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전도서 3 : 9 - 15
지난 시간에는 범사에 때가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 우리가 귀한 교훈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주어진 때를 바로 잘 이용합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기회가 다 주어지게 되어 있는데 이 기회를 어떻게 이용하느냐 하는데 따라서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 하는 것이 달려 있습니다.
인류 역사를 통해서 위대하게 산 사람들은 무슨 특별한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때를 바로 이용한 사람들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기회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민족적으로도 기회가 있습니다. 가령 교회적으로도 기회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지금은 하나님께서 우리 한국 교회에 복음 전파를 위한 최대한의 기회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문이 열릴 때가 있고 닫힐 때가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마다 감격스러움을 금치 못합니다. 우리 한국 민족 역사 아래 일찍이 없었던 전도의 기회를 활짝 열어 주셨습니다. 아마 세계 어느 나라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말할 수 없이 좋은 기회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보세요! 지금 우리 나라에서 복음을 전하기 어려운 곳이 별로 없습니다. 어디서나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문이 열려 있습니다. 가령 군대를 보세요. 매년 20만이 넘는 우리 청년들이 군대에 들어가고 또 군대에서 나옵니다. 그들의 마음은 거의 옥토와 같습니다. 여기 군목이 들어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부대의 특별한 사정만 없으면 언제나 전도 집회를 할 수가 있습니다. 민간인 목사가 가서 집회를 인도할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어느 나라에서 민간 목회자가 군대에 들어가서 전도 강연을 할 수가 있습니까?
지금 우리 교회에서 논산 훈련소에 목사님을 파송해서 전도하고 있습니다. “사병의 집”을 건축하고 거기서는 훈련소에 입소하기 전의 젊은이들이 한 주간씩 머물러 있는데 머리를 박박 깎고 자기가 입던 평상복을 벗어 집에다 우송하고 군복으로 갈아 입습니다. 생의 큰 변화를 가져오는 시기입니다. 이렇게 되면 청년들의 마음을 갈아 놓은 것과 같아집니다. 그립던 집도, 보고 싶은 부모 형제도 다 떠나서 의지할 데가 없어집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마음이 허전해집니다. 그래서 예배당에 나오라는 특별한 부탁을 안해도 자진해서 나오고 열심히 예배에 참석합니다. 예배시간이 아니더라도 많은 젊은이들이 나와서 눈물을 흘리며 찬송을 부르는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사회에 있을 때는 교회를 멀리했던 사람들도 열심히 교회에 출석합니다.
훈련소에 입소해서도 훈련생 1만 여명 가운데 40내지 50퍼센트의 훈련생이 교회에 출석합니다. 예배당은 천여명 수용할 수 있는데 여러번 나눠서 예배드려야 하는 형편입니다.
우리가 시간이 바빠서 자주 가지는 못합니다만 훈련소에 방문하겠다고 연락만 하면 훈련소 소장님을 비롯해서 참모들 훈련생 1만 여명이 연병장에 모여서 강연을 듣는데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마음껏 말하라고 합니다. 이런 기회가 어디에 있습니까? 전도 설교를 다한 다음에 예수님을 믿을 마음이 있는 사람은 손을 들라하면 약 90퍼센트의 훈련병이 번쩍 손을 듭니다. 감격스러운 장면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연한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특별히 우리에게 마련해 주신 기회가 아닙니까? 군대뿐만 아닙니다. 학원에도, 공장에도, 경찰에도, 교도소에도, 어디에도 복음 전파의 기회가 열려져 있습니다.
금융계에도 우리 믿는 사람들이 모여서 선교회를 조직하고 성경을 공부하고 정기 예배를 드리는 곳이 많이 있습니다. 실업인들도 모여서 훈련하고 선교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전에는 연예인들 하면 그저 그렇게 세상의 인기와 육신의 향락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인 줄만 알았는데 요사이는 믿음있는 연예인들이 생기고 교회를 설립하고 있고 선교하는 일에 힘쓰고 있습니다. 체육인들도 모여서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여러분 이런 일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일입니다. 아마 연예인 교회나 체육인 교회는 한국에만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 얼마나 놀라운 기회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기회 아닙니까? 이 기회를 우리는 최선을 다해 이용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기회를 잘못 이용하면 하나님께서 어떤 모양으로 이 기회의 문을 닫아 버릴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다른 바쁜 일도 많이 있겠지만 복음 전파하는 이 기회를 잘 이용해서 이제 앞으로 6년 후 1984년이 되면 한국에 복음이 들어온지 100년이 되는 뜻 깊은 해인데 그때까지는 적어도 예수 믿는 사람 1천만은 되게 해야겠습니다. 지금의 갑절만 되면 1천만이 됩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께서 꼭 축복해 주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세계 선교를 위해서도 우리의 책임을 다해야 겠습니다.
여러분 아시는 대로 지금 우리의 힘이 아직 좀 부족해서 그렇지 세계 자유 진영 국가에서는 솔직히 말해서 미국 선교사는 받지 않겠다는 나라가 점점 늘어나고 있지만 한국에서 선교사가 오겠다고 하면 어느 나라든지 환영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저 중공 대륙을 보세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우리는 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얼마 전에 중국에 선교사로 가셨던 어느 미국 목사님을 만나 이야기하는 중에 이런 말씀을 들었어요.
전에는 중국 본토에서는 이 도시와 저 도시의 말이 전혀 달라서 통역을 내세워야 할 정도여서 언어의 문제로 굉장히 어려움을 많이 겪었는데 하나님께서 모택동이란 사람을 시켜서 공산주의로 통일을 시키고 전국을 한 말로 통일어를 만들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제 그 후계자들은 미국과 퍽 우호적인 관계를 가지게 되었고 금년부터는 1년에 미국 사람 2만명이 중공에 다녀갈 수 있게 문을 열어 놓았기 때문에 자기도 미국의 사업가 몇 분과 같이 금년 가을에 중공엘 다녀오게 되었다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중국 본토의 언어를 이렇게 통일시켜 놓고 이제 서서 낼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인데 우리 한국에서 중국말을 미리 배워 놨다가 중국에 선교사로 보낼 준비를 해야겠다는 말씀을 듣고 퍽 의미있는 해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앞으로 머지 않은 앞날에 중공에 많은 한국 선교사가 들어가게 될 것으로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를 바로 이용해야 축복을 받습니다.
오늘 본문을 계속해서 보십시다. 9-10절 “일하는 자가 그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사람은 본래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일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할 때 그들 가운데는 주님의 날이 임박했다고 하면서 일은 하지 아니하고 돌아다니며 말썽만 피우는 사람이 더러 있어서 “조용히 자기 일을 하라”거 하면서 정말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지으심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는데 그들이 타락하기 전에도 에덴 동산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괴로움이 아니였습니다. 마지못해서 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짜증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일하는 만큼 성과가 났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일은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러나 저희가 범죄하여 타락하므로 하나님께 벌을 받아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살 수 있게 되었고 종래는 흙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세상에 사는 사람치고 땀 흘리지 않고 먹고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육체 노동하는 사람만 땀을 흘려야 살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세상에서 쉬운 일이란 하나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을 보면 다 쉬어 보이고 고생이 없어 보이지만 실상 그 사람은 그 나름대로 노고가 있습니다.
괴로운 인생 길 가는 몸이
평안히 쉬 일곳 아주 없네
걱정과 고생이 어디는 없으리
이것이 세상입니다. “인생이 70이요 혹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라”는 모세의 말씀은 체험을 통한 그의 고백이라고 생각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유는 하나 우리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죄의 값으로 이런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 씻음을 받고 용서함을 받으면 우리 마음에 기쁨과 평화가 임하여 새로운 삶이 전개되는 것입니다. 같은 일을 해도 보람을 느끼며 합니다.
그래서 시편 128편에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하였습니다.
얼른 생각하면 좀 이상하게 들릴는지 모릅니다. 수고한 대로 먹는 것이 무슨 복이 될 수 있을까?고 생각하게도 됩니다. 그러나 사실은 수고한 만큼 먹을 수 있는 것이 복입니다. 인간이 저주를 받은 후에는 수고는 하고 땀은 흘리지만 그대로 다 얻지를 못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도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면 수고한 만큼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도 이 땅 위에 40억이 넘는 사람들이 땀을 흘리고 수고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11절을 보십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인간이 인간으로 귀한 것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 성령을 불어 넣으셨기 때문에 사람이 생물이요, 동물이지마는 짐승과 구별되게 하셨습니다. 짐승은 그저 본능대로 살고 본능을 충족시키면 아무런 불만도 고민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사람은 짐승과 같은 본능만 충족시켜서는 만족이 없습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배부르게 먹을 것 준다고 만족한 것은 아닙니다. 잠시는 만족이 있을 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에는 다른 무엇을 찾게 됩니다.
인간에게는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영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살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옛날 진시황은 불로초를 찾았고, 한무제는 이슬을 받아먹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오래 살고 싶은데 이 세상이 전부인 줄로만 알기 때문에 세상에서 오래 살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불로초까지 구해 먹으며 오래 살기 원하던 시황제가 얼마나 살았는지 아십니까? 그는 주전 259년에 나서 주전 210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니까 49세에 죽었습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성경이 말씀한대로 ‘이 세상에는 영원한 도성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심령)사람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이 육신의 사람은 잠깐입니다. 풀과 같습니다. 안개와 같습니다. 지나갑니다. 없어집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 있는 보이지 아니하는 사람, 이 심령은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사람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것이 짐승과 다른 점입니다. 비록 이 육식이 잠깐 있다가 없어질 것이지마는 우리의 가슴에는 타오르는 영원한 불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사람이 70년 80년 살다가 가는 것 뿐이지만 그 심령 속에는 영원히 살리라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우리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얻을 때까지는 다른데서 안식을 얻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죄의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져 참 생명을 얻기까지는 참된 만족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왜요? 본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심을 받은 것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인간을 구원하고 그 형상을 회복하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서 인간의 죄를 사유케 하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아 영생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복음이요,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이 세상에 와서 다른 일 다 한다고 하지만 하나님을 찾지 못하면, 영원한 생명을 찾지 못하면 이 사람은 허무한데 빠지고 말 것입니다.
“만일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생명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영원한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장 17절).
사람이 사람으로 귀한 것은 영원히 생명을 갖는데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영원한 생명을 다가지셨습니까?
끝으로 12절 이하를 보십시다.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은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
아 땅위에 살면서도 영생을 얻은 사람이 가장 보람된 일이 무엇일까요? 전도자는 말합니다. “선을 행하는 것 보다 나은 것이 없도다” 그렇습니다. 정말 행복한 일, 기쁜 일은 선을 행하는 일입니다.
이번에 우리 한국에 오신 벌거비츠(Dr. Vercovitz) 박사께서 말씀하는 중심이 그가 90년 가까이 세상에 살면서 체험한 대로는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일을 하는 것처럼 행복한 것은 없다” 하였습니다. 더구나 주안에서 수고한 모든 것은 하나도 헛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술집 가서 한 상에 몇 10만원 짜리 먹고 몇 만원씩 화대를 주는 것은 다 헛것입니다. 그러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냉수 한 그릇 봉사한 것은 헛되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이 얼마나 보람된 일입니까?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모두가 놀라운 것 뿐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할 뿐입니다. 오늘 저녁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자신이 확인해 보십시다. 얻었으면 얼마나 이 세상에서 살든지 선을 행하십시다. 해지기 전 낮에 일합시다. 인생의 겨울이 다가오기 전에 힘써 일합시다. 그리하면 이 장막 벗는 순간 영원한 그 집에 가서 세상에서 행한대로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간신히 구원을 받았으나 아무 상급도 못받고 부끄러워하실 분 한 분도 안계시기 바랍니다. 선한 일하십시다! 무슨 일이 가장 선한 일입니까? 가장 선한 일은 다른 사람의 심령을 주님께로 인도하여 구원받게 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과 듣는 자를 구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