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2022년 7월 27일 수요예배 설교)
성경 : 시편 74:1-23(구약 855)
간절 기도의 법칙
우리 몸의 여러 장기 중에 ‘감정’에 따라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장기가 간(肝)입니다. 간은 콩알만 해지기도 하고, 간은 배 밖으로 나오기도 하고, 간땡이가 퉁퉁 붓기도 하고, 애간장이 녹기도 하고, 그리고 간이 두 조각으로 쫙 쪼개지는 것을 ‘간절’이라 합니다.
기도 응답과 불답의 차이는 간절함의 차이입니다.
1. 정말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 응답에 필요한 어떤 일을 뒤로 미루지 않습니다. 당장! 그것도 신속하게 합니다. 나중으로 미룬다는 것은 간절함이 없는 것입니다. 간절하면 내일이 없습니다.
2. 정말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은 뒤로 물러서지 않습니다. 물러설 데가 있다면 그것은 간절한 것이 아닙니다. 타고 온 배를 가라앉히고 사용하던 솥을 깨뜨리는 불퇴전의 각오로 기도합니다.
3. 정말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은 그 일을 자기 일로 생각합니다. 남의 일로 생각하면 절대 간절함이 생기지 않습니다. 자기 일이어야 욕심이 생기고, 욕심이 생겨야 잠재역량까지 끄집어낼 수 있습니다.
4. 정말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은 새롭게 변하려고 합니다. 현실에 안주하려고 하는 것은 간절하지 않은 것입니다.
5. 정말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은 몰입합니다. 결코 건성으로 대충하지 않습니다. 하루 종일 생각하고, 자면서도 고민하고, 하룻밤에도 검은 머리가 백발이 될 정도로 그 일에 몰입합니다.
6. 정말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은 그 일에 집중합니다. 오목렌즈로 한 곳에 빛을 모으면 그곳에 불이 붙는 것과 같이 간절함은 집중력입니다. 정말 간절히 기도했는데도 응답이 안 된다면 그건 기적이죠.
시편 74편은 아삽의 마스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삽은 다윗 시대의 성가대 악장이었는데 일반적으로 아삽의 시라고 하면 다윗 시대의 아삽만이 아니라 아삽의 후손들을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오늘 본문은 시대적으로는 다윗 시대보다 훨씬 뒤에 아삽의 후손 들 중 어떤 사람이 이 시를 지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아삽의 후손들은 이사야 시대를 거쳐서 포로 귀환 이후에 에스라 느헤미야 시대까지도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 것으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시는 남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 당하던 상황에서 지은 시인 것으로 보입니다.
예루살렘에 무너지고 성전이 파괴되고 유대인들이 포로로 잡혀가는 비참한 상황을 보면서 시인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신다고 선포하면서 노래한 것으로 당시 유대인들에게 희망을 노래한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남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 당하는 것은 철저한 멸망이었습니다. 철저한 멸망의 상황을 바라보면서 아삽의 후손 가운데 한 사람이 오늘 본문의 시편을 지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완전히 멸망 당하는 비참한 상황에서도 시인은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1. 고난 속에서 탄식
오늘 본문은 깊은 절망 속에서 탄식하는 소리로 시작을 합니다. 본문에 표현된 시인의 고난 속에서의 탄식하는 상황을 보면
성전이 파괴되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가장 절망적인 상황은 성전이 파괴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은 절대로 파괴되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임재 하시는 곳이고 하나님께서 만나주시는 곳이기 때문에 성전이 파괴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렇게 믿었던 성전이 파괴되는 것을 직접 보았습니다.
1-3절을 보면
74:1 “하나님이여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나이까 어찌하여 주께서 기르시는 양을 향하여 진노의 연기를 뿜으시나이까”
74:2 “옛적부터 얻으시고 속량하사 주의 기업의 지파로 삼으신 주의 회중을 기억하시며 주께서 계시던 시온 산도 생각하소서”
74:3 “영구히 파멸된 곳을 향하여 주의 발을 옮겨 놓으소서 원수가 성소에서 모든 악을 행하였나이다.”
시인은 성전이 파괴되는 것을 보면서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셨기 때문이라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셨기 때문에 성전이 파괴되는 것이고 원수들이 모든 악을 행하는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성전을 파괴하도록 허락하셨을까요? 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성전이 파괴된 다음에 유대인들은 법궤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했을 때 법궤는 그 성전에 없었습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바벨론에 의해서 성전이 파괴된 이후로 성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외형적인 성전은 있지만 가장 중요한 법궤가 없는 성전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이 파괴되도록 방치하신 것은 너무 익숙하기 때문에 형식적인 되어 버린 성전 예배를 깨뜨리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전통에 따라서 익숙한 성전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들이 드리는 성전 예배는 전통에 따라서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영적 감동도 없고 예배에 대한 감격도 없는 형식적으로 예배였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완전히 깨뜨리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예루살렘 성전 예배와 같은 오랫동안 익숙해져 있는 형식적인 예배를 깨뜨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성전을 무너지게 하신 다음 복음을 주셨고 성령을 주셔서 성전이 아닌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익숙해져서 감격도 없는 성전 예배를 깨뜨려야 합니다. 오순절 성령 충만을 받은 초대 교회처럼 성령 충만한 교회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깃발을 세웠습니다. 4-8절까지를 보면
74:4 “주의 대적이 주의 회중 가운데에서 떠들며 자기들의 깃발을 세워 표적으로 삼았으니”
74:5 “그들은 마치 도끼를 들어 삼림을 베는 사람 같으니이다.”
74:6 “이제 그들이 도끼와 철퇴로 성소의 모든 조각품을 쳐서 부수고”
74:7 “주의 성소를 불사르며 주의 이름이 계신 곳을 더럽혀 땅에 엎었나이다.”
74:8 “그들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우리가 그들을 진멸하자 하고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회당을 불살랐나이다.”
시인이 살았던 그 시대에 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이렇게 철저하게 무너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무너지게 허락하시고 그곳에 대적의 깃발을 꽂게 하신 것은 독선적인 선민사상을 깨뜨리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은 어떻게 해도 하나님이 절대로 버리지 않는다는 잘못된 선민사상에 젖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바벨론의 깃발이 걸리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선민도 버림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나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이라는 선민의식에 빠져서 영적으로 나태해지고 게을러지기 쉽습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에 바벨론의 깃발을 꽂게 하십니다. 나는 선택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선민의식에 빠져서 영적으로 게으르고 나태해지면 그때 원수의 깃발이 꽂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9-10절을 보면
74:9 “우리의 표적은 보이지 아니하며 선지자도 더 이상 없으며 이런 일이 얼마나 오랠는지 우리 중에 아는 자도 없나이다.”
74:10 “하나님이여 대적이 언제까지 비방하겠으며 원수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능욕하리이까”
시인은 예루살렘이 멸망 당하고 성전이 파괴되는 이런 고난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침묵하시고 계신다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표적이 보이지 않고 선지자도 더 이상 없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침묵하시고 계신다는 뜻이고 하나님의 침묵은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는 절망적인 상황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에게 침묵하십니다. 기적도 나타나지 않고 말씀을 들어도 깨달아지지 않고 기도를 해도 응답이 없는 것 같이 느껴지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침묵하시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새로운 준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장 유대인들에게는 침묵하신 것 같지만 새로운 일을 준비하셔서 유대인들에게 그 길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실 때가 있지만 역사를 멈추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가운데서도 새 일을 준비하십니다.
2. 구원자 이신 하나님
시인은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성전이 파괴되는 상황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침묵하신다고 탄식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시인은 다시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가 바라본 하나님은 구원자이십니다. 비록 모든 것이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하나님은 구원자로 임하셨고 언제나 구원의 하나님으로 역사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의 눈에 보이는 절망보다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영안이 열린 것입니다. 구원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시인의 고백을 보면
품에서 오른손을 꺼내시는 하나님, 11절을 보면 “주께서 어찌하여 주의 손 곧 주의 오른손을 거두시나이까 주의 품에서 손을 빼내시어 그들을 멸하소서”
성경에서 오른손은 능력의 손입니다. 예루살렘이 멸망 당하고 성전이 파괴되는 이런 상황이 온 것은 하나님께서 오른손을 거두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의 오른손을 거두셨기 때문에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성전이 파괴되고 포로가 되는 상황이 온 것인데 하나님께서 품에 넣었던 오른손을 꺼내셔서 대적들을 멸하실 것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비록 지금 우리가 어려움에 처해 있지만 구원자이신 하나님께서 그 손을 품에서 빼내시면 다시 능력의 오른손으로 우리를 지켜주실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하는 성도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품 안에서 오른손을 빼셔서 능력의 오른손으로 붙잡아 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것을 보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십니다. 13-17절까지를 보면
74:13 “주께서 주의 능력으로 바다를 나누시고 물 가운데 용들의 머리를 깨뜨리셨으며”
74:14 “리워야단의 머리를 부수시고 그것을 사막에 사는 자에게 음식물로 주셨으며”
74:15 “주께서 바위를 쪼개어 큰물을 내시며 주께서 늘 흐르는 강들을 마르게 하셨나이다.”
74:16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마련하셨으며”
74:17 “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
여기서 시인은 하나님은 만물의 주인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하신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지금 고난의 세월을 보내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만물의 주인이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만물을 움직이시기 때문에 마침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우리에게 반드시 임하게 된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모든 것을 마음대로 움직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시인은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바벨론보다 크신 하나님이시고 바벨론도 하나님의 뜻대로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절망과 고난의 상황에서 탄식하던 시인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생각하면서 또한 모든 만물을 하나님의 의지대로 움직인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힘을 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어려움에 처하게 되더라도 하나님께서 만물의 주인이라는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위대하시고 우리 하나님은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의지와 뜻대로 하십니다.
시인은 계속해서 나의 왕이시며 구원자이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12절을 보면 “하나님은 예로부터 나의 왕이시라 사람에게 구원을 베푸셨나이다.”
시인은 예로부터 하나님께서 나의 왕이라고 고백하는데 여기서 왕이란 말은 그의 백성들을 보호하고 지키는 왕이라는 개념입니다. 시인은 지금 나라가 멸망해 가고 있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나를 지키시고 구원하시는 왕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언제나 우리를 그 능력의 오른손으로 지키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고 구원하시는 왕이십니다.
여기서 인간에게 구원을 베푸신다는 말은 ‘세상 가운데서 구원하신다.’,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서 구원하신다.’ 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왕으로 나를 보호하시는 분이시고 또한 세상 가운데서 나를 건져주시고 구원하시는 왕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왕이십니다. 사람들이 보는데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고난 속에서 드리는 기도
시인은 우리에게 임한 고난은 반드시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있다고 믿으면서 나의 왕이신 구원의 하나님께서 품 안에서 오른손을 꺼내셔서 마침내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라고 노래하면서 하나님은 만물의 주인이시기에 그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선포했습니다.
이어서 시인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전심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시인의 기도의 내용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길 기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시인은 직접적으로 그렇게 언급한 것은 아니지만 바벨론에 의해서 하나님의 이름의 능욕을 받는 현실에 대해서 안타까워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능욕하는 자들의 멸망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18절을 보면 “여호와여 이것을 기억하소서 원수가 주를 비방하며 우매한 백성이 주의 이름을 능욕하였나이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찬양을 하는 아삽의 후손으로서 성전이 파괴되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아픈데 하나님을 비방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능욕하는 것을 보면서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시인은 하나님의 이름을 능욕하는 자들을 심판하셔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길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찬송이 회복되기를 기도했습니다. 21절을 보면 “학대 받은 자가 부끄러이 돌아가게 하지 마시고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가 주의 이름을 찬송하게 하소서”
여기서 학대받는 자와 가난한 자, 궁핍한 자는 모두 바벨론에 의해서 고통당하는 유대 공동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침공과 약탈로 인해서 학대받는 자가 되었고, 모든 것을 빼앗겨서 가난하고 궁핍한 자가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학대받고 가난하고 궁핍한 이 민족이 다시 기쁨의 찬양을 회복하게 하옵소서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찬양이 회복되게 해 달라는 간구는 구원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구절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할 것은 나의 찬송을 온전히 회복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살기 좋은 세상에서 너무나 편하기 때문에 세상의 즐거움 때문에 나의 찬송이 형식적이고 열정이 없는 노래가 되어 있지는 않은지 우리의 영적 찬양이 회복되고 우리의 중심을 다하는 간절한 찬양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원통함을 푸시기를 기도했습니다. 22-23절을 보면
74:22 “하나님이여 일어나 주의 원통함을 푸시고 우매한 자가 종일 주를 비방하는 것을 기억하소서”
74:23 “주의 대적들의 소리를 잊지 마소서 일어나 주께 항거하는 자의 떠드는 소리가 항상 주께 상달되나이다.”
시인은 하나님을 비방하는 자들을 보시고 일어나셔서 원통함을 푸시고 주의 대적들이 하는 소리를 잊지 마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도 이런 소리 즉 하나님을 비방하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비방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능욕하는 자들이 멸망을 당하게 됨으로 하나님의 원통함을 풀게 될 것입니다. 주의 원통함은 주의 백성들의 원통함이란 의미와 함께 주의 백성들이 고난을 당함으로 하나님을 조롱하는 소리로 인한 원통이란 의미가 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에는 부활의 은총이 있습니다. 바벨론에 의해 멸망 당하는 고난 뒤에는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직장에서 사회에서 고난당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놀라운 섭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의지하고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길 위해서 우리의 찬양이 회복되기를 위해서 기도하는 시간이 되고 기도를 통해서 영이 회복되고 온전한 찬양과 예배가 회복되고 삶이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