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애의 피리 음악으로 그린 바람 그리고 실크로드
-판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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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애의 피리 음악으로 그린
바람과 실크로드
발행_2022년 1월 20일
편찬자_한국음악평론가협회
표지 디자인_엄대호
펴낸곳_한국음악평론가협회
찍은곳_아시아문화 서울시 성동구 자동차시장1길 94-15
등록_2020-000069호(등록일 2020. 7. 8.)
펴낸이_전인평
정가 15,000원
ISBN 979-11-977168-1-2
주문_010-8775-3459, peacemusic@hanmail.net
※ 저자와의 협의 하에 인지는 생략합니다.
※ 이 책의 판권은 한국국민악회에 있습니다.
양측의 서면 동의 없는 무단 전제 및 복제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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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피리는 아시아 전 지역에서 볼 수 있는 보편성을 지닌 악기로 이중 우리나라 피리는 가장 원초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다. 피리 소리는 투박하며 단조롭지만 연주자의 미세한 숨소리까지 청중에게 전달되어 듣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호소력이 있다.
이 단순하고 작은 악기로 여러 쟝르의 음악을 섭렵하며 숨가쁘게 달려가던 경기도립국악단의 피리 연주자 김승애가 문득 자리에 멈춰섰다. 그리고 신악회 여섯 작곡가에게 길을 물었다. 한국음악을 위해 고민하는 연주자와 작곡가가 서로 만나 한국음악의 현재를 점검해 보고 미래를 위한 고민을 함께 나누기 위해서다.
신악회는 1963년 국악작곡가들 중심으로 창단되어 50여 년간 꾸준히 창작 활동을 이어온 단체이다. 이 책은 2012년 이해식, 전인평, 윤소희, 윤명원, 계성원, 안승철 등 6명 작곡한 초연 작품을 엮은 것이다.
독주회에서 초연곡으로 전 공연을 마련하는 일은 엄청난 모험이다. 모험은 어렵지만 즐거운 일이다. 김승애가 이 모험을 어떻게 즐기는지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을 준다. 김승애는 그동안 닦은 공력을 바탕으로 땀을 흘리며 즐기며 이 모험을 돌파해 나갈 것이다. 김승애가 물어본 피리의 길을 여섯 작곡가는 어떤 답을 주었을까? 작곡가의 개성 넘치는 시선으로 바라본 피리의 매력을 김승애가 어떻게 다양하게 나타낼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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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보기
지난 40년간 필자의 머리를 한시도 떠나지 않은 명제가 있었다.
“실크로드 음악의 역사”라는 책을 써보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실크로드를 탐사라는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당나라의 장안(長安)이었던 시안(西安)을 갔다. 엄청난 문물에 입을 다물지 못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실망도 컸다. 도대체 중국 학자들이 영어를 못하는 것이었다. 눈 구경은 풍년이었지만, 학자로서의 갈증을 풀지 못하고 큰 벽을 실감하고 돌아왔다. 중국 책값은 무척 싸서 익지도 못하는 중국어 문헌을 잔뜩 사 가지고 돌아왔다.
그래서 ‘중국에서 영어를 하는 학자를 찾는 것보다 내가 중국어를 공부하는 편이 쉽겠다’하는 생각이 들었다. 속담에도 ‘목마른 사람이 샘 판다’라는 말이 있듯이 아쉬운 마음에 10년을 작정하고 중국어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막상 공부를 시작하고 보니, 중국어가 그렇게 어려운 언어가 아니었다. 그 동안 틈틈이 익혀온 일본어도 큰 바탕이 되었다. 영어 공부하는 공력의 10%만 기울이면 되는 것이 중국어였다.
사실 처음의 계기는 1985년에 시작되었다. 나의 첫 현장 연구는 인도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그 때 사실 떠밀려서 인도를 향하고 있었다. 실력없다 몰아치는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뒤로하며 떠난 여행이었다. 그런데 인도에서의 고립 생활은 나의 음악적 안목을 넓혀 주었다. 내가 우물 안 개구리였음을 실감한 것이다.
그 다음에 결정적인 계기는 1991년에 찾아왔다. 당시는 아직 고르바쵸프가 실각하기 전인 소비엣 사회주의 연방 시절이었다. 유네스코 파리 본부에서 실크로드 탐사 계획을 세우고 추진하였다. 당시 한국 측 조정위원장인 전 서울대 교수 고병익 박사께서 필자를 한국 대표로 추천해 주었다. 이 탐사는 세계의 60여명 석학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프로젝트였다. 범위로는 중앙아시아 5개국을 포함하였고 기간은 60일간이었다. 트르크메니스탄의 아시하바드에서 시작한 탐사는 우즈벡키스탄,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키르키즈스탄을 거처 파미르 고원을 샅샅히 뒤지는 여행이었다. 당시 소련은 공산당 체제여서 가는 유적지마다 그 유적의 전문가가 나와 안내를 하고, 저녁에서 세계 여러 나라의 석학들과 토론을 벌이곤 하였다. 이 실크로드 탐사로 얻는 가장 큰 성과는 실크로드 역사를 어느 정도 파악한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의 원정으로 그리스 문명과 인도 문명이 만나 간다라 문명을 만들고 이것이 당나라에 이르러 문명의 꽃을 피우는 과정을 몸소 체험한 것이다. 더욱 소중한 것은 이 60일 동안 만난 학계의 저명한 인사들이다.
다음 기회는 1997년의 개인적인 6개월의 실크로드 현장 연구였다. 음악에서는 아랍음악이 무척 중요하다. 인도음악의 많은 부분이 아랍음악이고, 이 아랍음악은 스페인과 프랑스 음악에 영향을 주어 서양음악의 뿌리를 이루고 있다. 아랍음악에 대한 갈증을 이기지 못하여 학교 생활을 6개월 쉬기로 이집트의 카이로로 날아갔다. 카이로에서 한 달을 보내고 나일강을 따라 룩소르로 내려갔다가 요르단, 이스라엘, 시리아, 아랍, 이란, 파키스탄을 거쳐 쿤자라브 패스를 버스로 넘었다. 그리고 드디어 카슈가르를 거쳐 우루무치에 이르고 보니, 몸도 마음도 지쳐 꼼짝도 못하게 되었다. 아랍세계를 다니다 중국에만 들어와도 마음이 푸근해 졌다. 그래도 내가 중국말을 한다는 점이 그리고 즐겨먹는 중국 음식이 나를 편안하게 해주었는지 모르겠다. 거기다가 실크로드 연구소의 주칭빠오(周菁葆) 교수의 반가와 하는 마중이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이제 지난 20년을 생각해 보니, 내가 실크로드에 홀려 있었던 모양이다. 그 고생에 그 엄청난 돈을 쓰면서 왜 그렇게 열심히 돌아다녔는지,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제 지난 20년을 생각해 보니, 내가 실크로드에 홀려 있었던 모양이다. 그 고생에 그 엄청난 돈을 쓰면서 왜 그렇게 열심히 돌아다녔는지,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수가 없었을 것이다.
아직 애초에 꿈꾸었던 『실크로드 음악의 역사』는 아직 작업 중이지만, 부산물로 『동북아시아 음악사』를 썼다. 이 책은 그야말로 부산물이다. 외국 답사 여행을 마치고 나면 잡지 신문 등에서 부탁을 받아 하나 하나 써 모은 것이다.
이제 현장 연구는 일단 마감을 하게 되었다. 할 필요가 없어서가 아니라 건강이 허락치 않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몸이 건강할 때, 현장 연구를 많이 한 것이 여간 다행이 아니다
여행을 나를 고립시킨다. 주위가 익숙할만하면 떠나야 하는 것이 여행이다. 때로는 30시간 기차 여행을 하기도 하였다. 수많은 사람이 기차 안에 함께 있지만 나는 완전 고립된 사람이었다.
누군가 이야기하였다. “모든 성취는 인간의 완전한 고립 속에서 성취된다.”, “소외는 인간을 성숙시킨다.”
‘소외’, 스스로 고립을 원하여 고립되었다면 이는 사치다. 그러나 고립이 강요된 사람은 가슴 아픈 슬픔을 되씹게 된다. 나는 강요된 고립 속에서 아시아음악을 연구하였다. 나는 국악계에서 아시아음악으로 돌파구를 찾아야 했었기 때문이다. 내가 쓴 이 글에는 내 가슴에 든 퍼런 멍 자죽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그만큼 이 글은 고통을 감내하며 쓴 글이다.
국내에서의 여행도 고달픈 일이거늘 하물며 낯설고 물설은 외국에서의 여행은 고달프기 짝이 없다. 더구나 잘 알려진 관광명소를 찾아다니는 것도 아니고 음악을 찾아다닌다는 일은 여간한 인내심이 없이는 계속하기 어렵다. 그러나 여행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찾아낸 음악은 말할 수 없이 소중하기 마련이다.
그 동안 동양음악에 대한 연구는 동양 학자들이 이루어 놓은 연구업적보다 서양의 학자들이 연구한 것이 많았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의 대부분은 서양사람의 입장과 안목으로, 그리고 서양사람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이 많다. 그래서 우리 나라와의 관계를 살피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는 우선 서양 학자의 글에 덜 의지하려고 애를 썼다.
이러한 목마름 때문에 나는 직접 실크로드 상의 음악 현장을 찾아다녔다. 현장에서 듣는 음악은 아주 신선하다. 통조림 음식은 아무리 조리법이 훌륭해도 그것은 역시 깡통음식일 수밖에 없듯이, 레코드 음악은 그 녹음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다해도 그것은 통조림 음악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현장의 음악은 마치 새벽 어시장에서 막 배에서 내린 비린내나는 생선을 대할 때의 싱싱함이 있다. 이러한 매력 때문에 나는 마치 초등 학생이 방학을 기다리듯 방학을 기다리다가 방학만 되면 여러 곳을 쏘다녔다.
다행히도 대학교수라는 내 직업은 다른 어떤 직업보다도 방학이 길기 때문에 이와 같은 나의 연구에 편리함이 있었다. 이제 아시아의 음악이라면 어지간히 파악되었다는 자부심을 갖게 되었고 나의 이 소중한 체험을 혼자만 간직하기에는 아까운 생각이 들어 이렇게 책으로 정리한 것이다.
여행을 하면서 여러 번 이런 생각이 들었다. 경치가 아무리 절경이라도 이곳은 내가 떠나야 할 곳이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파키스탄의 라호르에서 정말 눈물나도록 아름다운 크발리 음악을 들었다. 그러나 그 음악은 아무리 좋은 음악이라도 외국음악이다. 된장찌개 냄새를 어떤 사람은 구린내가 나서 싫다고 해도, 역시 나는 된장찌개를 먹어야 속이 편하다. 이처럼 나는 임방울의 <쑥대머리>를 들어야 속이 시원해진다. 인도의 챠우라시아(Pandit Chaurasia)가 연주하는 <바게쉬리 라가>(Bagheshiree raga)가 아무리 기교가 뛰어나도 나는 김성진의 <청성곡>을 들어야 귀가 편하다.
이러한 외국 음악의 현장 연구를 통하여 뼈저리게 깨달은 것이 있다. 한국음악은 참으로 훌륭한 음악이다. 이것은 한국음악만 알고 있었을 때는 그냥 관념적으로만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리나라 음악의 특징을 파악하기 위해 이웃 나라의 음악을 비교해 보니 비로소 보이는 것이었다.
또한 이러한 비교 연구는 우리 나라 음악의 장단점을 더욱 뚜렷이 밝혀주었다. 이것은 마치 나 자신을 이웃과 비교해 봄으로서 키가 작은 나의 모습이 뚜렷이 파악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음악사의 연구와 외국음악과의 비교연구는 상호보완적인 것으로 우리나라 음악의 특징을 밝히는데 요긴하다고 하겠다.
이 글과 음악은 실크로드 상에서 난데없이 나타난 이방인에게 따듯한 미소로 대해 주었던 음악인에게 바친다. 이들의 대가를 바라지 않는 순수한 마음에 보답하기 위해서이다.
실크로드를 알아보자
실크로드! 얼마나 환상적인 이름인가? 이 길을 통하여 동양의 아름다운 비단이 유럽으로 들어갔고, 페르시아의 아름다운 유리 그릇이나 서역 지방의 호두․포도․클로버 등이 동쪽으로 전해지기도 했다.
기원전 1세기의 로마에는 비단이 아주 귀한 물건이었다. 이 비단은 너무 귀해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라도 겨우 한 조각을 얻어 눈에 잘 보이는 자리에 장식으로 봍이는 정도였다. 서기 14년 로마 원로원은 남자들의 비단옷 착용을 금지했다. 비단으로 인한 사치 풍조가 폐해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당시 로마는 중국에서 수입하는 비단과 중앙아시아에서 들여오는 보석의 대금을 금과 은으로 지불하였다.
이후 쿠샨 왕조가 중앙아시아에서 패권을 잡아 육로의 안정성이 확보된 뒤로는 더욱 교역이 늘어났다. 당시 중국인 상인은 파르티아왕국의 훼방 때문에 로마와 직접 교역하지 못하였다. 파르티야의 입장에서는 중개상은 수지 맞는 장사였다.
당시 중앙아시아는 비취옥과 청금석 같은 보석류의 주요 공급처였다. 인도는 향신료와 면직물, 상아를 중국과 서양에 공급하였다. 티베트는 암염을 몽골 남부의 알타이 산맥에서는 금의 공급처였다.
일찍이 이집트에서 만들어진 유리는 페르시아에서 유리그릇으로 크게 발달했는데 이것이 동으로 동을 전해져 신라시대의 고분에서까지 발견되는 것을 보면 실크로드는 결코 먼 나라의 이야기만이 아닌 바로 우리의 생활과 관계가 있음을 느끼게 한다.
유리그릇뿐이 아니다. 여름이면 입맛을 돋우는 포도며, 흔히 클로버라고 불리던 말풀이 이 길을 통해 서역에 들어 왔고, 식탁의 요리재료로 빠질 수 없는 파밀고원의 야생파가 전해진 것이라 한다. 이러한 여러 가지를 미루어 보면 우리 생활은 생각보다는 훨씬 깊게 실크로드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크로드란 한마디로 아시아와 유럽․아프리카를 잇는 옛날부터의 동서 교통로를 말한다. 이 길은 세 대륙을 연결하는 길이므로 그 규모가 엄청나고 매우 복잡할 수밖에 없는 길이다. 그 길은 몇 갈래의 간선(幹線)이 있으며, 그 길의 이용도는 시대에 따라 수없이 변했다.
이를테면, 어느 강대한 세력이 나타나 길을 차단하고 과도한 세금을 요구하면 이를 피하기 위해 멀리 돌아가는 길을 찾아 목적지를 찾아가게 도니 이 글은 점점 복잡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생각된다.
세 가지 실크로드
실크로드는 대개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북방 유라시아 대륙의 스텝지대, 대략 북위 50도 부근을 동서로 횡단하는 길로서‘스텝로드’라 부르고 있다. 이 길은 아주 옛날부터 유목민들이 이용한 길로서 몽골에서 아랄해를 거쳐 아랍북쪽의 흑해연안에 이르는 길이다.
둘째는 중앙아시아의 타클라마칸 사막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발달한 길인데, 대략 북위 30도에서 40도 부근을 횡단하는 길이다. 이 길은 쓸모 없는 사막이고 자연환경이 말할 수 없이 조악한 길이었는데 오히려 이러한 나쁜 자연환경이 여행객에게는 안전상 도움이 된 듯하다. 거의 길 전체가 사막이고 중간에 파밀고원이 차단하고 있으나 도처에 오아시스가 이 길을 연결하고 있어 가장 이용이 많았던 길이다. 이 길을 ‘오아시스로드’라고 하는데 보통 실크로드라면 이 길을 말한다.
셋째는 홍해 또는 페르시아만에서 인도, 동남아시아를 거쳐 중국의 화남(華南)지방에 이르는 길인데 보통 ‘바다의 실크로드’라고 부른다. 이 길은 조선․항해 기술이 크게 발달한 중세 이후에 활발해진 길이다. 특히 근세 이후는 아랍, 중국이 연결되는 길이었고, 16세기부터는 포르투갈․스페인․네덜란드․영국․프랑스 등이 잇달아 이 방면으로 항해무역을 벌여 동서 교역을 독점했다.
이와 같이 실크로드란 요즘 말로 바꾸어 보면 목이 좋은 곳이었다. 목이 좋은 곳은 사람이 많이 모이니 장사가 잘 되고 사람이 많이 모이다 보니 그들은 각자의 문화를 갖고 오게 되고 그 문화가 서로 교류되고 융합되어 새로운 문화를 낳게 한 곳이다. 요즘도 사업의 성패가 좋은 목을 잡는데 달려 있듯이 옛날에도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기에 좋은 목을 잡기 위해 서로 다투며 싸워왔고 여기에서 밀리면 새로운 길을 개척하기도 하는 등 처절한 인간 역사의 무대가 이 길이었다. 이 길은 실크로드란 아름다운 이름으로 불리고 있지만 사실은 이 길의 곳곳은 나그네의 목숨을 노리는 고약한 자연환경과 적이 도사리고 있는 위험천만한 길이었다. 그러나 이런 위험한 길이었지만 무사히 오아시스에 도착하고 나면 저마다 믿는 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저마다 자기가 오고 간 길에 대한 얘기로 꽃을 피웠을 것이다. 그러면 한쪽에서는 자기가 좋아하는 악기를 타기도 하며 노래도 불렀을 것이다. 그러기에 이 길은 인간 생활의 생생한 현장이자 무대로서 문화교류의 무대였다고 생각된다.
이 글은 전인평의 『실크로드, 길 위의 노래>(소나무)에서 머리 부분을 옮겨온 것입니다.
실크로드의 이해를 위하여 적었습니다.
* 참고: Chorus Culture Korea | 실크로드,길위의 노래-전인평 지음 -출판사 소나무 - Daum 카페
: Chorus Culture Korea | [전인평 교수] 파미르를 넘어 서역과 고구려로 이어진 인도음악 / 실크로드, 길 위의 음악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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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굿, 바람 그리고 춤의 작곡가 이해식 교수
2018년 가을 쯤이었다. 이재숙, 김선한, 정재국, 이해식 필자 등 국악과 원로교수가 10명 남짓 모이는 모임이었다. 한양대 피리 담당인 박인기 교수가 한 마디 하였다.
“이해식 교수님, 대단해요
선생님 작품은 시간이 갈수록 인정하는 사람이 많아진단 말이야.
다른 사람 작품은 초연이 마지막 연주가 되고, 몇 번 연주되다가 사라지고 마는데 ----.”
그러자 이재숙 교수도 한 마디 거들었다.
“그의 업적 중에 생각나는 것은 가야고 중주곡 <사계>의 편곡입니다. 1995년에 이 악보를 받았는데, 당시는 지금처럼 25현가야고가 널리 사용되고 있지 않았던 시절이라 명주실 가야고로는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러다가 1998년 아시아금교류회 첫 국내 연주회의 연주에서 호평을 받았다. 이 작품이 계기가 되어 가야고4중주단 사계가 결성되었고 이후 가야고 앙상블 연주단이 많이 생기게 되는 계기가 되었지요.”
이해식 교수님 작품은 난해한 작품이어서 연주 가교가 까다롭다. 그래도 연주가 끝나고 나면 “이 음악 연주하기 잘했다.”하는 생각을 갖게 하는 작품이다.
나와 이해식 교수와의 인연
필자가 이해식 교수를 처음 만난 것은 1966년 서울음대 국악과 1학년 때이다. 나이는 나보다 2살 많은데, 학년은 하나 위였다. 청계천 6가 국립의료원 뒤 청계천 시장 골목에 음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3층에 연습실이 있는데, 피아노를 엄청 잘 치는 선배가 있었다. 그는 국악과 학생이지만 작곡과 학생보다도 잘 쳤고, 어떤 사람은 피아노 전공인가 하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그는 자주 거쉬인의 <Rhapsody in blue>를 쳤다. 사실 나는 그 곡 제목만 알고 있었다. 이 곡을 그가 치는 피아노 음악으로 처음 들었다.
지방에서 올라와 음악대학 입학한 남학생들 형편을 보면, 모두 가난했다. 여학생들은 집안이 좋았지만, 남자들은 그저 음악이 좋아서 음악 공부를 하러 온 학생들이었다. 나나 이해식 학생도 마찬가지여서 하루 세끼를 해결하지 못하고 저녁에 몸뚱이 하나 누울 공간을 걱정하는 형편이었다. 연습실에서 연습하다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의 머리가 눈에 띄게 빠지고 있었다. “이게 영양실조로 생긴 것인가 봐. 자고 나면 한 움쿰씩 머리가 빠져 있어‘” 그러더니 그는 한평생 빵떡모자를 쓰고 살았다. 시간이 가면서 모자 패션이 다양하게 변화하여 색깔도 다양해지고 어떤 때는 붉은 손수건으로 모자를 만들어 쓰고 다니기도 하였다. 그래서 주위에서 이해식 하면 떠올리는 것이 다양한 모자 패션이었다.
필자는 그런대로 형편이 좋았던 모양이다. 초등학교 교사를 한 경력이 있어서였다. 당시는 월급은 한 푼도 없이 입주해서 학생 과외 지도를 해주는 아르바이트가 있었다. 이렇게 입주 가정교사를 하면 잠자리와 아침 저녁을 해결할 수 있으니 굉장한 조건이었다. 필자는 음대학생이어서 초등학생 초보 피아노는 지도할 수 있어서 학습지도도 하고 피아노도 가르쳐 주니 학부형들이 좋아하였다.
이해식 교수는 갑자기 군에 입대하였던가 보다. 주위에 입대한다는 소식도 전하지 못하고 논산훈련소로 간 것이다. 얼마 지나서 한만영 교수가 나른나른하게 헤어진 오선지에 쓴 <구름터>라는 가야고 작품을 가지고 왔다. 편지에 의하면 훈련받으며 구보 중 잠간 쉬는 동안에 짬을 내어 작곡하였다는 것이다. 한만영 교수가 하던 이야기가 지금도 생각난다. “참 대단하네, 훈련소라고 곳이 자기 몸뚱이 하나 건사하기도 벅찬 형편인데, 작곡을 하다니 ---”
내가 대학원 졸업연주를 하게 되자 그는 방송국 녹음기를 가지고 와서 녹음을 하였다. “이번에 방송에 작품이 소개되는데, 졸업 선물이야.” 당시는 TV도 없던 때라 모두들 라디오를 끼고 살았다. 그래서 그런지 주위 사람들에게서 잘 들었노라는 인사를 여러 번 받았다.
그는 나와 공통점이 많았다. 입학 전에 초등학교 교사 양성기관이 사범학교를 나와 국민학교 교사를 하였다는 점, 음대 입시에서 작곡과를 지망했지만 입시 성적이 모자라 제2지만 국악과 작곡 전공으로 입학하였다는 점 등이다. 또한 그는 신기하게도 나에게 일어날 일을 1년 전에 예고하고 있었다. 동아일보가 주최하는 작곡 콩크루에서 이 교수가 입상을 하고 나면 그 다음해에 내가 입상을 하였다, 그는 보기 드물게 동아일보 작곡 콩크루에서 서양음악 부문과 국악 부문을 동시에 입상하였다. 이 기록은 동아일보 70년 역사에서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공보부에서 시행하는 대한민국 작곡상 제도가 있었는데, 그가 상을 받고 다음 해에 내가 이 상을 받았다. 대학원 졸업하고 그가 영남대에 취직하였다. 그리고 일 년 후에 내가 중앙대학에 취직을 하였다. 말하자면 그는 나의 선행 지표였다.
이교수의 철저한 건강 관리는 음악계에 소문이 나 있었다. 당뇨가 있기 때문에 잡곡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회식이 있으면 회식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지만 도시락을 가지고 참석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평생 춤을 추었기 때문에 몸이 날렵하였다. 이토록 건강관리를 잘하고 열심히 운동까지 하였지만 그는 파킨슨병이라는 병마를 피하지 못하였다. 이교수와 남의천 교수 그리고 나 이렇게 세 사람은 가끔 만나 식사를 하며 지냈다. 한 번은 약속 시간을 잊었는지 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아 전화를 하였더니, 깜박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아들이 운전을 하여 이교수를 모시고 나타났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얼마 후 병원에 입원하였다고 하여 병문안을 하였는데, 이것이 이교수와의 마지막 만남이 되고 말았다.
이교수는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쯤부터 걷기가 불편하였다. 보폭을 크게 하지 못하고 종종 걸음으로 걷는 것이었다. 나는 이야기 하면서 함께 걸고 싶지만 먼저 가라고 한사코 권하였다. “나보다 먼저 앞서 가는 것이 나를 도와주는 것이네.” 이 분은 마음이 착해서 이처럼 남에게 폐를 끼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이해식 교수와 KBS방송국 생할
그는 일찍이 KBS 방송국에 취직하였다. 이 자리는 국악 연구하는 자리로서는 최상의 자리였다.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방송을 하라고 하면 누구나 거절하지 않고 방송국에 나온다. 그래서 조사할 것이 있을 때 요긴하게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또 다른 하나는 지방에 다니면서 민요 조사를 하는 것이었다. 지방에 다니려면 시간과 경비가 만만치 않은데, 그는 방송국에서 출장비를 받아 다니며 조사를 하였다. 사실 시골에서 민요를 잘 부르는 사람을 만난다고 해서 그에게 노래를 쉽게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적절한 분위기가 되어야 하니 먼저 술을 한 순배 돌리고 흥을 돋운 다음에 녹음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방송국에서 공식적으로 온 사람이어서 지방 유지들의 도움을 받기에 아주 좋은 위치였다. 이처럼 방송국은 현장 조사를 하는데 최적의 조건을 갖춘 직장이었다.
방송국의 문제는 박봉이었다. 누구나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방송국은 더 어려웠던 모양이다. 권오성 교수가 방송국에 취직을 하였는데, 선배가 주머니에서 2000원을 주더란다. 너무 적은 금액이어서 놀랐는데, 선배도 미안했던지 아래 바지에서 1000원을 더 꺼내서 주더란다. 그래서 “웬 월급을 주머니에서 주나” 하고 생각하였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방송국만 박봉이 아니었다. 필자가 1964년 초등학교 교사로 첫 월급을 4300원 받았는데, 하숙비가 한 달에 쌀 5말이었다. 그런데 쌀 한 말이 500원이니 하숙비로 2500원을 내야했다. 하숙집 주인도 너무 안쓰러웠던지 2000원으로 깍아 주었다.
이런 월급을 받고 살면서 자식 대학 보내고 저축해서 아파트라도 한 채 지니고 산 것이 기적 같다. 그렇지만 이 방송국의 좋은 조건 때문에 한양대의 권오성 교수, 한국예술종합학교의 백대웅 교수, 영남대의 이해식 교수는 방송국에서 일하면서 학문적인 성과를 거두어 학계에서 괄목할만한 업적을 남긴 것이다. 이처럼 방송국 직업은 모두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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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I. 100년 후의 독자를 위하여 3
II. 차례 4
III. 김승애 피리 음악으로 그리는 바람 그리고 실크로드 5
IV. 나와 실크로드(전인평) 5
1. 실크로드를 알아보자 8
2. 세 가지 실크로드 9
V. 김승애의 연주 에피소드 11
1. 피리연주가 김승애 프르필 12
VI. 한국의 진정한 국민주의 작곡가 이해식 교수 14
1. 나와 이해식 교수와의 인연 14
2. 이해식 교수와 KBS방송국 생할 16
3. 이해식 교수의 작품과 저서 16
4. 이해식 교수의 치밀함과 남긴 것 18
VII. 실크로드의 작곡가 전인평 20
VIII. 작곡가 윤소희와 작품세계 21
IX. 작곡가 문학박사 윤명원 23
X. 작곡가 철학박사 안승철 23
XI. 악보 23
1. 이해식: 바람의 여자 30
<음악 듣기, youtube 정보>
https://www.youtube.com/watch?v=O6d4ZpiL5AQ
2. 전인평: 실크로드- 길 위의 피리 45
<음악 듣기, youtube 정보> https://www.youtube.com/watch?v=OCZX8BYHl5k
3. 윤명원 가천 60
4. 윤소희; 범성일여 77
5. 안승철: 신비의 길 천수바라 80
XII. 판권 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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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애 피리 음악으로 그린 바람 그리고 실크로드 '실크로드, 피리의 길' 전인평 작곡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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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소개
연주자: 김승애 소개
*학 력:국립국악고등학교 졸업
추계예술대학 졸업
중앙대교육대학원 음악교육석사
*교 육: 국립국악중학교 강사역임
이화여대 강사역임
현재: 추계예술대학교 강사
*수 상: 2013년 신악회 주최 창작국악 연주 대상 수상
*이수경력: 국가중요문화제 제1호 종묘제례악 이수자
국가중요문화제 제42호 피리정악 및 대취타 이수자
*활동경력: 청소년국악 관현악단 단원역임
편저자 전인평 소개
전인평(Dr. 全仁平, 1945)은 작곡가이며 또한 아시아음악 학자이다. 그의 초기 작곡 경향은 형식과 음향 구성에서 서양의 기법을 원용하였으나, 전통과 현대의 접목을 시도하면서 고문헌에서 그 뿌리를 찾으려고 애쓰고 있다. 그 결과 정읍에서 노피곰, 정읍후사, 머리곰 등을 만들어 냈고, 한국의 민화에서 관현악을 위한 음악 이야기 '까치와 호랑이'(1982년) 등을 만들어 냈다.
한편 민속악에도 관심을 기울여 굿음악과 농악에도 관심을 보였다. 정읍후사(1984)는 진도 싯김굿을 현장 조사하고 굿음악 장단을 북으로 연주하도록 만든 작품이다. 또한 장구 연주자 김병섭에게서 설장고를 배우고 우리 나라의 농악 장단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때의 경험은 관현악곡 두레(1984)에 나타난다. 우리 나라 장단의 헤미올라 기법과 분할 조합 기법을 활용한 것이다.
1980년대 중반부터는 인도음악 등 아시아 여러 나라의 연구를 진행하면서 아시아적 요소를 자신의 작품에 도입하기 시작하였다. 거문고 독주곡 왕산악(1984)은 인도의 라가 부빨리(Bupali)라가를 이용한 것이고, 가야고 독주곡 서경별곡(1986)은 인도의 캬햘 형식을 도입한 작품이다. 관현악곡 별주부와 토끼(1989)는 인도음악의 지속음(Drone) 기법과 서양 관현악에 사용한 팀파니 비브라폰 등을 우리나라의 관현악 기법에 이용한 것이다.
유네스코에서 주관한 실크로드 탐사에 참여한 후, 안목을 더욱 넓혔다. 거문고 합주곡 가야의 노래(1999)는 중앙아시아 지역의 우술(usul)과 마캄(makam) 이론을 도입하여 선법과 리듬을 더욱 다채롭게 구사한 작품이다. 2002년부터 아시아음악학회를 이끌며 영문학술지 Asian Musicology를 발행하고 있다.
작품으로는 관현악곡 <쿠쉬나메>, 거문고 협주곡 <여섯줄 판타지> 등 80여 곡이 있고, 특히 거문고 관련곡을 많이 썼다. 또한 음악학자로서 『새로운 한국음악사』 『동북아시아음악사』 『창작음악사』 『한국음악 선구자들의 삶과 음악』 등 30여권의 저서를 냈다. 작곡연구단체인 한국국민악회 회장, 한국평론가협회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고 중앙대 명예교수이다,
김승애 피리음악으로 그린 바람 그리고 실크로드 | 전인평 | 아시아음악학회 - 교보eBook (kyobo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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