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언 일병 구하기 2023. 1. 28.
겨우 기내 좌석에 앉아 허물어진 심신을 추스르는데 이륙 준비 멘트가 뜬다. “높이 날고 싶은 건 당신일까요?”. 모두의 희망이겠지. 날아야 집으로 갈 수 있으니까. 몸과 마음이 지쳐 영혼이 사라진 상태, 이미 우린 높이 날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동남아 여행의 3대 요소는 보는 재미, 먹는 재미, 사는 재미다. 우린 골프라운딩의 3대 요소를 만끽하고, 꼼양꿍 까지 먹었다. 모든 것이 완벽한 여행이었다.
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했던가. 좋은 일에는 꼭 시샘을 하려는 듯, 안 좋은 일이 생기기 마련이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법무사의 철저하지 못한 성품으로 대충 주워 담은 가방이 말썽이었다. 오늘의 전조현상이랄까? 무언가 언짢게 시작된 하루는 결국 안 좋은 일이 일어난다.
아침에 룸메이트인 김법무사와 나오다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갑자기 “짐을 줄여야겠다.”며 먼저 가라고 한다. 뒤 늦게 도착해 밥을 부랴부랴 먹다가 “어? 폰이 없다”며 전화 좀 걸어 달라고 한다.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한다. 내 전화기를 들고 짐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고, 룸에 갔다가, 엘리베이터 앞을 찾아봐도 없다. 어디에도 없다면 발이 달리지 않는 한 가방에 있을 것이다. “가방을 열고 찾아보세요”.
결국 가방에서 찾은 폰을 하늘 높이 치켜들고, 성화 봉송 주자처럼 식당 안으로 뛰어 들어온다. 얼마나 좋았으면 먹다 남은 밥은 내팽겨 쳤다.
좋은 날씨에 아쉽게 18홀만 쳤다. 꼼양꿍으로 가득 채운 배인데도 살살 녹는 파인애플은 잘도 들어간다. 모든 일정이 잘 마무리 됐다. 가이드와 석별의 아쉬움을 나누고 짐을 붙이는 첫 번째 단추는 잘 채웠다.
두 번째 관문인 소지품 검사에서 법무사님의 가방이 걸렸다. 가방 풀어 검사 받고, 칼과 물을 빼앗겼다. 제법 당황스런 시간 때문에 밀리고 밀린 줄은 한참 뒤에 서야 했다. 일행과 멀리 떨어진 법무사의 낮 빛이 당황스럽고, 지켜보는 우리의 입술은 마르기 시작한다.
불행하게도 촘촘히 늘어선 긴 줄에 새치기를 안해 우리와 자꾸 멀어지고 말았다. 약간의 맨탈 행동에 마음 졸이는데, 얄밉게도 샌드위치 된 줄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아래층으로 가라한다.
시야에서 사라진 법무사님은 적진에 홀로 남은 라이언 일병이 되고 말았다. 무슨 순대 말아 놓은 듯한 긴 줄은 좁은 아래층을 꽉 채우고 있다. 이제 모든 시선은 에스컬레이터에 집중된다. 제한적으로 내려 보내는 사람들 사이에 법무사는 아무리 기다려도 보이지 않는다.
함께 가자고 추천한 이회장님이 입구에 남아 전화를 해댄다. 눈이 빠져라 쳐다보는 우리에겐 각자의 생각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 속이 타들어간다. 정말 이러다 라이언 일병을 구하기 위해 특수원을 보내야 되는 것 아닌가?
겨우 통화가 되어 살아있다는 전갈이 왔다. 약 30분간의 혈투 속에 극적으로 라이언 일병을 구출하는데 성공했다. 보일 듯, 말 듯 저 멀리 줄 끝에 이회장님과 나란히 선 법무사님을 보니 너무나 반가웠다. 개선장군처럼 자랑스러워 보인다.
적진에 홀로 남아 너무 긴장한 나머지 그렇게 많이 먹은 꼼양꿍 때문에 갑자기 복통이 일어났다. 토할 것 같다는 전갈에 분위기는 일순간 참담해 진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병원에 가야 되나? 생각 할수록 앞이 캄캄해 진다.
탑승시간 11시 40분에 겨우 한 시간 남았다. 아직도 징글스럽게 길게 늘어선 줄, 시간이 부족하여 제 시간에 비행기를 타려나 싶다.
면세점에서 마지막 미션이 하나 남았다. 아내가 좋아하는 건 두리안을 사야한다. 마음이 자꾸 조급해진다. 여긴 긴박하고 남은 과제는 촉박하다. 마사지로 풀린 목은 이리 저리 돌리다 보니 다시 뻑적지근해진다.
속 타는 말을 한 마디씩 하지만, 제일 답답한 사람은 법무사일 것이라고 위안 삼으며, 인고의 시간을 이겨 낸다.
다행히 봉지들고 어느 구석으로 빨려 들어간 법무사가 한참 후 고개 들고 나올 때는 “휴~이제 살았구나.” 안심이 된다.
여하튼 라이언 일병구하기 미션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꼼양꿍을 맛있게 먹은 기분 보다, 버디로 인해 하늘을 나는 기분 보다, 입에 살살 녹는 두리안에 영혼을 빼앗기는 그 기분 보다 더 황홀한 기분이다.
급한 발걸음으로 건 두리안을 사고, 달리다 시피 F2게이트에 도착하니 그때서야 화장실이 급하다. 정신이 한곳에 쏠리니 볼일 보는 것도 마비 되었나 보다. 용변 보고 의자에 풀석 앉는다. 정신이 몽롱해지고 온 몸에 힘이 쑤욱 빠진다. 완전 기진맥진이다.
법무사 찾느라 눈이 쑥 들어가고, 새까맣게 타들어 간 우리들의 시린 가슴을 아실련지 모르겠다. 하지만 살아오심에 감사하며, 모든 것을 긍정적인 마인드로 이겨내는 감성 마인드에 찬사를 보낸다.
콩나물시루 같은 비좁은 기내를 통과하여 뒷자리에 앉으니, 이제 그리운 집으로 가는 구나. 안도감에 잠이 쏟아진다. 주마등같은 일들을 다 떠오르지 못하고 눈까풀이 덮인다.
그러고 보니 오늘 하루 썸싱[something]이 많았다.
휴대폰 분실, 검사대 물품, 무리에 갇힌 라이언 일병, 여권 분실과 구토, 노랑종이 기록 등 애간장을 태운게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그것도 모자라 김해 공항에서 휴대폰 배터리 소진과 자동차 방전은 또 어떠했던가. 이 모든 일련의 해프닝은 법무사의 차량이 “푸드덕 펑펑”하며 시동이 걸리는 순간 “헤~헤 시동이 걸리네요.”라며 웃는 해맑음에 모두 날려 보낸다.
핫들의 시원한 공기를 마음껏 들이킨다. 내 삶이 살아있는 정겨운 공기다. 친숙한 공기라 맛있다. 넓은 도로에 차량이 어디로 가는지 바람을 일으킨다. 바쁘게 돌아가는 삶의 모습을 보니 이제 제자리로 돌아온 기분이다.
파란 잔디 위에 마음껏 놀았고, 긴박한 순간 속에 시간의 소중함도 알았다. 이번 여행에서 얻은 모든 것들이 삶을 더욱 윤택하고 보람되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