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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부 -
이번 H사의 신제품은 원가를 줄여볼 심산으로 급히 개발되었다. 지금까지는 쇠를 녹여 틀에 주물(쇠를 녹인 물)을 부은 다음 가공하여 장착되었으나 신제품은 주물 대신 두꺼운 각 파이프를 치수에 맞게 절단하여 가공했다. 원가가 많이 줄어든 반면 단점도 있었다. 바로 제품의 수명에서 차이를 보였다. 주물제품은 외부의 충격이 없으면 상당히 오래도록 사용 가능한데, 비해 신제품은 부식으로 인해 수명이 짧았다.
우선 시범적으로 2000세트를 만들어 장착해보고 발생하는 문제점들은 보완해가는 것으로 했다. 어떤 제품인들 처음부터 완벽한 것이 있을까? 다만 시행착오를 거듭하는 가운데 조금씩 발전해 가는 것이다.
기존 생산품과 개발품 양산을 겸해서 함으로 자연적으로 퇴근이 늦었다. 설비는 더 들여왔으나 사람은 한 사람도 더 충원하지 않았다. 1차분 500세트를 완성하는데 약한 달 보름이 걸렸다.
H사 담당자는 예상보다 입고가 늦어지자 애가 타는지 출근을 아예 우리 회사로 했다. 몇 날 며칠을 새벽이 다가오는 줄도 모르고 일했다. 이제 겨우 1/4이 끝났지만, 이것으로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계절은 그야말로 한겨울이다. 조카의 첫돌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개발품의 작업은 눈 덮인 마당에서 절반이나 이루어졌다.
손과 발 그리고 양 볼에 채찍 같은 바람이 치고 지나간다. 그럴 때는 아무 감각이 없고 채찍으로 인해 살이 갈라진 느낌이 든다. 곧 피라도 나올 것만 갔다. 찬 바람은 폐 속으로 들어가 속이 답답하다. 차디찬 것이 들어갔는데 답답하다니 참 아이러니했다.
손이 굳어 주먹이 쥐어지지 않는다.
그럴 때는 아무것도 잡을 수 없다. 잠깐 공장 안으로 들어와서 얼어붙은 손과 발을 녹인다. 그리고 어느 정도 녹인 다음 다시 밖으로 나갔다. 500세트를 2.5톤 트럭 석 대에 실어 납품했다.
아 그런데 사용 불가판정을 받았다. 순간 눈앞이 깜깜했다. 추위와 싸우고 몇 날 밤을 지새웠는 데,,, 검사자는 무작위로 10대를 골라내어 테스트했다. 그런데 그 중 한대가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그만 속에서 누유(漏油)가 발생했다. 다행히 다른 곳은 별다른 이상 없이 양호했다. 끝내 납품하지 못하고 다시 공장으로 돌아왔다.
전량 다 누유검사를, 실시하고 트럭 석 대를 다시 불러 납품했다. 이번에는 전과 같은 제품은 단 하나도 나오지 않고 통과했다. 합격한 것이다.
돌아오는 발걸음이 그렇게 가벼울 수 없었다. 그동안의 고생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나머지 1500대를 완성하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처음 500대는 시행착오로 인해 고생하고 시간도 많이 허비했다. 그러나 두 번째부터는 한번 작업을 했던 경험이 있기에 훨씬 기간이 단축되었다. 몸도 어느 정도 늦은 시각까지 버티는 것은 이미 적응한 것 같았다. 아직도 달려갈 길이 멀지만 그래도 오늘 하루는 잔업 없이 일찍 들어가 쉬고 싶었다. 500세트가 무사히 납품하게 되어 긴장이 풀린 탓일 게다.
하지만 형님은 그런 것에 전혀 상관이 없는 듯 오늘도 어제에 이어 계획대로라면 자정이 되어야 겨우 장갑을 벗을 수 있을 것 같다.
H사는 처음 시범적으로 1400세트를 계획했으나 당시 건설 경기가 나라의 살림을 책임질 정도로 뜨거웠기 때문에 해서 계획에도 없던 600세트를 추가하여 2000세트로 상향 조정했다. 11월에 시작해서 2월에 끝낼 예정이었지만 숫자가 늘어 3월에 끝마칠 수 있었다.
고객사로부터 오더(order) 내려왔을 때 모두 안 된다고 거의 자포자기하다시피 했다. 그런데 5개월이 지난 이후 기존 일도 병행하면서 신개발 제품도 무사히 납품했다.
그렇게 겨울을 거의 밖에서 보내다시피 하여 완성된 신개발 제품 2000세트를 모두 완료 납품하였다.
고객사인 H사는 처음부터 우리 회사에게 이렇게 큰 프로젝터를 맡길 생각은 전혀 없었다. 왜냐하면, 행여나 우리로 인해 준공이 지연될 경우 손실 부분은 1차 수주자인 H사가 오롯이 떠안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업자등록증이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열악한 태창에 그것도 개발 프로젝터 양산품 경험이 전무 한 업체에 맡긴다는 것은 여간 부담스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H사의 대표이사가 태창에서 제출한 견적서 및 소개서를 오랜 시간 붙들고 생각이 깊으셨다고 했다.
임원들이 모두 반대했음에도 대표이사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우리 회사를 선택했다.
이유가 궁금했다. 무슨 이유로 H사는 규모가 큰 협력사들을 배제하고 가장 보잘것없는 우리에게 일을 맡겼을까? 그러다 자칫 잘 못 되기라도 한다면 그 원망과 피해는 고사하고 회사의 이미지까지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을 텐데𐩐𐩐𐩐𐩐𐩐𐩐𐩐
그때 대표이사의 의중은 세월이 많이 지난 다음 우연히 알게 되었다. 형님도 그 당시에 이유를 잘 몰랐다.
아무튼, 회사는 모두의 우려를 보기 좋게 불식시키고 자신감이 충천했다. H사뿐 아니라 동종 업계에서도 유사한 건설 제품들의 견적문의가 잇따랐다.
그러나 그러한 제품을 생산할 만한 큰 힘을 내는 기계가 없어서 일하는데, 지장이 많았다.
그 당시는 큰 힘을 가진 기계가 몹시 귀한 시절이었다.
가까운 곳에 그렇게 큰 힘을 내는 기계는 거의 없었다. 있어도 기계에 무리가 되는 제품들은 웬만해서 하지 않으려고 했다. 이곳저곳 사정사정하면 마지못해 겨우 들어주었다.
한마디로 없는 자의 서러움을 참 많이도 겪었던 시절이었다. 형님은 나이 서른도 채 되기 전에 사업을 시작했다. 그야말로 두려울 것이 없는 청년이지만 너무 젊은 탓에 다른 사람들이 가겹게 대할 수 있었으나,,,,,
하지만 열정과 뚝심 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대단했다. 다른 회사의 대표를 비롯한 그 누구도 젊고 어린 사람이라 하여 막대하지 못했다.
H사의 신제품을 무사히 완결 지은 다음 1호선 석수역 근처에서 광명시 가리대 삼거리 근처로 공장을 이전했다.
물량은 많이 늘어났으나 설비가 여전히 열악했다.
옮긴 곳은 약 3천600평의 넓은 부지에 크고 작은 공장동이 여러 개 들어서 있었다. 소유주는 나이가 많은 사람으로 광명시 토박이였다. 조상 대대로 방앗간을 지금 이 장소에서 운영해왔는데 어느덧 방앗간 사업이 사향 길에 접어들자 기존에 있던 창고들을 개조해 공장 임대로 전향했다.
대략 25개 정도의 크고 작은 업체들이 운집해있었는데 그중 우리 회사는 제일 적은 평수를 임차하고 있었다. 처음 임대를 얻고자 방문했을 때 사장이 너무 나이가 적은 것이 불안했는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계약하기를 꺼렸다.
주인은 나이가 많이 들었어도 업체들과의 계약은 본인이 직접 했다.
머리칼은 이마 위부터 정수리까지 거의 없고 양쪽 관자놀이와 뒤통수 아래 부분만 남아 있었다. 입술은 비교적 굳게 닫혀있는데 아랫입술은 특이하게 두툼했다. 돋보기는 항상 코끝에 놓여있는 것이 마치 삼각대를 코에 얹혀놓은 것처럼 하고 있어서 처음 그 모습을 봤을 때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뻔했다.
까맣고 거친 피부에 드물게 송충이 눈썹을 하고 나이로 인해 흰 눈썹이 많았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다. 거기에 두 눈은 크고 앞으로 툭 튀어나와 있기까지 했다.
재차 임대를 놓아주기를 부탁드렸더니 그제야 겨우 말문을 열었다.
사업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더군다나 젊은 사람은 경험이 없어 실패할 확률이 높아 임대주기를 꺼린다는 자신의 속마음을 비췄다.
그래도 간절히 매달리자 마침내 매달 차임을 선입금하고 ‘제소전화해조서’를 월초마다 작성하고, 그리고 한 달을 시작하는 조건으로 공장을 임대해주었다. 한 달이라도 차임을 못 낼 경우 ‘제소전화해조서’로 인해 큰 문제가 되는 것이다. 만약 그런 경우가 발생하면 계약은 해지되고 짐을 싸서 다른 곳으로 이사 가야 한다. 그것이 ‘제소전화해조서’의 주된 내용이었다. 나는 이런 조건은 지금까지 본적도 들은 적도 없다.
이 장소에서 형님은 거의 십 년 가까이 공장을 임대하여 생활했다. 한 장소에서 계속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 안에서 조금씩 조금씩 지경을 넓혀갔다. 그렇게 하여 시화공단으로 분양받아 이전하기 전 우리 회사는 여기에서 가장 넓은 공장동을 쓰고 있었다.
아무튼, 처음 입주할 그 무렵 형님은 H사로부터 큰 기계가 없어서 할 수 있는 일이 지극히 제한적이라는 말을 심심찮게 들었다.
사실 형님은 오래전부터 기계에 대해서 고민이 깊었다. 물론 큰 기계가 있으면, 보다 많은 일을 할 수 있음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우선 기계의 가격도 그리고 기계로 인해 넓은 장소도 필요하고 유틸리티(utility)도 증설해야만 원활하게 돌아갈 수가 있었다. 큰 기계설비는 또 다른 부수적인 것들을 많이 요구했는데 그 모든 것은 결국 돈하고 결부되었다. 자금이 문제였던 것이다.
그렇게 고민을 거듭해온 형님은 우선 중고 기계상에서 프레스 150톤을 구입했다. 제조 시기가 많이 지난 구형으로 신형하고는 모양부터가 차이를 보였다. 그래도 파워는 아직 살아있어서 그동안 외주 처리했던 모든, 금형들을 거두어들여 자체 생산하는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그동안 톤 수가 작은 기계 소리만 들리다가 어느 순간부터 묵직하고 둔탁한 소리가 공장 전체를 감쌌다. 기계가 안착한 자리에 기초 보강 작업도 하지 않고 그냥 진동 고무 패를 깔고 그 위에 기계를, 안쳤는데
아니나 다를까. 얼마 못되어 공장 바닥이 조금씩 크랙이 가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육안으로도 기운 것이 보일 정도였다. 수평 자를 대보니 역시 많이 기울어있었다. 서둘러 패드 자리에 기초를 새로 해야만 했다.
문제는 또 있었다. 큰 기계가 들어오고 자주 전기가 끊어지는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이유를 몰랐다. 그 빈도가 점차 많아지자 관리실에서는 원인으로 큰 기계를 꼽았다. 임대인과 우리 회사와의 계약 전력은 30KW 로 낮게 맺어져 있었는데 그래도 큰 기계가 들어오기 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큰 기계로 인해 전력량이 과해지자 이런 현상이 자주 발생했다.
어느 순간부터 관리실에서는 짜증을 내기 시작했고, 전봇대 변압기로부터 내려오는 고압 배전반은 외부인의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만약 아무나 들어가서 잘 못 되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었다.
고압 배전반 속에는 입주한 모든 회사의 개별 스위치가 붙어있는데 스위치 카바에 회사 이름들이 적혀있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을 때는 해당 스위치의 끊어진 퓨즈를 새것으로 갈아 끼워야 했다.
관리자는 공장 소유주의 인척 관계로 나이도 있을뿐더러 입주자들을 향해 위세가 대단했다. 업체들은 소유주보다 오히려 관리인을 더 부담스러워하는 눈치다.
한번은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를 정도로 몹시 무더운 날이었다.
아무리 더운 여름이라도 새벽이나 아침은 그래도 견딜만했다. 그런데 그날은 기록적인 폭염이 찾아온 날이다. 오전에 벌써 스위치가 한번 나갔다. 먼저 공장 내부의 분전반 스위치들을 살폈다. 혹시 내부 차단기가 떨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가장 좋은데 그런데 그렇지가 못했다. 우려했던 대로 고압 분전반 메인 스위치에서 잘 못 되었다. 관리인의 잔 소리는 사무실 밖에까지 울려 퍼져 여러 사람에게 무안함을 안긴 적이 벌써 여러 차례이기 때문에 마음은 조마조마했다. 관리인은 아직 출근 전이었다. 일도 산더미같이 쌓여있는데 전기로 인해 손을 놓고 있으니 가슴속은 탄식이 나오고 있었다.
“또 뭐야?”
“푸 퓨즈가 나가서,,,” 관리인의 표정을 본 순간 언제나 나의 말은 끝을 맺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전기로 인해 관리실을 방문할 때마다 나는 몹쓸 죄를 지은 중 죄인과 같았다. 이럴 때 관리인은 영락없는 재판관이고 나는 선고를 기다리는 죄인의 모습을 하고 공포스럽게 서있었다.
‘또 뭐야?’ 무뚝뚝하게 하는 그의 말은 ‘이번에 무슨 죄로 왔어?’하는 것처럼 들렸다. 말을 높이는 법도 없다. 그것은 나에게 뿐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였다.
아스팔트위 이글 그리듯 피어오르는 더위는 얇은 납으로 된 퓨즈를 녹이고도 남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우리의 열정은 한층 더 뜨거웠다.
그날 퓨즈는 오전 두 번 오후 두 번 해서 총 네 번이나 허리가 녹아 끊겼다. 잘린 부위는 마치 뜨거운 인두가 닿은 것 같이 타 있었다.
네 번째는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앞의 세 번도 어떻게 다녀왔는지 모르겠다. 들어가지 못하고 관리실 문밖에서 서성이자 눈치를 채고 단념하듯 아무 말이 없다가 대뜸 “오늘 벌써 몇 번째야?” 하고 주위가 떠나갈 듯이 소리를 질렀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무슨 일인가? 뭣 때문에 저렇게 관리인이 소리를 높이지? 궁금한 듯 가던 길을 멈추고 힐끗힐끗 쳐다본다.
내가 돌아올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형님이 직접 관리실로 찾아 왔다. 동생이 관리인으로부터 많은 사람 앞에 무안당함을 목격하고는
“애가 뭘 잘못했소?” 형님의 물음은 조용했지만, 힘이 있었다.
“오늘 벌써 네 번째야. 더운데 짜증나 죽겠네.”
“네 번이든 열 번이든 갈아 줘야될 것 아닙니까?”
“뭣이 어째 이제 더 이상 못 해줘. 맘대로해.”
“관리실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입주업체들 위해서 있는 것 아닙니까?”
“이 사람이 못하는 말이 없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태창은 못 들어줘.”
“뭐요? 그럼 스위치를 안 고친다는 거요?”
“그래 못해 안 해줄 거다”
형님의 두 눈은 불꽃이 이글이글 타고 있었다. 힘이 충천한 데다 ‘태창은 못 고쳐줘’ 자신의 회사를 비하하는 듯한 말을 듣고 그만 젊은 혈기가 폭발했다. 그리고 파장은 150톤의 기계만큼이나 강력했다. 잠시 후 체구가 큰 편에 속하는 관리인의 몸은 허공에 떠 있었다. 두 다리가 땅에서 들리 운 이상 소리쳐봐도 소용이 없었다. 구경하던 사람들 가운데 누구 하나 말리는 이가 없다.
다들 말은 안 해도 상대방을 존중하는 말과 마음가짐을 모르는 무례한 사람을 혼내는 것 같아 내심 잘 됐다는 눈치다.
번쩍 들어 곧 내동댕이칠 것 같았다. 멱살을 잡은 형님의 손이 점점 조여오자 관리인은 숨쉬기가 곤란한 듯 사람 살려 하고 외친다.
그제 서야 사람들이 형님을 붙들고 말리기 시작했다.
“내가 경고하는데 또다시 태창을 들먹이면 그때 알아서 해.”
형님의 경고가 통하였을까? 아니면 그동안 자신이 사람들을 업신여긴 것을 뉘우친 것일까? 어쨌든 그날이 후 다시는 짜증을 내거나 경멸성 잔소리는 하지 않았다. 한동안 차단기가 끊어지지 않아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30KW로 되어있던 우리 회사의 메인 스위치는 60KW로 바뀌어있었다.
150톤 기계를 헤드로 하여 사용 한지 삼년이 흘렀다. 그동안 별 무리없이 잘 사용했다. 그런데 사 년째 접어들자 기계들은 나이 많은 사람처럼 갑자기 파워가 약해지고, 그리고 고장의 빈도가 점점 빨라진다.
헤드 기계가 고장으로 멈추면 일순간에 일이 꼬이기 시작하는데 그렇게 꼬인 일은 최소 3개월이 지나야 겨우 회복된다.
몇 날을 세워놓고 수리에 들어갔다. 그러면 얼마 동안은 잘 사용한다. 그러다 또 다른 예기치 못한 곳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이러한 현상은 해가 거듭될수록 그 빈도가 더해갔다.
그동안 우리 회사에서 헤드 기계는 일요일 제외하고 하루도 쉬어본 적이 없었다. 150톤 파워는 건축자재 생산에 다소 부족한 부분이 없지 않았다. 이쯤에서 형님은 또 한 번 깊은 고민에 빠진다.
그때로부터 20년도 더 전의 모델은 변화된 금형 공법과 잘 맞지 않아 언젠가는 교체를 해야 했다.
다만 그날이 생각보다 빨리 다가온 것뿐이다.
그 무렵 공장은 많이 협소하여 조립식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옆 회사까지 넓혔다. 그제야 답답했던 숨통이 조금 열리는 것 같다.
그 이후 기계 전문제작업체인 한일프레스에 250톤 기계를 주문했다.
문제는 기계 크기에 비해 공장 입구가 협소하여 정상적으로 도비 할 수 없었다. 형님은 사전에 기계 주문이 소문날까 봐 공장장 외 다른 직원들에게는 비밀로 했다. 왜냐하면, 공단으로부터 제제를 받을 수도 있기 때문으로 공단은 개인소유로 변압기도 20개가 넘는 업체들이 쓰기에는 다소 용량이 적은 편에 속했다. 가뜩이나 용량이 부족한데 전에 그 난리를 쳤는데 보다 큰 기계가 들어오면 또 한바탕 전기문제로 시끄러울 수 있었다.
기계 도비 하기 전 렉카 업체와 사전 답사를 했다. 크기가 워낙 커서 기계뿐만 아니라 지게차도 들어올 수 없었다. 방법은 단, 한가지 지붕을 걷어 내고 렉카로 들고 위에서 내려 안착하는 방법이 있었다. 이렇게 하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다.
그런데 주인이 이렇게 하는지 알면 순순히 허락할까? 형님은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렉카 기사와 중량물 운반기사와 목수(木手) 세 사람은 사전에 계획하기를 사람들이 출근하기 전에 마무리 짓는 것으로 했다. 그렇게 하려면 적어도 새벽 4시는 공장 마당에 이 모든 장비들이 도착해 있어야 하는데 새벽 4시는 아직 해가 떠오르기 전으로 어두컴컴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지붕 위에서 철거를, 한다는 것은 몹시 위험하여 전날 작업을 마쳐야만 했다.
캄캄한 새벽 미명에 집채만 한 시커먼 물체가 요란한 엔진음을 앞세워 경비실 바리케이트를 그대로 밀고 들어올 기세로 바짝 들이밀었다. 졸고 있던 경비아저씨는 놀라 밖으로 나왔다. 물론 사전에 연락받은 게 없어 몹시 당황하는 기세다.
이때 형님이 도착했다.
“우리 회사에 오는 것이니 열어주시오.” 강한 어조로 말했다.
경비아저씨는 사전에 연락받은 게 없어서 못 열어준다며 완강하게 버텼다. “우리 회사에 물건 들어오는데 무슨 허락을 받으라는 거요. 그 사람이 허락 안 해주면 물건도 못 들어오겠네” 형님은 경비아저씨와 실랑이 할 시간이 없었다. 끝까지 열어주지 않자 지게차로 바리케이트를 그대로 밀어버렸다. 도로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렉카와 추레라가 마당 가운데로 들어왔다. 마당은 장비 두 대가 들어서자 갑자기 협소하게 보였다. 중장비들이 자리 잡는 데 시간이 걸렸다. 렉카의 붐대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고 추레라도 쇠사슬 같은 체인으로 꽁꽁 묶은 것을 풀기 시작했다. 도비 설치 인부들이 기계위로 올라가 클램프 체결을 확인한 다음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워 들어도 좋다는 신호를 보낸다. 어느새 날이 밝았다. 하나둘 출근하는 사람들은 예기치 못한 광경이 연출되는 것이 신기하듯 쳐다보았다. 기계가 공중에 붕 떠 있을 때는 공단 안에 혼선이 빚어졌다. 중장비로 인해 차를 주차할 수가 없어 여기저기서 크락션 소리를 울려댔다. 어떤 사람들은 옆 회사에서 기계가 들어오는 것이 싫은지 불만을 여과 없이 표현했다. 그럼에도 형님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공단 내부가 우리로 인해 아무것도, 못하고 있자 관리실에서 나왔다. 이미 경비실을 통해 새벽부터 있었던 일들을 보고받은 터였다. 한걸음에 달려왔지만 육중한 기계가 공중에 매달린 상황을 보고는 아무 소리도 못 하고 멍하니 바라만 볼 뿐이다.
잠시 후 기계는 공장 안으로 들어가고 상황은 종료되었다.
추레라는 이미 자리를 떠났고 렉카도 펼쳐놓은 다리들을 접고는 황급히 현장을 빠져나갔다.
150톤 자리에 그보다 훨씬 큰 250톤이 들어서자 공장이 꽉 찬 느낌이다. 나의 마음도 흥분되었다. 우리 회사에 처음 새 기계가 들어왔다. 아직 페인트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그야말로 따끈따끈한 기계의 냄새는 향수같이 은은하여 종일 그 옆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로부터 20년간 참으로 모질게 일했다. 능력을 초과하여 작업하기가 다반사였다. 그럴 때마다 기계는 무리 없이 잘 따라 주었고 회사가 생산하는 거의 모든 제품들을 작업하기에 별 무리는 없었다. 그로 인해 회사는 눈부신 발전을 할 수 있었다. 사람도 세월 앞에 장사 없듯이 철 덩어리인 기계도 갈수록 소음은 늘어가고 능력에 훨씬 못 미치는 작업을 해도 끝 무렵은 마치 우는 것처럼 들렸다. 2007년도 무렵 더 이상 사용은 무리라 판단하여 처리했다. 팔려가면서도 처음 기계값과 비슷한 금액을 받았다.
150톤 기계를 중고로 들여와 많은 일을 했다. 회사 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다. 250톤은 철판으로 특별히 주문 제작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낯선 사람이 담배갑 절반 크기의 제품을 들고 회사 대표를 만나기를 청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형님이 물었다.
“사실 누구의 소개로 온 것은 아닙니다” 답답한 듯 앞에 놓여있는 냉수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그의 표정은 왠지 초조함이 묻어났다.
“공장들이 많이 있길래 들어와 봤고 우연히 프레스 소리가 들려서 이렇게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기계 소리가 들려서 방문하게 되었다니 조금은 황당하게 들렸다.
“무슨 제품입니까?” 형님이 물었다.
“자동차부품입니다.”
형님은 탁자에 놓여있는 제품을 이리저리 앞뒤로 관찰하듯 살폈다.
“소재 두께로 보아 승용차는 아니고 상용차 같습니다.”
“네 맞습니다.”
“수량은 많지 않겠네요?”
“그래도 차 한 대 두 개씩 들어감으로 한 달 약 10000개쯤 됩니다.”
“납품처가 어디입니까?”
“대한 중기입니다.”
“대한 중기?”
“신도림동에 있습니다.”
“현대 자동차 쪽입니까?”
“기아 계열사입니다.”
“대한 중기의 주력 생산품은 무엇인가요?”
“대차입니다.”
“대차?” 형님은 뜻밖인 듯 고개를 갸우뚱하며 되묻는다.
“대차라면 레일 위를 달리는 그 대차 말입니까?”
“맞습니다”
“,,,,,,,”
“오래전 기아 자동차는 대한 중기를 인수하여 대차와 특수강 일부를 생산하고 있었습니다.
군수 차량과 특장차를 제외한 엑슬하우징을 생산합니다.”
“아 그렇군요”
형님은 언젠가 기회가, 주어지면 건축부품에서 자동차산업으로 갈아타고 싶었다.
그동안 건축 붐이 일어 나름 바쁘게 일했지만, 리스크가 따랐다. 단가는 괜찮은 대신 그만큼 위험성도 따른다는 얘기다.
다행히 우리 회사는 아직까지 부도는 맞지 않았다. 그래서 기회만 있으면, 보다 안전한 자동차산업으로 눈을 돌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자동차부품의 매력을 느끼게된 계기가 한 차례 더 있는데,,,
그때로부터 약 3년 전쯤으로 어느 날 저녁 옆 공장의 김사장이 가까운 곳에 기아자동차의 트럭 적재함 문짝을 만드는 회사가 있으니 같이 가보자고 했다. 그때만 해도 다른 회사를 방문할 기회가 거의 없어서 보다 큰 회사를 가보는 것은 언제나 가슴 설레는 일이었다. 설비도 구경하고 적재함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도 보고, 또 우리 회사에 접목 하면 좋은 부분은 뭐 없을까? 견학하는 마음으로 바쁜 일을 뒤로하고 다녀왔다.
아! 그런데
그곳에서 전혀 다른 형태의 거대한 기계를 보았다. 처음 보는 것으로 산같이 우뚝 서 있는 것을 보고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H형 타입의 500톤이었는데 마침 적재함을 작업하고 있었다.
키는 천정에 닫을 듯이 높았고 지하로도 1/3가량 내려가 있다고 하니 가히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그때 ‘서울차량’을 방문하고 난이 후 형님은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자신도 대형(大型) 프레스를 반드시 하고야 말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그날의 다짐은 12년이 지난 90년대 중반에 이루어졌다.)
사업을 하는 동안 형님은 한 번도 그날을 잊은 적이 없다고 했다.
어찌나 강하게 와 닿았는지 기계가 작업하던 광경을 자주 들려주었다.
하지만 자동차 쪽으로 연결 지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제품의 단가가 너무 박합니다”
손님은 제품의 단가 얘기가 나오자 갑자기 목소리가 모기소리 만큼 작아졌다.
형님은 속으로 생각하기를 ‘이 제품이 나에게 올 때까지는 수없이 많은 업체들에게 거절을 당했겠구나. 거절에 거절을 당하다가 결국 여기까지 흘러 흘러 왔음을 직감했다.’
“얼마입니까?” 형님이 물었다.
“,,,,,,,,,” 손님은 대답을 못 하고 아랫입술을 오므려 입속으로 말아 넣었다.
“105원입니다.”
형님은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얼굴도 어이없어 놀라는 표정이었다.
참 기가 막힌 듯 어이없는 웃음만 지어질 뿐이었다.
“여기가 몇 번째입니까?” 형님은 상대방의 얼굴을 무안할 정도로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스물두 군데를 들렸습니다. 태창이 스물세 번째입니다.”
그의 얼굴과 말에 힘이 없음은 마치 이번에도 틀렸구나 하는 것 같았다. 단가가 너무 낮게 책정되어있어서 누구라도 선 듯 나서려 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제품은 적어도 사람의 손을 열다섯 번 이상을 필요로 했다. 거기에 CO2 용접까지 해야 하고 8mm 너트 스폿용접까지 해야 했다. 물론 너트 산에 이물질이 묻어있거나 들어가면 불량이다.
정상적인 원가는 550원 정도인데 잔손질이 많음을 감안하면 이 금액에도 하기를 꺼릴 정도다. 그런 성격의 것을 다섯 배나 적은 금액으로,,, 글쎄 비정상적인 사람이 아니고서야 누가 하려고 들까?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제품의 속성을 알고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상대방은 이번에도 업체를 못 만나면, 다시 생산할 수 있는 업체를 찾아 나서야 한다. 재고도 얼마 남지 않아 걱정이 태산이었다.
“조건만 맞으면 해보겠습니다.” 형님은 침묵을 깨고 조용히 말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상대방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화들짝 놀란 얼굴로 형님을 올려다보며
“조건이라뇨? 말씀해 보세요”
“지금까지 납품은 어떻게 했습니까?” 형님이 물었다.
“A라는 업체가 저희 회사로 납품하면 우리는 다시 대한중기로 납품합니다.”
“바로 그겁니다. 나에게 납품권을 주십시오. 내가 직접 대한중기에 납품을 하는 조건이면 해드리겠습니다.”
“얼마든지 해드리겠습니다.”
상대방은 오래 묵은 체증이 쑥 밀려 내려가듯 화색이 돌았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뜻밖의 장소에서 해결할 줄은 아마 본인도 예상하지 못한 것 같다.
CO2 용접기와 스폿용접기도 구매했다. 당연히, 용접을 할 수 있는 기술자도 모집했다.
하지만 직원들은 문제의 제품을 하면 할수록 불만과 원성이 높았다.
“도대체 우리 사장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형편없는 제품을 받은 거야 이해가 안 돼”
“그러게 말이야 이런 어처구니없는 제품을 할 바에는 차라리 안 하고 말지. 할수록 적자인 것을 왜 할까?
“생산 한지, 벌써 몇 달째인데 이건 1000원을 준다 해도 해서는 안 될 제품 같아” 다들 불평하며 못 마땅해했다. 제품은 생각보다 손을 많이 요구했다. 단가가 박한 것은 많이 생산할수록 더 많은 손실을 초래할 뿐! 어찌 보면 직원들의 불만도 이해가 간다. 차라리 다른 제품에 이 정도의 공을 들이면 외형이 꽤 나 올라갈 것 같았다.
그렇게 낯선 사람으로부터 우연히 손에 쥐게된 자동차부품을 형님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정성을 귀 우렸다.
그로부터 정확히 6개월이 흐른 어느 날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태창금속입니다.”
“네 수고하십니다. 대한중기 구매과입니다”
“저희 제품이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닙니다. 노사장님 급히 좀 뵀으면 합니다. 지금 바로 우리 회사로 방문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트럭을 몰고 신도림동에 위치한 대한 중기로 향했다. ‘무슨 일로 전화까지 해서 호출하는 것일까? 분명 제품의 문제는 아니라고 했는데,,,’ 형님은 영문도 모른 채 대한중기 사무실로 들어갔다. 납품업무는 주로 현장에서 이루어지다 보니 사무실은 처음이었다.
“어디서 오셨어요?”
“태창금속에서 왔습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직원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곳은 구매부장실이었다.
“부장님 태창금속 노사장님 왔습니다”
“어서와요. 이쪽으로 앉으세요.” 부장은 안내한 직원에게 차 두 잔을 주문했다. 부장은 나이가 지긋한 듯 목소리는 상당히 차분하다.
“그동안 우리 제품 때문에 수고 많았습니다.”
“아닙니다”
“노사장님 이렇게 뵈니 상당히 젊은 분이셨군요. 다 모두 이 제품을 꺼리는데 다행히 사장님을 만나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부장은 형님에게 찻잔을 들게 하고 본인도 천천히 입술을 적신 다음 말을 계속 이어나간다.
“태창은 설비 현황이 어떻게 됩니까?”
“프레스는 250톤 1대와 그 외 6대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아 그래요 250톤이 있어요?”
“네 얼마 전에 들여왔습니다”
“잘 됐습니다. 사장님이 원하시기만 하면 우리 대한중기 차축부 제품들은 얼마든지 개발하여 납품하세요. 내가 담당자에게 지시해놨습니다.
앞으로도 우리 대한중기를 위해서 노사장님 같은 분이 꼭 필요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하고 부장은 형님의 손을 꼭 잡았다.
그날 차를 몰고 돌아오는 길은 마치 꿈꾸는 것 같았다. 차에는 대한중기의 크고 작은 아이템들이 납품용 박스에 하나 가득 실려있었다.
사람들은 돈도 안 되는 제품에 열심 내는 것을 보고 형님을 향해 젊은 사람이 사업의 기초도 모르고 무슨 일을 한다고 그래 하며 비아냥 댔다. 그도 그럴 것이 이십 군데가 넘는 데서 외면한 제품을 자기가 하겠다고 나섰으니 정상적으로는 이해가 안 될 수밖에.
그럼 형님은 왜 이십여 업체도 더 되는 곳에서 외면받은 제품을 굳이 자처해서 한다고 했을까? 나는 어린 마음에 이해가 되지 않아 잔뜩 불만 섞인 목소리를 하고 직접 물어보았다. 물론 대한중기 구매부장의 호출이 있기 훨씬 이 전이었다.
“대한중기도 자기 회사 제품이 불합리하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아주 잘 알고 있지. 크고 작은 업체 이십군데도 더 문의해봐도 한결같이 단가를 올려주던지, 아니면 거기에 상응하는 인센티브를 주던지 안 그러면 못 한다고 하니 어쩌면 여기에 답이 있다. 돈 되는 제품은 누구나 할 수 있지 그러나 반대로 이윤이 남지 않는 제품은 누군들 하고 싶겠나. 아무나 할 수 없단다.” 근래에 들어본 형님의 말 중에 가장 길었던 것 같다. 나는 들어도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한마디로 대한중기에서 돈도 되지 않는 자기네 제품을 언제까지나 협력업체가 손해를 감수하면서 하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이다.”
형님의 의중을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그러나 그 통찰력(通察力)까지 이해하기는 글쎄 나로서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그랬다. 형님은 처음 제품의 단가가 105원이란 말도 않되는 얘기를 듣고 실망했다. 한편으론 ‘단가가 좋으면 이것이 나에게까지 왔을까? 아마 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실망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우리 회사가 몇 번째 방문이냐고 물었고. 22번째를 넘어 23번째라고 했다. 형님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것을 떠올렸다.
‘대한중기에서도 이것 때문에 머리가 많이, 아프겠구나. 그러면 골치 아픈 것을 해결해준다면 우리 회사가 대한중기의 협력사가 되고 그토록 자동차 부품업을 해보고 싶었는데 이것도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첫머리에 제품을 생산하되 단서가 붙었고 조건이 뒤따랐던 것이다.
대한중기 에서는 누군가 나서서 문제의 제품을 해결해주기만 한다면 조건을 따지지 않고 승낙할 생각이었다. 형님이 제시한 조건은 간단했다. 우리 회사가 직납권을 갖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우리 회사가 생산하고 우리 회사 이름으로 거래명세표를 만들어 납품까지 마치는 것.
그러나 처음 해보는 자동차부품은 건축자재와는 많이 다르다. 생각했던 것보다 까다로웠다. 훨씬 정교하고 공차 허용을 거의 용납하지 않았다.
품질 요원들은 제품의 사정을 알아도 봐주거나 묵인하는 일은 없었다.
처음 한 달 두 달 제품들의 특성을 몰라 무척 고전했다.
고객사는 과하게 정성을 요구했다. 당장이라도 ‘도대체 이 제품의 단가를 알기나 하는 겁니까?’ 불만을 표출하고 싶었다.
하지만 형님은 품질(QC) 요원들의 요구사항을 다 들어주었다.
그렇게 반년의 시간이 흘렀다. 앞에서 소개한 대로 묵묵히 성실하게 일한 대가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크게 와 닿았고 회사는 소리없는 성장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때마침 이러한 일을 예상이라도 하듯 수명이 다한 150톤 기계를 정리하고 250톤 기계를 들여놓은 것이 크게 유효했다. 아마 구매부장도 그날 기계 보유현황을 물어봤을 때 이런 기계가 없었다면 과연 몇 아이템이나 우리 회사로 올 수 있었을까? 기계의 능력으로 보면 몇 아이템 오지 못했을 것이다.
다음날부터 바로 금형 개발에 착수했다. 까다롭고 어려운 제품일수록 금형제작(金型製作) 회사에 외주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당사에서 직접 설계하고 제작했다. 철(鐵)은 사출이 아니므로 한 번에 완성되지 않고 여러 공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완성된다.
다른 회사 제품들과도 체결되고 그렇게 조금씩 완성이 가까워지면
본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내가 만든 제품은 어디에 꽃같이 숨었는지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을 때 비로소 완성된 것이다.
그날 형님이 프라스틱 박스에 담아온 새로운 제품들은 수개월의 개발 과정을 거쳐 양산전 고객사로부터 품질 심의(테스트)도 무사히 잘 통과했다.
이렇게 대한중기와는 출발이 좋았다. 얼마나 좋았는지 품질부장은 우리에게 1년간 무 검사를 허락했을 정도였다.
모든 금형이 완성되자 일은 몇 배로 늘어나고 직원도 많이 충원되었다.
대한중기로 본격적인 납품이 이루어지면서 건축 자재 일은 점차 밀려났다. 그럼에도 형님은 본인이 처음 사업을 할 때 했던 아이템들은 마치 첫사랑처럼 놓치기 싫어하셨다. 아마 그것은 사업을 하시는 모든 분들의 마음이 아닐까?
본인의 손때묻은 기계와 도구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회사는 늘어나는 자동차 제조에 밀려 결국 건축 자재 일은 얼마 못되어 자동차부품 생산업으로 바뀌고야 말았다.
우연히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또 주변의 말에 흔들리거나 요동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신념을 지킨 결과는 상상을 초월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고 현명한 판단이었다.
돌이켜보면 과연 우연이란 게 있을까?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찾아오는 것인가? 마침 그때 지나가던 사람이 생각지도 않은 곳에 공장들이 운집해있는 것을 보고 공단 안에 잠시 들렸던 것이다. 이리저리 둘러보는데 마침 프레스 소리가 들려 자기도 모르게 발걸음이 우리 회사로 향했단다.
만약 그때 금형을 교체 중이거나 무슨 연유로 기계를 가동하지 않았다면 아마 그 사람은 여기에 프레스 공장이 있는지도 모르고 발길을 돌렸을 것이다. 공단 안에 우리와 같은 프레스 공장이 코아를 찍는 고속프레스를 제외하고 네 개 회사가 더 있었다. 앞의 세 군데를 두드려 보고 우리에게 왔는지는 잘 모르겠다.
남들은 ‘노사장은 운 좋게 일이 잘 풀렸어. 이 사람은 순전히 운이 따라줘서 잘 된 거야 그렇지않고서 어떻게 잘되’ 하고 모든 것을 운으로 돌리지만 그런 행운도 받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나에게 오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이 시기와 때가 잘 맞아 준 것으로 보고 결코 우연히 저절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고 본다.
(고통의 시간이 지나가면서 점차 희망과 성공의 빛이 조금씩 비추는 것 같았다.)
88 올림픽은 우리나라에 많은 변화를 안겼다. 역사적인 순간으로 무엇보다 시민들의 인식이 이전 이후로 명백하게 바뀌었다.
올림픽은 산업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서울은 이미 국제적인 도시로 탈바꿈하기 위해 변화를 모색했다. 그 첫 번째가 도심 가운데 높이 솟아 연기를, 품어내는 굴뚝 산업들을 우선하여 지방으로 이전했다. 올림픽이 끝나면 많은 외국 손님들이 우리나라를 방문할 텐데 이러한 모습은 결코 좋은 인상으로 기억될 수 없기 때문이다.
대한중기도 신도림동에 굴뚝을 몇 개 꽂아놓고 있어서 예외 없이 지방으로 옮겨야 했다.
그 무렵 시흥시 정왕동에 대규모 국가공단 조성을 위해 뻘밭을 매립한 다음 분양 공고를 하였다. 응찰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렇게 많이 몰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국가에서 그야말로 제조업만을 위한 저렴한 가격의 특별분양이었다. 자격조건이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진 않지만 이런 기회가 언제 또 있을지 아니 영영 못 올 수도 있기 때문에 분양에 응찰하게 되었다.
구름 떼 같이 몰려든 사람들을 봤을 때 사업자등록증이 나온 지도 얼마 되지 않은 우리 회사는 절로 낙담이 되었다.
대한중기의 지방 이전으로 분주하지만 그래도 일단 접수를 해놓고 기다려 보기로 했다.
정부에서 제조업의 활성화를 위한 정책을 폈는데 혹 부동산 투기장으로 잘 못 이용될까 봐 분양 심사는 매우 까다롭게 진행되었다.
그로부터 두 달 후 당첨자 공고가 붙었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초조한 마음은 감출 수가 없었다.
예상을 깨고 명단에 상호와 대표자의 이름이 올라와 있는 것이 아닌가. 그곳은 시화공단으로 그 유명한 반월공단과 한 지면에 있어서 단일 공단으로는 동양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안산시와 시흥시에 걸쳐있었다.
신청 평수는 500평으로 분양 면적이 가장 낮은 면적이었다.
분양받고 얼마 후 시화공단으로 입주하면서 오랜 임대 생활을 청산할 수 있었다.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하고 사업을 시작 한지 꼭 13년 만의 일이었다.
나이 서른도 되지 않은 젊은 사람이 사업을 한다고 공장을 차임 할 때 주인은 불안하여 임대도 주지 않았다. 광명시 가리대 삼거리 조그마한 공단은 개인소유로 이미 다양한 업체들이 입주해 있었다. 그중에서도 우리는 규모가 가장 작았다. 그러나 국가공단으로 이전 할 때는 가장 큰 공장으로 변모되어있었다. 입주한지 7년 만이었다.
형님은 임대주로부터 야박하게 매달 ‘제소전화해조서’를 작성하고 또 차임을 선입금했어도 이사를 하지 않고 한곳에 오래 머문 것이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다음 임대 기간 만료가 도래하기 전에 분양받은 부지에 건축이, 가능했다. 더 이상 연장하지 않겠다는 통보를 관리실에 전했다.
며칠이 못 되어 나이 많은 공장 주인은 조용히 형님을 찾는다.
“뭐가 잘 못 됐습니까?” 형님이 물었다.
“아 아닐세” 나이 많은 주인은 눈꺼풀이 쭉 처져 있어 오늘따라 돋보기가 더욱 코끝에 놓여있었다.
“노사장 여기로 온지 몇 년째요?”
“7년입니다.”
주인은 믿기지 않는 듯 검고 두툼한 아랫입술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잠시 상념에 잠기듯 주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혼잣말로 신음하듯 “음, 벌써 그렇게 됐구먼”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형님은 주인으로부터 무슨 말이 나올지 긴장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제소전화해조서 외에 이렇게 독대해서 앉기는 처음이었다.
“사실은 말일세 자네에게 긴히 상의할 일이 있어서 불렀네.”
“상의할 일이라니요?”
형님은 주인의 말을 듣고 더욱 마음속이 복잡했다.
‘상의할 일이라니? 재산도 어마어마하고 연배도 많이, 높으신 분이 나에게 무슨 상의를 한단 말인가?’
주인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마음속이 복잡한가 보다.
“얘기 들었네. 시화공단에 부지가 당첨되었다지. 지금까지 내가 자네에게 아니 노사장에게 몹시 서운하게 대한 것 같구먼, 지금 생각하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는데 말일세. 그렇게 느꼈다면 내가 사과하지”
“아닙니다. 회장님”
“처음 노사장을 봤을 때 젊은 청년으로 일에 대한 두려움은 없는 사람으로 보여서 한편 불안한 마음도 없지 않았는데. 그래도 조금씩 지경을 넓혀가는 것을 봤을 때 언젠가 한 번은 일을 낼 사람이란 걸 알았네.” 나이 많은 주인은 누구를 불러 속내를 내비칠 그런 위인은 결코 아니었다. 형님을 오래도록 지켜보면서 그동안 꽁꽁 감춰둔 마음을 열어 보였다.
“관리실 김부장이 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일세”
“알고 있습니다.”
그랬다. 언제부턴가 주인과 생김새가 많이, 비슷한 사람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아들이었다. 그렇게 아버지와 아들은 생김새가 많이 닮아 있었다.
까만 피부에 코끝이 뭉툭한 것과 진한 눈썹, 양 볼은 땀샘이 열려있는 것처럼 보였고 아버지처럼 아랫입술도 검고 두툼하기까지 했다.
아들은 당시 나이가 42세로 형님보다도 연배가 높았고 별다른 직업 없이 아버지 공장의 관리사무실로 출근하는데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몹시도 못 마땅해했다.
비슷한 연배의 노사장은 열악한 환경을 해치며 밤낮 물불을 가리지 않고 일하는데 반면 아들에게는 안타깝게도 그런 진취적인 기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시간이 가고 해가 거듭될수록 아버지는 고민이 깊었다. 언제나 다급한 쪽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였다. 나이는 많이 먹었어도 그냥 내버려 두기에 걱정인 아들을 위해 자신이 생존해있을 때 뭐라도 일구어 안정된 생활을 해나갈 수 있도록 해주고 싶었던 것이었다. 돈도 장소도 어디 하나 부족함이 없는데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 관심이 없었다.
형님을 조용히 부른 까닭도 혹시 좋은 아이디어가 없을까. 해서였다.
“어디 복잡하지 않으면서 큰 기술 없이도 할 수 있는 그런 일이 있으면 좋겠는데.”
곰곰이 생각하는 형님을 향해 “큰돈은 못 벌어도 좋으니 자기 앞가림만이라도 할 수 있으면 족하네.”
묵묵히 주인의 고민을 듣던 형님은 이제야 자신을 보자고 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자식의 앞날이 걸려있는 문제이기도 하고 괜히 이상한 소문이라도 나게 되면 자존심의 상처를 입을 수도 있었다. 주인은 매우 신중하고 깊이 생각한 다음 형님을 불렀다.
“적합한 일이 한가지 있기는 합니다. 만!”
“오 그래, 어서 말해보게. 무슨 일인가?” 하나 가득 근심이 드리운 주인의 얼굴은 적합한 일이 있다는 형님의 말을 듣고 화색이 조금 돌아온 듯이 보였다.
“혹시 스리팅(Slitting) 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스 스리팅? 그게 뭔가?”
“핫 코일을 들여와 고객사가 원하는 폭으로 제단 해서 납품하는 겁니다.”
“노사장 좀 더 자세하게 말해주게.”
“둥근 코일은 그 상태로 쓰지 못하고 용도에 맞게 제단을 해서 씁니다. 고객사가 원하는 치수(폭)대로 스리팅해서 주면 고객은 그것을 받아 제품을 생산하게 되지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
“우선 42m정도의 공장이 필요합니다. 여기 라동 정도면 충분합니다. 라동을 보며 항상 그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그랬던가.” 주인은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또 다른 준비는 뭐가 있는가?”
그날 형님은 자세하게 일러 주었다.
그렇게 들려준 형님의 말이 주인에게 와 닿은 것일까?
얼마후 라동의 임차인들은 하나둘 빠르게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라동은 건축 된지 너무 오래되어 아예 건물을 다시 리모델링 하면서 새로운 건물로 변신하였다.
그리고
주인은 시도 때도 없이 형님을 찾아와 라동 공사현장으로 데리고 갔는데 마치 중간 점검을 받는 것 같았다.
약 두 달 보름 후 라동은 중량물을 취급할 수 있는 철골구조로 완전히 바뀌어있었다.
코일 스리팅기기가 들어와 자리를 잡더니 언제부턴가 다양한 크기의 코일을 실은 차들이 도로 밖까지 즐비하게 늘어섰다.
공단 안은 다시금 활력이 넘치고 분주한 사람들의 움직임과 기계들의 큰 울림소리가 힘차게 들리고 있었다.
스리팅 공장은 어느덧 공단 안에서 제일 큰 기업으로 급부상했다.
특히 주인의 아들은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자신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하듯 점차 활동적으로 바뀌어 갔다.
한편 대한중기는 1990년에 회사명을 기아특수강으로 변경했다.
신도림에서 전북 군산으로 이전했는데 1990년대 초반의 일이었다. 잘 지어진 건물은 오래되고 흉물스럽게 보이던 이전의 공장 하고는 외형적으로 매우 달라 외부에서 봤을 때 특수강을 생산하는 공장처럼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형님은 마음이 급했다. 기아특수강은 이미 공장이 지어져 곧 양산 들어가는데 우리 회사는 아직 공장용지조차 봐 둔 곳이 없었다.
기아특수강의 차축부서가 정상가동 되는데도 우리 회사는 한동안 장소를 구하지 못했다.
부품의 조달은 이틀이 멀다 하고 광명시에서 2.5톤 트럭으로 실어 날랐다. 상당히 먼 거리였다. 전날 늦게까지 생산한 제품을 차에 적재하고 밧줄로 묶은 다음 해가 떠오르기 전 어둠이 짙을 때 출발했다. 호남 고속로 여산 휴게소에서 처음 허리를 펴본다. 세수하고 화장실 다녀온 다음 또 목적지까지 쉬지 않고 달렸다. 피곤한 몸을 정신력으로 이겨가면서 그렇게 도착했어도 항상 고객사는 왜 이렇게 늦었냐고 못마땅해했다.
이렇게 장거리 납품은 군산 가까운 농공단지에 공장용지를 매입하고 건축하기 전까지 계속 이어졌다.
말도 못 할 정도로 피곤했다. 운전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공장에 도착하면 또다시 생산라인에 합류하는 힘든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너무 먼 장거리를 조그마한 부품 하나가 없어도 그곳까지 가야만 했다. 그래서 이것저것 챙길 것이 많았다. 한번은 2.5톤 트레이드에 너무 많은 짐을 실어 차가 상당히 무거워 출발부터 힘겨웠고 멈추는 것도 과적으로 인해 브레이크가 밀렸다. 내심 불안했다.
군산 끝자락까지 갈 생각하니 앞이 캄캄해 온다. 내 마음은 차에 실린 제품의 무게보다도 훨씬 더 무거웠다. 얼마를 지나왔을까? 갑자기 펑 하고 귀가 먹먹할 정도의 큰 소리가 들렸다. 아니나 다를까. 뒷타이어 하나가 무게로 인한 과열을 견디지 못하고 그만 뻥크가 나고 말았다.
고속도로 위에서 이렇게 황당할 수가 또 있을까?
나는 급히 속도를 줄이고 비상 깜빡이를 켜 비상상황임을 알렸다. 차는 한쪽 타이어로 겨우 버티고 있는데 곧 주저앉을 것처럼 위태롭다. 겨우겨우 졸음 쉼터 같은 곳에 도착해 차를 세웠다. 타이어는 지뢰에 갈기갈기 찢겨 지듯 형체가 거의 없었다.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고 유압 자키를 꺼내 타이어 교체를 시도했다. 자키를 바닦에 고정한 다음 유압실린더를 작동하는데 그러자 어느 정도 차가 들려 올라왔다. 그리 크지 않은 것이 엄청난 무게의 트럭의 축을 들어 올리는 것이 신기했다. 휠너트를 막 풀려고 하는데 들려 올라간 트럭이 조금 내려앉은 것 같았다. 자키의 바닥면이 무게에 의해 아스팔트 속으로 조금씩 밀려 들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스팔트는 도장의 각인보다 더 선명하게 네모가 찍혀있었다. 아스팔트와 자키 사이에 철판을 고였다. 그리고 다시 시작했다. 아무래도 처음 해 보는 것으로 많이, 서툴렀다. 이렇게 혼자 버거운 대응을 하고 있는데, 보다 못한 옆의 트럭 운전 수가 답답했는지 자기 차에서 내려 도와주었다.
“어디까지 가슈?”
“군산까지 갑니다.”
“2.5톤에 뭔 짐을 이렇게나 많이 실었소?”
내가 멋쩍은 표정을 지어 보이자 그는 적재함 하부를 가리키며 위험할 정도의 과적임을 알려주었다.
“판 스프링이 짐을 실어도 이 상태가 정상인데 지금 이차는 어떻소. 그 반대로 되어있잖소 앞으로 절대 이렇게 싣고 다니지 마시오. 너무 위험하오.”
경험도 부족 한데 다 겨우 면허를 취득하고 급한 대로 납품을 하고 있으니 잘 모를 수밖에 그는 더 큰 낭패를 당하기 전에 미리 경고하는 것 같아 목적지까지 중간중간 타이어를 점검하고 과열된 타이어에 물을 뿌려 식히면서 겨우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그날은 다른 날에 비해 열배는 더 힘들었다. 만약 그 시간 아저씨의 도움이 없었다면 납품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회사에서는 연락도 닫지 않아 이유와 원인도 모른 채 답답할뻔했다. 더군다나 실린 적재중량이 얼마나 위험한지도 모르고 급하다 하여 속력을 냈다면 더 큰 위험을 만났는지도 모를 일이다. 고마운 아저씨 덕분에 힘은 들었어도 무사히 회사로 귀가할 수 있었다.
이것은 나의 삶의 큰 경험이 되어 항상 준비하는 자세로 나를 다듬어갔다.
어느덧 깊은 밤은 서서히 사라지고 먼동이 터 오기 시작했다.
시화공단 분양 공장도 건축에 들어가고 서천 장항 공장도 건축에 들어갔다. 특이한 것은 공장 고(高)를 보통 회사보다 13M정도 높게 건축했다.
직원들도 그 이유를 모르고 ‘뭣 한다고 건축비 많이 들게 높이 짓는 다냐’ 하고 한마디씩 거들었다.
나도 이유를 잘 모르다가 시간이 한참 흐른 이후 비로소 알았다. 형님은 오래전 서울차량에서 봤던 대형 기계를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다.
형님은 자본이 모일 때마다 기계를 구매했다. 언제나 기계에 대한 목마른 사람같이 갈증을 느꼈다.
충남 서천 공장은 1000평으로 가리대 임대공장보다 4배나 넓었다. 갑자기 넓어진 공장을 보며 나에게도 새로운 목표가 하나 생겼다. 우리 회사가 기아자동차 차축공장의 납품처 중 제일 큰 밴드 업체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의 현실은 여러 업체 중 규모가 가장 작았다. 처음에 비해 설비 부분은 증설이 많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협력사 중 제일 열악했다. 가장 늦게 승선한 샘이다. 그의 대부분, 협력사들은 대한중기 초창기 시절부터 기아특수강으로 법인명이 바뀐 이후에도 별다른 구조 조정 없이 물 흐르듯 흘러왔다.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기아산업에서 삼륜차가 생산될 무렵부터라고 하니 가히 오래도 되었다. 쌀가마니를 가볍게 실어나르는 짐바리 자전거에 제품을 실어 납품하기도 하고 때론 오토바이를 이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으로서는 상상이 가지 않는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다만 우리 회사가 그들보다 한가지 자랑할 것은 젊음의 패기였다. 제품에 대한 노하우나 고객사의 흐름 등은 우리 회사가 결코 그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지만, 젊고 패기가 있다는 것. 그것은 곧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재산이요 자원이기도 했다. 그 외 내세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동시에 두 군데서 건축을 하다 보니 아무래도 자금력이 문제가 되었다.
그렇다고 기아특수강에서 협력사에게 무이자나 저금리로 차용해 주면 좋겠지만 본인들 또한 무리한 투자로 인해 자금의 고통에 시달리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렇다 보니 협력사까지 돌아볼 형편이 못되었다.
어느덧 시화 공장도 준공을 끝마치고 가리대 공장의 설비들 중 일부를 옮겼다. 서천공장을 지원해주고 건축제품 일부를 생산하는 것으로 했다.
이것은 사업을 시작한 지 꼭 10년 만의 일이다.
서천공장은 오직 기아특수강 차축부서만 상대했는데 조금 여유가 있었다. 기아특수강을 같은 고객사로 둔 D사와 함께 공장을 물색하던 중 이곳 서천 공업단지로 입주하게 되었다. D사는 우리보다 훨씬 먼저 약 15년 전에 이미 협력업체 등록을 마쳤다.
어느덧 대표이사의 나이가 많아 김포에서 아무 연고도 없는 이곳까지 따라 내려오기란 쉽지 않았다. 차라리 거리가 멀어도 장거리 납품을 강행하려고도 했었다.
기아특수강이 군산으로 이전한 이상 협력사들은 어떤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거래를 중단하든지, 자신 있으면 멀더라도 차질 없이 납품하든지 아니면 자기들을 따라 군산 근처로 내려오든지 특수강은 내심 이곳에서 함께하기를 원했다.
형님은 특수강과 동행하기로 마음먹고 시간을 내어 주변을 살폈다.
그나마 가격 부담이 없고 거리 또한 가까운 곳이 있었으면 좋으련만,,,
서천공단은 2000평씩 분양했는데 사실 2000평은 우리에게 너무 컸다. 누군가와 1000평씩을 나누면 좋겠는데, 마침 생각난 사람이 D사의 대표였다. D대표는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협력사 회의에서 공공연히 자신은 이사 가지 않고 장거리 납품하겠다고 신경질 내듯 말하곤 했다.
형님은 한 고집하기로 유명한 D사의 대표를 만나 설득에 들어갔다.
적당한 곳이 있으니 같이 한번 가보자고 약속을 잡았다.
D사의 대표는 형님보다도 인생이 이십 년 하고도 오년이 더 위였다.
그렇게 형님은 내키지 않는 D대표를 만나 해당 장소로 향했다.
군산 앞바다가 내려다보이고 산을 깎아 절토를 했기 때문에 지반이 약할 일도 없었다.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은 바다 내음을 하나 가득 담고 있어서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마음은 돌덩이가 들어앉은 것 같이 무거운데 시원한 바람을 맞으니 기분이 상쾌해졌다. 왠지 이곳에다 공장을 짓고 일하면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납품 거리는 조금 되지만 그래도 수년 전 금강 하구둑이 개통되어 접근 거리가 생각보다 가까웠다. 이만한 위치에 이만한 가격대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러한 상황을 돌아보고 그렇게 완강하던 D대표는 조금씩 마음을 열고 이것이 자신의 인생에서 마지막 여정이라 생각하고 이곳에다 공장을 건축하기로 드디어 결정했다.
그렇게 D사와 우리는 사이좋게 1000평씩을 나눠 각자 건축에 들어갔다. 형님은 이미 오래전 삼부토건에서 토목과 건축의 경험이 있기에 설계에서 건축까지 거의 본인이 진두지휘하다시피 했다.
철골의 중량과 콘크리트속에 들어갈 철근의 중량. 판넬의 양과 레미콘의 차량 대수까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형님에게 건축에 있어서 속칭 바가지나 날림 공사 같은 것은 있을 수 없었다.
D사는 우리보다 모든 면에서 한발 앞섰다. 특히 시설이나 설비가 우리하고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압권이었다. 기아특수강의 차축부는 말 그대로 차축만을 생산하다 보니 협력사들은 보통 1~3개의 아이템들이 서로 이원화되어있다. 그렇다고 교통정리가 잘 되어있는 것은 또 아니다.
우리 회사와 D사는 공교롭게도 4가지 아이템이나 중복되었다.
물론 특수강의 허락으로 된 것으로 한 업체에서 기계나 금형이 문제가 되었을 때를 대비한 나름 자구책이었다.
하지만 이원화는 당사자들에게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니다. 같은 제품을 우리 외에 다른 곳에서도 만들어 납품한다고 하니 나로서는 도무지 용납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원화된 제품은 무조건 우리가 독점한다는 목표로 삼았다.
자재(鐵)도 아예 한 달 발주량을 띄워 주문했다. 처음 50:50으로 입고되던 것이 점차 우리 회사의 비중이 늘어나더니 얼마 못되어 해당 제품은 우리 회사에서 전량 납품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그렇게 이원화된 제품을 몽땅 집어삼켜도 형님과 나는 아직 허기졌다.
마침 군산에는 대우자동차 군산공장이 있었는데 승용차 서너 개 차종이 바로 이곳 군산공장에서 완성차로 출고되었다.
가까운 곳에 자동차부품을 생산하는 프레스 공장이 있는 줄 알고 우리 회사를 방문했다.
한두 아이템을 시범적으로 해보았으나 우리와는 잘 맞지 않았다. 그것이 기계적인 문제인지 아니면 기아특수강과의 너무도, 상이 한 제품들의 문제인지 또 아니면 발주량 문제인지 잘 생각나지 않는다. 그렇게 대우와는 지속해서 연결되지 못했다.
그렇게 서천에서 공장을 가동한 지 일 년이 지났다. 아무 연고 없는 낮 선 곳에서 비교적 빠르게 자리를 잡았다. 형님은 특수강에서의 아이템은 기존 협력사들도 있고 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대우차의 승용제품도 해보고, 승용차와 상용차는 같은 기계라도 차이를 보였다. 이미 우리 기계들은 상용차에 길들어져, 있어 승용차를 생산하기에 적합하지가 못하다.’
짧게나마 대우자동차 일을 하면서 깨달은 것 같다.
한편 기아자동차는 28개나 되는 계열사들의 전면적인 구조 조정에 들어갔다. 기아 회장은 살을 도려내는 심정으로 기업들에 칼을 들이댔다. 새롭게 하는 뜻으로 법인명을 바꾸거나 하나로 통폐합하기도 했다. 기업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번 구조 조정은 과거 어느 때보다 냉정하고 신중했다. 이로 인해 상당수의, 인사들은 집으로 향하거나 먼 곳으로 발령이 내려졌다.
기아기공은 본래 경남 창원에서 이번 조정으로 광주 하남공단으로 일부 옮겨오게 되었다. 광주를 대표하던 아시아 자동차가 기아로 인수되면서 아시아 자동차에서 완성되는 대형 트럭이나 특수차량, 버스 이번에 특별히 도입된 우등고속버스의 후레임을 이곳 하남 기아기공에서 생산했다. 기아자동차의 트럭의 후레임은 모두 이곳 4000톤 프레스에서 생산되었다.
그러던 중 한번은 큰형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하남공단 기아기공의 공장장이 서천공장으로 방문하기를 원한다는 내용이었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사연은 이러했다. 큰형님의 고등학교 때부터 절친한 친구인 류사장님이 어느 날 광주로 출장을 오게 되었는데(광주 출장은 드문 경우로 몇 년에 한 번 있을까. 거의 없었다.) 출장을 마친 저녁 무렵 ‘건욱이가 창원에서 이곳으로 왔다는데 그래도 친구 얼굴은 보고 가야지.’ 하고 전화를 걸었다. (박건욱 부장은 류사장님의 고등학교 친구로 두 사람은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으나 큰형님하고는 졸업 후 만나지 못했다.)
“친구 광주로 왔다는 소식은 들었네”
“반갑네. 친구 어떻게 알고 전화를 했는가?”
“오늘 광주로 출장 왔네”
“지금 광주란 말인가?”
“그렇다네”
“업무는 다 보고?”
“응, ”
“괜찮다면 회사로 오겠는가?”
“지금 그곳으로 가겠네.”
두 사람은 위에서 잠깐 소개한 대로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졸업하고 가는 길은 다르지만, 꾸준히 서로 소식을 주고받는 사이로 졸업한 지 30년이 넘어도 한결같았다.
박건욱 부장은 대학을 졸업하고 줄곧 기아기공의 엔지니어로 인정을 받은 그야말로 성실함이 몸에 밴 사람이었다.
이번 시퍼런 사정의 칼날에도 그는 굳건히 자기 자리를 지켰다. 함께 입사한 동료들과 후배들의 상당수가 살아남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
회사에서는 오히려 그에게 공장장의 직무를 맡겨 야심 찬 우등고속버스의 개발을 책임지게 했다. 물론 회사도 그리고 본인도 우등고속버스는 처음이고 생소했다. 개발 장소도 창원이 아닌 광주였다.
류사장님은 큰형님의 인생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몇 안 되는 친구로 고교 시절의 우정은 오늘날까지 변함이 없었다.
당시 학교의 방침은 학생들을 대학으로 많이 진학시켜 학교의 위상을 높이고자 전교 100등 안에 드는 사람을 구분하여 특별반을 운영했다. 그 가운데 큰형님도 류사장님도 그리고 박건욱 부장도 포함되었다.
특히 류사장님은 공부를 뛰어나게 잘하여 그 유명한 S대학 법대를 진학했다. 공부만큼은 정말 대단한 분이었다.
류사장님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시골 우리 집에까지 왕래가 있어서 부모님도 친자식처럼 대하고 우리 형제들도 어릴 때부터 잘 따랐다.
“인사이동이 특히 심했나 보네?”
“말도 말게 그의 대다수가 물갈이, 되었다고 봐야지”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가?” 류사장님이 의아한 얼굴로 묻는다.
“기아 계열사가 28개나 되는데 그중 흑자를 내는 곳은 불과 몇 군데다보니 그렇다고 마냥 잘 되겠지 하고 기다릴 순 없고 해서 이번에 과감하게 인사를 단행했네.”
“그렇다는 기사를 봤는데 이곳은 좀 어떤가?”
“많이 좋아졌네. 변화를 주지 못하면 기업은 살아남기 어렵다는 것을 이제 조금씩 깨우치고 있는 것 같아.”
“가족을 떠나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과 새로운 일을 하려니 자네 고생 많네.”
바로 그때 사무실 밖에서 갑자기 잘 알아들을 수 없는 고성이 들려온다. 그들의 강한 목소리는 두 친구의 대화도 멈출 정도였다.
“아니 지난번에도 치수가 형편없이 안 맞아 해머로 두드리며 겨우겨우 썼는데 또 이렇게 해오면 어떡합니까? 지난번과 별 차이가 없잖아요.”
품질 요원의 말투로 보아 한번 두 번의 일이 아닌 것 같았다.
그의 말은 같은 말이 계속 반복되는 것 같으나 들어보면 내용이 모두 달랐다. 그의 하는 말로 보아 납품하는 회사가 문제가 많음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뭐라고 말 좀 해보세요. 왜 아무 말도 못 하십니까? 다음부터는 잘 해오겠다고 다시는 이렇게 생산하지 않겠다고 이 자리에서 분명히 말하지 않았습니까?” 품질 요원은 다그치듯 말했다.
“치수가 얼마나 차이 나길래 그렇습니까?” 상대방 영업사원도 가만히 듣고는 못 있겠는지 따지기 시작했다.
“보세요 몇 mm 차이 나는지”
“아니 이렇게 두꺼운 소재가 이 정도 차이도 없이 어떻게 만듭니까?”
“그럼 우리가 매일 해머로 두들겨 가며 써야겠네요” 품질 요원은 기가 막힌다는 듯 노려 보고 있었다.
그것도 퇴근이 훨씬 지난 시간이었고 아직 본격적인 양산에 들어가기 전으로 수량도 몇 대 되지 않았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류사장이 어색한 얼굴로 묻는다.
“우리 옆 부서인데 품질 문제로 매일 저 타령이다.”
“옆 부서는 어떤 부서인데?”
“프레스부인데 업체가 기술이 부족한지 양산 들어가기 전부터 계속해서 말썽이네. 앞으로 두 달 보름 정도면 양산인데 걱정이다. 저런 식으로는 하루 몇 대못 만드는데.” 박부장은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 앞에서 자기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은 갑자기 그늘이 내렸다. 반가운 친구를 만나 잠시 현실을 잊고 있다가 다시 돌아온 느낌이었다. ‘프레스부서’라는 말에 류사장은 뭔가 생각이 났는지
“프레스부서라고?” 박건욱 부장은 갑자기 흥분한 친구의 얼굴을 더 놀란 얼굴로 쳐다보았다.
“응, 프레스부서 맞아! 그런데 왜?”
“아니 프레스를 잘 하는 사람을 알고 있어서”
“아 그래 거기가 어딘데?”
“그 친구가 마침 기아특수강을 따라 군산으로 내려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
“아 그래 군산이면 여기서도 그리 멀지 않은데” 박부장은 마음이 급했다. 친구가 잘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할 정도면 하루라도 빨리 만나보고 싶었다.
“자네는 이런 제조업하고는 전혀 상관없는데 어떻게 프레스 하는 사람을 다 아는가?”
“자네도 알고 있지 우리 친구 노아무개?”
“아 기억나네. 내 기억으로 그 친구도 제조업을 할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맞네. 그런데 그 친구 동생이 마침 제조업을 하고 있지. 아주 대단한 열정으로 하고 있는데 나는 아직까지 그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네”
“자네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빨리 만나보고 싶네. 어서 골치 아픈 것 좀 해결했으면 좋겠어.”
그렇게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전혀 엉뚱한 화제로 이야기의 끝을 맺었다. 류사장님은 친구가 협력사로 인해 고민이 깊음을 알고 비록 늦은 밤이지만 친구인 큰형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다음 날 바로 방문 약속을 잡았던 것이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회사소개서나 브리핑할 수 있는 자료를 갖추고 있지 않아 주로 방문하여 판단했다.
이틀 후 박건욱 부장은 한걸음에 달려왔다.
공장을 둘러보고 생산하는 제품들이 자신의 회사와는 다르지만 그래도 대표자를 만나보니 왠지 잘 할 것만 같은 믿음과 확신이 들었다. 곧바로 내부회의를 거친 다음 결정했다.
돌이켜보면 참 꿈같은 얘기다.
류사장님과 큰형님은 고등학교 때부터 각별한 친구여서 작은형과 나는 어릴 때부터 형님하며 따르던 분이었다. 어느 날 광주로 예정에도 없던 출장을 가게 되고 불과 얼마 전까지 창원에 있던 친구가 광주로 오게 되고, 그리고 밖에서 만나지 않고 시간을 아끼기 위해 사무실에서 보게 되고 결정적으로 품질 요원과 영업사원 간의 다툼이 없었다면 만약 협력사가 별 무리 없이 납품을 잘 하고 있었다면 대화의 내용도 많이 달랐을 것이다.
류사장님이 그날 친구가 민망할까 봐 아무 물음도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갔다면 또 친구 동생이 제조업을 아주 열정적으로 하는 줄은 알지만, 괜히 사람 잘 못 소개했다가 무슨 원망을 듣게 될지 몰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면 광주 위아(WIA) 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을 뻔했다.
이렇듯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선물같이 찾아온 것이다.
- 2부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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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노작가님!
감동의 물결이 소용돌이 칩니다.
바쁜 일상에서 옥고를 탈고하셨습니다.
일취월장! 깊고 넓고 높은 감동입니다.
다시 정독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덕향문학 통권 14호를 빛내주셨습니다. ^^
사업의 역사를 소상히 기억하고 써주셔서 그 시절, 그분의 열정과 결단을 알것 같습니다.
노작가님 잘 읽었습니다
열정적으로 임하시는 형님 아래서 묵묵하게 열심히 일 하시느라 수고많으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