의 명(明)을 키우기 위하여
견고하게 정진을 일으킨다.
법의 명이 증장하여 마치면
오직 마음에 머묾을 통달한다.
[釋] 여기서는 보살이 법의 명을 증장하기 위하여 견고하게 정진함을 일으킨다.
이 법의 명에 머물면 유심(唯心)을 통달한다. 이 통달이 곧 보살의 정위(頂位)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모든 뜻은 다 빛이다.
오직 마음을 보기 때문이다.
소집(所執)의 어지러움을 끊으면
이것이 곧 인(忍)에 머문다.
[釋] 여기서 보살이 만일 여러 뜻이 다 마음의 빛임을 보고 마음의 빛 밖에 따로 다른 견이 있음은 아니다.
그때에 집착한 것의 어지러움이 멸해 없어짐을 얻게 되니, 이 견이 곧 보살의 인위(忍位)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소집의 어지러움을 비록 끊으나
아직도 능집(能執)이 남아 있다.
그러기에 이를 끊고 다시 속히
무간 삼마제를 증득한다.
[釋] 여기서는 보살이 능집의 어지러움을 끊기 위하여 다시 속히 무간 삼마제를 증득한다.
[문] 무슨 뜻이 있기에 이 삼마제를 무간이라고 이릅니까?
[답] 능집의 어지러움이 멸하여 없어질 때에 그때에 무간에 들어가기 때문에 이 이름을 받았다.
이렇게 무간에 들어감이 곧 보살의 세간 제일의 법위(法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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