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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김장생문학상 산문부문 당선작] 김대일
달의 기억
옛 왜관이라는 뜻을 가진 고관 입구에 자리 잡고 있는 나는 이유 모를 죄스러움을 늘 안고 산다. 아마 고관이란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구한말 많은 조선 사람들의 한 맺힌 눈빛이 가장 먼저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가끔 나는 한 맺힌 눈빛에 둘러싸이는 꿈을 꾸는 이유를 시간이 지워버릴 수 없는 공간이 가진 기억 때문이라 생각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공간은 점차 변한다. 하지만 공간은 오랜 흔적을 안고 있다. 이 때문에 곳곳에서 공간이 간직하고 있는 기억을 안을 수 있었다. 부산 동부경찰서에는 현수막과 울타리 사이 다소 부적절해 보이는 곳에 비석이 하나 서 있는데, 이는 1939년 부산진 일대의 매립사업을 마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일본인 사업자가 세운 것이다. 당시 일본은 대륙진출의 관문으로 부산을 택했고, 매립도 그런 이유로 일어났다. 그곳엔 인간의 탐욕과 죄악의 결과물이 여전히 숨 쉬고 있다. 당시 매립을 위해 일했던,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막벌이 일꾼과 같은 가장 힘없는 사람들은 아직도 그곳에 모여 산다. 매워 버릴 수 없는 공간의 기억을 안고 오늘만 버텨내는 사람들 말이다.
그 공간에 가야만 떠오르는 정취와 내음 그리고 잔상은 공간이 기억한 것이다. 공간이 변한다고 해도 기억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쌓여갈 뿐이다. 이처럼 공간의 기억은 우릴 붙잡고 놓아주려 하지 않는다. 이는 내가 사는 집이 일본풍의 집이며 일본인이 살았던 곳이라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나는 그 일본인과 직접적인 매입거래를 하지 않았고 산술적으로도 그가 살아있을 땐 세상에 없었지만, 공간은 기억을 붙잡고 있다가 끝내 우리가 서로 그 기억을 공유하게 하였다.
하지만 시간의 기억은 아주 쉽고 또 빠르게 변한다. 그래서 우리는 수많은 잘못 속에서도 아침이 되면 어제의 일이 꿈처럼 느껴지고 몽롱한 기분으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주변으로부터 얼마나 많이 가공되는가. 또한, 얼마나 많이 가공하고 있는가. 세상은 세상을 해석하는 사람들의 기록대로 흘러간다. 시간은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지워버릴까. 서로가 기억하는 사실과 추억은 모두 다르다. 그런 것을 비교하다 지치면 우린 그냥 술잔만 비워댔다. 왜 같은 과거를 다르게 기억할까. 그리고 나는 왜 기억에 집착할까. 술잔을 아무리 많이 비워도 답은 내릴 수 없었다. 이런 나를 향한 타박만이 이곳을 채운다. 나는 너무 진지하다는 것이다.
참 이상한 날도 있었다. 우리는 같은 동네에서 같은 교복을 입고 같은 반에 앉아 같은 수업과 시험을 쳤던 기억을 놓고 ‘그건 아니다.’ 또, ‘이건 틀렸다.’를 반복하다 결국 눈앞에 똑똑히 보이는 맥주를 벌컥벌컥 마셔버렸다. 같이 살았던 것이 아니었을까? 시간의 기억은 왜 서로 다른 걸 지워버리게 했을까. 마치 늘 달랐던 등수와 잘하는 과목과 못하는 과목이 달랐던 것처럼 학창시절의 기억도 잘해낸 기억과 못해낸 기억이 서로 나뉘어버렸다.
이처럼 시간의 기억과 공간의 기억을 두고 갈팡질팡하고 있을 무렵, 나는 나와 같은 공간을 공유했을 그들과 잠시 맞닿을 방법을 알았다. 그것은 차분히 달을 읽어보는 것이었다.
학창시절 우리는 가끔 떡하니 떠 있는 달을 보며 욕 한 바가지를 해대곤 했다. 대학만 가면 자유라는 말을 토하며 어두운 밤거리를 향해 침을 뱉기도 했다. 아무도 보지 못할 어두워진 길에 다만 침을 뱉은 것, 소리도 크게 내지 못하고 그냥 쭉 흘러내리게 쏟아내는 것이 우리가 세상을 향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항이었다.
당당하게 길에서 담배도 피우고, 교복을 입고 가도 술을 팔았던 육교 밑 허름한 술집이 아닌 시내에 나가 술도 마시고 여자 친구 한쪽에 끼고 추운 날 서로 껴안기도 하고 짝을 지어 여행도 다녀오리라. 푸른 달을 향해 그렇게 맹세했다.
하지만 단지 그때를 위한 유희로 끝나고 말았다. 약속이란 결코 의미 있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불과 어제 나눴던 대화도 기억으로 변환시키면서 곡해하게 된다. 하물며 몇 년 후를 기약한다거나 시간이 더 흐른 미래를 기약하는 것은 어린 소망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저 달은 기억하고 있을까? 어둠 속에서 행했던 그 날의 맹세를 저 달만큼은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지 않을까? 왠지 그런 기분이 들어 가끔은 달을 보기가 두려웠다. 어린 치기와 호전적으로 행했던 끈기 없던 약속에 대한 벌을 내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마 내가 당시 생각했던 달은 지금의 ‘Cloud' 같은 개념이 아니었을까. 내 속에서는 지웠지만, 달에는 저장된 그래서 어느 날 내가 우연히 달을 본다면 끈기 없던 약속이 나를 보며 낄낄거리고 있을 상상을 하곤 했다.
달은 꽉 찰 일도 없고 해킹당할 일도 없다. 그리고 모두가 공유하지만 동시에 사적인 공간이 되기도 한다. 그저 우리는 달을 바라보고 자신의 슬픔과 아픔, 기쁨과 사랑을 내뱉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저 달에 생생한 흔적이 생긴다.
시간에 굴복한 옛사람과 계속해서 굴복해가는 우리의 모든 잔상이 남아 있는 곳.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인류의 잔상이 남아 있을 곳. 달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체 늘 그곳에서 빛나고 있다. 시간의 기억과 공간의 기억을 오직 달만이 똑똑히 지켜본다. 어둑어둑해져 시간이 모든 걸 지우려 할 그때 달은 사라져 가는 기억을 하나둘 끌어 모은다. 밀물과 썰물이 반복 되듯, 밀려나 간 기억은 달에 도달한다.
어느 날, 하늘이 빨갛다. 저녁 10시가 넘었는데 마치 해 질 녘 같다. 달은 보이지 않고 시간이 지워줄 슬픔만 마음 한구석에 켜켜이 쌓여간다. 안개는 자욱해 마치 저세상을 향해 걷는 기분이 들게 한다. 하지만 한참을 걷다 보면 내가 처음 바라봤던, 보이지 않던 자욱함 속에 있음을 불현듯 깨닫는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것 같았던 자욱한 안개속도 발을 들인다면 나름대로 잘 보인다는 걸 알았다. 안개 속에서 나는 시야의 능력껏 보고 경험의 능력껏 상황을 예측했으며, 사고의 능력껏 계속해서 길을 추리해 나아갈 수 있었다. 이처럼 모든 것이 나름대로 이루어진다는 생각에 안심이 되었다. 살아가는데 정해진 기준이 없으니 안개 속에서 내가 보이는 만큼만 보면서 살아가는 게 당연한 게 아닌가? 다들 그렇지 않은가. 무엇이든 나름대로.
서서히 안개가 걷히고 달이 모습을 드러낸다. 내가 했던 끈기 없는 약속이 나를 보며 낄낄거리고 있다. 뭉클한 가슴을 부여잡고 행했던 어린 날의 약속. 주저하지 않고 굴복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그 날의 약속이 달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순간 나는 깊은 부끄러움에 잠겼다.
나는 언제부터 젊음을 잃었을까. 왜 언젠가부터 자유를 말하지 않았을까. 달이 뜨자 시간이 잊게 만들었던 순간의 기억이 스몄다. 자유와 정의를 말했던 그때, 삶과 행복을 말했던 그 날.
사실 인간의 삶에 목적이 없다는 것도 어딘가 어색하고 그렇다고 뚜렷한 목적이 있어야 한다는 것도 위선적이며 폭력적이다. 따라서 인간의 삶에 목적이란 게 있어야 하는가? 라는 다소 도전적이고 회의적인 질문도 합당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언젠가부터 내가 세상으로부터 재단되고 있다는 피해망상 아닌 피해망상에서 벗어나기가 참으로 힘겨워졌다. 이런 생각이 나를 속에서부터 썩게 할까. 아니면 거대한 재봉틀이 나를 밖에서부터 잘라내게 될까. 어쩌면 동시에 진행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마치 요즘 내 삶은 한줄기 빗물과 같아서 떨어지는데 속도가 붙어 방향을 마음대로 바꾸기가 힘들고 이리저리 부는 바람 따라 흩날리다 추락해버릴 것만 같다.
이젠 내가 누군지, 또는 왜 사는지 질문하지 않는다. 또한, 내가 누릴 수 있는 행복은 한 잔 술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시간의 기억 속에서만 살아간다. 어제는 잊었고 오늘은 잊어가며, 이 순간 나를 잊는 시간을 위해 건배를 한다. 내면에서 외치는 소리는 들을 수 없다. 그리고 아무도 나에게 질문하지 않는다. 왜 그게 행복이어야 하는지, 잘살고 있는 건지.
눈치 채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시간에 저항하는 동시에 억압되고, 자유를 갈망하는 만큼 자신을 옥죄며 살아간다. 어릴 적 왼손잡이였던 나는, 부모님께 크게 혼난 후 울면서 오른손으로 글씨 연습을 했다. 당시 부모님은 왼손을 쓰면 사회생활에서 여러 가지 불편한 점이 많고, 그것이 나를 불행하게 할 것이란 말씀을 하셨다. 그때 난 처음으로 무언가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후, 교복을 입으면서 내 세계는 조금 더 좁아졌다. 뒷머리를 길게 빼는 꽁지머리와 몇 가닥만 염색해 한쪽 눈을 가리는 머리 등 유행과 개성을 가질 수 있었던 초등학생 때와는 달리 모두 같은 머리 모양을 하고 같은 옷을 입었다. 나를 평가하는 기준은 오직 성적표였다. 물론, 당연한 듯 따랐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나를 잊어갔고, 학교에선 더는 꿈이 뭔지 물어보지 않았다. 고등학교의 종류와 특성, 그리고 대학진학률에 관해서만 설명했다. 원하는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약간의 성취감을 느꼈을 뿐이다. 새로운 목표가 던져졌기 때문이다. 대학을 가는 것. 그 순간, 나의 세계는 더욱더 좁아졌고, 약간의 답답함 마저 느꼈다. 그래도 모두가 같은 꿈을 갖고 달려가기에 끈끈한 동질감과 함께 안정감을 느꼈다.
하지만 축구선수가 되고 싶다며 홀연히 자퇴한 친구가 나타나자 이런 안정감이 송두리째 흔들렸다. 축구를 잘하진 못하지만 그게 내 꿈이고 도전하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 친구. 실업팀 테스트를 받았다더라, 유명 축구부가 있는 고등학교에서 함께 훈련 한다더라. 한동안 떠들썩했다. 대학이 꿈이 아닌 친구가 있다는 건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던 나에게 방향 모를, 이유모를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새롭고 상쾌한 바람. 하지만 이내 사라졌다. 9월 모의고사가 다가 왔기 때문이다. 바람이 새어 들어오던 내 세계를 모의고사 대비 문제로 모두 메우고, 겹겹이 덧붙였다. 덧붙일 때마다 계속 좁아졌으며 답답해졌다. 귓전에 맴도는 소리는 항상 똑같았다.
‘대학가야 행복해진다.’, ‘대학 가면 자유다.’
시간은 흘렀고 나는 대학에 진학했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자유와 행복이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고 애써 찾으려 하지 않았다. 지성이 자라 자유를 원하면 원할수록 더 큰 억압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그렇게 4학년이 되었다.
“이번 역은 동아대 입구입니다.” 입김과 빗물로 범벅된 창문이 어느새 나를 지웠다. 이곳이 어딘지도,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달리다 방송을 들었다. 순간 6년 전 처음 이 음성을 들었던 때의 ‘나’가 스쳤다. 늘 내 옆에 있었는지 혹은 내가 어딘가 놔두었다 꺼낸 것인지 모를‘처음’의 기억이 스몄다. 짧은 시간 동안 난 스무 살이 되었다.
처음이 주는 두려움을 적응하러 가던 그때, 혹여나 내릴 곳을 놓칠까 긴장 속에서 손톱을 물어뜯었지만, 그 와중에 한껏 멋을 냈던 나. 설렜을까? 아니, 사실 두려웠다. 한 번도 경험하지 않았던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이 무서웠다. 더군다나 주위에서는 계속 자유니 행복이니 따위의 말을 해댔기 때문에 오줌이 마려운 아이가 몸을 배배꼬며 조바심에 화장실을 찾는 것처럼 빨리 자유를 누리고 행복을 움켜쥐어야 할 것 같았다.
빨간 동백이 새로운 봄날을 온몸으로 알려주던 그해 1월 나와 친구들은 남포동 보세 옷가게에 일렬로 섰다. 우리는 이미 위, 아래가 맞춰진 옷을 대보기만 하고 계산했다. 수많은 옷 중 나에게 어울릴 옷을 선택할 줄 몰랐다. 그것이 유행이라는 말 때문이었다. 남포동에 똑같은 스타일의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에 속하는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거부감이 들지도 않았다. 맞춰지는 내 모습을 보며 안도했다. 몸에 딱 맞지 않아도, 거울에 비친 모습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아도 말 할 수 없었다. 그냥 그런 줄 알았다. 당시 나는 매화와 국화를 나란히 바라봤던 어느 겨울 비닐하우스에서처럼 몹시 불쾌했다. 하지만 나를 더 불쾌하게 했던 건 술병을 들고 환히 웃고 있는 내 모습이었다. 그때 난 어른인 척하는 내가 싫었다. 술병을 들 때만 어른임을 느끼는 내가 한심스러웠다.
나는 자유를 쟁취했을까? 아니 어쩌면 얻은 건지도 모르겠다. 하루하루를 고난의 연속이나 투쟁의 장으로 여긴다면 20살이 됐을 때까지 죽지 않고 살아남은 자랑스러운 전사로써 자유를 쟁취한 것이다. 하지만 딱히 한 것도 없이 나이만 먹었는데 수능이 끝나자 우릴 꽁꽁 얽매고 있었던 모든 것들이 갑자기 풀려 버리고 그 틈으로 자유가 굴러와 어색하게 마주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찾아보지 않은 건 사실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실 되게 갈망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선천적인 능력이 있어서 그것이 주어지기만 한다면 곧바로 본질에 맞게 쓸 수 있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자유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나에겐 자유를 규정 내릴 시간이 필요했고, 맛보고 즐길 호기심과 행동할 용기가 필요했다.
아무런 준비 없이, 예고도 없이 삶을 맞닥뜨렸다. 괜히 고등학교 친구와의 우정을 확인하던 나. 다시 그곳에 나를 가두고 싶었다. 적어도 지금까지 느껴오던 안정감을 느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우린 어른이라는 것을 은근히 뽐내고 다녔다. 길에서 담배를 피웠으며, 큰 소리로 술 약속을 잡았다. 우린 그렇게 담배 타는 소리와 술잔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며 소리가 빚어주는 어른이 되었다.
시간은 오늘도 모든 걸 지워간다. 나는 기억을 더듬으며 살아가지만, 그 기억도 점점 흐려진다. 흐릿한 기억을 더듬는 데 지쳐 행복과 자유를 떠올릴 수 없다. 나는 어떻게 빚어질까. 바람은 바람 골 따라 분다. 어디서 불어갈지 선택할 순 있는 것일까. 오늘은 달이 떴으면 좋겠다. 지난날의 내가 뱉었던 모든 말과 생각을 조금 더 생생하게 되뇌고 싶은 밤이다.
제11회 사계 김장생 문학상 심사평
"논리의 시대가 몰락하고, 수사(修辭)의 북(Book) 콘서트 시대가 부활했다."
- 김장생 문학상 대상 수상 유영애 시조집『산수유는 피어』
- 본상 운문부문 유다인의 시「아버지의 집」, 지경희의 시조「올갱이국」,
본상 산문부문 김대일의 수필 「달의 기억」 선정
요즘 중동호흡기증후군(일명 메르스 MERS) 때문에 온 국민이 온통 메르스 공포 속에서 살고 있다. 외국 관광객들이 한국행을 취소하는 일련의 사태가 장기화 될 조짐을 보여 우려의 목소리가 심심찮게 들리고 있다. 그런데 중동호흡기증후군의 정확한 감염 경로 및 백신개발에 대한 당국의 논리적 설명이 미흡하다는 것이 큰 문제다. 콕 집어 말하면 메르스 치료제(신약)가 아직 개발 전이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한계에 부딪쳤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가 의약 강국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메르스 앞에서는 속수무책인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안타까울 뿐이다. 논리적으로 국민들을 설득해 차분하게 위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대국민 행동강령을 전파해야 할 선점시기 또한 놓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르스로 인한 공포와 불안으로 얼룩져 있는 국민들의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수사(修辭)의 시대’ 부활 조짐을 보이고 있어 여간 다행스럽지 않을 수 없다. 바로 <김장생 문학상>이 그 ‘수사의 시대’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 올리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이다. <김장생 문학상>은 조선 중기 예학(禮學)의 태두로 평가되고 있는 사계 김장생 선생의 학문적 업적과 시대정신을 계승하고 21세기 문학 치료에 부응할 수 있는 역량 있고 참신한 인재 발굴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기성과 신인에게 '창작'에 대한 결실과 비전을 제시하고 있는 <김장생 문학상>이 올해로 벌써 11회째로 접어들면서, 국내외 어느 문학상에 견주어도 손색없는 대한민국 최고의 권위와 전통을 자랑하는 문학상임을 확실히 보여주었다. 특히, <김장생 문학상>의 대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유영애 시조집『산수유는 피어』중 「등긁기나무 아래서」의 시적 울림 속에는 메르스 예술 치유의 신선한 메신저 역할을 천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메르스 공포로부터 신음하고 있는 ‘국민들의 가려운 등을 긁어줄 나무’가 되어 주려는 시인의 고결하고 고매한 활어(活語)가 파도치고 있어 ‘수사의 북(Book) 콘서트 시대’ 의 서막을 알리는 감동의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상대방을 배려한 말, 상대방이 가장 듣고 싶은 말을 할 때, 비로소 상대방을 최고로 코디한 명품의 옷을 선물한 것과 같고, 심지어 상대방에게 명품의 옷을 코디한 화자(話者) 자신도 부메랑 효과처럼 고품격의 명품 옷을 동시에 입게 된다.”
문학은 대중성과 예술성을 지향한다. 메르스 한파로 인해 대중들이 가장 듣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위로’의 말이며, ‘힐링(Healing)’의 따뜻한 말이다. 바로 지난해 세월호 여파 이후, 또 다시 메르스 한파에 몸살을 앓고 있는 대중들의 마음을 위로해주고 치유할 '수사(修辭)의 북(Book) 콘서트'가 필요한 것이다.
오랜 논의와 검증 속에 '대상' 부문의 마지막까지 거론된 작품집들은 유종인 시집『혜초의 사랑』, 김옥중 시집『금강초롱 꽃』, 구광렬 시집 『슬프다 할 뻔했다』, 유영애 시조집『산수유는 피어』, 송명숙 동시집『버스 탄 꽃게』, 김은의 동화집『막막골 훈장님의 한글정복기』, 곽흥렬 수필집『여자와 함께 장보는 남자』등을 들 수 있다. 저마다 장인정신과 비유할 수 있는 세련된 자기 미학과 독특한 컬러를 가진 우수한 작품 군을 형성하고 있었다. 주목할 점은 이번 작품집들 중에, ‘휴머니티의 부활과 인간 탐구’라는 선 굵은 테마를 많이 다뤘다는 점이다.
유종인 시집『혜초의 사랑』은 역사적 인물의 발자취를 공유하는 실크로드 기행을 통해 철학적 사유(思惟)와 인간애의 자각, 깨달음의 여정을 수준 높은 언어의 질감으로 우려내고 있었다. 구광렬 시집 『슬프다 할 뻔했다』는 자아해체라는 인간본연의 모습을 발현시키면서, 자전적 체험과 라틴적 리듬으로 독자들의 시선을 흡입해 내는 미적 감각이 탁월했고, 흥겨운 음악과 감미로운 속삭임 그리고 자아해체를 통해 인간의 황홀한 도취를 유도할 만큼 치열한 작가정신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유영애 시조집『산수유는 피어』는 여성 특유의 정제된 미적 감각을 바탕으로 아름다운 서정의 집 한 채를 축조하고 있었다. 특히 작금의 메르스 한파와 같이 공포와 불안에 노출된 민중들을 위로하고 치유할 ‘등긁기나무’를 격조 높은 시조미학으로 형상화시키면서 민중들이 기댈 수 있는 언덕 역할뿐 아니라, 또한 민중들의 가려운 등을 긁어주고 있었다. 이른바 수사의 시대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치유문학’, ‘문학 치료’의 핵심근간을 구비하고 있었다. 김옥중 시조집 『금강초롱 꽃』은 단시조의 정수를 선보이면서 아울러 시조시인의 풍류와 멋이 어우러져 전통적 정서를 발아시키고 있었다. 이는 한국현대시조문학사에서 장형시조, 사설시조 등의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되고 있는 전환기적 일련의 과정을 거치는 가운데, 현대시조의 시대정신을 단수(單首)에서 찾고자 하는 신고전주의와 그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송명숙 동시집『버스 탄 꽃게』는 도심 속에서 외롭게 크는 어린이를 찾아 희망과 용기를 북돋아주는 말을 통해 작은 위안과 따뜻함을 반추해내고 있었다. 김은의 동화집『막막골 훈장님의 한글정복기』는 한글 문맹 할아버지와 손자와의 소통을 통해, 서로 다름을 인정하며 친구가 되어가는 스토리 설정 자체가 돋보였다. 한문(漢文)이라면 모르는 것이 없지만 한글의 문맹자인 할아버지의 변화 과정을 소박하게 그려내고 있는 가슴 뭉클한 감동 동화였다. 곽흥렬 수필집『여자와 함께 장보는 남자』는 ‘인생을 낭비하지 않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기본적인 물음에서부터 스토리가 전개되고 있다. ‘빛깔 연한 꽃이 향기가 짙다’는 어록을 남기면서, 일상에 대한 사색과 명상을 꽃피우고 있었다. 흠결 없는 문맥의 흐름, 건강한 문체가 어우러져 산문 정신 또한 적극 구현하고 있었다. 선자(選者)의 손에 남겨진 어느 것 하나하나 문학적 향기가 그윽하지 않은 작품이 없었다.
각 장르별로 종합하면서, 언어의 정제미, 완결미와 테마를 다루는 역량이 산문 보다는 운문 쪽에 훨씬 더 비중 있게 분포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결국 언어탐구의 최종 지향점인 휴머니티를 통해 대중과의 끝없는 소통의 예술치료와 감동의 카타르시스(Catharsis)를 생산해내고 있는 유영애 시조집『산수유는 피어』를 이번 11회 사계 김장생 문학상의 대상 수상작으로 선정한다. 대표작 「등긁기나무 아래서」, 「유월 수국」두 편을 싣는다.
옷자락 얼룩덜룩 칠칠하게 자란 나무
캄캄한 몸통가시에 발길이 멈칫한다
가려운 물소 등허리 긁어대는 저 몸짓
자연의 섭리 앞에 무슨 말을 내놓으리
내 영혼 깊은 잠을 눈물로 씻어 본다
이대로 끓는 무릎에 두 손 가만 얹는다
- 유영애의 시조, 「등긁기나무 아래서」 전문
동두천 쇠목계곡 소헌산방 울타리에
지난 밤 뜨다만 달이 한 소쿠리 피어 있다
소요산 뻐꾸기소리 달빛에 젖는 저녁
- 유영애의 시조, 「유월 수국」 전문
본상 수상 작품은 운문(시, 시조, 동시)부문에서 2명, 산문(수필, 동화, 소설)부문에서 1명, 총 3명을 400여 편의 작품 중에서 선정하였다. 본상 각 부문 수상자는『계룡문학』신인문학상 당선자로 동시에 인정되기 때문에, 문인 등단의 영예까지 주어진다.
운문부문에서는 유다인의 시「아버지의 집」, 지경희의 시조「올갱이국」을 선정하였다. 산문부문에서는 김대일의 수필 「달의 기억」을 선정했다. 유다인의 시「아버지의 집」은 돌아가신 선친의 엄숙한 하관식(下棺式) 장면을 통해 아버지의 생전 모습을 직조해내고 있는 가운데, 사후(死後) ‘신(神)의 집’인 선친의 봉분(封墳) 작업과정을 섬세한 감성으로 갈무리시키고 있었다. 이는 탁월한 시적 역량을 감지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고, 일정 수준을 유지하면서 독특한 미학적 경지를 넘나드는 수작(秀作)으로 평가되었다. 지경희의 시조「올갱이국」은 선명하고 격정적 어조로 시적 대상을 형상화시키는 시안(詩眼)이 남달랐다. 더욱이 특별 요리비법으로 차려진 올갱이국 한 사발을 시원하게 들이키는 맛깔스런 장면 또한 연상될 만큼 활달한 이미지 전개 능력이 뛰어났다. 김대일의 수필「달의 기억」은 깔끔한 문장, 탄력 있는 구성력, 눈길을 끄는 테마 선정 등을 통해 깊은 문학적 성찰과 기초·기본에 충실한 언어미학 등을 발견할 수 있었다. 위에 밝힌 당선작 이외에도, 당선작 후보로 오랜 숙고의 대상이 되어 마지막까지 논의되었던 작품은 운문에서 원갑분의 시 「달팽이관의 밀물과 썰물」, 장윤희의 시「거미줄」, 황재윤의 시「왜가리」, 최선주의 시조「바람을 읽다」, 여운택의 시조「겨울 의암호」, 김순희의 동시「나비처럼」, 김완수의 동시「별자리」등이었다. 기교와 서정성을 고루 갖춘 가작(佳作)임에 틀림없으나 시선을 압도하는 시적 긴장감, 활달한 이미지 전개 역시 굉장히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임을 밝히고자 한다. 또 산문에서는 최의영의 소설「꽃무덤」, 이환임의 수필「푸른 소금」, 김현지의 수필「멍」, 김완수의 동화「하늘 리모컨」등이 끝까지 논의되었다. 이들 작품마다 일정한 틀의 풍부한 미적 감성을 담보하고 있었으나, 시종일관 주제를 부각시키며 독자들의 마음을 흡입할 수 있는 독보적인 캐릭터(Character)와 독특한 문체 등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공모 규정에 의해 아깝게 선외 처리된 분들에게는 따뜻한 격려와 위로의 말씀을 전함과 동시에, 제11회 김장생 문학상에 당선된 대상, 본상 수상자들에게는 축하의 박수를 보낸다.
-심사위원 : 정유지(문학평론가), 이황진(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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