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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명학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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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 스크랩 한양조씨 주실 옥천종택및초당 이야기
혜명 추천 0 조회 22 13.06.23 19:4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명 칭 :  주곡동 옥천종택 및 초당(玉川宗宅)
소 재 지 :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189번지
건 축 주 :  조덕린(趙德?, 1658~1737)
건축시기 :  17세기 말
소 유 자 :  조우철
문 화 재 :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42호


건축 이야기
옥천종택은 17세기 말에 건립된 양반가옥이다. 이 집은 한양조씨 집성촌인 주실마을에 입향했던 조전(趙佺)의 증손자이자, 장사랑 조군(趙?)의 둘째아들 조덕린의 종가이다. 이 집에서는 조희당(趙喜堂, 1680~1737), 조운도(趙運道), 조진도(趙進道), 조술도(趙述道), 그리고 조거신(趙居信)과 같은 쟁쟁한 인물들이 태어났다.
살림채인 정침 왼쪽으로는 볏짚으로 이엉을 엮어서 지은 별당 건물인 초당이 있다. 이 건물은 조덕린의 장자인 조희당이 부모를 여읜 슬픔을 안고 부모를 추모하기 위해 지은 것으로,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서 검소하게 지었다고 한다. 이것은 주로 정자와 서당으로 사용했는데, 이후 뛰어난 인물들이 배출되는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건축 특징
옥천종택은 기와를 얹은 토석담으로 둘러싸인 집이다. 그 안으로 살림채인 정침과 서당을 겸한 별당으로 지어진 초당, 그리고 가묘인 사당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러한 형태는 17세기 말 경북지방 양반가옥의 일반적 특징을 보여주는 것으로, 일상적 삶과 교육,제사를 위한 필요공간들이 모두 배치되어 있다. 이 집은 호은종택 왼쪽으로 난 골목길 끝에 연결된 낮은 언덕 위에 남동향으로 자리 잡고 있어서 주실마을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정도로 전망이 훌륭하다.


건축 구성
이 건물은 살림채인 정침과 별당인 초당, 그리고 가묘를 제외하고도, 대문에 대문채를 별도로 두고 있다. 대문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ㅡ자형 건물로, 가운데 칸에 두 짝 대문을 달고, 좌우에 온돌방을 두어 행랑사람들이 거처할 수 있도록 하였다. 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초당과 ㅁ자형의 정침이 좌우에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정침의 오른쪽 뒤로 네모난 형태로 흙과 돌로 만들어진 담장을 둘러 별도의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 3칸 규모의 사당을 두고 있다.
생활공간인 정침은 정면 5칸, 측면 6칸 규모의 ㅁ자형의 건물이다. 평면은 중문칸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마구간을 개조한 온돌방 1칸과 고방 1칸을 두었으며, 좌측에는 2칸의 사랑방을 배치하였다. 안채는 3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건너방과 안방을 두었는데, 건너방의 전면에는 통래칸과 웃고방, 샛마루방을 연접시켜 좌익사를 이루게 하였으며 안방의 전면에는 부엌을 연접시켜 우익사를 이루게 하였다.
초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초가집인데, 막돌로 쌓은 제법 높은 기단 위에 위치한다. 평면은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 1칸씩을 둔 단순한 형태로 마루를 통해 좌우 온돌방으로 출입하게 하였다. 온돌방 앞에는 평난간을 설치하였다.
사당은 정침 동쪽에 두었는데, 안채와 사랑채와의 동선을 고려하여 안채 우측의 경사지에 배치하였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5칸의 맞배지붕으로 정면에 퇴칸을 두었다. 퇴칸은 제관들이 도열하거나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으로 사용된다. 내부는 우물마루를 깔아 마감하였고, 가구는 3량가의 초익공집이며 처마는 겹처마이다. 사당의 정면에는 출입을 위한 일각문이 있으며, 주위에는 방형의 토석담장을 둘러 공간적으로 구분하였다. 일각문 아래로 여러 단의 돌계단을 담장에 붙여 쌓았다.


현판
초당(草堂)
생원(生員) 김의수(金義壽)가 89세에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초당기(草堂記)
외예손(外裔孫) 생원(生員) 이종태(李鍾泰)가 지은 기문이다.
옥천고택(玉川古宅)
현판 좌측에 '주곡심방기념(主谷尋訪記念) 신미(辛未) 7월 초복(初伏) 모산(慕山)' 이라고 되어 있고, 낙관이 있다.

 

문중 이야기
- 일월의 문향, 주실마을
주실마을에 한양조씨가 정착한 것은 1629년에 호은공으로 불리는 조전(趙佺, 1576~1632)과 그의 아들 조정형(趙廷珩)에 의해서였다. 이 무렵에 세워진 종가가 호은종택(壺隱宗宅)이다. 따라서 한양조씨의 집성촌인 주실마을의 입향시조는 조전이 된다.
조전은 자가 여수(汝壽)이고, 호는 호은(壺隱)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기개가 있었고, 일찍이 무예에 힘썼다. 형 조건(趙健)이 후사가 없이 일찍 죽었기 때문에 홀로 가문을 이끌어가야 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아버지 광의(光義) 및 종형제들과 더불어 군량미를 조달하는 등 의병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이 일로 관직을 제수 받았다.
조정형은 자가 명경(鳴卿)이다. 외삼촌인 최철(崔喆)에게 배웠으며, 뒤에는 이명준(李命俊), 김시양(金時讓)에게서 배웠다. 1630년(인조8)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 많은 선비를 불러 모아 북인정권의 이이첨을 베어 죽일 것을 청하기도 하였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출사를 단념하고 병을 칭탁하며 술을 즐겨 마셨다. 정형이 죽자, 이시명은 글을 지어 곡하기를 “굴원은 맑은 정신에 물에 빠져 죽었고, 정형은 술을 마시다 요절하였으나 이 두 사람이 분을 품고 죽은 것은 하나이니 도에 무슨 손상됨이 있으리오”라고 하였다.
조정형의 아들 조군(趙?)은 자라서 이시명(李時明, 1590~1674)에게 배웠다. 아버지 정형이 병으로 가사를 돌보지 못하여 가난이 극심하였으므로 가사를 일으키는 데 힘써 학문에 전념할 수 없었다. 유운룡(柳雲龍)의 5세손인 유세장(柳世長)의 딸과 혼인하여 네 아들과 두 딸을 두었다. 이 가운데 맏아들 조덕순(趙德純, 1652~1693)은 장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좌랑 등을 지냈다. 둘째 조덕린(趙德?, 1658~1737)은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을 역임하였다. 주실마을의 한양조씨는 17세기 중반 이후 정형의 손자 대에 이르러 명실상부한 사족의 반열에 들게 되었다.
조덕순은 자가 현보(顯甫)이고, 호는 호봉(壺峰)이다. 1679년(숙종5) 진사시에 합격하고 그 뒤 서울로 올라가 아우 조덕린과 함께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1690년(숙종16) 문과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여 예조좌랑,정랑을 거쳐 병조정랑에 올랐다. 생전의 명성에 비하여 그의 저술을 담은 문헌은 전하지 않는다. 조덕순에 이어 조덕린이 문과에 급제하여 주실 한양조씨의 문풍은 17세기 말부터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크게 진작되었다. 조덕순과 조덕린의 아버지 조군은 학사(學舍)를 설립하여 두 아들을 엄격하게 교육시켰다.
또한 조덕순,조덕린 형제는 젊어서는 외가인 안동 하회에서 공부하였는데, 당시 하회에는 이들 형제의 외조부인 유세장과 외종조부인 유세명(柳世鳴, 1636~1690)이 문학과 행실로 명망을 얻고 있었다. 조덕린은 원근의 선비들이 경전을 강론하는 것을 듣는 등 견문을 넓히는데 힘썼다. 조덕린이 직접 가르친 손자 조운도(趙運度), 조진도(趙進道), 조술도(趙述道)형제는 조부의 유업을 계승하여 영남 유림들 간에 명망이 높았다. 이 중 조술도는 조부의 학문을 계승한 뒤에 안동의 이상정(李象靖)의 문하에서 이현일(李玄逸)-이재(李栽)-이상정으로 계승 발전된 퇴계학을 배운 선비였다.


관련유물
- 『홍재전서(弘齋全書)』
홍재전서는 조선 제22대왕인 정조(正祖)의 어제(御製)를 편찬한 문집으로 정조일대(正祖一代)의 어제와 저술을 총망라한 것이었다. 재위 22년 1799년(정조23)에 문신에게 편찬할 것을 명령하여 1814년(순조14)에 편간을 마쳤다. 총 184권이고 책 수로는 100권이니 편찬에만 15년이 걸린 것이다. 이 책은 사고(史庫)에 수장(收藏)하기 위하여 간행한 것인데, 그 당시 편찬한 여러 신하에게 1질 씩 하사한 것이 일월면 주곡마을의 조선 영조 때 문신 옥천(玉川) 조덕린(趙德?, 1658~1737) 종가에서 얻게 되어 지금까지 전한다. 전국에서 몇 질 되지 않는 귀중한 서적이다.

 

관련인물
- 조덕린(趙德?, 1658~1737)
자는 택인(宅仁), 호는 옥천(玉川)이며, 별호는 창주(滄洲)이다.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군(?)의 둘째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났다. 어릴적 부터 재질이 총명하고 출중하여 소년시절에 이미 풍부한 학식을 쌓아 글을 잘 짓고 사리가 통달하여 세인들이 감탄하였다.
1677년(숙종3) 사마시에 합격한 뒤 1691년(숙종17)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설서·교리·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725년(영조1) 노론·소론의 당론이 거세지자 당쟁의 폐해를 논하는 10여조의 소를 올렸다가, 노론을 비난하는 내용이 있어 당쟁을 격화시킬 염려가 있다 하여 종성에 유배되었다. 70여세의 나이로 3년간의 적거(謫居)끝에 1727년(영조3)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집권하게 되자 유배에서 풀려 홍문관응교에 제수되었으나, 서울에 들어와 숙사(肅謝)한 다음 곧 고향으로 돌아갔다.
1728년(영조4) 3월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영남호소사(嶺南號召使)에 피임, 격문을 돌리고 일로(一路)의 의용병을 규합하여 대구에 내려갔으나 난이 평정되자 파병(罷兵)하였으며, 이 공로로 동부승지에 임용되고 경연(經筵)에 참석하였다. 얼마 뒤 병으로 사직하고 세상에의 뜻을 버린 채 다시 환향하여 학문에 몰두하자, 원근에서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1736년(영조12) 서원의 남설을 반대하는 소를 올리자, 1725년(영조1)의 소와 연관되어 노론의 탄핵을 받고 제주로 유배가던 중 강진에서 죽었다. 그의 상소는 몇 차례에 걸친 소론들의 재집권을 위한 난언(亂言)·벽서사건(壁書事件)의 실마리를 만들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옥천집(玉川集)』 18권이 있다.
- 조희당(趙喜堂, 1680~1755)
자는 백구(伯?), 호는 초당(草堂)이며,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조덕린(趙德?)의 아들이다. 성격이 온아하고 몸을 가지는 태도가 단정하며 앉아서 글을 배우는 것이 어른의 태도와 같았고 학문에 조숙하여 사리가 밝았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님이 병환으로 계실 때, 배를 구하고자 배나무 밑을 돌아다니면서 얻고자 했으나 구하지 못하고, 우연히 연잎 속에 배가 있는 것을 어머님께 공궤하였다. 그 후에도 밤중에 약을 구하기 위하여 외출할 때, 중도에 호랑이를 만났으나 조금도 겁내지 않고 어루만지니, 호랑이 역시 순순히 산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는 초당을 세우고 만년에 두 동생과 여섯 아들과 같이 학문을 연구하고 조상의 유고를 정리하며 심신을 수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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