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3일 주일 설교
시리즈 제목: 땅을 위한 하늘의 대리인들 25
설교 제목: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1]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마태복음 10:32~33
설교를 위한 묵상:
김재준 목사는 1952년에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로부터 목사직을 빼앗겼다. 그로부터 63년이 지나 2016년에 예장 통합측은 김재준 목사의 파면을 취소하고 사과했다. 1992년 감리교 총회는 변선환 목사를 감신대학장직에서 몰아내고 출교 처분했다. 그리고 2024년 3월 감리교총회 재판위원회는 이동환 목사를 출교 처분했다.
이분들은 모두 자신들의 지위와 미래를 결정할 재판장에서 양심적인 발언을 했다. 김재준 목사는 한국신학대학교 설립에 기여했다. 변선환 목사의 순교적 발언을 흠모하는 목회자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현실은 박영식 교수를 유신진화론자로 몰아 교수자리에서 몰아내려고 한다. 서울신학대학교의 이야기다.
이처럼 이 세상에는 다양한 생각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그 가운데서 저마다 양심과 소신을 가지고 주장을 펼친다고 말한다. 그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 그리고 자신의 소신을 굽히라는 압력에 대하여 우리는 어떤 결정을 해야 할까? 이런 문제를 생각해 보면서 이번 주일 설교를 준비하고자 한다.
하지만 자신이 하는 일이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 같이 느껴지고, 혼자 서커스공연장에서 재주를 부리는 곰처럼 느껴질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종류의 고민은 ‘엘리야컴플렉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 엘리야는 그런 것을 느꼈다. 그리고 모세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엘리야는 새로운 사명을 받았고, 모세도 이드로를 만났다. 우리의 고민이 깊어지는 그 순간은 우리의 아집이 벗겨지는 순간이며 새로운 문이 열리는 시간이 될 수 있다.
설교 개요:
1. 건축자에게 버려진 돌들
2. 사람 앞에서 주님을 시인하고 부인하는 것
3. 모세와 엘리야에게서 배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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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건축자에게 버려진 돌들
지난 주에 저는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일어서셨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예수님은 시편 118편의 말씀을 인용하셔서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는데 이는 하나님이 하신 일이며 사람이 보기에 기이한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예수님처럼 배척을 받을 것을 각오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옳은 일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환영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배척을 받으셨고 사도 바울과 사도들도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들이 박해를 받고 순교를 당한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이처럼 건축자들에게 버림을 받은 돌들이 많습니다. 수많은 순교자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도 로마교회로부터 이단자라는 오명을 받았습니다. 우리 교회가 부르고 있는 찬송가 582장 ‘어둔 밤 마음에 잠겨’를 작시하신 김재준 목사님도 1953년에 대한예수교장로회 교단에서 목사직을 박탈당했습니다. 그리고 63년이 지나 2016년에 장로교 통합교단은 김재준 목사의 파문을 취소하고 사과했습니다. 그 당시 목회자들은 김재준 목사의 성경해석방법을 오해했던 것입니다.
건축자들이 그 돌을 버리는 이유는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감리교회는 1992년 감신대학교 학장이던 변선환 교수를 면직하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종교다원주의자라는 죄목이 파면의 이유였습니다 (2022년 종교재판 30주년 세미나가 열렸다). 그리고 금년 3월에는 성소수자들에게 축복기도를 한 젊은 목회자 이동환 목사를 출교했습니다. 죄목은 동성애를 찬동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박해하고 죽인 사람들과 사도 바울을 죽이려고 달려든 사람들이 모두 종교적인 열심이 충만한 사람들이었음을 주목하고 싶습니다. 물론 루터나 김재준 목사, 그리고 변선환 교수나 이동환 목사 등도 기존 교회에서 제명 또는 면직이나 출교를 당했습니다. 이 중에 예수님은 유대교보다 더 넓고 풍성한 그리스도교회를 시작하는 문을 열어 주셨고, 루터는 개신교회를 시작하는 문을 열었습니다. 김재준 목사는 한신대학교를 설립하는데 기여했습니다.
어쩌면 건축자들이 그 돌을 버린 이유는 당시의 시대가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낡은 가죽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없기에 새 포도주는 낡은 가죽부대를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새 포도주를 담기 위해서 새로운 가죽부대를 마련했습니다. 그렇게 역사는 진보하고 발전해 왔습니다.
우리가 역사로부터 배울 수 있다면 이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즉, 같은 시대에 살고 있지만 우리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신학적인 차이이며 또는 세대적인 차이입니다. 그 차이는 너무 분명하기에 하나가 옳거나 다른 하나는 반드시 틀린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바는 이것입니다. 지금 내가 수용할 수 없는 사상이나 관습이 반드시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는 내가 가지고 있는 가죽부대가 너무 낡았으므로 새로운 시대를 담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마음이 불편하고 걱정이 됩니다. 그런데 나에게 권위가 주어져 있다면 그런 사람의 직위를 박탈하고 우리 무리에서 쫓아낼 결정을 할 것입니다. 과거에 우리 조상들이 그렇게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취향 또는 도덕적인 기준이 절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에 맞지 않는 사람을 무조건 배척하고 정죄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그 사람을 존중하는 법을 잊으면 안 되겠습니다. 적어도 존중하며 시간을 함께한다면 언젠가는 상호 이해에 이를 때가 올 것입니다. 어쩌면 나를 불편하게 하는 바로 그 사람 때문에 나의 낡은 가죽부대가 수선되고 더 넓어지며 튼튼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세상이 악하기 때문일까요? 젊은이들이 세상에 물들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우리 교회가 젊은이들을 담기에는 생각이 너무 고루하고 완고하기 때문일까요? 낡은 가죽부대는 새로운 포도주를 담을 수 없다고 합니다. 젊은이들을 맞이하기 전에 저부터 젊은이들을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존중하려는 노력을 해 보고자 합니다. 교우 여러분들도 그렇게 마음을 모아 주신다면 우리 교회에도 젊은이들이 자리를 잡을 공간이 점점 넓어질 것입니다.
요새 젊은 여성들의 패션 중에 레깅스패션이 있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입을 수 있는 운동복이라는 의미로 ‘애슬레저(Athleisure = athletic + leisure) 룩’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복장에 대해서는 남성은 물론 여성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점점 많은 여성들이 이 복장을 착용합니다. 어떤 문화를 어떤 사회가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고 사회적인 논란도 불가피합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불쾌할 수도 있고 익숙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우리는 개인이 누리는 표현의 자유와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기준에 대하여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고민과 논의를 통해서 우리는 어쩌면 함께 성장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죽여야 한다고 판결을 내린 사람들이 반드시 악하기 때문에 그런 판결을 내렸을까요? 어쩌면 그들은 새로운 사상을 수용할 여유가 너무 적었던 것은 아닐까요?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종교적으로 열심을 가진 사람들이었고 율법에 충실하다는 평가와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죽인 판결을 내린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에 대하여 아쉬운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좀더 마음을 너그럽게 하여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그렇게 이상적인 것은 아닙니다.
2. 사람 앞에서 주님을 시인하고 부인하는 것
이제 건축자들로부터 버림을 받은 돌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는 왜 끝까지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았을까요? 어쩌면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는지도 모릅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마태복음 10:32~33
사람 앞에서 주님을 시인하는 것은 무엇이고 주님을 부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 주님이 주신 양심을 지키는 것은 주님을 시인하는 것이고, 양심을 저버리는 것은 주님을 부인하는 것 아닐까요? 사도 바울도 자신이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고 법정에서 말했습니다: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사도행전 23:1).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무엇이며 양심을 저버리는 것은 무엇일까요? 양심을 저버리는 것은 명백하게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과 반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나쁜 일인 줄 알면서도 돈이나 지위 때문에 입을 다물거나 거짓말을 하는 것은 양심을 저버리는 행위입니다. 더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서 시험장에서 부정행위를 하는 것이 양심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과도한 이윤을 위해서 상도를 저버리는 행위도 양심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길 때도 양심을 따를 수도 있고 양심을 저버리고 하나님을 섬길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을 섬기는 체하는 것입니다. 종교나 신앙을 이용하여 사적인 유익을 추구하려는 것입니다.
김재준 목사와 가까이 지낸 김경재 목사는 인터뷰에서 김재준 목사의 좌우명을 소개했습니다. 김재준 목사는 86세에 돌아가셨는데 죽기 전까지 10개의 좌우명을 가지고 사셨다고 합니다. 그 중에 하나는, ‘옳은 것은 옳다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말하자. 그 다음은 하나님께 맡겨드리자.’였다고 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안에 대하여 이런 결정을 하거나 저런 결정을 하게 되는데, 이런 결정을 하면 이런 어려움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저런 결정을 하면 저런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결정의 결과를 우리가 책임지려고 하기에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결정을 하는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김재준 목사님은 양심을 따라 결정하고 결과를 하나님께 맡겨드리는 것을 원칙으로 사셨다는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일이 나에게나 어떤 사람들에게 불이익을 가져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겠다는 믿음을 가진다면 우리는 조금 더 용기를 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결정이나 고백을 통해서 우리의 운명을 하나님의 손에 맡길 수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손에 자신의 운명을 맡긴 사람만이 양심적인 결정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사람을 제물로 받으셔서 새로운 일을 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교회가 세워지고 세상에 새로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자신이 건축자들로부터 버림을 받은 돌이 되었음을 알았을 때 그 사람의 심정은 어떨까요?
3. 모세와 엘리야에게서 배울 것
자신이 양심을 따라 발언을 하고 행동을 할지라도 사람들의 평가는 다를 수 있습니다. 어쩌면 다른 것이 당연하겠습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사는 것이니까요. 그럴 경우에 사람은 고민이 됩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요한복음 12:27
예수님도 마음이 괴롭다고 말씀하시고 하나님 아버지께 이 때를 면하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비난과 배척과 비방을 받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그런 일을 당하는 것은 정말 견디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 일을 위하여 자신이 왔다고 자신의 소명을 생각하셨습니다. 건축자들에게 버림을 받은 돌이라고 느낄 때 고민이 되겠지만 우리가 부름을 받은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를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되겠습니다. 애초에 우리는 왜 부르심을 받았으며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믿음과 신념이 있습니다. 저마다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가 있습니다. 그런 원칙과 신념 때문에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 견디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우리의 신념이 시험을 받게 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예수님도 늘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소중히 여기며 사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계속 살아야 할지를 결정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그것이 재판의 자리였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였습니다. 그 자리는 예수님의 일생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자리이며, 평생 무엇을 위하여 살아왔는지가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많은 반대자들을 극복하고 나서도 길은 계속됩니다. 그럴 때 사람은 한계 상황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 이전에는 전혀 생각해 볼 수 없었던 관점을 깊은 고민과 갈등의 자리에서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모세와 엘리야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두 사람 모두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반대자들을 이기고 그 소임을 감당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었고 엘리야는 우상숭배자들과 일전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지쳤습니다. 모세의 경우에는 재판을 혼자 처리하는 상황이었고 엘리야는 갈멜산의 일전 이후에 지쳐 있었습니다. 그때 모세는 그의 장인 이드로의 충고를 받아들여 재판을 혼자 처리하지 않고 십부장과 오십부장, 그리고 백부장과 천부장을 세워 백성의 재판을 관장하게 했습니다. 그 결과 모세는 더 효율적으로 백성을 인솔할 수 있었습니다(출애굽기 18장). 그리고 엘리야는 하나님의 산에서 기도하던 중에 새로운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뒤를 이어 일을 감당할 사람인 엘리사를 발견하는 일이었습니다(열왕기상 19:16).
세상이 정말 급변하고 있습니다. 그런 세상 속에서 여유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법을 익히는 것은 이제 지구인에게 필수적인 일이 되었습니다. 세계화는 이제 눈 앞에 이미 온 현실입니다. 이런 세상에 적응하면서 양심을 지키며 사는 일은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항상 우리의 앞에 모시고 자신의 운명을 주님께 맡기면서 살 것을 다짐한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결정은 하나님이 새 일을 이루시는 물꼬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가 우리가 지칠 때면 우리가 전에 볼 수 없었던 문을 열어 주시고 새로운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이런 소망을 가지고 주님을 바라보면서 살아봅시다.
신앙의 양심을 지키면서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며 살고자 노력하는 모든 분들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축복합니다.
<끝>.
[1]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요 1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