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내의 강구항 기행
김동수
상한 발목에 고통이 비듬처럼 쌓인다
키토산으로 저무는 십이월
강구항을 까부수며
너를 불러 한 잔 하고 싶었다
댓가지처럼 치렁한 열 개의 발가락
모조리 잘라 놓고
딱, 딱, 집집마다 망치 속에 떠오른 불빛
게장국에 코를 박으면
강구항에 눈이 설친다
게 발을 때릴수록 밤은 깊고
막소금 같은 눈발이
포장마차의 국솥에서도 간을 친다.
송수권 님의 시 ‘겨울 강구항’ 중에서
5월 6일 연휴가 시작되는 토요일 오후, 서산에서 꼬박 네 시간을 달려와 강구항에서 내렸다. 아, 냄새부터가 다르다. 시인은 ‘겨울 강구항’이란 시에서 강구항에 가면 댓가지처럼 치렁치렁한 게 발을 만날 수 있다고 했는데 정말 그렇다. 식당마다 붉은색 키토산을 뒤집어쓴, 먹음직스러운 대게를 형상화하여 붙여놓고 관광객들을 강하게 유혹한다. 시각과 후각을 동원해 양수겸장을 치기 때문에 웬만한 인내력이 아니라면 그 유혹에서 벗어나긴 힘들 것 같다.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안동을 거쳐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림처럼 펼쳐진 내륙의 절경을 보는 즐거움도 한몫했는데, 바다는 내륙의 미모를 질투나 하는 듯 더욱더 고고한 자태와 서정으로 관광객을 맞았다. 아, 내 나라의 아름다움이 이토록 장엄했단 말인가. 낮게 회색빛으로 내려앉은 강구항의 하늘과 바다를 번갈아 보며 나와 친구는 감탄사를 연발하였다.
갯내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며 해변을 거닐자 오랜 운전으로 인한 멀미 기운이 서서히 가신다. 하나, 둘, 셋 지금 내가 헤아리고 있는 것은 해안가에 정박한 배들이다. 바다의 횡포로부터 방파제를 지켜주는 테트라 포스와 아무렇게나 버려진 폐선, 그리고 늘어진 대게잡이 그물이 해변의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강구항의 석양은 우리보다 한발 먼저 달려온 듯 덕장에 매달린 물고기와 이름을 알 수 없는 해산물들을 핏빛으로 물들이며 저물고 있다.
널리 알려진 곳이라 사람이 많을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해변을 거니는 사람은 그리 많지도 그렇다고 적지도 않게 딱 하니 알맞다. 소박한 어선 장진호 옆을 지날 무렵 저 멀리 해변을 거니는 연인들의 모습이 어슴푸레한 실루엣으로 보였다. 친구는 참 아름다운 모습이라며 부러워한다. 그나저나 날이 벌써 저무나 보다. 세상의 살아있는 고독이란 고독은 혼자 씹으며 우리는 백사장을 거닌다. 깊게 팬 발자국마다 콩알만 한 게들이 파고든다. 파도가 휩쓸고 지나가는 모래톱마다 동글동글하게 마모된 갯 보석들이 드러난다. 저녁 어스름은 점점 짙어지고 저 멀리 방파제의 등대가 점화되어 별빛으로 빛날 무렵, 우리는 숙소를 찾아야 했다.
인터넷을 통해 사전 조사를 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비치모텔에 숙소를 정했다. 5월의 강구항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숙박료 - 평일과 일요일은 4만 원, 토요일은 7만 원 - 마침 토요일이라 7만 원이란다. 좀 비싸긴 했지만, 바다와 일몰 그리고 새벽녘의 일출을 볼 수 있다는 주인아주머니의 너스레에 하루를 묵기로 하고 흔쾌히 숙박료로 거금 칠만 원을 냈다.
객실 안은 청결하여 고독한 사람들이 머물기엔 안성맞춤이다. 마치 호텔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서둘러 샤워를 한 뒤 간편복으로 갈아입고 저물어 가는 강구항을 내려다본다. 파도가 몰려올 때마다 흰 모래톱이 사라지고 다시 생성된다. 코발트색 바다는 어느새 짙은 먹빛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한다. 문득 외롭다는 생각이 든다. 외로움은 고독이고 고독은 사람을 우울하게 만든다. 고독이 심해지기 전에 어서어서 저녁을 먹어야 한다. 영덕은 아무래도 대게가 팔도의 특산품이니 대게를 맛보아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 마음씨 좋게 생긴 모텔 아주머니에게 물으니 억센 경상도 사투리로 ○○대게식당을 추천해주셨다. 가격은 주로 크기와 무게로 계산된다.
저물어 가는 강구항 포구에는 대게 횟집과 좌판, 대게센터들이 즐비하다. 사이사이로 손님을 부르는 호객꾼들이 관광객들과 뒤섞여 또 다른 포구의 풍광을 연출한다. 그런데 생각보다 대게가 작다. 일본과 어업 협정이 체결되어 원양 어업이 어렵고, 일부 싹쓸이하는 어부들 통에 영덕의 명물 대게는 해마다 그 수량과 크기가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가게의 수족관마다 북한산, 중국산, 러시아산이란 푯말이 붙어 있었다. 끝을 모르는 인간의 욕심이 이곳 영덕의 명물 대게마저도 사라지게 할 것 같아 씁쓸한 생각이 든다.
걱정도 잠시 푹 삶은 대게의 고소한 냄새가 식욕을 돋우며 딴생각할 겨를을 빼앗는다. 붉게 변한 껍질 위로 노르스름한 내장이 흩어져있다. 주인아주머니가 말하기를, 살아 있는 대게를 쪄서 그렇단다. 서비스로 나온 소라와 삶은 땅콩도 먹음직스럽긴 마찬가지. 절개용으로 제공된 날 선 가위로 길쭉한 게 발을 자르다 보니 모양이 꼭 대나무 같다. 아니나 다를까 게 발의 모양이 대나무의 마디처럼 곧고 길쭉하다고 해서 대게라고 한단다. 그동안 대게를 큰 대 ‘자’로 알고 있던 나로선 새로운 지식 하나를 추가하는 순간이다. 이래서 여행은 견문을 넓히고 심오한 안목을 키우나 보다.
맛있는 저녁을 마치고 우린 맥주 한 캔씩을 사 들고 숙소로 돌아왔다. 낮에 휴게소에서 먹다 남긴 마른오징어를 안주 삼아 각자 자작을 한다.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침대에 누워 깊어 가는 강구항을 바라보며 캔을 기울인다. 하늘에는 성긴 별이, 바다에는 어선의 불빛이 개똥벌레의 불빛처럼 어른거린다. 추억에 취하고 낭만에 취하고 맥주에 취하고 고민에 취하고 게다가 옆에는 마음이 통하는 친한 친구까지…. 열린 창틈으론 동해의 시원한 바닷바람이 스친다. 갑자기 아련한 그리움과 간지러운 행복감이 밀려온다. 아, 삶은 이런 것이다. 대오각성의 깨달음도 잠시, 강구항의 새벽 또한 볼만하다는 주인아주머니의 충고대로 오늘은 술에 취해 별빛에 취해 바다에 취해 일찍 잠자리에 든다.
강구항의 새벽은 유난히도 일찍 찾아왔다. 먼바다로 나갔던 어선, 연안으로 나갔던 어선들이 각자의 피곤과 함께 싱싱한 대게들을 싣고 돌아왔다. 일부는 얼음에 절인 채로 일부는 살아있는 채로 대게들은 즉석에서 경매로 처분되고 있었다. 경매가를 부르는 소리와 하나라도 더 싱싱한 대게를 구매하려는 사람들의 아우성으로 강구항의 새벽은 활력이 넘친다.
반쯤 넋이 나간 채로 한참을 구경하다 주변을 둘러보니 여명(黎明)은 어느새 사라지고 동해가 붉어지기 시작한다. 아침 해가 솟고 있다. 먼 길을 밤새 달린 동해의 태양은 독도를 지나고 울릉도를 핏빛으로 물들이며 강구항까지 쉼 없이 달려왔을 것이다. 솟아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나 또한 잠시 일상의 힘든 일을 잊고 바다가 되고, 파도가 되고, 물새가 되어 하늘을 난다. 강구항에서 우리 두 사람의 고독은 그렇게 시나브로 묻혀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