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금강경은 140쪽 제7분(第七分) 무득무설분(無得無設分)입니다.
여러분은 그냥 가만히 계시고 저 혼자 읽겠습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느냐?
여래가 설한 바 법이 있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제가 부처님 말씀을 이해하기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할만한 정해진 법이 없으며,
또한 여래께서 설하셨다고 할 고정된 법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설하신 법은 다 취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으며,
법도 아니며 법 아님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까닭은 모든 현인과 성인은 무위법으로써 차별을 두기 때문입니다.
‘무득무설(無得無設)’이라는 게 말 그대로 ‘얻을 것도 없고 설할 것도 없다’ 하는 의미를 가집니다.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즉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이라고 하는 ‘최상의 깨달음’을 얘기하죠. 최상의 깨달음을 얻었느냐? 여래가 또 설한 바 법이 있느냐? 여래가 부처님께서 ‘최상의 깨달음’을 얻어서 그 깨달음을 중생에게 설해주었느냐?”
하고 물은 겁니다.
그랬더니 수보리가
“제가 부처님 말씀을 이해하기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할만한 정해진 법이 없으며, 또한 여래께서 설하셨다고 할 고정된 법도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최상의 깨달음’을 얻으셨는데
‘최상의 깨달음’이라고 할 만한 정해진 법이 없다.
설해야 할 고정된 법도 없다.
이게 왜 그럴까요?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셨고
‘최상의 깨달음’을 얻으셔서 그것을 가지고 중생들에게 법을 설하셨다.
이렇게 생각을 하지만 이 얘기는 그야말로 아주 본질적인 이야기인데요.
좀 쉽게, 어렵게 얘기하면 여러분이 이해가 좀 어려우실텐데
좀 쉽게 설명을 먼저 드려 보면
우리가 공연하게 붙잡아서 문제를 만들어 내지 않으면 그 문제를 해결해야 될 필요도 없겠죠.
그런데 공연하게 붙잡아서 문제를 만든 사람에게는 그 사람의 문제를 풀어줘야 되는 겁니다.
부처님의 자비로써
그런데 그 문제를 풀어주려 하니까
그 사람에게 이러이러한 얘기를 해줘서 풀어준단 말이에요.
옛날에 어떤 분이 매일 같이 절에 와서 108배 200배를 하다가 어느 날은 천배를 하고 열심히 기도를 해요. 젊은 사람이었는데.
그래서 나중에 왜 그러냐고 물어봤더니
사랑하는 여인과 깊이 사랑에 빠졌었는데
너무 충격적인 이별을 하고
너무 괴로워서 그 마음을 이길 방법이 없어 가지고
혼자서 있으니까 도저히 방법이 없더라는 거에요.
그래서 절에 와서 절을 좀 하면
부처님께 절을 하면 좀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부처님께 계속 절을 하고 불교 책을 사다 많이 읽고
와서 법문을 듣고 그러다 보니까 혼자서 이겨내려고 애쓸때보단
훨씬 마음이 편안해 지더라는 거에요.
그러다가 법문도 듣고 불교 공부도 하다보니까
내가 만들어 낸 집착이구나 하는 걸 알게 되고
나중에는 시간이 지나면서 집착을 내려 놓을수도 있는 것이구나 하고 집착을 내려 놓으니까
나중에 와서는 얼굴이 환해졌어요.
이제는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 같고 이제 새롭게 시작을 할 수도 있을 거 같다.
하면서 이제 제자리를 찾았습니다.
이게 중요한 얘기입니다.
이제 제자리를 찾은 거에요.
그전에 아무 문제가 없었어요.
평범한 삶을 살다가 갑자기 누군가가 사랑하는 사람이 눈에 들어와서 불꽃 튀기는 사랑을 했습니다.
마음이 이렇게 좋아져서 너무 행복감을 느끼며 살았어요.
그러다가 이 여인이 헤어지자고 하니까 갑자기 툭 떨어져 가지고 저 밑에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하고 절 수행도 하고 경전도 공부하고
법문도 듣고 그러면서 다시 제 자리를 찾았단 말입니다.
다시 제 자리를 찾았어요.
그런데 이 사람은 이렇게 가다가 올라갔다가 내려왔다가 다시 제 자리를 찾았어요
그런데 원래부터 제 자리에 있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이 사람이 수행을 잘 하는 사람입니까?
공연히 지 혼자 문제를 만들었다가 지 혼자 다시 제 자리를 찾아 놓고
부처님 법 때문에 제 자리를 찾아서
역시 부처님 법은 훌륭하시다.
부처님 법 때문에 내가 행복해졌다.
그렇게 얘기할 수 있겠지만
처음부터 일이 없던 사람에 비하면
애초에 일이 없던 사람에 비한다면
공연히 혼자서 문제를 만들어 내고 답을 찾으려 애쓰고
그래서 겨우 답을 찾았단 말입니다.
절에선 그런 얘기가 있습니다.
하한도인이라고 해 가지고 한가한, 일 없는 도인
공연히 일을 만들어 냈다가 제 자리를 찾는 것이나
본래부터 제 자리에 있던 사람이나
그럼 이렇게 사랑도 할 필요 없고 실패할 필요도 없느냐?
그게 아니다.
이렇게 이 파동을, 다양한 파동을 겪기 위해서 이 생에 온 겁니다.
그러한 다양한 파동을 겪음으로써 깨달을 수 있는 것들이 있기 때문에
그냥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한번 휘청거리는 파동을 겪음으로써
또 다른 깨달을 수 있는 것들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도 물론 우리에게 온 겁니다.
우리는 공연히 일이 없었던 사람도 아름답고
이를 만들어 냈다가 다시 제 자리를 찾은 사람도 아름답습니다.
즉 여러분들은 낱낱이 모든 사람들이 전부 다 아름답다.
죄가 있는 사람도 죄가 없는 사람도
잘못을 한 사람도 잘한 사람도
실수를 과거에 했던 사람도 하지 않은 사람도
옛날에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사람도 상처를 주지 않은 사람도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아본 사람도 받아 보지 않은 사람도
누구를 힘들게 한 사람도 힘듦을 당해 본 사람도
저마다 사실은 그 사람을 깨닫기 위한 완전한 일들이
그 사람을 돕기 위한 완전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을 뿐인 거에요.
그런데 우리는 거기에 그렇게 느끼지 못하고
그 사람을 원망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원한을 품고 그럼으로써
이것을 다음 생까지 다음까지 계속 끌고 간단 말이죠.
그렇게 끌고 가는 것이 문제이지
우리 앞에 벌어지는 상 그 자체는 아무런 하등 문제 될 것이 없다.
부처님께서
이게 아주 중요한 얘기입니다.
본래 이런 법이 이렇기 때문에
최상의 깨달음도 없고 설해야 할 법도 없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법을 굳이 설하지 않아도 됐다.
범천이 번천하니까(?)
‘그래, 이렇게 환상 속에서 괴로워하는 것도 그것 또한 괴로움이라면 그걸 내가 없애주자’
하고 법을 설하신 겁니다.
정상을 올라가야 되는데
동쪽에서 서쪽으로 막 이렇게 가야지만 올라갈 수 있잖습니까?
그럼 서쪽으로 가야 된다 라고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얘기를 해야 되잖아요.
정상에 가려면 진리에 도달하려면
서쪽에 있는 사람에게도 서쪽으로 가야 한다.
그럼 그 사람은 더 멀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럼 그 사람에게는 그 말이 진리가 아닌 거에요.
부처님께서 말하신 것은 말 자체에 진리가 없습니다.
입을 벌려 말하기 시작하면 방편일 뿐이지
부처님 팔만사천의 법문이 전부 다 방편입니다.
그 말에 끄달려 가지고 ‘그것만이 전부 다’ 라고 생각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다.
서양의 기독교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문자주의라고 해 가지고 문자 그 자체에 절대적인 진리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단 말이죠.
그것은 잘 못 됐다.
불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자 그대로 진리다’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어리석은 것일 뿐이다.
모든 것은 방편입니다.
공에 치우쳐 있는 사람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공허한 것이다. 텅 비었다.’
여기에 집착하는 사람은
‘왜 그게 없느냐? 불성이 있지 않느냐? 참나가 있다’
이렇게 방편으로 얘기하는 것이고
‘참나가 있다’, ‘주인공이 있다’ 에 너무 집착하는 사람에게는
‘그런 게 어디 있느냐? 그런 게 없다.
다 공한 것이고 무아인 것이고 참나라고 하는 것도 없다’
라고 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그럼 참나가 진짜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다고 해도 옳지 않고 없다고 해도 옳지 않다.
치우쳐 있는 사람에게만 필요한 겁니다. 법은.
집착해 있고 치우쳐 있고 머물러 있는 그래서 스스로 그것 때문에
내 스스로 내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치우침과 집착 때문에
스스로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에게만
그 집착을 놓아주게 하기 위한 방편의 진리가 필요한 거에요.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이 좌선을 하고 있는 순간에 생각이 탁 멎었어요.
생각이 탁 멎고 지금 이 순간 아무 생각과 잡념과 망상이 없습니다.
나라는 생각도 사라졌어요. 그 자리에는.
그냥 또렷하게 보고 있을 뿐이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다’ 라거나 ‘너다’ 라는 생각도 없고
이게 확연히 와 닿지 않는다면
어디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가서
정말 놀라운 풍경을 보고 감동을 하는 푹 젖어 있는 그 순간에
그 순간에 그저 ‘아!’ 하고 감동하고 있을 뿐이지
그 순간 아무런 분별이 없습니다.
그냥 뭐라 할까, ‘지복의 느낌’ 그런 것뿐만 나를 감싸고 있을 뿐이지
그런데 욕심이 생겨서 ‘이 꽃을, 이 만발한 꽃들을 계속 보고 싶다’
이렇게 한 생각 일으키면 꽃이 떨어질 때 괴로운 겁니다.
‘이걸 꺽어다 우리 집에 갔다 놔야지’ 하고 생각하면 괴로운 것이죠.
내가 붙잡으려고 하니까
본래 그렇게 흐르는 것뿐인데
그것을 보고 있는 그 순간
너와 나도 없고 맞고 틀리고도 없고
진리와 진리 아닌 것도 없고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고 부모자식도 없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그 자리에 그냥 그런 겁니다.
그냥 그것만 있을 뿐이에요.
뭐라고 말 할 수 없는.
‘법’이라고 할지
‘진리’이라고 할지
‘텅빔’이라고 할지
‘고요함’이라고 할지
아무것도 없다.
그냥 그럴 뿐이다
그냥 그러할 뿐이다
‘여여(如如)’
그냥 그러할 뿐.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
그래서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이랬단 말이죠.
본래 한 물건도 없다.
그 자리서는 아무것도 말도 필요 없고 법문도 필요가 없는 겁니다.
거기 무슨 깨달음이 필요가 있고 법이 필요가 하겠습니까?
그런데 중생들이 한 생각 일으켜서 망상을 일으키고 번뇌를 일으키고 집착을 일으키고 하니까 그것을 깨주기 위해서
허망한 집착을 일으키니까 허망한 집착을 깨주기 위해서
허망한 말을 가져다가 방편으로 쓰는 겁니다.
환상의 병을 환상의 약으로 치료해 주는 겁니다.
병도 환상일 뿐이고 병을 치료해 주는 약 법이라는 거 진리, 다르마 경전 이것 또한 환상일 뿐이다.
그래서 여기서 제가 이해하기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할 만한 정해진 법이 없다.
또 여래께서 설하셨다고 할 고정된 법이 없다.
여러분 이 사실을 아셔야 돼요.
이런 이야기가 앞으로 계속 나오니까 이 다음으로 넘어가면서 이야기를 또 계속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설하신 법은 다 취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으며,
법도 아니며 법 아님도 아니기 때문이다.
여래가 설하신 법은 취할 수가 없습니다. 집착해서
‘이것만은 절대 진리다’라고 해서 집착해서
‘이것만은 내가 놓지 않겠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어디에도 취해야 할 법이 없습니다.
팔만사천대장경에 ‘이것만은 내가 끝까지 붙잡고 있겠습니다.’ 할만한 것이 없다.
내가 환상의 병을 이미 치료했다며
환상의 병을 이미 치료했는데 환상의 약이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그것 또한 환상인데, 약이 필요가 없게 되는 거죠.
그냥 그 자체로 완전하다고 해도 맞지 않고
그렇지 않다고 해도 맞지 않지만
그저 말로 할 수 없는 그 자리, 그 자리가 있을 뿐인데
그 자리라고 해도 맞지 않아요.
그래서 취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으며
진리를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진리 그 자체를 말한다는 것은
방편으로 어떻게 짜 맞춰 가지고 방편으로 말할 수는 있겠죠
그런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일 뿐
입을 벌리면 벌써 어긋난다.
유마경에서 유마거사가 다른 10대 제자를 비롯한 보살님들이 불이(不二)에 대한 좋은 법문을 했지만 유마거사에게 마지막으로 물어봤을 때 유마거사가 탁 침묵을 했단 말이에요.
그래서 문수보살이 환희하면서 ‘이거야 말로 진정한 법문이다.’
입을 벌려서 말을 하기 시작하면 일단 그것은 온전한 진리라고 할 수가 없죠.
그것은 방편일 뿐
취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는
부처님 법 자체도 집착해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절대 진리다.
이렇게 하면 안된다.
여러분이 공에 치우쳐 있을 때 ‘참나가 있어’ 라고 했던 그 말에 집착해 가지고
참나에 너무 많이 과도하게 집착하게 되면 안 된다.
어느 정도 참나에 대한 집착을 내려 놓게 됐다면
또 다시 그것 또한 내려 놓을 수 있어야지.
어떤 것도 우리를 치유해 주기 위한 방편이구나 라는 것을 알아야 된다.
법도 아니고 법 아님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금강경은 법이 아닙니다.
그럼 법이 아니냐?
법이 아닌 것도 아니다.
법이 필요 없는 사람에게 이런 게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저런 아이들에겐 이런 법이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배고프면 울고, 먹으면 좋아하고 그게 다죠.
보살님 전혀 상관 없습니다.
애 울고 그래도 전혀 상관 없습니다.
그런 아이를 데리고 오셨다는 것 그 자체가 참 대단한 일입니다.
(박수 소리)
쉬운 일이 아닌데, 그죠? 참 대단하십니다.
얼마나 법에 대한, 법도 없는데, 법에 대한 듣고자 하는 마음이 많으시면 참 아주 훌륭하십니다.
이 말의 의미를 대략 아시겠죠?
이것은 법도 아니고 법이 아님도 아니다.
그렇다고 진리라고 할 수도 없지만 진리가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러니까 중도적으로 봐야 한다는 겁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그래서 모든 스님들이 하는 얘기가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중도다.
모든 희론(?)들을 탁 끊어 버리는 겁니다.
모든 일어난 생각들을 탁 내려놓게 만드는 거에요.
무심(無心), 마음 없음.
마음 없는 상태에서는 뭐가 있겠습니까?
일어날 마음이 없는데.
부처라고 아예 마음도 없고 중생이 라고 아예 마음도 없고
괴롭다 즐겁다. 너다 나다. 할 것이 일체 없다면
그 마음이 없는 자리에서 더 이상 일어날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 까닭은 모든 현인과 성인은 무위법으로써 차별을 두기 때문입니다.
라고 했는데요.
말할 수도 없고 설할 수도 없다. 라고 했단 말이죠.
그러면 말할 수도 없고 설할 수도 없는데
법도 아니고 법 아님도 아니라고 했는데
그러면 부처님께서 왜 법을 설하셨습니까?
수많은 성인과 현인들이 왜 우리 중생들에게 진리를 설하고 법을 설하셨습니까?
이렇게 물을 수 있겠죠?
그 분들은 왜 그렇게 설하셨을까요?
그 분들이 설한 것 그거 자체도 허물 아니겠습니까?
그것 자체도 허물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분들의 입장에서는 그게 허물이 되지 않는 이유가
무위법으로써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분들이 말을 하는 것은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차별하는 거에요. 분별하는 거에요.
분별심, 차별심입니다.
침묵하는 거보다 못하는 거죠.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부처님이나 성인들이나 현인들은 그 어떤 것을 질문해도 침묵만 하고 있느냐, 유마거사처럼?
그렇지 않죠.
자상하게 법을 설해주죠.
차별심을 일으키는 겁니다.
그 차별심으로 중생의 근기에 맞게 그 차별심으로 응해 주는 겁니다.
그렇게 응해주지만 그게 진짜 맞기 때문에 거기 응해 주는 게 아니라
무위법으로써.
해도 한 바가 없는 마음으로써 그 차별심을 일으켜 주는 겁니다.
무위법과 유위법 이라는 것을 금강경을 공부하시면 잘 아셔야 하는데요.
유위법은 마음으로 ‘위(爲)’라는 게 할 위(爲)자잖아요. 함이잖아요.
유위, 함이 있다.
조작이 있는 게 유위법(有爲法)이에요.
무위법(無爲法)은 해도 한 바가 없어요.
조작이 없어요.
즉 보시를 했는데 보시했지만 보시했다는 상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이것은 무위법으로써 보시한 겁니다.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그냥 줬다
이건 무위법으로써 보시한 거에요.
그 사람은 보시했다고 할 것도 없어요. 무위로써 했기 때문에.
그런데 유위법으로써 보시 한 사람은 복이 깃들겠죠. 유위복이 깃드는 겁니다.
유위법로써 하면은 무위복이 깃든다 말이죠.
그래서 뭐든지 무엇을 하더라도 유위로써 하면 그것은 흔적을 남긴다.
업의 잔재를 남긴다.
모든 우리들의 하는 모든 행위는 업이 되죠
업이 되고 그것이 과를 가져 옵니다.
왜냐 하면 우리는 흔적 없이 하지 않으니까
우리는 유위법으로써 하니까.
우리가 하는 모든 말, 모든 생각, 모든 행동은 유위법으로써 합니다.
즉 의도를 가지고 해요.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에너지를 남깁니다.
유위의 과를 남긴다 말이에요.
그래서 언젠간 거기에 대한 과보를 받게 됩니다.
좋은 말을 많이 하면 좋은 말을 많이 듣고
나쁜 말을 많이 하면 나쁜 악담을 듣거나 하겠죠.
좋은 행동을 많이 하면 좋은 과보를 받고
나쁜 행동을 많이 하면 나쁜 과보를 받겠죠.
한다라는 행위한다라는 의도를 가지고 했기 때문에
그걸 업이라고 하는 겁니다.
유위행이 업이라고 하는 겁니다.
유위로써 하는 행 그것을 업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업을 남기지 않는다.
무위로써 하기 때문에.
깨달음을 얻은 사람도 우리랑 똑같이 말하고 먹고 자고 다 한단 말이죠, 똑같이.
남들 보기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똑 같은 사람처럼 똑같다는 거죠
그런데 뭐가 다르냐?
유위로 하느냐 무위로 하느냐가 다르다.
똑같이 차별심을 일으키고 분별심을 일으킨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게 정해진 고정된 분별심, 차별심이 아니라
중생의 근기에 응해서 무위법으로써 차별을 일으키는 겁니다.
성인과 현인들은.
저 깨달음을 얻었다 하는 저 스님이
저 스님도 우리와 별 다를 바 없네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저희들 또한 우리 은사 스님이 하는 행동들을 보고
뒤에서 우리 스님들이 모여 앉아 가지고
‘아 도대체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
도인이란 분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
우리에게 어떻게 이렇게 상처 줄 수 있을까
가슴 아프게 할 수가 있을까’
뭐 이렇게 얘기를 했지만
그 마음에 우리가 들어가 보지 않은 이상
당신의 마음 속에서는 무위였을지 유위였을지는
그건 당신의 자내진의 경계입니다.
자기 안에서 증득한, 자내진의 경계라고 그래요.
그건 그 안에 있는 것이지 우리가 알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정말 말도 안 되는, 작은 거 하나를 안 챙겼어요.
큰 스님하고 모시고 시봉을 나갈 때는 챙겨야 되는 항목들이 있어요.
그 항목들을 전부 다 잘 닦아 가지고 비닐팩에 탁탁 넣어가지고 딱 봉해가지고
착착착착착 해 놔야 돼요.
뭐 하면 바로바로 탁탁 튀어 나와야 합니다.
하다못해 이쑤시개도
예를 들어 세끼를 드신다.
이쑤시개 세개를 넣어 가지고 딱 갖다가
밥 먹고 나면 그것을 탁
‘이쑤시개’ 이렇게 말 안하십니다.
눈빛을 탁 주세요.
그러면 저절로 알아듣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몇 번 눈빛을 줬는데도 모르고 얘기 할 때까지 모른다.
그럼 혼나는 거에요.
그런데 예를 들어 공양을 하셨는데 이쑤시개를 대령을 해야 하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는 겁니다.
스님들이 워낙 바쁘고 정신 없으니까 다른 스님이 챙겨 주기도 하거든요.
그러면 그걸 어디다 뒀는지 모르는 거에요.
스님들이 나름대로 각각에 넣으니까
여기저기 뒤졌는데 안 나오는 거에요,
그러면 갑자기 온 몸에 식은 땀이 쫙 납니다.
벌벌벌 떨고 있는데 큰 스님 소리 소리 지르고 고함을 치시면서 난리가 납니다, 정말.
그렇게 작은 거 하나 안 챙기면 난리가 나는데
정말 엄청난 잘못을 했을 때
정말 엄청난 과오를 저질렀을 때
한마디 말을 안 하세요.
한마디 말을 안 하세요.
정말 너무 고맙긴 했지만
그때는 저희들 오면서 정말 스님들 일곱 명이서
다 같이 ‘우리는 죽었다. 우리가 절을 나가던가 정말 우리는 죽었다’
그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아무런 얘기도 안 하신단 말이죠.
정말 알다가도 모르십니다.
저희가 엄청난 실수를 하고 잘못을 했는데도 웃어 넘기시기도 하시고
정말 이건 잘못이라고 할 수도 없는데 혼내시기도 하고
때로는 일부러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하셔 가지고 답을 못 하게 만들어서 혼내기도 하시고
종잡을 수 없는
우리는 유위법으로써, 무위법으로써 일으키는 마음을 우리가 판단하려고 하면 판단이 되겠습니까?
알 수가 없는 것이죠.
그래서 현인과 성인도 우리랑 똑같이 가슴 아픈 거 보면 눈물 흘리고 화 나는 거 보면 화도 내고
다 한단 말이죠.
그러나 흔적이 없이 한다.
무위법으로써 차별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우리는 유위법으로써 그 모든 것을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