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자
양상태
제2의 고향. 군산에는 적산가옥이 많았었다. 그러나 우리는 1960년대 지은 후생주택에서 살았다. 비가 오면 기왓장이 흘러내려 틈 사이로 비가 스며들어 방안 천정에는 얼룩 지도가 서생원이 그린 그림과 어울려 있었다. 해초를 달인 물과 석회를 섞어 기와 사이를 고정하는데 세월의 흐름에 따라 부석부석 해져 기와가 흘러내렸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방과 후 집에 오니 낯선 여자아이가 눈을 똥그랗게 뜨고 바라보았다. 고향의 먼 친척 벌 되는 아저씨가 아이와 함께 와서 우리 집에서 데리고 있었으면 했다. 마침, 우리 집 가사를 도와주던 ‘선희’ 누나가 자기네 집으로 가고 없어 같이 지내기로 하였다. 키는 작았지만, 거무숙숙한 피부와 긴 속눈썹에 크고 까만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금 새 오빠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붙임성이 좋아 보였다.
당시 우리 집에서는 검은 털에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개를 기르고 있었다. 이름은 ‘베스’였고 잡종 개였다. 힘이 얼마나 센지 제집을 질질 끌고 다닐 정도였다. 근처 ‘대동강’이라는 대폿집에서 연탄불에 굽는 돼지갈비 냄새가 코를 진동하면 어쩔 줄을 몰라 날뛰기도 했다. 아버지께서 퇴근하시면서 약주 한잔하시고 남은 갈비뼈를 가져다주기를 기다리고 기다리던 녀석이었다.
거의 하루를 집에만 틀어박혀 살던 영자의 유일한 친구는 ‘베스’였다. 베스는 밥을 챙겨주는 영자를 매우 잘 따랐다. "베스야, 베스야” 노래하며 같이 놀던 영자가 눈에 밟혀 아직도 지워지지 않고 있다.
오후가 되면, 어머니께서는 꼭 시장에 가셨다. 할 일이 별로 없는 영자는 어머니를 재촉하여 시장을 따라다녔다. “넘 들이 좋은 거 싹 다 사가 버링께, 얼릉 가장께요” 하면서 장바구니를 들고 항상 앞장을 섰다. “시장에 가서도 얼마나 야무진지 몰라, 돼지고기를 살 때 비곗덩어리 하나라도 더 달라고 한다”라며 어머니께서는 늘 영자를 칭찬하셨다.
비가 오고 지붕에서 물이 새면 “지가 올라갈 께라우” 하면서 빨랫방망이를 들고서 담을 타고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쳐올렸다. 그 어린 나이에 창피함도 무릅쓰고 막냇동생 점심을 싸서 교실에까지 가져다주는 정성이야말로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다양한 음식을 접해 보지 않았을 영자는 음식 솜씨가 뛰어나 한 번만 가르쳐 주면 그대로 척척 요리를 해냈다. 어느 날, 어머니께서 마실 을 다녀오니까 가르쳐 주지도 않은 육개장을 맛깔스레 끓여 놓아서 우리 가족들은 맛있게 먹기도 하였다.
시장을 다니면서 사귀게 된 ‘명숙’이네 집 ‘봉남’ 이와 영자는, 나의 짝사랑 명숙이에게 쪽지를 전달해 주는 전령사였다. 예비고사 때는 연필과 지우개 그리고 깨엿과 찹쌀떡을 받아 주기까지 하였다.
하늘이 온갖 인상을 쓰고 있던 어느 날, 영자를 데리고 온 아저씨가 와서 서울로 영자를 데리고 갈 때는 뒤 돌아보며 눈물을 글썽거리며 가지 않으려고 했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지금은 어느 하늘 아래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부지런하고 똑똑해서 잘살고 있을 것이라 빌어 본다. 나이도 예순이 훌쩍 넘었을 지금. 우연을 핑계로 삼지 않더라도 언제 어느 곳에서라도 보고 싶다. 아기자기하고 행복이 넘치는 가정을 이루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