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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선교사 스크랩 한국교회사 / 국외에서 복음을 받은 사람들에 의한 활동
상록수 추천 0 조회 67 14.11.15 13:3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한국교회사 / 국외에서 복음을 받은 사람들에 의한 활동

 

 

 

배론하당

 

1855년 충북 제천군 배론에 솔립된 한국 최초의 신학교로

1866년 병안교난으로 폐쇄되기까지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 공헌하였다.

 


평생전도회


만주 북간도 용정에서 교회 여성들이 조직한 평생전도회 회원들이다


12.동만노회


캐나다 장로회의 선교사업으로 이룩된 동만노회(간도노회) 의 임원들이

귀국하는 선교사 럽을 환송하기 위하여 모였다

 

 

 

한국교회사(20)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3. 개신교의 한국 전래를 위한 노력

2) 국외에서 복음을 받은 사람들에 의한 활동

(2) 서상륜에 의해 세워진 소래교회

한국 땅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는 서상륜에 의해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에 세워진 소래교회이다. 소래교회가 세워진 송천리는 순 토박이말로‘솔샘’이었다. 솔샘은 솔내로 변했고, 그것이‘소래’가 되었는데, 이 마을에는 소나무가 울창하고 계곡을 흐르는 물은 황해로 흘러들어가는 곳이다.

소래교회의 설립은, 선교사들이 우리 땅에 들어오기 전에 성경이 먼저 우리말로 번역되었다는 것 못지않게, 1884년 4월 5일에 공식적으로 우리 땅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선교사가 도착하기 전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 하겠다.

소래교회는「황해도지」와「은율군지」의 자료에 의하면, 1883년에 설립된 것으로 나타나며, 1·4후퇴 때 월남한 소래인들이 고향을 그리며 후세대에게 정확한 사실들을 알리고자 편집한「대구면지」(大救面誌)에 송천교회 회고편을 쓴 정용하의 증언에 의해서도 1883년에 설립된 것으로 나타난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서경조 목사님의 가르침에 의하여 1883년 5월 16일에 교회가 설립된 것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고향에 있을 때 5월이 되면 어린이주일, 어머니주일, 그리고 이어서 교회생일이 있었고,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온 교회가 축제 분위기에 젖어들었으며, 설립일에는 야외예배, 토론회, 웅변대회 등등 여러 가지 특별 행사를 하면서 이 날을 지켰습니다.”라고 하였다.

만주에서 쪽 복음서를 갖고 밀입국(1882년)하려다 관헌에 적발되었던 서상륜은 고향에 와서 전도하게 되었는데, 이 사실이 관가에 알려져서 그를 체포하라는 체포령이 내려지므로 신변의 위협을 받게 되자, 당숙이 살고 있는 소래로 피신하여 살면서 서울과 소래를 오가며 전도하였다. 의주에 살던 동생 서경조가 소래로 아주 이주하여 서상륜은 1883년 봄부터 자기 친척과 몇몇 동네 사람들과 함께 동생 서경조의 초가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후에 솔내는 58세대 중 50세대가 예수를 믿는 경이로운 전도의 업적이 나타난 동리가 되었다.

상경한 형에게서 신약과‘덕혜입문’을 받아 소래로 돌아온 서경조가 결단을 하고 믿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신약전서를 수차 읽어보니 예수교를 할 마음이 깊이 들어가는 동시, 그 교를 하면 피살하리란 마음이 또 생겨 시중전이 일어나”반년이나 갈등하다가 로마서를 보고는“사도 바울의 죽음을 무릅쓰고 두려움이 없는 마음을 보고 내 생각에 바울도 사람이라 어찌 죽기를 두려워 아니 하였으리오…죽는 것은 잠깐 동안이요 죽을까 두려운 마음이 실상 어려우니 성신을 받아 두려운 마음이 없으면 죽는 것이 두려울 것 없고 또한 생사가 천주의 뜻대로 되리라.”하며 기독교에 입문하였다고 술회하기도 하였다.

1895년에는 교회가 비좁아 신축을 하였다. 이때 교인 수는 2백여 명이라 했으며 교회를 짓기 위하여 밤새도록 기도하는 일, 금식하는 일, 십일조를 교회에 바쳐 3-4월이 되어 어려운 사람이 생기면 신·불신을 막론하고 구제해 주는 일, 근농으로 교회 설립 3-4년 만에 박토가 옥토 된 일, 주색잡기, 투전, 미신 등이 없어진 일, 열심히 전도하는 일이었다(국민일보“한국교회 뿌리를 찾아서”)고 기록되어 있다.

소래교회 건축에는 몇 가지 특색이 있는데, 첫째는 소래교인들이 자체적으로 건축비를 부담했다는 것이다. 또한 둘째는 미리 비축해 두었던 기금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서경조는 성경 공부 차 상경하였을 때 언더우드의 사랑채에서 서울의 신도들과 예배당 건축계를 조직한 일이 있었다. 이계금은 매년 10냥씩 불입하도록 하였고, 한국 어디서나 최초로 예배당을 건축할 때 이 기금을 사용하도록 약조하였다. 따라서 소래교회의 건축 준비가 무르익고 공사가 진행되자 계원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계금을 수령하였는데, 소래교회의 건축에 도전을 받은 서울교회가 서둘러 예배당 건축을 추진하였으므로 계금을 반분하여 500냥을 받아 건축비로 사용하였다. 셋째 특징은 건축비에 대한 언더우드선교사의 선교비 보조를 사절하고 한국 최초의 민족 교회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스스로의 힘으로 건축을 감당했다는 것이다.

소래교회의 부흥으로 인근 장연읍을 비롯하여 송화·은율·풍천·문화·해주 등 일곱 지역에 수십 개의 교회가 세워졌다.

이와 같이 한국교회의 창설은 분명 성경을 번역한 평신도들의 독자적 전도와 한글성경 반포라는 특징을 갖고 시작되었다. 또한 소래교회는 한국교회 스스로의 힘으로 건축을 감당함으로 자립, 자생하는 교회로서의 기초 돌을 놓았다.

 

 

한국교회사(21)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3. 개신교의 한국 전래를 위한 노력

2) 국외에서 복음을 받은 사람들에 의한 활동

(3) 일본에서 복음을 받은 이수정

① 이수정의 일본 방문

만주 우장에 거점을 마련한 존 로스 선교사와 의주 출신 젊은이들에 의해 중국에서 복음이 준비되고 있는 동안 바다건너 일본에서는 이수정(李樹廷)에 의해서 복음이 준비되고 있었다. 대학자 이병규의 아들 이수정은 민영익과 교분이 두터운 친우 사이였고, 일찍부터 개화설을 주장하였으며, 여러차례 국가에 공로가 많았던 인물로 1882년 9월 19일 임오군란후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본래 개화사상을 가지고 있는 데다 오래 전부터 일본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이수정은 일본에 건너가기 전부터 민영익과 가까운 친분을 가지고 있었고, 1881년 초 이전에 이미 부산주재 일본영사 콘도우(近藤)와 접촉하고 동경에 가기 위하여 일본 주우은행에 적금도 들어 놓고 있었다. 그만큼 일본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그가 일본에 체류하고 있는 동안 신문과 잡지에 기고하면서 밝혀진 일이지만 그는 상당한 예술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에 건너가기 전에는 한때 민영익과 함께 무역과 상업을 통한 부국의 길을 찾는 데도 적지 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881년 농학부문 담당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온 지우(知友) 안종수(安宗洙)를 통해 일본에 대해 어느 정도 식견을 갖고 있던 이수정은 일본의 선진 농업정책을 전수받고 한국에 그것을 계승하고 싶은 생각이 강하게 일어났다. 안종수는 일본에 있는 동안 당대 일본을 대표하는 걸출한 농학자 쯔다센(律田仙)을 만나 기독교에 대해 전해들은 후,“ 내가 배운 바를 왕과 나의 친구들에게 말할 것이고, 그들의 기독교에 대한 편견을 버리도록 노력할 것”을 약속했다. 쯔다센의 탁월한 선진 농법에 감명을 받은 안종수는 돌아와 농정신편(農政新編)을 저술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농업기술 서적으로 국민들에게 농업 선진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이수정이 관심을 갖고 있던 분야는 일본의 문화, 특히 농업과 법률, 우편 및 조운(遭運) 시설 사찰(査察)이었으나 제일 큰 관심은 일본의 농업 정책이었다.

② 이수정의 회심

일본에 건너간 이수정은 쯔다센과 개신교 지도자들, 그리고 주일 미국 선교사들과도 교분을 갖기 시작했다. 쯔다센은 자신을 찾아온 이수정을 친절히 맞아 주었고, 교리에 대한 설명과 함께 한문 성경 한 권을 건네주었다. 쯔다센은 당시 일본어에 익숙하지 않았던 이수정에게 한문 성경을 건네주고, 한문을 인용해 성경의 진리를 가르쳐 주었다. 이수정은 숙소로 돌아와 한문 성경을 읽는 가운데 감동을 받고 쯔다센이 믿고있던 기독교에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수정은 김옥균과 민영익이 귀국하고, 다시 얼마 후 박영효가 본국으로 돌아갔음에도 불구하고 쯔다센 박사 밑에서 농업 기술을 전수받겠다는 이유로 계속 일본에 남았다. 그러나 그가 남은 진짜 이유는 기독교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이수정은 쯔다센 박사로부터 농업기술을 전수받는 중에 훌륭한 그의 인격에 매료되기 시작했고, 그의 인격의 기원이 종교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쯔다센 박사가 다니는 감리교에 점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즈음 쯔다센 박사가 야스카와 토오루(安川亭) 목사를 이수정에게 소개해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때 처음으로 츠키지교회(築地敎會)에 나가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수정은 쯔다센에게 체계적으로 성경교육을 받으며 신앙이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이수정은 1883년 4월 29일 일본에 건너간 지 9개월 만에 로개쥬쵸교회(露月町敎會)에서 야스카와 토오루 목사로부터 세례문답을 받은 후 미국 선교사 조지 낙스(George W. Knox)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문답에 대한 그의 답변은 너무도 명확하고 또렷했다. 시취한 일본인 목사나 낙스 목사는 물론 방청했던 사람들 모두가 이수정의 분명한 신앙고백과 유창한 일본어 답변 실력에 놀랐다.

이때 그의 나이는 약 40세였다. 비록 일본에 9개월밖에 체류하지 않았지만 그는 유창하게 일본어를 구사했고, 심지어 두 번에 걸쳐 설교해 대단한 호평을 받았고, 정확한 언어로 모인 청중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일본에 체류하고 있는 동안 그가 쓴 한문 시는 일본의 주요 신문에서 대단한 호평을 받을 정도였고, 또한 그림도 상당한 수준으로 알려졌다. 루미스는 1883년 5월 30일 본부에 다음과 같이 썼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도 그는 대단히 열렬한 그리스도인이다. 그는 이미 여기에 있는 그의 모든 한국인 동포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고, 그는 그들이 이미 기독교의 진리를 받아들였다고 말한다. 그의 탁월한 학문적 자질과 능력과 더불어 그의 탁월성은 그의 한국인 동료들에게 대단한 영향을 주고 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인 도쿄국립대학의 한국어 선생은‘만약 이수정이 기독교 때문에 죽는다면 나 역시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불과 18년 전 이수정의 친척가운데 한 사람과 그의 가까운 친구가 천주교 신자가 되었기때문에 순교 당했다. 그의 팔과 다리가 먼저 절단되었고, 그 후 그의 머리가 절단되었다. 이수정은 몇 차례 밤에 나의 집에서‘만약 내가 나의 조국에 있었더라면 나는 어느 때든지 살해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국인들은 죽을 각오를 하지 않고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고 하였다.

미국 성서공회 일본주재 총무 헨리 루미스 선교사는 1883년 5월 11일 이수정의 세례 소식을 본부에 알리면서 이수정이 그의 조국 은둔의 나라에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부푼 기대감을 나타냈다. 이수정이 세례를 받던 1883년 당시 일본 사람들과 일본에 있던 외국 선교사들은 한국선교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한국인 이수정이 복음을 접했다는 소식은 곧 일본에 널리 알려졌고 여러 선교단체나 교회가 그를 연사로 초청하기에 이르렀다. 이수정이 세례를 받던 해인 1883년 1월에 일본에서는 선교사, 목사, 교역자, 교회 성도들 모두가 일본교회의 부흥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 대 부흥이 일어났고, 그와 같은 부흥의 열기는 가장 가까운 나라 조선에 대한 선교열을 한층 더해 주었다.

그런 때에 이수정이 로개쥬쵸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것이다. 1883년 5월 8일부터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 우에무라(植村), 니이지마 죠(新島)를 비롯한 전 일본의 기독교인들과 각 교파 목사, 교사, 교회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3회 전국기독교도 대 친목회가 동경에서 열렸다. 이것은 일종의 대 부흥집회였다. 집회 4일째인 5월 11일 오전 8시에 신에이교회당(新榮敎會堂)에서 특별기도회가 열렸을 때, 그곳에 참석한 일본인 목사 오쿠노 마사즈나(奧野正綱)의 제청에 의하여 이수정이 등단하여 한국어로 공중기도를 드렸다. 비록 그곳에 모인 이들 중 이수정의 한국어 기도를 알아들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지만, 그것은 오히려 오순절의 영감을 더해 주었다고 우찌무라 간조는 술회했다.

“그는 자기 나라 말로 기도했는데 우리들은 그 마지막에 아멘 하는 소리밖에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그 기도는 무한한 힘을 가진 기도였다. 그가 참석하고 있다는 사실과 또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 장소와 광경을 더 한층 오순절과 같이 만들어 주었다.”고 하였다.

1883년 5월 12일, 도쿄쿠단자카(東京九段坂) 스즈끼(鈴木)씨의 사진관에서 찍은 전국기독교 신도 대 친목회 간부 사진에는 이수정이 정가운데에 쯔다센과 마주앉아 있어 그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그가 얼마나 복음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는가를 그의 신앙고백문에서 알 수 있다. 그는 요한복음에 있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다는 말씀은 하나님과 사람이 서로 감응의 일치가 있음을 말씀하신 것으로서, 이것은 믿음으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확증한 것이라고 확신했다. 믿음이 없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을 것이며, 만약 세례를 받고도 그 사람 마음속에 참된 신앙이 없다고 한다면 성도라고 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이수정은 인간의 구원이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기독교의 근본 진리를 자신의 분명한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었고, 만약 그것이 포기된다면 곧 기독교가 포기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예수를 믿고 나서 이수정의 성품과 관심은 바뀌어 갔다. 무엇보다도 진리를 사모함과 동포를 향한 구령의 열정이 매우 강하게 나타났다. 그는 세례를 받은 후 일본에 유학하고있던 유학생들에게 열심히 복음을 전해 주었고, 그들 중에 세례를 받은 이들이 늘어나면서 성경공부반도 생겼다. 1883년 말 요한복음 15장에 기초한 그의 신앙고백과 교리에 대한 이해는 그가 이미 성경을 진지하게 연구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이수정의 활달한 성격, 분명한 신앙고백과 민족에 대한 구령의 열정 그리고 그의 뛰어난 리더십은 일본인들은 물론 일본주재 미국 선교사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수정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중생의 깊은 체험을 통해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상의 어느 것도 제공해 줄 수 없는 내면의 평안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의 친구가“나는 자네가 지금 그렇게 행복하게 보이는 그 이유를 알 수 없네. 자네는 최근 매우 크게 변화하였으며 어떤 새롭고 특별한 기쁨을 찾은 것 같네.”라고 말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이수정은 그 친구에게“나는 내가 이전에는 결코 생각해보지 못했던 마음의 큰 평안과 행복이 있다.”고 답했다. 그에게는 내면에서 우러나는 깊은 영혼의 평안이 그의 마음과 전 인격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한 구원의 확신과 민족을 향한 구령의 열정이 없이는 소유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신앙이었다.

 

 

한국교회사(22)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3. 개신교의 한국 전래를 위한 노력

2) 국외에서 복음을 받은 사람들에 의한 활동

(3) 일본에서 복음을 받은 이수정

③ 이수정의 성경 번역

이수정은 자신의 백성에게 성경을 줄 수 있기를 대단히 갈망하고 있던 차에 일본주재 미국 성서공회 헨리 루미스 선교사가 한글 성경 번역을 의뢰하자 주저하지 않고 그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이미 아시아의 복음화를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고 있던 미국 성서공회가 한국을 위해서도 성서반포사업을 추진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지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 상황을 루미스는 다음과 같이 선교부에 보고하였다. “조선사절단 가운데 한 명이 최근 동경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전해지는 말로는 그가 한 꿈을 꾸었는데, 그 꿈 속에서 어떤 사람이 책 한 보따리를 가지고 그에게 오더니, 그 책속에는 번영과 행복의 능력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하였답니다. 계속 물으니 그 책이 성경이라는 답을 듣게 되었고, 꿈에서 깨어난 그는 그 책을 찾아 그 가르침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현재 교인이 되었으며, 우리는 이것이 복음이 저‘은둔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게 될 것임을 확신합니다.”라고 하였다.

루미스로부터 성경 번역을 의뢰받은 후 곧바로 작업에 착수해 성경 번역은 놀랍게 진행되었다. 이수정은 로개쥬초교회 야스카와 목사의 도움으로 시간적으로 방해를 받지 않은 조용한 그의 서재에서 성경 번역을 진행할 수 있었다. 성경번역 과정 중 이수정은 동경대학 한국어 교수로 있는 자신의 친구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루미스는 1883년 5월 29일 이수정에게 ‘마태복음 원고와 상당한 양의 마가복음 번역이 이미 완성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루미스가 야스카와 목사의 안내로 그곳을 방문했을 때 이수정은 이미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완역하였고, 로마서를 열심히 연구하고 있었다. 이수정은 루미스에게“나는 사도의 서간들이 어려운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정확한 의미에 대하여 만족할 때까지 결코 글자 한 자도 쓰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번역에 임하는 그의 태도가 얼마나 신중했는가를 말해준다. 이처럼 성경번역에 대한 이수정의 애착은 남달랐다.

이수정이 성경을 번역하게 된 동기에 대해 이만열은 그의 저서 ‘한국 기독교 수용사 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있다.

“첫째는 신앙적 동기로서, 한국 선교를 위한 그의 열망의 발로였으며, 둘째는 한국 선교사로 파송되어 갈 미국 선교사들을 위해 성경의 한글 번역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며, 셋째는 신앙적 동기와 함께 개화 의지 때문이기도 했다.”고 하였다.

이수정의 회심과 그의 성경 번역의 착수는 일본에 유학 온 한국인들 사이에 복음이 전파되는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의 전도에 의해 복음을 받아들인 한국인들이 생겨났고, 자연스럽게 신앙의 공동체가 일본에서 형성되었다. 이수정은 그의 친구들과 일본에서 주일학교를 개설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며, 그의 동향 사람 가운데 두 명이 세례를 요청했는데 그 중의 한사람이 귀족의 아들이었다.

이수정은 무엇보다도 성경 번역이 그에게 맡겨진 일차적인 시대적 사명이라고 확신했다. 1883년에 마가복음 번역을 끝낸 이수정은 다른 성경 번역에 착수했고, 그에게 성경 번역을 부탁한 루미스는 1883년 7월 30일 인쇄되어 나온 요한복음 일부를 미국 성서공회본부에 보냈다. 그의 노력으로 한문 성경에 토를 단 현토성경 신약성서 마가전이 1884년 11월에 출판되었고, 현토한한신약전서가 1887년에 출판되었다. 토를 붙인 한문 성경은 유식자 층에 제한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수정은 이와 함께 1883년 6월부터 순수 우리말로의 번역을 착수해 1884년 4월에 완성하여 이듬해 2월 요코하마에서 신약 마가복음 1천 부를 발행했다. 1885년 4월 5일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제물포에 도착했을 때 가지고 온 성경이 바로 이 성경이었다. 비록 출판은 하지 않았지만,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번역도 완성했다. 이수정의 역본은 로스 역본과 함께 한글 성경 번역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번역 저본들이었다. 한글 성경 번역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인 레이놀즈(W. D. Reynolds)의 증언대로 로스와 이수정의 초기 번역은 여러 모로 보아서‘대단히 값진’선물이었으며, 그것은 또한 피어선이 지적한 것처럼 하나님
의‘한국 선교사역에 대한 인치심의 증거’였다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사(23)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3. 개신교의 한국 전래를 위한 노력

2) 국외에서 복음을 받은 사람들에 의한 활동

(3) 일본에서 복음을 받은 이수정

④ 이수정의 한국 선교 요청

이수정은 민족을 살릴 수 있는 길이 농업 기술이나 서양 기술문명의 전수가 아니라 동족을 복음화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자신이 만나는 일본 주재 미국 선교사들에게 한국선교를 호소했다. 세례를 받은 후 이수정은 곧바로 루미스와 다른 미국인 선교사들에게 미국 선교단체가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해서 선교사역을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다른 나라에서 먼저 선교사를 파송해 선교사역을 시작할 것에 대해 매우 우려했다. 당시 일본 교회에서는 한국 선교에 대한 주장이 나오고 있었고, 몇몇 사람들은 한국 선교사를 지원하는 분위기였다. 이수정은 일본 교회가 한국에 선교사를 파견한다는 데에 강력히 반대하였다. 한일 간의 오랜 역사적 감정 문제와 정치적 문제도 있었지만, 서구 문명을 직접 미국으로부터 수용하고자 하는 문화적 욕구가 강했기 때문이었다.

이수정은 통역과 지원만 이루어진다면 성공은 매우 확실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이수정의 노력에 힘입어 이미 1883년 5월에 조지 낙스 선교사와 헨리 루미스는 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한국을 여행할 계획까지 세우고, 이를 본부에 타진하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미국 선교부에 한국 선교사를 파송해 줄 것을 요청하는 1883년 12월 13일자 이수정의 편지가 선교잡지인 미셔너리리뷰(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 1884년 3월호에 실렸다.

그의 편지는‘1883년 12월 13일 요코하마에서’로 시작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나 이수정은 미국의 형제, 자매들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인사를 드립니다. 믿음과 진리의 능력으로 나는 주의 놀라운 축복을 받았으며, 나의 행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기도와 간구로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확고히 지킬 수 있으며, 결코 사단에 의해서도 제거될 수없기 때문에 주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립니다.

우리의 조국에서 수많은 백성들이 아직 참 하나님의 길을 모르고 있으며, 이방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직 주님의 은혜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 복음전래의 시대에 우리나라는 불행히도 눈에 띄지 않는 지구촌의 한 구석에 위치하고 있어 그 곳에서는 기독교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복음이 확장될 수 있도록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일이 성공할 수 있도록 나는 밤낮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이 거의 완성되었습니다. 다섯명의 나의 동포들이 나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세례를 받았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자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으며, 장차 기독교인이 될 것으로 기대되는 숫자가 매일 증가하고 있습니다.

과거 칠, 팔십 년 동안 불란서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비밀리에 복음을 전해 왔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엄격히 그 종교를 금했고, 회심자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굳게 지키고 승리의 죽음을 맞았던 것입니다. 사형에 처해진 사람들의 숫자가 십만 명이 넘습니다. 비록 이 사람들은 주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했지만, 그들의 신앙은 예찬할 만하며, 그것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부들 역시 종종 박해를 받았으나 그들은 결코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현재 정부는 나라를 개방해 다른 나라와 교류를 하고 있으며 국민의 여건을 증진시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정부는 (과거보다는) 기독교에 대해 좀 더 완만한 정책을 쓰고 있으며, 그러므로 비록 기독교를 공개적으로 허용한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최근에 완선작이라는 한 중국 기독교인이 우리 왕에게 신약성경 한 권을 헌정했으나, 정부가 이를 방해해 왕이 그것을 하사받지 못했습니다. 왕은 매우 불쾌해 했고, 그 일이 현재 중요한 논제가 되었습니다. 먼저 우리는 어려움들이 있으리라고 기대합니다만 그것들은 곧 해결될 것입니다. 나는 이것이 한국에 복음을 전하는 황금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귀국은 기독교 국가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나는 다른 민족들이 교사들을 보낼 것이라고 우려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만일 그렇게 되면) 그러한 가르침들이 주의 뜻과는 일치하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하는 바입니다.

여러분이 나의 말에 주의를 기울여 주기를 간구합니다. 만일 나의 요구가 허락된다면 나의 기쁨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그리스도의 종 이수정’이라고 자신을 밝히고 있다.

이수정의 편지는 그가 일본에 건너간 이유와 그 곳에서의 활동과 사역을 비교적 소상하게 밝혀 주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깊다. 그가 일본에서 한국 선교를 준비하는 데 기여한 사실은 단순히 복음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은 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 여러 명의 한국인들이 복음을 접함으로 말미암아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복음 전도자의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했고, 후에 성경과 많은 기독교 전도문서를 번역하여 한국복음화를 위한 중요한 토대를 구축해 주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보다도 한국 복음화를 위해 그가 이룩한 더 큰 공헌은 미국에 한국 선교를 촉구하여 한국 선교의 장을 여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사실이다.

세례받은 지 만 1년도 채 안 된 사람의 편지치고는 복음의 열정이 짙게 배어 있고, 전체 구성은 물론 내용과 논제가 너무도 분명하다. 이수정에게 세례를 베푼 일본주재 미국 선교사 조지 낙스가 지적한 것처럼 이수정의 편지는 자기 민족에게 복음을 전해 달라고 바울의 꿈 속에 찾아와서 간곡하게 부탁했던 그야말로‘한국의 마게도니아인의 부름’이었다. 이것은 한국 선교열을 고취시키는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실제로 미북장로회 선교부가 이 편지에 고무되어 선교사를 파송케 되었음이 다음 글에서 확인되고 있다.

“이 주목할 만한 일련의 사건에 자극된 우리(미북장로회) 선교사 몇 명은 여러 달 동안 선교본부에 한국 선교사를 임명해 줄 것을 간절히 요청하였는데, 이는 개종한 한국인 자신들의 청원과 일치한다. 다음 사실이 선교 본부가 취한 행동이다. 최근 모임에서 선교 본부는 목회 선교사로 언더우드(H. G. Underwood) 목사를 임명했다. 그는 뉴욕 대학과 뉴저지 뉴브른스윅의 개혁교회신학교를 졸업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12월 1일까지 미국에 머물다가 일본으로 떠날 것이다. 최초의 선교사들이 현재 동경에 머물고 있는 한국인 신자들로부터 일본에서 잠시 한국어 공부를 할 것이 확실하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오윤태는‘이 편지를 읽고 한국 선교에 뜻을 정하고 자기 나라를 떠나서 멀리 태평양을 건너 한국까지 온 사람은 한국장로교회의 창시자 언더우드 목사(Rev. Horace Underwood)와 메쏘디스트(감리교)의 창시자 아펜젤러 목사(Rev. Gerhart Appenzeller)이다. 당시 신학교에 재학 중이었던 두 청년이 뜻을 정하기까지에는 여러 가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이수정 씨의 편지를 잡지에서 읽은 후에“조선에는 누가 가는가?”하는 신령한 음성을 듣고, 전자는 북장로회의 선교사로서, 후자는 메쏘디스트교회(감리교회)의 선교사로서 한국에 오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수정의 한국 선교의 공헌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감리교 선교사 맥클레이의 요청을 받고 감리교 요리문답도 번역하여 1천부가 출판돼 국내에 널리 유포되었다. 요코하마에서 그의 마가복음 성경 1천 권이 출판되던 바로 그 해 언더우드가 선교사로 한국을 향해 오던 중 요코하마에 들려 이수정에게 2개월간 한국어를 배우고, 그가 번역한 마가복음을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오는 데 일조를 하기도 했다. 그 당시 세계 어느 나라도 선교사가 입국할 때 그 나라 말로 된 성경을 가지고 입국해 선교를 시작한 경우는 없었다. 근대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엄 캐리가 인도 방언으로 성경을 번역해 인도 선교의 토대를 마련한 것처럼, 이수정의 성경 번역은 언더우드를
비롯해 이후에 오는 선교사들이 한국 선교를 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해 준 셈이다. 언더우드가 선교지에 실린 이수정의 선교 호소 편지를 읽고 감동을 받았고, 입국 전 그로부터 한국어를 배웠고, 그리고 그가 번역한 성경을 가슴에 지니고 입국해 선교를 시작했다면, 한국 선교에 끼친 이수정의 공헌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수정은“비록 나는 별로 영향력이 없는 사람이지만”이라고 겸손하게 편지에서 밝혔지만, 확실히 그는 한국 선교를 가시화시킨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한국교회사(24)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3. 개신교의 한국 전래를 위한 노력

2) 국외에서 복음을 받은 사람들에 의한 활동

(3) 일본에서 복음을 받은 이수정

⑤ 이수정의 귀국

이수정이 이같이 일본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은 당시 조선 정부로서는 결코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갑신정변 이후에 한국에서는 외국 유학생을 소환하기 위해 소환령을 내렸다. 이수정도 예외가 아니었다. 두 명의 고위 관리가 일본에 와 이수정을 설득했으나 이수정이 귀환을 거절했다. 1886년 1월경에는 이수정의 동생이 형이 일본에서 진 부채를 갚기 전에는 한국으로 귀국할 수 없다는 소문을 듣고, 7,8백 달러에 해당하는 1천 원을 건네주러 왔다. 일본에서 농업 기술을 배워 한국의 농업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형의 말을 그대로 믿고 일본에 건너온 동생은 형이 더 이상 상업과 농업을 연구하지 않고 기독교에 몰두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대단히 실망했다.

당시의 상황을 오윤태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여기에 도착하자 그는 이수정이 농업, 상업의 연구에 종사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보고, 혹은 수많은 이상한 발명품에 접하여 보고 놀랐다. 그의 모든 시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바쳐졌으며, 그의 마음은 완전히 변화한 것 같았다. 동생은 이것을 보고 당황하여 그 형 이수정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더 이상 나의 형님이 아닙니다. 그리고 어떠한 이상한 감응이 형님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하였다.

기독교 신앙에 빠져 성경 번역에 자신의 전 시간을 몰두하며 신앙생활에만 매진해 있는 형의 모습을 불신자인 동생이 이해할 리 없었다. 그가 볼 때 그것은 결코 정상이 아니었을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그리고 일본에 도착해 한동안은 농업기술을 전수해 한국의 농업발전에 기여하겠다던 형이 이처럼 기독교에 빠져 완전히 달라진 것을 보고는 형에 대한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던 것이다. 형을 돕기 위해 1천 원의 돈을 가지고 일본까지 찾아왔던 동생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분노하는 동생에게 이수정은“나는 돈이 필요 없다. 너는 그 돈을 도로 가지고 가라. 나는 내가 여기서 해야 할 매우 중요한 일이 있으니 네가 바라는 대로 돌아갈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나와 우리 동포를 위하여 철도나 전신기나 증기선보다도 더 좋은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라고 하며 동생을 돌려보냈다. 이수정은 자신이 하고 있는 성경 번역 사업이 얼마나 중요한 사역인지를 깨닫고 있었고, 또 그 일을 속히 마쳐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고 있었다. 동생의 귀국 권유를 거부한 것은 동생을 무시하거나 고국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 민족을 향한 더 큰일, 더 시급한 일을 발견하였기 때문이었다.

한국 정부가 또다시 고위관리 박준우를 일본으로 파송해 설득하는 바람에 이수정은 고국의 부름을 거부하는 것도 신앙인으로서 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귀국을 결심했다.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 평소 이수정은 조선의 왕실은 물론 기왕의 민영익과의 친분과 우호를 소중히 여겼다. 정치적인 역학관계도 그의 귀국을 부채질했다. 갑신정변 후 김옥균이 일본으로 망명하자 주모자들을 색출하려는 움직임은 물론 자객을 보내 주모자들을 암살하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김옥균이 선교사들을 통해 한국선교를 호소하자 자신도 그들과 한 배를 탄 매국자라는 오해를 받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그동안 일본에 올 수 있도록 자신을 지원해준 민영익과의 개인적 친분을 고려할 때 더욱 그럴 수 없는 일이었다. 일본주재 선교사들과 교분을 나누면서 성경을 번역하고 그들에게 한국선교를 호소하는 행위 자체가 순수한 신앙에서 발로된 것이지만 본의 아니게 개화파에게 힘을 실어 주는 격이 될 수도있다고 그는 판단한 것이다.

본래부터 이수정이 김옥균과 관계가 나빴던 것은 아니다. 이수정은 김옥균과 마찬가지로 개화사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외국에 문호를 열어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여 부국을 꾀하여야 한다는 입장을 지지하고 있었다. 1880년 친구 김굉집이 일본에 건너가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가지고 돌아왔을때 그 책을 읽고 깊은 감동을 받았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난 후 일본에 갔을 때도 이수정은 김옥균과 친밀한 관계를 가질 만큼 둘의 사이는 좋았다. 이수정이 세례를 받기 1개월 전인 1883년 3월에 김옥균이 한국으로 돌아간 후 이수정은 일본에 유학하고 있던 한국인들에게 복음 전하는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정책적으로 조선과의 관계 증진을 위해 조선 학생들을 받아 1884년 3월 7일 당시 30여 명의 학생들이 일본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그가 1883년 8월에 저술한 조선일본선린호화(朝鮮日本善隣互話) 1권에 김옥균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묘사한 것을 볼 때도 김옥균에 대한 이수정의 인상이 상당히 우호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던 그들의 관계가 급속히 냉각된 것은 갑신정변 이후였다. 이수정은 김옥균이 갑신정변을 주도하고 자신과 절친한 사이였던 민영익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힌 것으로 인해 적지 않은 상처를 받았다. 그때부터 이수정이 1886년 고국으로 돌아올 때까지 두 사람의 관계는 악화일로에 있었다.

이때문에 김옥균은 기회가 있는 대로 이수정을 제거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다. 1886년 1월에 방문한 동생이 고국으로 돌아간 후 불과 얼마 되지 않은 3월 21일, 이수정은 김옥균이 보낸 자객에 의해 습격을 받고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당시 일본에서 간행되고 있던 1886년 5월 10일자 시사신보는‘김정식이라는 사람이 이수정을 암살하려고 하다가 발각되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동경경죄재판소에 구속되어있다.’고 보도했으며, 그 해 8월 24일자 시사신보에 의하면 ‘조선국 양산부 원동에서 온 김의순은 지난 3월 21일 밤에 신전구 담로정 2목 4번지 도변유길(渡邊留吉) 댁에서 친하게 교제하던 이수정 씨와 말다툼 끝에 복부를 차고 준비해 가지고 있던 비단 손수건에 싼 탄환의 파편으로 머리와 얼굴을 때려 전치 20일 이상의 상처를 입혀 동경경죄재판소에서 심문을 받은 결과, 지난 21일 형법 제 삼백일 조에 의거 중금고 일년의 형을 받았다.’고 하였다.

1886년 들어 이수정은 두 번에 걸쳐 자객에 의해 습격을 당한 것이다. 이것은 이수정에게 적지 않은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미 이 일이 있기 전 고국을 다녀올 계획을 세웠던 이수정으로서는 이와 같은 자객의 습격을 받자 아예 일시 귀국이 아닌 영구 귀국 쪽으로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위험한 상황에서 이수정이 일본에 계속 체류한다는 것은 신앙을 떠나 수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또한 조국의 부름을 계속하여 거부하는 것도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클라라 루미스(Clara Denison Loomis)에 의하면 그는 한국으로 떠나기 전, 헨리 루미스를 찾아와 한국에 오면 자신을 방문해 달라고 헨리 루미스를 초청했다. 루미스에게 방문 요청을 한 것을 보면 이수정은 귀국해도 특별한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여겼던것 같다. 이렇게 해서 그는 1886년 6월 2일, 4년 동안의 일본생활을 청산하고 조선정부가 보낸 박준우와 함께 귀국했다. 그가 탄 배에는 이수정 외에도 박준우, 본국으로 소환되는 유형준, 유송진, 박영우, 서광철, 김학기 등 다섯 명의 유학생 그리고 김옥균을 암살하겠다며 한국 정부로부터 2만 원을 가지고 와서 호화로운 생활만 하던 조복도 있었다.

조선으로 귀국할 당시 이수정과 선교사들과의 관계는 상당히 소원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유는 이수정이 정치 외교 문제에 깊이 관계하면서 친선교사적인 망명 개화파들(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의 정적으로 등장하는 한편, 반선교사적인 인물로 인식되어 오던 묄렌도르프와 가까워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1885년 3월 5일 매클레이의 집에서 제1회 한국 선교사회가 모였는데, 매클레이 부처 외에 한국 선교사로 임명받은 스크랜튼 여사, 아펜젤러 부부, 언더우드 그리고 한국인으로 이수정과 박영효 등이 참석해서, 한국에 대한“상황 분석과 여행 문제, 사업 방법, 선교회 개설 계획 등을 토론하고 무엇보다 앞에 놓여 있는 중요한 사업을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실것을 감사와 함께 간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수정과 선교사들과의 사이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민영익과의 관계로 김옥균과의 사이가 멀어지면서 망명 개화파들의 정적이 되어 김옥균 일파가 보낸 자객에 의해 두 차례의 암살 미수를 당하면서 이수정은 정치적인 인물이 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신앙에만 전념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루미스는 1886년 5월 14일자의 편지에서“이수정은 5월 12일 한국을 향해 떠났습니다. 그는 줄곧 기독교인으로만 산 것은 아니었으며, 우리는 대단히 실망하였습니다. 그는 여러 달 동안 매우 아팠으며, 최근에는 한 못된 동료에 의해 살해될 뻔 하였습니다.”라고 쓰고 있다.

우리는 위 편지에서 루미스가 이수정에 대해 실망한 것이 그의 비기독교적인(정치적인) 행동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귀국하기 전 이수정은 루미스를 찾아가 “그의 죄에 대해 깊이 뉘우친다고 고백”하였으며, 한국에 오면 자신을 찾아달라고 루미스를 초청하였다. 이러한 이수정의 행동은, 지난 1년여 동안 그가 행한 분주한 정치적 활동이 그에게 남겨준 것은 상처와 오해뿐이었음을 깨닫고, 루미스를 만나 우정을 회복하고, 한국선교 사업에 동참할 것을 약속한 것이라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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