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 속의 섬, 천년의 섬, 비양도
답사일: 2024년 4월 24일 수요일
섬에서 섬으로
육지 사람 입장에서 보면 오늘은 제주도라는 섬에 와서 다시 섬으로 들어가는 날이다. 섬 속의 섬을 들어갈 때면 인근 섬들의 이야기도 함께 따라온다. 청보리가 한들거리는 4월에는 가파도, 여름에는 백사장을 자랑하는 우도, 자장면과 마라분교로 익숙한 마라도, 2박을 해야한다는 가기 어려운 추자도. 그 섬에 갔다온 사람은 갔다온 사람대로, 그 섬에 가고 싶은 사람은 섬에 대한 로망으로 말을 주고 받다보면 어느덧 비양도에 도착한다.
비양도에게 묻는다
비양도 탐방은 중고등학교 교과목으로 따진다면 지구과학에 가깝다. 지구과학 시간으로 되돌아가서 추사 김정희 선생이 대정향교에 써 준 현판(疑問堂)처럼 비양도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하나. 비양도는 왜 천년의 섬일까? 둘. 비양도는 물에서 폭발했나 육지에서 폭발했나? 두 개의 질문은 서로 얽혀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비양도는 천년의 섬도 아니고 물에서 폭발한 수성 화산체도 아니다. 비양도는 오해를 받고 있는 섬이다. 이름부터 오해하기 딱 쉽다. ‘비양도(飛揚島)’라는 이름 자체가 그렇다. 협재에서 임신한 아낙네가 빨래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섬 하나가 날아오길래 깜짝 놀라 빨래 막대를 들고 딱 멈춰라 했더니 한림 앞바다에 딱 멈추어서 비양도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비양도’라는 이름에 걸맞는 전설이다.
비양도에 씌워진 프레임
비양도가 천년의 섬이라는 프레임이 씌어지는 과정은 중종 25년에 <동국여지승람>을 수정 보완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적힌 글에서 출발한다.
고려 목종 1002년 6월에 산이 바다 가운데에서 솟았는데 산은 모두 용암이 되었다. 1007년 서산이 바다 가운데에 솟아 오르니 태학 박사 전공지를 보내어 살피게 하였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산이 처음 솟아올 때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고 땅이 천둥처럼 진동하였는데 일주일이 지나서야 비로소 개였다. 산 높이는 100여 장이고 둘레는 40여리나 되었다 풀과 나무가 없었고 연기가 그 위를 덮었는데 마치 석류황같이 보였다. 사람들이 두려워 감히 가까이 가려하지 않자 공지가 몸소 산 아래까지 가 그 형상을 그려서 바쳤다고 한다.
이 섬이 무슨 섬일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1002년에 바다 가운데 솟았다는 섬을 ‘비양도’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 1925년 도쿄대 지질학부 교수 나까무라 신타가 문헌 조사를 하고 제주도 노인에게 탐문조사를 하고 ‘제주화산도잡기’에 1002년에 생긴 이 섬을 ‘비양도’라 하면서 천년의 섬이 된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2002년에 비양도 1000년 기념비를 세움으로서 비양도는 천년의 섬, 비양도가 된 것이다. 아니, ‘천년의 섬’이라는 프레임이 씌워진 것이다.
<비양도 천년 기념비>
비양도, 프레임을 벗다 그래도 천년의 섬이다
비양도가 천년의 섬이 아니라는 것은 본격적인 지질 조사로 송이로 이루어진 육성 화산이었다는 점, 신석기 유물이 나온 것으로 보아 한림항과 비양도 사이에 바다가 생기기 전, 육지로 연결되었다는 점에서 증명된다. 1만 5천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는데, 비양도가 정확히 언제 생긴 섬인지를 모르지만 분명 천년의 섬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양도는 천년의 섬으로 한동안 남아있게 될 것이다. 프레임이 그렇다. 사람들 사이에 ‘천년의 섬’이라고 인식이 된 순간 이는 지속된다. 신문사설에서 오류를 바로잡고 문화해설사가 열심히 설명한다고 해도 사람들 사이에서는 비양도를 천년의 섬으로 기억한다. 그 가운데에서 우리는 천년의 섬이 아니라고 설명하면서 다시 비양도를 천년의 섬으로 거론한다. 웃픈 일이다.
비양도의 하늘, 나무, 들꽃
비양도에 내려 비양봉을 올라가는 길은 관광객에게는 그저 봄소풍이다. 유난히 하늘이 예쁘고, 이름 모를 나무와 들꽃이 반겨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름 모를 나무와 들꽃을 설명해주는 이와 함께 간다면 마을 입구에는 팽나무가 서 있고, 뽕나무에 열매가 열리지 않았음을 애석하게 여기고, 하얗게 떨어진 것은 보리밥나무이며 시큼한 열매를 따먹는 재미가 있음을 안다. 협죽도가 멋있다는 ○대통령 말 한마디에 가로수로 심었다가 독이 있다는 사실에 다시 베어버리는 헤프닝도 듣는다. 나무와 들꽃은 저마다의 이름을 가지고 있고, 사연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름 외우기에 어려움을 겪고 과학(지구과학이든 생물이든)을 좋아하지 않는 누군가(?)는 흘려듣는다. 나무 이름, 들꽃 이름을 알게 되면 더 잘 보이는데 말이다. 양 옆으로 길게 줄서있는 대나무 사이를 한 줄로 서서 올라가다보면 이 섬이 ‘죽도’라는 것도 알게 된다.
비양봉에서 제주를 보다
비양봉 꼭대기에 올라서서 제주를 바라보며 이것은 협재 해수욕장이고 저것은 금릉 해수욕장이라는 설명을 듣는다. 그리고 몽고가 들어왔던 곳도 삼별초가 들어왔던 곳도 삼별초를 토벌하기 위해 군사가 들어왔던 곳이 이 곳이라는 설명도 듣게 된다. 물놀이를 즐기던 이 곳이 과거의 어느 시기에는 살벌한 전쟁터였음을. 오름반에서나 들을 수 있는 오름 상식도 추가한다. 둥그런 오름을 암뫼, 뾰족하게 솟은 오름을 숫뫼라 한다. 비양도는 암뫼에 해당한다.
비양도 해안길에서 지구과학을 만나다
비양도를 내려와서 해안을 따라 돌다보면, 화산이 폭발하여 만들어진 섬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2mm이하를 화산재, 2~64mm를 송이, 64mm 이상을 화산력이라고 한다는 지구과학 상식을 듣고 확인한다.
화산생성물이 호니토, 초대형 화산탄이 남아 있어 비양도를 ‘살아있는 화산 박물관’이라고 한다. 호니토는 용암류 내부의 가스가 분출하여 만들어진 작은 화산체로 내부가 빈 굴뚝 모양을 하고 있으며 이곳에서만 관찰된다고 한다.
애기 업은 사람의 모습과 같다고 해서 ‘애기 업은 돌’로 불리는 호니토가 있다. 애기가 크다는 둥 저것이 무슨 애기인가라고 하는 사람에게는 딱히 할 말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한바탕 웃는다. 그래, 인심 쓰듯이 애기 업은 돌로 봐 주자. 아 저기 보이는 애기 업은 돌이 호니토이구나!
저 멀리 눈쌓인 듯한 코끼리 바위에는 새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이 새는 ‘가마우지’라고 하는데 기름샘이 없어 물에 젖으면 바위에 앉아서 저렇게 몸을 말리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희뿌연 것은 가마우지의 똥이라고 하는데, 똥의 위력을 새삼 느낀다.
한 바퀴 빙 돌아 항구 쪽으로 올 때 습지를 만나게 된다. 펄렁못 습지라고 하는데, 이 습지는 새들이 먹이 활동을 할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외로운 비양분교
오늘 길에 꽃향기가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돈나무에 꽃이 피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작은 건물과 작은 운동장이 보였다. 이렇게 작은 섬에서도 학교가 있을까? 비양분교가 있었다고 한다. 코로나 전까지만 해도 관광객을 위해 빌려주었다고 하는데, 배가 다 떠난 뒤에 호젓한 비양도의 정취를 느끼기에 충분한 장소였으리라. 새삼 아쉽다.
비양도에서 자라는 비양나무?
비양도에서만 자란다는 비양나무가 있다고 하는데, 정작 자연에서 자라는 비양나무는 보지 못했고, 자그마한 화분에 기르고 있는 비양나무를 소개 받았다. 나무라 하기에는 부족함과 아쉬움이 많은 모시잎같은 나무이다. 하지만 비양도에서만 자란다고 하니 한 컷 남겨둔다.
비양도를 떠나며
비양도를 떠나면서 천 년의 프레임이 씌워지고 바다에서 갑자기 생겼다는 오해를 받고 있는 작은 섬을 바라본다.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천 년의 섬이라기보다는 드라마 ‘봄날’의 촬영 장소로 기억될 지도 모르겠다. 기억이 가물가물해지기 전에 비양도에 해시 태그를 달아본다.
#천 년 프레임 #육성 화산체 #비양봉 #암오름 #죽도 #호니토 #애기 업은 돌 #가마우지 성지 #펄렁못 #비양분교 #비양나무
시간이 더 오래 지나면 해시태그 또한 잊혀지고 이미지와 이야기만 남을 것이다. 비양도에서 정말 아름다운 4월의 청명한 하늘을 보았고, 갯무와 유채꽃의 어울림을 보았고, 그리고 그 섬에 함께 갔던 이들을 기억한다. 함께 같던 이들의 이야기는 2부로 남기고자 한다.
첫댓글 비양도 2부 - 사람 이야기는 며칠 후에 올리겠습니다. ^^
감동입니다~♧
비양도를 다시 한번 더 걷는듯합니다~♧
교수님의 설명도 귓가에 들립니다~♧
감사합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나, 글 좀 잘 써요!"라고 해맑게 자신만만하던 지영샘답게 잘 쓰셨네요 ㅎ. 수고 많으셨어요. 비양도 2부 사람 이야기에서는 아마도 교수님과 총무의 '수박대전'이 등장할 것 같은데 기다리고 있겠숨다!
재미있는 글 잘 읽었어요.
수고하셨습니다.
바다를 가르며
배를 타고 어디론가 간다는 것은
그 자체로 설레임입니다.
하늘은 맑고 구름은 두둥실~
경쾌한 웃음 소리~
즐겁고 신나는문화탐방입니다.
글맛나는 후기, 수고하셨어요^^
리는 천년의 섬이 아니라고 설명하면서 다시 비양도를 천년의 섬으로 거론한다. 웃픈 일이다.----------오오오! 이 문장 정말 멋있는데요~~ 그러게요 천년의 섬인줄 몰랐는데 아니란 설명에서 알게된 아이러니 ^^
같이 다녀온듯 생생하네요~ 비양도 아이랑 가봐야겠어요~
지영샘 덕분에 그날이 생생하게 느껴지네요
감사합니다
2부에는 어떤 얘기가~~궁금하고 기대 됩니다^^
아름다운 물색을 가진 협재바다 그 멋진 섬에 대한 멋진 글 잘 보았습니다^^
어렵게만 느껴지는 지구과학이야기를 산문으로 쉽게 쓴글로 편안하게 잘읽었습니다. 교수님 표현과 같이 글맛이 너무 좋습니다. 2부가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