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두 정여창고택 자료
예부터 함양은 선비와 문인의 고장으로 이름나 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일두 정여창이다. 비록 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되고, 다시 1504년 갑자사화때 부관참시까지 당하는 고난을 겪은 인물이지만 성리학사에서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함께 5현으로 칭송되는 인물이다. 일두는 조선 시대 대표적인 도학자인 동시에 성리학자로 이기론, 심성론, 선악천리론 등의 사상을 기초로 소학과 가례의 실천적 효행에 모범을 보였으며, 특히 부모에 대한 효행을 삶의 근본으로 삼았다.
함양 개평한옥마을에 ‘일두 정여창’의 생가인 '정여창 고택' 또는 '일두 고택'이라 부르는 정여창 생가가 있다. '정여창 고택'은 1570년 정여창 생가 자리에 지어진 이후 후손들에 의해 여러 번 중건되었다. 현재 민속자료 제18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유적으로서의 명칭은 문화재 지정 당시의 건물주 이름인 '함양 정병옥 가옥'으로 되어 있다. '정여창 고택', '일두고택', '정병옥 가옥'은 모두 같은 곳이다.
개평한옥마을이 있는 지곡면에 들어서면 '함양일두고택'이라는 커다란 간판이 보이고, 그 아래로 '오담고택', '하동정씨고가', '노참판댁고가' 등 의 표시가 보인다. 고풍스러운 고택도 여러 채 있어 비교적 마을 규모가 큰 개평한옥마을은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배형상을 띄고 있는 마을 형태 때문에 우물을 만들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개울길을 따라 마을길에 들어서면 왼편으로 마을의 전설을 확인하게 해주는 종바위가 우물과 우울자리의 위치를 표시해주고 있는데, 마을에서는 다섯 개의 우물외에는 일절 우물을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실제로 일본 강점기때 이곳에 초등학교를 세우면서 새로 우물을 판 이후로 마을이 기울었다고 한다. 일만제곱미터의 넓다란 대지 위에 자리하고 있는 '일두고택'은 명당지로 소문나 있으며, 전형적인 경상도의 양반집 형태를 보여주고 있는데, 솟을대문을 비롯하여 행랑채, 사랑채, 안채, 곳간, 별당, 사당 등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이곳 '일두고택'은 TV드라마인 '토지'에서 최참판댁의 촬영 장소로 알려진 곳이다. 솟을대문에는 다섯 명의 효자와 충신을 배출했음을 알리는 5개의 '정려'를 게시한 문패가 걸려 있고, 솟을대문을 지나 바로 정면에 보이는 사랑채에는 흥선대원군이 썼다고 하는 '충효절의'와 김정희의 글씨라고 하는 '백세청풍'이라는 커다란 글씨가 걸려 있으나 고증은 안 된 상태이다.
사랑채에서 일각문을 지나 안채로 들어가면 안채의 대청마루 뒤로 사당 건물을 볼 수 있다. 안채 뒤편으로 사당 외에 별당과, 안사랑채가 따로 있다.
정여창 고택
정부의 공식 지정 명칭은 문화재 지정 당시의 건물주 이름인 '함양 정병옥 가옥'이지만 하동 정씨 대종가, 정여창 고택, 일두고택, 정병옥 가옥 모두 같은 곳이다. 함양은 선비와 문인의 고장으로 이름나 있으며 대표적인 인물이 일두 정여창이다. 조선조 5현이자 동국 18현으로 성균관을 비롯한 전국 234개 향교, 9개의 서원에서 모시는 성리학의 대가다
고택은 1570년 정여창 생가 자리에 지어진 이후 후손들에 의해 여러 번 중건되었다. 풍수에서는 대문을 기의 출입구로 여겼으므로 건물에서 대문의 방위가 어디에 있는가를 대단히 중요시했다. 솟을대문 주위의 담장은 대문과 함께 사신사 역할을 한다. 이처럼 살림집을 풍수로 풀 때 집의 주된 건물은 혈, 마당은 명당이 된다.
솟을대문 앞에는 하마비가 자리해 주인의 명망을 알리고 있다. 일반적으로 솟을대문에는 벽사의 의미가 있는 호랑이 뼈나 가시가 많은 오가피나무 등이 걸려 있는데, 이곳에는 나라에서 내린 정려 패인 효자문 문패가 다섯 개 걸려 있다. 정려문을 통해 마당에 들어서면 정면으로 안채로 가는 일각문이, 오른편으로 넓은 사랑 마당에 잘 다듬은 디딤돌과 소맷돌을 갖춘 사랑이 보인다. 비교적 높은 축대 위에는 사랑채가 있고, 안사랑채로 이어지는 쪽담 아래에는 두 그루의 구불거리는 노송이 사랑채 누마루에 기대 있다.
사랑채 방문 위에 천장까지 닿도록, 소위 대문짝만하게 써놓은 '충효절의(忠孝節義)', '백세청풍(百世淸風)'이라는 글씨가 집안의 분위기를 압도한다. '충효절의'는 흥선대원군이 썼고, '백세청풍'은 김정희의 글씨라고 하나 고증은 안 된 상태다. 대문채는 쪽마루를 두어 좌우 두 칸씩 네 칸의 방을 꾸미고 왼쪽 끝에 사랑 측간을 만들어 놓았다.
사랑채 계단에 올라서면 디딤돌인 섬돌로 기둥과 기둥 사이에 꽉 맞게 잘 다듬은 장대석을 2단으로 쌓은 모습이 보인다. 신을 벗고 드나들기 편하게 널찍한 디딤돌을 만든 것이다. 기단이 높아 건물이 높게 들려 있는 듯하므로 마루 아래를 널로 막아 보이지 않게 했다. 사랑방 후면에 붙어 있는 마루방은 사랑방과 미닫이로 연결되어 있다. 안채로 통하는 마루는 청판을 이용한 장마루 형식으로, 대청에 사용하는 우물마루와는 다르다.
사랑채는 ㄱ자형에 정면 다섯 칸, 측면 두 칸 크기로 동쪽에 누마루를 꾸며 놓았다. 안채로 들어가는 일각문과 중문 아래채가 나란히 一자형으로 결합된 형태다. 전후퇴를 넓게 만든 사랑방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두 개의 건넌방과 누마루를 내어 달았다. 중문 아래채와 연결되는 오른편에는 두 칸의 대청마루를 만들고 툇마루를 꾸몄는데, 이 집의 특별한 마루 형식이다. 뜨거운 여름, 툇마루와 연결되는 사분합을 들어 처마에 걸면 네 칸 크기의 커다란 대청마루로 변신한다.
반갓집답게 사랑방은 겹집 평면으로 고방을 붙여 서재로 사용했다. 안채 쪽으로 커다란 광창을 만들고 창호지를 발라 햇살이 방 안으로 들어온다. 막쌓기를 한 기단 위에 소맷돌을 갖춘 돌계단에 올라서면 자연석 주춧돌을 사용해 원기둥을 세운 겹처마 팔작지붕인 5량 집이 드러난다. 겹처마는 네모나게 각진 부연을 사용했다. 이 부재를 대면 처마가 길어지고 처마 끝이 약간 솟아나 날렵하고 고풍스러운 느낌을 준다.
사랑채도 정여창 고택의 위세를 한껏 보여주지만, 더욱 유명세를 타는 것은 사랑채 앞에 조성된 석가산이다. 이는 자연석을 이용해 삼봉형 주산을 높게 만들고, 좌우에 주산보다 낮은 각각의 높이로 봉우리를 만든 후 산봉 아래 깊은 석곡을 만들어 매화 등을 심은 조원이다. 풍수적인 비보로 쌓는 조산과 다른 점은 규모가 훨씬 작고 관념적이라는 것이다. 아담한 규모이지만 산과 바위, 물과 나무가 모두 들어 있다. 동양 전통의 신선 사상을 조형물로 나타낸 것으로 정여창 고택은 비교적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고 추정한다. 석가산은 중국에서는 송나라 때 생겼으며, 한국에서는 백제와 신라 때 활발했고, 일본은 백제에서 전수받아 정원의 골격을 이루는 요소로 자리 잡았다.
특이한 것은 조원은 대체로 후원에 두는데 이곳에서는 사랑 마당 담장 옆에 조성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석가산은 사랑채의 누마루에서 잘 보인다. 안채와 사랑채가 각각 남서향과 동남향으로 방향을 달리하는데 바깥의 풍경을 석가산을 통해 빌린 것이라는 설명도 있다.
사랑채 옆 곳간채의 중간에 세워진 일각문을 거쳐 안채 영역으로 들어가는데, 일각문에 들어서면 또 한 번 중문을 통과해야 한다. 남향한 一자형 안채는 경북 지방의 폐쇄적인 공간과는 달리 아래채와 곳간채, 사랑채가 일정한 여백을 두고 개방적으로 분할되어 있다. 일각문을 지나 사랑채 끝에 연결된 중문 아래채의 왼쪽으로 네 칸짜리 판자벽으로 만들어진 안곳간채가 나온다. 안채의 오른쪽으로는 안사랑채가 있고, 안채 뒤편에는 별도의 담장으로 구획된 겹처마에 단청이 화려한 세 칸짜리 사당이 있다. 사당 옆에는 다섯 칸에 두 칸 크기의 큰 곳간채가 있다.
사당이 안채 뒤쪽에 있는 것이 이색적인데, 하동 정씨의 대종가이므로 수많은 제사를 원활하게 준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주자가례』에 "집을 지을 때 다른 것보다 사당을 먼저 건립하고 위치는 정침의 동쪽으로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는데도, 조선 전체를 통해 명가 중의 명가라고 불리는 하동 정씨의 자택에서 변화를 꾀한 것이다. 살아가는 데 실리적인 면을 무시할 수 없음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안채 대청마루에는 정여창 고택에 내려오는 전설이 있다. 선비 집안이니 가세가 청빈할 수밖에 없으므로 주인은 가마니를 짜는 등 손수 일을 했다. 작업하는 동안 조명 삼아 관솔불을 지펴놓았는데 관솔이 힘차게 타오르니 받침돌이 뜨거워질 수밖에 없었다. 뜨거워진 돌은 마루의 장귀틀을 꽈배기처럼 뒤틀리게 했는데, 장귀틀이 그렇게 된 뒤부터 재산이 불 번지듯 불어났다고 한다. 이는 부지런한 자가 누린 재복이라고 풀이되며, 후손들은 선조들이 노력한 흔적을 두고두고 알려주기 위해 뒤틀린 귀틀을 갈아 끼우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정여창 고택에는 또 다른 전설이 있다. 매우 가난했던 시절 안주인이 밭에 나갔다가 돌아오는데 뱀 한 마리가 머리를 꼿꼿이 치켜들고 길을 앞질러 갔다. 마치 길을 안내하는 듯이 한참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는데 뱀이 찾아간 집이 바로 자기 집이었다. 안주인은 뱀을 행주치마에 싸 성주님으로 모시도록 항아리를 마련했다. 지금도 곳간 깊은 곳에 은밀하게 모셔 놓은 성주 단지가 있다고 한다.
안채 서쪽 끝에는 부엌이 있는데, 부엌이야말로 주택에서 둘도 없이 중요한 공간이다. 『임원경제지』에서는 부엌을 우주의 원리로 해석했다.
"길이는 일곱 자 아홉 자로 하니 위로는 북두칠성을 본뜨고, 아래로는 구주(九州)에 대응함이요, 너비는 넉 자이니 사시(四時)를 본뜬 것이요, 높이는 석 자이니 삼재(三才)를 본뜬 것이다. 아궁이의 폭은 한 자 두 치이니 열두 시를 본뜬 것이요, 두 개의 솥을 앉힌 것은 해와 달을 본뜬 것이요, 부엌 고래가 여덟 치인 것은 팔풍(八風)을 본뜬 것이다."
이 집의 안채도 이 규칙을 최대한 따르고 있다. 부엌의 상부에는 안방에서 사용하는 커다란 다락을 두었고, 툇마루 끝의 부엌 옆에는 미닫이 창살이 정교하고 세련된 마루 벽장이 있다. 부엌 북쪽에 있는 미닫이 광창이 부엌을 밝게 해준다.
정여창 고택을 정리하면 안채와 아래채, 사랑채와 곳간채 등 독립된 채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폐쇄된 ㅁ자형의 모습을 보인다. 그중 놀라운 것은 곳간채가 10칸이나 된다는 사실이다. 워낙 큰 저택이므로 채 또는 담장으로 분할된 독립적인 영역도 8개나 된다. 사랑 마당, 안사랑 마당, 사랑 마당에서 안마당으로의 이동 공간, 안마당, 안사랑 마당에서 안마당으로의 이동 공간, 바깥 곳간채와 안 곳간채의 작업 공간, 사당 영역 등이다.
사당은 겹처마에 금색의 화려한 단청을 하고 있으며 이익공 공포로 꾸몄고, 위에는 패랭이꽃을 그린 화반을 꾸며 아름답게 치장했다. 유교 사상이 뿌리 깊은 조선에서 일반적으로 사당은 치장하지 않았지만 특별한 경우 단청과 공포를 꾸미도록 허락했다. 법도가 철저했던 조선에서도 예외를 두었던 사회상을 엿볼 수 있으며, 당대의 최고 가문에서 훌륭한 선조를 모시기 위해 최선을 다한 모습으로 볼 수 있다. 대부분은 반 칸의 퇴를 두고 삼문을 만든 후 위패를 모시는데 여기에서는 툇마루를 깔아 신을 벗게 했다.
건축 전문가들은 이 집이 조선 중기 사대부 살림집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평가한다. 드라마 〈토지〉의 최참판댁은 이곳을 배경으로 촬영했고, 〈다모〉에서는 어린 채옥의 생가로 활용해 명성을 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