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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오돈수론
頓悟頓修論
朴性焙*
논평․244/답변․253
*뉴욕 州立大學 敎授
頓悟頓修論
-性徹스님의 參禪指導路線을 中心으로-
朴性焙
차 례
1. 들어가는 말
2. 풀어야 할 문제와 필자의 입장
3. 채․용의 논리
4. 돈오돈수론
5. 원리와 응용
6. 돈오돈수설의 두 가지 측면
1. 들어가는 말
1965년 경북 문경 金龍寺에서 시작하여 1968년 해인사 백련암을 떠날 때까지 약 3년 간, 필자는 성철스님의 지도 아래 참선수련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 때, 스님의 지도노선은 철저한 돈오돈수사상에 입각한 것이었다. 요즈음 학자들 사이에 돈오돈수설에 대해서 논란이 많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학자들은 돈오돈수에 관한 글만을 분석하고 있을 뿐, 돈오돈수사상이 탄생하고 또한 실천되고 있는 현장을 고려에 넣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오히려 돈오돈수의 현장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자기 자신의 현장에다가 돈오돈수설을 억지로 맞추어 넣으려고 애쓰는 듯한 경우를 보게 된다. 글이란, 그 글이 탄생한 현장을 무시해 버릴 때 생명을 잃기 마련이다. 돈오돈수라는 말이 필자에게 조금도 이질감을 주지 않는 것은, 그 말이 탄생한 현장에서 살아 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필자의 경험이 곧 필자의 이해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사용될 수는 없다. 그래서 필자는 오늘 필자의 이해를 세상에 내놓고 여러분의 평을 듣기로 결심한 것이다.
2. 풀어야 할 문제와 필자의 입장
頓悟頓修란 말은 ‘단박에 깨쳐 단박에 닦아 마친다’는 뜻이다. 여기서 ‘깨쳤다’는 말은 자기 자신이 원래 완전무결한 부처님이었음을 추호의 의심도 없이 철저히 확인 완료한 상태를 의미하며, ‘닦아 마친다’는 말은 방금 말한 불교적인 ‘깨침’을 얻는 순간에 자기 자신 속의 부처님 성품이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완전무결하게 발휘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단박에’라는 말은 깨침이건 닦음이건 오랜 시간을 두고 서서히 점차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찰나 간에 이루어지는 것임을 나타내는 말이다. 1981년, 性徹스님의 禪門正路가 출판된 이래, ‘돈오돈수의 문제’는 깨침과 닦음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커다란 관심사가 되었다. 성철스님의 필생의 사업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돈오돈수의 소식’을 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白蓮佛敎文化財團이 후원하여 출판한 많은 禪書들도 모두 禪宗의 ‘돈오돈수사상’을 널리 선양하기 위한 것이었다.
단박에 깨쳐서 단박에 닦아 마칠 수 있다면 불교도들에게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성철스님의 이러한 ‘기쁜 소식’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 까닭은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여러 가지일 수 있다. 필자는 오늘 종교적인 경험을 놓고 철학적인 대화를 나눌 때,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에 빈번히 발생하는 프레젠테이션(발표)과 커뮤니케이션(의사소통)의 문제를 중심으로 성철스님의 돈오돈수사상을 필자의 말로 한번 전개해 보려고 한다. 사람들 사이에 의사소통이 잘 안 되는 이유를 열거하자면 그것 또한 한이 없을 것이다. 대화가 통하려면 말하는 쪽과 듣는 쪽이 모두 각자 해야 할 일을 다해야 한다. 그러므로 말하는 쪽에서 듣는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잘 말했는지, 그리고 듣는 쪽에서 제대로 알아들었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은 매우 중요하다. 학문을 하건 도를 닦건 간에 우리들이 대화를 하는 이상, 우리는 이 일을 피해서도 안 되고 또한 피할 수도 없을 것이다.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서 필자는 몇 가지 전문용어에 대하여 명확한 개념규정을 해두어야겠다.
1) 깨달음과 깨침
필자는 ‘깨달음’이라는 말과 ‘깨침’이라는 말을 구별해서 사용하려고 한다. ‘깨달음’이 머리로 아는 것이라면 ‘깨침’은 몸으로 아는 것이다. ‘깨달음’은 머리로 아는 것이기 때문에 몸이 깨달은 대로 실천해 주지 않을 수도 있다. 말하자면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따로따로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깨침’은 몸으로 아는 것이기 때문에 깨친 대로 몸이 실천한다. ‘깨침’이란 자기가 알고 있는 것에 몸이 책임을 져주는 것이다. 말하자면 知와 行이 일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漢字로는 깨달음을 解悟, 깨침을 證悟라고 구별하여 쓴다. 그러나 이제까지 우리들은 우리말의 깨달음과 깨침을 구별하지 않았다. 딱딱한 구별은 漢字用語에 일임해 버린 결과였을 것이다. 불교에서는 대개 깨달음과 깨침을 다 같이 문제삼는다. 그러나 禪家에서 말하는 궁극적인 체험인 究竟覺은 깨달음이 아니라 깨침이라는 것을 분명히 해두는 것이 좋겠다. 성철스님은 문제삼는 돈오돈수라는 체험도 깨달음이 아니라 깨침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깨침이란 말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깨침’의 동사형인 ‘깨다’는 두 가지의 서로 대조되는 뜻을 함께 가지고 있다. 하나는 ‘굿판을 깬다’든가 또는 ‘유리창을 깬다’고 말할 때처럼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의미의 ‘깨진다’는 뜻이요, 다른 하나는 ‘한글을 깬다’든가 또는 ‘잠을 잔다’고 말할 때처럼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의미의 ‘깨친다’는 뜻이다. 앞의 것을 ‘죽음’이라고 부른다면 뒤의 것은 ‘다시 살아남’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禪的인 체험에서 ‘죽음’같은 깨침과 ‘따시 살아남’같은 깨침이 시간적으로 도시에 일어난다. ‘깨진다’와 ‘깨친다’는 똑같은 경험의 두 가지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제까지의 묵은 것이 부서지는 깨짐의 순간이 곧 다시 새로 태어나는 깨침의 순간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불교인들의 수도상에 나타나는 ‘깨침’이라는 체험은 반드시 그 속에 이제까지의 잘못된 자기가 죽은 ‘깨짐’의 경험을 포함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깨짐이 없는 깨침은 깨침이 아니다. 깨달음과 깨침이 다 같이 불교적인 체험을 가리키지만 깨침이 죽음의 체험을 전제하는 데에 비해서 깨달음은 그런 체험이 없이도 나타난다. 깨침과 깨달음의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다.
2) 돈오돈수와 돈오돈수설
필자는 또한 ‘돈오돈수’라는 말과 ‘돈오돈수설’이라는 말도 엄격히 구별하여 사용하려고 한다. ‘돈오돈수’라는 경지는 분명히 부처님의 경지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이미 깨친 부처님을 위해서 ‘돈오돈수’를 문제삼는 것이 아니다. 아직 깨치지 못한 중생들을 위해서 ‘돈오돈수론’을 전개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에게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의 청중은 부처님이 아니라, 아직 깨치지 못한 중생들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될 줄 안다. 이미 깨친 이에게는 돈오돈수론이란 한낱 사족에 불과하겠지만 아직 깨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보통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돈오돈수론이 꼭 필요하다고 믿는다. 필자는 지금 ‘돈오돈수’와 ‘돈오돈수설’의 관계를 체용의 논리로 풀려고 하기 때문에 이 두 가지 말을 모두 거론하지 않을 수 없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필자의 문제는 역시 ‘돈오돈수’가 아니라 ‘돈오돈수설’이라는 사실도 처음부터 분명히 해두는 게 좋겠다.
성철스님은 이제까지 돈오돈수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하셨다. 그렇지만 스님이 프리젠테이션은 항상 ‘눈 있는 자는 보고, 귀 있는 자는 들어라’는 식이었다. 즉, 스님의 말씀을 듣고 스님이 가리키는 것을 보려면, 적어도 자기에게 눈이 있고 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스님의 말씀은 그것조차도 모르는 사람에게 열려 있지 않다. 단적으로 말해서 스님의 상대는 못 깨친 사람들이 아니라 깨친 사람들이 아니었나 싶다. 頓宗에서 전하는 消息이라는 것이 워낙에 깨치고 못 깨치고의 구별 자체가 본래 없다는 것이고, 상대가 깨친 사람이든 못 깨친 사람이든 깨친 경지의 소식만을 곧바로 들이대는 것이 頓宗의 독특한 방식이기는 하다. 그러나 일단 ‘說’로 내놓은 이상 의사소통을 문제삼지 않을 수 없고, 특히 돈오돈수설을 학문적인 방식으로 풀어보고자 하는 이 논문에서는 전혀 다른 프레젠테이션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오늘 필자의 문제는 어떻게 하면 성철스님의 돈오돈수설을 깨치지 못한 사람도 알아들을 수 있게 하느냐에 있다.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먼저 정확한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우리의 작업에서는 필연적으로 깨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을 수 없다. 좋은 약은 병에 대한 정확한 진단 없이는 나올 수 없기 때문이며, 나아가 병자가 받아 먹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3) 체와 용
필자는 동양철학의 體와 用이라는 말에 이중적인 의미를 부여하려고 한다. 깨친 이의 體․用과 못 깨친 이의 體․用은 그 내용이 서로 달라서 이러한 구별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유교의 성리학에 심취한 사람들은 體와 用의 區別을 철저히 했다. 그러나 불교의 화엄사상에 익숙한 사람들은 體와 用의 不二를 보라고 역설했다. 불교이론은 항상 깨친 이 중심으로 되어 있고 유교사상은 비교적 못 깨친 이에게 큰 비중을 둔다. 이러한 유교적 體用峻別과 불교적 體用不二의 현장적인 배경을 무시한채 어느 쪽이 더 타당한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필자가 여기서 체와 용의 개념을 이중적으로 사용하려 하는 것도 체․용의 논리가 사용되는 여러 가지 경우의 미묘한 차이를 잘 살리고 싶어서이다. 깨친 이의 體는 不二요, 空이요, 緣起요, 中道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용은 체와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그러나 깨치지 못한 이의 체는 그들이 지은 업이 일시 뭉쳐져서 체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에 공이 아니요, 중도도 아니다. 따라서 항상 불이와 대립된 이원론적인 대립과 모순과 갈등의 구조를 드러낸다. 일시적인 무상한 용이 체노릇을 하는 ‘용의 체화’현상은 모든 수도이론에서 항상 경계의 대상이 되어 있다. 그래서 못 깨친 이의 체는 항상 깨져야 할 체이다. 그리고 못 깨친 이들이 해야 할 일은 진정한 체, 즉 깨친 이의 체로 돌아가는 일이다 성철스님의 돈오돈수설에서는 이 점을 몹시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체가 둘로 갈라지듯이 용도 둘로 갈라진다. 다시 말하면 깨친 이의 용과 못 깨친 이의 용은 서로 다르다는 말이다. 깨친 이의 용은 불이의 실천이지만, 못 깨친 이의 용은 차별의 실천이다. ‘돈오돈수’는 부처님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체적으로 표현해도 좋지만, ‘돈오돈수설’은 중생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용적으로 표현해야 한다. 그러므로 ‘돈오돈수’는 체적 마당에서 체적 분위기로 풀어야 하고, ‘돈오돈수설’은 용적 마당에서 용적 분위기로 풀어야 한다.
3. 체․용의 논리
체․용의 논리는 동양철학의 핵심논리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에 와서 체․용의 논리를 본격적으로 다룬 학자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몇몇 외국의 학자들이 체와 용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모두가 단편적인 언급에 불과했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관심은 문헌학적이고 역사학적인 것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체․용의 논리가 맹렬하게 일하고 있는 실지 현장에 대한 분석을 하지 않았다. 가끔 철학적인 관심을 가지고 체․용을 연구하는 학자가 없지 않았지만, 그들은 또한 너무 이론화에 급급한 나머지 결국 한다는 소리가 체․용의 논리는 서양의 汎神論과 같다느니 인도의 因中有果論과 비슷하다느니 빙빙 도는 순환의 논리에 불과하다느니 하는 따위의 부정적인 결론을 내리는 데에 그치고 말았다. 한마디로 체․용의 논리는 아직 주인은 만나지 못한 느낌이 없지 않다.
체․용 논리의 본격적인 연구는 그것이 원래 道를 닦는 사람들의 修道理論이었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체․용의 논리가 국외자들에게 복잡해 보이고 때로는 애매모호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까닭이 있다. 동양에서는 일반적으로 ‘삶은 도 닦는 자세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가정생활하는 것도 도 닦는 일이요, 농사짓고 장사하는 일도 도 닦는 것이요, 불교를 믿건 유교를 믿건 모두가 다 도 닦는 일이었다. 그러니 체․용 논리의 응용과 전개가 매우 광범위하고 다채로울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다채로움이 국외자에겐 복잡하고 애매모호한 것으로 보이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하겠다.
그러나 필자는 체․용의 논리를 수행자들의 믿음과 닦음과 깨침을 다루는 가장 중요한 논리라고 생각한다. ‘돈오돈수론’이란 ‘돈오돈수’라는 체험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려는 일종의 학문적인 작업을 가리키는 말이다. 작업에는 연장이 필요하다. 해석학적인 작업에는 개념과 논리와 관점 같은 것들이 연장노릇을 한다. 필자는 여기서 ‘체․용의 논리’를 그러한 연장으로 사용해 보려고 한다. 학문의 세계에 완벽이란 없다. 학문은 원래 용의 세계의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체․용의 논리도 완벽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필자가 알고 있는 한, 체․용의 논리 이상으로 돈오돈수설의 구조적인 특징을 잘 드러낼 수 있는 효과적인 논리형식은 아직은 따로 없다고 생각한다.
체․용의 논리는 사람이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二元論的인 모순과 갈등을 해소해 주는데 탁월한 공헌을 해왔다. 여기서 말하는 탁월한 공헌이란 수행자들의 장기인 不二의 論理와 일상적인 二元論의 관계를 분명히 한 것이다. 대개의 경우, 이원론과 불이론은 공존할 수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체․용의 논리는 불이론이면서 이원론을 죽이려 하지 않ㅇㅆ따. 오히려 그들에게 있을 자리를 주어 제 몫을 하게 했다. 用의 세계에서 잡다한 개별자들의 상호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二元的인 구조 해명이 크게 도움되며, 이런 개별자들의 所從來와 所皎去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體의 세계에서의 不二論的이 구조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體․用의 논리는 이렇게 양자의 관계를 다루었따. 이것은 종교철학사사상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는 커다란 공헌이었다. 오늘 필자는 체․용의 논리가 가지고 있는 이러한 특징을 갖다가 우리의 작업에 활용하려고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동양의 불교역사 속에서 갈등관계를 극복하지 못했던 頓宗과 漸宗이 각각 그 위치를 드러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체와 용의 관계는 사람의 몸과 몸짓의 관계만큼이나 밀접하다. 닷 말하면 몸은 체요, 몸짓은 용이라는 말이다. 산 사람에 있어서 몸과 몸짓이 서로 떨어질 수 없듯이 동양철학과 체와 용은 항상 그렇게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몸과 몸짓은 현실적으로 두 개의 다른 개념이므로 양자를 똑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이들 둘은 완전히 독립된 별개의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말로는 두 가지이지만, 사실에 있어서 이들 둘은 흔히 말하는 별개의 두 물건은 아니다. 둘이면서도 하나이고 하나이면서도 둘인 관계는 인생의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 起信論에서 말하는 물과 물결의 관계가 그렇고, 六祖壇經에서 말하는 불과 불빛의 관계가 그렇다. 이러한 관계를 고전에서는 둘처럼 보이지만 둘이 아니라는 뜻으로 ‘不二’라고 불렀다. 어떤 사물이 가지고 있는 不二의 성격을 똑바로 볼 수 있으면 그런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이라 불렀다. 종래에는 몸짓이 바뀌는 것을 몸이 바뀌는 것으로 오해했다. 돈오돈수설은 ‘몸 바뀜’을 문제삼는 것이요, ‘몸짓 바뀜’을 문제삼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몸을 바꿀 것인가? 무엇보다도 부처님과 자기 자신의 不二(둘 아님)를 깨닫고 ‘둘 아님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 이것이 깨침이다.
천하에 별 것을 다 바꾸어 놓아봤자 소용없다. 사람이 바뀌어지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다. 사람의 바뀜이 깨침이다. 어떤 깨침도 행동이 없으면 소용없다. 현대 사회에서는 행동의 의미가 확대해석되어야 한다. 행동의 장으로서의 사회가 있고, 그 사회 속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고, 이러한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해 관계와 질서유지를 위한 법으로 구속되어 있다. 그러므로 깨친 이의 행동은 법을 고치고 다른 사람들을 정화하는 사회정화적인 차원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깨침은 사회적인 행동을 수반하는 것이며, 그런 행동은 사회정화운동과 법 개정운동을 불가피하게 한다. 단박에 끼치고 단박에 닦아 마침은 자연적인 의미에서 우주의 구조가 원래 연기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고, 황벽 같은 옛 선배들의 구경각의 순간이 그랬었고, 따라서 황벽처럼 항상 체로 돌아가는 공부만을 공부로 삼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해서도 안 되고 불가능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사회는 황벽의 사회가 아니다. 만일 누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도 ‘용의 체화’라는 오류에 속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냉전체제가 무너지고 무엇이나 지구촌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현대에 살기 때문에 현대인의 용이 나와야 한다.
체․용의 논리를 전개할 때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체와 용의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항상 죽어 있는 물건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체․용의 논리가 전제하고 있는 기본적인 조건이다. 그러므로 체․용의 논리를 구사한다 하면서 이 기본적인 전제를 무시하고 전혀 관련이 없는 별개의 두 물건을 체․용의 논리로 묶으려 하는 것은 잘못이다. 근대 중국의 강유위가 ‘中體西用[중국을 체로 하고, 서양문명을 그 용으로 삼는다]’이라는 말을 만들어냈지만, 이것은 체․용 논리의 기본원리에서 멀리 나간 응용이라고 생각한다. 中과 西가 공동으로 소유하는 기본전제가 없는 것이다. 이를 앞의 예를 가지고 설명하면 사람의 몸과 몸짓이나 바다의 물과 물결이나 등불의 타는 심지와 불빛을 갈라서 말하는 데에는 모두 사람, 바다, 등불 등이 기본적인 조건으로 전제되어 있다. 이런 기본적인 전제조건 위에 몸과 몸짓, 물과 물결, 타는 심지와 불빛이라는 관계가 성립되어 있다. 이러한 전제조건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생명체라는 사실이다. 이 점은 아래처럼 도표로 그려볼 때 더욱 분명해진다.
본 논문 | 기신론 | 육조단경 | |||
사람 | 바다 | 등불 | |||
몸 | 몸짓 | 물 | 물결 | 불 | 불빛 |
체 | 용 | 체 | 용 | 체 | 용 |
여기서 우리는 체․용의 논리가 원래 생명혀상을 제대로 이해하자는 것 이외의 딴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체․용의 논리로 구사하는 한, 우리는 이 점을 일시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돈오돈수설도 돈오점수설도 모두 생명 밖의 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불교의 믿음도 닦음도 깨침도 모두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돈오돈수설을 알기 쉽게 설명하려 하면서 체․용의 논리를 인용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다시 말하면 모두가 다 초점을 생명현상에 모으고 있다는 말이다. 종래에 일본의 학자들은 체․용의 논리를 범신론적인 사고방식의 산물이니 또는 순환의 논리니 하고 여러 말을 했지만 아무도 이것을 ‘修證의 논리’로 보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과 필자는 관점이 서로 다르고 말해야 할 것이다.
성철스님의 돈오돈수사상은 철저하게 체로 돌아가자는 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스님은 서투르게 깨친 이의 용을 흉내내는 것을 자살행위라고 경계하는 것이다. 돈오는 체요 돈수는 용이다. 보조스님의 돈오점수설 속의 돈오는 해오이다. 이것은 성철스님의 지적이기에 앞서 보조스님 자신이 내린 정의였다. 그리고 그 체계 속에서 해오는 체요, 점수는 그 용이었다.
보조스님 | 성철스님 | ||
해오 | 점수 | 돈오 | 돈수 |
체 | 용 | 체 | 용 |
漸修라는 用을 일으키는 ‘解悟라는 體’와 頓修라는 用을 일으키는 ‘頓悟라는 體’는 같은 것이 아니다. 전자는 믿음의 성격으로서의 悟요, 후자는 깨침으로서의 悟다. 보조스님이 화엄학의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보조스님의 해오는 화엄의 믿음과 아주 흡사하다. 사실 화엄사상에서는 믿음이 차지하는 비중이 거의 절대적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성철스님의 오는 화엄과 결별한 임제종의 오다. 임제 선종에서는 모든 것이 오 하나로 결판이 난다. 잡담 제하고 맨 처음부터 오와 대결하는 것이 임제종의 가풍이다.
임제종 같은 돈문은 체적 접근을 즐겨 택했고, 화엄종 같은 점문은 용적접근을 피하지 않았다. 문자를 중요시하고 현실을 중요시하면 용적 접근은 용적접근을 피하지 않았다. 문자를 중요시하고 현실을 중요시하면 용적 접근을 안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와 같은 용적 접근에는 用을 體化하는 위험이 따른다. 그런 함정을 피하지 못하고 천하가 용의 체화라는 병에 휩쓸려 들어갈 때에는, 그런 용을 쓸어 버리는 체적 접근이 등자하는 것 같다. 역사적으로 잘못된 흐름을 바로잡으려 할 때, 항상 용 근본주의를 거부하고 용의 근본이 되는 체를 보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체적 접근이 나왔다. 그러나 이 체적 접근이 도그마화하여 병적으로 굳어지려 할 때, 다시 말해 ‘체 근본주의가 되려고 할 때에는 또 다른 체적 접근’이 요청된다. 그러나 이 때의 체적 접근은 용 근본주의에 맞서서 나온 체적 접근과는 성격이 사뭇 다르다. 이것 역시 不二의 입장에는 용을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나서는 것이다. 여기에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체적 입장에 바탕한 용적 접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돈오돈수론
1) 믿음
돈오돈수는 수행자의 문제이다. 특히 看話禪을 하면서 자기가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지 의심나는 사람들, 또는 화두를 들다가 한 소식을 했는데 이것이 깨침인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돈오돈수는 자못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반대로 수행하지 않는 사람에게 돈오돈수라는 말은 매우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들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돈오돈수설도 수행자에게 중요한 문제가 되는 대목들을 맨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다룬다는 의미에서 믿음, 닦음, 깨침의 순서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돈오돈수설은 처음부터 부처님의 ‘깨침’을 전제하고 있다. ‘일체 중생이 있는 그대로 모두 완전한 부처님’이라는 것이 돈오돈숮주읮자들이 정의한 깨침의 내용이다. 이러한 깨친 이의 증언을 사실로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하나의 사건이다. 이 사건이 터짐으로써 믿는 사람의 세계에 커다란 변화사 생긴다. 우선 밖에서 찾던 부처님을 안에서 찾게 된다. 일체 중생이 부처님이란 말은 곧 나 자신도 부처님이라는 말이므로 부처님을 먼 곳에서 찾지 않고 가까운 자신 속에서 찾게 되는 것이다. 그 다음에 생기는 변화는 이제까지 무시했던 중생들을 부처님으로 받들고 존경하게 되는 것이다. 그 밖에도 변하는 끝없이 일어난다. 마치 돌멩이 하나가 조용한 호수에 던져졌을 때, 한 물결이 일어나자 여러 물결이 따라 일어나듯이, 가령 부처님과 중생이 둘이 아닌 것을 몰ㄹㅆ던 까닭에 중생을 부처님으로 볼 줄 모르고 그저 중생으로만 푸대접했던 과거의 어리석은 짓들을 뉘우치고 참회한다든가, 앞으로는 중생을 영원토록 섬기겠다는 誓願을 세운다든가 하는 등등의 여러 가지 변화가 생긴다. 믿음이라는 사건을 계기로 계속 터져 나오는 이러한 일련의 변화를 ‘닦음’이라 한다. 이러한 닦음은 일진일퇴의 여러 고비를 넘어 마침내 ‘깨침’을 이룬다. 그 다음에는 자기가 얻은 깨침이 과연 부처님의 깨침과 동일한 것인지를 검증해야 한다. 만일 여기서 동일치 못한 것으로 판정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初發心의 겸손한 마음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참선수행을 하는 사람들의 일생은 대강 이처럼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성철스님의 돈오돈수사상도 부처님의 깨침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우리들이 처음부터 전제했듯이, 우리의 문제는 깨치지 못한 사람들에게 있다. 깨치지 못한 사람이 깨친 이의 법문을 듣고 깨달은 바가 있어서 믿음이 생긴다. 이때 ‘믿음의 내용’은, 말로 표현하는 이상, 스승이 증언한 ‘깨침의 내용’과 동일하다. 다시 말하면 깨침의 내용도 믿음의 내용도 모두 ‘일체중생이 있는 그대로 모두 부처님’이라는 말밖에 딴 것일 수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양자는 모두 不二論的인 특성을 두드러지게 나타낸다. ‘중생이 곧 부처님’이라고 말한다든가, 또는 ‘煩惱가 곧 菩提’, ‘裟婆世界가 곧 極樂世界’ 등등의 不二論的인 표현이 모두 그런 것들이다. 만일 여기서 양자간에 조금이라도 차이가 생긴다면 그것은 제자가 스승의 증언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을 우리는 ‘믿음’이라 부를 수 없다.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의 차이는 크다. 안 믿는 자는 자기가 안 믿는 것을 합리화하려 한다. 특히 불교신자로 자처하는 사람은 항상 말로는 믿는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들이 과거에 불교를 믿지 않았을 때나 큰 차이가 없다. 결과적으로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변화가 생기지 않는다. 그들에게 믿음이란 일종의 앎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건이 아니다. 깨침의 소식이 믿음으로 받아들여졌을 때 일어나는 큰 변화가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사람이 천차만별이듯이 사람들이 갖는 믿음도 천차만별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오직 올바른 믿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여러 가지의 올바르지 못한 믿음을 대비시키는 의미에서 믿음도 두 가지라고 말할 뿐이다. 믿음의 종류가 꼭 두 가지라는 말은 아니다. 이 점은 禪家에서 쓰는 正信과 邪信이란 깨치지 못한 자기식으로 믿는 것이다. 깨친 스승은 일체 중생을 있는 그대로 모두 부처님이라고 믿는 데 반하여, 깨치지 못한 사람은 으레 스승의 증언 앞에서 일단 멈추고 서성거린다. 중생은 중생으로 보이지 부처님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수행자는 갈등한다. 스승의 증어을 무시할 수도 없고 자기의 현실을 외면할 수도 없고……. 스승을 따르는 사람, 자기를 따르는 사람, 스승 절반 자기 절반으로 절충하는 사람 등등 가지가지이다. 제 아무리 여러 가지일지라도 선가에서는 둘로 가른다. 스승을 따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다. 따르면 正信이요, 안 따르면 邪信이다. 다시 말하면 일체 중생을 있는 그대로 부처님으로 모시면 바른 믿음이요, 그렇지 않으면 그릇된 믿음이다. 선가의 믿음은 현실성이지 가능성에 입각한 미래에의 희망사항이 아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佛性을 가지고 있으니 닦아서 깨치면 부처님이 될 수 있다든가, 깨치지 못한 내 눈에는 부처님으로 보이지 않지만 나도 깨치면 스승처럼 일체 중생을 있는 그대로 부처님으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따위가 모두 올바른 믿음은 아니라는 말이다.
2) 닦음
우리는 앞에서 믿음이라는 사건이 몰고 오는 큰 변화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러면 이러한 큰 변화의 내용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아까는 믿음의 내용과 깨침의 내용이 같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것은 어느 한 면만을 강조해서 말했을 뿐이다. 따시 말하면 그것은 양자의 내용을 언어로 표현할 때 달라서는 안 된다는 점만을 강조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믿음 때문에 생긴 변화의 내용을 보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우선 깨침의 소유자인 스승과 믿음의 소유자인 제자의 실력차를 간과할 수 없을 것이나, 스승의 증언을 받아들여 믿음의 사람이 된 제자 자신이 누구보다 더 먼저 이 사실을 잘 안다. 그리고 주변에 눈 있는 자는 누구나 다 이 사실을 안다. 오직 글이 가리키는 현장을 안 보고 말에만 집착하는 사람들만이 펄쩍 뛰면서 덤벼들 것이다. 아까는 중생이 있는 그대로 모두 다 완전한 부처님이라 말해 놓고서 이제는 왜 딴 소리를 하느냐고. 그러나 잘 들여다 보면 딴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님을 곧 알 수 있다. 자기 자신과 스승 사이에 실력차가 발견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일체 중생이 부처님이라는 가르침이 거짓이라는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 아까 양자가 같다니까 양자 간에 모든 차이가 다 없어지는 식의 ‘멍청한 같음’으로 오해하고, 모든 차이를 다 인정하면서도 같다고 말하는 ‘눈밝은 같음’을 상상 못한 것이다.
아직 못 깨친 제자와 깨친 스승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실력의 차가 크다는 사실은 교리적으로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을 야기시킨다. 깨친 스승의 경우는 믿음과 닦음과 깨침이 모두 하나의 덩어리로 되어 있다. 信行一致니 修證一如니 하는 말들이 모두 그러한 소식을 전달해 주는 말들이다. 그러나 못 깨친 제자의 경우는 이런 말들이 모두 이중의 뜻을 가지게 된다. 믿음으로 말하면 춤이 저절로 나오는 이야기이지만, 닦음으로 말하면 그림의 떡처럼 맛도 없고 힘도 없는 텅 빈 말이 되어 버린다. 따라서 못 깨친 제자의 경우를 두고 말할 때는 믿음의 발언과 닦음의 발언이 전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어떻게 달라지는가? 믿음을 이야기할 때는 깨침을 이야기할 때나 마찬가지로 철저한 不二思想에 입각한다. 그러나 일단 믿음이 생기면 공기는 완전히 ㅂ뀌어 버린다. 不二는 어디론지 사라져 버리고 엄연한 현실로 돌아와 제자는 땅바닥에 엎드려 하늘같은 스승에게 겸손하게 절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믿음의 不二 앞에서 사라져버린 줄 알았던 二元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불교 수행을 지도하는 글들은 대개 믿음의 마당과 닦음의 마당 사이에 나타나는 이런 분위기의 차이를 의식하고 있다.
믿음에 두 가지가 있기 때문에 닦음에도 두 가지가 있게 된다. 올바로 믿으면 올바로 닦고 잘못 믿으면 잘못 닦는다. 正信은 正修를 가져오고 邪信은 邪修를 가져온다. ‘일체 중생이 있는 그대로 모두 완전한 부처님’이라는 명제를 놓고, 이것은 깨친 이의 경지이기 때문에 아직 못 깨친 나의 경지는 아니라고 한다면 이는 자기의 못 깨친 상태를 실체화하는 것이 된다. 모든 실체화는 잘못된 것이며, 邪信의 부산물이다. ‘일체중생이 있는 그대로 모두 완전한 부처님’이라는 正信의 명제 자체가 중생과 부처를 따로따로 실체화하는 것을 부인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못 깨친 사람의 입장에서 말할 때, 성철스님의 돈오돈수에 관한 말씀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은 믿음이라는 그릇밖에 없다. 그러나 그 그릇은 믿음을 담자마자 깨지고 만다. 믿음을 담지 않았더라면 안 깨졌을 텐데 담았기 때문에 깨진 것이다. 마땅히 깨져야 할 것이 깨진 것이다. 깨진 순간, 닦음이라는 그릇이 주어진다. 닦음이라는 그릇은 사실, 믿음이라는 그릇이 깨졌다가 다시 살아난 것이다. 다시 살아난 것이기 때문에 이것 또한 이중적인 성격을 지닌다. 옛날 믿음의 그릇이 가지고 있지 아니한 새로운 면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옛날 믿음의 그릇이 가지고 있었던 본래적인 면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 이것은 닦음이 가지고 있는 이중성이기도 하다. 새로운 면은 二元的인 面이요 오래된 면은 不二論的인 面이다. 따라서 믿음의 차원을 딛고 넘어서 온 이원은 믿음 이전의 이원과는 다르다. 믿음 이전의 二元은 不二를 용납 못하다가 믿음이라는 不二 앞에 견디지 못하고 사라진 二元이지만, 믿음 이후에 등장한 닦음이라는 二元은 믿음이라는 不二 때문에 탄생한 二元이므로 현실적으로는 不二의 실천이라는 성격을 지닌 二元이다. 다시 말하면 不二가 體가 되어 그 用으로 나타난 二元이라는 말이다.
저간의 사정이야 어떻든 간에 닦음의 분위기는 이원론적이라는 점에서 불이론적인 믿음의 분위기와 현저학 다르다는 점을 우리는 특별히 기억해 두어야 하겠다. 그동안 불교계의 일각에서는 이 점을 간과한 나머지 무수한 오해와 착각과 혼란이 뒤엉켜 시끄러웠다. 가령 이제 겨우 믿음의 차원으로 발돋음하려는 단계에 있는 사람이 이미 닦음의 차원에 들어가 열심히 수행하고 있는 사람을 믿음 이전의 二元論的인 구조를 극복 못한 것으로 착각하여 자기보다 더 낮은 차원으로 알고 괜히 무시하고 비난하는 따위의 현상들이 바로 그런 폐단들이었다. 사실은 자기도 진정 믿음의 차원에 돌입하면 똑같이 그렇게 되었을 터인데, 그렇게 안 된 것은 아직 자기는 믿음의 차원에도 들어가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信章(믿음의 마당)은 不二論이요, 修章(닦음의 마당)은 二元論이다. 信章은 상식의 二元을 거부하고 不二로 일관하지만, 일관하는 바로 그때 修章이 시작되며 修章은 다시 二元으로 돌아가 信章의 不二를 거부한다. 여기서 우리는 상식의 二元과 修章의 二元 사이에 있는 차이에 대해서 민감해야 하겠다. 다시 말하면 信章의 不二로 들어 갔다가 여기에서 나온 이원은 信章 이전의 二元과는 다르다. 그리고 그 다음에 修章의 二元이 다시 證悟의 경지에서 不二로 된다. 그러나 悟章의 不二는 信章의 不二와 또 다르다. 여기는 실력이 있는 不二이다. 融通自在하다. 無所不通이다.
수행자를 不信의 상태에서 正信의 상태로 끌어올리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따라 다르기 때문에 일괄적으로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몇 가지의 공통점을 이야기할 수는 있다. 첫째는 스승에 대한 존경심이다. 이것은 진리에 대한 존경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진리에 대한 존경은 구도자의 내적인 욕구와 상응한다. 즉, 진리에의 목마름이 안에 있지 않고서는 진리를 말해주는 經이나 스승에 대한 존경이 나올 수 없다. 내적으로는 목마르기 때문에, 그리고 외적으로는 스승을 존경하기 때문에 믿게 된다. 그러나 일단 入信하여 그 믿음이 난파당하는 것은 구도자의 정직성 때문이다. 아까 스승과 자기 자신 사이의 실력차라는 말을 했는데,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자기 자신의 수준미달을 간파하는 정직성이다. 정직은 일종의 슬기이다. 슬기롭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바라볼 수 없고, 그러면 스승과 자기 자신의 거리를 바로 알 수 없다. 스승의 증언인 ‘네가 바로 부처님’이라는 말을 받아들이자마자 ‘나는 부처님이 아니다’라는 자각을 불러 일으킨다. 스승의 증언에 대한 100% 존경과 현실적인 자기 자신에 대한 100% 정직이 공존하는 현상이 적어도 말로 나타낼 수 있는 닦음의 상태이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이런 상태는 話頭를 드는 참선상태와 흡사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화두가 잘 들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수행자에게 스승에 대한 100% 존경심과 자기 자신에 대한 100% 정직성이 공존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스승에 대한 종경심만 있고 자기 자신에 대한 정직성이 없으면 맹목적인 근본주의자로 전락하기 쉽고, 그 반대의 경우에는 현대의 지성인들 사이에 흔히 있는 회의론자가 되기 쉽다. 사실 자기 자신에 대한 철저한 정직이란 스승의 증언이 하나의 진리로 자기 자신 속에서 자리를 잡고 일을 하기 시작할 때만이 가능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고 스승에 대한 철저한 존경심도 똑같이 자기 자신의 비참한 모습에 몸서리칠 때만이 비로소 가능하다고 본다. 말하자면 양자는 양극에 마주 서서 서로 영향을 주며 성장하는 변증법적인 관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 깨침
깨침이 깨침인 이상, 깨침에 두 가지가 있을 수는 없다. 믿음과 닦음에 두 가지가 있다는 말은 딴 뜻이 아니었다. 오직 올바른 것과 그릇된 것을 구별하기 위한 작업이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깨침에 대해서 똑같은 작업을 해야 한다. 하나의 올바른 깨침을 드러내기 위해서 여러 가지 올바르지 못한 깨침을 고발하는 것이다. 올바른 깨침이란 깨친 스승과 똑같이 일체 중생을 있는 그대로 모두 완전한 부처님으로 모실 수 있게 된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그 깨침이 아무리 훌륭해 보여도 올바른 깨침은 아니라는 말이다.
결국 체가 깨져야 한다. 용이 깨진 것을 깨침이라 말할 수는 없다. 체가 깨진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부처님에게는 깨질 체가 없다. 부처님은 체가 없는 것으로 체를 삼는다. 당신의 체가 따로 없기 때문에 일체 중생을 있는 그대로 자기의 체로 삼을 수 있다. 깨치지 못한 중생의 경우는 다르다. 자기의 체가 있다. 業이 체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도 알고 보면 용의 체화현상에서 나온 것이다. 일체의 용은 無我이고 無常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이에 집착하고, 이런 것들이 응집 누적되어 체가 된 것이다. 이래서 중생이란 말이 생겨난 것이다. 이런 중생성의 근본이 무너지는 것을 체의 깨짐이라 부른다.
중생성의 근본으로서의 體가 정말 깨졌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돈오돈수설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정말 체가 깨지지 않으면 그것은 깨달음일 뿐이요, 깨침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깨침의 길은 오직 화두 하나만을 잡두리해 용맹스럽게 정진하는 것밖엔 없다고 잘라 말하는 것이 성철스님의 가풍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닦음의 장에서 이미 언급했었다. 깨침이 진짜 깨침인지를 확인하는 방법이 있다. 성철스님은 이것을 三關突破라고 부른다. 화두에 대한 의심 덩어리가 純一하고 如法하게 지속되어 이목구비 등 여섯 가지 기관이 천하의 별 것을 다 보고 듣는다 할지라도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으면 첫째 관문은 돌파한 셈이다. 그런데 잠이 들어 꿈을 꿀 때도 이런 話頭疑團이 여전하면 둘째 관문을 돌파한 것이 되고, 꿈이 없는 숙면상태에서도 疑團이 獨露하면 셋째 관문까지 다 돌파한 것이니, 공부가 그 경지에 이르면 수도자는 깨침의 경지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한다. 성철스님은 삼관을 돌파하지 않는 사람은 천하의 별 신통한 체험을 다 했다 할지라도 아직 체가 깨지지 않은 것이니, 딴 생각 말고 일사불란하게 화두 정진에 몰두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옛부터 임제종의 큰스님들은 이 점이 분명했다고 한다. 즉, 체가 깨지지 않는 것을 깨침이라 부르지 않았으며, 삼관을 돌파하지 않는 깨침을 깨침이라 부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5. 원리와 응용
유교의 경전에 中庸이라는 책이 있다. 그 첫 머리에 나오는 ‘道也者不可須臾離也[길이란 끊기지 않는 것이다]’라는 말처럼 修證理論으로서 체․용의 논리를 잘 이야기해 주는 말도 드물 것이다. 특히 그 다음에 나오는 ‘可離非道[끊기면 길이 아니다]’라는 말은 우리에게 체가 무엇임을 똑똑이 가르쳐 준다. 과연 우리 주변에 어떤 것이 이런 것일까 하고 한번 살펴보면, 우선 해와 달을 비롯한 천체의 운행이 그렇고, 사람의 경우는 숨결이나 맥박이나 혈액 같은 것들이 그렇다. 종교사에서는 부처님이나 공자님 같은 성인들의 일생이 그래도 끊기지 않는 길을 걸은 예일 것이다. 不可離[끊김 없음]의 개념을 불교에서는 허공으로 표현했다. 허공 속에 있는 모든 물건은 可離[끊김]의 것이지만 허공자체는 그런 끊어짐과 동아리남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깨침의 세계에서는 허공만이 허공이 아니고, 일체가 허공 아님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色卽是空이라고 한다. 부처님은 一切者니 一切處에 충만해 있느니 하는 표현들이 모두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용 없는 체는 체가 아니고, 체 없는 용은 용이 아니다’고 말하는 것은 불이론적인 입장에서 양자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깨침의 경지를 두고 하는 말이다. 설사 못 깨쳤다 할지라도 믿음으로 이를 받아들인다. 사실 體用不二가 되지 않고서는 不可離는 실현될 수 없다. 우주에 충만하지 않고서는 불가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못 깨친 사람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아직 불이의 경지에도 불가리의 경지에도 이르지 못하고 항상 이원론적인 끊김의 세계에서 윤회하는 사람의 수준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불가리를 실천할 수 있을 것인가? 항상 용의 세계에서 보고 듣는 것에 끄달리는 사람이 어떻게 체로 돌아갈 것인가? 언젠가는 돌아갈 수 있으리라 믿고 지금 별 뾰족한 수 없이 대립과 모순의 갈등 속에서 끊기고 동아리난 可離의 존재로 살아야 한다면, 그것은 돈오돈수설이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돈오돈수가 언제 어디서 이루어지는가에 있다. 만약 깨침에서만 이루어진다면 믿음과 닦음에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믿음과 닦음의 단계에서 돈오돈수설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자기가 지금 화엄 53위 가운데 어디에 있던 돈오돈수의 문은 활짝 열려 있어야 한다. 자기가 돈오돈수의 문을 닫았을 뿐, 돈오돈수가 스스로 문을 닫지는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돈오돈수를 미래에 미루고 비돈오돈수적인 짓을 하고 앉아 있을 수는 없다. 華嚴十信의 初位에 있건 十地等覺의 지위에 있건 하는 짓은 모두 돈오돈수저기어야 한다. 문제는 ‘어떻게?’에 있다. 깨친 스승이야 그게 원래 자기의 경지이니까 자연스럽게 되겠지만 못 깨친 제자의 수준에는 그것이 그림의 떡일 뿐이다. 이에 대해 해답은 이중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첫째는 무조건 부처님처럼 사는 것이다. 부처님이 下化衆生의 길을 걸으신다면 나도 그럴 수밖에 없고, 부처님이 中道行을 하신다면 나도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그렇다는 말이다. 만일 이러지 않고 하화중생은 부처님의 길이고 나는 중생이니까 上求菩提의 길을 가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돈오돈수의 길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불이가 아니고 이원론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돈오돈수의 길은 부처님의 하화중생의 길을 상구보리의 길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하화중생의 길 밖에 따로 상구보리의 길이 있다면 그것은 돈오돈수의 길이 아니라는 말이다.
불교에서 체로 돌아간다는 말은 못 깨친 중생이지만 부처님의 중도행을 그대로 실천한다는 말이다. 하화니 상구니 하는 말들이 모두 이원론적인 논리에 맞추어 만들어진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앞으로 중도행이라는 말로 바꾸어 쓰는 것이 좋겠다. 중도행은 만인의 길이다. 천차만별을 드러낸 채, 그대로 부처의 길을 가는 것이 중도행이다. 잘난 사람은 잘난 대로, 못난 사람은 못난 대로 일체처에서 일체만물이 중도행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스승과 제자의 실력차도 엄연히 드러난다. 그래서 갈등이 있고 정진이 있다.
전체주의자나 근본주의자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획일화의 경향은 돈오돈수의 길이 아니다. 돈오돈수는 엄연히 돈오돈수이지만, 모네의 그림을 통해 자연이 자기를 더 잘 드러내듯, 편작의 시술을 통해 비로소 의술의 진리가 병고치는 일을 하듯이, 그렇게 개개인이 각자 자기 자신이 처한 현실 속에서 몸부림치는 노력을 통해서 나타난다. 그렇지 않고는 사람의 문화란 생기지 않는다. 문화란 자연계에 사람이 개입하는 것이다. 문화는 사람이 자연계에 동참하는 것이다. 이렇게 돈오돈수의 문화도 꽃피어야만 할 것이다. 지금 우리 민족이 통이이라는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면 돈오돈수주의자는 그 문제에 대해서도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돈오돈수의 길을 가는 사람은 도처에 있을 터이니까.
6. 돈오돈수설의 두 가지 측면
돈오돈수설을 얼핏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몇 가지의 공통점이 있다. 첫째 돈오돈수는 말이 안 된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따진다. 불교의 깨침이 어찌 그렇게 단박에 이루어지는 것인가? 누가 그런 것을 경험했단 말인가? 돈오돈수를 주장하는 당신들은 그것을 직접 경험했는가? 우리가 보기엔 그것을 주장하는 당신들 자신도 그렇지 않는 것 같은데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주장하는가? 더구나 닦음이 단박에 마쳐지다니 말도 안 된다. 이 세상 어디에 그런 일이 있는가? 사람의 정성 안 맞는 소리다. 인간의 상식에 어긋나는 소리다. 현실을 등지고 하는 소리다. 돈오돈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그 밖에도 끝없이 계속될 수 있다.
종래의 돈오돈수설은 이론적인 체계화작업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못 깨친이의 눈으로 볼 때, 모순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대목들이 너무 많았다. 信章과 修章 사이에 발견되는 모순현상이 그 대표적인 예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사이비 돈오돈수주의자들이 ‘돈오돈수니까 이젠 안 닦아도 좋다’고 떠들고 다니는 면을 자꾸 들고 나오는 것은 상대방을 전체적으로 보지 못하고 어느 일부분만을 자기식으로 비약해서 보는 오류에 속한다. 돈오돈수라는 말은 연기적인 생명의 실상을 바로 드러내 보이는 말이었다. 까라서 그것은 생명의 특성으로서의 여러 가지 측면을 다 가지고 있다. 가령 믿음의 증표로서의 불이와 수행의 특징으로서의 이원성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이래서 닦음의 장은 믿음의 장을 배반하는 모순처럼 보이는 것이다. 돈오돈수주의자들의 이러한 면을 무조건 논리적인 모순으로 몰아 부치는 것은 잘못이다. 모순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생명현상의 하나로 모순처럼 보이는 것과, 또 하나는 언어현상으로서의 모순이다. 소위 논리적 모순이란 후자에 속한다. 그러므로 생명 속에 공존하고 있는 모순을 논리적 모순과 혼동하는 것은 잘못이다.
성철스님의 돈오돈수설 가운데서 가장 일아듣기 힘든 말은 ‘다박에 닦아 마쳤다’는 뜻의 ‘돈수’라는 말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닦아 마쳤으니 이제는 예불도 참선도 아무 것도 모두 다 할 필요 없다는 말로 이해한다. 이것도 분명한 오해이다. 깨친 사람이 일시 풍광을 한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지만 부처님이 해야 할 일을 그만두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실지로 돈수라는 체험은 부처님이 되었다는 말이므로 깨친 그 순간부터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더 부처님다워져야 할 것이다.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이 모두 부처님다워졌다면 이 세상에 이보다 더 철저한 수행이 어디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돈수를 수행의 중단으로 속단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 다음에 주변의 어떤 불교신자들이 막행막식하면서 돈오돈수설을 가지고 자기의 비윤리적인 행위를 합리화하려 하는 것을 보고 이것이 바로 돈오돈수설의 결과라고 단정해 버리는 경우를 본다. 이것 또한 오해에 불과하다. 사실상 돈오돈수설과 막행막식 사이에는 아무런 논리적인 상관관계가 없다. 어째서 타락한 사람이 제멋대로 돈오돈수설을 악이용한 책임을 돈오돈수설을 져야 한단 말인가? 이것이야말로 말이 안 된다. 문제는 사람들이 돈수라는 말을 깨친 이의 경지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을 깨치지 못한 사람들의 경험세계로 억지로 끌어내려 제멋대로 해석하는 데에 있다. 사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가령 닦아 마쳤다는 뜻의 돈수라는 말을 깨치지 못한 사람의 일상적인 경험세계에서 무슨 일을 하다가 그 일을 다 끝마치면, 그 다음에는 그 일을 다시는 더 하지 않는 것과 비슷한 것으로 연상하는 경우 같은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여기서 닦아 마쳤다는 말의 참뜻은 수행자가 돈오를 하면 그 때부터는 시작이니 끝마쳤느니 하는 차원을 벗어나 영원한 정진의 세계로 들어섰다는 말일 것이다. 그러므로 나태한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수행의 중단이나 타락한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막행막식을 돈오돈수설 때문에 생긴 현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잘못이다. 아무튼 돈수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해석할 때 백발백중 왜곡되기 마련이다. 생명을 생명으로 보지 않고 이를 이론으로 분석하고 해석하려 할 때 무리가 생기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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