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26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18절
사도신경의 마지막 부분은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들에 대한 고백인데, 죄 사함이 첫 번째 내용입니다. 죄 사함이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보상을 받으시고, 내가 평생토록 싸워야 할 나의 죄들과 나의 죄악 된 본성을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신다는 것, 오히려 은혜로 내게 그리스도의 의를 베풀어 주셔서 내가 다시는 결코 정죄에 이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때 주의 깊게 봐야 하는 것이 내가 평생토록 싸워야 할 나의 죄들과 나의 죄악 된 본성을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상으로 인하여 죄 사함을 받았지만, 내가 평생토록 싸워야 할 나의 죄들과 나의 죄악 된 본성까지도 사함을 받았지만, 이 땅에서는 내가 평생토록 싸워야 할 나의 죄들이 있다는 것이요 나의 죄악 된 본성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 모든 죄까지 사하셨지만, 그래서 죄로 인하여 정죄 받는 일은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경은 죄와 싸워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한 것을(히12:4) 책망할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죄 사함의 내용을 생각할 때 죄 사함과 함께 왜 죄를 사해주셨는지, 그리고 죄를 사해 주심으로 우리를 이끌고자 하는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죄 사함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죄와 싸우면서 거룩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제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로 우리의 생명이 끝난 후에 받게 될 복에 대하여 말하는데, 몸의 부활과 영생이 그것입니다. 오늘은 몸의 부활에 대하여 살펴보겠는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57문입니다.
57문. “몸의 부활”은 그대에게 어떤 위로를 줍니까?
답. 이 생명이 끝나면 나의 영혼이 즉시 머리이신 그리스도께로 올려질 것이요(눅16:22, 23:43, 빌1:21,23, 계14:13), 또한 이 나의 몸도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살리심을 받아 다시금 나의 영혼과 결합되어 그리스도의 영광된 몸처럼 될 것입니다(고전15:53,54, 욥19:25,26, 요일3:2, 빌3:21).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 가운데 그의 죽음에 이어 그의 부활에 대하여 다루었지만 성경은 죽음과 함께 부활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죽음의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맨 첫 사람 아담과 언약을 맺으실 때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임의로 먹을 수 있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창2:16-17). 그런데 아담은 이 명령에 불순종했습니다. 아담이 모든 인류의 대표로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다고 할 때 그의 죄는 그만의 죄가 아니라 우리의 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죄에 대한 결과 죽음을 말씀하셨다면 아담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도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결과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5:12)
그러나 죽음과 사망으로 결과 될 수밖에 없는 죄인을 위해서, 그러나 모든 죄인이 아니라 자기 백성이라 일컫는 죄인을 위해서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상, 다시 말해 그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의를 위하여 부활하셨는데, 그의 부활은 무엇과도 같은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45문을 통해서고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의 복된 부활에 대한 확실한 보증이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로마서 8장 11절입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그러므로 부활은 반드시 있습니다. 부활에 대하여 의심하는 자도 있었지만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도 헛되며, 또한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분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부활에 대한 불신은 결코 기독교란 이름 안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기 때문에 그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 역시 부활하게 되리라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그럼 몸의 부활이란 무엇인가? 일단 몸이 부활한다는 것은 몸이 죽는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읽은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절을 보시면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때 ‘자는 자들’이란 낮 시간에는 깨어 있다가 밤에 잔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죽은 자들에 대한 표현입니다. 죽었지만 왜 잔다고 표현하는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은 죽음으로 끝이 아니라 다시금 깨어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만이 아니라 그리스도 밖에서 죽은 자들도 부활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모든 사람이 죽지만 죽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부활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과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의 부활의 성격이 다른데, 요한복음 5장 28절과 29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생명을 받아 생명의 부활로 나아오게 됩니다. 선한 일, 악한 일로 표현되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선이요, 또한 그로 말미암아서만 선이 나오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만이 생명의 부활로 나아오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은 생명을 받지 못한 자로 죽어 심판만 기다릴 뿐입니다. 생명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생명과 반대되는 죽음이요 영원한 죽음이 심판의 결과로 있게 되겠지만, 죽음이요 영원한 죽음이라고 해서 생을 살다가 죽는 것처럼 그렇게 죽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영원한 죽음이란 그만큼 영원한 고통을 당한다는 것이요, 올레비아누스의 표현으로 하자면 죽고 썩는 가운데서 죽지 않고 섞지 않는 자로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차이에서 생명을 받아 죽는 자들은 생명의 부활로 나아오기 때문에 성경은 죽은 신자, 죽은 성도에 대하여 잠잔다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다는 전제 아래 잠잔다는 표현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부활의 전제가 죽음이라고 할 때 죽음은 우리 자신을 이루고 있는 영혼과 육체의 일시적인 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시적인 분리라는 것은 언제가 다시금 결합될 때가 있다는 것인데, 이때가 언제냐? 부활 때입니다. 그런데 죽음으로 인해 영혼과 육체가 분리될 때 육체는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흙으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갑니다. 이런 사실은 성경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창세기 3장 19절만 보더라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욥기 34장 15절에서는 “모든 육체가 다 함께 죽으며 사람은 흙으로 돌아가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럼 영혼은 어떻게 되는가? 오늘 본문에서 잠잔다는 표현이 있지만 어떤 이들은 육체가 죽으면 영혼도 아무런 활동을 할 수 없는 수면 상태로 들어간다고 주장합니다. 개혁주의 시대 재세례파들 가운데 일부가 이런 주장을 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에피쿠로스학파와 사두개인의 경우는 영혼의 불멸과 육체의 부활을 부인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죽을 때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지만 영혼은 결코 죽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영혼이 하나님으로부터 창조 된 후 불멸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잠자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두개인의 질문에 대하여 답변하실 때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막12:26-27)고 하셨던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이었지만 부활이 있을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역사 안에서는 죽었지만 하나님 품에서 살아 있다는 측면에서 하나님 자신을 산 자의 하나님으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부자와 나사로에 관한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부자의 경우는 죽어 음부로 갔고 나사로의 경우는 아브라함의 품으로 표현된 낙원으로 갔다고 말씀합니다. 육체는 죽어 흙으로 돌아가지만 그들의 영혼이 낙원 혹은 음부로 갔다는 것입니다. 단지 낙원과 음부로 간 것만 말씀하지 않고 살아서 낙원의 복됨을 누리고 음부의 고통을 느끼는 것까지 말씀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런 측면에서 한편 강도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고 하셨던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 자신도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영혼은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영혼은 잠드는 게 아닙니다. 영혼은 살아 있습니다. 불멸합니다. 마태복음 10장 28절에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는 말씀은 이런 측면에서 지옥에 멸함으로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옥에 던져 넣어 고통 가운데 있게 한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영혼이 육체와 분리될 때 낙원과 음부, 천국과 지옥 외에 다른 곳에 간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성경이 이 두 곳 외에 다른 곳을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톨릭의 주장은 무엇입니까? 롬바르두스의 말에 의하면 육체로부터 영혼이 분리될 때 사람들의 영혼은 연옥의 불 속에 들어가고, 금생에서 이 세상의 썩어져갈 것들을 얼마나 사랑했느냐에 따라서 어떤 영혼은 일찍, 또 어떤 영혼은 늦게, 거기서 죄로부터 정결하게 됨을 얻는다고 상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낙원과 음부, 천국과 지옥 외에 다른 곳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죽어 천국 아니면 지옥에 가게 되는데, 부활이란 천국에 있는 영혼 혹은 지옥에 있는 영혼이 다시금 육체와 결합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부활이라고 할 때 성경은 때때로 사람의 죄로부터 회심한 것, 다시 말해 중생의 의미로 부활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요한계시록 20장 5절에 있는 ‘첫째 부활’이 그것입니다. 이때 중생을 첫째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날 때부터 하나님께 대하여 죽은 자로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표현입니다. 에베소서 2장 1절 말씀에서처럼 허물과 죄로 죽었다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받았을 때 우리는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살피고 있는 이 부활은 첫째 부활이 아니라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둘째 부활입니다. 첫째 부활의 전제는 영적인 죽음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자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런 죽음에서 새 생명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둘째 부활의 전제는 영혼과 육체의 분리입니다.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천국 아니면 지옥으로 곧바로 가게 되는데, 부활은 분리되었던 영혼과 육체가 결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에서 몸의 부활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 후자와 관련된 것입니다.
그럼 언제 이런 부활이 있는가? 오늘 본문 14절 이하 17절을 보시면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보면 주께서 강림하실 때의 일을 말하는데, 사도신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으로 부활과 승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심 이후 그리로 부터 오사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실 것에 대한 고백이 있는데, 주의 강림은 이 부분을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즉 주께서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기 위해 재림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때 16절에 의하면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강림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난 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게 되는데, 이때가 부활하는 때입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자들은 어떻게 되는가? 17절에 의하면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부활한 자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되는데, 본문에서는 설명하고 있지 않지만 고린도전서 15장 51절과 52절에 보면 예수님 재림 당시 살아 있는 자들도 어떤 변화가 있을 것을 말씀합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먼저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이것만 부활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데살로니가전서나 고린도전서를 통해 말씀하고 있는 부분은 다 주 안에 있는 자들과 관련된 내용인데, 주 안에 있는 자들, 특히 예수님 재림 당시 살아 있는 자들은 죽음을 겪지 않았기 때문에 부활을 경험하지 못하는가 할 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 안에서 죽은 자가 먼저 부활하고 난 뒤 살아 있는 자들도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변화한다는 것은 죽었다가 부활한 자들과 동일한 부활체를 가진다는 것인데, 이때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한다는 것은 죽음과 방불한 일이 거기에 있는 것이고, 그리고 난 뒤 부활체를 입게 된다는 그런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심판자 되시는 주 앞에 서는데 지금과 동일한 육체를 가지고 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본성의 부패함을 가지고 있는 육체, 점과 흠이 있는 육체를 가지고 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죄인으로 분류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죄로 인하여 정죄 받는 일이 없도록 하셨습니다. 때문에 그리스도 앞에 서기에 앞서 예수님 재림 당시 살아 있는 자들의 육체도 부패한 본성도 없고 점과 흠도 없는 성태로 변화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변화가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한다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그럼 좀 더 구체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어떤 몸으로 부활하게 되는가? 어떤 몸으로 변화하게 되는가? 일단 현재의 몸과 전혀 다른 몸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부활 시에 다시 살아나게 될 몸은 우리가 현재 지니고 있는 몸입니다. 여기에 대해 재세례파의 주장은 지금 우리의 몸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창조하시는 다른 몸이라고 주장하는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 부활을 의심한 도마에게 보이신 것은 죽음 이전에 가지고 계셨던 자신의 몸이었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20:27)고 하셨습니다.
혹 예수님의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시고 난 뒤 변화되실 수 있다는 것도 염두 해 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부활하시고 난 뒤 부활체를 입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죽으시기 전 고난을 당하신 그대로의 몸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부활체로 변화하시기 전의 몸과 다르지 않는 몸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내용 때문에 성도가 죽기 전 장애를 가지고 있다면 그런 장애 그대로 부활한다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그렇다고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셔서 오실 때 이사야의 예언을 따라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는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마11:5).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다시금 오실 때는 부분적으로만 일어났던 일이 전체적으로 성취가 되지 않을까란 생각도 가지게 됩니다. 즉 우리를 회복하게 하신다고 할 때 전인을 회복하실 것이고, 그때 전인은 우리의 육체도 속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부활의 모습은 지금 우리의 몸과 다른 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현재 지니고 있는 이 몸으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 몸으로 부활하게 된다 할지라도 변화된 몸으로 있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선 35절부터 38절을 보시면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그러면서 42절 이하 44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그러니까 우리가 부활하게 될 때, 혹은 변화하게 될 때 어떤 부활체를 가지게 되느냐? 지금은 썩을 수밖에 없는 몸이지만 그때는 썩지 아니할 몸으로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욕된 것으로 있을 수밖에 없는 몸이지만 그때는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약한 몸일 수밖에 없지만, 그래서 병들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지만, 그때는 강한 몸으로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육의 몸이지만 그때는 신령한 몸으로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내용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하는 자들에게 속하는 내용들입니다. 그럼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은 어떻게 부활하는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그리스도가 우리 부활의 근거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위해 다시 살아나는 것으로 있습니다. 이때 그들에 어떻게 부활할지에 대한 성경 증거는 없지만, 우리와는 달리 지금의 몸으로 부활할 것은 자명합니다. 물론 지금처럼 썩는 몸이고, 지금처럼 욕된 몸이고, 지금처럼 약한 몸이고, 지금처럼 육의 몸이지만, 그들도 부활하고 난 뒤에는 다시금 죽는 일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게 될 당시 살아 있는 자들도 그런 몸으로 변화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앞에서도 표현한 것처럼 그들은 죽고 썩는 가운데서, 죽지 않고 썩지 않을 몸으로 부활하게 됩니다. 그런 몸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영원토록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고통도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의 저주 받은 몸을 완전히 태우지는 못합니다. 그것이 그들에게 영원한 벌로 있을 뿐입니다.
반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소망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부활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의 부활에 대해서만 언급하는데, 다시 한번 정리하자면 이 생명이 끝나면 나의 영혼이 즉시 머리이신 그리스도께로 올려질 것입니다. 죽음을 통해 육체로부터 영혼이 떠나가게 되는데, 이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그가 계신 곳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심판을 위하여 다시금 내려오실 때 지금 우리와 같은 육체가 다시금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살아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이 그 육체와 결합하게 되면서 부활하게 되는데, 이때 그리스도의 영광된 몸처럼 될 것입니다.
이때 이 내용 자체로도 우리는 우리의 부활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알 수 있지만,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의 부활을 통해 더욱 우리의 부활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그 말은 우리의 중보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게 되는 바가 얼마나 크고도 놀라운지를 마지막 때에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오시면 18절에서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고 권면합니다. 죽은 자의 부활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살아 있는 자들도 부활과 동일한 육체를 가지게 됨으로 그런 모습으로 항상 주와 함께 있게 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다면 죽은 성도의 부활도 믿을 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가 동일한 부활체로 주와 함께 영원토록 살 것이기 때문에 이것으로 서로 위로하라는 것입니다. 소망이 없는 다른 이들과 같이 성도의 죽음에 대하여 슬퍼하는 자로만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부활 신앙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부활 신앙으로 서로를 위로할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우리가 생을 살아가면서 성도의 죽음을 경험하게 될 텐데, 이때 죽음을 보면서 부활이 없는 자처럼 세상 앞에 비춰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물론 육신의 이별은 슬픕니다. 그리고 혹 내 부모가 먼저 세상을 떠난다고 할 때 부모에게 다 하지 못한 효도를 생각하면 슬퍼할 수밖에 없습니다. 혹 자녀가 부모보다 먼저 간다면 그에게 더 잘 해주지 못한 것 때문에 슬퍼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슬픔이 너무 과하게 나타나 세상으로 하여금 부활이 없는 것처럼 비춰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실제로 새뮤얼 러더퍼드라는 개혁자는 딸 아이의 죽음 앞에 슬퍼하는 한 여성에게 편지하면서 아이의 죽음으로 인하여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 것을 데살로니가전서 4장의 말씀으로 권면하기도 했는데, 아이의 죽음으로 인하여 슬퍼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이를 잠시 당신에게 맡긴 것이라는 사실, 나아가 아이는 전능하신 하나님 품에서 자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지나치게 슬퍼하는 것은 소망 없는 자와 다를 바 없다고 권면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실제적인 권면은 우리에게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다윗의 예를 통해서도 우리는 이런 면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사무엘하 11장에서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동침함으로 죄를 범하게 됩니다. 이 일을 숨기기 위해 어떤 일까지 행하게 되는가? 충신인 우리아로 하여금 죽음으로 내몰기까지 하면서 그를 죽이게 됩니다. 이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나단을 보내어 책망하시게 되는데, 사무엘하 12장 1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 하고” 물론 다윗이 회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회개를 받으십니다. 그러나 14절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그 죄의 심각성을 분명히 알리길 원하셨고 또한 경계해야 할 것도 알기 원하셨습니다.
실제로 이후에 다윗과 우리아를 통해 낳은 아이가 심히 앓게 되는데, 이때 다윗은 하나님께 간구하게 됩니다. 금식을 하면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려 기도합니다. 성경을 통해 언급하지는 않지만 자신의 죄 때문임을 알고 있기에 다시금 자신을 돌아보았을 것이요, 그러면서도 아이를 살려주십사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는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기도하되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통해 하신 말씀대로 아이의 생명을 취하여 가셨습니다.
그런데 아이의 생명을 취하여 가신 이후 다윗의 자세를 보면 우리 정서로 볼 때 좀 낯설게 느껴집니다. 사무엘하 12장 20절에 보면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왕궁으로 돌아와 명령하여 음식을 그 앞에 차리게 하고 먹은지라”고 기록합니다. 그가 죽은 것을 알게 되자 이렇게 한 것입니다. 우리 정서는 어떻습니까? 죽으면 더 슬퍼합니다. 죽으면 더 안타까워합니다. 어떤 이들은 그렇게 기도했는데도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대로 해 주지 않았다는 것으로 원망하고 불평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이런 자세는 앞서 보인 그의 기도가 가식이었다는 것인가? 결코 그렇게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이런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는가?
실제로 신하들이 이에 대하 묻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이렇게 답변합니다. 22절과 23절입니다.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거니와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나단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것은 아이를 취하여 가실 것이라고 하셨지만, 신학적인 표현으로 작정의 성격인지 아니면 교훈의 성격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혹 교훈의 성격일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을 돌아보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한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는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이제는 그런 죽음 앞에서도 주의 뜻이 이루어진 줄 알고 하나님께 나아가 경배하고 난 뒤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인정이 없는 게 아니라, 무엇이 하나님 앞에서의 바른 자세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도 죽음 앞에서 과한 슬픔은 우리에게 아무런 소망이 없는 것처럼 비춰질 수 있기에 조심해야 합니다.
죽음과 관련하여 한 가지 더 말씀드리면 가톨릭의 경우 죽은 자를 위한 기도가 있습니다. 의인의 영혼이 있는 천국과 악인의 영혼이 있는 지옥 사이에는, 죽은 후 지옥에 갈 정도의 대죄는 없지만 천국에 바로 갈 수 없는 소죄가 있는 영혼이 있어서 그 소죄를 속죄하기 위해 천국에 대한 소망을 품고 얼마 동안 단련하고자 머무는 장소가 있다고 믿는데, 그곳이 바로 연옥입니다. 앞에서 천국과 지옥 외에 다른 곳은 없다고 할 때 연옥이 있다고 말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지만, 연옥과 관련된 내용도 얼마나 성경의 가르침과 먼 지 모릅니다.
일단 연옥에 있는 영혼들은 감옥살이하는 범죄자들과 같아서 스스로는 죄를 경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승에 있는 사람들이 연옥의 영혼들을 위해 바치는 기도를 통해서, 혹은 헌금과 같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단의 제물을 통해서 죄를 경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로마 가톨릭에서는 11월을 위령성월로 지정해 죽은 자들을 위한 위령 미사 등을 통해 하나님에게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를 바칩니다. 연옥에 있는 자들의 죄를 여기 있는 사람이 어떤 대가를 치름으로 보속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거짓된 교리는 이미 다윗의 말로도 충분히 거짓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죽은 자를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죽은 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산 자를 위해서 그리고 앞으로 태어날 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정리하자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우리의 생이 끝나더라도, 그래서 죽더라도, 우리 영혼이 즉시 머리이신 그리스도가 계신 곳으로 올라가기 때문에 죽음 자체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죽음 이후 부활할 때가 있다는 것에 소망을 가져야 하고, 나아가 그때는 지금과 동일한 몸이지만 그 성격이 완전히 변해서 영광스럽게 된다는 것, 더 이상 죄와 전혀 상관없이 영광의 몸이 된다는 것에 감사와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땅에서 그런 영광스러운 몸에 합당한 자가 되도록 거룩하고 흠이 없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자신을 살피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