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령 이원범을 찾아서 — ‘용흥궁공원’에 떠도는 한 젊은 넋을 위로함
허송세월하는 저는 매일 ‘용흥궁공원’에서 놉니다. 만날 용흥궁 주위를 왔다 갔다 놀다보니 강화도의 용흥궁공원에 대하여는 전문가라 할 수 있습니다. 공원에는 바람이 불고 꽃이 피고 구름이 흐르고 새들이 찾아와 놀다갑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봄에서 겨울까지, 용흥궁 주변에서 생성되고 사라지는 갖가지 사연과 빛깔과 냄새와 표정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강화읍에서만 이십년을 살았고, 또 기록을 읽어 용흥궁우물에 고여 있는 옛 시간들을 찾아보기도 했으니 저는 용흥궁의 역사에 대해서도 조금은 전문가일지 모릅니다. 한 때 번성하던 심도직물이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공원과 주차장이 만들어지던 과정을 내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굴뚝만 남은 심도직물 자리에서 음악회가 열리고, 여성단체의 바자회가 열리고... 우루루 읍내 사람들이 모두 몰려나와 월드컵 축구 응원하던 어느 여름날 밤의 환호성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또한 여러분들이 잘 모를지도 모르는 용흥궁공원의 권태와 무료의 시간들에 대해서도 저는 단연 전문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권태와 무료의 시간이 찾아오면 저는 용흥궁 뒤 편 100년이 넘은 성당 안 보리수나무 그늘을 찾아보기도 했습니다. 나무 그늘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에워오는 적막과 권태도 때론 친구가 되었습니다. 평생 침묵으로 살아가는 나무들이 어느새 무성한 가지와 그늘을 펼치기까지의 기나긴 시간을 상상하며, 저는 나무들이 홀로 스스로를 키워 온 견고한 고독의 힘을 새삼 배우기도 했습니다. 그래요. 나무들은 시간을 견디고 있었습니다. 비와 바람과 햇빛 속에 시간을 견디며, 나무들은 사람들이 하는 일을 모두 알고 증언하고 있었습니다. 나무가 없는 사람들의 마을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나무들이 모여 푸른 숲과 산을 이루고, 사람들은 나무와 숲과 산의 언저리에 모여들어 터를 잡고, 집을 짓고, 아이들을 낳아 기르고, 마을을 이루어 살아 왔습니다.
(고려궁지로 올라가는 길/ 성공회성당과 용흥궁공원의 1906년 모습, 자료 : 강화역사문화연구소)
공원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어떻습니까? 다른 것은 차치하고, 요즈음 저는 용흥궁 너머 강화산성과 잇닿은 남산의 능선을 따라 남장대까지의 산빛깔이 매일 조금씩 바뀌어 가는 것을 보는 것이 큰 안복(眼福)입니다. 어쩜 저리도 부드럽고 밝고 연한 녹색이 있을까요? 세상에서 저 연녹색보다 아름다운 빛깔은 없을 것 같습니다. 이제 저 부드러운 녹색이 점점 더 진하게 짙어 가면 계절이 바뀌는 것이지요. 봄이 지나고 뜨거운 여름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주차장에 관광객들이 몰려 왔다 한 무더기가 고려궁지로 올라갑니다. 또 다른 한 무더기는 용흥궁과 성공회성당으로 방향을 잡기도 합니다. 언제부턴가 ‘강화나들길’이 생겨서 1코스(심도역사문화길, 강화버스터미널~갑곶돈대 17.2km)와 강화도령 첫사랑길(용흥궁공원~남장대~철종외가 11.7km)을 걸으려는 길벗님들을 쉽게 만나볼 때가 있습니다. 여기 용흥궁공원은 두 길이 만나는 교차점입니다. 어떤 날에는 인솔자나 해설사가 따라 붙어 열심히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도 지나는 길에 무슨 말씀들을 하나 기웃거려 보기도 했습니다. 초행 나들길에 나선 누군가가 질문하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용흥궁이 어디에요?” “용흥궁이란 무슨 뜻이에요?”
“기유년(1849) 봄에서 여름 사이에 밤중만 되면 잠저(潛邸)에 광기(光氣)가 뻗쳐 있는 것이 (강화읍) 남산의 봉수대 위에서 보였는데, 왕(원범)을 모시러 오기 하루 전날에야 그 광기가 비로소 없어졌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용이 일어남’, 즉 용흥(龍興)의 조짐임을 알게 되었다.” <철종실록>
‘이.래.서. 용흥궁입니다.’ 라고, 저는 마음속으로만 답합니다. 좋은 길을 나선 분들께 딱딱한 ‘실록(實錄)’까지 들먹일 이유도 없지만, 사실 이런 류의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제가 덜 좋아하기 때문이지요. ‘남산 꼭대기에서 서광(瑞光)이 일었다가 왕이 되기 하루 전날 없어지다니!’ 이런 이야기를 지어야 했던 맥락이야 이해할 수도 있지만, 이런 황당한 이야기를 기어이 만들어 기록으로까지 남긴 사관(史官)은 좀 너무 했다 싶습니다. 하기야 사관도 어쩔 수 없었겠지요. 이런게 다 지난날 왕조시대가 우리 착하고 어리석은 조선의 백성들을 교육시키고 세뇌시킨 억압의 한 방식이었습니다. 민주주의와 계몽의 20세기가 지나고, 이제 포스트모던(post-modern)의 21세기에 이런 식의 설명이란 ― 단지 사료의 사실 확인일 뿐 ― 오늘날의 시대 정신에도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실록 자료에서 오히려 관심을 끄는 건 ‘남산 봉수대’입니다. 지금의 남장대에 봉수대가 있었다는 말인지? 아니면 다른 곳인지? 하여튼 봉수대가 남산 어디에 있긴 있었나 봅니다.)
오늘 저는 저 남산으로 나무하러 다니던 한 젊은이의 이야기를 시작할까 합니다. 이 마을에 5년인가 살았던 초립동(草笠童) 더벅머리 총각이 어느날 임금님이 되었다네요. 남산 자락의 청하동이니 찬우물이니 하는 약수터에 이 불행한 젊은이의 전설이 전해오기도 한다지만, 전설(傳說)과 구전(口傳)보다는 믿을만한 기록들을 우선 찾아보려고 합니다. 기록이라지만 사실 별 것도 아니고 그저 학교 역사시간에 배운 옛날이야기입니다. 저는 탑 다운(Top-down) 방식으로 이야기를 구성하겠습니다. 조선시대와 유배지 강화 → 이원범의 가계 → 강화도령을 찾아서 등의 순서로 하겠습니다.
조선 최후의 유배자 이원범
1392년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이후 조선 5백년을 전·후기로 구분할 때 대략 그 기점을 임진·병자 양란(1592~1637) 전후로 나눈다고 합니다. 그러하면 조선전기에는 대략 4번의 반정(反正)과 4번의 사화(士禍)가 있었습니다. 4번의 반정이란 이방원의 형제의 난(1398~1400, 태종즉위) 수양대군의 계유정난(1453, 세조즉위) 중종반정(1506, 중종즉위) 그리고 인조반정(1623, 인조즉위) 입니다. 4번의 사화란 무오(1498, 연산4) 갑자(1504, 연산10) 기묘(1519, 중종14) 을사(1545, 명종즉위)사화입니다. 전기 250년 동안의 위 8번의 정치적 변혁과 그 의미에 대해서는 지면관계상 그냥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대략 왕과 신하들 간의 권력투쟁과 갈등이었지요. 이방원, 정도전, 김종서, 황보인, 한명회, 권람, 박원종, 김류, 이귀, 유자광, 김일손, 임사홍, 폐비윤씨, 김굉필, 조광조, 문정왕후, 윤임, 윤원형... 반정과 사화의 세월 속에 명멸해 간 수많은 사람의 이름들이 역사와 전설 속에 남았습니다. 그리고 반정과 사화 후엔 늘 이긴 자와 진 자가 있으니, 승자는 공훈으로 권력을 잡아 충신이 되고 패자는 역적이 되어 죽임을 당하거나 멀리 유배를 갔습니다.
여기에서 저는 강화도 이야기만 하렵니다. 우리 강화도는 섬이라는 지리적 특성으로 고려 때부터 왕과 왕족, 후궁들의 오랜 유배지였습니다. 왕족 아닌 사람들은 더 북쪽이나 더 남쪽으로 귀양을 갔습니다. 위 조선전기에서의 강화도유배 역사를 살펴보자면 계유정난 때(안평대군) 중종반정 때(연산군) 광해군 때(임해군, 영창대군) 인조반정 때(광해군)입니다.
낯익은 이름들이 많네요. 다시 한 번, 강화도는 조선의 대표적인 왕족들의 유배지였습니다.
강화도령 이원범(李元範, 1831~1863, 25대 철종)은 조선왕조의 오랜 왕족 유배역사에서 최후의 인물입니다. 정조·순조 대에 원범의 할아버지 은언군과 아버지 전계군이 강화로 유배를 당하였고 그 마지막의 핏줄 하나가 이원범 이었습니다. 이왕 말이 나왔으니 병자호란 이후 조선후기의 역사를 왕의 핏줄을 중심으로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인조(재위, 1623~1649) 사후, 효종(1649~1659) 현종(1659~1674) 숙종(1674~1720)을 거쳐 희빈 장씨의 아들인 경종(1720~1724)과, 무수리 최씨의 아들 영조(1724~1776)가 있습니다. 현종과 숙종이 독자였으므로 <효종-현종-숙종>의 3종혈맥(三宗血脈)이 경종과 영조 밖에 없었습니다. 영조의 세자는 노·소의 당파 싸움에 말려 뒤주 속에 굶어 죽고, 영조의 손자이자 사도세자의 아들인 이산이 보위에 오르니 그가 정조(1776~1800)입니다. 그리고 정조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순조(1800~1834)가 왕을 이었고, 왕세자인 효명세자가 일찍 죽어 순조 사후에는 그의 손자인 헌종(1834~1849)이 왕에 올랐습니다. 헌종 사후에 후사가 없었으므로 대왕대비(순왕왕후 김씨)는 ‘선원록(璿源錄, 왕실의 족보)’에서 신유사옥(1801) 때 천주교도로 죽은 은언군의 손자 원범을 찾아내, 영의정 정원용을 봉영대신으로 강화도로 보내 경복궁으로 모셔왔습니다. 그가 오늘의 주인공 강화도령 철종(재위, 1849~1863)입니다.
(강화도행렬도 江華島行列圖 /부분, 조선미술박물관(평양) 소장 , 자료 : 강화역사문화연구소)
철종도 후사가 없어 신정왕후(조대비, 효명세자 부인)는 대원군의 아들인 고종(1863~1907)을 지목해 왕에 앉혔습니다. 고종 재위시인 1897년에 조선은 대한제국(연호, 光武)으로 국호를 바꿨으나, 우리는 고종의 아들 순종(1907~1910)을 전주이씨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 (* 이후 일제강점기(1910~1945)-해방-남한 단독정부수립(1948), 이승만-윤보선-박정희-최규하-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 대통령들로 역사가 흘러왔고 또 흘러가고 있습니다.)
교과서적이라 식상하기도 하지만, 이렇게 왕들의 계보를 서술문장으로 엮어보자니 역사공부가 한결 가깝게 느껴집니다. 위 간략히 살펴 본 조선 5백년의 역사에서 강화도와 관련된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강화도령의 전생(前生)과도 관계 될 것 같은 역사가 눈에 보이기도 합니다. 하나만 찾아보기로 할까요? 병자호란 때 강화남문에서 자폭·순절한 김상용과 남한산성의 대표적인 척화파 김상헌이 있습니다. 두 형제의 충성과 절의정신을 기려, 그들의 자손들에 의해 이후 300년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씨앗이 뿌려졌던 셈인데, 병자호란 200여 년 후 강화도령은 그 김상용 후손들의 후견으로 왕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관청길에서 용흥궁으로 가자면 마침 ‘김상용순의비’를 거쳐 들어가야 하는데, 저는 그 옛날의 나무꾼 원범이가 이 순의비의 정치적 프로파간다(propaganda)의 의미를 알았을까? 몰랐을까?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이제 조금 더 자세하게 이원범의 가계를 추적하고 그의 시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철종의 계보와 그의 시대
영조(21대) ↓ 사도세자 ↓ (4형제 : 정조/은언군, 은신군, 은전군) 정조(22대) 은언군 ↓ (외아들) ↓ (3형제 : 상계군, 풍계군, 전계군) 순조(23대) 전계군 ↓ (외아들) ↓ (3형제 : 회평군, 영평군, 덕완군) 효명세자 덕완군(철종 : 이후 후사가 끊김) ↓ (외아들) 헌종(24대) ※ 1. 정조와 은언군, 순조와 전계군, 효명세자와 철종은 항렬이 ↓ (후사없음) 같습니다. 원범의 증조부는 사도세자이고 증조부가 같으면 철종(25대) 6촌인데, 헌종은 철종에게 7촌조카가 됨으로 왕실위계가 ↓ (후사없음)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순원왕후는 원범을 자신의 아들로 고종(26대) 입적시켰습니다.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전략이었습니다. ↓ 2. 철종이 후사없이 죽자 또 똑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제 순종(27대) 조대비가 이하응(대원군)의 둘째 아들 명복을 자신과 남편인 효명세자의 아들로 입적시켜 철종의 뒤를 잇게 합니다.
계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강화도령 원범은 ― 비록 막내아들의 막내아들로 이어 왔지만 ― ‘3종혈맥’인 영조의 핏줄을 이어받은 사도세자의 또 한 번의 분명한 ‘재3종혈맥’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철종은 왕비(철인왕후)도 안동김씨에서 맞아들일 수 밖에 없었고 재위기간 내내 대비인 순원왕후(김상헌 7세손 김조순의 딸)의 수렴청정과 장인인 김문근(김조순의 7촌조카)의 안동김씨 세도(勢道)정치의 소용돌이에 휘둘려 정치를 제대로 바로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참으로 가엾고 안타까운 왕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시대를 간단히 돌아보겠습니다.
(정원용 대감을 비롯한 봉영단 일행이 용흥궁에 오시다/ 자료 : <강화도령, 1963> 영화, 감독 : 신상옥)
철종의 시대(1849~1863)는 세도정치의 폐단으로 봉건적인 통치기강이 무너지고 삼정(三政:田政·軍政·還穀)의 문란이 더욱 심해져 백성들의 생활은 도탄에 빠진 기간이었습니다. 진주민란을 비롯하여 삼남지방에 백성들의 잦은 반란이 발생하고, 최제우의 동학(東學)이 창시되어 포교가 시작되기도 한 시기입니다. 시절이 이러하니 왕은 얼마나 힘들고 이 시대의 백성들도 또한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왕이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고, 실질적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정치를 잘 모르는 왕이 정사에 끼어드는 것을 조직적으로 차단하였음을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신들이 다 잘 알아 처리할 터이니 전하께서는 심려치 말으소서.’, ‘전하! 별궁에 주연을 마련하였사오니 그리로 드시옵소서.’, ‘밤이 깊었사오니 어서 침전에 드시지요.’ 왕의 주변에서는 항상 이런 말들이 떠돌았을 것 같습니다. 대신들에게 왕따 당한 강화도령은 ― 음주(飮酒)와 가무(歌舞) 속에 탕정(蕩精)한 우리 철종왕은 ― 극심한 심신의 피로와 고통 속에 허송세월을 보내다 병이 들어 새파란 33세의 나이에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강화학파 영재 이건창의 친구이기도 한 구한말의 선비 창강 김택영이 쓴 조선시대사인 ‘한사경’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1863년 왕이 여총(女寵)에 빠져 여러 해가 되자 이질(痢疾 : 허약해지는 질병)에 걸려 오래 앓다가 겨울 12월에 승하하였는데 후사가 없었다.” <한사경>
‘여총(女寵)’이란 후궁 등 왕의 첩을 말합니다. 산으로 들로 나들길 걷고 나무하러 다녀 튼튼하고 건강하기만 할 것 같은 철종이 이토록 빨리 돌아가신 합당한 이유를 찾던 저는, 이 대목에서 ‘탕정(蕩精)’이란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쓸어버릴 蕩, 정자 精, 탕정(蕩精)! 기진맥진(氣盡脈盡) 탕정! 14년 전 저 남산에 서린 용(龍)의 정기가 모여 왕이 되었던 강화도령은, 그 존귀한 정기를 여색(女色)으로 몽땅 다 흘려보내고, 모멸과 치욕의 풍진세상(風塵世上) ― 바람과 티끌의 이승,에서 영영 떠나가신 겁니다. 그러나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을 저는 이해할 것도 같습니다. 우주의 단독자로 행복하게 살 수도 있었던 한 젊은이가, 자신도 모르게 왕가의 혈손으로 태어났다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에 고난의 운명을 감내할 수 밖에 없었던, 그의 잃어버린 꿈과 사랑을 충분히 이해하고 위로드려야 할 것도 같습니다. 그의 병든 몸과 마음을 의지했던 세계는 어디였는지~ 살아 한 때, 그가 사랑하고 그리워했던 젊은 날의 꿈과 가엾은 넋은 지금 어드메 구천(九泉)을 떠돌고 있는지~ 아아, 망자(亡子)여 평안함에 쉬어지이다...
기록을 보면 철종은 재위 14년 동안 8명의 부인에게서 5명의 아들을 보았으나 어쩐 일인지 모두들 단명하고, 후궁 범(范)씨가 낳은 공주 하나만 살아남았습니다. 이 분 영혜옹주는 철종 사후 한말 노론가(老論家) 출신 개화파 정치인 박영효(朴泳孝, 1861~1930)에게 시집갔으나 그도 또한 결혼 3개월 만에 죽었다고 합니다. 이제 철종과 그 딸의 죽음으로 그의 핏줄은 완전히 끊겨버렸습니다. 인조의 둘째 아들인 효종-현종-숙종을 거쳐 경종-영조까지의 ‘3종혈맥’으로 간신히 이어지고, 또 비운의 사도세자 이후의 ‘재3종혈맥’으로 겨우 겨우 실낱같이 버텨온 한 왕족의 씨가 완전히 말라 사라져 버린 셈입니다.
그래도 고종이 있지 않냐구요? 대원군과 그의 둘째 아들 고종은 다른 씨입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은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의 8세손이었습니다. 이하응은 아버지(남연군)가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신군(철종에게는 종조부가 됨)에게 입양되자,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하에 그들의 주목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시정의 무뢰한들과 어울려 난행을 일삼았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후사(後嗣)가 없는 철종의 유고를 대비하여 조대비와 가까이 지낸 것이지요. 그의 전략은 결국 성공했고 인평대군의 씨가 왕위(고종)를 계승하게 되었습니다. 인조의 첫째 아들은 소현세자였고, 둘째는 봉림대군(뒤에 효종이 됨)이라는 것도 다들 잘 아시지요? 그래서, 이제 되돌아보니 소현세자만 안타깝습니다. 인조의 둘째 아들 봉림대군의 자손들(현종~철종)과 셋째 아들 인평대군의 후손들(고종-순종)은 어쨌거나 결국 왕이 되는 영화를 누렸는데, 장자였던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의 자식들만 그냥 역사 속에 묻혀버린 것입니다. 역사에 가정이 없다지만 만약 소현세자가 순리대로 왕이 되었다면, 효종에서 순종까지의 260년 역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어떤 역사’가 진행되었으리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철종의 죽음 이후, ‘강화도령’ 패러다임
1863년 12월 철종이 승하하고 150년이 되어 갑니다. 150년이란 시간은 그리 먼 과거가 아닙니다. 우리 할아버지들이 그들의 할아버지께 직접 들었던 이야기를 우리에게 그대로 전해줄 만큼의 가까운 세월입니다. 저도 어렸을 때 ‘강화도령’ 이야기를 집안의 누군가 할머니께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세월이 흘러 어찌어찌한 삶의 곡절로 강화도령이 살았던 강화도에 자리잡고 살게 된 저는, 강화에서 맨처음으로 찾아본 곳이 ‘용흥궁’이었습니다. 아마 저의 의식 속에 강화하면 처음 떠오르는 이미지가 ‘강화도령’이었던가 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이사한 그 해 추석에 처갓집에 갔더니 지금은 돌아가신 우리 장모님이 저의 아들(외손자)을 덥썩 안으시더니, “아이고~ 우리 강화도령 오셨나!” 말씀 하십니다. 제 아이는 그 때 5살이었습니다. ‘강화도령’이라!... 충청도 산골에서 나고 사셨던 장모님도 강화도령이 임금된 이야기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또 제가 아는 L선생님은 대학 졸업하고 초임발령이 마산이었다는데 학교에서 자기 별명이 ‘강화도령’이었다며 그 때 정말로 열심히 학생들을 가르쳤던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강화토박이인 L선생님이 그 옛날이야기를 들려줄 때의 ‘강화도령’이란 단어와, 그 발음 속에 무의식으로 스며있던 향수와 애향심과 자부심의 뉘앙스를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강화도령이라!... 산 넘고 물 건너 멀리 경상도의 선생님들과 학생들도 이미 ‘강화도령’을 잘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저는 타지 사람들에게는 어떤 동경과 부러움을, 그리고 고향인 원주민에게는 은근한 자랑과 자부심으로 표현되어 회자되는 이 ‘강화도령’이라는 말의 전거와 출전을 찾아보고 싶었습니다.
저는 다음에 설명할 두어 가지의 가설로 ‘강화도령’ 패러다임을 상상해 보고자 합니다. 어떤 기록들에도 없고, <조선왕조실록>에도 없는 이 ‘강화도령’이라는 말이 오랜 세월 전국적으로 알려지고 퍼지게 된 심리적, 사회사적 의미를 찾아보는 것은, 또 다른 한 세상의 공부가 되기도 합니다. 패러더임(paradigm)이란 원래 문법에서 동사의 어간에서 파생되는 어형변화표를 말하는데, 토머스 쿤(Thomas Kuhn, 1922-1996)이라는 과학사가가 이를 더 멋있게 학술 용어로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저는 아래에서 패러다임을 ‘강화도령’을 소재로 한 드라마, 영화, 노래, 길이름(강화도령 첫사랑길) 등을 표현하는 좁은 의미로 사용하겠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강화도령’ 페러다임의 처음은 이렇습니다.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철종 사후의 우리 역사는 외세의 침략과 일본의 식민통치로 이어진 수난과 인고의 세월들이었습니다. 병인양요, 신미양요, 강화도조약 그리고 이어진 문호개방과 개국으로 서양의 새로운 가치들이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온 시간들이었지요. 1910년에 이르러 결국 나라가 망하는 것을 본 어질고 착한 우리 조상들은 무너진 조선왕조와 나랏님(왕)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이 늘 가슴 밑바닥에 절절히 흐르고 있습니다. 1919년 3월 1일 고종의 인산일에 맞춰 태극기를 흔든 기미년 3.1 운동의 그 함성도 어쩌면 일제에 대한 항거보다는, 자취도 없이 갑자기 무너져 버린 조선왕조에 대한 집단적인 향수와 그리움이 더 컷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저는 1980년 박정희 대통령이 죽고 국장을 치를 때, 광화문 앞에서 나랏님이 돌아가셨다고 땅을 치고 통곡하던 할머님들의 모습에서 백성이 주인인 민주주의 시대에서도 변하지 않는 착하고 어질기만 한 우리 민족성의 한 단면을 보기도 했습니다. 직접투표로 우리 국민이 선출하는 민주주의 시대의 대통령도 그 분들께는 어쨌든 왕이었던 것이지요. 왕과 왕비에게는 무의식적인 복종과 충성의 향수가 국민들의 ‘역사 D.N.A.’ 속에 잠복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3년 전 노무현 전대통령 서거 때의 덕수궁 앞의 놀라운 조문 인파도 비슷한 맥락이었겠지요.
오~ 장려(壯麗)한 낙일(落日)도 없이 스러져버린 조선이여~ 옛 왕조의 화려한 기억이여, 왕과 왕비들의 날들에 대한 그리움이여~
뭐, 이 정도의 집단 무의식이 지금도 우리에게 남아있지 않을까요? 그러므로 어느날 졸지에 왕이 된 이 열아홉 청년 왕과 그의 불행한 생애, 그리고 스러진 왕조에 대한 무의식적이고 집단적인 그리움이 오늘의 ‘강화도령’ 패러다임의 단초가 되어 지난 세월동안 무시로 창작되고, 복제되고, 유통되어 오지 않았을까? 하는 가정입니다.
‘강화도령’ 패러다임의 다음 가정으로는, 여성학에서 말하는 이른바 <신데렐라 콤플렉스 Cinderella complex>의 어떤 변형된 기제가 우리들 마음속에 내재되어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여성에서 남성으로 성(gender)만 바뀌었습니다. 가난하지만 착한 고아 소녀 신데렐라가 어느날 왕자를 만나 행복한 결혼으로 결말이 나듯이, 천애고아(天涯孤兒) 청년 원범이도 어느날 졸지에 조선의 왕이 되어 화려한 봉영행렬에 둘러싸여 꿈같이 강화 갑곶나루를 건너갔다는 말씀입니다. 현대사회에서조차 이런 횡재가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영의정 정원용대감이 왕을 모시고 가는 ‘강화도행렬도’를 보자면, 영국 다이애나 황태자비나 케이트 미들턴의 세기의 결혼식 장면이 절로 떠오릅니다. 이렇게 더벅머리 나무꾼에서 왕이 된 젊은이의 급작스런 신분상승 실화(實話)는, 처음에는 백성들의 부러움과 경탄의 대상으로, 사후에는 안타까움과 넘사벽(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의 몽상과 동경(憧憬)의 이야기로 점점 발전되어 온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제 현대는 스토리텔링과 문화상품주의의 시대입니다. 대수롭지도 않은 역사나 전설이 이야기형식을 빌어 명소가 되고 관광 상품이 되기도 합니다. 어제 보았던 드라마의 한 장면이 오늘 상품과 광고가 되어 대박을 치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로 보자면, 우리의 ‘강화도령’ 이야기는 멀지 않았던 과거에, 오늘의 ‘문화의 시대’를 미리 선취(先取)한 최초의 문화상품이었던 것도 같습니다. 강화도령은 벌써 오래 전에 라디오와 TV 드라마, 영화, 음반 등 각종 문화적 파생 상품으로 창작되고 변주되어 왔습니다. (우리 나들길의 ‘강화도령 첫사랑길’은 가장 최근의 문화버전이고, 제가 살펴보니 아직까지 ‘뮤지컬’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강화도령’ 패러다임이 살아온 구체적인 사례들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에 1960~70년대라는 아주 가까운 과거가 있습니다. 그립기만 한 우리 부모님들의 한 시절 ― 왕이 된 ‘강화도령’과 갑곶나루를 함께 건너가는 영화와 노래들을 몇 개 소개드립니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그 시대를 대표했던 당대의 배우와 가수들입니다.
영화 <강화도령> 1963, 감독 : 신상옥 배우 : 신영균(철종) / 최은희(복녀)
영화 <임금님의 첫사랑> 1967, 감독 : 이규웅 배우 : 신성일(철종) / 문희(양순이)
<임금님의 첫사랑> (김지평 작사/김인배 작곡, 노래 : 이미자,나훈아)
강화섬 꽃바람이 물결에 실려오면 머리 위에 구름이고 맨발로 달려나와 두 마리 사슴처럼 뛰고 안고 놀았는데 갑고지 나루터에 돛단배 떠나던 날 노을에 타 버리네 임금님의 첫사랑
어려서 같이 놀던 그리운 강화섬에 흐르는 세월 따라 꽃은 피고지고 보고픈 그리운 님 언제나 오시려나 갑고지 나루터에 빈 배만 돌아오네 어디로 가시려나 임금님의 첫사랑
<강화도령> (이서구 작사/ 전수린 작곡, 노래 : 최숙자,박재란)
두메산골 갈대밭에 등짐지던 강화도령님 강화도련님 도련님 어쩌다가 이 고생을 하시나요 음 말도마라 사람팔자 두고 봐야 하느니라 사람팔자 두고 봐야 하느니라
음지에 해가뜨고 때가오면 꽃도 피듯이 꽃도 피듯이 도련님 운수좋아 나랏님이 되시었네 음 얼싸 좋아 좋다 좋구 말구 상감마마 되셨구나 상감마마 되셨구나
영화와 노래 외에 극작가 신봉승이 쓴 소설 ‘임금님의 첫사랑(전2권)’ 도 있습니다. 저는 소설은 못 읽어 봤지만, 원본인 KBS ‘조선왕조 500년’의 드라마를 어릴 때 보았습니다. 여기에 원범의 강화시절 연인 ‘양순이’가 등장합니다. 제가 언젠가 기회가 있어 신봉승선생께 직접 여쭤 보았는데, ‘양순이’는 당신께서 창조한 이름과 캐릭터라더군요. 강화도의 기록에는 ‘봉이(鳳伊)’ 등의 이름이 나오기도 하는데 이들 이름들도 아마 글쓴이가 작명한 가상의 이름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위 <강화도령> 영화에서 최은희가 분한 신상옥 감독의 '복녀'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타지 사람들이 이렇게 ‘강화도령’ 이야기를 많이 만들었는데, 정작 강화에서 아무 말도 없으면 되겠습니까? 자칭 ‘용흥궁공원 전문가’인 저 입춘대길도 언젠가 지나가다가 잠깐 한마디 한 게 있습니다. 어디서였죠? 여기 ‘강화나들길’ 카페였답니다.
< 용흥궁 공원 > ㅡ 강화도령 철종의 생각
용 : 용상(龍床) 앉아 14년, 부질없는 권좌(權座)여 흥 : 흥(興)하라 龍자 興자 강화섬 내수골 궁 : 궁궐너머 먼 옛날 초립동(草笠童)시절 그리워 공 : 공무도하(公無渡河)! 흐느끼던 갑곶나루의 女人아 원 : 원범(元範)아! 쓰러져 울던 ‘찬우물’의 양순아!
저는 죽기 전 병상에 누웠을 때의 철종의 회상 형식으로 이 짧은 글의 모티프를 잡았습니다. 제 글이라 말씀드리기 좀 쑥스럽지만, 이 행시(行詩)에서 눈여겨 볼 대목은 ‘公無渡河歌’입니다. 님이여 저 강 건너지 마오(公無渡河)/ 님은 그예 건너시네(公竟渡河)/ 물에 빠져 죽으니(公墮河死)/ 나는 어찌하려오(當柰公何) ... 고조선 때 백수광부(白首狂夫)의 아내가 남편을 따라 죽으며 처음 불러 전해져 온다는 우리 민족 최초의 노래입니다. 이를 목격한 곽리자고와 여옥의 슬픈 심정을 ‘양순이’에다가 감정이입했습니다. 양순이가 저렇게 울며 말리는데도, 강화도령은 결국 물 건너가서 죽었다는 말이지요. 조선의 남정네들이 여인들의 말을 듣지 않아 망하는 이야기는 ― 융(Carl Jung, 1875~1961)의 이론을 빌리자면 ― 우리 국문학사상 가장 오랜 원형(原形, Archetype)의 유산입니다. 가시리(고려가요), 진달래꽃(소월) ... e.t.c.
자기 글을 이야기하자니 부끄럽네요. 그러하니 이쯤해서 강화도령 이원범의 이야기를 서둘러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몇 일 동안 자료들을 찾아 뒤적거려도 보았으나, 이제 다시 보니 풍진세상(風塵世上)의 헛된 이야기가 길기도 했습니다.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리석고 염치없는 자가, 더욱 공부가 깊어 눈이 밝아지면, 다음에 다른 맥락으로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사람들이 걸어 살아온 길에는 어디서건 흔적이 남습니다. 그 흔적들을 모아 담아놓은 기록을 우리는 ‘역사’라 부릅니다. 오늘 강화도령과 함께 옛 길을 걸어보자니 흔적에는 ‘역사’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역사’가 있고, ‘역사가 아닌 그 어떤 것’이 분명히 또 있었습니다. 역사와 역사 아닌 것 사이의 어떤 경계와 간극이 분명히 존재하니, 여기에서 역사가 아닌 것을 민속, 민담, 풍설, 구비 등이라 부르기로 할까요? 이 둘은 서로 삼투(滲透)하여 스며들기도 하지만, 어떤 때에는 격절(隔絶)되어 소통 불가능이 되기도 합니다.
‘역사’ 속에서 지혜를 발견하고 위안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때론 ‘역사가 아닌 것’이 ‘역사인 것’을 위무하고 위로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하니 오늘 저의 ‘강화도령’ 이야기는 “역사 아닌 것이 역사를 위로한 이야기”라 할까요? 아니면 조금 더 멋있게 ―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함민복)고 하니 ― 역사의 경계에 피어난 저 남산의 진달래꽃이라고나 할까요?
진.달.래.꽃. 지고 있습니다. 저기 보이는 남산 꽃그늘 어디에 ― 원범이와 양순이가 정답게 앉아, 가는 봄을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끝>
(철종어진 哲宗御眞, 보물 제1492호/ 철종 12년인 1861년에 그려졌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조금, 덧붙이는 이야기
1. 저는 위 글을 『철종이야기』(김경준, 2006, 도서출판아이올리브)와 『조선왕조실록 강화사료집』(강화역사문화연구소 - 김형우 편, 2000, 대종출판사) 를 참고하였습니다. 여기에 몇 부분 <조선왕조실록>의 사료 원문을 실어 더욱 이해를 돕고자 합니다.
① “이시원(李是遠)을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로 삼았다.” (철종 1. 1850. 4)
② “정기세(鄭基世)를 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로 삼았다.” (철종 4. 1853. 3. 14)
③ “(임금이) 하교하기를, 내가 심도(沁都)에 대해 늘 한 번 뜻을 보이려고 하였으나 실천(實踐)하지 못하였다. 유생(儒生)·무사(武士)의 응제(應製)를 이달 19일에 설행(設行)하려 하는데, 영부사(領府事)가 이미 영중(營中)에 가서 있으니 유생·무사의 제술(製述)을 고시(考試)하여 20인을 뽑고, 무기(武技)는 유엽전(柳葉箭)을 일순(一巡)에 3중(中) 이상을 뽑도록 하라.” 하였다. (철종 4. 1853. 5. 16)
<해설>
① 원범이 잠룡이었을 때 사기리에 살았던 이시원의 명성을 들었나 봅니다. 즉위 다음해에 바로 이시원을 개성유수로 등용한 것이 인상적입니다. 이시원의 손자인 이건창은 1852년(철종 3)에 태어났는데 출생지가 강화 사기리라는 설과 개성이라는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할아버지 임지를 따라가 개성유수부에서 나셨으면 개성이고, 본가이면 강화 사기리입니다. 별게 아니지만 지금 사기리 본가를 ‘이건창생가(生家)’라 말하니 하는 말입니다. 생가의 사전적 의미가 ‘자신이 태어난 집 the house where one was born’ 이라면 다시 정확히 확인이라도 했으면 합니다.
** 사기리 이건창생가는 지금 초가집입니다. 본문 그림 ‘강화도행렬도’의 전체를 보면(전체 그림은 12폭 병풍), 맨 좌측 12번째 폭 마니산 줄기가 끝나는 초피산 자락 바로 밑에 기와집이 한 채 있고 갓 쓴 선비 두 분이 계신 것을 확인했습니다. 어떤 분 말씀이 “당시 초피산 아래 기와집은 이시원유수의 집 밖에 있을 수 없다.”고 합니다. 개성유수는 종2품의 당상관 품계입니다. 판서 아래의 고위직이지요. 그 분 말씀이 맞을 수 있습니다. 조금 더 찾아봐야겠습니다. 강화도에서 도상학(圖像學, iconography) 연구 주제를 처음 만납니다.
② 정기세는 봉영대신 영의정 정원용대감의 아들입니다. 결국 강화유수로 오셨네요. 지금 ‘용흥궁’은 이 분이 유수 재직시 건축했습니다. 용흥궁 입구에 정원용-정기세 두 분 생묘비가 있습니다. 생묘비(生墓碑)는 살아있는 이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을 말합니다.
③ 정기세를 유수로 삼고 2달 뒤에 특별시험을 치러 20명을 뽑았습니다. 요즘 말로는 ‘대통령특명’ 같은 것이겠지요. 순원왕후 수렴청정 4년이 끝나고, 이제 천애고아였던 자신의 젊은시절을 보살펴 준 강화와 강화사람들에 대한 은혜를 갚으려 했다는 생각입니다.
안동김씨 처갓집에 휘둘려 그렇지, 우리 ‘강화도령’은 청소년 시절을 보낸 강화섬의 지맥과 정기 때문인지 왕으로서의 자질은 충분한 분이셨을 것 같습니다. 철종임금은 죽기 전 해(1862. 5)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아 백성들을 편안히 하려고(안민 安民),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이란 관아를 임시로 설치하기도 하였습니다.
2. 본문의 ‘3종혈맥(三宗血脈)’은 영조실록에 나오는 전문 역사용어입니다. ‘재3종혈맥(再三宗血脈)’의 제가 만들어 썼습니다. 마루 ‘종(宗)’ 자가 들어가니 장자로 이어지는 핏줄을 말하겠지만, 철종 왕위 계승의 당위성을 더욱 강조하려고 했습니다. 형제와 숙부들도 다 죽고 혼자만 살아 남았으니 어쨌거나 맞는 말이라 생각하렵니다.
3. 본문 첫 문장을 김 훈 선생 소설,『남한산성』에서 차용했습니다. 김 훈 선생 글발 놀랍습니다. 강화도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읽어보시면 압니다.
(철종과 왕비 철인왕후 합장묘인 예릉睿稜,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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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는 이 글을 케이티엑스 열차 안에서 읽었습니다.
문상차 대구에 내려왔다가 올라가는 길인데, 이 글과 친구가 되어서 올라가고 있습니다.
풍부한 사료의 고증을 바탕으로 저자의 상상력을 가미하여 훌륭한 글을 낳으셨습니다.
입춘대길님의 정진에 박수를 보냅니다.
아래 두 문장은 꼭 신춘문예 심사평 같습니다.
강화도령 강화도령하는데 명확한 게 잡히지 않아 정리해 놓으려고 쓴 글입니다.
글의 전문가이신 <수필가 무량화미감>님의 격려를 받으니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강화도령 이원범으로. 강화의 정치.경제.사회.역사 문화.예술(도상학?)까지 모두를 아우르는 보기 힘든 글발입니다.
귀한자료와 좋은 글을 올려주셔서 저희 카페의 격이 확!!!! 올라간듯 합니다
나중에 써있어 보았지만
덧붙이는 이야기'와 해설'이 있어 글이 좀 쉽게 다가옵니다
이 정도 글을 올리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했을까 하는 생각에...
강화나들길카페는 복받은 카페입니다 원고료도 없이....이렇게.
두손모아 감사드림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간간히 올라오는 입춘대길형님 글로 좋은 공부합니다
글값으로 한잔 살라요.
연락합시다.성님!
허송세월하는 저는 매일 '용궁공원'에서 놉니다. 어떤 날에는 북산 넘어 대산리 나들길쉼터 <물길.바람길>에 몽피 나 왔어, 한 잔 해야제.
놀러가기도 합니다. 거기, 허송세월은 허송세월이 아니다 라고 말하는 화가가 한 명 살고 있습니다. 허송세월도 이렇게 흔적이 남으니 허송세월이란 말은 원래 말이 안되는 말인것도 같습니다. 어이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닉네임이 참 좋으시네요.
^^
종종 한번씩 올려 주시는 강화와 관계된
역사 이야기에 늘 많은 공부를 합니다.
강화의 옛 선조들의 발자취를 느끼며
많은 감동을 받습니다.
이렇게 게시글로 옮겨 놓지 않았으면
모르고 지나갔을 우리 선조들의 귀한
이야기들....
늘 고맙고 감사합니다.
<임금님의 첫사랑>님과 관계가 되는 글이지요? 저는 언제나 이 닉네임이 참 좋았습니다.
누군가 사랑을, 임금님의 첫사랑을... 멋있게 정리해주시길 바랐는데, 저는 이런 방식으로 정리했습니다.
글 중에 <전문가>니 하는 부분은 조금 실감나게 하느라 했습니다. 다시 읽어보니 부끄럽네요. 감사합니다.
유리컵 속에 든 것은 레드와인인가요? 확, 당기네요. ㅎㅎ
강화도령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입춘대길님 감사드립니다.
졸고를 잘 읽어주셨다니, 오히려 감사합니다.
덤덤히, 그러나 간략하고 꼼꼼히 추려주신 글에 감사하면서
조심히 댓글에 부쳐 봅니다.^^
타박네님! 감사합니다. 조심히 하지 않으셔도 되어요.
쭉~봤습니다. 입춘대길님
보고 또 다시 보고
필요할때 열어보고 계속합니다.
재밌고 공부되고...감사합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잘 읽고 아름다운 60대카페로 모셔갑니다.
강화도령에 대한 해박한 글, 잘 보고 갑니다.
제가 나무위키에서 본 자료에는 사도세자에게는 5남, 정조에게는 2남,
은언군에게는 5남(서자 포함), 철종에게는 1남 4녀가 있었다고 되어 있어 한 말씀 올립니다. ㅎ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